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신을 만약 기독교식인 조물주로 본다면 역시 이런 문제에 막히게 되지만, 법신은 모든 것을 그때 그때 새로 만들어 낸다는 여호와 같은 조각가도 미술가도 아니다.
다만 모든 생명을 똑같은 불성(佛性)이라는 동질(同質)로 낳아 준 생명의 어버이이실 뿐이다.
법신이라는 한 모체에서 태어난 뭇생명들은, 법신과 같은 불성을 일차적으로 평등하게 받은 것이다.
그래서 법신을 닮은 중생들은 그 각기 지닌 주체성에 의한 자유 의지로 어떠한 행동도 자유롭게 할 수 있는데,
그러나 아직 발육이 안 된 어린 아이는 잘못 움직일 수도 있어서, 어른의 가르침도 어기고 제멋대로 움직인 놈이 낭떠러지로 구르기도 하고 가시밭 속을 헤매기도 해서 장애인이 되는가 하면,
한편에는 같은 어린애면서도 어른의 지시를 따르고 옳게움직인 놈이 있어서 건전하게 귀엽게 자라 가는 것이다.
불평등. 불균형은 바로 이래서 생긴 것이니. 그 책임은 일차적으로 평등하게 불성 생명만을 낳아 주신 법신에겐 없다.
이차적으로 제각기 제 마음대로 움직인 제 책임일 뿐이다.
그리고 법신은 중생의 어버이이므로 그 어버이로서의 자식을 사랑하는 본능이 차별 없는 사랑(무연대자 = 無緣大慈)으로 작용하여서 중생들을 끊임없이 돌보고 길러주시는데,
중생은 결코 피조물 로봇이 아닌 독립된 주체 생명이므로, 그 주체성을 살려서 제 일은 제가 하고 제가한 일에 대한 책임은 제가 지도록 하면서 차츰 스스로 옳은 길을 걸을 수 있게 하는 것이므로,
부처님의 중생제도에는 일방적인 강압이 없고, 그래서 중생계의 현실에는 여전히 자업자득(自業自得). 자작자수(自作自受)의 원리가 그대로 있는 것이다.
만약 중생이 자주성의 생명이 없는 피동성(被動性)만인 로봇이라면 기차가 정해진 선로 위만을 굴러가게 하듯 착한 데로만 나아가게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죄악도 불행도 없는 세상을 만드는 것도 어려울 게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로 그런 사회가 있다면, 그건 생명이 기계의 사회일 뿐 살아 있는 생명의 세계는 아닌 것이다.
그리고 그건 그 기계를 조종하는 자 혼자만의 세계일 뿐 교화니 구제니 할 대상은 없는 세계인 것이다.(계속)
[철조 비로자나불, 중앙박물관 소장]
♣ 법신부처님을 '비로자나불' 또는 '바이로차나'라고 부릅니다.
[출처] 묘허스님의 지장보살본원경 강설-33 (법신)|작성자 무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