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예술에서 모노 아트라는 말을 쓰는지 이야기해주시면 좀 더 접근할 수 있겠는데요. 미술에서는 1970-80년대쯤 모노하(物派)의 영향이랄까, 비슷한 작업이 많이 있었습니다. 미니멀리즘+현상학의 조합이라고 이해하면 되겠네요.

모노하는 재일동포인 이우환이 창안했다고 할 수 있는 사조입니다. 일본인들의 깔끔취향, 선불교적인 단아함, 빈틈없는 마무리 등에 잘 영합하여 명상적인 단순형태-점, 선 면 등의 반복, 모노크롬-단색계열의 색채로 일본의 매우 영향력있는 사조로 부상한 일이 있었습니다. 사실 오늘날도 일본의 작품들을 보면 모노하 계열이 아닌가 할 정도로 단순 무미하고 마무리가 잘 되는 경향이 있어 한국인에게는 이질감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한국에서도 작가들 사이에는 이우환과 교감하고, 동조하여 많은 작품이 만들어졌습니다. 당시 단일한 색의 점이나 선 작품, 화랑에 흙이나 철판, 시멘트 등을 부어놓는 작업 등은 일본풍의 깔끔함보다 수더분하고 깊이가 있을 뿐 아니라, 당시 작가들이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어-국제전 등에 도맡아 출품할 정도로-상당기간 유행적인 사조가 되기도 했습니다.
한국의 작가들이 이우환의 영향을 받았다면 그것은 '만남의 현상학적 서설'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미술화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작가들이 이우환의 사상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이우환의 글은 월간 공간에 번역본이 실렸는데, 난해하기가 현상학의 원류라고 할 수 있는 후설, 하이데거의 글보다 어렵고, 약간 대중화했다고 할 수 있는 메를르 뽕띠 등과 비슷하달까요? 뽕띠의 [눈과 마음-L'eul et l'espirie]도 영어로 번역된 프랑스인의 현상학적 사고를 중역하다보니 대표적인 오역으로 꼽힙니다만, 이우환의 글 역시 번역가도 모르는 일본식 구문으로 프랑스의 현상학을 번역하는 바람에 더 난해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일본어 원문-그리고 프랑스어 원문-은 더 쉽습니다.
요약하자면, 우리 몸의 피부는 세계를 만나는 장소라는 거죠. 그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은 피부가 현상학적으로 지니는 장소성 때문이라는 건데, 그 장소성은 후설 류의 본질환원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결국 어떤 본질에로 귀착하게 되며, 궁극적으로 그 장소성은 무로 환원한다는 논지입니다.
그런데 이 가설이 그림이나 조각에서는 '장소에서의 만남' 혹은 '만남의 장소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현상'으로 전이되었던 거죠. 메를르 뽕띠 류의, 혹은 '촛불의 미학' 을 쓴 바슐라르 식의 문학적 현상학 계열이라 할 수 있죠. 그래서 이우환은 자신과 세계의 사이에 화면을 두고 현상학적으로 가장 본질적인 것이라고 추론되는 점을 찍는다.... 또 다른 작가의 경우 시멘트를 화랑 바닥에 깔아놓고 유리판으로 짜른 면을 보여준다... 등등의 작품으로 남게 됩니다.
다만 한국의 작가들은 한국적인 감수성이 바탕이 된 친근감, 푸근함, 인공이 덜 가미된 보다 자연적인 것으로 방향을 잡았기 때문에 일본작가들의 작품들보다는 인간적인 면이 강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경향의 미술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아니나, 어느 정도까지는 그 영향 혹은 흐름이 지속되고 있다고 볼 수 있겠습니다.
미술에서의 이러한 흐름이 다른 분야에 영향을 미쳤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패션이나 디자인 등에서는 미술의 흐름, 지명도 등을 많이 도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말로 꼭 번역해야겠다면 지금까지 말씀드린 프랑스 식의 문학적인 현상학을 일본식의 선불교적인 그림으로 해석한 이우환 식의 모노하( モノハ) 또는 비슷한 경향의 단색조미술(Monochrome Art), 혹은 단순화미술(Minimalized Art)등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떤 분야의 내용인지에 따라 다른 번역도 가능할 것입니다.
사진: 연합뉴스 TV에서 캡쳐
2016년 補遺
이우환 위작사건에서 이우환이 위작이 분명한 작품을 자기 것이라고 우기고, 경찰은 그 위작작가를 구속한 일이 있습니다. 미술시장에서 보면 씁쓸한 일이지만, 미술사상美術思想에서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특히 만남을 내세워 작품을 합리화한 '현상학의 이단아'로서는 충분히 강변할 수 있으라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