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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윤리는 어떻게 가능한가?
이 상 형*1)
[논문개요]
이 논문은 찰스 테일러의 입장에서 오늘날 선 윤리가 어떻게 가능한지를 해명하
고자 한다. 현대 의무론을 비판하며 자신의 입장을 부각시키는 공동체주의자들에
따르면 다원주의에서 공동삶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으로서의 보편주의적 도덕관은
개인적 삶의 이상과 가치의 문제에 대답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개인은
보편주의적 도덕규범을 형성하고 정당화하기 위한 파편화된 입자이며, 개인의 삶의
의미와 목적은 단지 사적인 자율성의 영역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좋음에
대한 옮음의 우선성으로는 가치혼란과 가치상실의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오늘날 차이와 연대성을 고려하는 도덕적 감수성
을 강조하는 덕 윤리가 의무론의 보완 또는 대안으로 부활하고 있다. 그러나 논자
는 이 덕 윤리가 개인과 공동체의 관계를 개인의 정체성 형성과 자아실현의 관점에
서 해명하는 선 윤리를 통해 가능하다는 입장이다. 선 윤리가 해명하는 주체와 선
과의 관계를 통해 이해지향적 주체는 탈중심적 자율성에 기반하여 올바른 인정관계
를 통해 좋은 삶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주 제 어 : 선 윤리, 의무론, 공동체주의, 인정투쟁, 다원주의
주제분류 : 윤리학, 사회철학
*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철학과
226 사회와 철학 제23집
1. 들어가며
현대 의무론이 공리주의와의 대결에서 성장했다면 덕 윤리는 현대 의무
론의 단점을 비판하면서 부활했다고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의 주요한 특징
중 하나인 다원주의의 도전에 대한 응답으로 현대 의무론은 공적영역에서
그 역할을 수행하였다. 상이한 가치를 가진 다수의 사람들이 공동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의무론은 모든 사람들이 따를 수 있는 절차를 확립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하버마스와 롤스로 대표되는 현대 의무주의자들은 공정
한 절차를 정당화하는 정의원칙의 수립을 윤리학의 과제와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이런 현대 의무론은 모든 사람들의 동의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 그
특성상 형식주의적이며 각자의 개인적 가치관의 문제에 대해서는 등한시할
수밖에 없었다. 어떤 형식주의적 정의원칙에 의해서는 구체적인 도덕적 선
택상황에서 개인이 처하는 상황은 고려되지 않으며 따라서 도덕적 인간은
비인격적 인간으로 전락하고 현실은 추상화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의무론에 대한 비판을 통해 구체적인 인간과 현실을 강조한 것이
바로 덕 윤리로 대표되는 공동체주의자들이었다. 샌들, 맥킨타이어, 월쩌,
테일러 등으로 대표되는 공동체주의자들은 현대 의무론이 가지는 형식성,
추상성을 비판하며 구체적 인간들이 상호관계를 형성하며 서로에 대해 가
지는 타자에 대한 연대성을 강조한다. 이 연대성을 통해 우리-공동체(Wir-
Gemeinschaft)를 형성함으로써 윤리적 행위의 정당성을 구체적 현실에
서 확보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맥킨타이어는 고대 덕 윤리를 강조
하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현대적 의미를 재구성하며, 테일러는 헤겔 사유의
현대적 재구성을 통해 덕 윤리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
레스와 헤겔적 사유를 현대에 재구성하는 것은 단순히 고대와 근대의 덕성
과 가치를 현대에 적용하는 방식이어서는 안 된다. 현대적 덕 윤리를 위해
서는 현대 조건하에서 가능한 덕 윤리의 존재방식 자체가 탐구되어야 한
다. 왜냐하면 현대는 다원주의와 탈형이상학적 시대로서 덕과 가치 자체의
정당성이 문제시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연구를 통해 현대적 조건에서
선 윤리는 어떻게 가능한가?(이상형) 227
가능한 덕 윤리로서의 선 윤리를 모색하고 현실에서의 수용가능성을 분석
함으로써 윤리학의 과제와 목표를 재정립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런 선 윤리를 정초하는 위해 우리는 먼저 현대 의무론자들이
제기하는 선 윤리에 대한 비판을 상기해야 한다. 왜냐하면 윤리학이 현대
사회의 시대인식과 그 도전에 대한 응답이라면 선 윤리의 가능성을 모색하
기 위해 먼저 선 윤리의 한계가 극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1) 첫째, 현대
사회에서 우리는 다원주의와 마주치며 또 이에 상응하는 좋은 삶의 이념들
의 다양성과 마주친다. 그러나 선 윤리는 형이상학적 토대에 의지하여 다
양한 생활방식들을 위계질서화하고 최고선의 기준에 의해 그 정당성을 부
여받을 수밖에 없다. 둘째, 만약 실천적 지혜가 형이상학적 토대를 상실하
게 되면, 그것은 우리에게 도덕적 삶에 대한 정당화를 제공할 수 없는 단
순한 일상지식에 머무르게 된다. 최고선이 무엇인지에 대한 공통된 합의가
불가능할 때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답은 각자에게 있을 것이다.
셋째, 선 윤리가 기존 삶의 에토스를 강조한다면, 우리는 도덕적 보편주의
의 해방적 내용을 포기하고 또 잠재적 착취와 억압의 관계 속에 들어있는
구조적 폭력을 도덕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기해야 한다.
이런 비판을 극복하기 위해 선 윤리의 가능성은 먼저 철학적 인간학에
서 모색될 수 있다. 만약 인간이 이해지향적 주체로 규정된다면 인간은 객
관세계와 상호주관적 세계의 영역에서 이해지향적 관심과 태도를 취할 것
이다. 그리고 성공적 이해를 위해 우리는 타자를 인정해야만 한다. 이해지
향적 인간본질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인정개념이 필요하게 된다. 따
라서 먼저 사회현상학적 연구와 존재론적 연구방법을 통해 이해지향적 주
체로서의 인간이 먼저 규명되어야 한다. 이 토대 하에서 참된 인간본질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으로서 인정개념이 도출될 수 있을 것이다.
1) 이하 선 윤리의 한계에 대한 설명은 하버마스가 제기한 것을 요약한 것이다
(J. Habermas, 이진우 역, 담론윤리의 해명, 108-113쪽 참조).
228 사회와 철학 제23집
2. 선 윤리란 무엇인가?
2-1. 선 윤리란 무엇인가?
왜 덕 윤리가 아니라 선 윤리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윤리학이 덕에 대
한 설명과 실천적 행위의 목적으로서 선에 대한 설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면, 덕 윤리는 기본적으로 선을 획득하기 위한 인간의 품성과 성격에 관련
되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 기능의 탁월함에서 행복을 찾고 이 탁
월성을 닦기 위해 인간의 욕구적 부분이 이성에 따라 잘 발휘될 것을 요구
한 것은 윤리가 인간의 성격을 적절히 조절하는데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탁월한 품성이 곧 오늘날 윤리적 상황의 어려움을 해결할 수 있는 인간
의 품성인 것이다. 따라서 이 품성은 행위 주체 자신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주체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절제와 용기로서 나타난다. 그러나 이런
덕의 목록은 결코 아리스토텔레스 자신의 독창적인 고안물은 아니다. ‘덕
이 무엇인가’하는 것은 그 당시 탁월한 시민이 행하는 행위방식 또는 행동
규칙을 의미할 뿐이다. 이런 맥락에서 덕은 곧 그 시대 인간이 따라야 하
고 그 시대 사회가 요구하는 올바른 인간상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다. 덕
윤리가 올바른 인간이 되기 위한 기준을 제공하더라도 이는 그 사회의 우
세한 규범에서 도출되어 지배계급의 정당화에 기여할 수 있다.
따라서 덕의 목록이 제시되기 이전에 먼저 덕 규범이 가지는 의미가 자
신의 삶과 공동체의 맥락에서 밝혀져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덕은 그 정당
화방식에서 선 개념을 요구하게 된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인간의 선이
‘탁월함(덕)에 따른 영혼의 행동’으로 정의된다면 이는 곧 덕과 우리가 추
구하는 선의 관계를 해명하는 것이다. 즉 좋은 삶을 위한 탁월함이 덕으로
서 규정됨으로 좋은 삶(행복, 최고선)은 덕의 목적이자 정당화 조건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이 덕이 선과의 관계에서 해명될 때 덕은 단순한 명령이
나 규율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나와 공동체의 맥락에서 좋은
삶을 위한 가치나 규범으로 정당화된다. 덕은 선과의 관계를 통해 정당화
선 윤리는 어떻게 가능한가?(이상형) 229
되며 그의 의미를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덕 윤리는 오늘날 의무론과
달리 행위자에게 초점을 맞춤으로써 주체를 문제시하고 이 행위자들이 사
회의 각 영역에서 행하는 역할에 대한 탁월성을 강조함으로써 의무론을 보
완할 수 있다.2) 왜냐하면 의무론은 보편타당한 규범의 정당화에 집중함으
로써 이 규범들이 각 구체적인 상황에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가의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반해 덕 윤리는 행위자의 품성을 계발함
으로써 행위자가 현실의 복잡한 상황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선택의 순간에
합리적 결정을 할 것으로 기대할 수 있다. 그러나 단순히 그 시대 사회의
덕을 정당화하는 윤리로 만족하지 않기 위해 덕 윤리는 선 윤리의 맥락에
서 조명되어야 한다.3) 따라서 오늘날 선 윤리는 우리의 가치와 규범이 정
체성 형성과 자아실현의 관점에서 좋은 삶을 위한 목적에 어떻게 기능하는
지를 해명한다. 만약 초점이 규범의 기원과 정당화 과정뿐만 아니라 주체
의 삶에 대한 의미와 목적의 해명이라면, 이 해명은 주체가 좋은 삶을 살
기 위한 해방적 힘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선 윤리에서 ‘선’은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즉 선은 우리가 일반적으
로 추구하는 가치 있는 것, 중요한 것을 의미한다.4) 이 선들이 내면화되
2) 덕 윤리는 현대사회에서 사회 구성원들이 각자 맡은 역할에서 수행해야 할 사
회의 요구를 반영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공학인들이 가져야 할 책임과 임
무를 규정하는 공학윤리, 의료인들의 경우에 해당하는 의료윤리 등은 덕 윤리
의 입장에서 가장 잘 설명될 수 있다.
3) 도덕적 덕을 갖는다는 것은 도덕규칙이 제시하는 방식으로 행위하는 성향을 갖
는다는 것이다 (황경식, 개방사회의 사회윤리, 648쪽). 따라서 덕 윤리는 의
무윤리가 가지는 행위자의 동기문제와 원칙의 적용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그
러나 덕 윤리는 덕이 되는 기준이 무엇이며 이것이 어떻게 정당화될 수 있는가
의 문제를 가진다. 따라서 덕 윤리는 선 윤리의 맥락에서 해명되어야 한다.
4) Ch. Taylor, Quellen des Selbst, 177쪽. 선에 대한 규정은 고대 이후로 여
러 상이한 뜻을 포함하였다. 훌륭함, 탁월함과 관련된 인간의 품성을 표현하거
나 이익, 쾌락을 주는 대상적 선 또는 악과 대비되어 고귀한 것을 의미하는 가
치 있는 것, 현대에는 개념적 정의가 불가능한 직관적인 의미에서 좋은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일반적인 의미에서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 있는 것과 관련된 포괄적 의미에서의 규범적 선을 말한다.
230 사회와 철학 제23집
어 우리의 주관적 선 개념을 형성하게 되며 이것이 다시 사회에서 많은 사
람들이 인정하는 객관적 선들을 형성하게 된다. 이때 선은 객관적인 어떤
것으로서 단순한 주관적 가치선호의 반영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5) 이
규정에 따르면 선은 모든 사람들이 바라고 따르는 사회의 문화와 제도에서
형성되는 객관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다시 이 객관적인 선을 형성
하는 것은 공동체 구성원들이 가지는 선에 대한 주관적인 표상이다.
따라서 주관적 선과 객관적 선은 항상 상호작용의 관계에 놓여 있다. 그
리고 테일러에 따르면 주체와 이 선의 관계를 해명함으로써 인간 행위와 삶
의 의미 그리고 사회형성의 원리가 밝혀질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의 행위
와 삶은 선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의미와 목적을 구성하며, 또한 우리 삶
의 의미와 목적은 우리가 추구하는 선에 의해 규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선 윤리는 세계 내 존재인 주체가 선을 형성하고 선을 추구하는 우리 삶의
의미와 방향성에 대한 해명이다. 그런데 선에 대한 우리의 방향성은 선에
대한 질적인 차이를 규정하는 어떤 틀 구조뿐만 아니라, 이에 관련하여 우
리가 서 있는 곳의 의미에 대한 해명을 요구한다. 즉 우리는 정체성을 형성
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살기 위해 이러한 질적 구분에 의해 규정된 공간에 우
리 자신을 위치시켜야 하며, 선의 질적 구분에 관련하여 우리가 서 있는 곳
이 우리를 구성함을 의미한다. 인간 행위와 정체성은 선의 질적 구분으로
이루어진 도덕적 공간에서 자신의 위치에 대한 해석의 결과이며 따라서 그
안의 규범적 내용과 가치들이 인간행위와 정체성의 구성적 역할을 수행한
다. 즉 인간은 선과 가치에 대한 방향성을 통해 자신의 행위와 삶을 규정한
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의 좋은 삶을 위해 선에 대해 올바르게 위치해 있
5) J. Habermas, Erläuterungen zur Diskursethik, 181쪽 참조. 테일러 또
한 선을 약한 가치와 강한 가치로 구별한다. 약한 가치는 개인의 주관적인 선
호와 관련되며, 강한 가치는 개인의 정체성과 자아실현에 관계되는 가치들이다.
여름휴가 때 제주도에 갈 것인지 경주에 갈 것인지는 약한 가치의 표현의 예이
다. 그러나 강한 가치는 도덕적 가치감의 표현으로 여행을 나의 직업으로 할지
말지를 포함한다. 따라서 강한 가치는 가치에 대한 질적 구별을 포함하는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하나의 조건이다.
선 윤리는 어떻게 가능한가?(이상형) 231
어야 한다. 이런 주체와 선과의 관계에 대한 해명을 통해 우리 삶의 규범적
내용뿐만 아니라 가치와 규범의 의미가 제대로 밝혀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삶을 살고자 하는 물음은 항상 인간이 선과의 관계
속에서 어떻게 규정되어 있는가에 대한 물음과 관련해서 답해진다. 따라서
선과 가치들로 구성되는 도덕적 공간에 우리의 정체성을 위한 본질적인 방
향점들이 담겨 있다. 우리가 도덕적 공간에서 자신의 방향을 상실한다는
것은 삶의 방향을 상실한다는 것이며 이는 곧 우리가 누구인지를 알지 못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도덕적 공간에서 자기정체성을 형성하며
이 정체성을 통해 자기를 실현한다. 이 “공간의 한계를 넘어서는 것은 곧
현존재의 이탈”을 의미할 뿐이다.6)
선들 간의 차별화를 통해 우리는 우리의 최고선을 가려내야 한다. 왜냐하
면 최고선을 통해 인간은 삶의 궁극적 목적을 설정하고 그에 따라 자신의 삶
을 평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근대의 도덕철학은 실천적 추론에서, 특정한
결과에 의해 결정되는 실질적 입장이 아닌, 그 결과에 도달하는 방식에 의해
결정되는 절차적 입장을 택했다. 왜냐하면 각 개인의 실질적 주관적 선 개념
은 일치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도덕적 의무는 모두가 합의할 수 있는 절차
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도덕의 원천으로서의 선은 매몰되고, 절
차를 공정하게 만드는 원칙을 결정하는 것에 도덕철학의 초점이 맞춰지게 되
었다. 즉 좋음(선)에 대한 옮음(도덕원칙)의 우선성이 도덕철학의 전반을 지
배하는 원칙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 원칙은 우리의 삶에서 질적 차별화를
배제시켰다. 그러나 이것은 좋음에 대한 옮음의 우선성 원칙이 가장 근원적
인 정체성의 위기를 불러오는 원천 가운데 하나임을 암시한다.
2-2. 옮음에 대한 좋음의 우선성
선 또는 좋음에 대한 옮음의 우선성 원칙은, 좋은 삶의 윤리학에 대한
6) Ch. Taylor, Quellen des Selbst, 55쪽.
232 사회와 철학 제23집
칸트주의적 비판, 즉 도덕은 단순히 행복추구나 인간의 목적 실현을 위해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도덕적 명령은 의무론적으로 생각되어야 한다는 주
장으로부터 기인한다. 즉 윤리학의 과제는 도덕적으로 옳고 그름을 판정하
여 그에 따라 도덕적 당위와 의무를 부과함으로써 도덕행위를 가능하게 하
기 위한 조건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이는 곧 도덕행위의 가능조건을 정초
함으로서 인간의 자유가 공동생활에서 실현되기 위한 가능성을 마련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에 따르면 좋음은 다양한 사람들에 의해 다양한 원
인으로 근거지워질 수 있으므로 자유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을 산출할 수
없다는 현실인식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도덕적 행위를 정당화하는
옮음과 개인의 가치관을 반영하는 좋음은 구별되어야 한다.
옮음의 우선성 원칙의 이유는 세 가지이다.7) 첫째, 공동삶을 규제하는
문제는 옮음의 개념에 속하는 것으로 이해되며, 따라서 이러한 이론에는
좋음에 대해 독립적인 보편주의적 개념이 중요하다. 옮음은 공동체 구성원
들이 모두 합의 가능한 규칙, 규범의 문제이며, 좋음에 대한 물음은 상이
한 답변이 가능하다. 둘째, 좋음이란 어떤 사람의 가장 좋은 인생 계획이
무엇인가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옮음의 원칙은 각각의 상이한 가치관들
(선관)에 근거한 개인의 대립적인 요구들 간의 최종적인 서열을 정해주고,
그 개인의 성취들을 평가하며, 아울러서 그것들의 가치를 총합하는 어떤
방도를 제시해 준다. 그러므로 옮음의 개념에 대한 개인의 입장은 동일해
야 하지만, 가치관에 대한 개인의 입장은 다양할 수 있다. 셋째, 인간의
욕구만족과 자아실현은 정의의 원칙에 의해 제한되어야 한다. 즉 정의의
원칙이 요구하는 범위에서만 개인의 자아실현은 허용된다. 따라서 옮음에
대한 기준은 좋음에 대한 제한조건으로서 기능한다. 이 제한조건은 선에
대해 중립적인 입장을 가진다.
그러나 선은 테일러에 따르면 무엇이 충분한 요건을 갖춘 옮음의 원칙인
가를 결정하기 위하여 우리가 지녀야 하는 가치감을 도출하기 위해서 필요한
7) 이 세 가지 근거는 홍성우,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윤리학, 398쪽을 참조하
였다.
선 윤리는 어떻게 가능한가?(이상형) 233
것이다. 만약 선이 우리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라는 포괄적 의미로 정의된
다면, 옳음도 결국 이 선을 표현한 것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옳다는 것은 우
리 모두가 그것을 따르는 것이 좋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선들
은 한 사회의 구성원들이 추구하는 목적 또는 좋은 것으로 표현된다. 만약
선이 우리 삶의 목적이라면 도덕은 이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조건을 보호하
기 위해 상호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태도로 규정되며, 이에 따라 먼저 “좋은
것(das Gute)에 대한 최소한의, 그러나 명료한 윤리적 이해가 필요하며, 이것
에 비추어 비로소 도덕적으로 올바른 것(das Richtige)의 의미와 범위가 측
정될 수 있다.”8) 결국 우리의 도덕적 행위는 이 선들을 통해 규정되며, 이
선들이 좋은 삶의 표본을 구성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의 공동체에는 다양
한 질적 차이를 가진 선들이 존재한다. 더 높은 선들에 의해 낮은 선들은 평
가받고 인정받는다. 따라서 옳은 행위를 위한 규칙도 또한 이 선들을 통해
도덕적 중요성을 획득하며 평가된다. 즉 규칙의 내용, 타당성, 구속력은 이
선들로부터 산출된다. 따라서 공동의지로부터 정당화되는 선은 우리의 행위
를 검토하고 판단하며 평가하는 관점을 형성하게 된다.9) 이 선이 도덕적 행
위와 삶의 목적과 지향점으로 기능하며 동시에 인간은 객관적 실재로서 이
선을 통해 도덕적 행위를 판단한다. 이런 의미에서 선은 한 사회에서 인정되
는 정도에서 구속적 힘을 산출할 수 있고 이것이 규칙들로 형성된다.
옮음에 대한 좋음의 우선성은, 테일러에게 선(좋음)의 회복을 위한 선언
적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선과 정체성의 관련성에서 바라볼 때, 그가 주
장하는 선의 회복은 다름 아닌 정체성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10) 선이 도덕규칙에 전제되어 있으며 규범의 구속력을 위한 객관적
8) 악셀 호네트, 문성훈 이현재, 장은주, 하주영 역, 정의의 타자, 232쪽.
9) 칸트 이후 개인적 삶의 방향설정의 물음으로 간주되어 윤리의 중심으로부터 추
방되었던 좋은 삶에 대한 물음이 형이상학적 토대 없이 선의 해명을 통해 객관
적 자격을 획득하게 된 것은 테일러의 업적이다. 투겐트하트 또한 이런 의미에
서 선 개념은 객관적 실재와 관련을 맺고 있다고 말한다 (E. Tugendhat,
Philosophische Aufsätze, 280쪽 참조).
10) 홍성우,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윤리학, 402쪽 참조.
234 사회와 철학 제23집
요소로서 인정될 때 도덕에 대한 입장은 많은 것이 변화된다. 왜냐하면 이
관점에 의하면 규칙은 우리의 행위와 삶을 규정하는 의미연관에 따라 도덕
적 의미를 획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치에 따라 자신의 선택을 검증하는
사람은 우선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지 묻는다. 이런
전체적인 삶의 방식에서 삶이 어떤지를 판단할 때 규칙은 삶의 통일을 이
루는 전체 의미맥락의 관점에서 중요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판단된다.
따라서 도덕규칙에 대한 합의는 의미연관의 확장이거나 좋은 삶에 대한 합
의를 의미한다. 도덕규칙에 대한 적절한 인식은 인간의 선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분리될 수 없으며 도덕규칙에 대한 이성적 합의는 항상 선에 대한
합의를 전제한다. 이런 이유에서 좋음에 대한 옮음의 우선성 이론은 이미
모순이다. 왜냐하면 옮음의 이론은 선에 대한 표상을 전제하지만 이를 부
정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자기정체성 형성과 자아실현의 가능조건을 부정
하는 것이다.
3. 선 윤리의 인간학적 정초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적 윤리학이 결국 인간학적 토대에 그 근거를
둘 수밖에 없듯이 선을 추구하는 인간의 행위를 규명하고자 하는 선 윤리
도 세계와 자신을 이해하고자 하는 인간이해에 기반한다.11) 호네트가 인
정투쟁에서 인정개념을 분석한 후 후에 물화라는 책을 통해 말하듯이
인정의 규범성을 위해서는 인정을 위한 전제, 즉 인정을 하고자 하는 인격
11) 인간의 본질이 무엇이며 그에 따라 무엇이 좋고 나쁜 것인지에 대한 인간학적
전제들은 실천철학과 윤리학을 위한 전제를 형성한다. 우리는 사유하며, 행동
하고 선택하는 주체로서 일상적 경험의 차원에서 인간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특정한 견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이런 인간학으로부터 우리는 실천철학
에서 사회의 의미체계 내에서 이루어지는 도덕적 행위를 위한 객관적 계기를
도출할 수 있다.
선 윤리는 어떻게 가능한가?(이상형) 235
체에 대한 분석이 요구된다. 즉 그에 따르면 자아형성과 사회비판을 위한
규범적 개념으로서 인정을 말하기 위해서는 “인정의 전제, 즉 인간 주체를
‘인격체’로 지각하는 문제”가 전제되어야 한다.12) 좋은 또는 올바른 인정을
가능하게 하고 그렇지 않은 경우 그것을 물화로 규정짓기 위해 호네트는
근본적인 인간이해에 대한 설명을 요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선
행하는 인정을 요구하는 것은 곧 인정하고 받는 인격체로서의 인간이다.
그리고 이 인정의 욕구를 가진 인간을 논자는 이해지향적 주체(das
verständigungsorientierte Subjekt)로 규정하고자 한다.13)
첫째, 주체는 ‘나에게 무엇이 의미있는가’는 물음을 통해 스스로를 규정
하며 세상을 살아간다. 이는 주체가 세계와의 관계에서 의미를 지향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의미를 구성하기 위해 인간은 먼저 세계와 타인을 해석하
고 이해하며 그리고 자신을 이해해야 한다. 즉 선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
은 자신과 타인, 세계를 이해하려는 존재이다. 자신과 타인, 세계에 대한
이해의 바탕에서 인간은 자신의 선을 규정하며 이를 통해 삶의 의미와 목
적을 구성한다. 그리고 이 삶의 의미와 목적이 자신을 또한 구성한다. 인
간이 그의 도덕적 행위를 도덕적 공간의 의미연관 속에서 의미물음을 통해
규정한다는 사실은 그를 이해지향적 존재로 규정하게 한다. 왜냐하면 이
의미물음에는 자신과 타인, 세계에 대한 이해가 전제되기 때문이다.
둘째, 주체가 타자와 맺는 상호주관성은 주체를 가능하게 하며 이 상호
주관성은 또한 주체의 구성요소라는 의미에서 주체는 상호주관성에 의지한
다. 즉 주체는 개별적 통일체로서 자기정체성 형성을 위해 상호주관성을
경험하며 이 상호주관성은 항상 주체형성의 전제이다. 즉 인간의 형성은
각자가 홀로 수행하는 독백의 과정이 아니라 상호작용의 과정이다. 그리고
12) A. Honneth, 강병호 역, 물화, 5쪽.
13) 인간을 이해지향적 주체로 규정하는 것은 도덕성과 인륜성의 종합을 위해 논
자의 논문에서 처음 시도한 것을 선 윤리의 인간학적 기초를 마련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다시 사용하였다. 이하 이해지향적 주체의 규정과 그 특성에 관해서
는 논자의 책 Moralität und Sittlichkeit-Versuch einer Synthese im
Hinblick auf die Ethik des Guten, 279-287쪽을 참조하였다.
236 사회와 철학 제23집
이 상호작용은 결국 타자에 대한 자신의 이해로 구성된다. 주체가 상호주
관성에 의존해있으면서 이 상호주관성의 의미공간 안에서 행위하며 구성된
다는 의미에서 주체는 이해지향적으로 규정될 수밖에 없다.14)
주체가 객관세계와 맺는 관계는 일반적으로 자기이익의 관점에서 독백
적과정인 전략적 행위를 통해 특징지워진다. 따라서 객관세계와의 관계에
서 전략적 행위는 도구적 이성에 의해 지배된다. 그에 비해 주체와 타자와
의 사이에 발생하는 이해지향적 행위는 주체가 타자를 이해하고자 하는 의
미에서 이해가 발생한다. 이때 이해는 가다머가 밝히듯이 타자로의 개입이
아니라 타자에 대한 주체의 직접적인 참여에 근거하며,15) 어떤 것을 해석
학적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이해된 것의 타당성에 대해 서로 대화한다는 것
을 의미한다. 올바른 이해는 결국 끊임없는 타자와의 대화과정에서 발생한
다. 왜냐하면 주체 자신에게 맞춰진 이해나 이해되지 않은 타자에 대한 배
제는 항상 타자의 저항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주체가 타자
에 대해 전략적 행위만을 취한다면 이는 인간과 세계를 이익실현을 위한
도구로서 간주하게 되며 결국 타자의 저항에 직면하게 된다. 이 과정이 바
로 타자를 소외시키며 동시에 자신을 소외시키는 과정이다. 따라서 주체는
객관세계에 대해 합목적적 태도를 가지기 전에 객관세계를 이해하고 상호
작용적 측면에서 그와 소통하고자 한다. 이런 관점과 태도가 주체의 이해
지향적 성격을 규정짓는 것이다.16)
14) 물론 타자에 대한 이해지향적 태도가 주체 형성을 위한 자기동일성 논리에 따
라 진행된다면 타자에 대한 폭력으로 귀결될 수 있다. 타자를 자신에 맞춰 이
해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것을 배제하는 태도 등이 그럴 것이다. 그러나 논자
가 의도하는 이해지향적 관심은 타자를 타자 그 자체로 이해하고자 하는 태도
이다. 그리고 주체가 스스로를 형성할 때 만나게 되는 자신과 타자에 대한 경
험에 이 이해는 전제될 수밖에 없다.
15) H.-G. Gadamer, Gesammelte werke 1, 387쪽 참조.
16) 합목적적 행위를 근거지우는 이해지향적 관점을 통해 도구적 이성으로 인한
폐해가 극복될 수 있다. 만약 노동이 도구적 이성을 통해 합목적적 행위의 형
태로 전환된다면, 그의 결과는 역사가 보여주듯 인류의 위기가 - 생태위기 등
- 발생할 수 있다. 결국 이해지향적 관점의 무시는 인간과 세계의 상호주관적
선 윤리는 어떻게 가능한가?(이상형) 237
이런 이해지향적 관점을 통해 인간은 이제 외적 자연을 노동을 통해 극
복해야 할 강제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노동과정을 통해 이해하는 타자로
서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상호작용에서의 타인은 자기 목적의 실현에 있
어 나타나는 경쟁자가 아니라 성공적 인정을 통해 자기정체성 형성과 자기
실현을 위한 조건으로 파악된다.17) 따라서 노동과 상호작용에서 해방의
계기는 외적자연과 내적자연의 강제로부터의 해방에만 있지 않다. 노동은
도구적 이성을 통해 자연의 외적 강제를 극복해야 하는 것만이 아니며, 상
호작용은 의사소통의 왜곡된 구조를 의사소통적 이성이나 지배로부터 자유
로운 의사소통을 통해 극복해야 할 것으로 파악되지 않는다. 오히려 주체
는 이해지향적으로 존재함으로서 객관세계와 타인과 긍정적 관계를 형성한
다. 즉 이해지향적 태도는 상대방을 타당성 주장의 근거로 인정한다. 따라
서 주체의 자연과 타인에 대한 이해과정은 상호 타당성 요구의 인정으로
이끌게 된다. 상호 타당성 주장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타당성 요구의 인정
을 위해 대화하는 과정에서 이해가 성립한다. 따라서 해방은 주체가 상호
관계와 세계 속에서 정체성을 형성하고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 의존하는 성
공적인 인정에 달려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해지향적 주체에게 있어 인정의
요구는 인간의 근본적 욕구이다.18)
물론 인간을 이해지향적 관심을 가진 존재로 규정하는 것은 규범적 의
미를 함축한 인간학적 전제를 기술한 것이다. 하버마스는 초기 저작에서
세 가지 인식관심을 분류하고 인간학적 계기로부터 해방적 규범원칙을 도
출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기술적 인식관심과 실천적 인식관심의 경우 인
간학적 계기가 강하고 해방적 인식관심의 경우 타당성을 확보하는 선험적
계기가 강하다는 사실은 하버마스에게 있어 인간학적 계기와 선험적 계기
의 통일이 성공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인간은 기
술적 인식관심과 실천적 인식관심에 기본적으로 방향지워져 있으나, 이 인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하여 결국 스스로 소외되는 결과를 초래한다.
17) Sang Hyung Lee, Moralität und Sittlichkeit, 285쪽 참조.
18) Ch. Taylor, Multikulturalismus und die Politik der Anerkennung,
15쪽 참조.
238 사회와 철학 제23집
간학적 계기가 담고 있지 못한 규범적 내용을 위해 해방적 인식관심을 이
모두에 부과하는 방식으로 끼워 넣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의
결합을 위해서는 인간이 왜 해방적 관심에 방향지워져 있는가가 설명되어
야 한다. 결국 하버마스는 그의 프로그램에서 시도했던 인간학적으로 깊이
자리잡고 있는 기본지향으로서의 관심과 타당한 인식간의 관계가 지니는
직접적 관련성을 포기한다. 후에 하버마스는 타당성을 확보해 주는 공간을
인간학적 인식관심에서 찾지 않고 담론에서 구하려 한다. 담론의 참여자는
행위를 수행하거나 혹은 경험을 공유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니라
논변과 정당화를 추구한다. 담론을 통한 타당성 주장의 정당화는 일종의
규범적 개념이다. 그러나 이 규범적 개념이 보편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담론은 강한 규범적 전제를 가진 것으로 이상화되어야 한다. 이 이상화된
담론의 조건에서 보편타당한 담론윤리가 정초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버마
스가 담론윤리를 상호주관적 이해도달의 과정으로 이해할 때 결국 그가 전
제해야 하는 것은 이해지향적 관심을 가진 인격체이다. 이를 통해 자아형
성의 원리와 사회적 규범적 원리는 통일적 시각에서 규범적 내용을 획득할
수 있다. 만약 인간이 이해지향적 주체로 규정될 수 있을 때 이 주체는 인
정에 대한 욕구를 가지며 올바른 인정은 우리의 행위를 규제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올바른 인정에 좋은 삶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4. 선 윤리에서 정당화문제
선 윤리는 선과 주체 그리고 주체와 공동체의 관계를 정체성 형성과 자아
실현의 관점에서 해명하고자 한다. 이에 따라 주체가 어떻게 선을 획득하고
다시 이것이 공동체의 선으로 형성되는지를 해명하는 것은 우리의 선 개념과
도덕규범이 어떻게 정당화되는지를 밝히는 과정이다. 이 정당화과정은 또한
도덕적 선택의 순간에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에 대한 윤리학의 과제를 해결
하는 과정이다. 도덕적 상황에서 선택기준의 부재로 인한 도덕적 불확실성은
선 윤리는 어떻게 가능한가?(이상형) 239
나의 삶의 의미와 목적이 세계 의미연관 내에서 해명될 때 사라질 수 있다.
의무윤리나 공리주의는 상위의 도덕원칙을 설정함으로써 상이한 도덕규
범들이 충돌할 때 어떻게 행위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주고 있다. 덕 윤
리는 탁월한 행위자의 성향을 규정함으로써 좋은 삶을 위해 어떻게 행위해
야 하는가에 대한 답을 제시해야 한다. 선 윤리는 주체와 선의 관계를 해
명하는 작업이기에 상이한 선 개념들이 부딪힐 때 어떻게 상위의 선이 이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이해된다. 일반적으로 정당화물음이 규
범의 구속력을 어떻게 산출할 수 있는가의 물음이라면, 다양한 선의 이념
들이 인정되는 현대 다원주의에서 선 개념의 정당화물음은 선 윤리가 해결
해야 할 가장 어려운 도전이다. 탈형이상적 다원주의 시대에서 최상의 삶
의 방식이 정당화되지 않는 한, 즉 최고선이 정당화될 수 없는 한 어떤 삶
의 방식이 좋은 것인지를 말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이에 대한 해결을 위해 논자는 선 윤리의 인간학적 토대를 통해 이미
암묵적인 해결방식을 제안하고 있다. 우리가 만약 행위주체를 이해지향적
존재로 인정한다면 우리의 삶의 방식은 이를 실현하는 것일 수밖에 없다.
주체는 타인과 세계를 이해하고자 하며 이는 자신의 타당성 요구에 대한
인정의 욕구로 나타난다. 자신의 선에 대한 타당성 요구가 인정될 때 성공
적 자기 정체성을 이루며 자기실현이 가능하다. 따라서 자신의 선 개념에
대한 타당성 요구는 자신과 타인, 공동체, 세계가 상호 인정을 위한 하나
의 역동적 과정에서 이루어지는 의미와 세계의 이해과정이자 구성과정이
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상이한 선 개념들이 충돌할 때 정당화되는 과정은
인정투쟁이외의 것이 없다.19) 왜냐하면 일인칭 단수 주체로부터 규범성을
19) 찰스 테일러는 선 윤리의 정당화전략을 BA-원칙을 통해 설명하고자 한다. 그
에 따르면 하나의 규범이나 명령으로 특징지워질 수 있는 도덕적 문장은 정당
화근거를 통해 구속력을 부여받을 수 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너는 A를 행해
야 한다.”고 말하고 그 이유를 설명할 때, 즉 특정한 행동의 정당성을 설명하
고자 할 때, 답은 A는 B이기 때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으며 B는 A
에게 도덕적 구속력을 줄 수 있는 행위형식을 나타내야 한다. B가 A의 정당
성 근거를 준다는 것은 B를 통해 의무가 A에 전달될 수 있다는 것이다. A와
240 사회와 철학 제23집
가능하게 하는 일인칭 복수 공동체를 형성하는 길은 인정개념을 통해 가능
하기 때문이다.20) 여기에는 보편타당한 규범을 위한 3인칭 복수의 공동체
는 우리에게 가능한가라는 의문이 놓여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현실의 일인
칭 복수 공동체가 가지는 의무형태인 인륜성은 오늘날 선의 표상들이 이성
적인 방식으로 인정투쟁을 통해 이르게 되는 것으로 묘사될 수 있다. 왜냐
하면 인정투쟁에서 문제되는 것은 단지 이익의 충돌이 아니라 이해지향적
주체가 하나의 공동체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고 자아를 실현하기 위
해 제기하는 선표상의 타당성에 대한 요구이기 때문이다. 이 인정원칙을
통해 어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삶의 의미를 초월함이 없이 우리의 도덕적
행위와 관련한 개인적 선의 표상과 공동체적 선들의 생성이 설명될 수 있
다.21)
B의 관계가 이런 동일화를 통해 인식될 때 A에게 근거를 줄 수 있는 B는 A
와 질적 차이를 가진 선 개념이다. 우리는 이런 질적 차이를 명료화함으로써
행위를 판단하고 평가할 수 있다. 다양한 선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할 때 선의
정당화를 위한 도덕적 권위를 주는 것은 높은 위치에 자리한 선들이다. 테일
러는 이를 생활선과 구별하여 상위의 선들이라 칭한다. 질적 차이를 가진 상
위의 선들에 의해 여러 다양한 선들의 평가와 판단이 가능하게 된다. 그러나
선들의 정당성을 부여하는 상위의 선들이 또 어떻게 정당화되는가는 테일러에
게 열려 있다. 단지 그에 따르면 상위의 선들은 그들의 생성과정에 대한 역사
적 조건을 해석함으로써 정당화된다고 말한다 (Ch. Taylor, Quellen des
Selbst, 141쪽 참조).
20) 현대 의무론은 3인칭 복수를 통해 보편타당한 규범의 정당성을 획득하고자 한
다. 그러나 1인칭 주체가 자신의 현실을 추상화하여 어떻게 자신에게 중립적
인 관점을 획득할 수 있는가는 항상 의문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귄터가 지적
하듯이 콜버그의 도덕발달론과 관련된 논쟁을 살펴보라 (K. Günther, Der
Sinn für Angenmessenheit: Anwendungsdiskurse in Moral und
Recht, 177쪽 이하).
21) 이런 연관에서 규범적으로 풍부한 사회이론의 토대를 발전시키기 위해 헤겔의 인
정개념을 탈형이상학적 시각에서 재구성한 이는 악셀 호네트이다 (A. Honneth,
Kampf um Anerkennung, 7쪽 참조). 그는 “인정 개념의 규범적 개념 정
의로부터 직접적으로 도덕이론의 원칙들을” 도출하기 위해 시도한다 (악셀 호
네트, 정의의 타자, 222쪽). 그러나 타당한 인정형태로부터 규범적 내용을
선 윤리는 어떻게 가능한가?(이상형) 241
먼저 주체는 자신에게 가치 있는 어떤 것을 선으로 인정한다. 주체는 사
회적 규범이나 행동방식, 선들을 받아들이고 이를 자신의 선으로 구성하며
자신을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 규정한다. 이 견해에 따르면 우리의 세계이
해는 처음부터 역사적으로 주어지고 언어적으로 구성된 세계에 대한 선이
해(Vorverständnis)에 의지해있다. 이 선들은 사회적 개별자들에게 이미
정당화된 좋은 것으로 나타난다. 주체의 정체성이 이 좋은 것을 선으로 인
정하고 또 이 자기정체성이 선을 구성하는 공동체로부터 인정됨으로써 자
기정체성은 주체와 타자 간의 상호인정에 의존해 있다. 즉 성공적 자기정
체성에 이르기 위해 인간은 자신의 능력과 실천에 대한 상호주관적 인정에
의존한다. 개인이 타자의 인정을 통해 자신을 형성하고 타자에 방향지워져
있음을 인식함으로써 그는 스스로를 이해지향적 주체로 인식할 수 있다.
이해지향적 주체가 인정의 조건이며 동시에 인정은 자기정체성을 형성하고
자아실현을 위한 조건인 것이다. 이해지향적 주체가 좋은 삶을 위하여 인
정을 요구할 때, 이 인정의 형식은 권력이나 강제의 적용이나 위협을 통해
강제되지 않고 대화적 형식을 통한 자유로운 인정에 의해 이루어진다. 따
라서 올바른 인정을 위해 이해지향적 주체가 전제되어야 하며 이 주체는
성공적 정체성 형성과 자아실현을 위해 다시 올바른 인정형식을 추구한다.
따라서 상호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규범의 구속력은 누군가 정한 도덕원칙
을 통해 명령됨으로써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구성원들이 올바른 인
정관계를 위해 그것을 규범으로 인정함으로써 발생한다.
도출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인정 관계에 대한 이유가 먼저 설명되어야 한다.
선의 정당화과정은 어떤 규범적 내용을 우리가 미리 전제하고 이로부터 다시
규범을 도출해서는 안 된다. 그를 통해서는 규범적 생활형식으로부터 그에 해
당하는 규범적 도덕내용만을 도출하는 결과만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곧
이미 타당한 인정형식을 우리가 인정할 때만이 가능하다. 따라서 우리가 여기
서 시도하는 것은 타당한 인정형식을 구성함이 없이 현실에서 구체적으로 발
생하는 정당화과정을 밝히는 것이다. 주체가 위치한 도덕적 의미연관 내에서
자기 정체성과 자기실현을 위한 조건으로서의 인정이 해명될 때, 올바른 인정
의 길이 밝혀질 수 있다. 이하 선 윤리의 정당화과정으로서 인정투쟁에 대한
설명은 논자의 책 Moralität und Sittlichkeit, 305-315쪽 참조.
242 사회와 철학 제23집
인정투쟁은 선 표상에 대한 타당성요구가 타인으로부터 인정되지 않을
때 발생한다. 어떤 사람이 도덕적 선택상황에서 어떤 것이 좋다고 말하고
이것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되지 않을 때 그는 다른 사람과 대립하게
된다. 만약 자기 정체성을 형성하는 강한 가치판단 또는 선 표상이 다른
사람으로부터 무시되거나 부정될 때 부끄러움, 굴욕 또는 분노와 같은 도
덕적 감정이 발생한다. 이 도덕적 감정들은 가치에 대한 우리의 자기이해
와 내적인 관련을 가지기에 다른 감정들과 구별된다. 이 도덕적 감정은 구
체적 공동체에서 사회적 의미를 가지는 자신의 선 표상에 대한 인정요구의
부정에서 발생하기에 성공적 자기 정체성 형성과 자아실현을 방해한다. 한
개인이 상처를 입었다는 도덕적 감정은 그 개인의 고유한 삶이 가지는 가
치에 대한 부정인 것이다. 이 도덕적 감정을 통해 자기정체성 형성을 위한
상호 도덕적 요청의 현상이 설명된다. 한 공동체 내에서 특정한 규범이 타
당하다는 것은 그 구성원들이 이 규범에 따르며 상호 이것을 요구하고 이
규범에 대해 도덕적 감정을 가진다는 것이다. 정당화되는 것은 이렇게 행
동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행동하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또한 구
성원들은 형성된 선 표상에 대한 반성을 통해 기존 공동체에 자신의 선 표
상에 대한 타당성 요구를 주장한다. 이런 상호 인정투쟁을 통해 주체는 자
신의 타당성 요구를 좋은 것이나 나쁜 것으로 판단하고 스스로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관철시킨다.22)
인정투쟁의 과정에서 행위자가 인륜적 관계를 해침으로서 경험하는 운
22) 인정투쟁을 통한 선 표상의 정당화전략은 맥킨타이어의 문맥에서 다음과 같이
재구성될 수 있다. 그에 따르면 선 표상은 역사 과정에서 서로 대립하고 우세
화됨으로써 정당화된다. 덕의 상실에서 그는 특정한 관점이 정당화되기 위
해 역사적 과정이 필요할 뿐만 아니라 모든 관점은 역사적 과정 내에서 대립
을 통해 다른 경쟁적인 관점에 대해 우세하거나 좌절된다고 말한다 (A. MacIntyre,
Der Verlust der Tugend, 358쪽 참조). 그리고 이 역사 속에서의 대립과
우세의 과정은 논자가 보기에 선 표상의 정당화를 위한 인정투쟁일 수밖에 없
다. 따라서 어떤 선 표상이 합리적으로 우세하다는 것의 근거는 보편주의적이
거나 절대적인 원칙으로부터가 아니라 역사적 문맥 내에서의 인정투쟁을 통해
결정된다.
선 윤리는 어떻게 가능한가?(이상형) 243
명(das Schicksal)은 자아실현을 위한 도정에서 주체가 가지는 심각한
부정적 경험이다.23) 인간은 인정투쟁에서 때로 자기 삶의 결핍을 경험하
며 자신으로부터의 소외를 경험한다. 그러나 이런 부정적인 개념으로 드러
나는 것은 주체가 자신의 자유로운 행위가 침해되었기 때문에 부정의한 것
이 아니라 저 상처 입은 태도는 주체가 상호주관적 인정에서 자신에 대한
긍정적 이해가 상처 입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 운명의 경험을 통해 결핍
된 삶은 성공적 삶을 위해 타자의 인정으로 나아가게 된다. 왜냐하면 자신
의 삶은 처벌에 의해 자기이해가 강제적으로 수정되거나 인정되지 않은 선
표상을 자기수정을 통해 타인으로부터 인정됨으로써 주체는 공동체 내에서
자기실현을 위한 정당성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이 운명을 통해 이해지향적
주체는 자신의 삶을 수정하고 공동체 내에서 자아실현을 수행한다. 물론
때로 선 이념에 대한 정당화 요구는 부정적 경험에도 불구하고 저항권이나
불복종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러나 결국 도덕적 행위를 위한 정당성은 자
신이나 타인의 정당한 요구에 대한 인정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선 표상
에 대한 공동의 인정을 통해 개인은 한 사회의 전통과 문화에 참여하는 관
계에 들어선다. 따라서 내가 다른 사람을 동료로 인정할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나는 나에 대한 인정을 기대할 수 있다. 이 인정의 과정에서 선 표상은
확장되고 이 확장의 과정은 사회적인 형태로 구성된다. 이 인정투쟁을 통
해 선들은 부정적 긍정적 방식으로 선의 일반적인 표상들로 확장된다. 어
떤 사람이 인정투쟁을 통해 타인과 선 개념을 공유함으로서 그는 공동존재
를 형성한다. 인정투쟁은 결국 자아실현을 위해 상호주관적으로 구속력 있
는 판단을 가능하게 하는 공동존재의 사회적 구성을 목표로 한다.
이 공동존재에서 개인들의 선 표상 사이에 인정투쟁이 발생하며, 그 인
정투쟁을 통해 개인의 선 표상이 일반적인 것으로 향하게 된다. 이 의미에
서 인정투쟁은 도덕적 진보를 나타낸다. 왜냐하면 공동존재는 공동체 내에
23) 인정관계 속에서 주체는 운명을 통해 올바른 인정과 인륜관계를 형성한다. 이
하 운명을 통한 인정관계의 재설정은 논자의 책을 참조하였다 (Sang Hyung
Lee, Moralität und Sittlichkeit, 312쪽 이하 참조).
244 사회와 철학 제23집
서 끊임없이 선의 타당성 주장을 제기하고 검증하는 과정에서 점점 더 확
장되며 이상적 공동체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때의 진보는 외부의
제 3자적 입장에서 판단되는 것이 아니라 인정투쟁의 내적인 과정을 통해
형성되는 공동체 내부에서의 관점에서이다. 이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구성
원 간의 상호인정의 관계망으로 존재한다. 일반적 선 표상과 개인의 선 표
상 간에는 서로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긴장관계가 존재한다. 따라서 이 긴
장관계가 드러나는 공동체는 선 표상에 대해 결코 중립성을 가지지 못한
다. 공동체의 경험적 역사적 조건하에서 인간 상호간의 공동체의 형식이
어느 정도로 가능하고 지지되는지가 결정된다. 따라서 일반의지와 선의 일
반적 표상이 형성되는 공동체가 객관적 규범으로서 최고선의 타당성 근거
로 작용한다.
도덕적 권리와 의무의 정당화는 이런 맥락에서 모든 공동체 구성원의 인
정을 통해 가능하다. “도덕”의 보편주의적 관점이 자신의 타당성 근거로서 공
동체와의 연관을 잃어버릴 때 주체는 자신의 행위근거와 자신의 정체성을 잃
어버릴 수 있다. 오늘날 거의 보편타당한 규범으로서 인정되고 따라서 절차
윤리학으로부터 변호되는 인권과 인간의 존엄성은 일반적 원칙으로부터 도출
된 보편주의적 윤리의 구성물이 아니라 오랜 역사에 걸친 인정투쟁의 결과이
다. 도덕적 구속력은 도덕원칙으로부터 산출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
성으로부터 귀결된다. 이해지향적 주체가 자아실현을 위해 타자와의 상호작
용을 통해 선 표상을 정당화하는 인정과정에서 우리-공동체는 형성된다.
한 사회에서 모든 사람들로부터 인정되는 선의 일반적인 표상이 이제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 것, 의미 있고 의미 없는 것에 대한 기준으로서
작용한다. 비록 이것이 인정투쟁의 역동적 과정 속에 항상 놓여 있을 지라
도 이 공동선의 관점에서 옳고 그름이 구별된다. 따라서 한 공동체가 가지
는 선에 대한 일반적 표상이 현실에서 인륜성으로 나타난다. 한 공동체와
다른 공동체가 부딪히는 경우에도 역시 인정투쟁이 발생한다. 문화와 문화
또는 공동체 간의 갈등은 인정투쟁의 결과인 “최소한의 도덕”으로 조절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우리 문화와 역사에 고유한 최대한(두꺼운)의 도덕을
가지며 이는 상호 인정투쟁을 통해 모든 문화에 공통된 최소한(얇은)의 도
선 윤리는 어떻게 가능한가?(이상형) 245
덕으로 발전할 수 있다.24)
이런 선 윤리의 정당화방식은 최고의 도덕원칙을 상정하고 이로부터 생
활세계로의 적용이 가능하다는 기존의 정당화방식을 뒤집는 것이다. 만약
정당화물음이 도덕원칙으로부터 생활세계로의 적용의 가능성문제라면 도덕
원칙의 정당성은 항상 생활세계로부터 추상화된 보편타당한 이상적 세계에
서만 가능하다. 칸트의 이성적 세계, 하버마스의 이상적 담론상황, 롤스의
원초적 입장 등이 이를 말해준다. 그러나 원칙의 정당화가 생활세계로부터
보편적인 도덕담론에 이루는 과정에 놓여 있다면, 우리의 도덕적 삶은 자
신의 생활세계를 확장하고 인정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도덕이 추구
하는 이상적 목적으로서 보편타당성은 현실에서부터 출발해서 인정투쟁을
거쳐 전체로서의 우리공동체를 형성함으로써 가능하다.
5. 다원주의의 가능성 근거로서 선 윤리
가치다원주의에 대한 기초적인 인식은 이미 근대 초기의 서양 윤리학에
서 이루어지고 있다. 좋은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합리적인 합의는 점점 어
려워지며, 우리가 삶의 의미를 말하면 말할수록 우리는 더욱더 일치하지
않게 될 것이라는 통찰이 그것이다. 이것이 근대 초기에 좋은 삶의 윤리학
에서 의무를 정당화하는 도덕이라는 윤리학적 전회가 일어났던 이유 가운
데 하나이다. 이로부터 근대 윤리학은 좋은 삶이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적
인 견해에 가능한 한 독립적인, 그리하여 모두에게 타당한, 선에 중립적인
도덕을 확립하는 데 주력하게 된다.
현대 의무론은 이런 시대요청에 대한 응답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선의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공동생활을 가능하게 하기 위한 하나의 윤리
24) M. Walzer, Lokale Kritik - globale Standards: Zwei Formen moralischer
Auseinandersetzung, 13쪽 참조.
246 사회와 철학 제23집
적 요청인 것이다. 이에 대한 답은 사적영역과 공적영역을 구별하고 공적
영역에서의 보편적 규범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시도라 할 수 있다. 만약 윤
리적 언어의 특성이 당위성에 있으며 그 당위성이 보편성을 통해 가능하다
면 우리는 가치와 공동선을 희생하며 규범적 당위성을 구하려 할 수 있다.
그러나 보편타당한 의무의 강조를 통해 형성된 공동체는 결국 개인의 삶의
의미와 목적, 공동체의 선에 대한 무관심으로 귀결되어 개인적으로는 삶의
허무, 사회적으로 차가운 공동체에 도달한다. 사적영역에서의 가치관의 물
음과 정체성, 자기실현의 물음은 개인의 문제로 치부되어, 윤리학은 우리
가 무엇을 따를 것인가에 대한 반성이지, 우리가 누구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문제는 개인적 물음으로 남겨진다. 그러나 자기정체성 형성과 자
기실현의 문제는 공동체의 가치와 선과 분리되어 생각될 수 없다. 공적영
역과 사적영역의 구별 그리고 이로부터 초래되는 개인주의적 경향은 결국
타자와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사회의 가치와 공동선에 대한 배제로 인
해 삶의 방향성 상실로 귀결될 수 있다.
이는 곧 역설적으로 현대 사회의 다원주의의 실패로 귀결될 수 있다.
2010년 이후로 유럽사회를 규정하는 다문화주의의 실패에 대한 선언은25)
결국 공적 영역에서의 규범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며 사적 영역에서 공동
체 구성원들의 다양한 가치관이 문화의 이질성으로 인해 서로 화합되지 못
한다는 표현이다. 그러나 공적 영역에서의 규범이 결국 공동체 구성원들의
25) 2010년 이후 다문화주의에 대한 종언이 시작되었다. 즉 공존의 가치를 강조
한 다문화주의를 실패로 규정짓고 ‘통합’의 가치를 중요시 여기게 되었다. 앙
겔라 메르켈 독일총리는 2010년 10월 16일 다문화사회 건설시도는 완전히
실패하였으며, 다양한 문화적 배경의 사람들이 더불어 사는 다문화구상이 작
동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총리는 2011년 2월 5일 독
일 뮌헨에서 개최된 국제 안보회의에서 지난 30년의 영국 다문화주의는 젊은
무슬림들을 극단주의에 쉽게 빠지도록 만들었으며 따라서 우리에게는 최근의
소극적인 관용(passive tolerance)이 아니라 더욱 적극적이고 힘 있는(active,
muscular liberalism) 자유주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또한 “우리는 이민자들의 정체성에 대해 너무 걱정한 나머지
그들을 받아들인 국가의 정체성을 소홀히 했다.”고 말했다.
선 윤리는 어떻게 가능한가?(이상형) 247
가치관의 표현이라면,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구별은 규범과 공동선이
공동체 구성원들의 상호작용을 통해 형성될 기회가 박탈됨을 의미한다. 공
동체의 규범을 통해 개인의 권리를 조절하는 역할로 전락한 사회에서 개인
은 공동체와 멀어질 수밖에 없다. 개인주의적 입장에서 다원주의의 차이성
만이 강조된다면 사회는 각자의 선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장소일 뿐이
다. 이때 발생하는 투쟁이 공동체의 규범으로 조절되지 않는다면 그 사회
는 2010년 유럽 정상들의 선언처럼 다시 하나의 문화, 가치만을 강조하는
사회로 회귀될 수 있다. 그러나 사회적 규범과 가치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는 공동체 속에서 좋은 삶의 표상에 대한 인정투쟁이 요구된다. 그리고 올
바른 인정투쟁이 진행되기 위해서는 구성원들 각자의 공동선에 대한 참여
가 필수적이다. 이런 문제점을 보완하기 위해 의무론은 때로 선 윤리 또는
덕 윤리의 장점을 수용하고자 한다. 의무론과 선 윤리의 종합에 대한 시도
는 당위성 또는 정의와 연대성을 결합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의무론에 입
각해 당위성을 강조하며 연대성을 보완하는 방법과 선 윤리의 입장에서 연
대성을 강조하며 당위성을 도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의무론이 주장하는 당
위성에 근거한 연대성은 곧 그 당위성에 합의하는 사람 간의 연대만을 허용
할 뿐이다. 당위성을 정당화하기 위한 이상적 상황의 조건에 해당하는 사람
은 내용과 현실이 상실된 비인간적 인간이다. 이런 인간 상호간의 연대성은
형식적, 추상적이기에 실질적 연대감을 형성하기 어렵다. 실질적 연대감은
서로 같은 현실에서 같은 상황에 처해 있음을 인식함으로 출발한다.
실질적 연대성은 상호 주체들이 사회의 선을 내면화하고 동시에 자신의
선을 인정받는 투쟁 속에서 같은 공동체에서 상호 좋은 삶을 추구하고 있다
는 인정에서 가능하다. 이 상호인정에 기반하여 나의 삶은 공동체에서 좋은
삶으로 실현될 수 있다. 따라서 공동선의 구체화인 운명공동체를 통한 연대
성에 기반하여 우리-공동체의 좋은 삶을 위해 노력할 때 다원주의로부터 발
생하는 어려움은 극복될 수 있다. 왜냐하면 공동체의 복지는 곧 자신의 좋
은 삶과 밀접히 관련 맺고 있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공동선은 구성원들의
인정투쟁의 결과이며 이것은 다시 자신의 좋은 삶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
다. 이런 인식과 삶이 다원주의 사회를 진정으로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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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 윤리는 어떻게 가능한가?(이상형) 249
Wie ist die Ethik des Guten Möglich?
Lee, Sang-Hyung
【Zusammenfassung】
In dieser Arbeit geht es darum, zu zeigen, wie die Ethik des Guten
in der heutigen Situation möglich ist. Wie Taylor schon den Zusammenhang
des Selbst mit dem Guten artikuliert hat, kann das Selbst durch den
Zusammenhang mit den Gütern seine Identität bilden. Menschliche
Handlung und Identität sind das Resultat einer Selbstdeutung im
moralischen Raum und daher spielen die normativen Gehalte eine
konstitutive Rolle für menschliche Identität und menschliches Handeln.
Die Frage, was ich bin, also welche Art von Wesen das Individuum sein
will, wird immer im Zusammenhang mit der Frage, wie der Mensch
durch den Zusammenhang mit den Gütern bestimmt wird, beantwortet.
Aus diesem Grund muss das Verhältnis zwischen Richtigem und Gutem
nun im Hinblick auf das Gute erklärt werden. Denn um die Universalität
im Praktischen zu ermöglichen, ist es erforderlich, dass die moralischen
Normen auf der Gemeinschaft begründet wird. Aber da alle Verfechter
des Richtigen auf der praktischen Ebene ein unverändertes, absolutes
Kriterium konzipieren, können sie infolgedessen nicht vermeiden, dass
sie eine ideale Welt oder Bedingung gegen die veränderliche Wirklichkeit
künstlich konstituieren müssen, damit alle diesem Prinzip zustimmen
können. Der abstrake Universalismus und der inhaltsleere Formalismus
erscheinen als Unterdrückung der Wirklichkeit ohne das Verstehen des
wirklichen Anderen und ohne die Verständigung mit dem wirklich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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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nderen. In dieser intelligiblen Welt oder der idealen Welt ist die Idee
des konkteren Lebens nicht zu berücksichtigen. Wenn wir einräumen,
dass die Güter den moralischen Normen vorausgesetzt werden und als
die objektive Instanz für die Verpflichtung der Normen funktionieren,
ändert sich die Sicht auf die Moral. Im Hinblick auf die Ethik des
Guten, nämlich dass die Vorstellung des Guten im Zusammenhang mit
der Gemeinschaft den Lebenssinn bildet, auf dessen Basis moralisches
Handeln beurteilt wird, kann der Mensch den richtigen Zusammenhang
mit dem Selbst und der Gemeinschaft bilden.
Key words : Die Ethik des Guten, Moral, Universalismus, Pluralismus,
Anerkennung
논문접수일: 2012년 2월 27일 논문심사일: 2012년 4월 9일 게재확정일: 2012년 4월 2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