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1부터 2박3일간 상해 윤봉길의사 기념관 방문 예정이다. 하나투어에서 임시정부
100주년기념으로 초등생5~6년11명, 후손6명, 스텝진6명,모두 23명을 후원하여 방문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12월12일 윤봉길의사가 일제강점기때 거사를 치른 홍구공원 윤의사기념관에서 윤의사 거사의 시종일관을 학생과 참가자들 앞에서 브리핑(Briefing)하는 목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줄 수 있을까 생각하며 자료를준비 했다.
1908년 윤봉길의사는 충남 예산 태어났고, 그의 호는 매헌이다.
1919년3.1운동이 일어나자 일제의 식민지 교육을 배척하고 1년전인 11살에 입학한 덕산공립 보통학교를 자퇴하고 사설학원 서당 오치서숙(마곡 성주록선생)에 들어가 학업에 열중했다. 그는<7언절구의 한시> 한시에 능통한 실력가였으며
1920년대 민족운동에 마음을 가졌다.
1927년은 개벽, 동아일보 등 신문을 구독 민족운동의 방향을 정립 해 나갔다. 또한 구매조합을 조직하여 농민의 경제 자립을 추구했다. 한편으로는 독서회를 통하여 문맹퇴치에 힘썼다.
1928년 부흥야학원을 설립해 농민의 자녀를 교육시켰고, "농민독본"을 지어 허례허식을 지향하는 교육정신과 주체적 민족정신의 확립및 근검 절약 그리고 근로정신에 대한 의식과 사상을 비탕으로
1929년 월진회를조직했다. 농민의 단결과 민족정신의 배양, 그리고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농촌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나라의 독립을 되찾기 전에는 일제의 압박으로 농촌운동이 성공할 수 없음을 깨닫고~~~!!!
1930년 3월 6일 중국으로 망명 하였다.
1931.5.8 상하이에 도착한 윤봉길은 한인동포 실업인 박진이 경영하는 중국 제품공사에 취직하여 말총모자 등을 만드는 직공으로 근무했다. 한인공우친목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1932년 이른 봄부터 상해의 홍구 일대에서 야채장사를 하며 일본군 정보를 탐지하였다. 그러던 중 박진의 소개로 임시정부 국무위원겸 한인교포단장인 백범 김구를 만나게 되었다. 이당시 김구는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계의 침체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 의혈투쟁을 계획했다. 백범의 첫 결실로서 1932.1.8. 한인 애국단의 이봉창으로 하여금 외왕을 폭사시키려 하였으나 불행히 성공하지 못했다. 하나, 이봉창 의거는 중국 내의 동포들과 독립운동계의 활력을 불어넣는 계기가 되었다. 그 뿐 아니라 전 세계에 한민족의 독립투쟁에 대한 열기가 식지않았음을 입증 하게되었다. 또한, 윤봉길에게는 일제에 대해 새로운 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윤봉길은 김구를 비롯한 다수의 독립운동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병략을 토론하였다. 의열투쟁의 기회를 열망한 윤봉길은 드디어 1932년 4월 29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1932년 1월 28일; 상해사변> 상해에 진주한 일본군은
4월29일 히로히토 일왕의 생일인 천장절을 일본군의 상해 점령 전승경축식을 홍구공원에서 거행키로했다. 상해에 있는 일본 거류민은 도시락 과 수통 그리고 입장권만을 휴대하고 참가하라고 상해 일일신문에 보도하였다. 윤봉길은 이를 살신구국할 절호의 기회로 판단하였다. 그 날의 전승경축식에는 상해 주둔 일본군사령부의 총사령관 이하 군정 수뇌들이 그대로 이동하여 식장에 모일것이다. 만약 상해사변의 원흉들을 일거에 제거 할 수 있다면 이봉창의 동경 의거보다 더 큰 용기와 자긍심을 동포들에게 줄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뿐만 아니라 수많은 중국군이 희생을 내고도 이기지 못했던 상하이사변 침략군 수뇌부를 폭파시키는 전과를 운봉길 혼자 해 낼 수 있기 때문이었다.
1932.4.26 살신구국의 결심을 한 윤봉길은 의거 4일 전 4월 26일 한인 애국단원단체 자격으로 김구 단장 앞에서, "나는 적성으로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서 한인애국단의 일원이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하기로 맹세하나이다." 라는 선서를 하고 최후의 준비를 서둘렀다.
1932.4.27~28 홍구공원에 가서 현지를 면밀히 조사하여 거사에 만전을 기하였다. 특히, 28일에는 홍구공원에 가서 오후5시까지 머물러 팻말을 보고 저격 대상인 일본군사령관 시라가와 대장과 해군함대 사령관 노무라의 설 자리와 그 주위에 모일 인물들까지 파악했다.
1932.4.29 <거사일> 아침 일찍 한 교포의 집에서 한인애국단의 김구 단장과 함께 아침식사를 했다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1개와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1개를 김구단장 으로부터 받아 어깨에 메고 손에 들었다.(김구단장의 요청으로 병공창병기주임 김홍일장군 주선으로병공청장 송식표가 기사 왕백수를 비밀리에 폭탄제조 지시를 했다. 윤의사는 출발직전에 자기가 찬 새시계를(600원) 김구가 찬 헌시계(60원?)와 바꾸어찼다. 의거 준비금으로 받은 돈의 나머지를 김구단장에게 돌려주며 택시를 타고 윤의사가 행사장으로 떠날때, 떠나는 택시에 탄 윤의사를 바라보며 백범의 두눈에 눈물이 흐르면서 "저세상에서 만나자."고 속말을 했다.
오전 7시 50분경 그는 공원 안으로 들어가 미리 작정해 두었던 지점에 이르러 폭탄 투척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홍구공원은 3만명의 인파가 모였다. 중앙의 식장을 중심으로 전면에 일본관민이 줄을 섰다. 그 앞에 일본학생이 서 있다. 그 좌.우에는 일본 육해군의 군대가 호위하고 있었다. 그 뒤 수 미터의 간격을 경비원들이 이중 삼중으로 경계하고 그 뒤엔 일반 군중이 모여 있었다.
상해사변의 원흉들이 죽음을 기다리며 착석 해 있었다. 윤봉길은 미리 보아두었던 뒷편의 군중 속에 들어가 투척장소와 시간을 맞추어 의거의 최후 준비를 하였다.
11시 20분 기념식 첫 순서인 관병식 이 끝났다. 두번째 순서인 축하식 순으로 일본국가 제창 끝날 무렵이었다.
11시40분 ★운명의 시간이 왔다!
윤봉길은 어깨에 메고있던 수통폭탄의 덮개를 벗겨들었다. 오른손에 수통폭탄을 쥐고 왼손으로 안전핀을 뺐다. 앞사람을 헤치고 2m가량 전진하여 단상 위로 정확하게 던졌다. 연이어서 도시락 폭탄을 던지려는 순간 주변의 일본 인들과 일경들이 붙잡아 폭행하여 실신했다. 그 폭탄은 그대로 노무라중장 과 시게마쓰의 면전에 명중하면서 폭발하였다. 일본 육군대장 시라가와는 전신에 24개의 파편에 맞아 5/24 죽었다. 제9사단장 육군총장 우에다는 다리가 절단됐다. 해군총사령관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는 실명했다. 주중공사 시게마쓰는 다리가 부러져 절름발이가 되었다. 거류민 단장이자 상해사변의 민간원흉 카와바다는 창자가 끊어져 즉사하였다. 이밖에도 단상에 있던 주중 총영사 무라이와 민단 간부인 도모도도 중상을 입었다.
1932.5.25 의거 직후 윤봉길은 일 군경에게 붙잡혔다. 상해 일본 헌병대에서 가혹한 고문과 취조를 받고 일제 상해 파견군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다
11월18일 오오사카 육군 위수형무소에 수감되어
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교외에 있던 한 작업장에서 26 발의 탄환을 맞고 순국하였다.
(결론) 윤봉길의 순국은 그의 뜻대로(살신구국~장부출가생불환: 사내 대장부는 집을 나가 뜻을 이루기 전에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 한국 독립운동의 새로운 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살신구국의 높은 정신을 영원히 기리게 하였던 것이다. 조국 광복을 위하여 생명을 초개와 같이 버린 의열사의 소원을 유시에서 볼 수가 있다.
25세 나이에 이국 땅에서 순국한 그의 유해는 1946년 일본에서 박열 이강훈의 주선으로 본국으로 봉환되어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정부에서는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에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을 추서하였다.
유시
강보에 싸인 두 병정에게
너희도 만일 피가있고 뼈가 있다면
반드시 조선을 위하여 용감한 투사가 되어라
태근의 깃발을 높이 드날리고
나의 빈 무덤 앞에 찾아와 한 잔 술을 부어 놓으라
그리고 너희들은 아비 없음을 슬퍼하지 말아라
사랑하는 어머니가 있으니
어머니의 교양으로 성공자를
동서양 역사상 보건대
동양으로 문학가 맹가가 있고
서양으로 불란서 혁명가 나폴레옹이 있고
미국에 발명가 에디슨이 있다.
바라건데 너희 어머니는 그의 어머나기 되고
너희들은 그 사람이 되어라
<윤봉길의사가 어린 두 아들에게 남긴 유시에 상해 홍구공원 가기에 앞서 두 눈가에 눈물이 서린다!!! 그리고 유복자인 나로서
왜 내 아버지 고 황도문장로 애국지사님은 윤봉깅 의사처럼 유시도 안남기셨는가? 아버지는 내가 어머니 뱃속에 있는지도 모르셨다던걸까?~~. 6.25 전쟁 9.28 수복 순국전, 강화읍 포로수용소에서 이러한 유시도 안남기시고 포승줄에 묶인채로 송악산에서, 괴뢰군의 총탄에 하늘나라로 가신것이 한스럽다. 얼마 안있으면 아버지를 볼 봄날이 올 것이기에 기대하니 심장이 요란스럽다 .뵙기 전에
부족하나마 나라를 위해 하나님 나라를 위헤 충성된 자로 남은 삶을 살 것을 다짐하고 역사를 아는 내가 될 것을 결심해 본다.>
★초등학새생대상으로 짧고 중요 요점만 추려서 설명할 준비를 할겁니다. 이글을 쓰기에 도움 주신 (사)독립유공자유족회 김삼열 회장님께 감사드립니다. 교정 해주시고 도와 주신 청와님 고맙습니다. 부족한 잔문의 글 읽어주신 유족회원님들 직계가족과 지인 님들 2019년도 12월 잘 보내시고, 대망의 새해 2020년 다시금 힘을 합칩시다! 화이팅!!!♥
첫댓글 염려 덕분에 상해 잘 다녀오고 윤봉길거사
브리핑 경건과 열성적으로 했어요.
홍커우 윤봉길기념관 앞에서 참가자와 촬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