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의 종교개혁과 미술
사회학적 견지에서 보면 종교개혁은 교회의 부패에 대한 격분에서 출발했고, 이 운동을 촉발시킨 직접적인 원인은 성직자들의 탐욕, 면죄부와 교회관직을 미끼로 한 교회의 돈벌이였습니다. 16세기의 전반부, 즉 일련의 종교전쟁과 트렌트 종교회의, 그리고 비타협적인 반종교개혁 운동이 시작되기 이전의 유럽이라는 상황에서, 종교개혁은 단순히 신앙의 문제만이 아니라 도덕적인 책임의식을 지닌 사람이라면 외면할 수 없는 양심의 문제였습니다.
독일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이탈리아의 이상주의자와 지식인들을 자극하고 열광시켜 반물질주의, 믿음에 의해 의로워진다는 속죄론, 하나님과의 직접 교섭과 신도가 사제와 동등하다는 이념을 갖게 했습니다. 하지만 봉건적 특권을 유지하려는 성직자들의 투쟁에 적극 대응하던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목적이 달성되자 한 발 물러섰으며, 하층계급의 이익을 도모함으로써 자신들의 이익이 손상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일체의 진보 운동에 완강히 저항했습니다. 프로테스탄티즘은 처음에 광범위한 사회적 기반 위에서 민중 운동으로 출발했지만, 지방의 중·소 규모의 영주나 시민계층에만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운동은 정치와 경제에만 관심이 있는 영주와 시민계급의 종교적 신조가 되고 새로운 교회 조직을 위한 편성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 가장 실망한 계층은 종교개혁을 정신적 운동으로만 이해했던 이상주의자와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종교생활의 내면화와 심화에 대한 열망이 가장 강한 곳은 로마였고, 동시에 독일에서 불어온 종교개혁 바람으로 교회 분열의 위험을 가장 잘 의식한 곳도 로마였습니다. 로마의 개혁 운동 지지자들은 교회의 부조리를 도려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진 계몽된 인문주의자들이었지만, 교황의 절대 권위와 존재 자체를 부정하지는 못했습니다. 1520년경 로마에서 경건한 신앙의 모범이 되고 종교개혁에 자극을 주기 위해 ‘하나님 사랑의 수도회’라는 단체가 결성되었습니다. 이 단체에는 로마의 성직자들 가운데서 가장 학식이 높고 명망 있던 추기경 야고보 사돌레토Jacopo Sadolet(1477-1547), 베로나Verona의 주교 기베르티Giberti(1495-1543), 티에네의 가예타누스Cajetanus(1495-1547)와 조반니 피에트로 카라파Giovanni Pietro Caraffa(1476-1559)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외세의 침입으로 이 단체의 구성원들은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당시 이탈리아는 두 강대국인 프랑스와 스페인의 각축장이었습니다. 프랑스는 봉건주의로부터의 왕권의 해방과 백년전쟁의 성공적 종결의 결과로 강국이 되었으며, 스페인은 독일 및 네덜란드와의 통합이라는 우연의 산물로 카롤링거 왕조의 제2대 프랑크 국왕 카알 대제Karl Magnus(샤를마뉴Charlemagne, 742-814, 768-814 재위) 이래 막강한 힘으로 성장했습니다. 그는 스페인 왕 카를로스 1세(1500-58)로 재위 중 151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알 5세Karl V(1500-58, 1519-56 재위)가 되어 1556년까지 재위했는데, 그가 상속받은 영토를 합쳐 정비한 국가 판도는 프랑크 왕국을 독일에 합병한 것과 같은 규모였습니다. 프랑스가 먼저 침입하여 나폴리, 밀라노, 피렌체를 점령했고, 1525년 카알 5세가 프랑스를 물리치고 이탈리아 전역을 장악했습니다. 그는 교황을 응징하기 위해 1만 2천의 용병을 이끌고 로마로 와서 교회와 수도원을 약탈하고 신부와 수도사들을 살상했으며, 수녀들을 능욕·학대했고, 성 베드로 대성당을 마구간으로, 바티칸 궁전을 병정들의 막사로 만들었습니다. 카알 5세의 침입으로 르네상스 문화 전체가 파괴된 것처럼 보였습니다. 1530년에는 피렌체마저 스페인과 독일 연합군의 희생물이 되었습니다. 클레멘스 7세는 카알 5세와 볼로냐에서 동맹을 채결하고 이탈리아 반도에서 프랑스 세력을 축출하기로 했습니다. 당시 피렌체는 프랑스를 지지하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카알 5세는 교황과 합의하여 알렉산드로 메디치를 세습 군주로 앉힘으로써 공화국의 마지막 흔적마저 없애버렸습니다. 로마 약탈 이후 피렌체에서 일련의 혁명적 소요가 일어나 메디치 가의 추방으로까지 이끌고 간 상황은 황제와 결합하려는 교황의 결심을 촉진시켰습니다. 교황은 황제의 동맹자가 되었으며, 나폴리에는 스페인 부왕이, 밀라노에는 스페인 총독이 직접 주재했고, 그 밖에도 스페인은 피렌체의 메디치 가, 페라라의 에스테 가, 만토바의 곤자 가를 통해 이탈리아를 지배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수도회’는 카알 5세의 로마 약탈로 흩어졌지만, 나중에 베네치아에서 사돌레토, 콘타리니, 폴레 등을 중심으로 활동이 계속되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루터주의와 화해하고 종교개혁의 도덕적 내용, 특히 신앙속죄론을 살려 가톨릭교회에 활용하는 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1541년 레겐스부르크 회의에서 콘타리니의 종교화해 협상이 결렬됨으로써 가톨릭 개혁 운동의 제1기가 종말을 고했습니다. 레겐스부르크 회의의 결렬은 가톨릭교회가 전투적인 공세를 취하게 만들었으며, 권위와 권력에 의한 가톨릭 재건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교황 바오로 3세는 관용적인 르네상스에서 비관용적인 반종교개혁 운동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를 대표합니다. 1542년에는 종교재판 제도가 있었고, 이듬해에는 출판검열 제도가 실시되었으며, 1545년에는 트렌트 종교회의가 열렸습니다. 고위 성직자들 가운데서 인문주의자들은 박해를 받았고, 광신적 반르네상스 정신이 도처에서 고개를 들었습니다.
이탈리아 트렌트에서 비정기적으로 18년 동안 열린 트렌트 종교회의는 정치적 현실주의의 최대 수련장이 되었습니다. 이 회의는 교회 제도와 신앙의 기본 원칙을 현대생활의 여러 조건과 요구에 적응시키는 조치들을 냉철하고도 실무적인 태도로 채택했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신도들이 가톨릭교회에서 이탈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전통 신앙과 이단 사이에 명확한 선을 그었습니다. 그들은 대립관계를 강조하고 신도들의 요구조건을 완화시키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으며, 이는 곧 통일된 기독교 세계의 종언을 의미했습니다.
개신교의 비판에 직면한 교회를 개혁하고 가톨릭 교리를 명시하며, 옹호하려했던 트렌트 종교회의가 종결되자 예술에 적용되었던 엄격주의가 현실주의적 정신에 입각하여 완화되었습니다. 교회는 만인을 위한 화려하고 매혹적으로 장식되었습니다. 이 과제는 바로크 시대에서야 만족할 정도로 성취되었고, 매너리즘에서는 트렌트 종교회의의 엄격한 규정들이 여전히 지배적이었습니다. 교회가 보장했던 미술의 자유주의는 트렌트 종교회의로 종식되었습니다. 교회를 위한 미술품은 신학자들의 감독 하에 놓였고, 특히 대규모 작품은 담당 성직자의 지시를 엄격하게 지켜야했습니다. 밀라노 화가 조반니 파올로 로마초Giovanni Paolo Lomazzo(1538-1600)는 서른세 살에 실명한 후 미술 이론에서 당대의 최고 권위자가 되었는데, 그는 종교화를 그릴 경우 화가는 신학자의 조언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매너리즘 화가인 타데오와 페데리코 주카로 형제는 채색에 있어서도 교회의 지시를 따랐으며, 바사리도 파울리네 예배당을 위해 작업할 때 도미니크회의 수도사로 미술에 조예가 깊은 빈첸조 보르기니가 내린 지시에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가 없을 때는 불안해했습니다.
이 시기는 표현을 예술가의 재량에 맡겼던 중세보다 더 엄격하게 규정되었습니다. 특히 이단 학설에 영향을 받은 미술품을 교회에 두는 것을 철저히 금지했습니다. 예술가들은 성서에 나오는 에피소드의 공식화된 형식이나 교리 문제의 공식적인 해석을 정확하게 지켜야만 했습니다. 안드레아 질리오는 미켈란젤로의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수염 없는 그리스도, 그리스 신화에서 죽은 사람의 영혼을 저승으로 가는 강 너머로 건네주는 카론의 나룻배, 그의 언급처럼 투우장에서 구경하고 있는 듯한 성자들의 태도, 묵시록에 언급되는 천사들의 배열이 성서와는 반대로 화면의 네 모퉁이에 나눠 있지 않고 나란히 서 있다는 사실 등을 들어 비판했습니다.
베로나 태생이라서 별명이 베로네제인 파올로 베로네세Paolo Veronese(1528-88)는 <레위 가의 만찬>에서 성서에 열거된 인물 외에도 난장이, 개, 앵무새를 데리고 있는 바보 등과 같은 임의로 선택한 모티프를 그림에 첨가했다는 이유로 종교재판소에 호출되었습니다. 이런 비관용적인 정신은 <최후의 심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오로 4세는 1559년 다니엘레 다 볼테라Daniele da Voltera(1509-66)에게 <최후의 심판>에서 특히 자극적으로 보이는 누드를 덮어씌우게 했습니다. 후임 교황 바오로 5세는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후인 1566년, <최후의 심판>에서 자신의 비위를 거슬리게 만든 몇몇 부분을 제거시켰습니다. 클레멘스 8세는 <최후의 심판>을 아예 없애려고까지 했지만, 아카데미의 탄원으로 겨우 만류되었습니다. 교황들의 이런 태도에 동조라도 하듯 미켈란젤로를 서양의 최고 예술가로 꼽은 바사리조차 1568년에 출간한 『미술가 열전』 재판에서 <최후의 심판>의 누드상은 이 그림이 놓인 장소에 비추어볼 때 적합하지 못하다고 적었습니다. 이러한 비난은 <최후의 심판>을 문화사의 획기적인 전환점으로 만들었습니다. 즉 미켈란젤로가 신학보다 예술적인 표현을 중시함으로써 ‘예술의 자유’를 말해주는 사례가 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