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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이 있나니
말씀/마태복음 5:1-16
요절/마태복음 5:3, 찬송가/516장
예수님은 천국이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부들을 부르시고, 병자들을 고치고 또 말씀을 가르치며 천국복음을 보이셨습니다. 그런데 과연 누가 천국복음을 누릴 수 있을까요? 또 천국복음을 간직하고 산다는 소위 신앙생활은 무엇을 말할까요? 이를 집중해서 전하고 있는 것이 산상수훈입니다. 산상수훈은 천국복음을 빼고서는 이야기가 안 됩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말씀인 ‘팔복’은 산상수훈에서도 천국복음의 입문서요, 천국을 향해 가는 신자들의 삶의 방향을 일깨워 주는 내비게이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천국을 얻으며 누릴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아온 제자들을 향해 입을 열어 천국복음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이 부분은 ‘산상수훈’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천국복음의 첫 번째 원리는 흔히 ‘팔복’이라고 부르는 부분입니다. 팔복의 가르침은 크게 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처음 넷은 하나님에 대한, 또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고, 뒤의 넷은 사람에 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먼저 하나님에 대한 관계와 자세가 있고, 그 다음에 사람에 대한 관계와 자세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원리는 십계명도 그러하고 주기도문도 그러합니다. 이를 테면 성경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매번 ‘복이 있나니’로 시작되고, ‘복이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밝히고 그 근거와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아주 치밀합니다. 또 처음과 마지막이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는 것을 통해 이 모든 8가지 복이 천국복음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결국 예수님이 전파하는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이 누리게 되는 복된 상태와 또 그러한 상태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단순히 당부가 아니라 결단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첫 번째 복을 볼까요? 3절을 읽겠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천국복음의 복을 누릴 수 있는 첫 번째 관문, 조건은 ‘심령이 가난한 것’입니다. 흔히 가난하면 필요한 것이 제대로 없는 것을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갑이 가난하다. 스펙이 가난하다는 말을 합니다. 이런 것들은 하나같이 어떤 조건을 말합니다. 그런데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난은 어떤 조건아 아니라 마음상태를 말합니다. 많은 경우 조건이 가난하면 마음도 가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더 독하게 마음을 먹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나름 강하고 센 사람입니다.
어찌되었든 흔히 심령이 가난한다는 것을 자신이 내세울 것이 없어서 낮아지고 깨진 마음으로 이해합니다. 한때 스펙을 자랑하고 건강을 자랑했는데, 갑자기 상황이 바뀌고 문제가 생겨서 마음이 깨어집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나오는 그 가난한 마음, 그 가난한 마음이 복된 것으로 많이 이해합니다. 전혀 아니라고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난한 심령’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즉 뭐가 좀 안되고, 뭐가 좀 깨져서 상하고 낮아지고 겸손해지는 그런 정도의 가난한 심령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을 향한 마음 자세를 말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가난합니다. 돈에 대해서 가난한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지 돈을 벌고자 하는 것처럼, 이 사람은 하나님에 대해서 가난하기 때문에 계속해서 하나님을 찾고 절박하게 매달립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을 얻고자 하고, 하나님을 얻을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돈에 대해서 가난한 사람이 돈만 벌면 다 된다고 여기는 것처럼, ‘가난한 심령’은 하나님이면 다 된다고 여깁니다. 한마디로 “God is All! Jesus is All!’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모든 것을 잃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안심하고, 하나님으로 만족합니다. 이것이 지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이들이 받는 복이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심령이 가난한 자, 하나님을 구하고 하나님을 찾는 자, 하나님으로 만족하는 자, 그 사람은 천국을 얻는 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구한 그에게 천국을 주십니다. 그 마음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감동과 은혜와 기쁨 가운데 살게 해 주십니다. 특히 여기서 ‘복이 있다’는 말은 다른 복들은 미래형인데 반해 이 복은 현재형입니다. 내가 절박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구할 때, 천국을 얻습니다. 또 이것은 예전에 그 언젠가 한번 가난한 심령으로 천국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천국을 얻는 복으로 다 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합니다. 늘 현재적입니다. 늘 싱싱한 지금 복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지금 하나님에 대해서 심령이 가난해야만 천국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복이 점점 은행 잔고 빠지듯이 슬슬 빠져나가고 결국 텅 비어버릴 수 있습니다.
특히 ‘심령이 가난한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복의 시작이요, 출발이 됩니다. 심령이 가난할 때, 하나님의 말씀도 듣고자 하게 되고, 또 어떤 가운데서도 믿음을 지키게 됩니다. 결국 내 신앙을 지키는 힘은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얻고자 하고, 하나님께 구하는 심령이 가난한데서부터 시작되고 계속됩니다. 그런 점에서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얻고자 하는 이 가난한 심령이야말로 가장 기본이 되는 복 중의 복입니다. 그럼 과연 나는 심령이 가난합니까? 나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해 얼마나 비어 있습니까? 10리터 빈 상태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하나님이 10리터 채워주실 것입니다. 10리터 만큼의 천국의 은혜와 감동과 기쁨으로 채워주십니다. 그런데 내 마음이 다른 세상 것으로 꽉 차 있어, 겨우 커피 한잔 정도 50cc 정도 하나님을 향해 비어 있다면, 커피 한잔 정도만 천국의 은혜와 감동과 기쁨을 채워주실 것입니다. 달리 말해 메마른 심령으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애통은 가슴이 찢어지는 아픔, 슬픔을 말합니다. 애가 끓는다, 애간장이 탄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속이 뒤틀리는 고통 속에서 괴로워하는 것이 바로 애통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애통하는 슬픔은 갖는 것이 불행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여러 가지 일로 애통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애통은 시험에 떨어지고, 하던 일이 안되어서 애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애통은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애통하는 것입니다. 왜 애통하겠습니까?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자신의 죄 때문에 눌리고 괴로워서 애통하는 것입니다. 사실 죄를 지어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살짝 고민은 하지만, 별로 애통하지 않습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에 대해서 무감각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너무 너무 힘들어 하고, 괴로워하며 애통합니다. 이 애통은 사실 심령이 가난한 것에서부터 오는 것입니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사람이 다윗입니다. 시편32편을 보면, 처음 그는 애통해 하지 않았습니다. 완전 범죄를 꿈꾸며 좋아 라 했습니다. 그러다 그가 나단 선지자를 통해 자신의 죄가 드러났을 때, 애통합니다. 그때 다윗은 자신의 심령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 속에 꽁꽁 담아 두려고 했더니 내 뼈는 가루로 변화고 내 말은 종일토록 신음이 되었습니다. 나를 짓누르는 중압감 그치지 않으니 내 생명의 진액이 다 말라버렸습니다. 마침내 내 모든 것 주께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 내 모든 잘못을 모조리 털어놓겠습니다. 갑자기 나를 짓누르던 압박이 사라지고 죄책감이 날아갑니다.”(시 32:3-5) 그때 그가 받은 복이 이 시의 맨 앞에 나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를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1) 자신의 죄에 대해서 애통하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위로를 받습니다. 그런데 메시지 성경은 이 말씀을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에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라고 했습니다. 청년들에게는 자신이 원하는 인생계획을 이루어가는 것이 가장 소중한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그 무엇보다 하나님을 가장 소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잃었다는 탄식 가운데 애통 하는 사람, 그 사람은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위로를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죄 사함을 통해서 위로해 주십니다.
또 어떤 사람이 복이 있습니까? 5절을 보십시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온유’하면 다른 사람에 대해서 성격이 부드럽고 따뜻한 것을 말합니다. 실제로 천성적으로 마음이 부드럽고 따듯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의 ‘온유’는 사람에 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온유하다면 무엇일까요? 하나님에 대해서 마음이 부드러운 것입니다. 순종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뜻대로 가게 해 주신다면 온유하지 않을 사람이 없습니다. 무슨 성질 낼 일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전혀 아닌 경우가 있습니다. 내 뜻이 박살나고 내 방향이 깨어집니다. 그럼 이때 하나님에 대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것입니다. 이때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주권에 대해서 불평 원망하지 않고 잘 따르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에 대해서 성질내고 잘 삐지는 사람들도 의의로 많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엘리야입니다. “하나님, 차라리 저를 죽여 주세요!” 하고 드러누워 버리지 않습니까? 반면 성경에서 온유한 사람하면 모세를 꼽습니다. 성경은 모세의 온유함이 지면에 승하다며, 모세가 세상에서 가장 온유한 사람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민12:1-3절에 그에게 반발했던 미리암과 아론에 대해서 잘 감당했기 때문으로 나옵니다. “너만 선지자냐?” 하며 모세의 리더십에 대적하고 반발하는, 미리암과 아론에 대해서 모세는 같이 성질내며 싸우지 않고 잘 감당합니다. 이를 보면 자기에게 반발하고 성질내는 사람에 대해서도 화내지 않고 잘 감당하는 부드러운 성격의 소유자가 온유한 사람이구나 하며 오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정말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성격이 부드러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모세가 성격이 부드러운 사람입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한 성질 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일생을 보면 몇 번 한 성질 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런 그가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 상황에서 온유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모습을 잘 보여주는 것이 그의 말년입니다. 그는 광야 40년을 마치고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었습니다. 그는 정말 가나안 땅에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여기서 은퇴하라고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여호수아에게 넘기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나를 건너가게 하옵소서’하며 간청하였지만 하나님은 거절하십니다(신3:25). 이러면 뒤집어 질 수 있습니다. 40년 동안 뼈 빠지게 고생하면서 백성들을 인도했는데, 왜 이러시는가? 하나님께 분노하며 항의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세는 순종해서 조용히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집니다. 불평하지 않습니다. 원망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이렇게 온유는 하나님의 뜻이 나의 뜻과 다를지라도 그 방향에 겸손하게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에게 온유하기 때문에 나에게 거스리는 사람에 대해서도 온유한 것입니다. 즉 사람과 싸우지 않고 이 상황속에서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모세는 가장 온유한 자로 남았습니다.
온유한 자는 땅을 기업으로 얻는 복을 얻는다고 했습니다. 부동산을 많이 얻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기업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동역자, 하나님 나라의 청지기로서의 하나님 역사의 남는 자가 되고 계승자가 되는 것입니다. 온유했던 모세는 역사상 기록된 가장 위대한 지도자로 남았고, 또 아름답게 마무리를 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온유는 신앙의 성숙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 누가 복 있는 자입니까? 6절을 보십시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여기서 ‘주리고 목말라 하는 의’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기도하러 올라갔던 바리새인과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잘한 것이 많기 때문에 이것저것 자신의 의를 내세웁니다. 그러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눅18:14절에 “하나님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바리새인은 자신의 의가 많이 때문에 전혀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마르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세리는 하나님의 의에 주리고 목말라 했습니다. 이런 그는 하나님이 주시는 의로 배부르게 되는 복을 얻습니다.
7절을 보십시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여기서부터 사람과의 관계에서 나타나는 마음입니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첫 번째 마음이 무엇일까요? 신뢰, 의리... 그런데 그 첫 번째가 긍휼입니다. ‘긍휼’은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돌봐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단지 착한 마음, 휴메니티가 아닙니다. 무엇보다 이 긍휼의 출발점은 하나님께서 나를 긍휼히 여기신 것을 알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런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 긍휼은 마태복음에 정말 많이 나오는 단어이고, 신앙생활에서 아주 중요한 키워드입니다. 즉 나 같은 죄인을 사랑하신 그 하나님의 사랑 때문에 다른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섬기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긍휼의 마음도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면 긍휼히 여김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조건이 아니라, 내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길 때에,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긍휼하심을 더 깊이 알게 되고 느끼게 됩니다. 내가 사람을 불쌍히 여겨서 돕다보니깐, 다른 사람의 불쌍한 모습, 어려운 모습을 보면서, 나도 내용 없고, 형편없는 불쌍한 자였는데, 하나님이 나 같은 자를 불쌍히 여기셔서, 요 만큼이라도 사람이 되게 하셨구나? 깨닫고,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을 받는 복을 얻습니다. 메시지 성경은 “남을 돌보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렇게 정성들여 돌보는 순간에 너희도 돌봄을 받는다.” 라고 하였습니다.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야 말로 곧 나를 향하신 주의 긍휼하심을 알고 주의 은혜를 더 풍성하게 누리게 되는 복을 얻습니다.
8절을 보십시오.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이요.” 어떤 명상원 입구에 이 성경 구절이 적혀 있다고 합니다. 물론 ‘청결한 마음’이 모든 욕망과 갈등과 잡생각을 다 떨쳐 버리라는 정신 수련원이나 명상원 이야기가 아닙니다. 여기에서 마음이 청결하다는 것은 생각과 동기가 깨끗하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곧 ‘두 마음을 품지 않는’것입니다. 무엇보다 청결한 마음이 ‘긍휼히 여기는 마음’에 이어서 곧바로 나왔습니다. 이것은 서로 연결이 된다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긍휼히 여기는데 나름대로 계산을 갖고 할 수 있습니다. 그를 잘 도와서 뭔가 얻고자 하는 마음으로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이 청결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되면 그에게서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게 된다는 것을 아는 순간 더 이상 도움을 중단하고, 긍휼의 마음도 거둘 것입니다. ‘청결한 마음’은 단지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전부입니다. 단순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고 돕는 것입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강도 만난 사람을 돕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강도 만난 사람 도와주고, 명암 주면서 나중에 돈 생기면 계좌번호에 입금하라고 하고 가지 않습니다. 강도 만난 사람 도와주고, 그냥 갑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본다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자기 아들까지 십자가에 내어주는 큰 사랑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해서 그렇게 하셨을까요? 적어도 열 두 제자는 키워내는 역할을 기대했을까요? 주를 위해 죽도록 충성하는 자가 되기를 기대했을까요?
분명히 기대는 하셨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 “왕같은 제사장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못한다고 해서 우리를 향한 마음을 거두지 않으십니다. 아웃시키지 않습니다. 세상에서는 원하는 바를 얻지 못하면, 당장 아웃입니다. 미국에서 가장 흔한 단어가 해고, 아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내가 너에게 기대를 했는데, 아직도 그대로야, 너 안 되겠다. 아웃이야” 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끝까지 우리를 사랑으로 대하시고 감당해 주십니다. 잠언에 보면, ‘정직’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하나님을 경외해라.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행동해라. 라고 말씀하시면서도 정직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뭘 말할까요? 그렇게 못한다는 것을 인정하고, 하나님께 나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이 만큼 높은 수준인 것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두신 기대는 너무나 높고도 높습니다. 그런데 그것 못한다고 해서 “너 나가, 아웃이야.”라고 절대로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못하는 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나오면 다 받아주십니다. 우리가 청결한 마음으로 끝까지 섬길 때에,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더 풍성해지는 복을 얻습니다. 단순한 마음, 손해 보는 것 같지만, 무작정 주는 것 같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을 안다면 가장 큰 복을 얻는 것입니다.
또 누가 복 있는 자입니까? 9절을 보십시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를 NIV는 peace maker 라고 번역했습니다. 다툼과 갈등이 끊이지 않는 세상에서 어느 때보다 peace maker인, 화평케 하는 자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peace maker는 하나님과 죄인의 관계를 잘 맺도록 도와주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곧 ‘사람을 낚는 영혼의 어부요’ ‘양들의 목자’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죄인과 하나님 사이를 화평케 하고자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그런 예수님의 그 모습을 보면서 로마의 백부장은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잘 알지 못합니다. 알지도 못하면서 안 될 때마다 하나님에 대해서 화가 난 사람들이 많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아예 무시하고 살아갑니다. 이들을 하나님께 인도하는 그 사람, 하나님과 화해시키고자 애쓰는 그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받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되기까지 십자가에 못박히는 희생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화평케 하고자 하는 자가 그냥 되지 않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는 정도는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희생이 있고 아픔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는 놀라운 축복이 있습니다. 내가 한 사람의 영혼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받는 복을 받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여기서의 ‘의’는 ‘하나님 나라의 의’입니다. 하나님 편에 서고, 또 하나님을 위해서 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상을 받아야 하는데, 오히려 미움을 당하고 박해를 받습니다. 맞고 터지는 것만이 박해가 아닙니다. 주님을 섬기기 때문에 겪는 모든 어려움이 박해입니다. 이런 박해를 당하면 힘듭니다. 그러나 그런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또 천국이 그들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처음에 복 있는 자와 마찬가지로 이 말씀도 현재형입니다. 지금 의를 위하여 살기 때문에 당하는 박해가 있다면 지금 천국을 누리는 복을 얻습니다.
이 복을 추가적으로 설명합니다. 11절을 보십시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박해가 점점 세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12)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때문에 괴롭힘을 당해서 힘들어 죽겠는데, 예수님은 오히려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기 때문입니다. 우리보다 먼저 온 선지자들도 다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습니다. 박해는 다 안 받고 싶습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자신의 자녀의 이름을 ‘박해’라고 지으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피할 수 있다면 피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를 제대로 믿으려고 하다보니깐 원치 않게 박해가 오는 것입니다. 선지자들도 선지자로 살려고 하다보니까, 사람들의 죄를 지적하니까, 진리를 가르치니까, 누가 좋아하겠습니까? 다 욕하고 박해를 했습니다. 따라서 오늘을 사는 우리가 예수님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우리의 급이 선지자급으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박해는 피할 수 없습니다. 박해를 하나도 안 받는 것이 도리어 이상한 것입니다. 당연히 아픔을 감당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당하는 것보다 더 크고 놀라운 하늘의 큰 상이 있습니다. 그것은 천국을 얻는 상입니다. 사도 바울도 많은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 번도 낙심하거나 주저앉지 않았습니다. 계속해서 부르심의 상급을 쫓아 달려갔고, 즐거워하는 자가 되었습니다. 우리가 이 복을 누리는 자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그럼 이 팔복을 가진 자가 세상에서의 역할이 무엇일까요? 13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소금의 특징은 그 짠맛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이 소금처럼 짠맛을 내는 자들이 되라고 하십니다. 그것은 커피 한 잔도 사지 않는 짠돌이, 짠순이로 살라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의 짠맛은 바로 팔복의 삶 가운데 천국을 누리며 사는 자가 내는 맛입니다. 팔복의 복을 가진 자만이 낼 수 있는 그 짠맛을 낼 때, 소금처럼 세상의 부패를 막습니다. 또 살맛나는 세상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소금이 짠맛을 잃어버리면 아무데도 쓸데가 없습니다. 유대지역의 소금은 암염이라 불순물이 많아 이를 녹여서 짠맛을 내게 합니다. 그리고 맛을 잃은 찌꺼기는 길에 버립니다. 이것처럼 우리가 내야 할 짠맛인 천국복음의 맛을 잃어버리면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국복음을 가진 자다운 짠맛을 내고 살아야 합니다. 바닷물이 썩지 않는 것은 3.5%의 염분 때문입니다. 염분 3.5%만 있어도 세상은 부패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기독교인이 17%라고 하는데, 세상이 이런 것은 기독교인들 책임입니다. 우리가 짠맛을 간직한 소금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또 예수님은 천국복음을 간직한 자들을 향해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하십니다(13). 빛은 어둠을 밝힙니다. 그래서 산 위에 세운 마을도 그 빛이 비춰지기 때문에 숨길 수 없습니다. 또 등불을 켜면 높은 곳에 달아둡니다. 천국의 복음을 간직한 우리는 어둔 세상을 환하게 밝히는 세상의 빛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같이 너희 빛이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그들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16)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드러내야 할 ‘착한 행실’은 굳 매너가 아니라. 곧 천국복음을 간직해서 팔복을 누리는 자로 사는 것입니다. 인간성이 착해서 착한 행실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 복음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 때문에, 짠맛을 내고, 빛을 내는 그 착한 행실을 말합니다. 내 가치관이 세상과 다르고, 세속적이지 않고 하나님을 구하는 그 삶의 모습 때문에 나타나는 행실이 착한 행실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온유하면 당연히 사람에 대해서도 온유할 것입니다. 하나님께 긍휼히 여김을 받았다고 생각하면, 당연히 다른 사람에 대해서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살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이 착한 행실을 보고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자식이 잘 되야 부모가 영광을 받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인 우리가 잘 해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축복의 출발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팔복의 모든 출발, 빛과 소금을 살 수 있는 모든 출발, 우리가 착한 행실로 살아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는 모든 출발은 심령이 가난한 자입니다. 하나님을 얻고자 하는 절박한 심정에서부터 모든 것이 출발합니다. 팔복의 축복들이 시작되고, 결국에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착한 행실’을 드러내며 사는 자들이 됩니다. 그렇다면 신자로 사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 믿는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원하는 것을 하나님을 통해 얻는 것이 아닙니다. 신자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을 얻고자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고자 사는 것이고,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고, 이것을 모든 것으로 여기며 사는 것이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가난한 자이고, 그 사람에게 천국의 복음이 있고, 그 사람은 소금과 빛으로 제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얻고자 하는 한 마음으로 사는 가운데, 팔복의 축복을 얻고, 소금과 빛으로 하나님께 영광돌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