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히브리서 9:23~28
7421장 내가 예수를 믿고서
7435장 나의 영원하신 기업
(히 9:23)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
(히 9:24) 그리스도께서는 참 것의 그림자인 손으로 만든 성소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로 그 하늘에 들어가사 이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시고
(히 9:25)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
(히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한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물로 드려 죄를 없이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히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8)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모든 사람들과 믿음의 성도에 대한 미래예언 (히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라는 말씀에서 보이듯이 반드시 죽습니다. 또 하나는 심판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죽음이란 연기처럼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는 흙으로 지음 받았으니 흙으로 돌아가고 내 영혼은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입니다. 누가 이 죽음을 벗어날 수 있으며 회피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라도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입니다.
최근 수십 년 동안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다룬 서적과 과학 보고서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대부분 죽음에 대해 생각조차 하기 싫어합니다. 그러나 결국 누구나 죽음의 현실에 부딪치게 마련이며, 그러면 죽음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인간은 죽음 앞에서 매우 나약한 존재로서, 매일 평균 16만 명 이상이 죽어 갑니다! 사람은 누구나 예외 없이 죽음에 직면하게 되며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현실에 두려움을 느낍니다.
전문가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여러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그중에는 고통에 대한 두려움,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에 대한 두려움, 자신의 죽음이 다른 사람들에게 미칠 부정적인 영향에 대한 두려움 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신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가장 큽니다. 종교에 관계없이 많은 사람들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난다는 생각에 두려워합니다. 게다가 과학은 이러한 두려움을 더욱 가중시킵니다. 현재 대부분의 신체 기능은 과학적으로 설명이 가능합니다. 생물학자나 물리학자, 화학자 가운데 인간에게 몸이 죽고 나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보이지 않는 뭔가가 있다는 증거를 찾은 사람은 분명히 아무도 없습니다. 따라서 많은 과학자들은 인간의 죽음을 단순히 생물학적 작용으로 설명합니다.
죽음의 문제는 오직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으로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요 11:25~2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고 하십니다. 예수님을 내가 믿는다는 것은 그 분의 생명을 내 안에 모셔 들이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내게 예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게 하셨습니다. 내 안에 성령으로 들어와 계신 예수님이 내게서 나타나도록 하는 것이 신앙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이 자라나는 것을 방해하는 진짜 원수는 바로 나라는 사실이 믿어지십니까? 나라는 생명은 자기를 보존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흔히 생존본능이라고 하지요. 이 본능을 나를 붙들고 놓아 주지를 않습니다. 끝임없이 자기를 붙잡도록 격려하는 존재가 있는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원히 대적하고 있는 마귀입니다. 끝임없이 나의 생명은 내가 보존하여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마귀의 속살거림이란 “네 인생을 네가 책임져야지 다른 누구에게 의탁하는 것은 너의 약함을 보이는 것이 아니냐?”면서 우리를 유혹합니다.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길들여 사느냐가 관건입니다. (갈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했습니다. 육체대로 사는 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자기 스스로를 지키려고 애를 쓰는 사람은 육체대로 사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가 인생의 주인이라 생각하여 자기의 사상과 계획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입니다. 사람의 관점으로 볼 때는 무척 성실하게 보입니다. 무척 계획성 있고 성실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잠 16:25)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자기 인생을 위하여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런데 죄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죽음 이후의 심판을 이기지 못합니다.
심판은 두 종류입니다. 죄에 대한 형벌이 주어지는 심판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행한 모든 것에 대한 상급 심판입니다. 죄의 심판은 세상에 살면서 저지른 모든 죄악은 하나도 남김없이 드러날 때가 옵니다. 드러나 죄에 대하여는 무엇으로도 변명할 수도 없고 벗어날 수도 없습니다.
(롬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했습니다. 죄는 영원한 사망으로 이끌려 갑니다. 단번에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두려움이 영원토록 지배하고 사망의 고통이 한순간도 쉬지 않고 이어지는 지옥으로 떨어지는 것이 바로 영원한 사망입니다. 이 사망에서 누구 건져낼 수 있겠습니까? 오직 예수님 외에는 길이 없습니다. 25절에서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의 피로써 성소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기를 드리려고 아니하실지니”라고 했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들은 일년에 한 번씩 속죄일에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 전체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 희생 제물의 피를 가지고 지성소에 들어갔습니다.(레 16장). 이러한 속죄 행위는 매년 반복되었으며 이 속죄 행위를 위해 매년 다른 희생 제물의 피를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나 구속 사역을 위한 그리스도의 희생은 영원한 효력을 갖고 있기 때문에 반복해서 드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이 나의 죄를 씻어주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이제는 그 믿음이 실체화되어 내 안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자라나야 됩니다. 23절에 “그러므로 하늘에 있는 것들의 모형은 이런 것들로써 정결하게 할 필요가 있었으나 하늘에 있는 그것들은 이런 것들보다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의 성막은 하늘의 것들에 대한 모형이라고 했습니다. 세상에 속한 것은 정결하게 하는 피 뿌림이 있어야 하지만 하늘에 것들은 이미 완전하여 흠이 없어 피를 뿌려 정결하게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는 “더 좋은 제물로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제물에 대하여 성서주석학자들은 하늘 성소에 들어갈 그리스도인들을 가리킨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지난 시간에 모든 창조물의 꽃은 사람이라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은 사람을 그 안식에 초청하시므로 하나님과 더불어 그 분이 창조하신 모든 함께 누리도록 하는 안식으로 초청하셨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새롭게 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의 주인공은 예수의 피로 속죄함 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이 자녀들이 천국에 들어와야 할 숫자를 채우므로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 빛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에 들어갈 내 영혼이 준비하여야 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고 하셨습니다. 내 몸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이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은 후에는 내 몸이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그의 피로 나를 사셨습니다. 그리고 보증으로 성령을 내게 보내셔서 하나님의 성전이 되도록 하셨습니다. (고전 3: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교회당이 성전이 아니라 우리 각 사람이 성전 되어서 예배가 살아나고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2장에서는 혼인 잔치를 베푼 임금의 이야기를 비유를 들어 천국의 초청이 어떠한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잔치에 필요한 모든 것을 풍성하게 준비하였습니다. 그리고 초청을 합니다. 그런데 이 초청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속출합니다. 이런 핑계 저런 핑계로 도무지 이 잔치에 오지를 않는 것입니다. (마 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 잔치에 손님들이 가득한지라”고 했습니다. 지금이야 의복이 흔합니다만 과거에는 옷이 흔치 않았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이 같은 옷을 입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그러 까닭에 부자들이나 권력자가 잔치를 벌이게 되면 미리 예복을 보내어 입고 오도록 배려를 하였습니다. 그런데 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을 보니 예복을 입고 오지 않았습니다. 이에 대하여 (마 22:11~12) “임금이 손님들을 보러 들어올새 거기서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을 보고 이르되 친구여 어찌하여 예복을 입지 않고 여기 들어왔느냐 하니 그가 아무 말도 못하거늘”이라고 하였습니다.
사람도 호의에 대한 반응이 없으면 화가 나는 법입니다. TV에서 요리연구가 김혜정씨가 나와서 자기는 요리하는 것이 너무나 즐겁고 행복해서 남편을 위하여 밥상을 차려놓고 기다리면 남편은 제 때에 와서 밥을 먹지 않아 속상하다고 하였습니다. 조갑경이라는 가수도 밥상을 차려놓고 남편에게 말하면 “먼저 먹어!”그런다고 합니다. 이것이 더욱 짜증나게 만든다고 하소연합니다. 누구는 먼저 먹을 줄 몰라서 기다리냐는 것이지요. 아내의 성의를 무시하는 것이 얄밉고 속이 상하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것은 영원 전부터 만물이 있기 전에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받을 사람들이 거처할 곳을 예비하셨습니다. 이것을 이루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수치와 극심한 고통이 수반된 죽음까지 치러야 했습니다. 죽음이 없으신 예수님이 죽음의 두려움과 고통을 받으셨다는 것은 말로 표현 못할 만큼 크고 놀라운 희생을 치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짓밟습니다. 예수님의 희생으로 이룬 천국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을 역행하는 것이요 철저히 무시하는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이뤄진 천국의 초청에 응하여 나오는 것이 믿음이요. 이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28절에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그의 택하신 자녀들이 예수 안에 담겨있는 아름다운 보화를 누리도록 오십니다. 구약의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간 것과 연결되는 말씀으로 속죄일에 대제사장이 속죄제를 드리기 위해 지성소에 들어갔을 때 백성들은 근심 가운데 대제사장이 직무를 마치고 지성소에서 나오기를 밖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제사장이 성소에서 나왔을 때 백성들은 대제사장이 대신 드린 속죄제를 하나님께서 받으셨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속죄의 은혜를 선언하면 기뻐하고 즐거워 하였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하늘 성소에 들어가셔서 백성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나타나셨다가 자신을 기대하는 자를 위하여 두 번째 나타나시는 에수님의 재림의 사건을 비유로 말씀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