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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재 위백규 著
대체로 부귀한 가문의 사람을 보면 반드시 부러워하는 마음이 생기게 마련이고, 남보다 뛰어난 재능과 기예를 가지고 있으면 반드시 자랑하려는 기색이 있게 마련이다. 공명(功名)에 뜻이 있지만 그것을 얻지 못한 자들은 끝내 반드시 속이 타는데 재주와 역량이 있는데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평생 백에 하나의 기회도 얻지 못해 머리가 세도록 시골구석에서 가난하게 지내며 끼니를 거르는 삶을 사는 자들은 또한 모두 그 근심을 감당하지 못한다. 고금의 인물들을 평소 살펴보면 비록 호걸스러운 선비라고 자처하는 자라도 여기에서 하나라도 벗어날 수 있는 자가 드물다. 하지만 내가 본 바로는 우리 간암 선생(艮庵先生)이 바로 그런 분이다.
선생의 성은 위씨(魏氏)이고 휘는 세옥(世鈺)이며 자는 백온(伯溫)이다. 군수공(郡守公) 휘 동전(東峑)의 셋째 아들이다. 어머니 나씨(羅氏)는 행실이 정숙했으며 서울 집에서 군수공을 모셨는데 푸른 학이 품 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선생을 낳았다. 선생이 태어났는데 정신이 아주 맑고 골격은 깨끗하고 수려한 것이 과연 꿈에서 본 모습과 같았다. 나씨가 해산하던 날 저녁 군수공은 대궐에서 숙직 중이었는데 큰 호랑이가 군수공 앞에 꿇어앉으며 “대인의 아들이 되는 것이 소원입니다.”라고 하는 꿈을 꾸어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겼다. 이때 선생이 태어나자 마침내 어릴 때의 이름을 몽호(夢虎)라고 지었으며 매우 기특하게 여기고 사랑하였다.
나이 겨우 5세 때 완연히 옥 같은 사람의 모습을 갖추었고 매우 영특하고 총명하여 비길 데가 없었다. 일찍이 천자문을 배웠는데, 하루는 바람이 불고 구름이 끼는 것을 보며 문득 “어머니, 왜 구름이 올라가는데 비가 되어 내리는 것을 볼 수 없지요?”라고 물으니,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이 매우 기특하게 여겼다. 이때부터 비록 공부를 독려하지 않더라도 학업이 날로 진보하였다.
7, 8세 때 문장을 지을 수 있었고 초서(草書)와 예서(隷書)를 더욱 잘 썼는데 글씨체가 굳세고 수려하였다. 15세가 되어서는 제자백가를 거의 다 섭렵해 아름답게 짓지 못하는 문장이 없었다. 시(詩)에 더욱 뛰어나 비록 시를 잘 짓는다는 명성이 있는
사람이더라도 항상 스스로 비교해 보며 부족하게 여겼다. 천성적으로 학문을 가까이하고 번화함에 물들지 않아 비록 글을 배우고 외우는 공부를 하더라도 매번 덕 있는 분을 택해서 따르며 배웠다.
나이 겨우 20세가 되었는데, 동료들 가운데 나름대로 자부심을 가진 사람도 모두 그가 세속을 벗어났다고 생각하며 우러러보았다. 마침내 과거시험에 종사해 글을 잘 짓는다는 칭찬이 한양과 지방까지 떠들썩했지만, 자신이 지닌 재능과 포부를 다 펼치기에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다. 군수공을 받들어 섬길 때에는 공경과 사랑을 극진히 했으며 어머니를 봉양할 때에는 늘 즐겁게 해 드렸다. 항상 예법에 따라 자신을 다스리며 오직 자신의 몸을 망쳐 부모를 욕되게 할까만을 두려워하였다.
계사년(1713, 숙종39) 가을에 군수공이 서울 집에서 세상을 떠났는데 당시 두 형은 고향에 있었다. 선생이 홀로 아버지상을 당해 관곽(棺槨)과 의금(衣衾)의 물품을 갖추었는데 모두 아주 넉넉하게 하였다. 군수공이 평소 사용하던 물건과 몸에 차고 걸치던 것 심지어 칼과 수건, 빗과 같은 작은 물건도 모두 문서로 기록하여 봉해 두고 두 형이 오기를 기다렸다. 두 형이 달려와 곡을 하고 나서 널을 고향으로 모셔가는 일에 대해 상의하는데, 선생은 종가에서 비용을 감당하지 못할 것을 염려해 수레꾼을 고용하고 식량과 비용을 마련하면서 두루 넉넉하게 하지 않은 것이 없이 모두 몸소 준비하였다. 군수공의 빈소를 차리고 시신을 염하는 일부터 널을 고향으로 모셔가는 일까지 모두 경전(京錢) 5백여 냥을 썼는데 어머니의 농장 2곳을 팔아 모두 갚았다.
고향으로 돌아가는 장례 행렬을 따르며 슬픔에 겨워 몸이 야위면서도 예를 다하였고 두 형을 섬기는 데 우애와 공경을 다했다. 큰어머니 유씨(柳氏) 부인을 받들어 모시는 데 정성과 공경을 더욱 극진히 하여, 아침 문안과 저녁 잠자리 돌보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얼굴빛 조차도 거스름이 없었다. 부인 역시 자신이 낳은 자식들과 다름없이 어루만지며 사랑하였다. 상을 마치고 나서도 연이어 한양과 고향을 오갔으나 서울에 있을 때가 더 많아 여전히 고향에서는 손님이었다. 그 뒤 기해년 (1719, 숙종45) 1월 14일 유씨 부인의 상을 당하고, 을사년(1725, 영조1) 11월 12일 생모 나씨의 상을 당하여 모든 예법과 애통함을 지극히 갖춰 인정과 예문에 모자람이 없었다.
신축년(1721, 경종1) 당시의 정치에 큰 변고가 발생하자 마침내 가족들을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하니, 한양 내 여러 이름난 선비들이 모두 시를 지어 전송하였다. 헌납(獻納) 최도문(崔道文) 또한 〈천관산가(天冠山歌)〉를 지어 선생의 훌륭함을 노래하였다.
귀향해서 곧 둘째 형인 송와공(松窩公)댁 아래에 집을 지었는데 종가와 거리가 멀지 않아 매번 귤우헌(橘友軒)의 큰형에게 안부를 드렸으며, 돌아와서는 송와공을 모시고 경서와 역사서의 내용을 토론하며 일찍이 잠시도 떨어진 적이 없었다. 스스로 어렸을 때부터 송와공을 스승 삼아 학문 배웠다 하여 항상 제자의 예를 갖추었고, 귤우헌공을 엄한 아버지같이 섬겼으며 송와공을 엄한 스승같이 대하였다. 매번 한 집에서 정겹게 모일 때면 선생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무릎을 꿇은 채 몸가짐을 조심했으며, 감히 함부로 말하거나 웃지 않았지만 조용히 정을 나눌 때는 화목한 기운이 손에 잡힐 듯하였다. 두 형 역시 선생을 애지중지 여겨 하루라도 선생이 곁에 없으면 두 손을 잃은 듯 허전해하였다.
갑인년(1734, 영조10) 한양에 있을 때 국가에서 재해로 인해 구언(求言)하자, 마침내 임금의 유지(諭旨)에 응하는 상소를 올려 6가지 폐단을 구제할 것을 말했는데 그 내용은 바로 학교의 정사를 바르게 닦고, 고을의 향약(鄕約)을 세우며, 마을에 창고를 설치하고, 재해를 입은 토지의 세금을 면제해 주며, 노 젓는 군사〔櫓軍〕의 제도를 개혁하고, 인재를 거두어 등용하는 일이었다. 또 7가지 ‘실(實)’ 자를 올려 권면했으니, 바로 성실하게 하늘을 공경하고, 성실하게 학문에 힘쓰며, 성실하게 정사에 근면하고, 성실하게 간언을 받아들이며, 성실하게 붕당을 혁파하고, 성실하게 검약을 숭상하며, 성실하게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었다. 임금이 비지(批旨)를 내려 매우 가상하게 여기며 칭찬하였고, 구폐 6가지는 비변사(備邊司)로 내려 보내 의논해서 아뢰도록 했으며 칠실(七實)은 승정원(承政院)에서 베껴 들이게 해 임금이 살펴 볼 수 있게 하였다.
경향 각지에서 글로서 재예를 견준 것이 무릇 전후로 40년이었는데 운명이 기구하여 결국 한 가지 명성도 이루지 못하니, 비록 평소 선생의 얼굴을 알지 못한 자라도 모두 극구 그 원통함을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마음은 일찍이 원망한 적이 없고 더욱이 비리로써 요행히 그것을 구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대개 평생 한양의 문벌 좋은 집안을 따라 노닐면서도 일찍이 자신을 굽히며 구차하게 따른 적이 없었다. 그가 인정하여 시종토록 변치 않았던 사람은 모두 어진 재상과 이름난 정승이었으며, 그가 크게 우러르고 모범으로 삼은 사람은 모두 산림(山林)과 유일(儒逸)이었다. 이 때문에 자신은 재상을 배출한 가문과 교유하면서도 일찍이 개인적인 일로 관장(官長)에게 청탁한 적이 없었다.
만년에 고향에 살면서 가난이 극심해지자 사람들이 혹 청탁을 넣어 이익을 도모하라고 권하기라도 하면 비록 사안이 이치상으로는 바른 일이더라도 반드시 엄하게 물리쳤다. 늙어 죽을 때까지 끝내 그 지조를 바꾸지 않았으니 한양의 서로 아는 집안에서는 모두 지조와 마음이 얼음과 옥 같은 위백온(魏伯溫)이라고 일컬었다. 우의정(右議政) 오헌 민응수(梧軒閔應洙)에게 가장 지우(知遇)를 받아 항상 스스로 의리를 저버릴 수 없다고 말하며, 한양에 머물 때마다 그의 빈관(賓館)에서 지냈는데 역시 일찍이 청탁을 구한 적이 없었다.
경오년(1750, 영조26) 선생의 나이 62세였는데 이전 정묘년(1747)에 한양에 들어와서 이때에 이르러 4년이 지났다. 객지 생활에 백발이 성성하고 온갖 병이 몸 전체를 휘감고 있었다. 또 이 해에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자 고향으로 돌아가 죽고 싶은 마음에 눈물을 흘리며 주인 상공(相公)에게 작별을 고하니, 상공 역시 매우 안타깝게 여겼다. 이에 여자 종을 불러 술을 사고 안주를 마련하자 처사공이 즉시 사양했지만 술이 취하자 비틀거리며 광통교(廣通橋)로 가서 같은 일가로 과거에 낙방해 남쪽으로 돌아가는 사람을 만나고는 20여 일 험한 길을 걸어 비로소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때 이후부터 오랜 병이 점점 고질이 되었고 집안 살림은 더욱 곤궁해졌다.
마침내 그윽하고 한적한 곳을 찾아 천관산(天冠山) 서쪽에 작은 집을 짓고 시냇물을 끌어들여 정원을 두르고 대나무와 소나무, 약초를 빙 둘러 심었다. 세 아들 문옹(文翁)・문좌(文佐)・문량(文良)에게 농서(農書)를 초록하고 농기구를 갖추게 해서 몸소 농사를 지으며 책을 읽었다. 때로는 죽으로도 끼니를 잇지 못하는 날이 혹 여러 날 계속됐지만 좌우에는 책이 쌓여 있고 온 집안은 편안하였다. 마침내 그 집의 편액을 ‘간암(艮庵)’이라고 했으니, 이는 머무를 곳을 알아 머문다는 뜻으로 서울의 여러 이름 있는 선비들이 모두 그 원운(原韻)에 화답해서 시축(詩軸)을 이루는 데에 이르렀다. 아! 선생과 같은 분을 어찌 많이 만날 수 있겠는가.
부모를 봉양할 때는 정성을 다하고, 부모상을 당해서는 온 힘을 다했으며 큰어머니를 공경으로 섬기니 큰어머니가 항상 우리 몽호(夢虎)라고 불렀는데, 또한 두 형에게는 우애를 극진히 해 집안에서 이간하는 말이 없었으니 그 효성과 우애는 이와같이 천성에서 우러난 것이었다. 항상 종가(宗家)의 일을 우선시하고 자신의 일은 뒤에 두어서, 무릇 종가 일을 구획해서 처리하는 데 세밀하고 빈틈이 없었으며 지극정성으로 행하지 않은 일이 없었다.
4대 이하 선산을 돌보는 일과 제사에 관한 장부를 정리하는 데 각각 조리가 있어 이것을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는 계획으로 삼았으며, 친족들을 사랑하고 구휼하는데 멀고 가까운 곳이 없이 슬프거나 기쁜 일을 모두 자신이 당한 것처럼 여겼다. 집안사람 가운데 영민해서 성취할만한 자가 있으면 항상 얼굴에 기쁜 빛을 띠며 자상하게 이끌어 가르치는 일을 그만두지 않았고, 집안사람이 아들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으면 먼저 얼굴 생김새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물었다. 선생은 종가에 더욱 관심이 커서 종손이 아들을 낳으면 밤새도록 그 기쁨에 잠을 이루지 못했으니, 그 효성과 우애를 미루어 나간 것이 이와 같았다.
평상시 몸에는 오만한 몸가짐이 없었지만 입으로는 가릴 말이 없었다. 남의 선행을 들으면 화답하고 칭찬하는 데 그침이 없고 싫증을 내지 않았으며, 남의 악행을 들으면 즉시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군수공과 다른 사람이 부임한 주(州)・부(府)를 여러 번 따라다닐 때 말소리와 얼굴빛이 즐거운 속에서도 담박했으니, 그 타고난 자질이 이처럼 도(道)에 가까웠다.
문학에 뛰어나 각 문체에 두루 능했으며,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뛰어나 고금의 진귀한 서적과 국조 사실(國朝事實)에 해박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의약(醫藥)・복서(卜筮)・산수(算數)・추보(推步)・감여(堪輿) 같은 학문 또한 모두 연구해서 그 요체를 명확하게 알았다. 항상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남보다 뛰어난 사람이 아니지만 내가 아는 것을 사람들이 나누어 각기 그 한 가지를 터득한다면, 곧 응당 한 사람은 감쌀 수 있을 것이다. 대개 행시(行詩) 하나, 단율(短律) 하나, 표(表) 하나, 부(賦) 하나, 간찰(簡札) 하나, 의(疑) 하나, 의(義) 하나, 전고(典故) 하나, 필(筆) 하나, 잡술(雜術)이 각각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남들 또한 그렇다는 점을 인정하고 믿었으나, 진정 선생을 아는 사람은 심행(心行) 하나가 응당 앞서 언급한 여러 가지 하나 중의 가장 위에 있어야 한다고 여겼다. 그러나 일찍이 이로써 스스로 과시한 적이 없었고 사람들과 이야기할 때면 늘 부족한 듯 잘하는 것이 없는 것처럼 겸손하였다. 이는 선생의 좋은 자질이었으니, 일찍부터 우리 사람이 가장 먼저 추구해야 할 일들이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화려한 서울에서 낳고 자라 부귀를 물릴 만큼 보았고 명예와 총애받는 영광과 성대한 수레와 말들, 그리고 궁실, 처첩의 아름다움과 음식, 의복의 사치에도 한 번도 그 마음이 동요된 적이 없었기에, 한양에 있을 때는 일찍이 벼슬을 청탁하기 위해 뵙기를 청하지 않았고 고향에 있을 때는 일찍이 한양의 부귀한 일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는 선생의 높은 소견으로 지위가 높은 자를 만나 이야기할 때는 그 지위를 하찮게 여긴다는 것이다.
남들 누구보다 재예가 뛰어나 과거 시험장에서 늙었지만 끝내 남성시(南省試)에 이름 한번 올리지 못했고, 초야의 경륜(經綸)으로 대궐에 장주(章奏)를 올렸으나 끝내 금마(金馬)에서 명을 기다리라는 은전을 입지 못하였다. 그러나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도록 바닷가 산과 적막한 물가에 몸을 숨기고 살면서도, 벼슬길을 얻지 못한 것을 한으로 삼지 않고 항상 실학(實學)이 없음을 후회로 삼았다. 이는 선생의 뛰어난 식견으로, 비속한 사람들이 요행을 바라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어려서부터 늙도록 맛 좋은 음식을 먹고 따뜻한 옷을 입으며 몸이 편해 명성과 영화가 사람을 감동시켰으나 칠순이 이미 저물어가는 나이에 온갖 병마가 교대로 침범하고, 독한 안개 낀 바닷가 조그만 집의 구들에 불도 제 때에 때지 못해 30일에 겨우 아홉 번 끼니를 때울 정도로 주위에 가난 귀신이 붙어버리니, 화려한 서울에서 노닐던 옛일이 꿈과 같이 아득해져 벗들의 안부 편지가 마침내 이로부터 끊겼고, 시골 늙은이들과는 더불어 자리다툼이나 할 정도로 허물이 없어졌다. 그러나 그런 처지를 즐겁게 여겨 조금도 개의치 않고 경서와 역사서를 두루 읽어 가며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감흥이 일어나면 감흥대로 읊조리다가 좋은 경치를 만나면 시를 지었는데, 다시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고 오직 마음에 유쾌한 즐거움만을 취했다. 평생 음률을 깨닫지 못했지만 오히려 항상 거문고를 갖춰두고 약간 취할 때마다 문득 어루만지며 마음을 붙혀 보기도 하였다. 날마다 소작인, 채소밭 가꾸는 노인들과 다정하게 지내니 노인부터 어린아이에 이르기까지 모두에게 환심을 얻게 되었다. 이는 선생이 평상시 마음가짐으로 곤궁에 처해도 그 즐거움을 바꾸지 않은 것이다.
일찍이 요사스러운 사람 박필장(朴弼長)에게 무고(誣告)를 당해 몇 달 동안 장흥부 옥사에 구금되어 있었다. 당시 임재(臨齋) 윤 참판(尹參判)이 보성군수로 좌천되어 있으면서 장흥을 지나다가 장흥도호부사(長興都護府使)와 마주 앉게 되었다. 얼마 뒤 관청 아전이 차꼬와 항쇄를 채운 죄인을 압송해 왔는데 바로 선생이었다. 윤공(尹公)이 보자마자 크게 놀라 자신도 모르게 대청 아래로 내려가 선생의 손을 잡더니 차꼬와 항쇄를 풀어 주고 이끌어 한자리에 앉히며 말하기를 “어찌 우리 백온(伯溫) 같은 사람이 법령을 어겼겠소. 무지한 무부(武夫)가 어찌 이처럼 괴이한 짓을 저질렀단 말이오.”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상황이 이와 같은데 왜 내게 알리지 않았소?”라고 하자, 선생이 말하기를 “횡역(橫逆)이 닥치는 것 또한 운명입니다. 어찌 요행히 면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윤공이 웃으며 “이 미치광이의 옛 모습이 여전하구려.”라고 하고서 서로 술을 마시며 시를 지어 주고받다가 날이 저물고 나서야 끝이 났다. 이처럼 선생의 지조가 환란 속에서도 변치 않았던 것이다.
병인년(1746, 영조22) 봄, 송와공이 선친의 뜻에 따라 방어공(防禦公)의 무덤을 천관산(天冠山) 북쪽 기슭으로 이장하려고 하였다. 조개껍데기로 만든 횟가루를 널 옆에 회칠해 이미 꾸며 놓았으며 비석을 세우기 위해 장차 줄에 매달려는데, 당시 고을수령이던 허급(許伋)이 간사한 말을 잘못 듣고 소나무를 베지 못하게 한 봉산(封山)을 범했다고 여겨 직접 와서 증거를 찾아내려고 하였다. 그런데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도 오히려 몹시 고집을 부리며 묘 구덩이를 직접 허물고 일꾼들을 때려서 내쫓아 버리고 돌아갔다.
송와공의 나이 당시 72세였는데 눈물을 슬피 흘리며 간청했지만 끝내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분개하다 화병에 걸려 세상을 뜨고 말았다. 허급이 이 소식을 듣고 몹시 면목이 없어 장례에 부의를 넉넉히 보내자 선생이 말하기를 “이미 사람을 죽여 놓고 또 이익으로 화해를 청한단 말인가.”라고 하면서 결단코 물리쳤다. 허급이 매우 불만을 품고 장차 일을 꾸며 선생을 죽이려고 했지만 결국 이루지 못하였다. 이는 선생이 지킨 의리가 매우 견고해 재앙이 뒤흔들지 못하고 위력으로 빼앗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맹자가 이르기를 “부귀가 그 마음을 흔들지 못하고 빈천이 그 절개를 옮기지 못하며, 위엄과 무력이 그 지조를 꺾을 수 없으니 이를 대장부라고 한다.”라고 한 것이 이것이다.
내가 본 선생은 청수하고 마른 모습이 하늘에서 내리는 눈 빛과 엉긴 옥처럼 가냘픈 듯하면서도 강인해 마치 한 사람의 처자와 같았지만 그가 대장부라는 것을 알아보기는 매우 쉬웠다. 이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훌륭함이 본래 다른 사람보다 나았고, 조심하고 삼가는 공부 역시 속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15세에 진안현감(鎭安縣監)을 지낸 민승수(閔承洙)에게 일찍이 수학했을 때에도 선생의 지조와 덕행에 대한 칭찬이 항상 그치지 않았다.
화전 선생(花田先生) 이재(李縡), 대사헌(大司憲) 섬촌 민우수(蟾村閔遇洙), 참판(參判) 임재 윤심형(臨齋尹心衡), 찬선(贊善) 직암 신경(直菴申暻) 같은 분 모두 젊어서부터 좋은 관계를 맺어 늙어서도 서로 잊지 않았다. 비록 한양과 시골 사이가 멀더라도 편지를 전할 만한 인편이 있을 때면 반드시 안부를 물었고, 바닷가 벽촌에 훌륭한 선비 위백온(魏伯溫)이 있음을 모두들 믿었다.
병계(屛溪) 윤 선생(尹先生) 같은 경우에는 소싯적 집이 서울 같은 동네에 있어서로 가장 잘 아는 사이였다. 무인년(1758, 영조34) 봄, 선생의 나이 70세에 장차 죽음이 가까이 닥쳐오자 선대의 업적을 널리 드러내지 못할까 걱정해 전답을 팔아 행장을 꾸렸다. 병든 몸으로 장마를 무릅쓰고 증조 판서공(判書公)과 할아버지 방어공(防禦公)의 가장(家狀)을 지니고 옥병계(玉屛溪)로 가서 선생을 만났다.
병계 선생은 선생의 손을 맞잡고 옛정을 나누며 백발이 된 벗을 보고 다정한 눈길로 탄식하였다. 한양과 호서지방에서 묘지명을 지어 달라고 뵙기를 청한 사람들이 가져온 온갖 폐백이 가득 쌓여 있었는데, 유독 선생이 간청하자 기한을 정해 원고를 작성해서 두 편의 묘갈명을 완성해 주었다. 그리고 문하생과 자제들에게 “이 사람은 내 죽마고우인데 그 사람됨이 진실로 좋다.”라고 하였다. 내가 매번 병계 선생을 뵐때면 선생은 반드시 먼저 백온(伯溫)이 잘 지내고 있는지 안부를 물었다. 선생의 막내 동생 오헌(梧軒) 참판어른 봉오(鳳五)도 나를 보면 역시 매번 백온은 옥 같은 사람으로 모습이 그 마음과 같다고 말하고는 하였다.
선생은 타고난 체질이 약해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아 평소 몸이 옷 무게를 가누지 못할 정도였고 말이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매번 마음이 맞는 사람과 고금의 일을 담론할 때면 박식하여 두루 통달했고 변론하는 말은 논리 정연했으며, 시비(是非)가 격렬한 대목에 이르러서는 문득 팔을 걷어붙이며 비분강개하기도 하였다. 길거나 짧게 인용하고 비유해서 말을 하면 시원스럽고 들을 만하여 사람들에게 피곤을 잊게 하였다.
민 우의정(閔右議政)이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갈 때 편지를 보내 불렀는데, 선생이 고향에서 늦게 달려와 겨우 국경 근처에서 전송할 수 있었다. 의주 부윤(義州 府尹)이 통군정(統軍亭)에서 송별연을 베풀었는데 선생 홀로 착잡한 심정으로 북쪽을 바라보며 종일토록 편치 않았다. 선생이 돌아 갈 때 민공이 연도 변의 수령들에게 편지를 써서 돌아가는 여비를 차례대로 주선하도록 했는데, 선생이 즉시 편지를 가지고 온 두 세 사람에게 노정을 계산하여 출납하게 해서 선생의 돌아오는 전대(纏帶)에는 남은 것이 없으니 사람들이 모두 고지식하다고 웃었다. 매번 술에 어느 정도 거나하게 취하면 그때 일에 대해 말하기를 “당시 난간에 기대 북쪽을 보면서 만 리 끝까지 펼쳐진 자줏빛 성벽과 변방의 담장을 보았는데, 어느 곳이 백암(白巖)이고 안시(安市)인가. 붉은빛 띠는 태양 아래 잡초가 무성한 들판, 하늘가 구름이 일어나는 그 아래가 의무려산(醫無閭山)이니 이곳이 옛 유주(幽州)임을 알았다. 요수(遼水) 가을바람에 당나라 태종의 회군이 떠오르고 창해(滄海)까지 영토를 확정한 〈우공(禹貢)〉의 성인의 자취가 사라진 것을 생각하니, 온갖 감정이 가슴속에 꽉 차고 머리카락이 곤두서서 관(冠)을 찔렀다.
아! 우리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갑옷을 입고 말채찍과 화살을 지니고 만주국(滿住國)을 왕래한 일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고, 뽕밭이 푸른 바다로 바뀌듯 변고가 일어난 뒤 뜻있는 선비의 두건은 마를 날이 없었기에 술자리의 악기 소리와 좌석아래 큰 술잔이 도무지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날 종일토록 편치 않은 것이 어찌 우연일 뿐이었겠는가.”라고 하였다. 비록 이미 늙어 버린 뒤라 이에 대해 이야기하면 입가에 침이 흘러 거품이 생기고 술 취한 눈에 눈 꼬리가 치켜 올라갔으나, 보는 사람들 역시 선생의 지기(志氣)가 그저 녹록하고 하릴없는 서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선생은 우리 집 가친(家親)과 젊어서부터 한마음으로 우정을 나누었는데 늙어 가면서 더욱 친밀해졌다. 문장을 토론하고 생각을 논할 때는 작거나 크거나 반드시 우리 집 가친과 함께하였다. 간암(艮庵)과 춘곡(春谷)은 삼십 리 정도로 가까워서 언제나 손을 잡고 더불어 잠시도 떠나지 않았는데, 헤어졌다 싶으면 문득 그리운 마음을 그대로 두지 못하고 공이 병이 없을 때는 비록 겨울 추위와 여름의 무더위에도 끊임없이 서로 방문하고, 서찰로서 서로 안부를 묻기를 일찍이 한 달을 빠지지 않았다. 가친과 이야기할 때는 비록 잠깐 짧은 이야기를 나누더라도 반드시 그 종가(宗家)의 일을 유지하고 보호할 수 있는 이야기를 나눴으며, 비록 작은 종이에 별다른 내용 없이 주고받은 편지라도 반드시 끝에는 종손(宗孫)을 가르치고 깨우치려는 뜻을 말했으니, 그분의 종족을 위한 정성은 진실로 참된 마음이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선생은 나를 가장 아껴 항상 원대해지기를 기대하였다. 돌아보면 이처럼 거칠고 열등한 사람이, 비록 안주하여 자포자기하고 있었지만 병계 선생에게 스승의 예를 올릴 수 있었던 것 역시 선생의 가르침이다. 병술년(1766, 영조42) 여름 끝자락에 종형(宗兄) 백휘(伯暉)와 종제(宗弟) 백침(伯琛)과 함께 문중 자제들을 모아 사강회(社講會) 규약을 만들고,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강회를 열고 규약 조문을 읽었는데 백침은 바로 선생의 종손이다.
당시 선생은 오랜 병으로 다리가 마비되는 증상이 더욱 심해져 앉았다 일어날 수가 없고 옆으로 몸을 돌리는 것도 사람의 도움을 필요로 할 정도였다. 그런데도 늦더위를 무릅쓰고 가마를 타고와 종가 대청에서 강회를 열게 하고 옆에 앉아 그 광경을 보며 아직 죽지 않고 이 광경을 볼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하였다. 두 달을 머물며 모두 네 차례의 강회를 보고 돌아가서는 즉시 편지를 써 부쳐오기를 “몸소 농사지으며 다시 강습을 겸했으니, 이는 옛 사람이 귀중히 여기는 일을 잘 성취한 것이다.
나는 곧 죽겠지만 유독 한스러운 것은 사는 곳이 조금 떨어져 세 아들로 하여금 호미를 메고 경전을 휴대하고서 그 뒤를 따르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겨울이 되자 병이 더욱 위독해져 마침내 일어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 슬프다. 아! 선생은 참으로 뛰어난 사람이고 참으로 보통 사람과 다른 사람이다.
내가 일찍이 선생께 말씀드리기를 “간암 어른 일생의 신명은 지극히 좋기도 하고 지극히 좋지 않기도 합니다.”라고 했더니, 선생께서 “왜 그런가?”라고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어려서부터 오십의 나이가 되도록 맛있는 음식 좋은 옷에 날마다 귀인 현사들과 노닐며, 그 마음에는 또한 의리를 잘 식별하고 고금에 능통해서 어려서는 어여쁘게 재주를 자부하고 장년이 되어서는 명예를 날렸습니다. 늙어서도 비록 가난했지만 병이 들면 약과 보약이 처방에 따라 상머리에 있고 일찍이 하루도 술병이 없는 날이 없으며, 여름옷과 겨울옷이 언제나 때맞춰 준비돼 있어 추위와 더위에 시달리지 않았고, 젊어서도 말을 타고 다녔지만 늙어서 다리가 불편하면 말이 없어도 말을 빌려 타며 일찍이 십 리 길도 도보로 간 적이 없습니다. 젊어서는 노복이 있어서 부리기에 편했으나 늙어 가난해졌어도 세 아들이 효성스럽고 모두 건강해서, 집을 나서면 의관을 준비해 말의 재갈을 물리고 이부자리, 서책, 약주머니, 술병, 마른 식량주머니, 요강, 변기, 머리빗과 긁개, 여의장을 메고 뒤따르며 집에 들어가면 땔나무 하는 것, 고기 잡는 것, 농사짓는 것, 밥하는 것 모두 세 아들이 스스로 하면서 유순한 태도와 즐거운 얼굴로 일찍이 조금도 부친의 뜻을 거역한 적이 없습니다.
보통사람들은 가난하면 반드시 자손에게 남겨 줄 것이 없음을 근심하는데, 유독 간암 어른께서는 편안한 즐거움을 남겨주면서 항상 돈이 얼마나 남았는가, 농토가 얼마나 여유가 있는가를 묻고는 팔기를 재촉하여 베풀곤 하였습니다. 또한 보통 사람들은 겉으로는 아닌 체 하면서도 항상 마음속으로 근심이 가득한데, 유독 간암 어른은 선행하기를 그치지 않아 마음속이 편안하고, 보통 사람들은 지반(地盤)이 미약하면 근심하는데 유독 간암 어른께서는 평생 매씨집안의 어린 자식이라는 것을 잊고 지냈습니다. 이것이 어른의 신명이 지극히 좋은 것이니 이 같은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세간의 재주 있다는 명성에도 머리가 세도록 과거 시험장에서 겨우 두 번 향시(鄕試)에 합격하고는 병과 함께 살아가며, 약물과 침 뜸이 항상 몸에서 떨어지지 않아 조금만 많이 먹고 조금만 찬 것을 마시면 바로 담벽(痰癖)과 냉괴(冷塊)가 발작해 숨이 끊길 듯합니다. 한번 말에서 떨어진 뒤 다리를 절어 비록 가고 싶은 곳이 있어도 말을 탈 수가 없어 다만 앉아서 탄식을 하고, 어려서는 좋은 거처에서 살다가 늙어서 초라한 오두막집에서 무릎을 감싸 안고 있을 뿐인데도 세 아들이 모두 어질고 재주가 많지만 가난 때문에 문학에 힘을 쏟을 수가 없습니다. 젊어서 모아 논 깨끗이 단장된 표지에 초록한 많은 서적들이 서재에 차고 넘쳐 모두 진귀해서 소장할 만하고, 또 젊어서 지은 시문이 책으로 여러 권이 되어 모두 옥처럼 기이해서 후세에 전할 만하지만 중년에 모두 불에 타 남아있는 것이 없고, 만년에 읊조렸던 시문도 역시 몇 권이나 되는데도 그것마저도 사람들이 도둑질해 가버렸습니다. 그래서 항상 탄식해 말하기를 ‘나에게 글[文]이 궁박한 것이 이와 같은데, 그 신명이 지극히 좋지 않은 것이 또 누가 나 같은 사람이 있겠는가.’라고 하셨습니다.”라고 하자 선생이 웃으며 대답하시기를 “그 말이 또한 명언이다.”라고 하셨다. 아! 신명이 좋아도 선생이고 좋지 않아도 선생인데, 좋지 않은 것이 바로 좋은 것이고 지금 좋다는 것이 좋지 않은 것이 될지 누가 알겠는가.
위씨의 본관은 옛 회주(懷州)이니, 회주는 즉 장흥이다. 신라와 고려 때부터 이름난 공경들이 있었다. 고려 말 합문지후(閤問祗侯) 휘 충(种)은 태조 이성계(李成桂)에게 복종하지 않아 김종연(金宗衍)의 옥사에 연루되어 장형을 받고 귀양에 처해졌는데, 이분이 선생의 10대조이다. 6대조 휘 유형(由亨)은 은덕(隱德)이 있었는데, 영천 신잠(靈川申潛)이 장흥으로 귀양 왔을 당시 서로를 알아주는 지기(知己)가 되었다. 5대조는 침랑(寢郞)을 지낸 휘 진현(晉賢)이며, 고조는 진사 휘 곤(鯤)이다.
증조는 훈련원 정(訓鍊院正)을 지낸 어른으로, 맏아들이 원종공신(原從功臣)에 녹훈됨으로써 여러 번 추증되어 호조판서(戶曹判書)에 이른 휘 덕화(德和)이며, 할아버지는 부사 겸 방어사(府使兼防禦使)를 지낸 휘 정철(廷喆)이다.
선생은 기사년(1689, 숙종15) 5월 13일 자시(子時)에 한양 종남산(終南山) 아래 주자동(鑄字洞) 집에서 태어나 병술년(1766, 영조42) 겨울 남쪽 바닷가 도천(陶泉)의 간암(艮庵)에서 세상을 떠나니, 향년 78세였다. 병술년 12월 19일 아침에 병세가 위독해져 숨이 끊어졌다가 다시 깨어났는데 해 질 녘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정신이 맑아졌다.
둘째 아들에게 붓을 쥐도록 명한 다음 불러서 사귐에는 남녀노소가 없으니 왜 굳이 장년뿐이겠는가. 맑은 혼이 이따금 혼자 찾아가면
知音無老少
何必壯年而
淸魂時獨往
桂巷月依依
라는 한 구를 쓰게 하였다. 그리고 첫닭이 울 때 부음과 함께 족손(族孫) 백규(伯珪)에게 전하게 하였다. 또 “무(武)를 버리고 문(文)을 따라 이로써 자손들을 가르쳐라. 선조를 먼저 위하고 나 자신을 뒤에 둠으로써 후손들을 창성케 하라. 〔舍武從文, 以敎子孫. 先先後己, 以昌後昆.〕”라는 16글자를 불러서 쓰게 하여 부음과 함께 종손 백침(伯琛)과 그 아우 백찬(伯瓚), 백림(伯琳), 백록(伯琭)에게 전하게 하였다.
또 “관의 재목 두께는 두 치를 넘지 말고 염습할 때는 지금 입은 옷으로 해라. 신주(神主)를 세우지 말며 장지(葬地)는 멀리서 구하지 마라. 장사 지낼 때 전(前) 부인 최씨(崔氏)의 묘를 옮겨와 합장하라.”라는 유서를 쓰게 하였다.
마침내 부축을 받고 일어나 속미다(粟米茶)를 올리라고 명하고 몸소 손가락을 구부려 가며 숟가락을 세더니 다섯 숟가락이 되자 “되었다.”라고 하였다. 아주 희미한 음성으로 “2대의 갈문(碣文)이 비석에 새겨지지 않았고, 돌아가신 아버지의 묘표(墓表)는 미호(渼湖) 어른께 허락받았지만 아직 받아 오지 못하였다. 하늘은 어찌해서 내게 몇 년을 빌려주지 않는가!”라고 하였다. 다른 일은 언급하지 않고 이부자리로 돌아와 미처 몸을 편안히 하기도 전에 숨을 거두니, 바로 그날 술시(戌時)였다.
선생이 세상을 뜨자 신분의 높고 낮음, 노인과 아이 할 것 없이 온 마을 사람이 모두 친척인 양 곡을 했으며, 원근에서 소식을 들은 자들은 서로 마주 보고 조문했으니 그의 삶이 또한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그의 족손 백규는 이미 달려가 곡을 하고 염습과 찬도(欑塗)를 살폈으며 석 달 동안 제마(制麻)를 입었다. 다음 해 2월 17일, 천관산 서쪽 갑경(甲庚)의 언덕에 장사 지냈고 죽기 직전에 했던 유언에 따라 최씨와 합장하였다.
최씨의 본관은 수성(隋城)으로, 아버지는 부사(府使) 최격(崔槅)이고 할아버지는 우윤(右尹) 최종두(崔宗斗)이다. 아들 하나와 딸 넷을 낳았으며, 갑인년(1734, 영조10) 5월 17일 술시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은 밀양 박씨(密陽朴氏)를 두 번째 아내로 맞아들였는데 첨정(僉正) 박원주(朴元柱)의 딸이며 아들 둘을 낳았다.
아! 옛날에 황헌(黃憲)은 비록 어질었지만 실제 일로 드러난 행적은 원래 없었다. 황헌을 전하는 사람은 다만 언어로써 그 생김새와 모습을 묘사해 후세 사람들이 볼 수 있게 하였다. 지금 내가 이분의 행장을 짓고 있지만 이분에게 걸맞은 글이 없다.
다만 살아서는 사람들이 모두 사랑하고 공경했으며, 죽어서는 사람들이 모두 통곡하고 애석하게 여겼다는 두 가지 말로써 깊이 숨어 있는 어진 사람을 드러내는 군자들에게 받들어 고한다. 부디 이 글을 통해 세상에 드날려 우리 여남(汝南)의 안자(顔子)를 사라지지 않게 한다면 다행이겠다.
숭정 갑신후 124년(1768, 영조44) 중추절 좋은 날에 종인 백규가 삼가 행장을 쓰다.
아! 우리 간암 선생은 마음을 바르고 행실을 삼가는 것이 참으로 보통사람들보다 몇 등이나 뛰어났지만 몸을 낮추는 덕 또한 본래 성품 그대로 행하신 분이다.
게다가 옛 성인의 청화한 기운이 있었다. 그러나 〈행장〉을 기록하면서 거론할만한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닌데 만약 또 구구한 말을 늘어놓는다면 역시 설만한데 가까울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행장〉을 지으면서 내 스스로 말하기를 선생과 타인을 함께 거론할 때는 선생을 모두 처사군(處事君)이라 칭하고, 구구절절 처사군이라 칭할 때마다 온화하고 공손한 사람이 옥처럼 빛이 나서 완연히 눈앞에 있는 듯이 하겠다고 하였다. 이는 내가 마음속에 알아주는 의리를 간직한 자로서 주 부자(朱夫子)가 그의 장인을 유빙군(劉聘君)이라고 칭한 뜻을 미루었던 것이지, 애당초 손해를 끼치려고 한 말이 아니다.
지금 혹자들이 이것을 의심하는데, 이들이 어찌 나와 선생과의 관계를 깊이 아는 자이겠는가. 이에 후일 이것을 보는 자들이 마침내 미혹할까 염려해 행장의 말미에 기록해 두는 것이다. 아! 저승에서 다시 살아나기 어려운데 소자가 어디에다 말씀드리겠습니까. 을미년(1775, 영조51) 정월 초 8일 백규가 쓰다. <아양 이병혁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