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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아서 한량없고 불가사의하느니라. |
다시 선남자야, 마치 설산에 있는 낙미(樂味)라는 하나의 약과 같으니라. 그 맛은 아주 달고 깊은 떨기 아래 있어서 사람들은 보지 못하되, 어느 사람이나 향기를 맡으면 이내 그 땅에 그 약이 있으리라는 것을 알게 되느니라. |
지나간 세상에 어느 전륜왕이 이 설산에서 이 약을 얻기 위하여 있는 데마다 나무통을 만들어서 이 약에다 대놓았으며, 이 약에 약기가 다 오르면 땅으로부터 흘러나와 나무통 속으로 들어갔었으니 그 맛이야말로 진정한 것이었느니라. 이 왕이 죽게 되자, 그 후에 이 약은 시기도 하고 짜기도 하고 달기도 하고 쓰기도 하고 맵기도 하고 싱겁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맛은 그가 흐르는 곳에 따라 갖가지로 달랐고 이 약의 참 맛은 산에 묻혀 있었으니 마치 만월(滿月)과 같았느니라. 범인은 박복한지라 괭이로 파며 공들여 수고한다 하더라도 얻을 수는 없으며, 다시 성왕이 세간에 출현하여야 그의 복으로 이내 이 약의 진정한 맛을 얻게 되느니라. |
선남자야, 여래의 비밀 광의 그 맛도 그러하여 모든 번뇌의 떨기에 가려져서 무명의 중생은 얻어 볼 수 없느니라. 한 맛의 약은 마치 불성과 같은데 번뇌 때문에 갖가지의 맛을 내나니, 이른바 지옥ㆍ축생ㆍ아귀ㆍ하늘ㆍ사람ㆍ남자ㆍ여자ㆍ남녀추니ㆍ찰리ㆍ바라문ㆍ비사ㆍ수타이니라. |
불성은 굳세고 사나워서 부수거나 무너뜨리기 어렵나니, 이 때문에 살해할 수 없느니라. 만약 살해할 수 있다면 불성을 끊는 것이나 이러한 불성은 끝내 끊을 수 없나니, 성품을 끊을 수 있다 함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라. |
나의 성품 같은 것은 바로 여래의 비밀한 광이어서 이와 같은 비밀한 광은 모두가 다 같이 부수거나 무너뜨리거나 태우거나 없앨 수가 없으며, 비록 무너뜨릴 수 없다 하나 볼 수도 없되 만약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면 그제야 증득하여 아나니, 이런 인연으로 살해할 수 없느니라.’ |
가섭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
‘세존이시여, 만약 살해할 수 없다면 으레 착하지 않은 업이 없어야 하겠나이다.’ |
부처님께서 가섭에게 말씀하셨다. |
‘실은 살해되느니라. 왜냐 하면 선남자야, 중생의 불성은 5음 안에 머무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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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있는데, 만약 5음이 무너지면 살해라 하기 때문이니라. 만약 살해되면 이내 나쁜 갈래에 떨어지고, 업의 인연으로 찰리ㆍ바라문ㆍ비사ㆍ수타며 남자거나 여자거나 남녀추니 등의 25유의 차별된 모양을 지니면서 나고 죽음에 헤매느니라. |
성인 아닌 사람이 멋대로 나[我]의 크고 작고하는 모든 모양을 헤아리되 마치 작은 새와 같다 하면서 혹은 콩만큼 하다 하기도 하고, 내지 엄지손가락만큼 하다 하기도 하며 이렇게 갖가지로 망령되이 억측을 하나니, 허망하게 생각하는 모양은 진실 됨이 없느니라. 세간을 벗어난 나의 모양이라야 불성이라 하나니, 이렇게 나를 헤아리면 바로 가장 좋다고 하느니라. |
다시 선남자야, 마치 어떤 사람이 땅에 묻힌 광을 잘 알므로 이내 날카로운 괭이로 땅을 파는데 반석이며 모래ㆍ조약돌들을 곧장 파 내려갔으나 금강(金剛)에 닿게 되자 더 뚫을 수가 없게 된 것과 같으니라. 금강이란 온갖 칼과 도끼로도 부술 수가 없느니라. |
선남자야, 중생의 불성도 그와 같아서 온갖 논자(論者)거나 하늘 악마 파순(波旬)이거나 모든 사람과 하늘들로서는 파괴할 수 없는 바니라. 5음이 모양은 바로 생기고 만드는 것이니 생기고 만드는 모양은 마치 돌과 모래로서 뚫을 수 있고 무너뜨릴 수 있는 것에 비유되고, 불성은 마치 금강의 무너뜨릴 수 없는 데에 비유되느니라. 이런 이치 때문에 5음을 무너뜨리면 살해라 하느니라. |
선남자야, 반드시 불법은 이렇게 불가사의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
비록 불성이 있다 하더라도 오랫동안 가려졌음을 알았으므로 모름지기 지관(止觀)으로써 훈습하고 닦아야 밝고 깨끗하게 됨은 마치 가난한 여인이 광 안의 보물을 얻은 것과 같고, 마치 역사가 거울 속의 구슬을 본 것과 같으리니, 그제야 제 마음을 친히 깨쳐서 묘한 깨달음이 원만해지리라. |
또 어떻게 지관을 행하면 참 수행에 계합될 수 있는가. 다만 능히 관하는 마음[能觀之心]과 관할 바의 경계[所觀之境]가 각각 성품이 떨어졌음을 알기만 하면 이내 허망한 마음이 스스로 쉬리니 이것을 지(止)라 하며, 언제나 이런 관을 지으면서 그 비춤을 잃지 않기 때문에 관(觀)이라 한다. 이것이야말로 지 그대로가 관이요 관 그대로가 지이니, 능소(能所)가 없는 관을 바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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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관이라 한다. |
선덕(先德)이 이르기를 “법 성품이 고요하여짐을 지라 하고, 고요하면서도 언제나 비춤을 관이라 한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
능소가 아닌 관으로서 그것에는 두 가지 일이 있다. 그런 까닭에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이르기를 “부처의 경계를 알고자 하면/그 뜻을 깨끗하기 허공처럼 해야 하고/망상과 모든 집착[取] 멀리 여의어/마음의 향할 바에 걸림 없게 하라”고 했다. |
소(疏)에서 해석하기를 “첫째는 허망한 집착을 여의면 마치 저 깨끗한 허공에 구름의 가림이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침된 지(止)다. 둘째는 경계에 접촉하되 걸림이 없으면 마치 저 깨끗한 허공에 장애 없는 것과 같기 때문이니, 이것이 바로 참된 관(觀)이다. 이 관은 작의(作意)하지 않으면서 경계를 비추면 비추는 바가 끝이 없고, 이 지는 체성과 성품이 떨어지면서 허망이 쉬기 때문에 모든 잡음이 다 고요하다. 이렇다면 털지도 않고 닦지 않는데도 스스로 깨끗하여진다. 깨끗함이 없음으로 깨끗해야 법의 근원에 은밀하게 계합되고 닦지 않음으로 닦으면 부처의 지경을 가만히 밟는다”라고 했다. |
그러므로 알라. 한 마음의 참 지혜만이 바로 나의 본래 몸이어서 맑고 고요하여 언제나 존재하고 앞에 나타나 밝으면서 깨끗하다. 저절로 지혜의 부리로써 무명의 알을 쪼아 깨뜨리고 3계를 날아 벗어나서 자재하여 걸림 없으면 이때에야 견성하게 되어 분명하여지리니, 다시 무슨 법이 있어서 이를 대할 만하겠는가. |
단하(丹霞)의 고적음(孤寂吟)에 “미혹되지 않음이 잠시 있을 적의 미혹되지 않은 마음을/볼 때에는 얕고 얕되 쓸 적에는 깊구나/이 진주는 이와 같이 캐야하는 일이거늘/나무꾼이 황금을 짐과 어찌 같으랴./ 황금은 불리면 더욱 새로워지고/이 구슬은 빛 품고서 사람에겐 안 보이나/깨달으면 털끝에도 큰 바다를 머금나니/대지가 한 티끌임을 비로소 알리라”고 하는 것과 같다. |
[문] 모든 부처의 마음이 온갖 중생들의 마음에 두루하여 범부 마음을 나타낼 수 있고 중생들의 몸이 모든 부처의 몸에 두루하여 성인 몸이 될 수 있다면, 바뀌어 옮겨가고 서로가 두루 미치면서 이루어지는가. 그 한 자체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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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이 되는가. |
[답] 만약 바뀌어 옮아가서 이루어진다거나 서로가 두루 미친다고 말한다면 두 가지 마음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항상 머무는 한 마음은 마치 허공의 체와 같고 범부ㆍ성인이란 두 이름은 도리어 허공 속의 꽃과 같다. 청색ㆍ황색과 생김ㆍ소멸은 비록 다르나 하늘의 성품을 벗어나지 않았고, 미혹ㆍ깨침과 오름ㆍ잠김은 다름이 있으나 진각(眞覺)의 근원을 여의지 않았다. |
또 한 방안에 있는 천 개의 등불 빛이 한 거울에 비쳐 들면서 만 개의 영상이 뒤섞여 나열되는데 다른 것도 아니고 같은 것도 아니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 것과 같다. 이 뜻을 통달한 사람인 부처님만이 환히 안다. 그러므로 만유(萬有)는 진실에 즉하여 바뀌거나 변하는 모양이 없다. |
『화엄경』에서 이르기를 “마음은 환술과 같아서 온갖 법의 경계를 내되 두루하고 그지없어서 다하지도 않고 그치지도 않음을 안다”라고 했다. |
『대집경(大集經)』에서 이르기를 “한 마음 속에 머물면서 일체 중생들의 모든 마음들을 알 수 있나니, 중생들의 마음은 모두 다 평등하여 마치 허깨비의 모양과 같되 본래 성품은 청정한 것으로 관하고, 모든 중생의 몸의 업은 평등하여 모두가 물속의 달과 같은 것으로 관하며, 모든 중생들은 모두가 자기의 몸에 있고 자기 몸도 중생의 몸속에 있어서 마치 영상이 나타남과 같은 것으로 보면서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가 부처 몸이 되게 하고 또한 자기 몸도 중생의 몸이 되게 하므로 모두가 바뀌어 옮길 수 있는 것이 없다”고 했다. |
또 경의 게송에서 이르기를 “부처님들 한결같아 크고 둥근 거울이며/내 몸은 마치 마니주와 같으므로/부처님들 법신이 나의 몸에 와서 들어오고 /내 몸은 언제나 부처님들의 몸에 들어가네”라고 했다. 그러나 서로서로 들어가면서도 들어가는 바가 없나니, 만약 드는 바가 있다면 곧 두 가지의 법을 이루리라. |
[문] 만약 실로 마음의 밖에 법이 없고 홀로 종(宗)을 드러낸다 할 적에 모든 부처님이 없으면 능히 교화하는 사람이 없고 중생이 없다면 교화할 바의 무리가 없으리니, 전혀 의뢰할 데 없는 데로 돌아가거늘 무엇으로 계승할 수 있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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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 유심임을 알기 때문에 평등함의 부처를 이루고, 유식임을 요달하기 때문에 동체(同體)의 대비를 행한다 할 뿐이다. 만약 바로 이 종(宗)을 단박 깨치지 않으면 자기와 남의 두 일이 함께 상실된다. 왜냐 하면 한 마음의 평등에 들지 않으면 성불하는 바른 종(宗)을 어기고 동체대비를 요달하지 않으면 애견(愛見)의 망상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
『유마경(維摩經)』의 「관중생품(觀重生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 같다. |
“그 때 문수사리가 유마힐(維摩詰)에게 물었다. |
‘보살은 어떻게 중생을 관(觀)합니까?’ |
유마힐이 말하였다. |
‘마치 요술쟁이가 요술로 된 사람을 보는 것처럼, 보살은 중생을 그와 같은 것이라 관합니다. 마치 지혜로운 이가 물속의 달을 보는 것처럼, 마치 거울 안의 그 얼굴 모습을 보는 것처럼, 마치 더울 때의 아지랑이처럼, 마치 부르는 소리의 메아리처럼, 마치 공중의 구름처럼, 마치 물더미의 큰 거품처럼, 마치 물 위의 작은 거품처럼, 마치 파초의 속처럼, 마치 번개가 오래가는 것처럼, 마치 제5대(大)처럼, 마치 제6음(陰)처럼, 마치 제7정(情)처럼, 마치 13입(入)처럼, 마치19계(界)처럼, 보살은 중생을 그와 같은 것이라 관합니다. 마치 무색계의 빛깔처럼, 마치 볶은 곡식의 싹처럼, 마치 수다원의 몸에 대한 소견처럼, 마치 아나함이 태 안에 든 것처럼, 마치 아라한의 3독(毒)처럼, 마치 법인(法忍) 얻은 보살의 탐냄과 성냄과 파계(破戒)처럼, 부처님의 번뇌의 습기처럼, 마치 소경이 빛깔을 보는 것처럼, 마치 멸진정(滅盡定)에 들어서 숨쉬는 것처럼, 마치 공중의 새의 자국처럼, 석녀가 낳은 아이처럼, 마치 변화로 된 사람의 번뇌처럼, 마치 꿈에서 보다가 깨어난 것처럼, 마치 멸도한 이가 몸을 받는 것처럼, 마치 연기가 없는 불처럼, 보살은 중생을 그와 같은 것이라 말합니다.’ |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
‘만약 보살이 그렇게 관한다면 어떻게 자비를 행합니까?’ |
유마힐이 말하였다. |
‘보살은 이렇게 관하고서 생각하기를 는 장차 중생들을 위하여 이와 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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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법을 말해야겠다>고 하나니, 이것이 바로 진실한 자비입니다.’” |
『정명사기(淨名私記)』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
“이제 관중생품의 대정(大精)을 밝힌다면 다만 그 중의 한 구절에 의지하여 행하면 족하며 한 구절을 얻어 마음을 거두고 언제나 행(行)의 온갖 만행을 비추면 족하다. 지금 그대 스스로가 관하되 ‘너의 몸과 마음은 이렇게 필경엔 공(空)하다’라고 관하면 바로 이것이 보살로서 중생을 관하는 것이다. 보살은 도(道)라 하는데 도는 통할 수 있으므로 너의 물질과 마음의 본래 성품을 통하여 허망을 여의게 하면 바로 이가 보살이다. 보살은 너의 몸속에 있을 뿐이니, 너의 몸과 마음 관하기를 마치 세 번째의 손처럼 여기면 마침내 몸과 마음은 없게 된다. 이 안의 것으로 사람들에게 좌선에서 마음 쓰는 법으로 보인다면 대단히 좋으리라. |
몸과 마음이 이와 같다고만 관하면 안정과 산란과 옳음과 그름과 같음과 다름을 지을 만한 것이 없어서 온갖 것이 평등하여 곧 좌선하는 법으로서 지금 마음에 얻을 만한 것이 있다고 헤아리는 것과는 같지 아니하다. ‘내 마음이 어지러우므로 산란을 제거하고 안정을 취하고 싶다’고 말하면 크게 뒤바뀐 것이니, 모름지기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한다. |
또 지금 중생을 제도하려 하면 밤낮 너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번뇌 성품을 관하여야 하리니, 바로 이것이 중생을 제도하는 것이요 이 번뇌를 관하는 지혜를 부처라 할 뿐이다. |
석가가 이미 번뇌를 관한 뒤에 부처가 되었고 가르침을 말씀하느라 머무르시면서 함께 하셨으므로, 이제 범부는 가르침에 의지하여 수행한다. |
만약 ‘따로 부처가 있고 따로 수두룩하게 세계의 중생이 있다’고 하면, 부처님께서는 차례대로 제도한 뒤에야 성불하셨으리라. 그렇다면 석가는 이미 성불하였거늘, 지금 어찌하여 아직도 중생이 세계에 가득 차 있을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은 줄 알아야 한다. 마쳤다 함은 끝났다는 말이다.” |
위에서는 중생 관하는 것을 마쳤으니, 다음에는 여래 관하는 것을 보자. |
「아촉불품(阿閦佛品)」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그 때 세존께서 유마힐에게 물으셨다. |
‘너는 여래를 보고 싶으냐? 무엇들로 여래를 관(觀)하게 되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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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마힐은 말하였다. |
‘스스로가 몸의 실상(實相)을 관하는 것처럼 부처님을 관하는 것 또한 그러하나이다. 저는 여래께서 과거에서도 오지도 않았고 미래에도 가지 않을 것이며 지금도 머무르지 않는 것으로 관하오며, 색(色)으로 관하지 아니하고 색의 여(如)로 관하지 아니하고 색깔의 성품으로 관하지 아니하며,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으로 관하지 아니하고, 식의 여[識如]로 관하지 아니하고 식의 성품으로 관하지 아니하며, 4대(大)로 생기는 것이 아니어서 허공과 같고, 6입(入)의 쌓임이 없으므로 안ㆍ이ㆍ비ㆍ설ㆍ신과 마음이 이미 지나갔으며, 3계에 있지 않고 3구(垢)가 이미 떠났고 3탈문(脫門)을 따르고 3명(明)과 무명이 같으며, 동일한 모양이 아니고 다른 모양도 아니며 자기 모양도 아니고 남의 모양도 아니며 모양 없음도 아니고 모양을 취함도 아니며 이 언덕도 아니고 저 언덕도 아니고 중류(中流)도 아니면서 중생을 교화하며, 적멸을 관하면서도 영원히 소멸하지도 아니하며,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며 이것으로써도 하지 아니하고 저것으로써도 하지 아니하며 지혜로써도 알 수 없고 식(識)으로써도 알 수 없으며, 어둠도 없고 밝음도 없고,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강함도 없고 약함도 없으며, 깨끗함도 아니고 더러움도 아니며, 방소에도 있지 않고 방소를 떠나지도 않으며,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니며, 보임도 없고 말함도 없으며, 베풀지도 않고 아끼지도 않으며, 계율을 지키지도 않고 범하지도 않으며, 참지도 않고 성내지도 않으며, 나아가지도 않고 게으르지도 않으며, 안정되지도 않고 산란하지도 않으며, 지혜롭지도 않고 어리석지도 않으며, 정성스럽지도 않고 속이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나오지도 않고 들어가지도 아니하여 온갖 말의 길조차 끊어졌으며, 복밭도 아니고 복밭 아님도 아니며, 공양 받을 만하지도 않고 공양 받지 않을 만하지도 않으며, 취함도 아니고 버림도 아니며, 모양도 아니고 모양 없음도 아니며, 진제(眞際)와 같고 법성과 같으며, 일컬을 수도 없고 헤아릴 수도 없어서 모든 일컫거나 헤아림을 뛰어났으며, 큼도 아니고 작음도 아니며, 봄도 아니고 들음도 아니며, 깨달음도 아니고 앎도 아니어서 모든 결박을 여의었으며, 모든 지혜와 같고 중생과 같으며 모든 법에서 분별이 없고 온갖 것에 앎이 없으며, 닿임도 없고 고뇌고 없으며, 지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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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없고 일으킴도 없으며, 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으며, 두려움도 없고 근심도 없고, 기쁨도 없고 싫음도 없고 집착도 없으며, 이미 있었던 것도 없고 장차 있을 것도 없고 지금 있는 것도 없으며, 온갖 말로써 분별하거나 나타내 보일 수 없나이다. |
세존이시여, 여래의 몸은 이와 같사오며 이렇게 관하옵니다. 이것으로 관하면 바른 관이라 하겠거니와, 만약 다른 것으로 관하면 삿된 관이라 하겠나이다.” |
천태(天台)의 『정명소(淨名疏)』에서는 다음과 같이 해석하였다. |
“색으로 관하지 아니하고[不觀色], 색의 여로 관하지 아니하며[不觀色如], 색의 성품으로 관하지 않는다[不觀色性] 하였는데 색으로 관하지 않는다 함은, 마음은 마치 요술쟁이가 요술로 갖가지 물질[色]을 만드는 것과 같으므로 만약 요술쟁이의 거짓임을 알면 요술로 만들어진 갖가지 물질은 얻지 못하리니, 이제 물질은 마음의 요술로부터 요술로 내는 것이라 오히려 이 마음조차 얻지 못하겠거늘 어디에 이 물질이 있음을 보겠는가. 때문에 물질로 보아서는 안 된다. |
여(如)로 관하지 않는다 함은, 만약 물질과 여가 다르다고 보면 이것은 물질을 없애고 여에 드는 것이며, 지금은 물질을 여읜 딴 것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여로 관하지 아니한다. 성품으로 관하지 않는다 함은, 곧 불성으로 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색으로 관하지 않으면 바로 공의 세속[空俗]이요, 여로 관하지 않으면 바로 공의 진리[空眞]이며, 불성으로 관하지 않으면 바로 공의 중도[空中道]이다. 그 중도로 불성이 있다고 헤아리면서 순도애(順道愛)를 일으키면, 바로 정타(頂墮)가 된다. 그러므로 경에서 이르기를 ‘나[我]와 열반의 이 두 가지는 모두가 공이다’라고 하였으므로, 공의 병(病)이 있을 뿐이나 공의 병 또한 공하다. 지금 성품으로 관하지 않는다 함은 이 순도애가 없기 때문이다.” |
세간의 차별된 과보를 받음은, 모두가 한 생각의 마음이 달라지면 분별하고 망정이 생기면서 중생의 모양을 취하여 범부로 삼고 모든 부처의 경계를 집착하여 성인으로 삼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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