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눈이 되고 눈사람이 되고 지나친 사람이 되고
이미화
파란시선 0125
2023년 4월 30일 발간
정가 12,000원
B6(128×208)
155쪽
ISBN 979-11-91897-53-1 03810
(주)함께하는출판그룹파란
•― 신간 소개
절반이 흔들릴 때마다 깨어나는 절반
[비가 눈이 되고 눈사람이 되고 지나친 사람이 되고]는 이미화 시인의 첫 번째 신작 시집으로, 「나는, 내가 아는 사람」, 「세상의 인사들」, 「나의 비탈진 중력」 등 57편의 시가 실려 있다.
이미화 시인은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고, 2011년 [현대시]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비가 눈이 되고 눈사람이 되고 지나친 사람이 되고]를 썼다.
“이미화 시인은 “불러도 명명되지 않는 것들을 모았다”고 했다(「시인의 말」). 불러도 명명되지 않는 것들을 시라고 한다면 그것은 저 지하 세계로 영영 떠나 버린 에우리디케를 향한 전언일 것이다. 시인의 노래가 없는 대상과 잃어버린 세계에 천착하고 있다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의 언어나 이 세계의 것으로 명명되지 않을 것이다. 시인은 ‘빛’, ‘어둠’, ‘허공’, ‘바람’, ‘언어’, ‘울음’, ‘노래’, ‘얼굴’과 같은 시어들을 통해 시적 자아와 세계의 창조적 성립과 관계에 주목한다. 불완전한 자신에 대한 치열한 탐구이자 불가해한 세계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서 상호 공존과 존재의 도래를 위한 역설의 회로를 미학적 장치로 호명하고 작동시키고 있는 시인은 교란하며 붕괴되는 실존과 의미의 차원 그 너머를 보게 한다.” (신수진 문학평론가의 해설 중에서)
•― 추천사
이미화 시인의 복안(複眼)을 가만히 따라가다 보면 자연적인 재료로 구성된 오브제가 설치된 미술관에 들어선 듯하다. “창틀에 눈동자를 얹어 놓고 발성 연습”을 하는 작품이 있는 입구를 지나 천장을 올려다보면 어딘가에서 바람의 장송곡이 울려 퍼진다(「바람을 품다」). 과거의 ‘당신’은 지금 ‘나’의 ‘손’과 ‘입’을 움직이게 하는 사람이다. ‘당신’은 어둠을 재료 삼아 ‘나’의 현재의 삶에 지속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연기를 피운다. “시차를 건너오는 몸의 귀환들이 똑딱거”리는 소리가 들리며(「어디로도 가닿지 않는 길」) “죽은 자의 혀를 잔등에 태우고” 오는 ‘낙타’는 ‘나’의 주변을 맴돈다(「하마다」). 이미지의 현재완료. 이미화 시인의 매혹적인 문법이다. 그녀가 설치한 작품은 자연주의와 초현실주의의 경계 어딘가에 놓인 듯 보인다. 아니 시다. 선과 색이 아닌 신체와 사유로 곡진하게 빚어진 시다. “세상의 등대들을 따라 선을 그으면/고래의 귀 모양”이 되는 것도(「고래의 환유」) “설레던 방을 잊는다는 건 너의 얼굴에서 내 눈을 빼는 것”도(「바람의 안쪽」) “바람의 주물을 떠 놓고 꽃의 형상”을 보는 것도 시다(「잠기는 표정들」). 이 미술관의 출구는 잘 보이지 않는다. 다만 지구처럼 종말을 향해 끊임없이 변형을 거듭하는 공간으로 우리는 던져질 뿐이다. 그런데 그녀가 ‘기다리던 것’은 무엇이었을까? 연속적인 망각. 이 시집에 전시된 ‘손’과 ‘입’은 어린 시절의 기억과 내면에 잠재된 기억들을 시적 언어로 환원시키는 동시에 사랑으로 진입시켜 주는 도구이다. “산종하는 기억들”을 가지고(「기흉」) “얼굴을 던져 몌별을” 하며(「얼굴의 체위」) ‘나’의 모습을 의연하게 복원시키는 모습에서 이 시집의 ‘방향’과 ‘모서리’가 무한으로 열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다. 결국 한 시절을 통과한 화자는 “가시를 뱉는 애인의 입에서 어린 내가 걸어” 나와(「발자국의 산란」) ‘열매들 속에 갑각류가 자라고’ 있는 것을 본다(「가로의 개념」). ‘비가 오거나 눈이 오는 날엔’ 우리는 사랑하는(했던) 사람의 오브제가 될지도 모른다. “모든 빗소리는 두개골에 고여 있기 때문”이다(「분류법」).
―정우신(시인)
•― 시인의 말
기다리는 것들이 잡아당기는
기척을 생각한다
입 닫음과 고요와 혼자 안아야 될 것들을 위해
혼란, 그 한곳을 비운다
팔 길이가 모자란 계절에도
혼자 피어 있는 꽃은 멀리서도 보였다
불러도 명명되지 않는 것들을 모았다고 모았지만
봄의 산만한 햇살 아래
혼자 기대어 섰던 유년의 담장은
아직 찾지 못했다고 생각하면
나는 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나
마음이 가혹해진다
•― 저자 소개
이미화
서울예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2011년 [현대시]를 통해 시인으로 등단했다.
시집 [비가 눈이 되고 눈사람이 되고 지나친 사람이 되고]를 썼다.
•― 차례
시인의 말
제1부
분류법 – 11
푸른 사과를 먹는 시간 – 14
나는, 내가 아는 사람 – 16
바람의 안쪽 – 18
지켜본 사람 – 20
연민의 반쪽 – 22
하녀의 방향 – 24
바람을 품다 – 26
쇄빙선 – 28
강요의 사과 – 30
사랑한 앞니 – 32
깁스 – 34
프쉬케 – 36
제2부
스치는 사람 – 41
예정의 세계 – 44
열매를 닮은 꽃은 없다 – 46
더듬이가 구름을 끌며 – 48
사차원의 친절 – 50
모른다 – 52
불투명한 방 – 54
하마다 – 56
떠내려가는 책 – 58
마르는 돌 – 60
딛는 시간 – 62
세상의 인사들 – 64
얼굴의 체위 – 66
피리에서 만나고 호흡에서 헤어졌다 – 68
제3부
손수건 – 73
불량한 어둠 – 74
통증의 연대기 – 76
가로의 개념 – 78
장서표 – 80
잠기는 표정들 – 82
쥐여 줌으로써 – 84
발목들의 편대 – 86
화각(畫角) – 88
아프리카 접시 아래 유럽 접시 – 90
발자국의 산란 – 92
몸의 커서를 옮기다 – 94
이끼 – 96
제4부
바벨의 노래 – 101
나의 비탈진 중력 – 102
부비동 – 104
사라진 남자 – 106
어디로도 가닿지 않는 길 – 108
외알박이 안경 – 110
우리들의 공중 사용법 – 112
진통제 – 114
타임 슬립, 說 – 116
기흉 – 118
적소(謫所) – 120
우리 집에는 손이 가득할까요 – 122
제5부
빗방울이 미끄러지는 냄새가 나는 사람 – 127
우리의 각도 – 129
편련통(片戀痛) – 131
발자국은 겨울에만 – 133
고래들의 환유 – 135
해설 신수진 상호 공존과 존재의 도래를 위한 역설의 회로 – 137
•― 시집 속의 시 세 편
나는, 내가 아는 사람
맨 처음 나는 나를 몰랐을 거예요
내가 나를 처음 알게 된 때는 아마도 울음이 아니었을까 싶어요 그 울음이 바깥을 흔드는 것이 아니라 안쪽을 흔든다는 것을 알았을 거예요
반대로 웃음은 타인으로부터 배웠을 것이고요
울음을 울 때는 내가 내 옆에 있는 것 같고
웃을 때는 타인이 내 옆에 있는 것 같으니까요
이런, 내 울음은 버릇이 없군요
웃음은 늘 가리는 방법이 있었지만
돌아서서 웃을 수 있지만
울음은 돌아서서 울어도 감춰지지가 않아요
나는 다른 사람보다도
나를 몰라요
계속 타인의 질문을 돌고 있으니까요
그럴 땐,
그네를 밀어 줘요
민 거리만큼 다시 돌아온다는 것을 알 수 있으니까요
갈 때도 올 때도 뒷모습이지만
그네에서 내리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고요한 정점이 될 테니까요
나는 나에게 외면받은 적이 있어요
그럴 땐,
자두를 먹고
살구의 맛을 이야기해요
그날은 비행기가 나비가 물고기가
점점 작아지며
나를 모르는 체했어요
말하지 않는 건 아무것도 아닌 걸까요
아무리 말을 되삼켜도 나는 점점 뚱뚱해지지 않고
겉모습이 말라 가는 사람이 됩니다
나는 내가 아는 사람이라고
여전히 믿어요 ■
세상의 인사들
굿바이, 안녕? 너는 아프리카에서 인사하고 나는 아시아에서 인사를 한다 너는 뺨에 침을 뱉어 인사를 하고 나는 코를 두 번 부딪쳐 인사를 한다
벌새는 공중을 모아 인사를 하고 바람은 강물의 손을 빌려 와 인사를 한다 새들은 계절로 안녕의 부리를 잰다
우리는 모두 다른 모양의 단추, 너는 단추를 보고 인사하고 나는 단추를 만진다 세상의 단추들은 섞이는 걸 좋아한다 인사는 나보다 먼저 와서 이름을 푼다 잠긴 이름들이 수챗구멍으로 흘러간다
썩은 이빨로 안녕? 이불을 덮고 안녕?
난 아직 너의 인사를 몰라 웁살라, 떠도는 종족의 인사를 빌려 와 우리는 얼굴을 섞는다 소름이 돋을 때까지
미끄러지는 것만 상상하면 인사가 나왔다 안녕안녕안녕 너는 단추를 본다 인사인지 이별인지 몰라 안녕안녕안녕 목구멍이 무거웠다 깃털만 한 날들이었다 그런 날은 빈 수화기를 들고 수신음에 자꾸 인사를 했다
미지의 고개 쪽을 향해 안녕? 우리의 인사들은 군조(群鳥)를 이뤘다
숲으로 들어가는 날에는 낮게 엎드려 눈을 반짝이는 인사법을 사용했다 우린 어두운 인사법을 몰랐다 바람은 그런 의도의 안쪽에만 불었다
안녕, 인사가 동난 몸으로
활짝 열려진 이름으로, 붉은 혀로 인사를 하자 ■
나의 비탈진 중력
비탈진 곳에 서 있었다
그때 나의 절반에서 딱 한 눈금 더한 무게로 서 있었다
나는 비스듬했지만
비스듬한 사람이 아니었다
딱 한 눈금 벋어 난 절반의 바깥을 견디고 있다
절반의 나뭇잎을 먹어 치우고 추워지는 벌레들처럼
나뭇가지에 앉은 새들이
공중으로 후드득 떨어지듯
절반은 늘 자유롭고
언제든 이쪽이나 저쪽이 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우리는 딱 한 눈금에 시달린다
한 눈금은 절반보다 더 자유롭거나
뚜렷한 자의식을 도려낼 생각을 한다
기다렸던 기척이
절반의 기억을 뒤집어 놓듯
잠을 뒤척이는 일도
서 있다 발을 바꾸는 일도
절반을 넘나드는 눈금의 자의적 일탈,
절반이 흔들릴 때마다
깨어나는 절반
비탈길은 이미 알고 있다
언제나 극복할 수 있는 경사도가
주변 어디에나 있다는 것을
가파른 눈물, 평평한 한숨
이미 내 편을 떠난 웃음,
켜를 일으키는 물결의 무늬로 서 있는
누가 나의 무게를 묻는다면
갸웃하는 방향이라고 대답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