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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달력의 유래
달력(calender)은 '책력'(冊曆· almanac)이라고도 하며, 1년의 절기와 날짜를 기록한 문서로서 천체의 운행을 바탕으로 1년의 주기적 시기를 밝히는 역법(曆法)에 근거한다. 달이 차고 기우는 주기를 '삭망월', 계절이 순환하는 주기(지구가 태양을 한 바퀴 도는 주기)를 '태양년'이라 하는데, 오늘날 정확한 천문학적 삭망월은 29.530589일(日), 태양년은 365.24220 일이다.
로마 누마王 1년 12달 355일로 정해
기원전 700년께, 고대 로마 2대 왕인 '누마'는 이전의 달력을 개정하여, 1년을 12달로 하고 날 수를 355일로 정했다. 또한 첫 번째 달을 세 번째 달로 바꾸고, 11번째와 12번째 달을 앞으로 가져와 각각 1월과 2월로 하였다. 누마의 달력을 순서대로 라틴어로 나열해 보면, Ianuarius(1월·영어로는 January), Februarius(2월·February), Martius(3월·March), Aprilis(4월·April), Maius(5월·May), Iunius(6월·June), Quintilis(나중에 Iulius로 바뀜·7월·July), Sextilis(나중에 Augustus로 바뀜·8월·August), September(9월·September), October(10월·October), November(11월·November), December(12월·December)의 순이다.
야누아리우스(1월)는 야누스(Janus) 신에서, 페브루아리우스(2월)는 정화한다는 뜻의 Purificatio에서 유래했다. 마르티우스(3월)는 군신 마르스(Mars)에서, 아프릴리스(4월)는 꽃이 핀다는 뜻의 Aperio에서, 마이우스(5월)는 여행과 상업의 신 Mercurius에서 파생했고, 유니우스(6월)는 유노(Iuno) 여신을 기리는 달이다. 퀸틸리스(7월)는 3월부터 5번째 달이고, 섹스틸리스(8월)는 6번째, 셉템베르(9월)는 7번째, 옥토베르(10월)는 8번째, 노벰베르(11월)는 9번째, 데켐베르(12월)는 10번째 달이라는 의미이다. 달의 순서를 바꾸는 바람에 7번째, 8번째, 9번째, 10번째 달이라는 뜻의 이름이 9월, 10월, 11월, 12월로 불리어 오늘날에까지 이르고 있다.
라틴어에서 직접 파생되지 않은 영어도, 달의 이름을 보면 역시 로마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을 알 수 있다. 나중에 7월을 Iulius(율리우스)로 바꾼 것은 '율리우스 카이사르'(영어로는 줄리어스 시저)가 태어난 달을 기념한 것이고, 8월을 Augustus(아우구스투스)로 바꾼 것은 초대 제정황제 '아우구스투스'를 기념한 것이다. 9월도 하마터면 '티베리우스'로 바뀔 뻔 했지만 2대 황제인 티베리우스가 거절하여 이름은 살아남게 된다.
누마의 달력은 기원전 46년에 이르러, 율리우스 카이사르에 의해 새롭게 정비된다. 카이사르는 태양력을 기준으로 2월은 28일, 나머지 달은 31일 또는 30일로 하여 1년을 지금처럼 365일로 정하고, 4년 마다 윤년을 도입하여 2월을 29일로 하였다. 이것을 '율리우스력'이라 한다. 그러나 율리우스력의 1년은 평균 365.25일이므로, 실제 천문학적인 길이보다 0.0078일(128년당 1일)이 길어서 세월이 지남에 따라 날 수의 편차가 증가하였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기 위한 개정이 필요하게 되었다.
교황 그레고리13세 새 규칙 제정
그리하여 1582년에, 교황 '그레고리 13세'는 10월 4일 다음 날짜를 곧바로 10월 15일로 정하고, 그 간에 누적된 10일의 오차를 제거하였다. 그리고 율리우스력보다 편차가 적게 나는 새로운 윤년 계산방법을 도입하였는데, 규칙은 율리우스력처럼 4년마다 한 번씩 윤년을 두지만, 100으로 나누어서 떨어지는 해는 윤년에서 제외시키고, 다시 400으로 나누어서 떨어지는 해는 윤년이 되도록 하였다. 이 규칙은 400년마다 반복된다. 이것이 '그레고리력'이고 오늘날까지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달력이다. 그레고리력은 대략 3천333년마다 하루가 길어지는 편차를 가진다. 우리나라는 조선시대인 1896년 1월 1일(건양 원년)부터 그레고리력을 처음으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하늘의 문지기로서 한 해를 여는 신이며, 시작을 의미하는 모든 사물의 출발점의 신이기도 한, 앞과 뒤 두 얼굴의 야누스로부터 유래된 새해 1월을 맞아, 달력에 숨어있는 오래된 역사를 한번 들춰보았다.
2. 우리나라의 달력
인간은 하루와 1년이라는 시간의 흐름을 어떻게 알았을까? 최초의 달력은 해와 달, 그리고 별의 움직임을 관측하고 기록해 만들어졌다. 낮과 밤의 변화, 달이 차고 기우는 현상을 통해 우리 조상들은 하루, 한 달, 일 년의 시간을 알아냈다. 특히 태양과 달의 변화는 아주 오랜 옛날부터 시간의 척도로 사용됐다. 우리 조상들은 달의 주기를 기본으로 한 태음력과 태양의 운행을 기본으로 한 태양력을 모두 합한 ‘태음태양력’을 사용하였다.
1-a. 시간의 측정
인간은 천체의 규칙적인 움직임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시간에 규칙성을 부여했다. 태양은 제일 먼저 인간이 시간을 인식하게 한 천체이다. 태양의 움직임으로 시간으로 재는 해시계는 인류가 제일 먼저 이용한 시간 측정 도구이다. 천문도는 별과 행성의 위치와 움직임을 기록한 지도이다. 천문도에 담긴 천체의 규칙은 하루[日], 한 달[月], 절기(節氣)가 되어 달력에 기록되었다.
1-b. 달력과 권력
20세기 전까지 달력을 만드는 권한은 국가에 있었다. 제왕의 절대 권력은 하늘로부터 나온다는 생각 때문에 하늘을 관찰하고 기록하는 일은 지배자의 영역에 속했다.
중국이나 한국의 역대 왕조는 정확한 달력을 만들기 위해 온 힘을 기울였다. 나라에서는 천문학자를 고용하여 달력을 만들고 그것을 백성들이 사용했다. 통일된 달력이 잘 사용되고 유지되는 것이 곧 중앙정부의 권위를 세우는 일이었다.
2부. 책력의 시대
조선시대 달력은 특징에 따라 역서(曆書) 혹은 월력(月曆), 책력(冊曆)이라고 부른다. 특히 조선시대 달력은 책 형태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책력이라는 이름을 많이 사용했다.
책력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을 나열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농경생활의 지침서로서 또는 길흉화복에 따른 일상의 지침서로서 활용되었다. 책력에는 월(月), 일(日)뿐 아니라 24절기와 예상 강수량, 풍·흉년 예측, 각종 길흉일 등이 적혀있다. 농경사회에서 24절기에 맞추어 제작된 책력은 요긴한 선물로서 귀중한 대접을 받았다. 조선 전기에 1만부 정도 발행되었지만 조선 후기에는 30만부 이상 발행될 만큼 책력의 중요성은 시대가 갈수록 높아졌다.
2-a. 역법의 발전 역법이란 천체의 주기적 현상을 기준 삼아 달ㆍ날짜ㆍ시간 등을 계산하는 방법이다. 조선은 국가적으로 천문학을 중요시 하면서 세종(世宗, 1397~1450) 때 중국력인 수시력과 대통력을 완전히 이해하고, 나아가 조선의 위도에 맞는 새로운 역법을 고안해 내는 수준에 이르렀다.
2-b. 대통력(大統曆) 중국 명나라의 역법인 대통력을 바탕으로 만든 달력이다. 우리나라에서 대통력이 처음 사용된 것은 조선 건국 이전인 1370년(공민왕 19)부터이다. 이후 1653년(효종 4)에 시헌력(時憲曆)으로 개력할 때까지 대통력은 283년간 조선의 공식 달력으로 사용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1580년 경진년 대통력
3. 서양달력
율리우스력
셰익스피어의 희곡 등에서도 잘 알려져 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Julius Caesar)는 독재자라로서 모든 권력을 장악하였지만, 그는 달력에도 큰 관심을 가져 1년 365일의 달력을 만들었다(46 B.C.). 이 달력이 소위 "율리우스력(曆)"(the Julian calendar)이다.
카이사르는 먼저 계절과 달력을 일치시키는 것에서 개혁을 시작하였다. 여하튼 달력이 3개월이나 어긋나 있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23일간의 윤월을 터미날리아의 바로 뒤에 배정하는 것만으로는 해결되지 않고, 다시 11월과 12월 사이에 67일간의 제2 윤월을 두었기 때문에, 기원전 46년이라는 해는 실로 445일이라는 1년이 되었다. 느긋하고 서두르지 않는다는 당시의 로마인도 정말로 혼란스러웠을 것이다. 이 해를 "혼란스런 해"(annus confusionis)라고 이름을 지었다. 그러나 혼란스러웠던 것은 그 이전의 백년간이었고 그 혼란을 수정한 해였던 것이다.
카이사르는 이어서 "야누아리우스"를 연초(年初)로서 정식으로 지키게 정하였다. 이 때까지도 정치적인 공개적인 장소에서는 "율리우스력"에 의하여 정식으로 1월이 연초로 정해지고, 이것이 현재 우리들이 사용하고 있는 달력의 연초가 정해진 최초로 되었다. 따라서 September이 정식으로 9월이 되었던 것은 이 때부터이다. 그 다음에 카이사르는 1년을 365.25일로 정하고 평년을 365일로 하여 표에서처럼 각 달의 일수를 정하였다. 즉 홀수 달을 31일로 하고 짝수 달을 30일로 하였다. 짝수 날을 싫어하는 로마인의 풍습을 타파하고 30일의 달을 만든 것은 독재자 시저라면 가능하였던 것이다. 다만 원래 날짜가 적었던 2월은 적은 달로 하고 29일로 정했다.
그런데 카이사르는 1년을 365.25일로 정하였으므로 4년마다 1일의 "윤일"(閏日)을 넣어서 1년 366일의 윤년을 설정하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4년간에 1일이 증가되어 평균 365.25일이라는 현재의 태양년에 매우 가까운 달력이 탄생하게 되었다. 처음에 카이사르는 2월말에 윤일을 두려고 하였던 것 같으나, 터미날리아를 연말로 하는 관습이 너무 강하였으며, 軍神의 달(月), 3월의 하루 앞의 날이라는 눈에 띄는 시기에 윤일이 들어가는 것은 어색하게 보였다. 홀수를 존중하는 습관을 타파한 권력자 카이사르도 민중의 긴 전통 앞에는 굴복하고, 결국 윤일은 윤월(메르케도니우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터미날리아의 23일과 다음 날인 24일 사이에 끼워 넣는 것으로 하였다.
여기까지의 경위로 알게되겠지만 고대 로마의 위정자들은 자신의 공적이나 명성을 남기는데는 달력에 한정한다고 생각한 것 같고, 카이사르도 예외는 아니었다. 자기가 탄생한 7월 "퀸틸리스"를 자기의 이름에 연유하여 "율리우스"(Julius)라고 이름을 고쳤다. 이것이 현재 영어(July)의 어원이 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개정한 달력
카이사르의 사망 후에 달력을 관장하는 위정자(爲政者) 중에 "율리우스력"의 윤년을 두는 방법을 틀리게 한 사람이 나왔기 때문에 달력과 계절이 바르게 맞았던 율리우스력은 30년 사이에 3일이 남는 어긋남이 생겨서 1년이 368일이 되었다. 이것은 당시의 계산법에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4년마다"라는 의미를 로마 방식으로 그 해도 계산에 넣는 것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3년마다"라고 해석하여 3년마다 두었던 시기가 있었던 때문이다.
그런데 카이사르를 뒤이은 아우구스투스는 달력의 3일의 어긋남을 "율리우스력"에 대한 모독일 뿐이어서 B.C. 6년에서 A.D. 4년까지의 10년간에 3회 윤년을 생략하고, 다시 A.D. 8년부터 율리우스력의 규정대로 "4년마다" 윤년을 두었다. 그래서 달력은 다시 태양의 운행과 일치하게 되었지만, 그도 율리우스력에 수정을 가하였다.
율리우스력을 보면 1월에서 6월까지에는 로마에 중요한 신의 이름이 나열하고 있는데, 7월에는 카이사르의 이름이 붙어 있다. 그것을 본따서 아우구스투스도 달력에 이름을 남기려고 하였다. 그는 트라키아, 악팀의 싸움에 승리를 한 8월, "섹스틸리스"의 이름을 전승기념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변경시켰다. 황제인 자신의 달이 다른 달보다 날짜가 적은 것은 자신의 위신에 관한 것이므로 8월을 31일로 늘리고, 그 대신에 2월을 28일로 줄인 것이다. 그 결과로 7월, 8월, 9월의 31일의 달이 3개월이나 이어졌다. 아우구스투스는 큰 달과 작은 달이 교대로
배열되게 9월을 30일로 하고, 10월을 31일, 11월을 30일, 12월을 31일로 정하였다. 홀수 달이 큰 달이라는, 모처럼 정연하게 조정된 달력이 아우구스투스에 의하여 흐트러졌다. 아우구스투스는 2월을 28일로 하고, 윤년은 율리우스력에 정해진 그대로 행하였다.
달력의 이름에 관해서는 그 후에도 이어진다. 아우구스투스의 뒤를 이어 로마 황제가 된 티베리우스(Tiberius)도 측근으로부터 11월을 "티베리우스"로 고쳐 달력에 이름을 남기라고 진언되었다. 그러나 그는 「황제가 13인이 되면 어찌할 것인가」라고 말하고서 진언을 거절하였다고 한다. 악명 높은 네로(Nero) 황제(A.D. 54-68)도 4월을 "네로네우스"(Neroneus)라고 고쳤지만 네로의 사후에는 바로 원래의 4월로 환원되었다. 9대 황제 도미티아누스(Domitianus, A.D. 81-96)는 자신을 신격화하여 로마인들로부터 "우리의 주(主)이시며 하나님"(Dominus et Deus noster)으로 부르게 하였고, 황제 및 황제상(像)에는 꿇어앉아서 예배를 하도록 강요하였고, 따르지 않는 사람은 사정도 없이 죽였다고 한다. 요한계시록에서 「짐승」(beast)으로 언급된 폭군(계 13:1)인데, 이 도미티아누스도 10월을 자기의 이름으로 고쳤다. 그 뿐만 아니고 그는 9월을 "게르마니쿠스"(Germanicus)로 고쳤다. 게르마니쿠스는 3대 황제 칼리굴라(Caligula, A.D. 37-41)이다. 도미티아 누스는 이 칼리굴라를 경애하여 그의 이름을 남기려고 하였던 것이다. 물론 9월, 10월의 이름이 변한 것은 도미티아누스가 생존하였을 때 뿐으로, 사후에 원래의 이름으로 환원되었다.
아우구스투스가 정했던 12월의 명칭은 유럽 세계를 중심으로 많은 나라에 전해져서 각국의 12개월의 어원(語源)으로서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레고리오력
율리우스력은 1년의 길이를 365.25로 정하였다. 그러나 1태양년은 365.24219879일이므로 율리우스력에서는 1년간 0.00780121일(약 11분14초)만큼 실제의 태양의 운행보다 달력의 쪽이 길다. 이 오차는 128년이 경과하면 거의 24시간 요컨대 1일에 가까워진다.
( 365.24219879 365.25) 128 0.99855488 1
128년이 지나면 달력의 쪽이 1일 빨라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원래 로마인들의 달력의 발상(發想)에는 「새로운 해(年)의 시작은 낮과 밤의 길이가 같게 되는 춘분부터」라는 생각이 있었으므로, 달력의 달의 순서나 이름이 여러 번 변하기는 하였지만, "봄은 춘분에서 시작한다"라고 하는 발상은 계속하여 강했다. 이것은 터미널리아로서 연말이라고 생각하는 습관을 시저조차 변경시킬 수 없었던 것이었다.
다시 4세기, 황제 콘스탄티누스1세 때에 로마가 기독교를 국교로 인정하고서는 기독교 최대의 축제인 "부활절"이 로마인에게는 지금까지의 춘분과 같이 1년의 중요한 절기가 되었다. 그런데 콘스탄티누스는 A.D. 325년에 부활절을 다음과 같이 정하였다. 「부활절은 춘분을 지난 후에 오는 첫 만월(滿月) 다음의 첫 일요일로 한다」(니카이아 기독교회의). 현대에서도 부활절의 날짜는 회의에서 정해진 그대로 3월 22일에서 4월 25일까지의 사이에서 정해진다. 그런데 기독교의 행사는 거의가 부활절을 기준으로 하여 정해져 있다. 더구나 춘분은 「3월 21일」로 정해졌다. 낮과 밤이 같아지는 날을 3월 21일로 달력에서 정했다. 그것도 1일에 11분 14초 오차가 있는 율리우스력에서 결정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세월은 흘러서 16세기 로마 교황 그레고리우스13세(Gregorius ⅩⅢ)의 시대에 이른다.
율리우스력의 일차(日差)인 11분14초는 쌓이고 쌓여서 16세기에는 오차가 10일이나 되었다. 그 때문에 달력에서 3월 21일에 와야 할 춘분이 실제로는 3월 31일이 되었다. 달력에서의 춘분보다 10이나 빠르게 낮과 밤이 같아졌다. 기독교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춘분은 「3월 21일」로 정한 이상, 그 어긋남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춘분의 날을 바르게 달력에서의 날짜로 고정해 둘 필요가 있는 것은 당연하고, 기독교의 권위가 걸린 것이다.
그레고리우스13세는 다음과 같이 영단(英斷)을 내렸다. 1582년 10월 4일의 다음 날을 10월 15일로 하여, 그 사이의 10일간을 달력에서 생략하였다. 그 결과로 역사상 1582년 10월 5일에서 14일까지의 날자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춘분은 다시 3월 21일에 오게 되었다. 그러나 그대로 두면 춘분의 어긋남이 반복한다. 그래서 그레고리우스는 "윤년"을 정하는 것을 다음과 같이 고쳤다. 「서력 년이 4로 나누어지는 해를 윤년으로 한다. 다만 서력 년이 100으로 나누어져도 400으로 나누어지지 않을 때는 평년으로 한다. 윤일은 2월 28일의 다음 날 29일로 한다」 이것이 소위 "그레고리오력(曆)"(the Gregorian calendar)이다. 이것은 4년마다 윤년이 오는 점에서는 율리우스력과 변하지 않으나, 400년 사이에 3회 윤년을 생략한다는 점이 새로운 발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하자면 그레고리오력에서는 「400년간에 97회 윤년을 설정한다」고 말하는 것으 로 된다. 즉 율리우스력으로는 400년간에 윤년이 100회 있는데, 그레고리오력에서는 윤년이 97회로 줄어든다. 이렇게 되면 [(365 3) (366 97)]/400 365.2425가 되어 1태양년에 가까워진다. 이것이 그레고리오력의 원점이다.
이것으로 진정한 1태양년과 그레고리오력의 차이는 년간 0.00030121일 뿐이다. 요컨대 달력의 쪽이 태양의 운행보다 1년간에 약 26초만큼 빠르다. 물론 26초의 어긋남도 0.00030121 3319 0.99971599 1이라는 계산과 같이 3391년이 경과하면 거의 1일의 오차로 된다.
이 그레고리오력은 현재 세계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달력이지만, 1582년에 제정되자 바로 세계 각국에 전파되어 채용된 것은 아니었다. 그레고리오력은 로마 교황에 의하여 개정된 달력이라는 것에서, 이탈리아,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 폴란드, 헝가리 등의 카톨릭교 국가에서는 바로 채용되었으나, 프로테스탄트의 여러 나라에서는 처음에는 종교적인 반발 때문에 거부되었다.
영국, 스웨덴, 덴마크 등이 그레고리오력을 채용한 것은 200년 늦게 18세기 후반이다. 영국에서는 1752년에서야 그레고리오력을 채택하였다. 그 때 11일을 생략하였다. 그리스 정교의 나라에서는 유대와 더불어 부활절을 축하하였으므로, 그레고리오력의 채용에 300년의 세월이 소요되었다. 그리스 정교에서는 1923년에 그레고리오력을 채택하였는데, 그 때 13일을 생략하였다. 중국에서도 1912년 신해혁명 때에 이 그레고리오력을 채택하였다.
그레고리오력이 미친 다른 개혁은 1년의 시작으로서 January를 일반적으로 채택하였다. 그 때까지 일부의 국가에서는 새 해의 시작을 December 25일에서 시작하였고, 다른 나라들은 January 또는 March 25(1752년 이전에 영국에서처럼)에 시작하였다. 구 달력과 신 달력 사이의 변화를 18세기의 문서에서 율리우스력과 그레고리오력으로 표기된 날짜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아이사크 뉴턴의 생존은 율리우스력으로는 1642. 12. 25-1727. 3. 20이고, 그레고리오력으로는 1643, 1, 5-1727, 3, 31이다. 죠지 워싱턴의 탄생일은 율리우스력으로는 Feb. 11, 1731이고, 그레고리오력으로는 Feb. 22, 1732이다. 율리우스력에서는 3월에 새 해가 시작하였던 것이다.
기원(紀元)에 대하여
달력의 연월일은 춘분과 달을 기준 점으로 하여 정해졌지만, 시(時)의 흐름을 정하기 위해서는 문제가 되는 것이 기원이다. 기원은 건국이나 독립과 같은 국가적 행사나 종교적 축제를 기념하여 만들어진 예가 많다. 기년법(紀年法)을 채택한 것은 후대의 일이었다. 먼저 그리스의 세레우코스 왕조 기원의 연대가 성서에 보인다(마카베오상 1:10; 14:1; 16:14)인다. 「…그는 그리이스 왕국 백 삼십 칠년에 왕이 되었다」. 이어서 랍비(rabbi) 시대에는 천지창조를 기원(紀元)으로 하는 소위 "유대 기원"이 있다. 기원전 3761년에 세계가 창조되었다고 생각하여, 이것을 "유대 기원"의 원년으로 하였다. 이스라엘에서 현재 사용되고 있는 기원(紀元)이다. 한편 그리스인들은 B.C. 776년 제우스의 제전(祭典)경기로서 제1회 올림픽경기가 개최된 것을 기념하여 "올림피아 기원"을 원년(元年)으로 하고, 4년마다 구분하여 "올림피아드"라고 하여 연(年)을 기술하였다. 로마에서는 로물루스가 로마를 건국한 B.C. 753년을 "로마 기원" 원년으로 하여 연월을 계산하는 기준점으로 하였다.
그 후에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 A.D. 245-313)가 로마 황제가 되면서, 기독교를 이단으로 취급하여 교회를 파괴하고 성서를 몰수하고 기독교인의 시민권을 박탈하여 노예로 하였다. 그 때까지 사용되었던 기년법(紀年法)을 폐지하고, 자신이 즉위한 서력 284년을 "디오클레티아누스 기원" 원년으로 정하였기 때문에 연대는 이 해를 기준 점으로 하여 계산되었다. 그 후에 그리스도교는 로마의 국교로서 융성하였지만, 기년법은 탄압자인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정했던 것을 사용하였다.
이 기년법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던 것은 로마의 대수도원장 Dionysius Exiguus로서, 그는 그리스도교를 탄압했던 디오클레티아누스의 기원(紀元)을 "악마가 정했던 기원"으로 거부하고, 그리스도의 탄생한 해를 기원으로 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하였다. 그 결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기원 248년을 "서력 기원" 532년으로 하여, 부활절의 날짜를 정하는 달력을 만들었다. 이 서력 기원(the Christian Era)은 로마 교황 니파디우스 2세의 인가를 받아서 교회에서 사용하게 되어(일반 학자들은 로마 기원을 고집하여 역사를 쓴 것 같은데), 9세기에는 유럽에 보급되고, 18세기 후반에는 세계에 널리 사용되게 되었다.
그런데 디오니시우스가 그리스도가 탄생하였다고 생각했던 해에 그리스도가 정말로 탄생한 것인가. 신약성서에 예수의 탄생 시기가 헤롯(Herod)왕이 통치하고 있던 기간으로 기록하고 있다. 「헤롯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마 2:1). 전통적으로 학자들은 헤롯이 B.C. 4년에 죽었기 때문에(Schurer) 적어도 예수는 그전에 태어났음이 틀림없고 서력 기원과 사리가 많지 않는다.
「모든 사람이 호적하러 각각 고향으로 돌아가매」(눅 2:3). '호적'에 해당하는 원어 '아포그라포'는 '등록하다', '기록하다'(눅2:3, 5; 히 12:23)라는 말로 세금 징수를 위한 파피루스로 된 공식 기록부를 가리키며, 이 기록부에는 성명, 직업, 재산, 친척관계를 기록하도록 되어 있다. 요컨대 세금징수를 위한 조세 등록으로 일종의 인구조사였다. 요셉도 인구조사 때문에 정혼한 마리와 함께 베들레헴으로 가서, 마리아는 마구유에서 예수를 출산하였다(눅 2:1-7). 이 인구조사는 B.C. 7년에 황제 아우구스투스에 의한 것과 B.C. 6년경 시리아 총독에 의한 것의 두 가지의 해석이 있다(눅 2:1, 2). 명령이 전달된 시간을 고려하면 인구조사는 B.C. 5년경이거나, B.C. 7년경으로 된다. 결과적으로 디오니시우스의 설은 틀렸으며, 예수의 탄생은 B.C. 4년이라는 것이 정설(定說)로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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