유월을 보다
김상분
천국으로 올라가는 계단인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며 유리창 밖으로 펼쳐지는 유월의 정원을 바라본다. 잠시라도 기분이 무척 좋아진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계절의 순환을 바라보며 원예치료까지 받도록 하는 병원 당국의 세심한 발상에 놀랍고 참으로 고맙다. 전철역에서 병원 정문까지 올라가는 언덕이 제법 가팔라서 늘 숨이 차고 진료실 앞 대기실에 도착하여 혈압을 재려면 불안했다. 이제 이렇게 멋진 길이 마련되어 편안하게 다닐 수 있으니 아픈 것도 잠깐은 잊어버릴 것만 같다. 비를 맞으랴 바람을 걱정하라 눈길에 미끄러워질 걱정도 없이 봄을 맞았는데 어느새 녹음방초를 굽어보면 신선놀음이다.
지난가을부터 병원 앞 주차장의 리모델링 공사가 한동안 진행되었다. 어느 날 멋진 옥상정원이 개방되고 한쪽에는 근사한 카페도 문을 열었다. 정원 한가운데로 난 통로에는 유리창이 아치 모양으로 덮인 에스컬레이터로 연결되어 있다. 양쪽 대칭으로 만들어진 한 계단 아래의 정원에는 환자나 보호자들이 앉아 쉴 수 있는 벤치와 비치파라솔도 비치되어 있다. 옥상정원의 특성상 관수나 토양관리가 여의찮은데도 남천이며 둥굴레가 꽃봉오리를 맺고 마가렛이 화안하게 웃는 옆에 무스카리도 질세라 작은 보랏빛 봉오리를 내민다. 모자라는 대로 자리를 잡고 옹기종기 피어나는 모습들이 눈물겹다가도 살려고 애쓰는 생명의 경이로움에 정원을 찾는 모두가 힘을 얻는다. 자연과 조화로운 만남으로 구성된 이 특별한 아이디어의 계단식 화단을 내다보며 오르내리는 나날, 어찌 감동이 없으랴, 언덕에 위치한 병원 건물까지 편안하게 통행을 유도하는 새로운 건축 기술과 녹색 주거문화의 조합이 탁월해서 감탄할 뿐이다.
흙이 넉넉한 맨 아래층 화단에는 야생화들이 가득히 피어 있다. 잡초도 무리무리 어울려 피어나니 저리도 아름답다. 문득 빛의 화가인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를 떠올린다. '그의 눈이 바라다본 대상의 색채는 빛과 대기. 주변 환경에 의해 매 순간 새로이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했다던가. 그가 여기 서 있다면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저 풀꽃들의 색깔들을 어떻게 묘사했을까. 아침과 저녁 해가 뜰 때와 해가 질 때, 언덕을 올라갈 때와 내려갈 때, 오전과 오후의 변화무쌍한 빛의 신비를 그는 어떻게 표현했을까. 순간마다 달라지는 대상의 표정을 그대로 따라가며 성급한 터치로 표현하고자 부단히 노력했다던 그의 열정과 집념을 떠올린다. 드문드문 피어나기 시작한 샛노란 금계국이 무색하게 우리 토종의 씀바귀꽃들은 연노랑의 가녀린 꽃잎들을 흔든다. 그 옆으로는 앙증스러운 개망초의 샛노란 꽃심까지 어우러진다. 어느 천진스러운 어린아이가 풀밭에 엎드려 그린 그림일까. 온통 노란 크레파스로 문질러 놓은 도화지 속의 그림은 어쩌면 르누아르의 작품 같기도 하다.
20세기의 모네는 알았을까, 이 먼 나라 유월의 찬란한 햇빛을 …. 만약에 그가 이곳을 보면 어떻게 이 아름다운 유월을 그렸을까? 아니 어쩌면 21세기의 기계문명이나 낯선 초현대식 건축공간을 보며 얼굴을 찡그렸을까? 1889년, 프랑스혁명 100주년을 기념하여 열린 파리만국박람회의 상징적인 건축물로 에펠탑을 세울 때 당시 프랑스의 지식인이나 예술가들은 극렬하게 반대했다고 한다.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닌 아름다운 파리의 경관을 깨뜨릴까 걱정하며 박람회가 끝나면 철거를 조건으로 탑을 세웠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우뚝 솟은 에펠의 위용은 이제 온 세상 사람들의 사랑받는 프랑스 파리의 랜드마크가 되었으니 ….
오로지 자연의 빛을 사랑하고 시시각각 변화하는 대기의 움직임에 따라 붓을 움직여 강렬하게 표현한 그의 작품들의 소재는 초원의 빛이며 떠오르는 태양이고 흔들리는 파도였다. 그의 작품 안에 그가 살아있듯이 역동적으로 타오르는 정신세계를 짐작할만하지 않은가. 불현듯 그가 오랫동안 애정을 가지고 살았던 파리 근교 지베르니의 정원을 살아생전 꼭 한 번만이라도 가보고 싶어진다. 한 가지의 테마 '수련'을 그토록 많은 작품으로 연작을 창조해 낸 그의 열정을 더욱 가까이 느껴보고 싶어진다. 노년에 악화한 백내장으로 더는 그림을 그릴 수 없을 때도 붓을 놓아버리지 못한 집념은 결코 아무나 흉내 낼 수 없으리. 이 작은 나의 소박한 꿈으로 감히 어디 20세기를 풍미한 천재 화가를 떠올리는지 부끄럽다.
그래도 나는 꿈을 꾼다. 6월은 언제나 나를 그렇게 꿈 많은 소녀로 만든다. 단 2분이면 오르내리는 계단 위에서도 나는 몽상가가 되곤 한다. 오늘도 병원의 진료를 마치고 조금 더 나아진 건강에 감사드리며 작은 정원의 쉼터를 찾는다. 비치파라솔이 우리 차지가 아니어도 좋다. 풀밭에 주저앉아 먼 하늘가를 바라본다. 저 구름 흘러가는 곳으로 세느강변이라도 좋고 프로방스의 작은 마을이라도 행복할 것 같다.
따뜻한 카페올레를 주문하여 둘이 나란히 앉아 마실 수 있는 건강한 오늘 하루가 감사하다.
향기로운 유월이 작은 정원에 가득하다.
첫댓글 월간 『한국수필』 7월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