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7년 부르군디의 샤를大公이 프랑스와의 전쟁 중에 전사하여 19세의 외동딸 마리가 대공의 지위를 계승했다. 마리大公이 프랑스에 대항하기 위해 합스부르크 왕가의 막시밀리안 황태자와 혼인함으로써 부르군디 공국과 합스부르크 왕국이 통합되었다. 두 사람의 손자인 카를로스 1세는 스페인의 공동 군주인 이사벨과 페르난도의 외손자였다. 카를로스 1세는 여섯 살이던 1506년에 부친의 사망으로 부르군디 대공을 세습하고 1516년에 외조부의 사망으로 스페인 왕위를 계승했다. 1519년에는 조부 막시밀리안 1세로부터 합스부르크 왕위를 물려받은 뒤 신성로마제국 황제에 선출되었다. 카를로스 1세의 치세에 스페인은 아메리카 대륙과 필리핀을 정복하여 제국을 건설했고 유대인들은 앤트워프에서 번영을 구가했다.
카를로스 1세는 끝없는 전쟁으로 스페인의 국력을 탕진한 뒤 1556년 동생 페르디난트 1세에게 신성로마제국을 물려주고 아들 펠리페 2세에게 스페인을 물려주었다. 이때 신성로마제국에 속한 부르군디를 아들에게 물려준 것이 스페인에게 재앙이 되었다. 부르군디 사람들에게 카를로스 1세는 플랑드르에서 태어나고 자란 고향 사람이었지만 펠리페 2세는 스페인에서 낳고 자란 외국인이었다.
스페인의 극심한 재정 적자를 메꾸기 위해 펠리페 2세가 플랑드르와 네덜란드에 중세를 부과하자 1568년부터 무력 항쟁이 시작되었다. 1581년 7월 북부는 네덜란드연방공화국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스페인과 본격적인 전쟁을 시작했다. 1585년 앤트워프가 스페인군에게 함락되자 절반 이상의 시민이 탈출해서 대부분 암스테르담으로 갔다. 1만여 명은 영국으로 도피했는데 상당수가 유대인이었다. 이후 앤트워프는 급속히 쇠퇴하고 불과 10년 후 암스테르담이 유럽 최대의 항구로 부상했다. 암스테르담의 상권은 유대인이 완전히 장악했다.
1588년에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칼레에서 영국 해군에게 참패하자 네덜란드는 유대인의 주도로 해외 무역에 진출하여 1595년 바타비아(자카르타)에 도착하고 1598년 향료제도에 도착했다. 10여개의 회사들이 동양무역에 뛰어들자 유대인을 주축으로 160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를 설립하고 독점권을 부여했다. 세계 최초로 주식을 발행하여 조달한 동인도회사의 자본금은 금 64톤으로 영국 동인도회사의 8배 규모였다. 동인도회사는 자체의 군대를 보유하고 전쟁을 선포하고 조약을 체결하며 식민지에서 세금을 징수하고 화폐를 발행하는 등 국가와 다름없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네덜란드는 아프리카 남단에 케이프 식민지를 건설하고 인도 남단의 실론 섬과 향료의 주산지인 동인도제도(인도네시아)를 장악했다. 포르투갈은 아시아에서 급속도로 밀려났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는 1609년 일본에 무역관을 설치한데 이어 타이완에 식민지를 건설했다. 1642년에는 타이완에서 스페인 세력을 몰아냈으나 1662년 명나라의 정성공에게 축출되었다. 네덜란드는 아메리카에도 진출하여 1612년 맨해튼 섬에 뉴암스테르담을 건설했다. 1621년 서인도회사를 설립했으나 사업이 부진하여 1674년에 해산되었다. 동인도회사의 직원 아벨 타스만은 1642년~1644년에 호주 남단의 타스마니아 섬과 뉴질랜드, 뉴기니 섬을 비롯하여 남서 태평양 일대의 여러 섬들을 발견한데 이어서 호주 대륙의 북부 해안을 탐사했다. 광대한 지역을 식민지로 차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고도 동인도회사는 이들 지역을 방치했다. 유대인의 관심사는 오로지 장사였기에 향신료가 산출되지 않고 인구가 희박한 지역에는 관심이 없었다.
네덜란드의 인구가 적은 것도 식민 사업에 무관심했던 이유라고 생각된다. 자국민을 해외에 정착시키는 문자 그대로의 식민지 개척을 본격적으로 추진한 나라는 실업자가 넘쳐나던 영국이었다. 타스만의 탐험으로부터 1백년도 더 지난 1769년에 영국의 제임스 쿡 선장이 유럽인으로서는 두 번째로 뉴질랜드에 도착했고 1770년에는 호주 동해안에 도착했다. 영국은 호주와 뉴질랜드를 자국 영토로 삼고 죄수들을 보내 식민지를 건설했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네덜란드공화국의 독립이 승인되었을 때 네덜란드는 이미 유럽 제일의 해군 함대와 선단을 보유하고 세계의 무역을 지배하고 있었다. 네덜란드는 조선과도 접촉했다. 1653년 동인도회사의 난파선이 표류하다 제주도에 도착하여 선원 36명이 억류되었고 그 중 하멜을 포함한 7인이 1666년 일본으로 탈출했다. 하멜은 1668년에 귀국해서 하멜표류기로 알려진 보고서를 출판하여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하멜을 통해 조선의 사정을 알게 된 동인도회사는 조선과의 도자기 무역을 추진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무산되었다.
자본주의의 토대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유대인들에 의해 확립되었다. 네덜란드는 1608년 암스테르담 증권거래소를 설립해서 주식공모로 자금을 조달했다. 1609년 암스테르담 은행을 창설하고 암스테르담 시 정부가 지급을 보증했다. 암스테르담 은행에 금과 은을 맡기면 보관증서로 은행권을 발급했는데 이 은행권이 시중에 유통되어 화폐 구실을 함으로써 사실상 최초의 지폐가 되었다. 1614년에 무역금융을 지원하는 여신은행을 설립했고 암스테르담 시에 보험국을 설치했다. 주식회사, 증권거래소, 보관은행에 이어 은행예금에 대한 이자지급, 신용대출, 기명채권, 무기명채권, 채권시장, 외환시장, 선물시장, 보험, 주식의 액면분할, 증권거래인, 자본이동의 자유화 등이 이때 네덜란드에서 시작되었다. 처음으로 신문도 발행했다.
세계 각국에 퍼져있는 유대인들은 세계를 단일시장으로 이해했다. 그들은 상품이나 재화의 자유로운 이동을 막는 규제는 모두 없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중상주의 시대에 다른 나라는 귀금속의 유출을 막았지만 네덜란드 의회는 귀금속의 자유로운 수출입을 허용했다. 자본이동의 자유화를 400년 전에 실행한 것이다. 자본주의 뿐 아니라 민주주의의 토대 역시 네덜란드에서 구축되었다. 독립선언 당시부터 공화국을 선포하고 의회 제도를 확립했으며 종교의 자유, 양심과 사상의 자유, 언론과 출판의 자유가 보장되었고 그 어떤 나라보다 여성의 권리가 신장되었으며 유럽에서 최초로 마녀사냥이 금지되었다.
네덜란드가 번영한 17세기는 바로 유대인의 황금시대였다. 그러나 국토가 협소하고 인구가 적은 네덜란드는 강대국이 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뒤늦게 해외 진출에 뛰어든 영국과 프랑스의 거듭된 도전에 시달렸다. 1652년부터 1674년까지 네덜란드는 영국과 두 차례, 프랑스와 한 차례 치른 전쟁에서 강력하게 대응했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네덜란드가 대적하기 힘든 강국이었다. 1688년 영국에 정변이 일어나자 네덜란드의 유대인 자본가들은 혁명세력에게 군대와 자금을 지원했다. 혁명이 성공한 후 네덜란드의 유대인들이 대거 영국으로 빠져나가면서 네덜란드의 번영은 내리막길로 접어들었다. 유대인들이 자발적으로 네덜란드를 떠나 영국으로 건너간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 이렇다 할 연구가 없는데 어쩌면 프랑스로부터의 위협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어쨌든 유대인을 받아들인 영국은 강력한 경쟁국인 프랑스를 물리치고 대영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부르군디의 마리 대공
합스부르크 막시밀리안 1세
1477년 부르군디 공국
1512년 신성로마제국
카를로스 1세의 제국 분할 상속
적색 - 아들에게 상속
녹색 - 동생에게 상속
네덜란드
1556년 스페인에 귀속된 부르군디 공국
1581년 독립선언 지역
1648년 베스트팔렌조약
1648년 유럽
네덜란드 연방공화국
아메리카 대륙의 세력권 - 17세기 후반
향료제도
정향나무
정향 열매
17세기 네덜란드 무역로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전성기 세력권
네덜란드 서인도회사 전성기 세력권
중남미의 네덜란드 식민지
1665년 네덜란드와 포르투갈의 아시아 무역관
타이완 (포르모사)
네덜란드의 케이프 식민지
네덜란드의 동인도 식민지 확장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범선 - 일본인 그림
아벨 타스만의 탐험 경로
암스테르담
암스테르담 시나고그 내부 - 엠마뉴엘 비테, 1680
17세기 암스테르담 은행
17세기 암스테르담
1730년경 암스테르담
오늘날의 암스테르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