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령의 9가지 열매 중에 두 번째 열매인 희락에 대해서 살피려고 합니다. 희락은 헬라어로 카라라는 단어입니다. 다른 번역본에서 보면 주로 기쁨이라는 단어로 번역이 되어 있어요. 희락이라는 단어는 약간 예스러운 단어인데 지금 우리가 좀 쉽게 이야기 할 수 있는 단어는 기쁨이라는 단어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던 것처럼 사랑은 성령의 9가지의 존재예요. 오래 참음도 자비도, 양성도, 충성도, 온유도, 절제도 다 사랑이 이렇게 감싸고 있어야 되는 거예요. 사랑 안에 있어야 기쁨도 사랑 안에 있어야 하고 화평도 마찬가지고 사랑이 모든 9가지 성령의 열매의 전제와 같다면 희락도 기쁨도 이 사랑 다음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그 정도의 역할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랑이 없는 신앙생활을 생각하기 어려운 것처럼 기쁨이 없는 신앙생활도 생각하기 어려운 거예요.
사랑이 없는 교회 생활은 여러분 이게 불가능한 겁니다. 그처럼 기쁨이 없는 교회 생활도 불가능하다는 거예요. 사랑이 모든 성령의 열매의 전제가 된 것처럼 기쁨 또한 성령의 열매의 전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신앙생활과 뗄레야 뗄 수 없는 것이 사랑이고 기쁨입니다.
기쁨은 성령을 통해서 누릴 수 있는 성품이에요. 우리가 가지긴 가질 수 있는데 기쁨이란 성품은 성령을 통해서만 가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쁨을 성령의 열매라고 하는 겁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기쁘게 하시는 영이 성령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다른 한편으로는 기쁨의 영이라고도 말합니다.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기쁨의 종류가 다양해요.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과 세상에서 누리지 못하는 기쁨이 있다면 성령은 세상에서 누리지 못함을 못하는 기쁨을 누리게 하는 분이 성령이라는 거예요. 세상에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은 누구나 다 경험할 수 있는 기쁨이잖아요. 근데 성령을 통해 누리는 기쁨은 결코 우리가 세상을 통해서는 얻거나 누릴 수 없는 기쁨이라는 겁니다.
빌립보서 4장 4절에 보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립보서 4장 4절의 기쁨도 오늘 본문의 기쁨과 같은 헬라어예요. 어원이 같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기쁨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기쁨은 성도와 교회가 맺어야 하는 열매이기 때문입니다. 맺기도 하고 누리기도 해야 되는 열매인 거예요. 그러니까 교회와 성도 안에는 반드시 기쁨이라는 열매가 있어야 되는데 이것은 우리가 맺기도 하고 또한 누리기도 해야 되는 열매예요.
희락이라는 이 단어는 언어를 이렇게 해석하는 데 보면 잔치와 관련돼 있어요. 그러니까 잔치의 기쁨인 거예요. 잔치의 기쁨 그러니까 이 땅을 우리가 이 땅의 삶을 잔치하듯 살라는 거예요. 그럴 때 누릴 수 있는 기쁨이 희락인 겁니다. 그러니까 신앙생활을 잔치하듯 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인생 자체를 잔치하듯 이 땅을 살아갈 때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종류가 기쁨이 희락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잔치하듯 하라는 거예요. 여러분 잔치는 우리가 기분이 나빠도 밝은 모습으로 잔치를 치르려고 하잖아요. 가정에 어려운 일이 있어도 잔치는 좀 기쁘게 치르려고 노력해요. 그러니까 그렇게 인생과 신앙생활을 살라는 것입니다.
잔치하는 동안은 세상 근심이 다 잊어지게 됩니다. 세상의 염려도 다 잊어져요. 그렇게 살라는 거예요. 너희 인생을 잔치하듯 살아라. 우리가 이 땅의 삶이 길지 않잖아 긴 것처럼 짧아요.
저는 이렇게 숫자 세는 게 익숙해서 이제 숫자를 세보니까 제 인생의 이제 3분의 1이 남았더라고요. 3분의 1은 2는 가고 이제 3분의 1 정도가 남은 거예요. 그 남은 삶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될까 오늘 말씀 우리에게 잔치하듯 살려고 하는 거예요. 잔치하듯이 그런 의미에서 이 희락이라는 단어는 기쁨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좀 많이 고민해야 하는 자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기쁨,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의 기쁨, 하나님이 초청하신 잔치의 기쁨을 빼앗긴 사람들이 많아요.
이 기쁨은 성도가 맺어야 하기도 하고 누려야 하는 것인데 이것을 빼앗겼어요. 그래서 성도들의 삶에 기쁨이 없는 것을 보게 돼요. 교회 생활을 교회 봉사도 이렇게 기쁨이 없어졌어요. 세상 근심에 쌓여 살아갑니다. 교회와 성도는 빼앗긴 기쁨을 다시 찾아와야 돼요.
언제 어떻게 빼앗긴지 알지 못하지만 교회는 그 고유의 기쁨을 천국 잔치하듯 살아야 하는 그 기쁨을 어느 순간 빼앗겼어요. 이게 사단이 빼앗아 갔는지 내 원래 삶의 성품이 그래서 기쁨을 쉽게 빼앗겼는지 모르지만 어떻든 교회는 가지고 있어야 될 품고 있어야 기쁨을 어느 순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교회 일을 하되 근심으로 하고 교회를 하되 걱정으로 하고 교회를 하되 염려로 하는 거예요.
이런 태도는 잘못된 태도입니다. 교회와 성도는 빼앗긴 기쁨을 다시 찾아와야 됩니다. 어디서 빼앗는지 모르지만 다시 찾아서 가져오고 이 기쁨의 열매를 맺고 누릴 수 있어야 됩니다. 따라 하겠습니다.
기쁨을 빼앗기면 영광도 사라집니다.
여러분 우리가 전도의 기쁨을 빼앗기면 전도의 영광도 사라지고요. 예배의 기쁨을 빼앗기면 예배의 영광도 사라져요. 예배를 기쁘게 드리면 예배는 영광스러운 예배가 되는 거예요. 하나님이 우리 예배를 받으신 것이 기쁨으로 표현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예배를 기쁘게 드린다는 것은 기쁨이 예배 가운데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영광 중에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해요. 성도의 삶도 하나님이 받았다는 증거가 그 사람이 기쁨으로 사느냐 그렇지 않느냐가 결정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기쁨을 빼앗긴 것은 확실합니다. 빼앗겨도 한참 빼앗겼어요. 언제 어디서 무슨 일로 인해서 빼앗겼는지 알지 못하지만 기쁨을 빼앗긴 채 예배하고 교회를 섬깁니다. 우리는 구원해 주는 기쁨도 빼앗기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구원에 감사하지도 감격하지도, 구원을 누리지도 못합니다.
하나님의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백성들이 누려야 하는 것이 기쁨인데 이 기쁨을 빼앗기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기쁨이 없는 자녀 기쁨이 없는 예배에 기쁨이 없는 사역을 합니다. 기쁨이 왜 중요하냐? 빼앗기면 다 곤욕스러운 게 돼요. 기쁨을 빼앗기면 교회의 모든 사역은 곤욕스러운 사역이 돼요. 힘든 일이 되는 거예요. 일이 힘들어서가 아니라 기쁨을 빼앗겨서요.
제가 몇 번 말씀드렸던 것처럼 성령의 9가지 열매는 가치를 결정해요. 이 열매가 성도와 교회 안에 있어야 교회가 교회의 가치를 드러내고 성도가 성도의 가치를 드러내게 돼요. 그러니까 성령의 열매가 가치 있게 하는 거 예배를 가치 있게 하고 우리의 봉사를 가치 있게 하는 거예요. 얼마나 세상과 다른지를 성령의 열매가 증명하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이 기쁨을 빼앗겼어요. 그래서 가치 없는 게 된 거죠. 예배도 같이 없는 게 되고, 봉사도 가치 없는 게 되고 모임도 같이 없는 게 돼요. 그 사단은 할 수만 있으면 우리에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구원의 기쁨을 하나님의 자녀의 기쁨을 빼앗으려고 합니다.
실제로 사단이 좀 성공한 듯 보여요. 왜냐하면 교회 안에는 기쁨을 빼앗긴 사람들이 꽤 있어 보입니다. 봉사 자체가 가치를 지니기도 하지만 기쁨으로 봉사할 때 봉사가 진정한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쁨이라는 성령의 열매를 맺어야 됩니다.
여러분 어디서 이 구원의 감격을 빼앗겨버리셨습니까? 삶이 너무 힘들어서 이 성령의 기쁨을 놓치고 살지는 않습니까? 세상 일이 너무 힘들어서 교회 일까지 힘든 일로 전락해 버리지 않았습니까?
다시 기쁨을 회복하셔야 됩니다. 예배하는 기쁨, 봉사하는 기쁨 성도들과 함께하는 기쁨. 여러분 이만한 기쁨이 없어요. 할렐루야 회복해야 돼요. 이만한 기쁨이 없어요. 우리는 서로 보면 좀 못나 보이기도 하고 그렇지만 우리만한 기쁨이 세상에 없어요. 여러분 다시 회복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전도하지 않아도 돼요. 사람들이 저 교회는 기쁨은 이게 성령의 열매는 가치를 결정한다 그랬죠. 야 가치 있는 교회다. 야 저 교회 가자 이렇게 되는 거예요. 야 저 사람이 믿는 예수를 내가 믿자야 가치 있는 삶을 산다. 그게 기쁨과 나머지 성령의 열매들이 그것을 결정하는 거예요.
여러분 최근에 어떤 일로 어려움이 있으셨습니까? 혹시 그 일로 기쁨을 빼앗기셨다면 다시 기쁨을 되찾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기쁨을 찾으면 용광도 회복이 됩니다. 할렐루야 가치도 지니게 돼요. 예배가 기쁘면 예배가 같이 있어지고 예배가 영광스러워져요. 하나님 영광 돌리길 원한다고 늘 기도하잖아요. 예배 때마다 영광 받으시라고 기쁘게 드려야 받으시는 거예요.
여러분 한 주간 오늘 말씀 붙잡고 곰곰이 좀 생각해 보십시오. 무엇이 여러분의 기분을 빼앗았는지, 옛날에 잃어버렸던 어떤 돈이 아니면 어떤 사람과의 관계가 아니면 어떤 사건이 교회에서 힘들었던 일이 여러분의 기쁨을 빼앗지는 않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다시 한 주간 회복시키셔서 다음 주에 오실 땐 우리가 기쁨으로 교제하고 예배하고 여러분 웃어도 가짜 웃음이 있고 진짜 웃음이 있어요. 아시죠? 우리는 다 똑똑해서 상대방이 진짜 웃는지 가짜 웃는지 다 알아요. 그죠? 그 정도 머리는 있어요. 진짜 웃어야 되지 않을까요? 우리가 초등부 아이들, 학생부 아이들을 볼 때 진짜 웃으면 이 아이들이 무류 있으면 가식 대답하지 않을 거예요. 목사님 저렇게 가식적으로 웃냐? 어떻게 애들 다 알아요 내 안에 기쁨이 없어서 내가 억지로 웃는지 애들이 알아요. 다음 주에 인사할 때 그 억지 기품이 아닌 성령을 통한 기쁨의 교재가 우리 안에 충만하기를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