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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비전이라는 뜻에 꿈을 주제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사람들은 꿈과 관련해서 이야기를 참 많이 합니다. 이는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나 기업들도 꿈이나 비전에 대해서 관심이 많습니다. 지금의 상황이 좋지 못하니 당신은 더 나은 꿈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꿈에 대한 주제도 매우 다양합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서부터 최근에는 종교와 교육, 스포츠까지 정말 사회 모든 분야에서 꿈이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사실, 꿈에 대한 주제는 어른이나 아이들, 국내나 국외 할 것 없이 이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생각했던 주제이기 때문에 저는 이 시간 다시 꿈을 주제로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전하지 않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꿈에 대한 주제를 이제는 진지하게 한 번쯤은 되물어봐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을 하면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열이면 열 사람, 꿈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세상이 이렇게 꿈을 잃어버린 데에는 사람들에게 꿈이 없었기 때문이라고는 말을 못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신 꿈도 매우 귀한 것입니다. 그것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다만 우리는 그 꿈에 대한 질문을 다시 고쳐서 던져야 합니다.
사람들은 꿈과 비전에 대해서 관심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꿈에 대한 첫 번째 질문도 늘 ‘당신은 꿈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질문에 답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꿈에 대해서 그렇게 다양한 생각을 가지고 많은 말을 하는 것 같지만, 꿈에 대한 이야기는 이처럼 딱 두 가지로 요약 됩니다.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라고 묻고, ‘그래서 지금 당신은 그 꿈을 이루었습니까?’에 대해 답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 재미있는 것은 오늘날 꿈에 대한 이야기들이 국가나 기업, 개인들에게 그렇게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또다시 꿈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지금까지 우리가 해 왔던 꿈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우리사회를 그 꿈대로 아름답게 만들어가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꿈은 이처럼 ‘무엇입니까?’라고 질문하고 ‘예’나 ‘아니오’로 대답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어렸을 때는 선생님이라는 직업이 사람들에게 존경도 많이 받고 안정된 직업이라 많은 아이들이 선생님이 되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실제로 교대에 진학해서 선생님이 된 친구도 있습니다. 그 친구는 꿈을 이룬 것입니다. 그러나 나머지 친구들은 꿈을 이루지 못한 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사이에서 꿈을 물어보는 것이 행복하지 않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사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사회가 그렇게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터키 땅 위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우리 터키 이즈미르 한인교회를 세워주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곳에서 만나는 대상들이 무슬림들이든, 아니면 현지 크리스찬들이든 마치 주님이 어린 양들을 품어 보살펴 주시는 것처럼 목양적인 관점으로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을 만나면서 배우게 되는 것은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상대적인 박탈감 때문에 이곳 무슬림 이웃들도 어둔 곳에 계속 머물러 사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지난 한 주간 동안에는 우리 무슬림 이웃 한 가정이 많이 아팠습니다. 지난 주 설교 때도 말씀 드렸던 마흐뭇트 아저씨 가정입니다. 아저씨를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마흐뭇트 아저씨를 보면 초고도 비만에다 게으른 사람으로만 보여질 텐데요. 과거 그는 굉장히 명석한 엘리트였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현재 에게 국립대학 총장까지 지내신 분이고, 마흐뭇트 아저씨 역시 부유한 집안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유복한 환경이 오히려 화가 되었을까요? 그는 젊은 시절 흥청망청 돈을 써 가면서 미래를 전혀 준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아저씨의 어머니가 지병으로 오랜 시간을 일어나지 못하셨는데, 그때 마흐뭇트 아저씨는 하던 일을 다 그만두고 어머니를 간호하는 일만 했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체중은 점점 늘었고, 일을 그만 두었으니 주변의 친구들도 하나 둘씩 관계를 잃어버렸습니다. 저희를 처음 만난 때가 2015년도 2016년 그 사이였는데, 아저씨는 너희 가족들을 보고 너무 좋아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지난 수년 동안 자신의 집을 찾아 온 손님들이 하나도 없었는데, 저희가 와 줘서 너무 반갑다고 하신 겁니다.
그래서 저는 마흐뭇트 아저씨를 매번 만나면서도 그분이 다시 꿈을 가지고 일어나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꼭 기도를 해 드립니다. 그럼 아저씨는 고맙다면서 기도해 달라고 하십니다. 저는 그 댁의 상황을 잘 알기 때문에 지난 주 페이자의 사고 소식을 듣고서 더 마음이 슬펐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번 주에는 아이 상태가 어떤지 궁금해서 그의 어머니 날란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날란은 딸의 이식수술 경과가 좋게 나와서 살이 잘 아물면 된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날란의 목소리가 평소와 같지 않아서 물어 보니까, 자신도 부인과 관련해서 수술을 해야 하는데 직장에서 병가를 15일 낸 상태라고 했습니다. 저는 날란과 통화를 하면서 마음이 많이 슬펐습니다. 그 무슬림 가정에도 지금 당장 필요한 것은 그 어두운 그늘에서 빨리 나와서 밝은 곳에서 사는 것인데, 하는 일마다 안 되고 아버지 어머니 할 거 없이 자녀들까지 다 아픈 거예요.
무슬림 가정의 예를 든 것이지만 문제는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어둠에 갇혀 우울하게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이 시간에는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꼭 있어야 하는 그 꿈에 대해서 “나의 꿈은 무엇인가?”로가 아니라 “나에게 꿈은 어떤 것인가?”라는 주제로 말씀을 전하고자 합니다.
이제 다 함께 본문을 읽겠습니다. 마가복음 2장 13절과 14절입니다.
v.13 예수님께서 다시 호수로 가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왔고,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르치셨습니다. v.14 예수님께서 호숫가를 걸으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서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본문의 시작은 예수님께서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부르시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열 두 명의 제자들 가운데 누가 레위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었는지 생각해 보면 바로 떠오르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레위라는 이름보다는 우리에게 마태라는 이름이 더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레위의 또 다른 이름이 마태입니다.
재미있게도 똑같이 마태를 부르신 장면에 대해서 마태복음 9장 9절에서는 그를 ‘마태’라고 했고, 마가복음 2장 14절에서는 그를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어떤 이름이 더 진짜였고, 더 먼저 불려졌는가는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여기에서 더 눈 여겨 봐야 봐야 할 것은 마태 자신이 기록한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자기를 마태라고 부르셨다고 기록했다는 것입니다. 마태라는 이름은 지난 주에 말씀 드린 것처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입니다.
그렇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이기 전에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로만 불려졌을 것입니다. 그는 세관으로서 자기 민족의 돈을 거둬 드리는 것을 넘어 서서, 불법으로 재산을 쉽게 늘려갔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무엇을 해도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알패오의 아들 레위라는 뜻은 그렇게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았던 때에 불려졌던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을 때 마태라고 부르셨는지 아니면 레위라고 부르셨는지, 제3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가 예수님의 제자가 된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는 그 작은 차이가 마태 자신에게는 매우 중요했던 거 같습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꿈에 대한 메시지도 바로 이것인데요. 마태는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노력했던 사람도 아니었고, 예수님이 제자가 되고서도 남들에게 그 자리를 자랑했던 사람도 아닙니다. 그는 이미 사람들이 모두 부러워하는 세관의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다시 무엇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이나 계획은 전혀 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을 때, 레위가 아니라 마태로 부르셨다고 굳이 기록한 것은 그에게 무엇을 의미할까 하는 것입니다. 그는 오늘날 사람들이 그토록 관심이 많은 꿈에 대해서, ‘나는 무엇이 되어야 하겠다!’는 그 꿈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마태라는 이름은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뜻이라고 했는데요.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의 선물 마태야!”라는 것이 참 기뻤다는 것입니다. 그에게 꿈은 하나님의 선물, 마태로서 두 번째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가 더 중요했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시작하면서 이제는 꿈에 대한 질문이 달라져야 한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전에는 ‘당신의 꿈이 무엇입니까?’라고 물었지만 이제는 ‘당신의 꿈은 어떤 것입니까?’로 바꾸어서 물어야 합니다. 당신의 꿈은 무엇입니까로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에 대한 답도 예나 아니오로 답해야 하기 때문에, 그 목표를 이루지 못한 사람들은 남은 삶을 상대적인 박탈감을 느끼면서 살아가야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는 ‘여러분의 꿈은 어떤 것입니까?’로 다시 물어 보기를 원합니다. 그럼 마태와 같은 사람들은 가장 먼저 자신의 이름을 댈 것입니다. ‘네, 예수님이 저를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하셨습니다.’라고 말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과 삶이 그만큼 귀하고 다는 것을 날마다 간증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다시 본문을 함께 보시기를 바랍니다. 본문을 보면 ‘다시 예수님께서 호수로 가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그 호수로 다시 가셔야 되는 목적이 있으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다시 호수로 가셨는데, 그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나아왔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많은 사람들’이란 아마도 전 장에서 기록됐던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들, 병든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을 다시 만나시기 위해서 같은 장소로 나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귀신들린 사람들, 병든 사람들을 ‘다시’ 만나러 가셨던 것일까요? 그리고 이들은 무엇 때문에 ‘다시’ 예수님께 나아왔던 것일까요? 먼저 이들이 예수님께 다시 나아갔던 1차적인 목적은 자신의 병을 고침 받기 위해서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귀신들린 사람들, 병든 사람들을 다시 만나러 가신 이유는 이들이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 나오기를 바라셨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들에게 온 빛을 영접하기를 바라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본문에서는 이들이 예수님을 영접했다는 것은 기록된 것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장 4절과 5절 말씀에서는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그 분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 생명은 세상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었습니다. 그 빛이 어둠 속에서 빛을 발했지만, 어두움은 그 빛을 깨닫지 못했습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함께 기억해야 될 것은 예수님은 다시 그들을 만나기 위해서 호수로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역시도 다시 예수님께 나아갔다는 것입니다. 빛이 왔으나 어둠이 빛을 깨닫지 못했어도, 빛은 또다시 어둠을 비춘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가 터키 이 땅에서 어둠에 갇혀 살아가는 무슬림 이웃들을 만나고 또다시 만나야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계속해서 빛 된 삶을 그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도 큰 믿음의 도전을 드립니다. 아마도 여러분들이 이곳에 만나시는 분들은 모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빛이 왔지만 여전히 어둠에 머물러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거짓말도 할 것이고, 성실하지 못해서 게으른 사람들도 만날 것입니다. 답답하고 많이 화가 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삶을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들은 빛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꿈은 어떤 것인지’를 여러분들의 삶으로도 직접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터키에서도 밝고 능력으로 살아가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15절부터 17절까지 다 함께 읽겠습니다.
v.15 예수님께서 레위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계실 때였습니다. 여러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랐기 때문입니다. v.16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어째서 너희 선생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느냐?” v.17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의로운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
계속해서 꿈을 주제로 말씀을 전합니다. 이제 본문에는 레위의 삶을 세관으로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복되게 살 수 있도록 두 번째 삶을 주셨던 예수님의 삶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이는 “당신의 꿈은 어떤 것입니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으로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레위의 집에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아마도 레위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서 예수님과 제자들을 초대해서 식사대접을 했던 거 같습니다.
하지만 그곳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초대한 레위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곳에는 다른 세리들뿐만 아니라 죄인들도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스스로 따랐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구원할 메시아로 오셨지만, 주님은 성전에서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더 많은 삶의 분량을 빛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그때 여러 세리들과 죄인들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많이 따랐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 장면을 바리새파 율법학자들이 보고서는 제자들에게 “어째서 너희 선생님은 세리와 죄인들과 먹고 마시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들은 선생님이 계셔야 할 곳은 성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이 제자들에게 하는 말을 들으시고,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 없고, 병든 사람에게 의사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의로운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고, 죄인들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꿈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병든 사람들에게 의사가 되어 주시는 것이었습니다. 의로운 사람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오신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주변에는 항상 아픈 사람들이 많았구요. 죄인들이 많았습니다. 참으로 귀한 것은 그 죄인들 가운데 오늘 마태를 부르시고 그가 주님을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습니까? 어둠이 빛을 깨달을 수 있도록 빛은 어둠을 계속해서 비춘다는 것입니다. 한 번 만나고 두 번 만나고, 죄인들과 식사를 함께 하면서 여러분들의 빛의 삶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당연히 어둠은 빛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빛이 어둠을 거부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빛 안에는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터키인들과 함께 어울려서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의 하루하루의 삶을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건강하시고 날마다 행복 하시기를 바랍니다. 어둠에 갇혀 사는 사람들에게 빛 된 삶을 보여주시는 아름다운 삶이 영원까지 함께 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다 함께 기도하시겠습니다.
2018.06.03, <터키 이즈미르 한인교회>, 설교: 임병인 목사
※ 본 교회는 터키 한인교회로서 터키인들을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매 주 한인 예배로 모입니다.
첫댓글 터키인들에게 구원의 등불이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이 잔잔한 호수에서 여울이 점점 퍼지듯이 이즈미르교회가 하나님의
크신 섭리와 계획에 쓰임받는 사명을 감당하고 이들에게 꿈과 비젼을 주는 아름다운 교회가 되길 기도합니다
아멘! 교회가 세워지면서부터 부모님의 기도로 힘내어 잘 사역해 나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주신 모교회와 성도님들의 중보로 무슬림 이 땅에서 빛된 사명을 계속해 나갑니다. 모든 일에 감사드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인 기쁨과 은혜가 한국과 터키 위에 가득 넘치게 하고 계심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