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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제5기 동인지
구/리/문/예/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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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싣는 순서
-권두수필/한명희지부장
-구리문예산책
시/서재환
수필/오경자
문학기행/김영숙(B)
-시반
기홍철:
김미영:
김승남:
김연래:
김영숙:
민경자:
박금희:
박승호:
백순례:
서양원:
안만강:
윤주영:
이선자:
이영숙:
이은숙:
이현숙:
진영희:
최인희:
홍정희:
-수필반
기홍철
김미영
김승남
김영숙
김태연
박승호
서양원
안만강
이선자
이선주
이영숙
이은순
이현숙
최인희
홍정희
[권두수필]
어린 영혼
韓 明 熙
어린이가 죽었을 때 우리는 흔히 ‘어린 영혼 고이 잠들게 하소서’ 하고 기도를 올린다. 이 기도대로라면 영혼도 ‘어린 영혼’, ‘젊은 영혼’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육신을 떠난 영혼도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젊어지고 늙어가는 것일까, 그리고 그 영혼은 어디에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할까.
연말정산에 필요하다며 딸아이가 떼어온 호적등본을 보다가 일 년 남짓 이 세상에 살다가 저 세상으로 간 넷째 남동생 중희(重熙)의 제적 난에 눈길이 멈추어졌다. 중희는 1950년 1월 20일 출생하여 1951년 3월 20일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까 정확하게 14개월을 살다가 간 것이다. 그러니까 6?25전쟁이 나던 해에 출생하여 다음해 3월 피난지에서 사망하여 그곳에 애총을 썼다고 한다. 1?4 후퇴 때 나는 부모님과 따로 피난을 하였기 때문에 피난에서 돌아와서야 그가 죽은 사실을 알았다.
그런데 그 후 어머니도 아버지도 중희의 죽음에 대하여는 한마디 말씀도 없었다. 그냥 가슴에 한으로 묻어두고 잊어버린 듯 지내셔서 우리 형제자매들도 그의 존재를 완전히 잊고 지냈다.
피난지에서 돌아온 후, 부모님은 2남 2녀를 더 두시어 우리 동기(同氣)는 6남 3녀가 되었으나 어려서 죽은 중희는 아예 빼고 우리는 8남매로 살아왔다. 아래 네 동생은 우리 동기가 처음부터 8남매로 알고 자랐을 것이다.
이렇듯 온전하게 그를 잊고 지내다가 우연히 호적등본 제적 난을 보고 그의 존재를 다시 기억하게 되었고, 그와의 인연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 어린영혼은 저승에서 우리 가족과 가졌던 인연을 기억이나 하고 있을까? 만에 하나 그 인연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이 세상에서의 인연은 저승에서는 하나의 물거품 같은 것인가?
동생 중희는 1년을, 어머니는 44년을, 아버지는 86년을 이 세상에 머물다가 저 세상으로 가셨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함께한 시간이 길어서인지 생전의 모습이 눈에 선하고 지금도 많이 보고 싶은데, 동생은 그 모습도 기억되지 않을뿐더러 애틋한 정이 가지를 않는다. 그가 이 세상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믿음이 가지 않을 정도이다.
죽은 동생의 영혼이 저세상 어딘가에 살아있다면 그의 존재를 철저하게 외면해온 가족에게 서운한 마음이 얼마나 컸을까? 얼마나 외로웠을까?
굿판을 벌려 그의 혼백이라도 불러다가 어린영혼의 넋두리라도 들어보고 싶다. 그러나 어린 동생은 말을 하기도 전에 이 세상을 떠났으니 무당의 입을 빌려도 푸념조차 들어볼 수 없다 생각하니 그 영혼이 더 불쌍하다. 그 불쌍한 영혼과 내가 피를 나눈 형제가 되도록 한 큰 인연은 필연이었을까? 우연이었을까? 그리고 기억에서 조차 지워진 그 인연의 의미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인연에는 지연(地緣), 학연(學緣), 혈연(血緣)등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중에서 피를 나누었기 때문에 맺어진 혈연은 사람의 힘으로는 끊기가 쉽지 않다. 피를 나누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사랑하고, 그리워하고, 용서하고, 이끌리는 마음이 생겨나 서로 아끼고 도우며 살아간다.
이렇듯 큰 인연으로 맺어진 동기인데 우리는 그를 잊고 살아왔다. 사실 우리 가족과 중희 라는 어린 영혼과의 인연은 그의 죽음으로 이미 끝났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한 살배기 영혼도 틀림없는 하나의 독립된 혼백인데 나와의 인연이 죽음으로 완전하게 소멸되어 없어진다면 나와 내 부모와의 인연도 똑같이 죽음으로 끝이 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렇게 크고 소중한 인연이 이승에서의 삶으로 모두 끝나고 무(無)로 돌아간다면 너무 허무하고 억울하지 않은가.
천병상 시인은 그의 글 ‘귀천’에서 이 세상살이를 갑갑한 마음을 풀기위하여 바람을 쐬는 소풍에 비유하고 있다. 그의 글대로라면 영혼은 그 본향이 따로 있고, 이승에서 이루어진 크고 작은 인연은 소풍 길에 스치고 지나간 바람에 불과한 것이 된다. 인간 삶이란 것이 그렇게 허망한 것인가.
영혼은 틀림없이 존재하고 불멸한다고 믿는 사람이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영혼이 저승에 가서는 이승에서의 모든 인연을 잊고 새로운 영혼으로 살아간다면 그 영혼은 이승을 떠날 때 이미 없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영혼과 영혼이 이승에서의 상호 관계를 모르게 된다면 이승에서의 가족이 갖는 의미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가슴이 답답해진다.
하여간 나는 영혼이라도 이승에서의 인연이 저승에서도 좋은 인연으로 이어지길 바란다. 그래야 이다음 내가 저승엘 가서 어린 동생의 영혼을 만나볼 수 있기 때문이다. 동생의 혼백을 만나면 그를 철저하게 잊고 지낸 일을 뉘우치고, 그를 외롭게 한 사실에 대하여 진심으로 사과를 할 생각이다. 그리고 꼭 껴안은 채 재회의 기쁨을 나눌 것이다.
근정전(勤政殿)
서 재 환(구리문예대학 강사)
경복궁 앞마당에 내려앉은 늙은 새다.
오백년 기운 하늘 나래 위에 지고 와서
흐려진 단청을 안고 깊은 잠에 빠진 새다.
아니다, 언제라도 날아오를 푸른 새다.
보신각종이라도 한번 꽝! 울려주면
다시금 하늘을 싣고 한껏 솟아오를 새다.
*근정전: 조선시대에 임금의 즉위식이나 대례(대례)식을 거행하던 궁전
보길도(甫吉島)
기름진 물결 속에 숨어사는 보길도를
파도 너머 찾으려고 선착장에 나와서면
어느 새 고산(孤山)갈매기 먼 수평(水平)을 열어준다.
뱃길은 한 시간 길, 파도 길은 삼백 년 길
거북 같은 작은 배가 흰 물살을 갈고 가면
당신의 도포자락에 저녁놀은 물들고.
세월은 구름자락 낙서제(樂書薺)에 앉아 있고
세연정(洗然亭) 산그림자, 귀가 밝은 파돗소리
풍랑 속 어부사사가(漁夫四時歌), 떴다 잠긴 보길도여.
돌아간다
오 경 자(고려대사회교육원교수. 구리문예대학강사)
가까운 길을 두고 먼 길로 둘러 갈 때 돌아간다고 한다. 갔던 길을 되돌아 올 때도 그렇게 말한다. 목적한 일을 다 마치고 집으로 갈 때도 돌아간다고 한다. 인생을 하나의 긴 여행길로 보았기에 우리는 죽음을 돌아간다고 말하는가 보다. 일을 끝내고 돌아갈 때 왔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 가기도 하고 다른 길로 가기도 한다. 걸어왔던 길을 차를 타고 돌아갈 수도 있다. 사람의 가는 길도 그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늙으면 애가 된다는 옛말을 들으면서 나이가 들면 어린아이처럼 생각이 단순해져 노여움도 잘 타고 그렇다는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늙어보지 못했을 때 그 정도의 생각밖에 못하는 일이 오히려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아직 늙는 일을 경험으로 말 할 수 있을 만큼은 못 늙었으니 무어라 말하기는 어려우나 노모를 지켜보면서 사람이 늙으면, 아니 늙는다는 일이 아이로 돌아가는 일임을 절감하게 되었다. 오던 길을 그대로 되짚어서 귀가하고 있는 것이다. 좀 일찍 세상을 뜨는 사람은 차를 타거나 다른 길로 가는 경우이겠고, 장수기간이 길면 길수록 철저하게 오던 길을 착실히 되짚어 가고 있는 것이다.
시어머니가 천천히 걸어 나오신다. 화장실부터 다녀 나올 것을 아무리 권해도 막무가내로 소파에 앉는다. 목욕을 시켜서 기저귀팬티를 갈아입힌다. 자신의 처지를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손 하나 까딱 안하고 아이처럼 목욕에 응할 뿐이다. 식탁에 앉아 아침을 잡숫고 방으로 안내하면 순순히 따라 들어가지만 이제 그만 들어가시라고 말로만 하면 아무 반응 없이 그대로 붙박인 듯 앉아있다. 귀가 어두워서 못 들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해 보지만 그래서만은 아닌 것 같다. 내가 왜 들어가야 한단 말이냐, 내 마음이지 네 마음이냐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앉아 있을 뿐인 것 같기도 하다. 겨우 방에 들어가서도 금세 도로 나와 식탁에 앉는다. 진지 잡수셨지 않느냐고 달래듯 말하면 고개를 젓기도 하고 어느 때는 언제 먹었냐고 묻기도 한다. 더러는 그래 안다고 끄덕이기도 한다. 아직은 식탐 많은 아이처럼 음식을 자꾸만 잡수려고 하지는 않으니 다행이다.
아이는 자라면서 대소변을 가려가기 시작하고 처음에는 의사표시만 하고 도움을 받다가 스스로 해결하는 발전을 보인다. 노인은 거꾸로 그 과정을 밟아간다. 요즘은 그 문제 하나 때문에 노인전문시설에 맡겨지는 노인이 늘고 있다. 자식의 기저귀를 기꺼이 갈아 길렀건만 그들은 그 일을 돈을 주고 맡기는 세상이 되었다. 시어머니는 아직 심하지 않아서 그냥 기저귀팬티를 갈아 입혀 드리고 거의 매일 목욕을 시켜드리는 정도로 우리가 모시고 있다. 대소변 문제가 지금은 약 두 살배기 수준으로 퇴화되어 있는 것 같다. 더 어린아이로 퇴화되어 버리면 어떻게 대처할지 우리 자신도 모른다.
사람을 알아보는 정도는 옛사람은 모두 기억하고 최근 사람은 모르니 이 부분은 딱 몇 살로 돌아갔다고 단정하기 힘들다. 8살짜리 증손자는 아는데 4살짜리 증손녀는 볼 때마다 누구냐고 묻는다. 거의 매일 보아도 마찬가지다. 아침이면 어김없이 우리 방문을 열어본다. 아이가 그러면 이렇게 찾아올 줄도 안다고 기특해할 터이지만 잠을 깨워 놓았다는 짜증이 밀고 올라올 뿐이다. 물고기가 배고프겠다며 고기밥을 주는 네 살배기 손녀를 보면서 새삼스레 지금 그 어른의 아이 되기가 어디까지 진행 되었나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종일 아이를 보아주면서 점심에 간식을 다 먹이고 난 직후에 아이가 고기밥을 찾아 먹이고 있으니 놀랄 수밖에 없다. 아직 세 돌도 채 안되었는데 저 먹을 것 다 먹고 나니까 고기가 배고프겠다는 생각이 들었나보다. 신통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해서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고기밥을 찾아들고 조그만 어항 앞으로 가더니 “배고팠지, 배고팠지” 하면서 아주 조금씩 고기밥을 뿌려주고 있다. 지금 저 행동에 시모님을 대입시키면 세 살보다 훨씬 어린 나이로 퇴화되어 있는 셈이다.
식탁 위의 프리지어가 희한하게 마른 꽃이 되어가고 있다. 분명 아직도 물속에 꽂혀있건만 꽃잎의 바깥 부분만 마르고 그대로 물기를 머금은 듯 보인다. 만져보니 아주 종이꽃처럼 말라있는 것이 아닌가? 지금 어머님의 상태가 바로 저 꽃 같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마음이 바스락거리는 것 같다.
죽음을 돌아간다고 생각했던 우리 조상들의 의식세계는 꽤 멋지고 낭만적이다. 자연의 순리대로 모든 것을 내맡기고 물 흐르듯 몸을 맡긴 생사관이다. 아주 천천히 오던 길을 되짚어서 돌아가고 있는 어머님의 미로학습이 언제쯤 끝이 날지 알 수 없다. 그때를 정하는 일이 인간의 소관이 아니니 하늘에 맡긴다고 초연해 하는 마음은 머리의 몫이고 언제쯤 별로 즐겁지 않은 노인의 아이 되기 관전을 마치게 될지가 궁금해지는 것은 가슴의 몫이다.
누구나 멋지게 돌아가고 싶어 한다. 택시를 타고 돌아가고 싶어도 자신에게 선택권이 없다. 날마다 고운 저녁노을이 하늘을 물들이지는 않는다. 고운 황혼이 내 것이 되기를 원하지만 그 또한 알 수 없는 일이다. 치매, 분명히 멀리 돌아가는 길인 듯싶다. 나는 택시를 타고 싶다. 그런 행운의 반열에 들고 싶다. 그나저나 지금 어느 모퉁이쯤을 돌아가고 있는 중일까.
[문학기행]
시대적으로 불행했던 여인
-허난설헌 묘 기행-
김 영 숙(B)
6월. 하늘은 가을 하늘처럼 푸르고 높았다. 저 맑은 남빛하늘 아래로 태양의 열기는 직선으로 내리꽂히고 산야는 푸르름과 이름 모를 야생화가 지천으로 흐드러져 피어있다.
허난설헌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일상을 탈출 모처럼의 야외학습장이랄까? 문학기행은 항상 가슴 설레이는 일이지만 기분이 상쾌하다.
오 선생님 이하 일행여러분들과 차 3대로 나누어 타고 경기도 광주시 초월면 지월리 소재 허난설헌묘 탐방 길에 나선 것이다
허난설헌 이름밖에 몰랐던 그분에 대한 지식이 나로서는 부끄럽다.
묘지 가까이에 오르니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작은 두 봉분이었다. 허난설헌의 아들과 딸의 묘였다. 그 옆으로 큰 봉분이 어머니 허난설헌 묘임에 왠지 가슴이 저미어온다. 이렇게라도 어머니와 아들과 딸을 한곳에 있게 해주는 것이 사후에 그분에 대한 안식이 되어주길 바라는 후대인들의 뜻일 거라는 생각에서다.
자식 잃은 애통해하는 시.
"아들의 죽음에 울다/비통한 피눈물에 목이 메인다." 하는 구절을 끝으로 맺는 시가 돌에 새겨져있다.
어린 시절 부모형제 밑에서는 더없이 행복하였고 총명함과 재능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이미 7세 때는 광한전 백옥루 상량문을 짓는 등 신동으로 불리어왔던 난설헌. 15세에 김성립과 결혼을 하면서부터 짧은 생을 마감하는 때까지 불행했던 ??을 살다간 그의 탁월한 작품세계는 400여년이 지난 지금 후대에 길이 영원한 향기로 남아 그를 찾는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열다섯 나이에 짐작이나 했겠소./조롱받는 사나이에게 시집갈 줄을" 한을 그대로 토해낸 시 구절이다.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의 풍류를 즐기고 외도를 일삼고 거기에다 고부간의 불화 학대와 질시, 뱃속에 있는 아기까지 잃는 아픔과 친정집에 아버지의 객사 오빠 동생의 옥사와 귀양 등 비극의 연속으로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으로 고뇌를 달래며 생의 울부짖음을 토해내야 했던 난설헌. 조선조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우뚝 서계시니 행복하였으나 불행하였던 여인 당신 앞에 우리는 이렇게 다가서 있습니다. 이런 저런 생각을 옆으로 하면서 그의 남편의 묘가 있는 곳으로 올랐다. 강렬한 햇살은 더해갔다. 양산을 펼쳤으나 열기는 여전하다.
김성립의 묘는 한눈에 보아도 관리가 안 되어있었다. 그의 묘는 잡초로 우거져있었고 그나마 후처와의 합장한 묘였다. 옆에 나란히 있는 봉분은 그의 동생 김정립의 묘였다. 윗대 묘가 있었지만 거기까지는 가고 싶지 않았다. 그곳을 내려오면서 씁쓸한 생각에 난설헌은 죽어서도 혼자이구나 싶었다. 그러나 아들과 딸이 앞에서 뛰노는 것 같아 억지로 위로를 삼아 본다. 관리가 잘 되어있는 난설헌의 묘와 남편의 관리되지 않은 묘가 산 사람들의 편견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것 같아 좀 그랬다.
묘지 앞으로 중부 고속도로가 있어 끊이지 않고 질주하는 차량들 소음이 괜스레 마음에 걸린다. 당신 계신 곳은 고요하고 솔 향내 나는 키 큰 적송이 울창한곳에서 산새노래하고 당신 시심이 여전한 곳이었으면 하는 욕심이 나만의 생각일까.
우리 일행은 소나무 그늘을 찾아 준비해가지고 온 음료수와 떡 과일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었다. 어디를 가게 되면 몸만 빠져나오기도 바쁜데 이렇게 준비를 해오신분께 고마운 마음을 넘어 존경을 표하고 싶다. 주부로써의 느낌이다. 습도는 없어 그늘은 시원했다.
점심을 먹으러 퇴촌으로 일행은 옮겨가야했다. 차창 밖으로 묘역에서도 그리했고 어디서나 흔히 보는 망초꽃이 하얗게 장관을 이룬다. '풀꽃임에도 메밀꽃 필 무렵에 소금 뿌려놓은 듯 하다.' 라고 효석이 표현했듯이 요란스럽고 소란스럽던 봄꽃들이 지면서 산하에는 하얀 풀꽃 들이 지천에 깔린 모습이다.
팔당호 물이 오늘처럼 시원해 보일 수가 없다. 물이 반가웠다. 30도가 넘나드는 요즈음 땡볕이 차안에서도 고통이다. 물이 내다보이는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우리일행은 집으로 왔다. 집 가까운 교보문고에 들려 허난설헌의 책을 주문하니 서점이 큰데도 비치가 안 되어 있었다. 준비해 놓겠다고 전화번호를 적어놓고 가랜다. 며칠 후 소설로 된 책 일, 이권을 사가지고와 읽고 있다.
조선에 태어난 것을 한스럽게 여겼던 여인, 여자로 태어난 것을 원망스럽게 여겼던 허난설헌 그는, "스물일곱송이의 아름다운 부용꽃/ 달빛의 찬 서리에 붉게 떨어지네," 한 시대를 잘못 태어나 자기의 이상을 한껏, 펼치지 못하고 못다 한 삶을 짧게 마감한 시대적으로 불행한 여인이다. 지금 이 세대를 만났다면 정말 뜻을 펼치고 멋진 그의 이상적 반려자가 있었을까 하면서 괜스레 울적한 기분이다.
그와 전연 거리가 멀게만 느껴지는 내 삶은 평범함 그 자체이기를 바라고 들녘 지천으로 피인 들풀 꽃처럼 스러져갈 삶일망정 앞으로도 마냥 소박하고 정겨운 삶을 살다가기 바랄뿐이다.
기 홍 철
텃 밭
밭 갈고 이랑 낸 다음
된장에 상추쌈 생각나
상추씨 한 줌 뿌리고
자식인 양 돌봤더니
늙은 손
섭섭지 않게
상추들이 욱었다.
비 그친 뒤 한결 더
너울너울 싱그러워
한 줌 따들고
먼 구름 바라보며
남은 날
생각해봤다
씨 뿌리고 가꾸는 삶.
*욱다/욱었다: [형]식물 따위가 안쪽으로 조금 우그러져 있다.
우리 가락 좋은 가락
-소리향에 부쳐
아차산 한다리 골에서 우리 가락 울려오네
저마다 몸의 악기로 쏟아내는 인생 곡조
그 곡조 내 노래 같아 핏줄처럼 감겨오네.
팝송에 유행가에 다 잊은 줄 알았는데
더덕 같은 우리 가락, 도라지 같은 우리 가락
한 줄기 스쳐만 가도 마음결이 흔들리네.
우리네 눈물, 탄식 또 아니면 분단 겨레
그것도 가락에 실으면 한 필 펼친 비단 되어
눈부신 꽃밭만 같네, 찬란한 슬픔 같네.
김 미 영
어머니
딸에게 들킬까봐
거친 손 숨기시며
모조리 도와주고
길 떠나신 뒷모습이
자꾸만
아른거리네.
눈시울에 감기네.
참 새
오늘도 참새는 그 지리에 혼자남아
백미러 속 제 모습 안 잊으려고 부딪히고
부리로 대답이 없는 거울만 쪼아댄다.
지나가는 참새들이 길동무 하잔데도
참새는 그 자리를 떠날 생각을 않는다
어미를 잃어버린 듯 눈망울이 촉촉하다.
가끔씩 찌르르 가늘게 우는 참새
다가가 손 내밀면 두어 번 힘겨운 날갯짓
내일은 날아오르렴. 물과 모이를 준다.
김 승 남
오 월
임 떠난 오월에
다시는 또 다시는
올수 없는 상처가 난 하늘.
새소리 물소리에
임의 소리가
저 만큼 비켜 갈지라도
오월에 연이 끊긴
애달픈 통곡들이여!
오늘따라 아스라한 날의
햇볕이 왜 이리 그리울까!
그 대
그대 없는 이 봄에도
새는 울고 꽃은 핍니다.
가슴을 파고드는
아리고 쓰린
고통의 상처.
이제 일어나 내 손을
잡아 주오.
김 연 래
핸드폰
적막한 액정화면에
간만의 당신 소식
“봄꽃이 찬란하다”
보내온 마음 받고
해종일
강북하늘로
고개 기울었습니다.
진달래
누가 슬쩍 던져놓고
숨어 보고 있는가
싹도 안 핀 마른 가지에
황진이 분홍치마
바스락!
상사병 든 바람이
산 밑에서 기어오른다.
김 영 숙
동백꽃
날 선바람 흰 눈보라 담금질에 또 담근질
그 고통이 잉태한 눈부신 빛깔인가
혹한을 이기고 핀 얼굴 초경같이 붉어라 .
추수(秋愁)
벌레 먹은 나뭇잎, 누더기 같은 영혼을
화정(火定)불에 누이면 무슨 향기가 날까
숨차게 달려온 세월 만수향(萬壽香)으로 타오른다.
*화정(火定): [불교]불도(佛道)를 닦은 사람이 열반(涅槃)할 때에 몸에서 맹렬(猛烈)한 불길을 내는 선정(禪定).
**만수향(萬壽香):[불교]여러 가지 향료(香料) 가루를 반죽하여 국수발 같이 가늘고 길게 만든 향으로 부처 앞에 태우는 향.
민 경 자
바 보
시작선과 끝선만이 보일뿐입니다.
분명한 건 중간선이 있어야 끝선이 있는 것인데
왜 그들은 중간선을 볼 줄 모르지요.
시작선에서의 넘치는 격려
끝선에서의 화려한 영광.
중간선에서는 무슨 일이….
자-알 보세요.
중요한 기적은 어디에서 일어날까요.
맨드라미와 바보
그 많은 곳을 두고
어쩌면 넌
콘크리트 사이에 네 몸을 묻었니.
‘바보야,
그 길은 갈 수 없어.
그냥 잘 닦인 신작로를 이용해.’
그나마 비바람만이 불 때야
넌 겨우
물 한 모금 마시는구나.
수풀 속을 헤치고 나온
이름 모를 꽃 한 송이에도
넌 행복해 하는구나.
너의 강인한 삶이
그 메마른 땅에서
꽃까지 피울 수 있을지 몰라도
비록 바보로 비춰질지언정
그 행복한 웃음은
분명 너에게만은 큰 기쁨이겠지.
박 금 희
홍유릉을 거닐며
어깨 적시며 내리는
차가운 이 빗물이
통한의 백년세월
못 지울 눈물이라면
그 왕조 쩌렁한 목소리는
연못의 뜬 부초인가
넝 쿨 장 미
넝쿨장미는 겁 많은 겁쟁인가
아니면 부끄럼쟁이인가
하얀 펜스 틈사이로
발그레한 저 얼굴들
푸른 잎
닫았다 열었다
자꾸 밖을 내다보네
나무그림자
나무는 춤을 췄다
제멋대로 흔들었다.
허한 내 가슴도
그림 자되어 흔들렸다.
흰 커튼
무대를 등지고
제 곡조를 흔들었다.
박 승 호
어머니
검푸른 뻘밭 위에 기역자로 사신 어머니
굴 조락 포개 이고 더 얹던 옹차신 몸
세월도 꺾을 줄 알았는데 저 지팡이 누구신고
*조락: 칡넝쿨로 만든 광주리.
** 뻘: 개펄
수종사
수종사 차향기가 일품이란 말을 듣고
다산과 마주앉아 신선 한 번 하려는데
설익어 달이 차지 않아 상상으로 마셨다
오백 년 은행나무 의연함 어디가고
멍이 든 손가락 사이 윙윙대는 바람소리
풍경도 고단함 달래듯 구슬프게 따 알랑
온 누리 귀불에 담아 고르로운 무량수불
선머슴 속살 꺼내어 굽히며 관음보살
부처님 큰 열탕 안에 때 묻은 몸 담근다
백 순 례
솔비알 언덕
다채로운 감각들이
감성에 노크하는
우리 그리운 날
앞서거니 뒤서거니
다정스레 거닐다가
쪼그리고 앉아 들여다 본
파란 세상이 거기에 있었지
온통 셋 뿐인 논리 속에
네잎크로바 찾아 나서던
유년의 꿈
가슴을 비집고 들어가
그 속에 나를 끼워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약속의 꽃반지
솔바람 스치던
비탈진 언덕에 추억 쓸어 모아
둥지를 틀고 소나무 향기어린
솔비알에 솔개비로 눕고 싶다
*솔비알 : 소나무가 있는 비탈진 아름다운 언덕
복수초
삶의 텍스트
해답을 찾아
나의 촉수는 언제나
한 곳을 향한다.
스스로 자초한 굴레
뼈 속 까지 저려오는 아픔
우리의 운명이라 하자.
당신의 손짓에
망설임 없이 따라 나선 것은
순전히 사랑 때문이었다.
사유(思惟)의 뜨락은 좁아도
어름 속에서
우리가 피워낸 것은
그래도 꽃, 꽃이었다.
서 양 원
중년일기
자동차 전조등이 하나 둘 켜지는데
다가선 어둠처럼 스며든 삶의 무게
어느새 밀려온 고독 치렁치렁 매달리네.
바람도 멈춘 이 밤은 지친 몸 더 가라앉고
쓴 소주 한 잔하며 시린 마음 달래는데
갈등은 한숨에 섞여 소리 없이 흐느끼네.
한창 때 품은 야망 시들어 허전한데
일상은 어제처럼 오늘도 흘러가고
이 밤에 황촛불 하나 빈 방 안에 홀로 타네.
촉석루에 앉아
시원한 강바람에 젖은 땀은 가시는데,
살며시 감은 눈에 떠오르는 님의 모습
향국한 당신의 혼이 노을되어 붉게 타네.
푸르른 남강물결 옛과 같이 변함없고
임진란 님의 체취 의암위에 그대론데
잰물살 오리보트는 무얼 찾아 헤메는가
사백 년 새긴 한이 비바람에 닳기도 전
강 건너 우뚝선 도시 밤을 새워 휘청이니
가신 님 칠만 영령 앞에 향불 다시 피우리.
안 만 강
약수터 가는 길
바람도 시원하고 새소리도 정다워라.
약수터 가는 길은 길이 나를 이끕니다.
나무들 푸른 손을 내밀며 반갑다고 흔듭니다.
감로수 맑은 약수 한 바가지 떠 마시면
모종배추 늘어졌다 비 맞고 기운 차린 듯
한 팔십 고목나무도 어깨 절로 들립니다.
무 상
인생은 일장춘몽 또한 구름 같으니.
멱살 잡고 아웅다웅 살아야 하는가.
어느새 구름이 가고 태양 밝아 오는데.
윤 주 영
마른꽃잎
찻물 속에 몸을 담근 노란 국화꽃잎하나
따끈한 물이 좋은가 은은한 향을 흘린다.
말려둔 해맑은 가을 고스란히 풀어낸다.
이 선 자
그 해 겨울
명왕성이 행성에서 제명 되었던
지난해 끝자락
그가 죽었다
하회탈처럼 웃는 지난시간
사진 속 추억만남기고
호적에선 그의 이름도 지워 졌다
너희에겐 순간이
나에겐 영원이라고
무릎 밑에 넣어둔
비애를 끄집어 내던 날
하얗게 하얗게
잠들었던 눈발들도
섬뜩 놀라
일어나 앉았다
주인 잃은 승용차는
진눈깨비를 맞으며 울고 섰고
떨어진 갈잎은 바람에 구르며
제살들을 부셔냈다
그 해 겨울
아파트 베란다에 가지런히 놓였던
빈 술병은 그의 영원한 부재에
그리움을 담아낸
언니의 눈물이 얼어있었다
뒷모습
목숨을
누가 잠깐 가져갔다가
되돌려 놓았으면
어릴 적 구멍가게에서 뽀리 하고
골목 어귀로 도망갔다가
차마 먹지 못하고
제자리에 가져다 놓은 것처럼
삼베옷 저고리 곱게 차려입고
일곱 마디 동여맨 끈에
노자 돈 넣어 드린 것
편도 (片道) 아닌
왕복 차비였으면
돌아오지 못할
문지방 넘어 가던 날
투정 한번 하지 않던
문지방도 저 만치
따라 나서며
엎드려 통곡하는데
오봉산 골짜기에
아버지 분골 뿌리고
내려오는 하늘엔
젖빛 연무(煙霧)가
아버지 마지막 뒷모습
거두어 들여간다
*뽀리: 훔치다
이 영 숙
앵 두
수줍어 수줍어서
잎사귀에 숨었어요
바람이 지나가다
슬며시 들춰보면
빨개진
얼굴이 얼른
초록 문을 닫지요
보리밭
가느단 바람결에도
깔깔대는 한장 바다
숨은 이랑 속에
종달새 한마리가
꾹 참다
푸른 이랑하나
일으키며 날아가요
이 은 순
산소 앞에서
한 자리 앉았어도
천리만큼 멀던 당신
도리질했던 그 침묵이
가족사랑이었다니!
마음 문
벌써 열리고
눈시울은 젖습니다.
가깝고 멀다는 것도
마음 한 장 차이런가.
내 생각 앞이 가려
바라봐도 안 뵈더니
오늘은
구름 너머의
당신 모습 환합니다.
이 현 숙
퇴원하면서
석 달을 병원에서 지냈던
문성이가 퇴원하면서 말했다.
- 엄마, 하느님 사랑 내가 독차지 했나봐. -
곁에 있던 엄마가
쉬이!
입술에 손을 갔다댄다.
누워있는 친구들을 보면서
문성이가 제 주둥이를 때린다.
- 아유, 이 바보! 바보! -
아 침
귓구멍으로 쏙 들어온 녀석은
간지럼 태우다가
이윽고 꽹과리 놀음이네
베란다의 사랑초
눈 비비며 하품하다 들켜
부끄러운 듯 얼굴이 벌겋네
하늘도 푸우푸우
세수를 했는가
티 없이 맑은 얼굴
오늘은 어떤 색깔이 될까
민들레 홀씨처럼
가볍다
주 여 진
마로니에
바람이 불곤 했다
머리카락 사이로 불꽃 하나가 집을 짓고는
머리 속 깊이 뿌리를 묻었다
날마다 하얀 진통제 한 알과 꼬리도 없는
시간을 털어 붓고는 입을 다물었다
바람은 불씨를 흔들어 섞거나 머리 속을 샅샅이
뒤집어 놓고 태연하게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아무도 사랑한 적은 없다
떨어지지 않는 날들을 부대끼며 왔지만
누구를 위한 흔들림도 아니었다
지금까지 나를 위해 산적도 없다
찢어지고 깨어지면서도
추스르고 아물리고
상처 몇 개 쓱쓱 문지르고 다시 날마다
다시
돋아 오르곤 했다
구멍 뚫린 어깨에 햇살이 머무를 때까지
새로운 아침이 올 때까지
아무 눈짓도 없이
바람이 불고
보호막은 어디에도 없었다
증오하나 만들고 새 집 짓고
부러지도록 버텼다
후들거리지 않는 다리를 위해
이파리 뚝뚝 떨어뜨리는 연한 가지
드러낼 그때까지
러브레터
하루를 다 밝힌 오후의 햇살이 포근하다
한 평생을 다하고 다음 생을 기다리는
재활용 창고 앞에서는
바람도 조용하다
먼지가 한 쪽으로 밀려있는 계단을 내려가서
사람들의 손때로 반들거리는 손잡이를 민다
가마니마다 살아온 날들의 모습대로 쌓이고 우글거려
안으로 짓눌린 욕망처럼 묶여있는 주둥이
살짝 비집고 우유 통을 떨어뜨리자 아이의 키처럼 한 뼘 자란다
날짜 지난 신문 잡지를 종이 상자에 던져 넣는데
오래 전 받은 편지 한 장
맥없이 떨어진다.
너 없는 동안 달라진 건 없다
늘 평온하고 따뜻한데
물관이 막혔는지
가지가 버석거리더니
물이 몰린 뿌리가 부어오른다
바람이 불어야 꽃이 피고 잎이 나는 구나
네모 반듯이 접혀진 모양새며 꾹꾹 눌러쓴 정성이
쉽게 닳거나 헤질 것 같지 않은 나날이었는데
조그만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저녁 햇살에
먼지가 흔들리고 내 손도 떨렸다.
진 영 희
담벼락 꽃
벽 쌓을 때 벽 틈에다 드문드문 심은 풀꽃
죽으면 어떡하지? 싹 안 나면 어떡하지?
겨우내 맘 졸였는데 얼굴 환히 내밀었다.
고것 참, 쬐그만 게 내 발걸음 붙잡네
벽 틈에 심은 것이 산 것만도 기특한데
저것 봐 어김없이 나와 봄볕 속에 웃는 것 봐
나의 시
기를 쓰고 뻗은 날개
포물선 하나 휘감고
눈부신 하늘 보지 못한 채
내리꽂히는
종이비행기
상처를 동여매고
또 다시 비상을 시도하지만
먹구름 속에서
다시 곤두박질치는
종이비행기
짧은 반경의
질긴 테두리만
수없이 오르내리다
가슴팍에 생겨날 모터 소리에
귀 기울이며 날갯짓하는
종이비행기
최 인 희
나무의 속삭임
온갖 나무들이
모여 살지만
숲은 조용하기만 하다.
서로의 영역 표지는 없다
등을 맞대고
팔을 어깨에 걸치고
그렇게 어울려 산다
가지와 가지가 싸우지 않으며
숱한 바람에 흔들리고
더러는 피복이 벗겨져도
상대를 탓하지 않는다
뿌리와 뿌리는
서로 손을 뻗어 꽉 잡는다.
발자욱 소리가 크다고 초인종이 울리고
주차선을 침범했다고 경비실 인터폰이 울린다
나무가 속삭이는 소리가 들린다
숲을 만들자고 .
베개 냄새
아내의 베개를 베고 혼자 누워 있다가
문득 베개에 밴 아내의 냄새를 맡는다.
그 옛날 굴뚝냄새 같은, 엄마의 젖 냄새 같은
가만히 눈 감으면 냄새는 타임캡슐
묻어둔 시간들이 부스스 눈을 뜬다.
남이섬, 동해모래밭 선남선녀 떠오른다.
홍 정 희
승 무
산문 밖 깊은 인연 등지고 돌아서니
피안을 향한 마음 어엿쁜 춤사위
고해의 땅을 디디고 나비되어 오른다.
장 미
아침 새소리에
창문을 열뜨리니
밤사이 담장 위에
씻은 듯이 고운 얼굴
덜 깬 잠
뿌연 눈 안 개
한 순간에 씻긴다
기 홍 철
세 월
지난 토요일 우리 교회 성도의 확신과정을 마친 수료자들에게 남성합창단이 "세월"이라는 노래를 불러 주었다. 가사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세월은 나를 보고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가라고 하더니/ 이제는 쉬어가라고 뒤돌아보라고 또 깨달으라고 하네./ 정신없이 달리다보니 내 어리석음은 빛이었던가 아니면 어둠이었던가./ 아쉬움만 맴도는 곳에서 꺼내보고 기대면서 살려 했는데 / 그저 바람처럼 흘러가버렸네 / 바람처럼 흘러가버렸네."
대부분 합창단원의 나이가 50대에서 70대로 구성된 직장 은퇴자들이나 자영업자들의 모임이어서 이 노래가 갖는 의미가 남달라서 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노래로 부른다. 그래 노래를 부르면서 서로 공감이 가서 부르고 또 부른다.
직장생활을 한지 30년을 한 곳에서 보내었지만, 이 가사처럼 아쉬움만 남고 자신의 진정한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산 것이 이제 와서 후회스럽다. 사람은 누구나 나이가 들면 활동할 수 없게 되고 몸이 허약하게 되며, 모든 쾌락을 거의 앗아가며 죽음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강박관념에 사로 잡혀 외롭고 쓸쓸하기 만하다.
그러나 키케로는 "노년에 관하여"라는 그의 책에서 이를 하나하나 반박하고 있다. 즉 큰일은 체력이나 민첩성이나 기민성이 아니라 계획과 명망과 판단력에 의하여 이루어진다. 그리고 기력이 떨어지는 것은 늙어서라기보다는 젊었을 적의 방탕 때문인 경우가 더 많다. 늙어서 허약한 것이 아니라 청년과 장년 시절에 절제하지 못한 결과다. 또한 쾌락의 부재는 저주가 아니라 축복이다. 욕망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자제력이 설 자리가 없고 쾌락의 영역에서는 그곳이 어디든 미덕이 존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울러 죽음은 전혀 나이를 가리지 않는다. 노인이 죽음에 가깝고 청년이 죽음으로 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은 착각이다. 혼탁한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조용하고 순수하며 우아하게 삶을 가꾸는 일을 하라고 권면한다. 그렇다 훌륭하게 살았다는 의식과 훌륭한 일을 많이 행했다는 기억으로 ‘노년이 즐겁다’라고 생각하고 즐겁게 노년을 맞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 현명하다고 본다.
요즘 보험전문 손해사정인으로서 온갖 사건 사고관련 피해자들과 상담하다보면 세상의 온갖 애환을 다 겪는 기분이다. 무보험에 오토바이 무면허로 배달나가다가 물적 피해와 인사사고로 피해자로부터 손해배상을 요구받았는데, 이에 대한 대책을 물어 오는가 하면, 보험금 수령을 둘러싸고 부부가 서로 자기에게 보험금을 지급해 줄 수 없는가하고 묻기도 하고, 공사장에서 일을 하다 위에서 쇠뭉치가 날라들어 두개골 골절과 인지장해로 살아가는 가장에게 어떻게 하면 보험사로부터 보상을 적정하게 받아 낼 수 있을까 하는 등 이루다 열거할 수 없다. 그들에게 위로하고 마음을 달래주며 차근차근 그 절차를 말해주면 고맙게도 감사하다고 한다. 여기에서 진정한 삶의 보람을 느낀다.
자, 이제 새봄과 더불어 움츠렸던 마음을 펴고 재충전하여 새롭게 출발하자 나이가 들면서 젊음이 아름다워 보이고 식물의 씨앗에서 새싹이 나오는 것이 신비롭지 않는가. 우리도 젊었을 적에 그런 적이 있었지 그렇지만 나이 들어 보는 세상이 더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가. 이른바 내적 성숙의 미와 관조의 미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나옹선사는 완숙의 경지에서 이런 시를 썼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 창공은 나를 보고 티 없이 살라하네 /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 가라하네”
두고두고 음미해 볼 말씀이어서 민요조로 외어 가며 노랫가락으로 배운다. 또 한 번 앞서 세월이라는 가사를 생각하며, 그 동안의 공직생활의 경직된 삶에서 현재의 여유롭고 한없이 낮아지는 자신을 반추해 볼 때, 내 비록 젊은이들처럼 활동적이지는 못하지만 스트레스 받고 있지 않는 지금이 행복하다. 하지만 세상을 살다보면 또 무슨 일을 당할까 알지는 모르지만 앞으로 닥칠 상황이 아무리 어려워도 현재에 자족하며 감사하자. 하나님은 우리에게 감당할 만한 시험을 주셨다. 오늘에 성실하자.
2007.4.9
김 미 영
아버님과 머리 방울
며칠 전에 곱게 기르던 딸아이의 머리를 단발로 잘라 주었다. 바쁜 아침 시간에 매일같이 머리 때문에 실랑이를 하느라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아깝지만 찰랑이던 긴 머리의 미련을 버리고 결단을 한 것이다. 미용실을 가지 않겠다던 아이도 단발머리가 마음에 들었는지 신이 나서 뛰어 논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짝이 안 맞는 머리 방울 들을 정리하다보니 잊고 있었던 아버님과의 추억이 아련히 떠올라 가슴이 저려온다. 십여 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님은 줄곧 형님이 모셨는데, 조금씩 아프시던 형님의 허리디스크가 갑자기 악화되어 수술을 하셔야 했다. 당장 아버님이 계실 곳이 필요했다. 형님이 아프시니 동생들 형편 뻔히 아시는 아주버님도 어쩔 수 없는 대안으로 다른 집에서 한 일 년 정도만 모시기를 바랐다.
젊어서 게으름과 노름으로 가족을 건사하지 않으셨던 아버님인지라 아들들은 아버지에 대한 애틋함도 없을뿐더러 아버님을 모시는 큰형 덕에 부모에 대한 자식으로서의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며 살고 있었다. 지금까지 큰아들이라는 이유하나로 형님과 아주버님이 모시고 사신 것이다. 새삼 그분들의 존재가 커 보였다.
형님과 나, 아래로 동서가 둘이 있다. 순서대로 하자면 내가 모셔야 하는데 남편의 실직으로 물질의 어려움에 있던 때라 아버님을 모시기 어려웠고, 아버님도 우리 집엔 죽어도 안 오신다고 하셨다. 가족회의 끝에 직업군인인 바로 아래 동서네로 아버님이 가셨는데 가신지 얼마 안 되어 전화가 왔다. 동서가 아버님을 도저히 모실 수 없다고…. 모시는 동안 삼촌이랑 크게 다투고 이혼얘기까지 오간 것 같다.
오래전에 큰 수술을 하셨던 아버님은 항문을 쓸 수 없게 되셨고, 옆구리로 대장을 조금 빼서 주머니를 차고 사셔야 하셨다. 이런 환자들의 경우는 수시로 배설이 되기 때문에 주머니를 자주 갈아주어야 하는데 주머니 값이 비싼 편이었다. 자식들이 용돈을 여유 있게 드려도 술값으로는 아끼지 않으신 분이 주머니 값은 아까운지 그러시지 말래도 꼭 빨아 쓰셨다. 약간 치매가 있으신 아버님은 뒤처리를 잘못하셔서 욕실의 벽과 바닥에 배설물을 튕겨 놓았던 것이다. 평소 집안을 쓸고 닦는 일에 몸을 아끼지 않았던 깔끔한 동서는 많이 힘들었던 것 같다.사실 나와 동서들은 말로만 들었던 일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형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지 그런 분을 싫다 좋다 내색 않고 모셨으니….'
오갈 데 없는 아버님은 어쩔 수 없이 우리 집에 오시게 되었다. 마침 우리 집에 붙어있던 방 하나가 비게 되어 그리로 모셨다. 우리 집에 안 오신다던 아버님이 걱정이었다. 형님 없는 집에 혼자 계시겠다는 아버님을 매월 얼마의 돈을 보내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라며 겨우 설득할 수 있었다.
아버님을 모시는 일 년이 십년 같았다. 한번은 하도 해드릴게 없어서 수제비를 해드렸는데, '나는 수제비는 절대 안 먹는다.' 하시면서, 받은 용돈으로 막걸리와 군것질을 하시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보기 싫던지 아버님이 얄미웠다.
“내가 빨리 네 형님한테 가야지….” 속상해하시는 아버님은 음식솜씨 좋은 형님 생각이 간절 하셨던 것 같다. 술 취하신 아버님의 눈가에 그리움과 힘든 생활의 고달픔이 하나로 엉긴 눈물이 흘러내렸다.
육체의 고통가운데 놓인 형님과, 물질의 어려움 속에서 아버님을 모셔야 하는 나, 죽어도 오기 싫다던 둘째 아들에게 계셔야 하는 아버님, 우리 세 사람은 바로 앞에 닥친 삶의 현실 앞에서 피할 수 없는 상황들을 받아들여만 했다. 아버님이 우리 집 형편에 익숙해지고 아버님의 냄새나는 옷을 빨아도 냄새를 느끼지 못할 만큼 편해질 때 사건이 일어났다. 가끔 치매를 보이셨던 아버님이 평소 잘 다니시던 길을 잃어버리고 행방불명이 된 것이다. 9일 만에 찾은 아버님의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고 그나마 지탱하고 계셨던 정신까지 아예 놓고 마셨다. 형님은 단걸음에 오셔서 더럽혀진 아버님의 몸을 씻기시고 모셔가셨다.
우리들은 일주일에 한 번씩 돌아가면서 형님네로 가서 아버님을 돌봐 드렸다. 창문이 방문인지 알고 넘나들던 아버님은 그날도 나를 보시고는 창문을 넘어 돌아 나오셨다. 아버님이 나를 보고는 형님 눈치를 살피시더니 형님네 딸아이들 방으로 가셨다. 그리고는 무엇인가 의미 있는 웃음을 지으시면서 나를 부르셨다. 어찌 보면 그 모습이 어린아이의 해맑은 모습과도 같았다. 아버님은 둥그렇게 움켜쥔 주먹을 펴시면서 형님 몰래 주는 시늉을 하셨다. 그것은 형님네 딸아이의 머리 방울이었다. 말씀도 잘 못하시던 아버님은 내게 형님 몰래 가져가서 딸에게 묶어 주라고 하시는 것 같았다.
가난한 우리 집 계실 때 아버지로서 아무것도 해주지 못하는 것을 마음아파 하셨던 것이다. 부모의 마음이라는 것이 이런 것일까? 모든 기억뿐 아니라 자신의 존재조차도 잃어 가시던 분의 생각 속에 그때의 내가 남아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아버님의 가슴속에 묻어두었나 보다 무언인가를 사주고 싶은 마음을….
웃으면서 쥐어 주시던 머리 방울 위로 뜨거운 눈물이 떨어진다. 이제 진짜 며느리의 역할을 할 수 있었는데 아버님은 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으셨다. 아버님의 장례를 마치던 그날 밤 아버님이 웃으면서 주시던 머리 방울 생각에 가슴이 미어져 형님에게 갔다. 아버님의 이야기를 해 드렸더니 형님도 아버님 생각에 목이 메신다. "그래도 일 년을 모셨다고 정이 들었구나." 하시면서 그때 아버님을 모셔 주어서 정말 고마웠다고 말씀하신다. 짧은 일 년이지만 아버님을 모실 수 있었던 환경이 감사했다. 그 시간들이 없었다면 나에게 시아버지라는 이름은 귀찮은 존재로 남겨 졌을지 모른다. 아무 느낌도 없이 애틋한 정도 없이.
내 손에 쥐어진 딸의 머리 방울을 보면서 그날 아이처럼 천진난만하게 웃으시던 얼굴이 지워지지 않아 가슴속으로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김 승 남
20년 만에 당신에게 쓰는 편지
"아빠!
내가 너무 너무 보고 싶지 않으세요.
나는 아빠가 보고 싶어서 오늘밤 많이 울었어요.
울고 또 울었어요.
삼촌이 왔다가서 더 울었어요.(88년 7월)"
"아빠가 무척 보고 싶어 엄마도 울고 나도 울었다.
우리 세 식구만 자면 잠이 안 온다.(89년 3월)"
10여 년 전, 큰 아이 초등학교 일기장에서 이 글을 보고 나는 무척 울었답니다.
이렇게 예쁜 두 딸을 남겨 놓고 떠난 당신.
하늘나라에 있는 아빠한테 이 편지를 꼭 보내리라 했던 당신의 큰딸이 벌써 25살이 되었어요.
당신이 가신지 20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이 편지를 쓰며, 아련한 기억을 떠올립니다. 당신과 내가 처음 만난 때는 82년 6월에 선을 보고 2개월 만에 약혼식을 10월 10일에 화촉을 밝혔으니 우리의 인연은 어느새 25년이 되었네요.
우리의 신혼은 실로 달콤했었지요. 그리고 사랑의 결실인 첫아이가 태어나던 날 행복해하던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둘째 아이가 첫돌을 지나고 겨 발자국을 띠던 그 모습도 보지 못하고 이승의 인연을 끊은 당신. 그때는 슬픔이란 단어로 표현하지 못할 정도의 아픔이었습니다. 가정의 달 5월에 나는 무슨 죄가 있기에 저주스런 운명의 여자가 되었는지 당신을 원망해 봅니다.
당신이 교통사고가 나던 20년 전 5월 19일 봄밤은 왜 그리 추웠는지 모릅니다.
주검으로 만난 당신. 흙속으로 들어가는 당신의 모습을 보며, 나는 정신을 잃고 당신의 맨 얼굴이 환영으로 보였을 때, 그때가 끝이었습니다. 깨어나니 장례가 끝나고 두 딸과 시어머니, 친정엄마, 언니만 남아있더군요. 너무 허무해서 울음도 허무해지더군요. 그날을 정말 잊을 수가 없네요.
어느새 세월은 흘러 20년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참고 견딜 수는 있지만 아이들 맘속에 당신이 살아있어 당신에 대한 그리움으로 꽉 차있는 아이들을 보면 견딜 수가 없습니다.
늘 가슴에 남아있는 당신에게, 내 가슴 깊이 큰 추억으로 간직한 당신께 예전에 써놓았던 일기가 있어 눈물을 훔칩니다.
"보름달이 환히 비추는 날 큰 아이가 말했다.
엄마 저 달은 왜 구름이 포옹을 했어? 엄마 난 저 달을 보면 괜히 슬퍼져….
날개가 있으면 아빠한테 날아가 만나고 싶어…."
아련한 아빠의 모습을 떠 올리며 응석을 부리는 그때의 아이의 모습에서 저는 더 용기를 얻었고, 아비 없는 자식이라고 남들의 눈총은 받지나 않을까 늘 노심초사 했습니다.
하지만 편모슬하에서도 훌륭하게 자란 것은 당신이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지켜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큰 아이가 스물다섯, 둘째아이가 스물 둘. 그 아이들을 바라보며 지금보다 더 꿋꿋하게 살아가렵니다. 오늘도 당신의 제사상을 폅니다. 그리고 저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영원히 사랑할 것입니다.
-2007년 5월 19일 당신의 20주기에 당신을 사랑하는 아내가
김 영 숙
다리를 건너며
요즈음 날씨가 회색 구름을 머금고 낮게 드리워진 것이 비가 올 모양이다.
하느님이 심기가 불편하신가. 올 여름은 유난히 덥고 장마철에 비가 많이 온다는데, 벌써 걱정이 앞선다. 몇 년 전에 해마다 침수로 우리 가게에도 수마가 덮쳐 피해를 입어 보상도 못 받고 시청에 가서 데모한다고 사진을 찍고, 피해민 도장을 받아 동장 이하 몇 사람이 대표로 간다느니 하더니만, 흐지부지 아무 결과 없이, 감감 무소식이 된 적이 어디 한 두 번 이었던가. 이제는 하수도도 보수하고 도로도 넓히고 있어 걱정 없을 것 같다고 모두들 위안의 말을 한마디씩 한다.
다리를 건너면, 사람들은 어김없이 다리 아래 물을 꼭 한 번씩 내려다보는 습관이 있는 것 같다. 늘 다니는 다리지만 나도 사람들이 난간을 붙잡고, 고개를 숙이고, 자전거를 기대어놓고, 가던 길을 멈추고는 “뭐가 떨어졌나.” 하면서 다리위에서 낚시라도 하는 사람을 보면 “피라미라도 잡혔나” 궁금한 얼굴로 다리 아래를 내려다본다.
운수좋은 날에는 몇 년에 한번 비가 그친 뒤 운무 속에 신비롭게 빛나는 오색 무지개도 본적도 있고, 강둑에 앉아 세월을 낚는지, 시간을 낚는지 모르지만, 팔뚝만한 잉어의 힘찬 물소리, 아가미를 파닥거리는 생명의 안타까운 몸부림도 본다. 바람도 한 점 없는 아열대 끈적거리는 여름밤 야광 조릿대에 매달려오는 참게도 간혹 볼 수 있다. -그들은 참게라고 우긴다. 잘은 모르지만…. ―잠 못 드는 여름밤. 강둑에는 어김없이 돗자리를 펴놓고 먹을 것에 가스버너까지 가져와 돼지고기 굽는 냄새가 진동하고, 드러눕고, 엎어지고, 이건 아예 피난살이하러 나온 수재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어스름 노을이 질 때면 아주 가끔은 자살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는 한강다리 위에 놓인 누군지 주인을 알 수 없는 신발을 생각하며, 삶의 고단함이 다리위에서 목숨을 팽개치도록 힘들었을 까라는 연민에 우울해지고, -투신자살을 부르는 자석이라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오렌지색 금문교 위에서 실제 자살한 사람을 찍었다는 자살바위라고 명명되어 슬픈 곳도 가보고 싶고, 파리 세느강의 미라보다리 위 젊은 연인들의 애틋한 로망도 부러워지고, 프랑스에서 가장 높다는 미요(millau)다리의 운해로 가득한 아름다운 장관도 보고 싶고, 템즈강을 가로지르는 타워브리지 -매춘과 자살문제로 도보할 수 없게 폐쇄 된- 야경도 보고 싶고, 시드니의 하버브리지 -낡은 옷걸이라는 낭만적인 애칭-의 아름다운 다리도 건너가고 싶다.
워털루다리의 비비안 리의 마지막 라스트신이 생각나며, 이 나이에도 멋진 로망이 부러워 진다는 것이 새삼스럽다.
어느 유명한 소설가는 춘천의 강가에 집에서 기르던 물뱀 한 마리를 놓아버린다는 표현이 너무 좋아 나도 송사리라도 잡아 기르다가 방생이라도 해주고 싶다는 생각한 적이 있다.
물의 네 가지 덕성 중에서
모든 생물을 씻기고 만물을 흐르게 함이 인(仁)이요. 맑은 것은 떠오르게 하고 탁한 것을 휘둘러 찌꺼기를 제거함은 의(義)요. 부드러워도 범하기 어렵고 나약하여도 이기기 어려움이 용(勇)이며, 강을 인도하고 넓히면서 가득 찬 것을 미워하고 겸손하게 흐르는 것을 지(知)라 함이라했다.
필리핀 지진 해일 쓰나미로 수많은 목숨과 경제적 손실, 해마다 홍수로 물난리가나서 수재민에 집과 재산을 날리고 망연자실하는 우리나라의 현실, 지구 온난화로 더 몸살 앓는 지구, 치산치수로도 어쩔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드러내는 재앙이 아닌가 보다.
강 아래로 흐르는 노을을 담뿍 담은 은비늘이 반짝반짝 이고, 물결이 찰방찰방 내 곁으로 온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서민의 애환과 서글픔 고통 애증을 안고 유유히 흐르는 무심한 아리수(한강)를 바라보며, 세월이 흘러도 어김없이 강물은 흐를 것이고, 인간의 삶의 편의와 교통수단으로 아름다운 다리는 탄생할 것이며, 세느강의 미라보 다리위에서 젊은 연인들의 사랑은 익어 갈 것이고, 한강 다리위에서 바라다본 노을은 어느 시인의 시상을 통해 불멸의 명시를 탄생시킬 것이다.
붉은 줄장미가 흐드러지게 펴 장미향으로 행복한 유월의 망중한을 즐기며, 장미꽃을 다리난간위에서 한잎 두잎, 나풀나풀 떨어뜨리며 하염없이 흘러가는 세월을 바라본다.
내가 아는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의 남은 생이 행복하고, 아름다운 생이 되길 마음속으로 빌어본다.
김 태 연
우렁이 잡던 아이
초등학교 5학년 때의 일이다. 수업이 끝나기 바쁘게 논둑으로 달려갔다. 집 앞에 펼쳐진 못자리 논과 모심기 위해 물을 가두어놓은 논에 띄엄띄엄 두엄(거름) 무더기가 놓여있고 따뜻한 봄 햇살에 살금살금 기어 나온 우렁이가 두엄 가에 모여 있다.
'엄마 우렁이, 새끼우렁이, 아빠 우렁이도 있겠지….'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책 보따리를 풀어 책은 논둑에 던져놓고 책보자기를 허리에 질끈 묶고는 우렁이를 잡기 바빴다. 한참을 잡다가는 더 많이 잡고 싶은 욕심에 그만 작은 집 논 못 자리 판엘 들어가고 말았다. 정신없이 주워 담기 바쁠 때 산 및 언덕 위에서 한참 높은 작은댁 증조할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90세가 되시는 호호백발 할아버지는 호랑이 할아버지. 발 빠르게 논둑으로 달음질쳐 나와 꺼내 놓았던 책 위에 개미들을 얼른 쓸어내고 옆구리엔 책을 한 손엔 우렁이 보따리를 뒤 돌아볼 사이도 없이 한 달음에 집으로 향했다.
잡아온 우렁이들은 흙을 뱉게 하기 위해 쌀을 씻는 자배기에 담아 물을 채워놓고는 다시 보리새우를 잡으러 말박(쌀을 한말정도까지 씻을 수 있는 큰 바가지)과 얼개미를 들고는 우리 마을 둠벙(웅덩이) 중 가장 큰 작은댁 포강엘 갔다. 이 포강엔 한쪽으로 잔디가 자연적으로 물에 잠긴 언덕이 있고 배수로 쪽에는 발동기로 물을 빼는 웅덩이와 나무로 만든 방천이라는 것이 있다. 말박을 논 가운데 바르게 중심 잡아 놓고 새우 잡이를 시작, 보리새우는 한 번에 반 공기 정도씩 잡혀 올라왔다.
커다란 바가지에 절반가량이 차도록 신바람 나게 잡고 있는 중에 '쏴~아' 하는 소리와 함께 힘겹게 당겨 들어 올리다가 순간 너무나 놀라 "으악" 비명과 함께 얼개미를 포강에 던져버리고 말았다. 물뱀(율무기) 두 마리가 엉킨 채 얼개미안에 떠억 하니 새우와 함께 들어가 있는 것이었다. 놀란 가슴이 진정이 안 돼 허겁지겁 꼬불꼬불 논둑 밭둑을 지나 집에 도착했으나 어찌나 내달렸는지 입에 침이 말라 입 밖으로 말이 나오질 않았다.
엄마 한번 부르기를 "어어어, 어어엄, 어엄마…." 깜짝 놀란 우리 엄마. "얘야 왜 그러니" "어어엄마…. 배배배배앰…. 뱀뱀…. 배미…." 한참을 버벅거리다가 자초지종을 이야기하니 어머니는 잔걸음으로 포강으로 가서 말박에 잡아놓은 새우를 보시곤 "아니, 얘야 이 많은 새우를 네가 잡았단 말이냐?" 하시며 대견해 하셨다. 그런데 나는 뱀 때문에 내팽개쳐 버린 얼개미 속에 담겨있던 그 많은 새우를 버린 것이 아까워 발을 동동 굴렀다. 포강에 던져진 뱀이 어찌 따라온다고 그리도 허둥지둥 집까지 뛰어왔느냐며 다시는 혼자서 포강엔 가지 말라던 어머니.
이제는 오랜 세월이 흘러 십 여일 후엔 88세 미수연이시다. 십 팔세 정월 보름날 김씨 가문 며느리로 들어오셨다는 우리 어머니, 한살 아래 신랑 덕분에 회갑은 여행으로 대신하고 긴 세월 투병 생활을 하시던 아버지 덕에 우리 8남매가 수시로 모였다 흩어졌다를 여러 회 반복하다보니 칠순은 등 넘어 남의 집 잔치요, 팔순에는 만리타국 브라질에 가있는 장남과 아직은 모자란 내 탓에 속만 태우고 지나갔다. 85세 되신 우리 엄마 기념사진 한 장 찍어드리려니 축하객 없는 쓸쓸하고 삭막한 모습이 되겠기에 내 회갑이라는 이름으로 가까운 지인들을 모셔 조촐한 연회 자리를 만들었다.
비록 내 옷은 물빨래하는 싸구려일망정 실크로 지어올린 고운 보라색 한복을 입고 계신 우리 어머니, 그 모습이 어찌나 온화하고 자상해보이시던지, 내 입가에 행복한 미소가 번진다. 시간이 흘러서도 지금 이 모습이 항상 내 마음 속에 남아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든다. 73세의 나이로 하늘나라로 가신 우리 아버지, 지금쯤 어머니의 이런 모습을 내려다보시며 예전처럼 실눈 뜨고 '씨익' 웃고 계실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제 큰 딸 덕분에 평생소원 풀었다던 어머니, 영정 사진도 이 사진으로 수의도 보랏빛 한복으로 꼭 챙겨 입혀 달라 시던 말씀하시며 수시로 사진을 꺼내보시고는 흐뭇해하신다. 노환으로 몸이 편찮으셔서 88세까지 사실 것 이라는 확신이 없었기에 85세에 준비해드렸는데 다행이도 미수가 다가온다.
이제 우리 8남매 모두 모여 고향 마을에 가서 동리 어른들과 친족들 모시고 잔치할 일만 남아있다. 어머니의 미수연을 차릴 수 있다니 고맙고 감사한 마음에 눈시울이 젖어온다.
논에서 우렁이 잡던 15세 단발머리 소녀가 이제 환갑을 훌쩍 넘기고 나이 들어 온 세월을 생각하니 감회가 새롭다.
박 승 호
이끌지 못한 아쉬움
문학 공부를 하려고 시간 맞춰 강의 장소로 가다가 우연히 옛 직장에서 함께 일했던 선배와 마주쳤다. 어언 이십여 년 만에 만난 것이니 그 얼마나 반가우랴! 그도 머리에 서리가 내렸고 나 또한 다를 바 없었으니 많은 날들이 흘러가버린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게 했다.
“정 선배님, 아! 박ㅇㅇ 맞지.” 둘은 금방 알아보고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얼싸안았다. 이산가족 재회 장면과 다를 바 없었지만 우린 하루가 시작되는 아침인지라 명함만을 주고받은 채 좋은날 잡아 대포한잔 나누기로 약속하고 아쉬움을 뒤로한 채 헤어졌다. 어찌 보면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이렇듯 세상이란 참으로 넓은 것 같기도 하고 좁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어 시간의 수강을 끝마치고 사무실에 돌아와 손수 차 한 잔을 타서 마시며 창밖을 바라보는데 어쩐지 아까 만났던 선배에 대한 생각이 영 지워지질 않았다. 초임 발령통지를 받았던 판촉부 시절부터 영업소 등 자리를 옮겨 다니면서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함께 근무 했었다.
직장은 조직사회라 선의경쟁을 통해서 만이 자기와 직장의 발전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또한 상사와 부하가 신뢰를 바탕으로 일사불란한 체계 속에서 유기적인 관계가 조화롭게 형성 되었을 때, 발전의 토양은 더욱 튼실해 질 것이다. 이런 목표를 달성하려고 두 사람은 부단히 노력했고, 청춘을 바치다시피 열정적 이였다.
어느 해인가 지방 영업소로 발령이 난 적이 있었다. 좌천이 된 것으로 생각 했으나 그 불찰은 내게 있었으니 누굴 탓할 수 없는 일. 아마 더불어 걸어야 할 때 홀로 걷는 것처럼 처세에 능하지 못했던 것을 깨닫고 반성하며 함께 걷는 모습으로 변할 것을 다짐해 보기도 했다. 직장인은 누구나 좋은 부서에서 일하기를 바라는 마음은 한결같은 것. 나 역시 같은 마음이었으며, 그렇게 오지근무가 계속되고 있을 때 선배 덕택으로 본사에 복귀하여 함께 일하게 되었다. 그 후 중간 관리자의 꽃(맡고 싶은 직함)이라 일컫는 영업소장으로 진급하는데 까지 힘을 써준 일들을 생각하니 좋은 이미지만 떠올랐다.
??성실함이 크게 어필 했다네. 그것이 천거한 이유야.??하며, 당시 내게 했던 말이 어제 한말처럼 생생히 기억나기도 했다. 세상일이란 열심을 다해도 인정받기가 그리 쉽지 않는 현실인데도 살펴준 그 마음이 무엇과 비교할 수없이 크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나는 당시 당연한 것인 양 가볍게 여기며 지나쳐 버렸다. 지금 와서 생각하니 인생경험과 경륜이 부족하고 사려 깊지 못한 지난일이 못내 아쉽다. 사람이 받기는 쉬워도 베풀기는 그리 쉽지 않은 모양이다. 내가 남을 보살필 능력이 있을 때 받은 사랑을 나누어주는 배려가 내게는 없었던 것 같다.
얼마 전 부산에 사셨던 큰고모가 별세하여 문상을 갔다가 고종사촌 동생과 대화를 하게 되었는데??형께서 예전??S??회사에 근무할 때에 저를 이끌어 줄 수 있는 여건을 가졌으면서도 소극적이어서 야속하다는 생각을 했었다??고 털어놓은 것이었다.
맞는 말이었다. 다가서지 못하고 이기적이었던 것에 대해 후일 많은 갈등을 겪은 적이 있었다. 이 동생은 상업학교를 나와서 갓 제대 후 내게 취직을 부탁 했었고, 마침 그때 내가 근무 하고 있는 회사에서 공개채용이 아닌 보충인원을 추천에 의해 모집을 하고 있었다. 대학출신이 아니어도 상업학교 졸업자는 가능하도록 기준이 정해졌고, 내게도 추천 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 된 상태였다. 그런데 그때 내 속마음은 신원보증에 대한 부담과 조직 내에서 친척에 대한 역작용을 지레 예단하는 속 좁은 사고방식을 가졌던 것이다.
믿음을 갖고 이끌어 주지 못한 그때 일이 미안하다. 하지만 그는 지금누구 못지않은 탄탄한 일가를 이루고 있으니 기분이 좋다. 그것으로 위로를 삼는 이 마음 또한 이기심인지도 모른다.
이처럼 주로 받기만 하고 주는데, 인색한 삶을 살아온 것에 대해 부끄럽고 앞으로는 트인 세상을 보는 안목으로 남을 배려하고 더불어 사는 것에 많은 관심 기울이고 살아갈 것을 다짐하며 수화기를 집어 든다. 급하지 않은 업무는 뒤로 미루고 선배와 옛날로 돌아가 막걸리와 어울리는 분위기 좋은 곳을 찾아 회포나 풀어야겠다. 철들자 망령이라더니 이제 베풀 힘도 보살펴 줄 능력도 약해 졌지만 이제라도 깨닫게 됐음에 감사한다. 사방을 살피고 미력하나마 나의 도움이 필요한 곳을 유심히 찾아보자. 저녁노을이 깃든 창가에서 그와 함께 드는 막걸리 맛이 유난히 좋아 단숨에 잔을 비운다.
2007년 3월
서 양 원
주홍글씨
전화 저쪽의 음성은 사촌형님이었다. “그만 두고 서울로 올라와라” 그 금속성목소리는 순간 나를 석고상처럼 굳게 만들었다. 현장 소장과 나는 회사 일로 인해 기싸움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형님은 나에게 은인과도 같았다. 가난과 정신적 부재를 함께 책임 져야 하는 가난한 집의 장남으로 한 치의 희망도 없이 내일을 걱정하던 시절, 형님은 건설회사의 간부로 사우디에 파견되어 본부장을 하였고, 건설이라고는 아무 것도 모르는 나를 사우디에 취업시켜 주었다. 작렬하는 태양과 '할라스 바람(죽음의 바람)' 속에서도 다른 사람보다 몇 배 열심히 일했던 것은 형님의 배려에 보답하는 마음에서였다.
삼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향수에 젖을 땐 노래를 부르고 솟구쳐 오르는 가족생각에 긴 밤을 뜬눈으로 보낼 땐 시를 쓰며 그리움을 달랬지만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가고픈 심정 다잡는 비련 속에
시련을 움켜쥐고 번뇌 하는 마음이여
피폐해진 가슴은 열병을 앓고
추슬러진 평정 뒤에도 고통 이지만….'
그러나 귀국을 하고 나니 적잖은 실망이 나를 기다렸다. 돈벌이를 하지 않던 부모님이 송금해 준 돈을 곶감 빼먹듯 써버렸기 때문이었다.
“돈은 또 벌면 되지요” 이렇게 말은 하면서도 가슴 한켠에 서운함이 너무 컸다. 삼 년 이란 세월 동안 여우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딸은 얼마나 보고 싶었던가, 남들은 일 년하고도 개선장군처럼 의기양양하여 처자식 품으로 귀국 하는데, 일 년 또 일 년을 연장하며, 돌아서서 흘린 눈물 은 또 얼마였던가. 그 모질고 아픈 세월을, 오로지 귀국 후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청사진 삼고, 참고 또 참았었는데, 그 허탈감은 열풍으로 쇠약해진 몸과 마음을 더 아프게 했다. 잠을 자다가 벌떡 일어나 쓴 소주에 화를 달래는 날이 많아졌다. 누구는 사우디 일 년 다녀와 집을 샀다는데, 누구는 장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번다는데, 이런 소리를 들을 땐 더욱 화가 치밀었다.
사실, 나는 결혼을 하고 바로 군대엘 갔었다. 그래서 이별의 아픔, 그리움이 얼마나 절절한 것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제대하고 삼 개월도 안 되어 또 사우디에 갔으니 그 삼 년을 인내 하는 동안, 마음고생이 어떠했겠는가. 그러나, 어떤 사람은 사우디에 갔다 와서 마누라도 잃고 돈도 잃었다는데, 그에 비하면 나는 젊음도 있고, 변함없이 나를 사랑하는 마누라가 있지 않은가….
'그래 피 할 수 없다면 즐기자.'
이렇게 생각하며 차츰 마음의 평정을 찾고 있을 때쯤, 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전남 여천공단에 현장 소장으로 있으니 오라는 것이었다. 그곳에서 회사직원으로 임명되어 노무관리를 맡아 일하게 되었다. 열심히 일했고 실력을 인정받아 진급을 눈앞에 두고 있던 때, 형님이 회사를 그만 두고 당신의 회사를 설립한다며 같이 하자고 했다. 다니던 회사가 상장회사라 그만 둔다는 것이 아까웠지만 형님에 대한 믿음이 컸기에 망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형님과 금이 가는 계기가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형님이 설립한 회사가 잘 안 되면서 회사 내부에 알력이 생긴 것이다. 현장소장은 나로 하여금 자기를 감시한다며 불만을 표출했고, 형님은 출근을 하기 위해 외투를 입고 있던 나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허탈함과 우울함에 몇 날 며칠 밤을 잠을 이루지 못했지만 마음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와 친구의 도움으로 술 도매업을 하게 되었다.
삼사 년 잘되던 도매업이 하향 길로 접어들어 전업을 하려고 고심하던 중 친구의 삼촌이 찾아왔다. 건설하는데 쓰는 쇠파이프를 재활용하여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기계를 발명했는데 실용화 할 단계에서 스폰서를 구하고 있는 중이라고 했다. 호기심을 가지고 공장을 가보고 또 실제로 작동되고 있는 현장에도 여러 번 가보았다. 상당한 메리트가 있다고 판단하고 투자하기로 마음먹었을 때 형님 생각이 났다. 형님이 하던 회사가 잘 안 되어 정리 중이었고 건설 회사의 생리를 잘 아는 분이었기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였다. 형님에게 전화를 했다.
"좋은 사업이 될 것 같으니 투자를 해 보시는 것이 좋겠어요."
며칠 후 형님이 오셔서 회사를 두루 살피고 현장에도 가보시더니 마음의 결정을 내리고 투자를 했다. 그러나 사업은 시행착오 끝에 투자한 돈을 모두 날리게 되었다. 가뜩이나 하던 사업이 안 돼 힘든 상황에 투자한 돈까지 날리게 되자 형님은 상실감이 큰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은 얼마만의 돈이라도 달라는 뉘앙스를 풍겼지만 나는 못들은 척했다. 가장 어려운 시기에 있을 때, 항상 힘이 되어 주었던 형님의 축 처진 어깨를 보며 가슴이 아팠지만 나 역시도 많은 돈을 잃었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십 년이 훨씬 지난 지금도 형님의 처진 어깨가 눈에 선하게 밟혀 나의 가슴을 아프게 한다.
'헤스터 프린'의 "주홍 글씨"처럼….
안 만 강
장자못 산책
아침 햇살이 화사하였다. 며칠간 꽃샘추위와 눈비가 오락가락 하는 변덕스러운 날씨로 출입을 못하고 있다가 산책길을 나섰다.
청명한 날씨다보니 상쾌한 기분에 발걸음도 가벼웠다. 중천에는 반달이 떠오르는 아침햇살을 받으며 정겹게 둥실 떠있다. ‘장자못큰길’에 이르러서 아차산을 바라보니 지척에 우뚝 서있는 광개토대왕의 동상이 눈에 다가왔다. 웅장한 자세로 북방을 향하여 굽어 살피는 엄숙한 정경이다. 아차산은 고구려사에 온달장군이 전사한 유적지기도하다. 갑자기 중국의 동북공정(東北工程)생각이 뇌리를 스치며 역사를 왜곡하는 작태가 섬뜩해진다. 우리역사를 지켜야 되겠다는 사명감을 절감 한다.
‘고구려의 기상, 대한민국 구리시’이는 시의(時宜) 적절한 구리시의 상징인 것을 새삼 느꼈다. 나직한 목소리로 ‘고구려의 기상….’을 외쳐 보았다.
교문2동 동사무소 앞을 지나 ‘장자못길’을 걸어 장자 못에 이르렀다. ‘장자못’은 나에게 아름다운 추억이 있다. 그 옛날 2,30대 적에 친구들과 함께 낚시와 천렵을 즐기던 곳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50여년 전일이다. 당시의 이곳 행정관할 명칭은 ‘양주군 구리면’에 속했다. 지금의 서울 중랑구 중화동까지가 구리면이던 시절이다 보니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역은 축소하였으나 알차고 아름다운 고장이 되었다.
‘장자못’ 이름은 그대로나 형태는 탈바꿈 하였다. 자연생태 그대로이던 장자못이 이제는 현대화된 시민의 쾌적한 휴식공간으로 정서함양과 체력향상에 기여하는 복지시설로 큰 역할을 하고 있다. 흐르는 물도 한강상류 다목적댐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고 항상 관계 기관이 시설관리를 열심히 하여 만족스러운 혜택을 누리고 있다.
못을 끼고 둑길을 걸어갔다. 무심코 잔잔한 수면을 내려다보았다.
풍경이 아름다웠다. 청둥오리, 원앙이 줄지어 이리저리 오고가며 잠수놀이도하고 활개도 치면서 유유자적 하고 있다. 평화롭고 사랑스럽다. 둔치에는 진달래, 산수유가 성급히 꽃 몽우리를 터뜨려 애인을 반기듯 미소 짓고 있다. 스피커에서는 가곡의 선율이 조용히 흘러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무아의 경지에 이른 기분이다. 나는 산수유 꽃 몽우리와 눈을 마주치며 행복을 느끼었다.
고개를 돌리다보니 천상병시인의 ‘귀천’시판이 보였다. 시를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천상병의 ‘귀천(歸天)’은 하늘나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어렴풋이 이해가 된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과 닿으며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 에 손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 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 하며는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다고 말하리라”
이슬, 구름, 소풍이 아름답게 그려져 있다. 인생살이를 소풍으로 여기면 얼마나 마음이 편안할까? 흔히 인생살이를 아침 이슬, 또는 뜬 구름 같다고도 하였다. 자연과의 교감 생과사의 융화감이 흠뻑 느껴진다.
불가(佛家)에서는 “제행무상( 諸行無常)이라 가르치고 금강경에서는 사구게(四句偈)로 범소유상(凡所有相)이면 개시허망(皆是虛妄)이요. 약견제상(若見諸相)이 비상(非相)이면 즉견여래(卽見如來)”라 하였다. “무릇 상(相)은 다 헛되고 망령된 것이다. 만약 모든 상(相)이 상이 아닌 줄 알면 진실을 깨닫게 된다. 욕심을, 성냄을 버리고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했다. 진리인 듯하다.
목교(木橋)가 바라다 보인다. 황토색깔로 단장한 아름다운 모양이 이제라도 한강으로 항진할 유람선 같이 정겹다.
‘장자못’의 유래도 예사롭지 않다. 욕심 많고 심통 고약한 장자라는 부자가 어느 날 시주를 구하러 온 스님 발우에 쇠똥을 퍼주었다. 스님은 노여움도 없이 합장인사를 하고 가려는데, 착한며느리가 스님의 발우를 깨끗이 씻고 정성껏 보리쌀을 시주하였다. 스님이 이집에 변고가 있을 것이 예감되어 착한며느리를 살리려고 뒤를 돌아보지 말고 나를 빨리 따라오라 당부하였다. 스님을 따라 ‘아차산’을 향하여 올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뒤에서 천둥번개가 치면서 굵은 소나기가 쏟아지자 착한 며느리는 스님의 당부를 잊고 집에 있는 가족들이 걱정되어 그만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 며느리는 돌이 되었고 장자가 살던 집은 사라져 그 주위가 지금의 ‘장자못’이 되었다고 한다. 우리에게 선행과 악행의 본보기를 가르쳐 주고 있다. 장자는 어찌 되었고, 그가 살던 집터자리는 어디였는지, 철없는 상상을 하여본다.
먼 하늘을 바라보니 흰 구름이 두둥실 흘러가고 있다. 저 구름도 언젠가는 비구름으로 변하여 대지를 적셔 줄 고마운 인연의 존재라는 생각이 떠오른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공생하다는 진실의 의미를 느껴본다. 어느새 ‘장자교’를 지나 ‘선행교’에 이르렀다. ‘선행교(善行橋) 이름 마저 좋다!.’ 적선지가(積善之家)에 필유여경(必有餘慶)이라 하였다. 나와 남이 하나같다는 덕목으로 자리이타(自利利他)의 아름다운 삶을 희구(希求)해 본다.
'장자호수공원표석'아래에서는 흘러내리는 폭포수가 맑은 물을 쏟아 내고 있다. 물 풀숲에서는 물고기들이 행복하게 놀고 있다.
나무, 꽃, 새와 물고기들 그리고 사람이 함께 어우러져 아름답고 청정함이 마치 정토(淨土)인 듯싶다.
‘살기 좋은 구리시! 장자못아! 영원 하라!’
2007.3.12
이 선 자
진달래
시선을 창문에 고정시키고 아무생각도 할 수 없을 때 연분홍 물감을 풀어 놓은 듯 수채화 같은 풍경이 눈앞에 들어왔다. 예뻤다. 진달래꽃이 살며시 내게 미소를 지어 보인다. 아버지의 웃는 모습처럼….
꽃피는 춘 사월에, 진달래꽃을 유난히 좋아 하시던 아버지는 우리 곁을 떠나셨다. 병상에 누워 계시면서 한 겨울에 진달래꽃을 꺾어와 방에 꽂아 달라 시던 아버지의 지친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려 눈시울이 또 붉어진다. 유골함은 아버지의 고향 땅인 배후령터널를 지나 오봉산에 멈췄다. 산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니 청평호가 보인다. 여기가 아버지의 고향땅이란 생각에 가슴이 또 한 번 울고 있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가자, 춘천으로 가고 싶다.” 라고 말씀하시던 곳이 여기구나, 결국엔 고향땅엘 돌아가셔서야 오셨다. 아버지의 유골함에 손을 넣고 뼈 가루를 한 움큼 쥐었다. 따뜻했다. 고통을 베고 불쏘시개로 누운 자리에서 나온 온기지만 아버지의 체온을 느끼는 것 같아 남아있는 눈물이 또 터져 나왔다. 연분홍 진달래가 미풍에 시름없이 나푼대는 모양을 작은 빗방울이 톡톡 건드려 본다.
아버지의 목숨을 그저 바라만 보고 하늘에 기대야 하는 내가 고작 할 수 있는 일은 물 몇 방울 입에 넣어 드리는 일과 목까지 차오르는 가래를 섹션 해드리는 일 외엔 아무것도 없었다. 아버지를 바라보며 아껴 써도 얄팍해지는 시간은 항상 내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었고 시름시름 시들어 가는 거대한 고목은 내 마음을 겨울 갈잎처럼 누렇게 말려만 갔다.
답답한 어둠속에서 뒤틀리고 일그러진 아버지의 숨소리가 허공을 울리면 딸인 내손은 아버지를 쓰다듬는 손으로 모든 걸 대신 해야만 했다. 이렇게 아프더라도 우리 곁에 계시기만 해달라고 일 년 만, 몇 달 만이라도 애원하던 욕심은 아버지를 붙잡고 있어서 더 고통스럽게 한다는 생각에 어느새 아버지를 편안하게 보내야겠다는 마음으로 기도를 해본다.
그러나 병간호 하는 몇 달에 지친 마음으로 아쉬운 미련마저도 내게 합리화 시켜 나를 옹호했던 것은 아니었는지 죄책감이 밀려온다.
그렇게 아버지를 보내고 아버지의 그리움으로 다시 한 번 설움이 복받쳐 눈물이 봇물터지 듯 흘러내린다. 사랑한 만큼 마음도 그만큼 아프겠지. 산을 내려오니 비는 그쳤지만 하늘은 낮 빛을 삼켜 버리고 젖빛 연무(煙霧)가 장관을 이루고 있다. 하늘엔 아버지가 드리워져 물들어 있었다. 하늘을 향해 아버지를 불러본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이 선 주
전화위복
오늘은 병원생활의 마지막 날이었다. 선생님께선 수술부위가 잘 아물었으니, 이제부터는 목발을 짚지 말고 조심스럽게 걷고 근력운동을 열심히 하라고 말씀하셨다. 두발로 조심스럽게 걸어보지만 한동안 목발을 의지해서인지 걸음 걷기가 두렵다. 재활치료를 시작하라는 말씀이 제일 반가운 말씀이었으며, 이번 사고로 인해 많은걸 깨닫게 되었다. 우연한 사고는 언제든 일어날 수 있어 항상 조심해야 한다. 사고로 본의 아니게 후천적인 장애를 갖게 되신 분들의 아픔과 어려움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며 건강한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를 실감했다. 그분들의 사회적인 어려움들과 고충을 진심으로 헤아릴 수 있을 것 같다.
사건의 발단은 올 삼월에 친구들과 검단산에 갔다가 하산 길에서 넘어진 일이 시초였다. 하긴 사흘간 피죽 한 그릇 못 얻어먹은 것처럼 자주 넘어지곤 했는데 이번엔 강도가 좀 심한 것 같았다. 며칠 병원엘 다니며 치료를 받았더니 괜찮은 것 같아 다시 일요일마다 산엘 열심히 다녔다. 산에 오른다는 것은 힘들지만 기쁜 일이다. 처음엔 힘들어 후회하며 오르고 이윽고 정상에 도달해서는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겼다는 성취감에 뿌듯했고, 하산 길에 마시는 시원한 막걸리 한잔. 그야말로 멋진 보너스다. 산을 다녀 본 분들은 다 그 맛을 알 것이다. 거의 중독되다시피 매주 가는 산행이었다.
여전히 뭉근하게 아픈 다리로 밤시장과 새벽시장에 물건을 사러 다니며 일요일엔 산엘 갔다. 그러길 한 두어 달이 되었고 갈수록 아픈 강도는 심해졌다. 견디다 못해 게으르게 미뤄오던 병원엘 가서 진료를 받으니 심한 상태라 MRI를 찍어야만 정확히 알 수 있다고 했다. 부랴부랴 사진을 찍고 보니 당장 수술을 해야 한단다. 연골부위가 깨어진 것을 모르고 지나다가 악화 된 것이다. 수술 날을 잡고 병원에 입원하던 날, 웬 비는 청승맞게 쏟아지는지 심란한 마음과 두려움에 저절로 눈물이 났다. 수술은 무사히 끝나고 매일 바쁘게 지내던 습관 때문인지 답답하고 지루했지만 며칠이 되자 익숙해졌다.
입원 할 때 준비해간 몇 권의 책들을 고스란히 덮어둔 채 아무 생각 없이 쉬었다. 어찌 보면 내게 필요 한 것은 이런 휴식이 아닐는지. 결혼해서 근 이십여 년 동안 장사하느라 정신없이 살아선지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쳐있었다. 충분한 수면과 정시에 하는 식사시간에 잘 적응하며 불만 없는 날들을 보냈다. 오죽하면 문병오시는 분들마다 혈색이 좋아져서 예뻐졌다고 하니 이는 아마도 잠시 끊었던 술자리 덕분이 아닌가도 싶다. 아무튼 나름대로 나만의 시간을 불만 없이 의미 있게 잘 보냈고 이제부턴 재활치료를 잘 받아 예전처럼 걸을 수 있기만 바란다.
병원생활을 하면서 옆 침대에 계신 분들과도 정이 듬뿍 들었는데 입원하신 언니 한 분은 조카네 과수원에서 배나무 봉지를 싸다 사다리에서 떨어져 오른쪽 팔에 깁스를 했다. 나는 다리만 제대로 못쓰니 손 쓸 일이 생길 땐 내가 해주고 식판을 내다 놓는다던가하는 다리 쓸 일엔 언니가 내다 주는 등 서로 친하게 지냈다. 생판 모르던 사람들이 스물네 시간을 좁은 공간에서 지내야한다고 생각해보라. 서로의 개성이 강해 불편하였을 텐데 동병상련의 마음이어서인지 다행히도 한 달 동안 정이 많이 들었다. 일주일 먼저 퇴원한 언니는 내게 문병도 와주었다.
지나간 일이지만 작년 가을에 어머님이 많이 편찮으셔서 이십 여일 병원에 입원해 계셨는데, 장사를 핑계로 우리 부부는 자주 찾아뵙지 못했다. 그랬는데도 어머님께선 밉다 않으시고 불편하신 몸으로 병원에 있는 동안 집에 오셔서 남편과 딸아이를 챙겨주셨다, ‘참, 가족이 이런 것이구나. 새삼 깨닫게 되고 죄송한 마음 금할 수 없었다. 이번 일을 계기로 많은걸 깨달았고 어머님께 정말 효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또 처음 일주일은 간병인 대신 남편이 맡아 해주었는데 큰일을 겪으면서 이렇게 가족 간에 화목 할 수 있음에 감사하다.
이제는 늘 피곤에 절었던 과거의 모습을 버리고 힘차게 다시 일하고 싶다. 재충전을 해서인지 의욕이 솟구친다. 소중한 가족들과 병원생활이 힘들지 않게 힘이 되어준 많은 분들, 친구들에게 감사하다. 건강할 때 아끼고 무리한 운동도 앞으론 삼가 하려 한다. 천금 같은 몸이란 걸 새삼 느꼈으며, 장애를 가져 고생하시는 분들이 예사롭게 보이지 않는 건 그들의 아픔이 내 아픔마냥 마음에 닿기 때문이다. 평소에도 그런 분들에게 잘 대하려 노력했듯이 앞으로도 늘 그들의 아픔을 마음으로 느끼고 잘 대하고자 다짐한다.
어찌됐던 사십일 동안 책도 제대로 읽지 못하고 글 한줄 못쓴 게으름뱅이지만 처음엔 아파서 힘들었어도 푹 쉬어준 지금 내 몸의 컨디션은 최상이다.
이 영 숙
어릴 적 추억과 어머니
어릴 적 엄마가 없으면 큰일 나는 줄 알았던 그때, 엄마를 졸졸 따라다니곤 했다.
동네 어르신들은 그런 나를 보고 다리 밑에서 주워 왔다고 놀리곤 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가 시장에 가시려면 나를 떼어 놓으려 얼마나 고생을 하셨는지 눈에 선하다. 시장까지 가려면 걸어서 30분 나가 버스를 타고 20분은 가셨던 것 같다. 한번 가실 때마다 짐이 많아 머리에 이고 가시곤 했다. 그래서 나까지 데리고 가기엔 너무 무리였나 보다.
그것도 모르고 얼마나 울면서 뒤따라갔는지…. 맛있는 것 사다 준다고 달래어 언니 등에 업혀 집에 오기까지 얼마나 언니는 또 힘들었을까! 한참을 발버둥 치며 울고 나서야 겨우 진정을 했던 기억이 난다. 엄마가 시장에서 돌아오실 시간이 되면 꼭 마중 나가 기다리곤 했다.
그런 나를 기쁘게 해 주시려는 지 꼭 나에게 맞는 예쁜 옷이나 먹을 것을 하나씩 사 들고 오셨다. 그것을 받아들고 얼마나 좋아했던지….
그 시절에 우리 엄마는 아주 예쁘셨다. 옅은 화장을 조금만 해도 너무나 화사했다 그 때 엄마는 외출복이 한복이셨기에 아버지와 여행 가실 때도 한복을 입고 가셨던 기억이 난다. 어린아이의 눈에도 얼마나 우아하게 보였던지….
엄마는 못하는 것이 없으신 분이셨다. 바느질, 뜨개질, 모든 음식은 엄마의 손에서만 나오는 것인 줄 알았다. 그 당시에는 모든 어머니들이 그랬으리라….
어버이날인 오늘 문득, 시장에 따라 간다고 울면서 쫓아가던 40년 전의 기억과 곱기만 하셨던 어머님의 아름다운 자태가 떠올라 사라지지 않고 머릿속에서 맴돌고 있다.
2007년 5월 8일 (화) 어버이날에….
이 은 순
이웃나라에서 배우기
분리 수거되지 않은 쓰레기들이 길가에 나와 있다. 비닐 종류 등이 함께 타면 다이옥신이 나와서 우리 몸을 병들게 한다는데 걱정이다.
지난 5월, 쓰레기 처리 시설을 견학하러 일본 후쿠오카에 간 적이 있었다. 우리보다 경제가 20여년이나 앞서고 있다는 경제대국 일본은 과연 어떤 나라일까. 그리고 우리를 36년 동안이나 지배한 그들의 저력은 무엇일까? 만감이 오가는 착잡한 심정으로 후쿠오카에 도착했는데 너무나도 깨끗한 거리에는 분리 수거된 쓰레기를 모아놓은 것조차 볼 수가 없었다. 얄미울 정도였다. 이 나라는 쓰레기를 철저하게 밤에 내놓으며 쓰레기 처리도 밤에 한다는 것이었다.
쓰레기 소각장은 10년에 걸쳐 지었다고 하는데, 공해 문제도 완벽하게 해결 했으며, 소각할 때 나오는 에너지로 온실, 노인복지 목욕탕, 시민수영장 등에 이용하고도 남아 현재 후쿠오카 전력회사에서 절반을 사용 한다고 했다. 쓰레기를 소각 할 때 공해방지를 위해 소금물을 쓰는데 700톤의 쓰레기가 타면 1톤 정도의 소금이 또 나온다. 그 소금으로 안경알 등 유리제품을 만들고 경기장에도 사용한다고 했다. 테니스장등 땅을 다지는데 넣는 것이다. 쓰레기 처리시설과 재활용 시설이 완벽하게 갖추어진 그들이 참으로 부러웠다. 다이옥신 문제도 완전히 해결되었고. 재활용은 아주 세분화 되어 있어서 우리처럼 분리 된 것이 도로 섞이는 일은 없다고 했다.
그리고 어디를 가나 잘 가꾸어진 인공조림은 그들의 국토를 더욱 건강하게 해주고 있었다. 그런 모든 것들이 탐나고 부러웠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여러 가지 경제적 어려움으로 그렇게 좋은 시설을 갖지 못하고 그렇게 튼실한 인공조림도 하지 못했지만. 이제 우리의 민둥산도 푸른 숲으로 바뀌었으니, 인공조림의 가능성도 가까이 와 있지 않을까? 그날이 올 때까지 우리 모두가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부터 실천하기로 결심하고 그전보다 더욱 철저하게 쓰레기 줄이기 운동부터 시작했다. 참외나 수박껍질을 옥상에다 말렸더니 1/10로 줄어들었고, 젖은 음식물 쓰레기는 탈수시켰다. 우유팩, 야쿠르트 병, 신문잡지, 온갖 것의 분리수거를 옛날보다 더욱 열심히 하며 그런 모든 것들을 이웃에게도 권해 보았다. 처음에는 시큰둥해 하던 훈이엄마, 석이엄마도 동참해주니 고맙다.
그렇게 열심히 살아가노라면, 우리나라도 좋은 때가 오겠지….
이 현 숙
이 빠진 동그라미와 나
아침이면 서둘지 않아도 된다. 직장을 그만 두고 나니 참으로 좋다.
FM라디오를 켜놓고 책꽂이에서 '어디로 갔을까 나의 한쪽은'이란 얇은 책을 꺼냈다.
중학교 3학년 때였다.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떻게 살아야 하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일까를 고민하면서 내 진로에 대해 생각한 적이 있다. 이 책을 처음 읽고 엎드려 한참을 생각에 잠겼던 때가 생각나 피식 웃게 된다.
이가 빠진 동그라미는 길을 떠난다. 자신의 잃어버린 조각을 찾으러 떠난다. 그는 그 긴 여정에서 수많은 존재들을 만난다. 그들은 모두 동그라미에게 맞는 조각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그에게 큰 의미로 다가온다. - 우리도 인생의 부족한 조각을 알고 찾으려고 끊임없이 노력한다. 또한 그 긴 여정에서 수많은 인생과 경험을 하게 된다. 결국 이가 빠진 동그라미는 자신에게 맞는 조각을 찾게 된다.
동그라미는 주체할 수 없는 속도로 서로를 알게 되고, 마냥 행복할 것만 같았던 순간은 잠시 뿐. 함께 살아가던 존재들과의 단절을 경험하게 된다. - 우리에게도 부족한 조각을 찾는 날이 온다. 하지만 모든 것이 채워진 순간이 되고 나면 우리는 다시 깨질 것만 같은 불안감과 익숙지 않은 상황에 당황하게 된다.
동그라미는 다시 그 조각을 내려놓고 길을 떠난다. 그리고 다시 노래를 부르고, 인사를 나누고 수많은 존재들과 가까워 질 수 있게 된다. - 우리는 조각을 내려놓지는 않는다. 하지만 또 부족함을 헛되이 채우려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과정 속에서 얻었던 또 다른 풍성함을 다시 찾아 채우려고 한다.
동그라미와 인간을 비교하면서 나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어디 단계까지 온 것일까? 이 질문에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나머지 조각을 찾으려 무던히도 노력했다. 그리고 그 근처까지 갈 수 있었다. 하지만 조각을 손에 넣기도 전에 조각이 부질없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지금은 여러 조각들을 만나 이리저리 끼워보고 부딪혀 보고 있는 중이다.
위와는 달리 동그라미와 조각 사이를 사람과 사람사이로 이해 할 수도 있다. 이 빠진 동그라미가 자신에게 꼭 맞는 조각과도 그렇지 않은 조각과도 모두에게 만족함을 느끼지 못 했다. - 이것은 우리가 마음이 맞는 사람이든 그렇지 않는 사람이든 인간관계에서 만족감을 얻지 못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빠진 동그라미처럼 그들과 조화롭게 살 수도 있다. 서로의 부족함을 채워주면서.
내가 서있는 자리가 어디인가, 바로 잘 서있는가, 더불어 잘 살고 있는가를 40년 중반이 지났지만 아직 뭐가 뭔지 모르고 있다. 그렇지만 꿈을 찾아 사는 사람들의 삶이 좋아 보이고 닮아가고 있다. 산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다.
최 인 희
아내의 베개
비가 내리는 휴일 저녁 무렵 아내의 베개를 베고 누웠다. 장마가 온다고 하더니 정말 그럴 모양이다. 아침부터 내리더니 저녁때가 되어도 그칠 생각을 안 한다. 눈을 감고 있으려니 베갯속에서 비에 대한 추억이 피어올랐다.
아내는 비를 무척 좋아한다. 비가 오는 날이면 같이 자동차를 타고 빗속으로 나가야한다. 자주 가는 곳은 경춘로에 있는 강촌휴게소. 가는 시간 동안 별로 말도 대화도 없다. 각자 자기만의 생각을 한다. 카라디오에서 흐르는 음악은 차창 밖 풍경을 운치 있게 만들지만 아무 말이 없다. 가끔 기어를 잡고 있는 내 오른 손등에 왼손을 포개 주는 것이 전부다. 나 또한 가끔 아내의 허벅지에 오른손을 잠시 얹을 뿐이다. 그것이 둘이 하는 최상의 애정 표현이다. 휴게소 옥상에 오르면 물안개가 하얗게 연기처럼 피어오르고 물안개가 떠난 자리에 두 마리 청둥오리가 다정하게 떠다니는 것을 보아야한다. 청둥오리의 다정함을 부러워서 여기를 오는지도 모른다. 강촌에서 둘이 좋아하는 산골 닭갈비를 3인분이 많다고 느끼지 않고 맛있게 먹고 가평 남이섬 길로 들어서면 한적한 산길이 있다. 강을 보기도하고 산을 보기도 하고 구불구불 휘어진 길은 시골길 같은 느낌이다. 청평댐에 도착하면 서종면을 거쳐 양수리 지나 집으로 돌아온다.
아내는 미루어 두었던 행사를 마친 기분으로 행복해한다. 이런 행사를 치루지 못하고 집에 있는 날이면 아내는 현관문 까지 활짝 열어 놓고 빗소리를 듣는다. 그래도 반응이 없으면 마당에 주차해 둔 차에 혼자 앉아 음악을 크게 키우고 차창에 내리치는 빗줄기를 보며 무언의 항의를 한다.
아내가 집을 비우고 없는 시간이면 아내의 베개를 자주 베어 본다. 베고 있으면 마음은 참으로 편하다. 아내의 베개와 나의 베개는 같은 양의 메밀을 넣은 높이와 모양이 똑같은 베개다. 다른 것이 있다면 아내의 것은 녹두 색이고 내 것은 갈색으로 구분된다. 잠자리에 들어도 내 것 네 것의 구분을 두지 않는다. 베개를 바꾸어 베는 날은 의견 충돌로 마음을 다치게 하여 미안한 마음이 들 때나 세상 일로 힘들어 한때 위로해 주고 믿어 주는 고마운 마음을 느낄 때 어김없이 아내 것을 선택한다. 습관 같은 사랑의 표현이다. 아내도 그 것을 안다. 그러기에 탓하거나 베개의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물론 처음부터 아내의 베개를 베었던 것은 아니다. 10여 년 전 IMF라는 시련에 견딜 수 없어 모두 다 잃은 후 가정은 힘들어졌고 돈 벌이는 할 수가 없었다. 가족에게 아무 도움도 준수 없는 시절이 이였다. 무능한 가장의 아픔을 이기느라 힘들게 버티던 어느 날 우연하게 아내의 베개를 베고 누워 살아갈 방도를 찾고 있던 중 외출에서 돌아 온 아내는 "내가 그렇게 보고 싶은 거야. 내 베개를 베고 있게…." 정말 보고 싶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곁에 가깝게 있는 베개를 선택 했을 뿐인데 아내가 내게 그런 마음이 있다고 믿어준 것이 정말 고마웠다. 아름다운 마음으로 나를 믿어 주는 아내에게 감사했고 아내의 예쁜 부분만 생각하고 아내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해 주고 싶었다. 그날 이후 아내의 베개를 베고 있으면 아내의 팔베개를 한껏 같고 잘못했던 기억들이 되 살아나 후회도 하고 아름다운 추억들로 빙그레 웃기도 했다. 아내의 향기가 베개에서 피어오르면 그리움이 차오르곤 했다.
비는 아직도 내린다. 아내는 직장에서 창문 밖 비를 바라보고 있을까? 언제 부터인가 '빗님이 오시는데 빗속의 방황은 어떠신지?' '눈이 펑펑 쏟아진다. 눈싸움은 어때?'라는 문자 메시지가 없다. 이젠 조르거나 무언의 항의를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자동차도 없는데 내게 무담만 준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떼라도 썼으면 좋겠다. 무언의 항의도 좋고…. 참고 있는 아내의 마음이 사랑스럽다. 그러나 참고 있는 아내의 마음은 얼마나 힘들었고 체념해야만 했던 마음은 얼마나 아팠을까.
오늘은 버스 정류장에 마중 나가 아내와 함께 빗속을 걸어봐야겠다.
마음엔 아내의 향긋한 베개를 품고.
홍 정 희
어느 봄날의 예봉산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은 연초록 새싹들이 파릇파릇 하늘을 향해 기지개를 켜고 있는 가슴 설레는 봄이다. 맑은 하늘과 따뜻한 봄볕이 어우러져 눈부신 하루가 될 것 같다. 이런 날엔 산으로 가고 싶어 도시락 하나, 과일 한 개, 물 한 병을 배낭에 넣고 돌다리에서 버스를 탄다. 다시 덕소에서 88ㅡ2번 마을버스를 타고 어룡을 지나 예봉산 입구에서 내려 아스팔트길을 걸어본다. 산등성이며 산자락 아래는 봄꽃의 향연이 펼치어 있다.
아스팔트길을 오르다 보니 매표소가 보인다. 몇 차례 다녀간 예봉산 이지만 봄에 산행을 하니 또 다른 아름다움이 가득하다. 길섶에는 많은 야생화들이 피어나고 또 다른 꽃들이 피어 날 준비를 하고 있다.
아름답고 수줍은 꽃들의 인사에 마음은 마냥 즐겁다. 산괴불주머니, 개별꽃, 제비꽃, 금붓꽃, 양지꽃, 현호색이 차례대로 인사를 한다. 여기서 잠깐 예봉산을 소개해 본다. 높이는 687.2m, 능선길로 1.5km 정도 떨어져 적갑산과 마주보고 이어진 트래킹 수준의 등산로다. 위치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과 조안면에 걸쳐있다.
야생화들이 피어난 길을 따라 오르니 세재길이다. 세재 약수터 앞에서 발을 멈춰 시원한 약수에 맛깔난 점심을 먹고 주위를 둘러본다. 여기저기에 쓰레기가 널려있다. 쓰레기를 정리해 한 쪽으로 모아놓고 발길을 떼어본다. 나 역시 대단한 양심가는 아니지만 산에까지 와서 쓰레기를 버리고 간다는 것은 좀 그렇다. 자연을 후손한테 잠시 빌어다 쓰는 것인데 망가뜨리지 말았으면 좋겠다. 능선으로 오르는 길은 가파르지만 험하지는 않다. 몇 번 다녀와서 그런지 길이 익숙하다. 능선을 따라 가는 길에는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있다. 소월님의 '나보기가 역겨워'를 낭송하며 힘찬 발걸음을 내 딛는다 .
인생은 자기를 데리고 먼 길을 가는 것이다. 길을 가다보면 앞서 간 사람들의 발자국이 보일 때가 있다. 발자국 들은 점점이 찍혀 있다. 발자국 하나하나는 모두 작은 도약의 연속이다. 발자국과 발자국이 서로 떨어져 있다는 것이 바로 그 도약의 증거이다.
마치 시간의 궤도 속에서 존재하는 하루하루와 같다. 어제, 오늘, 내일은 서로 티 나지 않게 연결되어 있는 듯하다.
하나의 발자국 없이는 다른 발자국을 찍을 수 없듯이, 어느 하루도 그것 없이 다른 하루를 만들어 낼 수 없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길을 계속 가는 것이다. 도시에서 탈출하여 대지에서 만남 봄은 기운이 다르다. 가파른 숨을 몰아쉬며 도착 한곳은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이다. 예봉산 최고의 조망권을 자랑하는 장소인데 오늘 따라 사람들의 모습이 적어 보인다. 패러글라이딩 활공장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에 온 몸을 내 맡겨 후끈 후끈 달아올라 흘러내리는 땀을 식힌다. 이 순간의 상쾌함이란 산을 다녀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이제 또 한걸음, 한걸음 철문봉을 향해 오른다. 철문봉을 지나 드디어 예봉산 정상에 도착했다. '아 드디어 올라 왔구나!', 그동안 힘들었던 게 싹 잊히는 순간이다. 정상에는 사람들이 가득하다.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산행하는 사람들이 많다. 정상에서 부는 바람과 아이스바 하나로 몸을 식히고 하산을 한다.
계곡을 통해서 상팔당으로 가는 길 계곡에는 낙엽들이 가득하다. 예봉산은 낙엽송이 많이 심어진 산이다. 산행의 즐거움을 더 해 주는 요소이기도 하다.
낙엽이 우거진 길을 빠져 나오니 상팔당 입구이다. 상팔당 입구에 도착하니 시간은 어느새 5시이다. 콩나물 버스에 몸을 싣고 집으로 간다. 지금 내 귀에는 계곡의 물소리, 지저귀는 새소리가 귀를 놓아 주지 않아 만원버스는 힘든지도 모르고 즐겁게 가도 있다. 나뭇잎 움트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 봄, 아름다운 이봄. 이런 능선 길, 고운 산길을 찾아 여러분들도 고운 봄 만끽하면 좋겠다.
첫댓글 수고 많으셨습니다. 샘들 특히 한선생님. 도우미선생님들 감사합니다. 무사히 마무리 할 수 있게 수료식때 도와주세요
수고하셨어요! 목차에 이은숙---> 이은순으로 바꿔 주시고요, 주여진 님이 작품은 있는데 목차에 빠졌습니다. 진영희 바로 앞에 끼워넣어 주시어욤. 그리고 강사님들의 인적 사항이 너무 간단한 것 같아요. 너무 길지 않게 요점정리해서 목요일까지 올리겠으니 참고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목요일에 오경자 선생님의 원고 하나 받을 것 있거든요.) ^---^
제 원본을 보시면 말줄임표를 없애면서 수정한 부분이 있다고 말씀드렸는데 수정하지 않은 것으로 올라와 있네요. 선생님...괜찮을 까요? 고운 잠 이루시고 기분좋은 수요일시작하시기 바랍니다.
신형님! 인쇄소에 작품 넘기셨나요? 김미영 님의 시 수정 있거든요.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좀 고쳐주시어요. 1. <어머니> 3행 에서 모조리 도와주고--->몸조리 도와주고 2. <참새> 1행 그지리에--->그 자리에, 2행 안 잊으려고 부딪히고 ---> 안으려다 부딪히고 ...... 이렇게 고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수고하십시오.
좋은글 잘봣습니다 건강이 안좋아 결석을 하다보니 본의아니게 참가를 못헷습니다 저는 수필반의 홍정애인데 홍정희라고 나왔네요 부족하지만 즐거웠고 많이 배웠습니다 늦개라도 제출해도 되나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