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망의 촛불(롬 12:12, 사 53:1-12)
<본문 속으로 들어가기>
*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소망 가운데 즐거워하며, 환난 가운데 참으며,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라고 권면한다. 롬 12:9-21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규범에 대한 내용이라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는 것이 마땅하나 대림절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기 위해 오늘은 12절만을 본문으로 정해 말씀을 전하겠다. ‘소망 중에 즐거워한다’라는 말을 헬라어 원문에 가깝게 번역하면 “소망을 사용해서 계속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에게 소망이 있으면 끊임없이 즐거워 할 수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기쁨이 없는 이유는 소망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 그런데 이어지는 “환난 가운데 참으며”와 “기도를 꾸준히 하십시오”라는 말과 연관시켜 생각해보면, “환난과 고통 중에도 참고 감사하며 도저히 길을 찾을 수 없는 암담한 현실 속에서 오히려 소망을 간직하라”는 말로 이해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이어지는 “꾸준한 기도”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때는 지금처럼 평화롭고 안전하게 신앙생활을 하지 못했을 것이며 여러 어려움들이 존재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미래에 대한 소망을 간직하면서 기쁨을 잃지 말라는 권면은 대림절을 시작하는 시점에서 많은 교훈을 준다고 생각한다.
<삶에 적용하기>
* 오늘부터 4주 동안 대림절 기간이 시작된다. 대림절 때마다 말씀드리지만 대림절에 해당하는 영어 단어 Advent는 로마황제가 즉위한 후 지방을 순시할 때 사용되었던 라틴어 Adventus에서 유래했다. 라틴말에는 미래를 표현하는 두 가지 단어가 있다. 하나는 후뚜라(futura)-기계적으로 흘러가는 도달하는 미래(future)-이고 다른 하나는 앗벤뚜스(adventus)-정반대의 순서로 장차 올 미래의 그 무엇이 지금/여기를 규정하는 미래-이다. 이는 ‘오는 것’ ‘현존’을 의미하는 헬라어 ‘파루시아’를 번역한 것으로 직역하면 ‘찾아옴, 도착’이다.
* 예수에 대한 용어들이 황제와 관련해 사용되던 말들(복음/주)이라는 사실은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특히 베들레헴이라는 알려지지 않은 동네의 마구간에서 초라하게 태어난 예수의 출생을 기다리는 기간의 이름을 황제의 행차를 의미하던 단어를 사용할 수 있었던 것 자체가 박해의 대상에서 로마의 국교로 승격된 기독교의 위상을 반영하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가장 낮은 자의 모습을 이 땅에 온 예수의 참뜻을 왜곡하고 가장 높은 자의 모습으로 격상시킨 인간의 욕망이 반영된 단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 그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하기로 하고 대림절에 대해 이야기를 전하도록 하겠다. 전통에 따르면 네 개의 초에는 각자 예언의 초, 베들레헴의 초, 목자들의 초, 천사들의 초이다. 그리고 이 초들은 소망, 화평, 기쁨, 사랑 등을 상징한다. 대림절 첫 주일인 오늘 밝힌 초는 예언의 초로 소망을 상징한다. 그래서 오늘 설교의 제목을 ‘소망의 초’로 정했다. 이후 3주 동안도 ‘화평의 초’, ‘기쁨의 초’, ‘사랑의 초’라는 제목으로 설교를 하면서 대림절의 의미를 우리의 신앙에 연결시켜볼 생각이다.
* 대림절 첫 주일에 점화되는 초의 이름이 “예언의 초”이자 “소망의 초”인 이유는 예수가 이 세상에 오셔서 주시고자 한 첫 번째 선물이 바로 하나님나라에 대한 예언이자 소망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예언이라는 말을 “앞으로 일어날 일을 미리 알거나 짐작하여 말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데, 성서에 기록된 대부분의 ‘예언’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 “신탁(信託)을 받은 사람이 하느님의 말을 직접 듣고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말”이라는 의미로 사용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기억하기 바란다.
* 즉 예언자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알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일어난 일에 대해 하나님의 뜻에 입각해 재해석하는 사람이다. 목사의 소명 중 예언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런 의미 때문이다. 예수는 하나님나라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한 분인데 그 소식은 이미 전해진 성서 구절(하나님의 말씀이라 이해되는)의 재해석과 기도 중에 깨달은 새로운 하나님의 뜻을 통해 보다 분명해지고 확실해졌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나중에 메시야로 불린 예수가 전한 하나님나라의 소식과 그 이전에 메시야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생각이 달랐다는 것이다.
* 마태와 누가는 마가가 기록하지 않은 신비로운 탄생 이야기를 통해 유대 백성들이 예수의 탄생을 기다렸다고 묘사하고 있지만, 사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기다렸던 것은 나약하게 십자가에 달려 처참하게 죽는 지도자가 아니라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것처럼 군마를 타고 천군만마를 거느린 당당한 군왕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들이 그런 소망을 품었던 것은 아니다. 북이스라엘에 이어 남유다까지 멸망함으로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자존심과 정체성이 산산조각 난 유대인들에게 가장 강렬한 소망은 자주독립국가 건설(다윗왕조 재건)이었다.
* 그런데 예수가 태어나기 수백 년 전에 유대인들의 기존 사고와 전혀 다른 생각을 제시한 예언자들이 있었다. 이름조차 알 수 없는 그 예언자들의 글은 이사야와 스가랴라는 걸출한 초기 예언자들의 두루마리에 첨부되어 전해지는데 학자들은 그들을 제2 이사야와 제2 스가랴라고 부른다. 먼저 이사야서 40-45장에 해당하는 제2 이사야의 글에 우리가 알고 있는 "고난 받는 종"에 대한 생각이 처음 기록된다. 일반적으로 힘이 약해 무너진 민족은 힘을 길러 적국을 물리치고 이전의 영화를 회복하길 원하는 외의 생각을 하기 힘들다.
* 그런데 제2 이사야는 단순히 유다라는 한 왕국을 재건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인간이 당하는 삶의 고통을 흡수하고, 삶의 능욕을 용납하며, 삶의 죄악 속에 개입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온전하게 만드는 전혀 새로운 메시야에 대한 소망을 제시한 것이다. 제2 스가랴(스가랴 9-14장) 역시 "이스라엘의 목자 왕(Shepherd King of Israel)"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영웅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목자 왕은 성전에서 동물을 매매하는 장사꾼들에게 반대하자 그들로부터 공격을 당해 쫓겨나는 강력하지 않은 모습으로 묘사된다.
* 결정적인 것은 나귀를 타고 의와 구원을 가져오는 겸손의 왕, 매를 맞는 목자 등으로 그려지면서 예수의 삶에 접목됐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예수의 삶을 통해 드러나는 고난받는 종의 모습은 유다의 멸망이라는 극한적인 민족의 비극 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던 예언자들이 발견한 결과물이며, 이는 수백 년의 시간을 통해 숙성되면서 예수의 삶을 통해 완성됐다고 해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강력한 군주와 같은 메시야를 기다리던 가운데 이런 겸손하고 온유한 메시야를 소망하며 기다리던 사람들도 존재했을 것이다.
* 마태와 누가가 그리고자 했던 대림의 소망은 그런 겸손하고 온유한 메시야(특히 누가의 경우)를 기다리던 사람들의 마음을 반영한 결과물일 것이다. 나는 이런 식의 새로운 생각(정신)들이 쌓이고 쌓여 예수라는 인물을 낳은 것이고 그의 삶과 가르침, 고난과 죽음으로 인해 제자들의 변화가 가능해졌다고 믿는다. 그리고 제자들의 변화는 결국 기독교라는 새로운 종교의 출발로 이어졌고, 비록 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과도 분명히 있지만 지금까지 이어지면서 인류 발전의 한 축을 담당하는 역할을 수행(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했다고 믿는다.
* 이런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생각/정신의 변화이다. 17세기 프랑스 논객 에티엔 드 라보에시는 <자발적 복종>(1548)에서 전제군주 권력의 원천은 돈도 아니고 무기도 아니라고 주장했다. 스스로 군주에게 복종하려는 민중의 마음이야말로 지배의 가장 굳건한 토대라는 말이다. 복종이 있기에 지배가 있는 것이지 지배를 하기 때문에 복종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라보에시는 이런 이유 때문에 혁명은 민중 편에서 감행되는 정신의 각성이라면서 민중이 마음을 돌이키는 순간 어떤 독재 권력도 사상누각이 될 수밖에 없다고 주장했다.
* 독일의 혁명가이자 사상가 구스타프 란다우어는 1906년 <나와 너>의 저자로 유명한 철학자 마르틴 부버로부터 ‘혁명’에 관한 집필을 해달라는 청탁을 받고 <혁명>(1907년)이라는 책을 쓰게 됐다. 그는 라보에시와 마찬가지로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혁명은 새로운 정신이 탄생하고 이 정신이 대중에 깊이 스며드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흔히 혁명은 기존 정권이나 체제를 타도하는 일로만 생각하는데 그것은 절반의 진실일 뿐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공통 정신이 등장해야 기존 질서는 와해되고, 새 질서의 토대 구실을 한다는 말이다.
* 우리는 3년 전 이맘때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겠다는 염원을 모아 촛불을 들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원하는 대로 나라다운 나라는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기존 정권은 타도했지만 기존의 질서가 여전히 지속되면서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 이유는 공통의 정신이 등장하지 않았거나 아직 확고하게 자리잡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정신의 중요성을 강조한 라보에시와 란다우어의 주장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생각한다. 특히 소망을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기독교인들은 더욱 그렇다.
* 란다우어의 <혁명>은 ‘토피아’와 ‘유토피아’의 논의로 시작된다. ‘토피아’란 어딘가에 ‘있는 곳’이고 ‘유토피아’란 어디에도 ‘없는 곳’을 의미한다. 란다우어는 한동안 기존의 질서가 지속되다 그 질서를 넘어서려는 열망이 등장한다면서 인류 역사가 토피아와 유토피아의 반복이었다고 설명한다. 성서에서도 ‘토피아’에 안주하려는 사람들과 ‘유토피아’를 꿈꾸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토피아’에 안주하려는 사람들은 자신들의 억울함과 비참함을 해결해줄 강력한 군주를 소망하며 하나님의 정의를 갈망했다. 그러나 그들이 원했던 것은 폭력적인 보복 정의였다.
* 성서에 폭력적인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 부분 기록되어 있는 이유는 바로 그런 갈망 때문이다. 그런데 소수의 예언자들은 폭력적인 보복 정의가 아니라 비폭력적인 분배 정의를 추구하며 소망하기도 했다. 구약 전반에서 강조되는 안식일과 희년, 그리고 예수의 하나님나라 메시지의 핵심에 자리 잡고 있는 정신은 토피아를 유지하기 위해 전쟁과 살육, 편견과 차별을 조장하는 폭력적인 보복 정의가 아니라 유토피아를 소망하며 평화와 공존, 이해와 포용을 전파하는 비폭력적인 분배 정의라고 믿는다.
* 그리고 대림절을 맞아 우리가 예언의 촛불, 소망의 촛불을 켜고 비폭력적인 분배 정의가 이 땅에 이뤄지길 소망해야 한다고 믿는다. 성서가 기록될 때도 그렇지만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그런 소망을 간직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적지 않다. 믿음과 소망은 이미 존재하거나 이뤄진 것을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아직 존재하지 않거나 이뤄지지 않은 것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믿음이고 소망이다. 그런 점에서 믿음과 소망은 토피아가 아니라 유토피아를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그런 믿음과 소망을 간직하며 기쁜 마음으로 살아가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