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글: 죽음, 영혼, 연옥, 구원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은
죽은 모든 이의 영혼,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전통적으로 교회는 오늘 세 대의 위령 미사를 봉헌해 왔습니다.
이러한 특전은 15세기 에스파냐의 도미니코 수도회에서 시작되었습니다.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11월 1일부터 8일까지 묘지를 방문하여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서 기도할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묵상 1]
교회는 모든 성인 대축일인 어제 천상 교회의 성인들에게 지상의 나그네인 우리 구원을 위하여 전구를 청하였으며, 오늘 위령의 날에는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연옥 영혼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어제와 오늘, 이 두 날에 걸쳐 우리는 천상 교회와 지상 교회 그리고 연옥에 있는 이들이 하나임을 기억하며, 서로 기도해 주고 영적인 도움을 주고받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세상을 온전히 혼자서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을 때까지 누군가와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그 안에서 서로 온갖 것을 주고받습니다. 죽음 이후의 생명을 믿고 희망하는 교회는 이러한 관계가 세상을 떠난 이들과도 지속된다고 믿습니다. 성인들의 통공에 대한 교리는 이처럼 산 이들과 죽은 이들이 모두 주님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거룩함을 나누고 서로 도우며 살아간다는 믿음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에 나아가고 있는 영혼들을 위하여 기도해 줄 수 있다는 사실은 세상에 남아 있는 우리를 위한 하느님의 자비이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을 떠나보내고 세상에 남은 이들은 그리움과 더불어, 살아생전에 더 잘해 주지 못하고 고마운 마음을 전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과 안타까움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통공의 교리는 우리가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이 아직도 남아 있음을 알려 줍니다. 그들이 영원한 안식을 누리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오늘 위령의 날을 맞아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영혼을 기억하며 그들이 평안한 쉼을 얻도록 기도하는 하루로 보내기를 바랍니다.
[묵상 2]
가톨릭 교회는 연옥이 있음을 믿습니다. 연옥은 하느님과 영원한 일치를 충만히 누리기 위하여 거쳐야 하는 정화의 과정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는 것으로 영원한 구원을 보장받았지만, 천국에 들어갈 만큼 깨끗해지려면 정화 과정이 필요합니다.
혹독하게 단련시키는 연옥의 이미지에서 하느님을 엄격한 심판자로 떠올릴 수도 있지만, 그와 반대로 연옥은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드러냅니다. 천국은 하느님과 깊이 일치된 성인들만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은총과 사랑 안에서 죽었으나 완전히 정화되지 않은 사람이 하늘의 기쁨으로 들어가기에 필요한 거룩함을 얻을(『가톨릭 교회 교리서』, 1030항 참조) 기회를 주십니다. 완전히 정화되고 주님과 일치한 영혼만이 천국에 어울립니다.
그런데 지상 생활을 마칠 때까지 완전히 정화되고, 주님과 온전한 일치를 이루어 하늘 나라에 걸맞게 된 이들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주님을 믿고 하늘 나라를 바라고 살았지만, 인간적 나약함 때문에 하늘 나라에 걸맞지 않는 대부분의 우리에게 구원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죽음 뒤에도 세상에 남아 있는 이들의 기도와 희생으로 정화가 가능하고 그로 말미암아 구원될 수 있다는 희망이 바로 연옥에 있습니다. 이 같은 ‘연옥 영혼’과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은, 우리를 끝까지 포기하시지 않고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교리입니다.
연옥은 정화의 과정이기에, 이 과정은 이 세상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습니다. 인생살이에서 겪게 되는 삶의 우여곡절과 부침은 우리를 정화하는 연옥과 같은 구실을 합니다. 자신의 죄악과 무능을 깨닫게 하고 하느님 자비에 자신을 더욱 내맡기게 하는 고통과 고난은 연옥과 같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고통은 정화하는 연옥의 의미가 있으며, 그 고통은 영원한 행복의 시작입니다.
[묵상 3]
죽은 모든 이를 기억하는 위령의 날, 셋째 미사의 독서와 복음은 언제 올지 모르는 마지막 날에 대한 준비를 말합니다. 열 처녀는 신랑이 언제 올지 몰랐습니다. 슬기로운 처녀들은 기름을 충분히 준비하였지만, 어리석은 처녀들은 준비하지 못하였습니다. 갑자기 신랑이 돌아오면서 그제야 기름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친 어리석은 처녀들은 기름을 사러 나갔지만, 이미 문은 닫히고 결국 혼인 잔치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마지막을 준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 마지막에 일어날 일들을 늘 염두에 두고 준비하며 살아가는 삶을 종말론적 삶이라고 합니다. 세상 종말에 있을 하느님의 심판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하느님의 가치를 선택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마지막 날 앞에서는, 살아가면서 중요하게 보였던 세속적인 것들이 무의미해지고 영원한 것이 더 중요해지는 가치 전환을 체험하게 됩니다.
종말은 우리에게 죽음을 생각하게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옆에 두고 살아갑니다. 죽음을 생각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을 볼 수 있는 지혜를 얻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하느님의 종’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죽을 때 가지고 가는 것은 마음 닦은 것과 복 지은 것 뿐.”
죽어서 하느님 앞에 갈 때, 지금 우리가 그토록 가지기를 바라는 돈과 권력과 명예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 앞에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하느님 뜻을 따르려 하였던 노력과 형제와 나누었던 사랑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준비해야 할 기름입니다.
출처: 최정훈 바오로 신부(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매일미사(한국천주교주교회의) 2024.11.2 오늘의 묵상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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