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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의 사회주의와 탈사회주의
이한우(서강대)
I. 서론
베트남은 19세기 후반부터 프랑스의 식민지배와 일본의 식민 지배 하에 있다가, 1945년 일본의 패망으로 독립을 기회를 갖게 되었다. 호찌민을 지도자로 하여 베트남독립동맹(Viet Minh, 베트민, 월맹)이 주도하 여 1945년 9월 2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을 선포하였다. 강국의 식민지배에 저항하는 베트남의 민족운동은 유 학자, 비사회주의자, 사회주의자 등 다양하게 분포해 있었으나, 사회주의 계열의 민족운동 세력이 장기간 의 식민지배를 견뎌내고 민족독립운동의 주도권을 쥐게 되었다. 베트남독립동맹은 베트남공산당이 주도하 는 통일전선적 민족독립운동단체로서 1941년에 설립된 단체였다. 따라서 1945년 해방 공간에서 사회주의 자가 주도하고 비사회주의자가 협력하는 속에서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을 식 민지배하기 위해 획책하면서 1946년 말부터 1954년까지 양국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그런 가운데 프랑스는 1949년 베트남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다이(Bao Dai)를 앞세워 괴뢰국가인 베트남국 을 선포하게 하였다. 1954년 베트남민주공화국이 프랑스를 물리치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에서 승리했지 만, 그 세력이 약했기에 17도선을 분단선으로 하여 2년간 분단한 후 전국 총선거를 치른다는 조항을 포함 하는 분단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이후 베트남은 남북으로 분단되어, 베트남민주공화국이 북부에 베 트남국(1955년 10월 이후 베트남공화국)이 남부에 병존하는 형세로 전환되었다. 분단 이후 북부는 정치적· 경제적으로 사회주의체제를 수립했고 남부는 자유주의/자본주의체제를 수립하였다. 그러나 남부가 1956년 총선거를 거부하면서 남북 양국은 대치하여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확대되었고, 1964-1975년간의 열 전 끝에 1975년 4월 30일 북부가 무력으로 남부를 점령하며 전쟁을 종료하고 통일을 이루었다. 이후 남부 는 북부의 사회주의체제가 부과되는 형태로 사회주의적 전환과정을 겪게 되었다.
베트남은 통일된 이후 남부를 사회주의체제로 전환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절반의 성공만을 거두었고, 1970 년대 후반의 경제적 침체로 인해 이를 극복하려는 탈사회주의적 개혁에 착수하게 되었다. 베트남은 1980 년대 초부터 경제부문에서 탈사회주의적 요소들을 용인하는 부분적 경제개혁에 착수하였고, 1980년대 중 반의 극심한 경제적 침체를 극복하기 위해 1986년 12월 제6차 공산당대회에서 ‘도이머이’(쇄신) 정책을 선 포하며 전면적 개혁으로 전환하였다. 이후 개혁과정은 ‘탈사회주의’ 과정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적 전개과정에서 수립된 베트남의 사회주의 체제의 특성은 어떠하며, 현재 진행되고 있는 변화 속에서 현 사회주의 체제의 현상과 의미는 무엇인가를 분석하는 것은 베트남의 현 체제의 본질을 이해하고 향후 체제 변화를 예측해보는 데 기여할 것이다.
II. 베트남 사회주의 체제의 성립과 그 역사적 성격
1. 북부 사회주의 체제의 수립
1) 사회주의 정치제제
일본의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베트남독립동맹(Viet Minh, 베트민, 월맹) 세력은 이른바 ‘8월 혁명’을 주도하였고, 1945년 9월 2일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베트남독립동맹은 1941년 호찌민을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이 주축이 되어 결성한 프랑스와 일본의 식민 지배에 저항하는 연합전선조 직이었다. 그러나 베트남은 프랑스의 재식민지화 시도로 1946-54년간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을 치렀고, 1954년 제네바 협정으로 17도선 이북에 한정되었다.
베트남은 독립을 선포하기 직전인 1945년 8월 28일 인도차이나공산당 주도하에 베트남민족해방위원회를 임시정부로 전환하였다. 이 임시정부는 호찌민을 국가주석 겸 외교 담당으로 하는 이외에 13명의 장관으 로 구성되었다. 독립 선포 직후 1946년 1월 1일 구성된 베트남민주공화국 임시연합정부는 베트남독립동맹 주도하에 베트남혁명동맹회, 베트남국민당 등 비공산계열을 포괄하는 민족주의 인사들로 구성되었다. 독립 당시 베트남의 민족주의 세력은 공산당이 우위를 점한 가운데, 국민당이 중국의 후원하에 경쟁하고 있었 다. 임시연합정부는 주석 호찌민, 부주석 응우옌하이턴(Nguyen Hai Than)과 장관 18명으로 구성되었는 데, 베트남혁명동맹회 인사가 부주석, 베트남국민당 인사 2명이 장관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베트남은 1946년 1월 6일 제헌 국회를 구성하기 위한 총선거를 실시하였다. 제1기 국회는 국회의원 403명으로 구성되었는데, 그 중 333명은 국민의 선거로 선출되었고 20명은 베트남혁명동맹회, 50명은 베 트남국민당에 배정되었다. 국회의원 중 다수는 지식인(61%), 농민(22%)이 차지하였다(Van phong Quoc hoi 2005, 104). 국회는 3월 2일 최초로 회의를 소집하여 호찌민을 국가주석, 응우옌하이턴을 부주석으로 선출하고 장관 10명을 포함하는 항전연합정부를 구성하였다. 이후 베트남 국회는 1946년 11월 9일 헌법 을 제정하였고, 1946년 11월 3일 호찌민 국가주석(외교부장관 겸직) 및 14개 부로 항전정부를 구성하였다 (Ban chi dao Bien soan Lich su Chinh phu Viet Nam 2006, 52-53, 58-59, 149). 이 항전정부에는 그간 참여하고 있던 베트남혁명동맹회 및 베트남국민당 인사가 포함되지 않아 연합정부가 종료되었음을 보였다. 24)
베트남은 1946년 헌법에서 민주공화제를 베트남민주공화국의 정체로 규정하였다. 최고권력기관인 인민의 원은 3년 임기의 의원들로 구성되며, 인민의원 중에서 국가주석을 선출하도록 규정되었다(Hien phap 1946). 국회는 사회경제체제의 사회주의적 전환을 기본적으로 완료할 즈음 1959년 12월에 이르러 새 헌법 을 채택하였다. 이 1959년 헌법은, “베트남은 ‘인민민주국가’이며, 4년 임기의 국회대표(의원)로 국회를 구성하고 국회가 국가주석을 선출한다”고 규정하였다. 이 헌법은 베트남노동당(통일 이후 베트남공산당으로 개명)이 국가와 사회를 지도한다는 문구를 처음 도입하였으며, 현 과도기에서 사회체제를 사회주의로 전진 시킨다고 규정하였다(Hien phap 1959). 북베트남은 1959년 헌법으로 명문상 사회주의 체제의 면모를 갖 추게 되었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1946년 11월부터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느라 제2기 국회의원 선거를 1960년 5월에 가 서야 치를 수 있었고, 이후 선거를 1964년, 1971년, 1975년 4월에 치렀다. 제2기 국회는 1960년 5월 선 거를 통해 453명의 의원으로 구성하였는데, 이 중 91명은 유임된 남부 의원들이었다. 국회의원들 중 노동 당원은 82.3%였고, 구성원의 다수는 정치간부(35.2%), 지식인(28.4%), 소수민족(15.4%), 노동자(13.8%), 여성(13.5%), 농민(12.9%) 순이었다(Van phong Quoc Hoi 2005, 105). 북 베트남은 사회주의적 개조가 완료된 이후 노동당과 국가가 일체화된 강성 권위주의적 당-국가(Party-State) 체제를 지속해 갔다.
2) 사회주의 경제체제로의 전환
북베트남은 1955-57년간 복구기간을 거쳐, 1958-60년간 사회주의체제로의 전환과 1961-65년간 제1차 5 개년계획을 통하여 사회주의체제를 건설해 나갔다. 농업부문에서는 1953년부터 토지개혁에 착수하여 1956 년까지 이를 완료하였고, 1958년부터 농업집체화에 착수하여 1960년 초급합작사 25) 수준의 집체화를 기본 적으로 완료한 후, 1960년대 후반에 고급합작사 수준의 농업집체화를 완료하였다. 공업부문에서는 1960년 말까지 기존의 사유경제를 국유-사유 합작경제로 전환하고 궁극적으로 사회주의적 공유제로 전환한다는 목표하에 소유제도의 전환작업을 진행하였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화를 보면, 베트남에서 사회주의화는 1960년대 중후반에 완료됐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 토지개혁과 농업집체화
1954년 7월 분단 전후 북베트남은 농촌에서의 토지개혁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이어 농업집체화를 추진하 였다. 베트남은 이미 1952년 말에 프랑스 이주민과 반민족행위자 토지의 90%, 공유지 및 준공유지의 77% 를 몰수하여 재분배하였고, 1953년 4월에 토지개혁 특별법정을 세워 지주들의 토지소유권을 박탈하고 토 지를 분배하기 시작하였다(떼시에 2014, 288, 302). 공식적 토지개혁은 국회가 1953년 12월 토지개혁법을 채택하고, 정부가 토지개혁위원회를 설치하여 팜반동(Pham Van Dong) 부수상이 위원장, 쯔엉찐(Truong Chinh) 총비서 외 2명이 부위원장을 맡으면서 시작되었다. 토지개혁 방식은 농민들을 지주, 부농, 중농, 빈농, 토지 무소유 농민 등 5계급으로 구분하고 토지를 다량 보유한 지주와 부농의 토지를 몰수하여 빈농 및 토지 무소유 농민에게 무상으로 분배하는 것이었다. 27) 이 방식은 중국의 토지개혁을 모델로 한 것이었
25) 합작사의 발달과정에서, 초급합작사(hop tac xa bac thap)는 농민들이 토지를 비롯한 자기 소유 자산을 합작사에 제공하고 공동으로 작업한 후 노동한 양과 합작사에 공여한 자산의 양에 따라 분배받는 형태이고, 고급합작사(hop tac xa bac cao)는 농민들이 자산을 합작사에 제공하여 소유권을 이전하고 공동작업을 통하여 얻은 생산물을 노동한 양에 따라 분배받는 형태이 다.
26) 이 부분은 이한우(1999)에서 관련된 부분을 가져와 고친 것이며, 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를 참조.
27) 북부에서 토지개혁을 수행할 당시 농민계층을 구분한 기준은 다음과 같다. 지주는 자기 토지를 경작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의 2/3 이상을 외부로부터 고용할 만큼 많은 토지를 가진 농가를 지칭한다. 부농은 주로 자기 가족의 노동에 의해 경작하지만
으며, 중국의 전문가들이 토지개혁을 지도하기 위해 베트남에 파견되었다. 초기 토지개혁과정에서 지주의 비율은 5%로 규정되었는데, 당시 베트남 북부 농촌에서 지주에 해당하는 계층은 2%, 부농은 1%에 불과 하였다(떼시에 2014, 306). 그러나 지역에 따라서는 지역 인구의 9-10%가 지주로 분류되었다. 이 과정에 서 지주로 잘못 분류되어 처형된 사람은 16,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이러한 무리한 토지개혁에 대한 반발 이 거세지자 정부는 1956년 9월에 이를 중지시키고 초기 토지개혁과정에서의 오류를 인정하였고, 쯔엉찐 이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노동당 총비서직을 사직하였으며, 보응우옌잡(Vo Nguyen Giap) 장군으로 하여 금 자아비판을 총괄하게 하였다. 노동당은 토지개혁과정에서의 오류가 중국모델을 기계적으로 베트남에 적용 하고 주로 토지개혁소조들의 과도한 행동 때문이었다고 비평하고 교정운동을 전개하였다(떼시에 2014, 319-321).
28) 이러한 토지개혁과정에서의 과오는 베트민 세력의 주도로 수립한 국가의 정당성을 훼손시켰다. 노동당과 정부는 토지개혁에 이어 농업집체화를 추진하여 재산제도를 개인소유로부터 집체소유로 전환하 고자 하였다. 북부 베트남의 농업집체화는 일반적으로 중국과 같이 세 단계를 거쳐 수행되었다. 1956년 3 월 노동당 지도자들은 노동교환조(to doi cong: 互助組)를 농업생산 증대를 위한 주요 동력으로 공식적으 로 평가하고, 이의 결성을 장려하였다. 1958년 말까지 66%의 농가가 노동교환조에 가입하여 집체화의 예 비단계가 마무리되었다(Vo Nhan Tri 1990, 11). 다음 단계의 집체화 형태인 초급합작사로의 전환은 1958 년 11월 및 1959년 4월에 각각 개최된 베트남노동당 제2기 중앙위 14차 및 16차 회의의 결정에 의해서 개시되었다. 이에 따라 북부 농촌은 1960년 말까지 촌(thon, 村) 29) 수준에서 합작사의 설치를 기본적으로 완료하였고, 이로써 1960년 말 초급합작사에 속한 농가의 비율은 74%, 고급합작사에 속한 비율은 12%로 합계 약 86%의 농가가 합작사에 소속되었다(Vo Nhan Tri 1990, 12). 초급합작사에 가입한 농가는 토지 및 농기계 등의 자산을 합작사의 공동관리하에 두고, 각 농민은 공동토지에 투여한 노동의 양 및 합작사에 제공한 자산의 양에 따라 생산물을 분배받았다. 초급합작사로부터 고급합작사로의 전환은 1959년 이래 수 행되어 1966년에 완료되었다. 이로써 농가는 토지를 비롯한 농업생산에 쓰이는 모든 자산을 합작사의 공 동소유로 제공하고 단지 노동한 양에 따라 분배받았다. 1966년 당시 전체 농가 중 10%의 농가가 초급합 작사에 소속되어 있었고, 고급합작사에 소속된 농가의 비율이 85%로, 합계 95%의 농가가 합작사에 소속 되었다(Gordon 1981, 21).
노동당은 1961년 제3기 중앙위 5차 회의에서 소규모 합작사를 일차적으로 톤(thon, 村) 규모인 톤합작사 (hop tac xa thon)로 만들고, 이어 싸(社) 규모인 전사(全社) 합작사(hop tac xa toan xa)로 확대할 것을 결의하였고, 이로써 합작사당 평균 농가수는 1960년 60호에서 1968년 136호로 증가하였다(Vo Nhan Tri 1990, 14-15). 이후 1974년에는 노동당 비서국이 싸보다 상위의 행정조직인 후옌(huyen, 縣)을 경제적 단위로 더욱 중시한다는 방침을 공표하고, 합작사의 규모를 현급으로 확장하여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러
자주 외부 노동력을 고용하거나 소작을 줄 만큼 많은 양의 토지를 가진 농가이다. 중농은 주로 자기 가족의 노동에 의해 자기 토지를 경작하며, 가끔 외부 노동력을 고용하거나 자기 가족이 타 농가에 노동하러 가는 농가이다. 빈농은 자기 가족의 생계 를 위하여 충분할 만큼의 토지를 가지고 있지 않아 소작을 하든지 임노동을 하는 농가이다. 토지 무소유 농민은 토지를 가지 고 있지 않아 전적으로 임노동에 의존하여 생계를 꾸려 가는 농가이다(Luong 1992, 187).
28) 교정운동으로 지주로 분류되었던 10만 9,816명 중 2/3인 7만 2,263명이 복권되었고, 부농으로 분류되었던 6만 2,192명 중
82%인 5만 1,003명이 복권되어, 당초 토지개혁에서 계급 분류상 과오가 컸음을 보였다(떼시에 2014, 326-327).
29) 베트남의 지방행정조직은 대체로 성(tinh) 산하에 다음과 같이 구성된다.
시(thanh pho) 및/또는 티싸(thi xa) 프엉(phuong) 성(tinh) 싸(xa)
현(huyen) 티쩐(thi tran)
싸(xa) 촌(thon) 쏨(xom)
나, 농민들의 회피로 인하여 합작사의 대규모화는 전반적으로 실현되지 않았고, 극히 일부 지역에서만 몇 개의 싸를 포괄하는 규모의 연사(聯社) 합작사(hop tac xa lien xa)의 결성이 시도되었다(Chu Van Lam et al. 1992,
39).
북부 농촌에서의 집체화는 대체로 유사한 시기와 과정을 거쳐 수행되었으며, 합작사의 규모는 1960년 톤 (thon, 村) 규모 합작사의 설립이 완료된 후 1965년 전후를 기점으로 톤의 경계에서 벗어나 대규모화하였 고, 1980년대 초에 다시 톤 규모의 합작사로 환원되는 과정을 거쳤다. 1960년대 중반에 합작사가 전통적 자연촌('랑‘)의 경계를 넘어 싸 규모로 확대됨으로써 몇 개의 ‘랑’(lang)이 하나의 합작사 내로 강제로 소속 되어 통일 이후 탈집체화과정에서 톤 간에 발생한 토지분규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Kerkvliet 1997, 74). 북부에서는 농업집체화로 1960년대 전반에 농업생산이 계속 증대되었으나, 후반에 들어 정체를 나타냈다. 이러한 정체는 한편으로는 전쟁으로 인한 피해에 그 원인이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대규모화하는 집체화 농업 자체의 결함에도 기인하였다. 1960년대 중반 이후 합작사 규모는 자연촌의 경계를 넘어 확대되고 있 었다. 농민들의 생활기반인 톤의 경계를 넘어 진행된 대규모 집체화는 전통적 농촌생활과의 부조화를 초래 하였고, 농민들이 노동에 따른 보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단지 노동점수에 따라 평균적으로 분배받게 되어 작업을 형식적으로 하고 공동자산의 관리를 소홀히 함으로써, 집체농업을 약화시키는 구조적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Nguyen Sinh Cuc 1991, 18).
한편, 합작사 체계 하에서 농민들 및 합작사 간부들의 일상적 저항행위는 집체농업을 내부적으로 침식하여 합작사를 명목화시키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Fforde 1989; Kerkvliet 1995). 이러한 불법행위들은 농민들 이 자류지(自留地)를 음성적으로 확장하고 가계경제로부터의 소득을 증대시킨다든지, 농민과 지방간부가 결탁하여 불법적 계약을 체결하고 일부 토지를 배분하여 경작케 하는 계약제를 채택하는 행위 등이었다.
(2) 산업의 국유화와 재정 문제
공업 및 상업 부문의 사회주의화는 기업의 국유화 또는 집체화를 통해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하는 것이었 다. 북베트남에서 노동당과 정부는 1958-60년간에 사유 공업과 상업부문을 국유경제부문과의 합작경제로 전환하도록 하였고, 이후 1965년부터 국유-사유 합작경제를 온전히 국유경제로 전환하도록 추진하였다. 노동당과 정부는 수공업 부문을 1960년까지 ‘합작사’(cooperative)로 전환하여 집체경제(collective economy)화하도록 하였다(Vo Nhan Tri 1990, 26-29).
한편, 북베트남의 부문별 발전전략은 중공업의 발전을 농업 및 경공업의 발전과 동시에 추진한다는 것이었 으나, 실제로 정부는 중공업 편중 정책을 폈다. 중공업 편중 정책은 저발전 국가에서 자본을 축장시키고 유휴 노동력을 많이 고용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사회주의적 공업화를 조기에 달성하 려는 의도에서 이를 진행하였다. 중공업과 경공업 생산량 비중은 1960년 34% 대비 66%로부터 1965년 43% 대비 57%로 변하였고, 1974년에도 1965년과 같은 수준을 유지하였다(Vo Nhan Tri 1990, 36). 이 로써 북베트남은 경공업 제품의 부족으로 만성적 결핍의 경제를 초래하였다.
북베트남은 저발전국으로서 산업화를 위해 외국으로부터 원조를 받지 않을 수 없었는데, 베트남전쟁 기간 에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로부터 매년 평균 7억 달러, 중국으로부터 매년 3억 달러, 총 미화 10억 달러 상당액을 지원받았다. 대외 경제원조가 북베트남 재정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1960-64년간 22~27%, 1965-72년간 42~69%를 차지하였다(Vo Nhan Tri 1990, 39). 이처럼 북베트남 경제는 대외의존 형 경제의 취약성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2. 통일 이후 남부의 사회주의화
1) 남부 정치체제의 재편
1975년 4월 베트남 통일 당시 남부에는 북베트남 정권에 우호적인 정치조직으로 베트남남부해방민족전선 (NLF), 30) 인민혁명당, 31) 및 제3세력인 베트남민족민주평화세력연맹(The Vietnam Alliance of National, Democratic, and Peace Forces) 32) 등이 있었고, 베트남공화국에 대항하는 남베트남공화국 임시혁명정 부(The Provisional Revolutionary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South Vietnam) 33) 가 활동하고 있었다. 베트남전쟁 기간 중 북베트남의 베트남노동당은 남부에서 공산혁명을 지도하기 위하여 1961년 1 월 이래 남베트남중앙국(COSVN, Central Office for South Vietnam)을 설치해 놓고 있었다.
통일 이후 남부에서는 1975년 5월 3일 사이공-자딘 시 군사관리위원회(Uy ban Quan quan Thanh pho Sai Gon - Gia Dinh)가 임시혁명정부 산하에 설치되어 1976년 1월 그 권한을 호찌민시 인민혁명위원회 에 이관하기까지 통치기구로서 기능하였다. 임시혁명정부 인사들은 통일 이후에도 5년 내지 10년 간 남북 연합정부를 희망하였지만, 북부의 급속한 사회주의체제의 이식으로 남부 공산주의 활동가들의 의사가 무시 되고 북부의 방침에 따라 체제가 재편되었다(Truong Nhu Tang 1986).
양 체제를 통합하기 위한 시도는 1975년 11월 5-6일간 사이공에서 베트남남부해방민족전선 대표 24명, 베트남민족민주평화세력연맹 대표 9명, 남베트남공화국 임시혁명정부 고문회의 대표 3명, 애국민주인사ㆍ 지식인 대표 20명이 참석한 가운데 확대연석회의를 개최해 전국 통일을 빨리 이루자고 의견의 일치를 본 데서부터 구체적으로 시작되었다. 이어 11월 15-21일간 사이공에서 쯔엉찐(Truong Chinh)을 단장으로 하는 북부대표단 25명과 팜훙(Pham Hung)을 단장으로 하는 남부대표단 25명이 회동하여 조국통일정치협 상회의를 개최하였다(Nguyen Huu Dao 2005, 340-341). 34) 1976년 4월 25일 총선거가 전국에서 실시되 었고, 그 결과 북부 262명, 남부 230명, 총 492명의 제6대 국회의원이 선출되었다. 1976년 7월 2일 국회 는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 국명을 변경하였다.
30) 일반적으로 ‘민족해방전선’(NLF, National Liberation Front)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베트남 남부 해방 민족전선’(Mat tran
Dan toc Giai phong Mien nam Viet Nam)이라고 해야 한다. 31) 인민혁명당은 1962년 베트남노동당 남부지부로서 설립되었다.
32) 남베트남민족민주평화세력연맹은 남베트남의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를 포함한 조직으로, 1969년 4월에 설립되었다. 33) 남베트남임시혁명정부는 1969년 6월 10일 남베트남민족민주평화세력연맹, 베트남남부해방민족전선, 인민혁명당 및 기타 단체
에 의해 공동으로 설립되었다.
34) 북부 대표 쯔엉찐은 북부 남딘(Nam Dinh)에서 출생하여 1930년 인도차이나공산당 창당에 참여하였고, 1930-36년 간 수감 되었다가 석방된 후 줄곧 북부에서 혁명운동을 하였다. 그는 1940년 인도차이나공산당 베트남 북부지역 위원장, 1941년 인도 차이나공산당 총비서로 추대되었다. 독립 이후 그는 북부에서 토지개혁의 과오에 책임을 지고 1956년 총비서직을 사임했지만 정치국 위원직을 유지했고, 1960-81년간 국회주석, 1981-87년간 국가평의회 주석을 맡았다(Duiker 1998, 259) . 남부 대표 팜훙은 남부 메콩델타의 빈롱(Vinh Long)에서 출생하여 1930년 인도차이나공산당 창설에 참여하였고, 1931년 체포되어 폴로 콘도르 감옥에 1945년까지 수감되었다가 풀려나, 제1차 인도차이나전쟁 시 레주언(Le Duan)의 부관을 지냈고, 1955년 하노 이로 이주하였다가, 1967년 남부로 다시 파견되어 남베트남중앙국 주임을 담당하였던 인물이다(Duiker 1998, 200-201).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 출범과 함께 남베트남공화국 임시혁명정부는 폐기되고, 베트남남부해방민족전선 및 베트남민족민주평화세력연맹은 1977년 1월 통일민족전선대회에서 북베트남의 베트남조국전선에 통합되었 다(中野亞里 2005a, 56). 35) 이와 함께 사회단체의 통합도 이루어져, 노동조합연맹, 농민회, 청년단, 부녀 회 등이 북부의 해당 조직으로 통합되었으며, 사회단체를 총괄하는 베트남조국전선 산하에 편제되었다. 더 불어, 남부에서 활동하던 임시혁명정부 인사들을 한직으로 보내는 등 그들을 멀리하거나 제거하려는 시도 들이 있었다. 이는 북부의 지각 있는 인사들에게 사회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실망감을 주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Bui Tin 2002, 120).
2) 남부 경제체제의 사회주의적 전환
베트남은 통일 이후 공ㆍ상업 부문에서 주요 기업을 국유화함으로써 개인지배구조를 철폐하고, 농업부문에 서는 지주들의 토지를 몰수하여 토지 무소유 농민에게 배분함으로써 남부의 개인소유에 기반한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사회주의 체제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1) 도시부문
도시부문에서 사회주의적 개조는 X-1 캠페인과 X-2 캠페인을 통하여 수행되었다. 1975년 8월부터 X-1 캠페인을 통하여 대지주, 매판자본가, 대자본가의 재산을 압수하여 국가소유로 귀속시킴으로써 국가가 주 요 산업부문을 장악하게 되었다. 매판자본가 가운데 70%가 화교들이었던바, 그들은 남부 경제의 많은 부 분을 장악하고 있었고, 특히 쌀 도매, 도정사업, 운송부문의 대부분을 독과점하고 있던 상태였다. 이어 정 부는 1977년 초부터 자본가들로 하여금 재산을 국가에 자진 헌납케 하는 조치를 취했고, 1978년 3월에는 X-2 캠페인을 통하여 1,500개의 기업을 국유화하여 650개의 국유기업으로 만들었다(Ngo Vinh Hai 1991, 67-70).
정부는 기업의 국유화 조치와 더불어 기존의 경제적 지배계급을 압박하려는 조치로 두 차례에 걸친 화폐 개혁을 단행하였다. 남부의 통화는 1975년 9월 제1차, 1978년 5월 제2차 화폐개혁을 통해 전국적인 단일 통화인 ‘동’화로 통합되었다. 사유재산 몰수와 화폐개혁조치는 부분적인 성공만을 거두었는데, 그것은 부자 들이 재산을 화폐가 아닌 귀금속 형태로 보유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Bui Tin 2002, 119). 또한 일 부 주민은 화폐개혁시 교환 한도 초과분 가운데 80-90%를 지방간부에게 헌납하는 조건으로 하여 한도 이 상 금액을 교환하는 경우도 있었다(Pham 2000, 168). 이러한 국유화와 화폐개혁을 통하여 제한적이기는 하지만 남부의 기존 경제지배계층이 해체되었다.
(2) 농촌부문
농촌에 대한 사회주의적 개조는 대지주 토지를 몰수하는 ‘토지조정’과 함께 수행되었다. 남부에서 토지조
35) 베트남조국전선은 당초 1954년 제네바협정에서 규정한 전국 총선거를 실현하기 위한 목적으로 1955년 북부에서 결성된 인민
전선이다(中野亞里 2005a, 37).
정은 1978-79년간 및 1983-84년간 두 차례에 걸쳐 수행되었는데, 토지조정으로 지주와 부농의 비율이 감 소하였으나, 남부 농촌지역에서 계급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통일 이전 남부 농촌은 중농이 70% 이상 을 차지하는 중농 중심의 계급구조 하에 있었다. 그 주요한 원인은 농촌의 많은 지역이 공산세력의 영향권 하에 있었고, 그 지역에서는 이미 토지개혁이 이루어져 대부분 토지가 농민들에게 분배된 상황이었기 때문 이다. 통일 이후의 조사에서도 중농이 여전히 70% 정도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나, 통일 전후 남부 농촌 의 계급구조는 크게 변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이한우 1999, 41-58).
이러한 중농 중심의 계급구조는 1978년 이래 추진된 농업집체화에 부정적으로 작용하였다. 국가 전체 개 혁이 시행되기 직전인 1986년에도 남부에서 ‘합작사’보다 초보적 집체농업조직, 즉 초급합작사 수준인 ‘생 산집단’에 가입한 비율은 89%로 비교적 높았으나, 개인소유를 폐지하고 공동소유로 전환되는 합작사 가입 률은 31%에 불과하였다(이한우 1999, 62-63). 특히 메콩델타 지역에서는 1986년에도 합작사 가입률이 6%에 지나지 않았으며, 단지 생산집단 가입률이 82%였다. 이 가운데 형식적으로만 가입하고 실질적으로 는 사영농업을 유지하는 농가들이 많았으므로 남부 농촌에서의 사회주의화는 실패하고 말았다.
전반적 사회경제적 상황으로 볼 때, 공ㆍ상업부문에서는 국유화 조치로 인하여 기존의 경제체제가 전환되 었으나, 농촌 및 농업부문에서는 기존의 체제에 부분적인 수정만 있었다고 평가된다.
III. 개혁 사회주의의 체제 전환적 의미
1. 탈사회주의 체제 전환과정
1) 사회주의 이행전략과 과도기
베트남은 1970년대 후반 극심한 경제적 침체에 처하게 되었다. 그것은 사회주의체제 자체의 문제, 남부 주민의 사회주의화에 대한 저항, 장기간 전쟁의 후유증, 캄보디아 침공으로 인한 세계적 금수조치 등에 기 인하였다. 이로써 1970년대 말 개혁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분출되기 시작하였고, 베트남 지도부는 1980년 대 초부터 경제부문에서 부분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다가, 1986년 12월 제6차 공산당대회에서 ‘도이머 이’(Doi Moi 刷新) 정책을 채택하면서 전면적 개혁을 수행하고 있다.
베트남의 개혁과정은 실제로 탈사회주의화 과정이지만, 공식적 견해로는, “베트남이 현재 사회주의로 이행 하기 위한 사회주의혁명을 수행중이며, ‘도이머이’는 사회주의 혁명과정에서 혁명의 원칙과 전략을 견지하 면서 이에 전술적 활력과 전술적 창조를 결합하는 것”이라고 한다(CPV 1996, 26). 2001년 열린 제9차 공 산당대회에서도 “인류는 역사적 진화법칙에 따라 사회주의로 전진할 것이며, 베트남의 현재의 발전단계는 사회주의로의 과도기이다”고 하였다(CPV 2001, 15; DCSVN 2001, 65). 베트남은 자본주의제도를 채택하 지 않으면서, 자본주의 사회 하에서 인류가 성취한 성과를 취함으로써 자본주의를 뛰어넘어 사회주의를 달 성할 것이지만, 자본주의를 뛰어넘어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복잡한 일이므로 여러 단계와 사회경제조직의 형식을 가진 장기간의 과도기를 경과해야만 한다고 보고 있다(CPV 2001, 31; DCSVN
2001, 84-85). 여기에서 ‘사회주의로의 과도기’의 주요 임무는 대규모 사회주의 공업화에 필요한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기초를 확립하는 것이며(CPV 1987, 44), 주된 목표는 생산력의 발전, 즉 경제발전에 있다 고 한다. ‘사회주의로의 과도기’에는 타 경제부문을 이용하는 정책이 필요하며 다양한 경제형태를 인정해 야 하므로, 과도기의 경제형태는 다양한 경제부문을 포괄하는 ‘다부문경제’(multi-sector economy)라는 특성을 나타낸다(CPV 1987, 63). 베트남에서 다부문경제의 장기간 지속이 요구되는 것은, “생산력 발달 수준에 조응하지 않는 생산관계로 인하여,” 즉 사회주의체제에 부합하지 않는 낮은 경제발전 수준으로 인 하여, 국유부문에서 노동력 흡수에 한계가 있고, 개인(경영)사업 종사자를 단기간에 집체화하는 것이 불가 능하며, 국유/집체경제부문의 자원이 한정되어 있으며, 자금이 소비에 쓰이거나 축장되어 생산에 쓰이지 못하는 한계를 나타내기 때문이라고 본다(CPV 1987, 62-3). 따라서 일자리를 창출하고 자금이 생산에 쓰 이도록 유도해야 할 필요가 있으며, 이로써 국유경제부문의 선도하에 다른 경제부문을 인정하고 이용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CPV 1987, 63).
이러한 혼합경제체제의 명칭은 1986년 제6차 공산당대회에서는 “다성분경제”(kinh te nhieu thanh phan: 多成分經濟)로(CPV 1987, 64), 제7차 공산당대회에서는 “사회주의 지향 다성분 상품경제”(CPV 1991, 54 & 114) 또는 “국가관리하 시장기제에 따라 작동하는 다성분 상품경제”로 명명되었고(CPV 1991, 72), 제8차 공산당대회에 이르러서는 “국가관리하 시장기제에 따라 작동하는 사회주의 지향 다성분 상품경 제”로 정식화되었다(CPV 1996, 28; DCSVN 1996, 57). 2001년 제9차 공산당대회에서도 “국가관리하 시 장기제에 따라 작동하는 사회주의 지향 다성분 상품경제”, 약칭 “사회주의 지향 시장경제”로 명명되었다 (DCSVN 2001, 86).
다부문경제의 구성내용은, 제8차 공산당대회에서 국유경제(kinh te nha nuoc), 합작(집체)경제(kinh te hop tac), 국가자본경제(kinh te tu ban nha nuoc), 개인/소(小)소유자경제(kinh te ca the, tieu chu), 사유자본경제(kinh te tu ban tu nhan)를 포괄한다고 하였으며(CPV 1996, 51-54; DCSVN 1996, 93-96), 제9차 공산당대회에서는 여기에 외국투자경제(kinh te co von dau tu nuoc ngoai)를 추가하였 다(DCSVN 2001, 96-99). 이는 사유경제의 확산과 외국인투자가 증대한 경제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2004 년경부터는 비국유경제를 통칭하여 ‘민영경제’(kinh te dan doanh, 民營經濟)라는 용어가 쓰이기 시작하 였다(Vu Quoc Tuan 2004, 324).
과도기의 다부문경제체제 하에서 각 소유부문의 역할은 다음과 같이 제시된다. 국유경제는 전체 경제에서 선도적 역할을 수행하고, 집체경제는 공고화되고 계속적으로 확대되며, 개인경제는 적정한 규모를 유지하 여 자발성, 민주, 상호이익의 원리하에 점진적으로 집체화의 길로 들어서도록 유도된다. 사유자본경제는 국가이익과 인민의 생활수준에 유익한 부문에서 사업을 수행하며, 다양한 형태의 국가자본주의부문을 발전 시키며, 가계경제는 적극적으로 장려된다(CPV 1991, 54).
2) 사회주의체제로의 전환
과도기의 경제체제로부터 사회주의경제체제로의 전환은 다음과 같이 이루어진다고 본다. 국가에 핵심적인 부문은 국영기업이 계속 담당하고, 사유경제부문은 자발성에 기초하여 집체화함으로써 집체경제를 확대하며, 사유자본경제부문은 국유경제와의 합작을 통해 국가자본경제로 유도됨으로써 실현된다고 한다(CPV 1991, 54, 116). 과도기를 거쳐 건설되는 사회주의의 본질은 제7차 공산당대회에서 채택된 “사회주의로의 과도기에 있어 국가건설을 위한 정치강령”에서 이렇게 제시되었다. 사회주의 사회는 “(1)노동인민이 주인 이 되고, (2)현대적인 생산력과 주요 생산수단에 대한 공유(公有)에 기반한 고도로 발달된 경제를 갖추고, (3)독특한 민족적 정체성을 지닌 진보된 문화를 갖추고, (4)억압과 착취, 불의로부터 해방된 인간이 능력에 따라 일하고 노동에 따라 분배받으며, 풍요와 자유와 행복한 생활을 향유하며, 개인의 전면적 발전을 위한 바른 조건을 향유하고, (5)서로 다른 민족들이 공동의 진보 아래 평등, 단결, 상호원조의 유대로 결합되며, (6)세계 모든 국가의 인민들과 우호적이고 협력적 관계를 유지하는” 사회다(CPV 1991, 51). 이러한 사회 주의 지향 목표는 이후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Do Muoi 1996, 15).
2. 경제체제의 구조적 변화
소유부문별 GDP 비중을 보면, 국유경제부문은 1990년대 하반기까지 전체 GDP 중 40%를 점하다가 1999 년부터 40% 이하로 감소한 이후 계속 감소하여 2013년 기준 32%를 기록하였다(표 1 참조). 비국유경제부 문의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연도별로 약간의 증가, 감소가 있었지만 2013년 48%였다. 외국인투자부 문의 GDP 비중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2013년 기준 20%에 달했다. 이렇게 보면, 전체 경제에서 차지하 는 국유부문의 비중은 계속하여 하락하고 있으며, 국유부문의 GDP 감소분이 대체로 외국인투자부문의 증 가분으로 나타나는 현상을 보여준다. 국유경제부문에 속하는 기업들은 대부분 국가의 기간산업들이기에, 그 비중이 30% 정도임에도 국가 경제에서의 중요성은 매우 크다. 국가가 기간산업을 국유부문에 포함하고 있어 공산당 이론가들이 주장한 것처럼 ‘관제고지’(commanding heights)를 점하고 있기에, 이를 보면 일 견 베트남에서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유지되고 있는 듯하다.
<표 1> 소유부문별 GDP 비중(%)
연도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국유 39.7 37.7 33.7 33.4 31.8 31.1 34.3 38.2 40.1 40.1 39.9 40.5 40.0 38.7 국내
53.5 53.5 52.7 50.5 50.0 49.0
비국유
60.3 62.3 66.4 66.6 68.2 68.9 65.7 61.8
외국인
투자부문 6.4 6.3 7.4 9.1 10.0 12.2
연도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국유 38.5 38.4 38.4 39.1 39.1 38.4 37.4 35.9 35.5 35.1 33.7 32.7 32.6 32.2 국내
비국유 48.2 47.8 47.9 46.5 45.8 45.6 45.6 46.1 46.0 46.5 47.5 49.3 49.3 48.3
외국인
투자부문 13.3 13.8 13.8 14.5 15.1 16.0 17.0 18.0 18.4 18.3 18.7 18.1 18.1 19.6
주1: 베트남 정부는 1993년까지 국유부문과 비국유부문으로 구분하다가, 1994년부터 국유부문, 비국유 국내부문, 외국인투자부문 으로 나누어 통계를 내고 있다. 주2: 2013년 통계는 추계치임.
출처: GSO 2004: 1112-1115; GSO 2005: 74; GSO 2008: 76; GSO 2011: 134; GSO 2014: 150.
그러나 공업에서 소유부문별 생산량 비중을 보면 국유경제부문의 비중은 계속 하락해왔다(이하 표 2 참 조). 국유부문은 ‘도이머이’ 정책을 선포한 1986년 후반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50%를 상회하였고, 그 이 후 하락하기 시작하여 2003년에 30% 이하, 2007년에 20% 이하로 감소하였고, 2013년에는 약 16%로 되 었다. 국유부문 비중의 감소는 전체 GDP보다 공업생산량에서 더 현저하게 나타났다. 1986년에 국유부문 의 비중은 GDP 중 40%, 공업부문에서 56%로 높았으나, 2000년에 그 비중은 각각 38.5%, 34%로 공업에 서의 비중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보다 처음으로 더 낮게 나타냈다. 2013년 국유부문의 비중은 전체 GDP에서 32%를 차지한 반면 공업부문에서 16%를 차지하는 데 그치고 있다. 이에 반해 국내 공업생산량 에서 차지하는 비국유경제부문의 비중은 1990년대 말까지 감소하였지만 2000년대 후반부터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특히, 1990년대 중반까지 가계경제부문의 증가가 국내 비국유부문의 증가에 기여한 바가 크나, 2000년대 이래 사영기업의 성장에 힘입어 사유경제부문의 증가가 이어져, 전체 공업생산량에서 차 지하는 비중은 2010년에 32.5%에 이르게 되었다. 외국인투자부문은 개혁정책 채택 이후 지속적으로 증가 하여, 공업생산량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98년에 33%, 2000년에 41%, 2013년에 50%를 상회하게 되었 다. 특기할 만한 것은 국유경제부문의 비중이 점진적으로 하락한 반면 집체경제부문이 급속히 하락하였다 는 점이다. 공업부문에서 집체경제의 비중은 1986년 28%로부터 1990년 12%로 감소하였고, 1995년부터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공업부문에서 집체경제부문 비중의 급격한 감소는 대부분 소규모인 수공업합 작사가 시장경제로의 전환과정에서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몰락하였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사회주의경 제의 근간은 국유경제부문과 집체경제부문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집체경제부문 비중의 급속한 감소는 사회 주의경제의 비중을 급격히 하락시키는 효과를 나타냈다. 농업부문은 1981년 생산물계약제, 1988년 농가경 영제를 도입하면서 전반적으로 탈집체화하였으므로, 집체경제의 감소는 가속화하였다.
<표 2> 소유부문별 공업생산량 비중(%)
연도 1986 1987 1988 1989 1990 1991 1992 1993 1994 1995 1996 1997 1998 1999 국유 56.3 55.9 56.5 54.3 54.1 55.8 55.3 56.4 57.1 57.3 49.6 47.3 45.4 39.5 국내
비국유 43.7 44.0 43.5 43.1 41.4 31.5 29.4 28.2 27.6 28.2 23.9 23.7 21.4 21.9
집체 28.1 27.0 23.9 15.8 12.2 4.8 2.8 2.1 1.1 0.8 0.6 0.5 0.5 0.5 사유 0.4 0.5 0.5 0.7 0.7 1.4 2.8 4.0 2.4 2.4 2.4 2.5 2.4 2.1 가계 15.1 16.4 19.0 26.4 28.4 25.2 23.8 22.1 21.4 20.7 15.5 14.0 11.7 12.3 혼합 - - - 0.2 0.1 - - - 2.7 4.3 5.5 6.6 6.7 6.9
외국인
투자부문 - - - 2.6 4.5 12.7 15.2 15.4 15.2 14.5 26.5 29.0 33.2 38.6
연도 2000 2001 2002 2003 2004 2005 2006 2007 2008 2009 2010 2011 2012 2013 국유 34.2 31.5 31.5 29.4 27.4 24.9 22.1 19.9 18.1 18.3 19.1 17.6 16.9 16.3 국내
비국유 24.5 27.0 27.0 27.5 29.0 31.3 33.5 35.5 37.3 38.5 38.9 37.8 35.9 33.6
집체 0.6 0.5 0.6 0.4 0.4 0.4 0.4 0.3 0.4 0.4 0.4 - - - 사유 14.2 16.3 16.7 18.4 20.4 22.8 25.6 27.8 30.1 31.4 32.5 - - - 가계 9.7 10.2 9.7 8.7 8.2 8.1 7.5 7.3 6.9 6.7 6.0 - - -
외국인
투자부문 41.3 41.5 41.5 43.1 43.6 43.8 44.4 44.7 44.6 43.2 42.0 44.6 47.2 50.1
주1: 1986-1990년간은 1982년 가격 기준, 1991-95년간은 1989년 가격 기준, 그 이후는 경상가격 기준임.
주2: 베트남 통계총국은 통계연감에서 1986-99년간 국내 비국유 경제부문의 하위 부문을 집체경제부문, 사유경제부문, 가계경 제부문, 혼합경제부문으로 분류하다가 2000년 통계부터 혼합경제부문을 삭제하고 세 부문의 통계만 제시하고 있으며, 또한 2011 년 통계부터 비국유부문의 하위 부문별 통계를 제시하지 않고 있음.
출처: GSO 2004: 1390-1391에서 필자 계산; GSO 2001: 253; GSO 2006: 325; GSO 2011: 423; GSO 2014: 479.
근래 공업 생산에서 소유부문별 증가율을 보면, 국유부문은 2006년에 6%, 2008-11년간 평균 7.8% 증가 율을 나타냈으나, 국내 비국유부문은 같은 기간에 각각 26%, 14.7%를 나타냈고, 외국인투자부문은 각각 20%, 14.7%를 나타내, 공업 생산에 있어서 국내 비국유부문과 외국인투자부문의 증가율이 국유부문보다 두 배 정도 높다는 점을 보이고 있다(Nguyen Thi Tue Anh et al. 2014: 9). 이를 보면, 공업에서 외국 인투자부문의 우위는 더욱 강화되고 있고 국내 비국유부문이 이를 이어 확대되고 있는 반면에 국유부문은 계속 하락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 국유경제에 기반한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근간은 흔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IV. 개혁 시기 ‘사회주의’ 체제 정당화
1. 개혁 이전 체제 정당화
1945년 독립 이후 베트남에서 공산당은 독립과 통일과정에서의 지도적 역할을 지배의 정당화 기반으로 삼 아 왔다. 베트남이 1975년 통일을 이루기까지 공산당 지도부는 대체로 민족의 독립과 통일의 지도세력으 로서 신뢰를 얻고 있었다. 1953-56년간 북부에서 진행된 토지개혁과정에서 지주 및 부농들에 대한 과도한 탄압이 공산당 지배에 대한 신뢰를 부분적으로 훼손했고, 통일 이후 남부의 급속한 사회주의화 과정에서 남부의 지배층뿐만 아니라 공산혁명 지도자 및 비공산계열 민족주의자들이 소외되었지만, 이러한 일들이 직접적으로 체제에 대한 위협 요인으로까지 작용하지는 않았다.
베트남 공산당 및 관변 이론가들은, 각국이 그 국가의 역사적 환경, 문화적 전통, 사회적 특징에 따라 정 치제도를 가지며, 베트남공산당의 영도 역할은 베트남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자연스런 산물로서 객관성을 지닌다고 주장한다. 베트남이 1945년 9월 독립을 선포한 시기에 베트남에는 공산당 이외에, 베트남국민당 과 베트남혁명동맹회가 있었으나 이 두 정당은 국민당 군대의 철수와 함께 사라졌다. 1944년 설립된 베트 남민주당과 1946년 설립된 베트남사회당이 1988년 해산되기까지 존재했으나 이 두 정당은 공산당의 영도 지위를 인정하고 있었다. 따라서 베트남공산당이 유일 집권당이 된 것은 구국과 민족해방을 달성한 민족적 지도세력이면서 평등한 사회주의 사회를 성취하려는 목표에 따라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목표를 결합한 역 사적 산물이라는 것이다(Nguyen Van Quang, 2015: 75-76; Nguyen Viet Thong, 2014: 245-246). 이 러한 민족적 영도세력으로서의 공산당 지배의 정당화 방식은 대체로 1970년대 말까지 유효하게 작동하였 고, 지금도 조금은 작동하고 있다.
2. 개혁을 통한 업적 정당성 확보
개혁정책 집행 이래 사회경제적 변화는 적지 않았다. 먼저 베트남은 전면적 개혁에 착수한 1986년말 이래 경제부문에 주안점을 두어 개혁을 추진했고 1980년대 말부터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베트남 은 1990년대 말까지 높은 경제성장 실적을 나타냈고, 이에 따라 국민들의 경제적 여건은 현격히 개선되었 다. 베트남은 1989년부터 쌀 수출국으로 전환하였고 1990년대부터 연평균 8% 경제성장 실적을 나타냈다. 이에 따라 국민들의 생활수준은 급격히 향상되었고 빈곤율이 감소하였다. 지표로 보면 1989-2007년간 연 간 평균 GDP 증가율은 8%에 이르렀고, 빈곤선 이하 인구비율은 1993년 58%로부터 2007년 15%로 감소 하였다. 최근 통계로 보면, 베트남의 인간개발지수(HDI)가 1990년 0.475로부터 2014년 0.666으로 급격히 증가하여 베트남의 발전성과를 보여주고 있다. 2014년 베트남의 인간개발지수는 필리핀(0.668), 인도네시 아(0.684)와 비슷한 수준이었다(http://hdr.undp.org/ en/composite/trends).
한편, 시장경제의 도입으로 의료와 교육 등 보편적 복지가 상실되고 소득불평등이 확대되는 등의 문제를 낳기도 하였다. 기존에 보편적으로 제공되던 교육, 의료 등 서비스가 유료화하여 빈곤계층에게는 시장화의 피해를 안겨주기도 하였다. 더불어 비공식적 납부금 부과, 간부들의 부패, 토지 수용 등으로 인하여 농촌 에서 농민들의 저항이 확산되었다. 빈부 격차가 커져, 상위 소득자 20% 대비 하위 소득자 20%의 소득 격 차는 1990년 4.1배로부터 2010년 9.2배로 증가하였다(Nguyen Van Quang, 2015: 207-208). 특히, 2007-8년간의 세계 금융위기는 베트남 경제에 악영향을 끼쳐 국민들의 생활수준을 악화시켰다. 2011년 중반의 통계에 따르면, 그 이전 5년간 베트남 내 시위가 3,829건 발생하였다(Le Hong Hiep, 2012: 162). 개혁 이후 경제성장이 베트남 지도자들이 업적 정당성을 확보하는 데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데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상대적 경제적 격차의 심화가 향후 정당성 훼손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지만, 현재까지 베트 남 공산당의 지배는 업적을 통한 정당성 회복에 성공했다고 평가될 수 있다. 그러나, 개혁정책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공산당의 낮은 수준의 지도력, 만연한 부패는 사회주의체제와 지도자들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를 잃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게다가 이러한 문제가 공산당 1당 통치로 인해 발생한 것이라는 견해가 지지를 얻기 시작하면서 현 체제와 정권의 정당성은 보다 더 약화되었다. 중요한 사회적 도전은 농민들로 부터 나왔는데, 특히 1997년부터 북부 홍하 델타 농촌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발생한 시위는 정치지도자들 에게 관료들의 부패문제에 더욱 경각심을 갖게 하는 계기로 작용하였다. 이와 함께 산업화과정에서 공장 건설 등을 위해 토지를 수용당한 농민들의 시위가 하노이와 호찌민시에서 끊임없이 계속되어 왔다. 그러나 부패는 단지 국민들과 직접 대면하는 지방 관료들뿐만 아니라 최고위 지도자들 가운데에도 만연해 있어 근본적 해결이 곤란한 사안이었다.
개혁의 진전은 다른 한편 지식인들의 목소리를 높이는 계기로도 작용하였다. 지식인들은 체제 내 비판자와 체제비판자로 구분할 수 있는데, 2000년대에 급증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체제 내 비판자들은 사회주의 체제 자체를 부정하지 않고, 공산당을 지도세력으로서 인정하여 1당 통치를 받아들이는 부류이나, 체제비 판자들은 공산당 1당 통치를 폐지하고 다당제 국가로 전환할 것을 주장한다. 언론인들도 국영언론의 한계 내에 있지만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부패문제를 보도하여 공산당 및 국가 지도자들로부터 경계심을 유발 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반체제인사들이 ‘블록 8406’을 형성하는 등 조직화 사례들이 늘고 있다(이한우, 2010). 이러한 체제 정당성에 대한 도전은 전통적 권력 정당화 자원의 유효성이 한계에 달하였고, 새로운 정당화의 자원이 필요한 상황임을 말해준다.
3. 개혁 시기 사회주의 체제 정당화의 방식
1) 이념적 변화
(1) 사회주의 외연의 확대 36)
베트남 당-국가는 이념, 제도 및 절차상 변화를 통하여 사회의 요구에 대응해 왔다. 공식적으로 베트남은 현재 사회주의로 향해 가는 과도기에 처해 있고 사회주의 사회에 도달하기 위해 혁명중이라고 한다. 그러 나 공산당은 개혁 진행과정에서 사회주의 개념의 외연을 확대하여 변화하는 사회경제 상황에 대응하고 있 다. 공산당이 “사회주의 과도시기 국가건설 강령 2011”에서 사회주의 사회 개념에 “부유한 인민, 강한 국 가, 민주·공평·문명된 사회”라는 일국적 목표를 삽입한 것이라든가, “사회주의 과도시기 국가건설 강령 1991”에 있던 “인민이 압박, 착취, 불공정을 면해 해방되고, 능력에 따라 일하고 노동에 따라 향유한다”는 문구를 삭제하고, 단지 “인민이 편안하고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누리며”라는 매우 일반적 목표를 제시한 것은 계급적 시각을 완화하고 사회주의 사회의 외연을 확대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또한 사회주의 사 회의 주체를 ‘노동인민’(nhan dan lao dong)으로부터 ‘인민’(nhan dan)으로 변경하고, 목표로 하는 사회 주의 체제의 경제적 기반을 “생산수단의 공유제”로부터 “진보적 생산관계”로 변경하여 사회주의의 외연을 확대하였다(Cuong linh 1991, II-4; Cuong linh 2011, II-2).
또한 베트남은 “인민이 주인이며, 국가가 관리하고, 공산당이 영도하는” 체제라는 점을 명시하여, 국가와 사회를 영도하는 공산당의 역할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으나(Hien phap Viet Nam nam 2013, 제2, 3, 4 조), 단지 그 역할은 기존의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방식으로부터 간접적 방식으로 점차 변하고 있다. 공산 당은 공산당의 위상을 기존의 “노동자계급의 선봉대”로부터 2006년 당조례에서 “노동자계급의 선봉대인 동시에 노동인민과 베트남 민족의 선봉대”로 바꾼 데 이어, “사회주의 과도시기 국가건설 강령 2011” 및 2013년 헌법에도 이를 반영하여 수정하였다(Dieu le Dang cong san Viet Nam 2006; Cuong linh 2011, IV-4; Hien phap Viet Nam nam 2013, 제4조). 이러한 변화는 공산당이 노동자 계급의 전위대로 서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한다는 기존의 인식으로부터 국가 내 모든 계급 및 민족 전체를 대표하는 세력이 라는 인식으로 전환한 것이다(寺本實, 2012: 43). 사회주의 개혁과정에서 공산당은 계급정당으로서의 공산 당의 위상을 폐기하지는 않지만 국민정당으로서의 위상을 강조함으로써, 일국적 사회주의를 유지하는 가운 데 공산당이 국민 전체를 대표하는 유일정당으로서 집권당의 지위를 지속하고자 한다.
베트남은 현재 처한 사회주의로의 과도기 사회에서 노동자, 농민, 지식인 등 전 사회계층의 연맹과 민족 대단결을 기반으로 발전을 도모하면서도 여전히 계급투쟁은 유효하다고 한다(Nguyen Phu Trong, 2004: 147-148). 그러나 최근 공산당은 정치 관련 문건들에서 사회주의 계급투쟁적 용어들을 순화하고 좀 더 중
36) 이 부분은 이한우 (2012) 에서 일부 관련 부분을 가져와 수정 · 보완한 것이다 .
립적 용어를 채택하고 있다. 예컨대 베트남은 1989년 3월 제6기 공산당 중앙집행위원회 6차 회의부터 ‘프 롤레타리아 독재’ 대신에 ‘정치체제’(He thong Chinh tri)라는 용어를 쓰기 시작하였다(Nguyen Phu Trong, 2007: 31).
이러한 ‘탈계급화’ 경향은 헌법에도 나타나 있다. 사회주의 체제의 본질을 극명히 드러낸 1980년 헌법과 달리 개혁과정에서 수정된 1992년 헌법은, 베트남의 국가 성격을 “프롤레타리아 독재 국가”(人民民主專政) 로부터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국가”로 변경하였고(제2조), 2013년 헌법은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사회주의 법치 국가”로 규정하였다(제2조). 또한, 베트남은 1980년 헌법에서 “국가의 주인은 노동자계급, 집체농민계급, 사회주의 지식계층을 포함한 노동인민의 집단주인이며, 핵심은 노동자계급에 의해 영도되는 노농연맹이다”(제3조)라는 규정을 1992년 헌법과 2013년 헌법에서 “국가권력은 인민에게 속하며 그 기초는 노동자계급, 농민계급 및 지식계층의 연맹이다”(제2조)로 변경하였다(Hien phap Viet Nam (nam 1946, 1959, 1980 va 1992); Hien phap Viet Nam nam 2013). 이는 집체적 표현과 사회주 의적 색채를 완화하고 인민의 개념을 노동자 농민 지식인 모두를 포함하는 개념으로 확대한 것으로서, 노 동자-농민 계급의 국가로부터 전인민의 국가로 전환한 것임을 나타낸다(이한우, 2010: 176). 이러한 변화 는 경제부문뿐만 아니라 정치부문에서도 사회주의를 명목상 유지하면서 실질적으로는 탈사회주의화하고 있는 현실을 절충적으로 포괄하려는 노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2) 호찌민사상과 민족주의의 양면
베트남은 1990년대초부터 호찌민사상을 공식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하였다. 공산당은 1991년 6월 제7차 공 산당대회에서 채택한 정치강령과 정치보고에서 “당은 맑시즘-레닌이즘과 호찌민사상을 단단히 쥐고 창조 적으로 적용하여 발전시켜야 한다”고 언급하며 호찌민사상을 공식적으로 등장시켰다(CPV, 1991: 48, 102). 1992년 헌법도 전문과 제4조에서 맑시즘-레닌이즘과 함께 호찌민사상을 베트남의 사상적 기초로 삼 았다. 이후 베트남 지도자들은 통치의 사상적 기반으로서 호찌민사상에 대해 누누이 강조해 왔고, 학자들 도 호찌민사상을 연구의 기초로 제시하였다. 2011년 제11차 공산당대회에서는 “‘호찌민 도덕의 거울’에 따 라 학습하고 영도 능력을 증진시켜야 한다”고 강조하였다(이한우, 2011: 113).
이렇게 호찌민사상을 베트남의 공식적 이념으로 삼은 것은 베트남이 사회주의 지향의 체제이면서도 민족 주의에 기반한 사회주의를 추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강조는 민족의 독립과 통일에 헌신한 민족 지도자에 대한 경외감의 발로인 한편 현 지도부에 대한 국민들의 낮은 신뢰 상황 하에서 공산당 지 배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공식적으로 미혼인 호찌민이 중국 광동에 서 혁명활동을 할 때 중국인 부인과 결혼한 이외에도 여러 명의 여성과 관계했으며, 2001년 당 총비서에 취임한 농득마인(Nong Duc Manh)이 호찌민의 자녀라는 소문이 유포되면서 그에 대한 도덕적 신뢰감이 상실되었고, 호찌민을 배경으로 한 공산당의 정당성 강화는 그다지 효과를 발휘하지 못했다(Nguyen Quoc Cuong, 2006: 77-78).
최근에는 당-국가의 지도부가 남중국해 문제 등 중국과의 갈등을 공산당 집권 정당화의 자원으로 활용하 고 있다. 특히, 2011년 5월 중국 선박이 베트남 원유탐사선의 작업 케이블을 절단하면서 반중국 시위가 발생했는데, 베트남 지도부는 반중국 시위를 부분적으로 방조하면서 민족주의적 정당화의 자원으로 활용하 였다(Le Hong Hiep, 2012: 163-164). 한편, 베트남에서 민족주의가 최고위 정치지도자들에 대한 비판적 논설로 활용되기도 한다. 그것은 남중국해에서 중국의 영유권 확대에 대항하여 시위를 벌이는 인사들이 베 트남 지도부가 중국 지도부와 연계되어 국가의 이익을 침해하고 있다고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베트남에서 민족주의는 전반적으로 현 당-국가의 정당화에 기여하지만, 부분적으로는 공산당 지배에 비판 을 가하는 반체제 인사들의 논리에도 활용되는 양면적 성격을 지닌다.
2) 제도적 변화
37) 베트남은 정치체제 개혁을 두 방향으로 진행하여 왔다. 먼저, 베트남은 당-국가 지배체제의 틀 내에서 국 가능력을 증진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공산당의 포괄적 간섭을 축소하고 당-국가 간 역할을 구분하고 제도화하여 공산당 지도자, 정치인 및 관료들에 의한 자의적 권력행사를 줄이려고 하였다. 동시에 국회의 입법기능 강화, 행정부의 행정효율화 등을 추진하여 국가능력을 강화해왔다. 다른 한편 베트남은 국가기관 간 견제와 균형 장치를 확대하여 횡적 책임성(horizontal accountability)을 강화하고, 사회로부터의 요구 에 좀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여 종적 책임성(vertical accountability)을 증진시켰다. 38) 베트남의 당-국가 는 체제 자체에 도전하지 않는 한 사회세력의 요구에 수용적 태도를 보이며, 이를 위로부터의 개혁으로 실 현하고 있다.
(1) 공산당 위상의 재정립과 당내 ‘민주화’
베트남에서 공산당의 국가와 사회에 대한 영도 역할은 공식적으로는 변함없이 추구되고 있다. 공산당이 국 가 독립과 통일의 지도세력으로서 민족적 과제를 수행했기 때문에 국민들의 신뢰를 얻고 있었지만, 통일 이후 경제적 침체, 전횡적 권력 행사, 부패 등으로 인해 그 위상은 하락해왔다. 이에 공산당은 국가에 대 한 공산당의 위상을 재정립하는 작업에 착수했고, 그것은 공산당을 헌법의 틀 내에 위치시키고 당의 영도 적 권력 행사는 국가기관을 통해 행사되도록 제도화의 수준을 높이는 것으로 실현되고 있다(Nguyen Van Quang, 2015). 특히 2013년 헌법은 공산당의 국가와 사회에 대한 영도 역할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당 조직과 당원은 헌법과 법률의 틀 내에서 활동한다”고 규정하여 법치적 요소를 강화하였고, “인민에 대한 봉사와 책임을 다하고, 인민의 감독을 받는다”는 규정을 삽입하여 공산당의 국민에 대한 책임을 강조하였 다(Hien phap Viet Nam nam 2013, 제4조). 또한, 2001년 제9차 공산당대회에서 채택된 당 조례에는 공산당 총비서의 임기를 2회까지로 제한하는 규정을 신설하여 권력의 장기 독점을 방지하는 장치를 마련 하였다(Dieu le Dang cong san Viet Nam 2001).
동시에 공산당 내에서 제기되는 당내 ‘민주화’ 요구에 대응하여, 지도부는 보다 더 많은 인원이 주요 정책 의 결정에 참여하도록 제도화하고 있다. 당내 민주화에서 빠른 진전은 2006년 4월 제10차 공산당대회를
37) 이 부분의 일부 내용은 이한우 (2010) 에서 가져온 것이다 .
38) 횡적 책임성은 타 국가기관에 대한 대응으로서 , 국가기관 간 권력 분립 , 견제와 균형 , 거부 등을 포함하며 , 종적 책임성은 선 거민 즉 국민들의 국가적 결정에 대한 개입과 이에 대한 국가기관 및 지배자들의 대응으로서 대표적으로 정기적 경쟁적 선거에 의해 실현된다 (Abrami, Malesky & Zheng, 2013: 244).
전후하여 나타났다. 기존의 공산당 최고위 지도부의 의사결정방식은 정치국에서 방침을 만들어 이를 중앙 집행위원회에서 추인하거나 중앙집행위원회의 결정을 공산당대회에서 추인하는 방식이었다. 제10차 공산 당대회에서는 사전에 정치국에 의해 결정되지 않고 회의 기간 중 중앙집행위원회에서 바로 결정되는 사안 들이 많아졌으며, 정치국 또는 중앙집행위원회의 의견이 공산당대회에서 그대로 추인되지 않는 경우도 있 었다. 이는 정치국 또는 중앙집행위원회에서 사전에 결정된 방침을 공산당대회에서 추인하는 방식으로부터 벗어나 공산당대회에서 직접 의사를 결정함으로써 보다 더 많은 대표자들이 의사결정과정에 참여하게 되 어 당내 ‘민주주의’를 확대한 것을 의미한다. 공산당 총비서의 선출과정에서도 과거에는 중앙집행위원회가 후보를 추천하였는데 제10차 공산당대회에서는 이를 공산당대회가 추천하였고, 당초 3명의 복수 후보가 경쟁하다가 최종적으로 단일 후보에 대한 투표가 행해진 것은 공산당 내 ‘민주화’가 진전된 상황을 보여주 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2011년 제11차 공산당대회에서는 총비서 후보가 단일 후보였고, 2016년 제12 차 공산당대회에서는 2명의 후보가 경쟁하여, 당내 ‘민주화’ 수준은 시기별로 차이를 보였다.
(2) 법치 국가와 국가능력의 증진
베트남 공산당과 정부는 개혁정책 채택 이래 법제화를 추진해왔다. 헌법의 개정은 법치(法治)를 강조하는 캠페인, 즉 “사회주의적 법치 국가” 건설과정에서 비롯되었다. 베트남의 당-국가 지도자들이 예전보다 더 당-국가의 기능 분리와 법률 및 규정에 따라 권력을 행사해야 한다는 규범을 체현하고 있다. 베트남은 2001년 개정 헌법 제2조에,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은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 사회주의 법치국 가다”로 ‘사회주의 법치’를 부가하였고, 제3조에 “국가는 … 부유한 인민, 강성한 국가, 공평·민주·문명된 사회의 목표를 실현한다”고 민주와 문명된 사회 목표를 새로 추가하였다. 법치국가를 포함한 것은 개혁과 정에서 법치를 강조하여 제도화의 수준을 높이고자 한 것이며, 민주사회의 건설은 1997년의 타이빈(Thai Binh)의 농민 시위 이후 전개된 기층 민주주의 확대와 결부된 사회변화의 요구를 반영한 것이다. 이처럼 법이나 조례에 문구를 삽입하는 것이 단지 수사(rhetoric)에 불과하다고 평가할 수도 있으나, 사회의 요구 를 정치체제의 기본질서에 반영한 것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더욱이, 국내외 비판자들이 헌법 규정을 당 -국가를 비판하는 근거로 삼고 있기에 조문상 변화는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당과 국가가 추 구하는 법치는 ‘법의 통치’(rule of law)가 아니라 ‘법에 기반한 통치’(law- based rule)라는 성격을 갖기 에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의 법치와 차이를 보이고 있다(Bui Hai Thiem, 2014).
개혁 이전 베트남에서 행정부는 공산당의 지시를 집행하는 기구로 독자성과 전문성을 갖추지 못하였고, 행 정절차는 지체되고 복잡하며 관료주의적이었다. 개혁 이래 사회경제적 변화는 행정부의 역할을 확대하였고 이를 위하여 전문성과 책임성을 요구하였다. 행정개혁은 1995년 1월 제7기 당 중앙집행위원회 8차 회의에 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하여, 행정조직 개편, 행정절차 간소화, 유능한 행정관료 육성 등에 집중하였 다. 정부는 1998년 행정개혁조정위원회를 설치하고 행정개혁에 박차를 가하고자 하였으나, 개혁이 급속히 진전되지는 않았다(Painter, 2003: 218). 이후 정부는 2001년 9월에 “2001-2010년간 행정개혁 마스터 프 로그램”을 작성하고 본격적으로 행정개혁에 착수하였다. 그 목표는 행정부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증진하고, 더 효율적·효과적인 행정 서비스를 제공하며, 부패를 줄이고 시민들의 참여를 증진시키는 데 있다
(Vasavakul, 2006: 83-84). 행정절차를 축소하기 위한 시도로 전국에 원스톱 서비스 센터가 시험적으로 개설되었는데, 2000년대 중반에 64개 설치되었다. 이런 시도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에서 행정개혁은 급속히 진전되지 않고, 반부패 캠페인에도 불구하고 관료들의 부패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어, UNDP를 비롯한 국 제기구들이 행정개혁을 통한 국가능력을 향상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를 계속하고 있다.
(3) 국가기관의 책임성 강화
국회의 개혁은 국회의원 선거과정에서 국민의 참여를 확대하고, 국회 본연의 기능인 입법기능과 행정부 견 제기능을 확대해가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베트남은 국회를 국민의 최고 대표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직접선거를 통하여 국회의원을 선출하는 선거제도를 채용하고 있어 사회주의 국가에서 비교적 발전된 제 도를 채택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공산당은 선거준비과정에서 주관기관인 국회 상무위원회에 가이드라인 격인 ‘의견’을 제출하여 국회의원의 구성에 대한 지침을 제공하며, 베트남조국전선이 주도하는 3차에 걸친 ‘협상’(consultation) 과정을 통하여 후보자를 선발하도록 하고 있다. 더욱이 베트남조국전선이 공산당의 지도하에 있는 조직이므로, 공산당의 영향력이 입후보과정에 작용하며, 후보자 선발과정에서 자 격이 없다고 판단되는 후보자에 대하여 입후보 자체를 사전에 제한할 수 있다. 39) 이런 점에서 베트남은 절차적 민주주의를 실현하고 있지 못한 정치체제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제까지 선거과정상 변화가 미약하여 곧 정치체제의 변동을 초래할 것이라고 예측할 수는 없으나, 선거과정은 국민들의 참여와 절차적 민주주의를 조금씩 확보해 가는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다. 베트남 국회 의원 선거제도상 개혁은 1987년 4월에 실시된 제8기 국회의원 선거에서부터 구체화되었고, 국민들의 참여 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제8기 선거에서는 최초로 후보자들이 선거운동을 하였고, 유권자들 과의 공식 회합에서 유권자들이 후보자들을 검증하는 기회를 가졌다. 1992년 제9기 국회의원 선거부터는 선거구별로 후보자가 의원 정수보다 많아야 한다는 선거법 규정을 적용하여, 국회의원 3명을 선출하는 선 거구는 후보자를 5명, 국회의원 2명을 선출하는 선거구는 후보자를 4명 선발하였다. 이후 의원 정수 대비 후보자 비율은 150%에서 170%로 증가하였다.
40) 또한, 후보자가 정치-사회단체의 추천을 받지 않고 자기 추천으로 등록할 수 있도록 새롭게 제도를 도입하였다. 입후보과정에서 차별적이어서 자천 후보자수는 아 직 많지 않으며 기별 당선자는 1-3명에 불과하다. 41) 1997년 선거법은 각 기관 및 단체의 유권자회의에서 후보자를 추천하도록 하여 유권자들의 참여를 확대하는 조치를 규정하였다. 이후 2002년 선거법은 소수민 족 및 여성 후보자수를 일정 부분 확보하여야 한다는 조항을 삽입하였다. 2007년 선거과정에서는 처음으 로 입후보자가 재산과 수입을 신고하도록 하였다(中野亞里, 2009: 395). 이렇게 국회의원 선거과정에서 절 차를 보다 더 명확히 하고 국민들의 참여를 확대하는 조치는 공산당 1당 지배체제 하에서나마 절차적 민 주주의를 조금씩 갖춰 나가는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이는 한편으로 공산당 1당 지배를 존속시키는 데 기여하는 측면도 있지만(Malesky & Schuler, 2013), 곧 국가의 국민에 대한 종적 책임성을 증진시키는
39) 이런 상황을 베트남 내에서는 “ 당이 추천하고 인민이 선출한다 ”(Dang cu Dan bau) 고 하여 , 선거가 비민주적임을 나타내
고 있다 .
40) 의원 정수 대비 후보자수 비율은 , 제 8 기 선거부터 150% 였다가 제 12 기 선거에서는 170% 로 증가하였다 .
41) 자천 후보는 1992 년 제 9 기 국회의원 선거에서 2 명 입후보 당선 무 , 제 10 기 선거에서 11 명 후보 중 3 명 당선 , 제 11 기 선거
에서 13 명 후보 중 2 명 당선 , 2007 년 제 12 기 선거에서 30 명 후보 중 1 명 당선되었다 .
것이라고 평가된다.
국회는 입법부 본연의 기능을 확대해가고 있다. 특히 1992년 농득마인(Nong Duc Manh)이 국회주석으로 선출된 이후 그 변화는 컸다. 국회는 공산당의 거수기 역할에서 입법기능을 강화하고 행정부를 견제하는 등 제 기능을 조금씩 갖춰가고 있다. 국회는 1992년 국회조직법(제37조)에서 전임(專任) 국회의원과 비전 임 의원을 두고 국회가 그 수를 결정한다고 규정하였다가, 전임 의원수를 2001년 국회조직법(제45조)에서 25% 이상, 2014년 국회조직법(제23조)에서 35% 이상 둔다고 규정하여 국회의 전문화를 기하려고 시도하 였다(Luat To chuc Quoc hoi 2001; Luat To chuc Quoc hoi 2014). 42) 국회는 2007년에 법률위원회 를 입법기능을 전담할 입법위원회와 사법적 감독기능을 수행할 법률위원회로 양분하여 그 기능을 전문화 하였다.
국가기관 간 견제와 균형을 취하는 일은 민주적 국가 운영을 실현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하다. 특히 국가 권력 집행권이 집중되는 행정부에 대한 감시와 견제는 권력 집중과 남용을 방지하는 데 필수적이다. ‘사회 주의적 민주’를 추구하는 베트남에서도 국가 권력 집행의 적법성과 투명성을 높이려는 노력이 추진되어 왔 다. 특히, 국회의 행정부에 대한 견제장치는 지속적으로 마련되었다. 국회는 1989년부터 국회 회의를 생방 송하여 국회에서 장관이 답변하는 모습을 TV로 방영함으로써 국민들에 대한 국회의 책무를 보다 더 잘 보여주고 있다(Porter, 1993: 76). 국회의 행정부 제출 안건에 대한 심사를 강화하는 추세는 확대되었고, 2010년 6월 행정부가 제출한 고속철 사업을 부결한 사례는 국회의 권한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 중 하나였 다(石塚二葉, 2015: 126). 최근에는 행정부의 예산안과 법률안에 대한 심각한 토론이 행해지기도 한다. 또 한 국회는 2012년 11월, 국회에서 선출한 인사들, 즉 국가주석 및 부주석, 국회주석(국회의장) 및 부주석, 각 위원회 위원장, 그리고 수상, 장관 등 행정부 고위 인사들에 대한 신임투표를 매년 실시한다고 결정하 고, 2013년에 처음으로 이를 집행하였다. 2013년 투표 결과 당시 공산당 총비서와 국가주석으로부터 견제 를 받던 수상에 대한 신뢰가 다른 인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수상에 대한 신뢰는 2014년 신임투표에서 다시 회복되었다(石塚二葉, 2015; Malesky, 2014). 그 투표과정은 단지 국회 의원들이 대상자 개인별로 ‘높은 신임’, ‘신임’, ‘낮은 신임’ 중 선택하는 것이어서 신뢰성이 낮았지만, 이 러한 제도가 사회주의 국가에서 실시되었다는 점은 높게 평가할 수 있으며, 상대적으로 낮은 신임을 얻은 인사들에게 도덕적 중압감을 주어 향후 분발케 하는 효과를 나타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들은 공산당의 지도하에 위로부터 용인되는 것이기에, 국가 수준에서 종적 책임성의 수 준을 근본적으로 변경하지 않으면서 횡적 책임성을 강화하려는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4) 기층 ‘민주주의’의 확대
1997년 북부 홍하 델타의 타이빈(Thai Binh) 성에서의 대대적인 농민 시위는 공산당과 정부 고위 지도자 들에게 경종을 울리는 큰 사건이었다. 이 시위가 주로 지방정부의 농민들에 대한 과도한 부담금 징수, 불 투명한 집행, 간부들의 권력 남용 및 공금 횡령 등에 대한 반발로 발생하였고, 사회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도전은 아니었으나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Nguyen Hai Hong, 2014: 76). 타이빈 성의 농촌에서
42) 기존의 대부분 국회의원은 전임 의원이 아니라 타 국가기관에서 직무를 가진 겸직 의원이었다 . 그들은 전 직무 중 1/3 의 직무
를 국회의원직에 할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
시위가 확산되자, 정부는 조사팀을 파견하였고, 이후 국가주석 쩐득르엉(Tran Duc Luong)을 포함한 고위 정치국원이 현지를 방문하여 실태를 조사하였다. 그 결과 공산당은 영도적 역할을 상실하였고, 민주주의의 결여로 당, 국가, 정치사회단체가 국민들로부터 멀어지게 됐다고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사회기층에서 의 민주주의를 보장하는 입법과 지방 관료들에 대한 통제로 이어져 그 정책적 효과를 발휘하였다. 공산당 과 정부는 기층에서 민주화를 진전시키는 결의를 채택하였고, 공산당은 자기비판을 전개하였다. 공산당은 1997년 6월 제8기 중앙집행위원회 3차 회의에서 ‘사회주의적 민주’의 이념에 따라 기층 민주화와 양질의 당원 양성을 실천하도록 결의하였고, 1998년 2월에는 “기층에서 민주체제의 건설과 실현에 관한 지시”로 싸(xa, 社) 등 기층에서 주민들의 참여를 강화하는 정책 기초를 설립하도록 하였다. 정부는 1998년 5월 정 부의정(政府議定) “싸(xa)에서의 민주 실현 규칙”, 9월 정부의정 “(정부)기관 활동 중 민주 실현 규칙” 등 을 발령하였다. 공산당은 1998년 10월 중앙집행위원회 6차 회의를 열었음에도 불구하고 1999년 2월 회의 를 다시 열어, 5월부터 2년간 당원의 비판·자기비판 및 당 건설, 정당(整黨)운동을 전개하도록 결의하였다 (中野亞里, 2009: 278-279).
이 기층 민주화를 추구하는 제도는 주민들의 참여를 확대하는 것으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Tortosa, 2012: 112-114). 그 효과로 기층에서 지방 관료들의 행위가 개선되었고 책임성 있게 되었으며 주민들과의 관계를 더 밀접히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지방행정구조에서 가장 낮은 단위인 톤(thon, 村)의 촌 장(村長)은 주민들의 직접 투표로 선출되나, 톤 공산당 지부로부터 후보자 명단을 승인받아야 하며, 촌장이 당원이 아닐 경우 활동상 제약이 있어, 그 민주적 효과는 제한적이다(Nguyen Hai Hong, 2014: 81-83). 또한, 타이빈에서의 농민 시위 이후, 국회사무처는 산하에 국민청원국을 두고 국민들의 청원을 접수하고 있다. 청원은 연간 2만건에 달했고, 이 가운데 토지 및 주택 관련 청원이 전체의 40%에 달했다 (Andersson et al., 2002: 25). 이러한 공산당 및 정부의 조치는 지방 수준에서 종적 책임성을 증진시키 는 데 부분적으로 기여하였다.
V. 결론
베트남은 1980년대 후반부터 경제개혁을 통하여, 경제적 침체로부터 벗어났고, 국민들의 경제적 수준도 향상되어 비교적 성공적 개혁을 수행해왔다고 평가된다. 반면 사회주의체제 자체를 유지하면서 정치체제는 근본적 변화 없이 부분적 변화만을 거듭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공산당의 목표와 탈 사회주의적 현실 간의 괴리는 여전히 상존하고 있다.
베트남의 현 체제를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 국유경제부문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30% 정도에 불 과하지만, 국유경제부문이 국가의 근간이 되는 기업들로 구성되어 있어 ‘사회주의성’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고, 공산당 1당의 정치권력 독점은 근본적 변화 없이 유지되고 있다. 반면, 국유경제부문의 침식은 지속 되고 있어, 국유부문이 국가경제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은 머지않은 장래에 소멸할 것이다. 따라서 소유제의 근본적 전환이 공산당 권력독점에 기반한 사회주의 정치체제에 조응하지 않을 것이라고 예상할 수 있다.
베트남에서 잔존한 긍정적 사회주의 가치는 무엇이며, 공산당의 활로는 무엇일까? 공산당의 지도하에 착취 없는 사회, 즉 유토피아를 만들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현재 없을 터이나, 그런 가 치가 국민들의 불평등을 악화시키는 상황을 제약하는 요인으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 다. 베트남은 역사적으로 민족주의에 기반한 사회주의 체제를 채택했기에, 국가의 독립과 통일의 지도세력 으로서의 공산당에 대한 신뢰는 적지 않았다. 이제 그 민족주의적 기반은 약화됐지만 아직 완전히 소멸했다고 할 수는 없다. 사회경제적 변화과정에서 공산당 1당 지배의 정당성은 침식되고 있고, 권력의 ‘독점적’ 성격에 대한 도전이 증가하고 있다. 공산당은 사회주의 개념의 외연을 확대하여 유연하게 적용함으로써 1 당 지배와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베트남 공산당과 국가는 공산당의 국가기구를 통한 지배, 입법·행정 개혁, 국회 기능의 강화 등 국가기관의 개혁을 통한 국가능력의 향상시키고, 공산당원의 건전한 혁명적 도덕성 회복과 내부적 민주(사회주의 민주)를 강화하여 도전들을 극복하고자 한다. 그러나, 베트남 사회주의는 사회주의 혁명정신을 갖춘 엘리트의 지배에 기반한 체제여서, 공산당 통치에 대한 자기 점검의 한계를 보인다. 사회주의체제 자체의 민주적 장치들이 미흡한 것은 분명하며, 공산당 권력에 대한 견제 메커니즘의 제도화 필요성이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