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高麗史 卷11
계해(癸亥)일에 왕이 교서를 내리기를 “내가 덕이 부족한 사람인데, 맏아들이 있으니 마땅히 그를 동궁으로 봉해야 하겠다”고 하면서 해당 관리에게 특명을 내려 태자를 책봉하고, 첨사부(詹事府), 좌춘방(左春坊), 연경궁사(延慶宮司) 들에 관원을 배치하는 동시에, 노복과 식읍을 다 여기에 종속시키게 하였다.
이날 소태보(邵台輔)를 태사(太師)로, 김상기(金上琦)를 태부(太傅)로, 최사추(崔思諏)를 태보(太保)로, 김선석(金先錫)을 소사(少師)로, 황영을 소부(少傅)로, 임간(林幹)을 소보(少保)로, 위계정(魏繼廷),이오,조인충(趙藺忠),곽상(郭尙) 등을 모두 빈객(賓客)으로, 김한충(金漢忠) 홍기(洪起) 등을 좌우서자(左右庶子)로, 유신(柳伸), 김경용(金景庸) 등을 좌우유덕(左右諭德)으로, 윤관(尹瓘)을 동궁시강학사(東宮侍講學士)로, 최공후(崔公珝)를 가령(家令)으로, 문익(文翼), 고령신(高令臣) 등을 좌우찬선대부(左右贊善大夫)로, 우원령(禹元齡)을 중사인(中舍人)으로, 이위(李瑋)를 전내(典內)로, 장녕(蔣寧)을 세마(洗馬)로, 유재(劉載)를 시독(侍讀)으로, 강증(康拯)을 중윤(中尹)으로, 유인무(柳仁茂)를 동의랑(同議郞)으로, 장경(張景)을 약장랑(藥藏郞)으로, 최인필(崔寅弼)을 궁문랑(宮門郞)으로, 이후(李侯)를 솔경(率更)으로, 황유현(黃兪顯)을 시위(侍衛)로, 오손경(吳孫慶), 최유정(崔惟正) 등을 좌우청도솔부솔(左右淸道率府率)로, 나준(羅俊), 궁제(弓濟) 등을 좌우감문(左右監門)으로, 최정(崔挺)을 우위(右衛)로, 최현(崔現)을 여분 중랑장(旅賁中郞將)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원문) 高麗史 卷11 - 世家 卷第11 - 肅宗
癸亥, 敎曰: “寡人謬以凉德. 而有元良, 宜升震位.” 特命有司, 立太子, 備詹事府․左春坊․延慶宮司等官, 皂隸釆邑, 皆屬焉. 以邵台輔爲太師; 金上琦爲太傅; 崔思諏爲太保; 金先錫爲少師; 黃瑩爲少傅; 林斡爲小保; 魏繼廷․李䫨․趙藺忠․郭尙, 並爲賓客; 金漢忠․洪起爲左右庶子; 柳伸․金景庸爲左右諭德; 尹瓘爲東宮侍講學士; 崔公詡爲家令; 文翼․高令臣, 爲左右贊善大夫; 禹元齡爲中舍人; 李瑋爲典內; 蔣寧爲洗馬; 劉載爲侍讀; 康拯爲中允; 柳仁茂爲司議郞; 張景爲藥藏郞; 崔寅弼爲宮門郞; 李侯爲率更; 黃兪顯爲侍衛; 吳孫慶․崔惟正爲左右淸道率府率; 羅俊․弓濟爲左右監門; 崔挺爲右衛; 崔現爲旅賁中郞將.
5) 高麗史 卷11
기해(己亥)일에 김상기(金上琦)를 수태부(守太傅)로, 황영(黃瑩)을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로, 조인충(趙藺忠)을 수사공상서좌복야(守司空尙書左僕射)로, 위계정(魏繼廷)을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이오(李䫨)를 예부상서(禮部尙書)로 각각 임명하였다.
(원문) 高麗史 卷11 - 世家 卷第11 - 肅宗
己亥, 以金上錡守太傅; 黃瑩爲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 趙藺忠守司空尙書左僕射; 魏繼廷爲吏部尙書; 李䫨爲禮部尙書.
6) 高麗史 卷11
경자(庚子)일에 임간(林幹)을 판상서형부사(判尙書刑部事)로, 위계정(魏繼廷)을 판한림원사(判翰林院事)로, 오수증(吳壽增)을 판삼사사(判三司事)로, 왕하(王嘏)를 추밀원(樞密院) 좌승선(左承宣)으로, 조규(趙珪)를 우부승선(右副承宣)으로 각각 임명하였다.
(원문) 高麗史 卷11 - 世家 卷第11 - 肅宗
庚子, 以林幹判尙書刑部事; 魏繼廷判翰林院事; 吳壽增判三司事; 王嘏爲樞密院左承宣; 趙珪爲右副承宣.
7) 高麗史 卷11
12월 병오일에 요나라에서 고주(高州) 관내 관찰사 고덕신(高德信)을 보내 왕의 생신을 축하하였다. 위계정(魏繼廷)을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주국(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柱國)으로, 이오(李䫨)를 참지정사주국(叅知政事柱國)으로, 오수증(吳壽增)을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겸 태자빈객(太子賓客)으로, 유신(柳伸)을 예부상서동지추밀원사한림학사승지(禮部尙書同知樞密院事翰林學士承旨)로, 김경용(金景庸)을 병부상서동지추밀원사(兵部尙書同知樞密院事)로, 한영(韓瑩)을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로, 최홍사(崔弘嗣)를 이부상서로(吏部尙書), 백가신(白可臣)을 병부시랑좌간의대부(兵部侍郞左諫議大夫)로, 고령신(高令臣)을 형부시랑우간의대부(刑部侍郞右諫議大夫)로, 강증(康拯)을 고공랑중어사잡단(考功郞中御史雜端)으로, 노충근(盧忠謹)을 시어사(侍御史)로, 김지화(金至和)를 우보궐(右補闕)로, 김준(金晙)과 장기(張起)를 좌우습유(左右拾遺)로 각각 임명하였다.
(원문) 高麗史 卷11 - 世家 卷第11 - 肅宗
十二月丙午, 遼遣高州管內觀察使高德信, 來賀生辰. 以魏繼廷爲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柱國; 李䫨叅知政事柱國; 吳壽增爲尙書左僕射兼太子賓客; 柳伸爲禮部尙書同知樞密院事翰林學士承旨; 金景庸爲兵部尙書同知樞密院事; 韓瑩爲尙書右僕射; 崔弘嗣爲吏部尙書; 白可臣爲兵部侍郞左諫議大夫; 高令臣爲刑部侍郞右諫議大夫; 康拯爲考功郞中御史雜端; 盧忠謹爲侍御史, 金至和爲右補闕; 金晙․張起爲左右拾遺.
(144-139일차 연재에서 계속)
첫댓글 (144-138일차 연재)
(장흥위씨 천년세고선집, 圓山 위정철 저)
138일차에도 '충렬공 관련 고려사 기록' 이 밴드에 게재됩니다.
[본문내용- 충렬공 관련 기록]
(앞에서 이어서, 7-3회차)/ 무곡
고려 15대왕인 숙종때 사건이 위의 고려사 권11에 실려 있습니다.
후임은 숙종의 장남인 예종으로 16대 임금입니다./ 무곡
충렬공을 '빈객'으로 임명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이부상서'로 임명한다는 내용도 보입니다.
'이부상서'는 이조의 장관으로 조선시대의 '판서'와 동격으로 봐도 될것 같은 권한과 책임이 큰 자리입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행정안전부'와 '인사혁신처'를 합해 놓은 부처의 장관으로 정부의 인사와 시험, 의전 등을 행하는 직책이라고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 무곡
충렬공 묘소 입로비입니다.
천년세고선집 밴드게재가 더욱 가속도가 붙어 144-138일차가 되었습니다.
앞으로 6일차가 남았습니다.
이번 게재에는 6년전의 수정본과 비교할 때 '만회재공(정철) 부분'이 3페이지 정도 추가되었으며,
존재공의 '옥과현감 해잠' 부분이 보완 및 증보되어 8페이지 정도 늘어나는 등 전체적으로는 10여 페이지가 늘어난 것이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외 부분적으로 수정 및 보완된 곳이 적지 않아 천년세고선집의 편집 및 내용상 완성도가 더욱 높아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끝까지 함께해 주시기를 요청드립니다./ 무곡
고려사에 충렬공에 대한 기록이 전해오고 있네요./ 무곡
충렬공 위계정께서는 고려시대는 물론이고 현재까지 통틀어 관료로서 최고위직에 오른 위문의 걸출한 인물로 사료됩니다./ 무곡
위계정(魏繼廷),이오,조인충(趙藺忠),곽상(郭尙) 등을 모두 빈객(賓客)으로,
위계정(魏繼廷)을 이부상서(吏部尙書)로,
위계정(魏繼廷)을 판한림원사(判翰林院事)로,
"위계정(魏繼廷)을 중서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주국(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柱國)으로"에서 관직명이 엄청 길어요./ 벽천
위윤기 님
종1품인 '중서문하시중'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ᆢ
지금으로 말하면
국무총리정도의 직위가 아닌가 합니다만 ᆢ
삼성 중의 한명이니
그보다는 조금 아래 직급인 정승 정도,
하여튼 아주 고위직으로 사료됩니다./ 무곡
최근에 발행된 관보 내용 중
정부의 인사사항입니다.
'고려사'와 비교해보는 것도 좋을것 같습니다./ 무곡
응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