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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
최 은 진**
연 구 논 문
1. 머리말
2. 성장 배경과 일본 비행사 활동
3. 고국 방문 비행과 민족의식 각성
4. 중국에서의 항공독립운동
5. 맺음말
1. 머리말
최초의 한국인 비행사로 널리 알려져 있는 인물이 安昌男(1901.1.29.~
1930.4.2)이다. 그런데 최근에 최초의 한국인 파일럿은 이응호(George
Lee)1)로 밝혀졌다. 이제 안창남은 한국인 비행사 최초로 국내 비행에 성
* 이 논문은 2014년 10월부터 2015년 12월까지 공군역사기록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한
「공군 창설 이전 태동기 항공독립운동사 연구」 자료집의 일부를 논문으로 대폭 보
완한 것임.
** 국가보훈처 공훈심사과 연구원.
1) 이응호는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직후인 1917년 6월경 미 육군 항공대에
입대하여 독일·프랑스 국경지대에서 비행선 조종사 등으로 활약했고, 뉴욕주 미첼
필드(Mitchell Field) 비행학교를 졸업하고 1918년 5월 말경 정식 파일럿이 되었다
(신한민보, 1918년 5월 24일, 「이응호 씨의 종군」; 신한민보, 1918년 12월 26
일, 「한인 비행가 이 조지 씨 6개월 동안 경력」; US Army Registration Card, 1917년
9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5집
공한 인물로 기념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항공인의 기원으로서 안
창남의 ‘表象’은 여전하다. 일제 치하에서 일본에 앞서 유학한 조선인 비
행가이자 새 과학기술의 선각 수용자로서 누릴 수 있었던 부귀영화를 버
리고 항일무장투쟁에 투신한 사실로 그 상징성이 더 커졌을 것이다. 안
창남은 일본에서 비행교육을 받은 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순국할 때까지
비행사로서 독립운동에 참여한 행적으로 2001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
되었다.2)
하지만 의외로 선구적인 항공인이자 대표적인 항공독립운동가3)로서의
중요성에 비해 안창남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논문은 거의 전무하다고 할
수 있다. 안창남의 생애 전체를 다룬 연구는 안창남기념사업회에서 발표
한 약식논문이 유일하며,4) 大韓獨立共鳴團의 조직과 비행학교 설립 시도
등과 관련하여 안창남의 행적 일부를 다룬 연구 정도가 있다.5) 그 밖에
1920년대 과학운동의 출발점으로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의 의의를 다룬
연구가 있다.6) 공군사 및 항공사, 개설서류 단행본, 신문지상에서는 그에
대해 부분적으로 언급하거나 심지어 한 편의 소설처럼 추측성 글을 쓰기
6월 5일 및 Stockton Daily Record, 1918년 12월 18일, “George Lee Wins Honors and
Bride”(한우성, 「1920,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5, 7~9) : 한민족 최초 파일럿의 탄생」,
미주중앙일보, 2014년 3월 15·18·20일에서 재인용)).
2) 국가보훈처, 「안창남」, 독립유공자 공훈록.
3) ‘항공독립운동’은 무장독립운동에서 항공력을 활용한 독립운동도 있었다는 차원에
서 나온 용어이다. 국권을 상실한 열악한 상황에서도 군사 분야에서 중요성이 부각
된 항공력을 활용한 독립운동이 시도되었다는 사실 자체에 주목하여 그 의도에 방
점을 두고 의미 부여한 것이다. 따라서 이 용어는 실질적인 항공력 운용 차원을 넘
어 그 구상까지도 대상으로 포함한다(김기둥 외, 「최용덕의 항공독립운동과 광복군
내 역할」, 군사 95,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5, 428쪽).
4) 박정규, 「안창남 飛行記와 안창남의 생애」, 안창남기념사업회 제7회 월례학술발표
회, 안창남기념사업회, 2000.
5) 조규태, 「대한독립공명단의 조직과 활동」, 한국민족운동사연구 33, 한국민족운동
사학회, 2002; 홍윤정, 「독립운동과 비행사 양성」, 국사관논총 107, 국사편찬위원
회, 2005; 김영범, 한국독립운동의 역사(26) : 의열투쟁(1),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
동사연구소, 2009.
6) 현원복, 「일제하 과학운동의 새로운 이해」, 크로노스, 한양대 사회과학대학 신문
방송학과, 19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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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 했다.7) 그런데 이들 서술의 사실 관계가 명확한지 여부는 구체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대체로 출처가 정확하지 않은 자료나 몇 가지 사료
만을 참고하고 관계자 회고에 의존하여, 잘못된 정보가 회자되거나 사실
순서가 뒤바뀌고 활동 시기가 틀린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또한 안창남
의 중국군 참가를 통한 항공독립운동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증명하는 서
술은 더욱 부족하다.
우리나라 초기 항공인으로서 안창남을 추앙하고, 특히 일제강점기 일
본 유학파 비행사 가운데 선두에 서서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면모를 적극
기념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의 전 생애를 사실적으로 입증하는 데 노력을
다해야 한다. 안창남의 삶을 세세히 추적하는 작업은 곧 일제강점기 항
공인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나아가 그가 민족의식을 각성하여 항공독립
운동가로서 전개한 항일무장투쟁 및 의열투쟁을 증명하는 중요한 사례
연구가 된다.
이에 이 글에서는 안창남의 생애를 크게 세 시기로 구분해 본다. 첫째,
그의 성장 배경과 국내 및 일본에서 받은 초기 교육, 이후 일본의 비행학
7) 박용구, 풍류한국명인열전, 신태양사, 1961, 8~57쪽; 장성환, 나의 항공생활, 공
군본부 정훈감실, 1964, 151~152쪽; 임종국·박노준, 흘러간 星座 3, 국제문화사,
1966, 18~43쪽; 임종국·구자익, 동서일화집, 동아일보사, 1972, 91~92쪽; 동아일보
사, 東亞日報社史 1, 1975, 204~207쪽; 대한항공, 대한항공10년사, 1979, 611~615,
619~622쪽; 김경옥, 한국근대풍운사 3, 대중서관, 1981, 205~234쪽; 이용선, 「안창
남의 ‘비행기 감격시대’」, 교통안전 8, 교통안전진흥공단, 1983; 김광한, (김광한
자서전) 창공만리, 일조각, 1986, 4~6쪽; 한겨레신문사,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1,
1991, 61~66쪽; 이경재, 서울 定都 600년(2) : 개화풍속도, 서울신문사, 1993,
314~319쪽; 이현희, 한국의 역사(9) : 민족 독립운동의 자립시대, 한국교육문화사,
1994, 369~379쪽; 서울특별시, 서울민속대관(10) : 생업·교통·통신편, 1995,
545~547쪽; 임달연, 한국항공우주사, 한국항공대출판부, 2001, 27~31쪽; 이민수,
위대한 군인정신 2, 봉명, 2001, 465~467쪽; 임달연, 항공기 이야기, 동명사,
2003, 53~57쪽; 김백순, 항공, 한국신문홍보, 2008, 242~244, 247~251쪽; 裵淵弘, 朝
鮮人特攻隊 : ‘日本人’として死んだ英靈たち, 新潮社, 2009, 83~86쪽; 권주혁, 한국
공군과 한국전쟁, 퓨어웨이픽쳐스, 2010, 33~34쪽; 길윤형, 나는 조선인 가미카제
다, 서해문집, 2012, 20, 59~60쪽; 김기둥, 「일제시대 항공 분야에서의 한국인 활동
에 관한 서술의 현황과 과제」, 공사논문집 65, 공군사관학교, 2014, 120쪽; 대한민
국항공회, 「2천만 한국인의 자존심을 세우다 : 안창남의 모국 방문비행」, 대한민국
항공사 : 1913~1969,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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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를 졸업하고 정식으로 비행사 면허를 취득하기까지 비행사 활동에 대
해 살핀다. 둘째,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의 의미를 되짚고 그 후 그가 민
족의식을 자각하며, 관동대진재 후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더욱 각성하는
과정을 추적한다. 셋째, 중국으로 건너가 혁명운동에 참여하여 항일무장
투쟁을 벌이고,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하여 비행사 등 독립군 양성을 추
진했던 행적에 대해 서술한다.
사료는 독립유공자로 포상되면서 인정된 거증자료 이외에도, 이후 정
리·공개된 일제강점기 신문 및 잡지기사가 상당수 있다. 특히 국가기록
원에 소장되어 있는 국방부 공군본부의 ‘3급 비밀 자료’인 공군창설전기
록(기사) 공군관련자료(1950)는 주로 안창남 관련 동아일보 기사 필사
스크랩으로 참고가 된다. 고려대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1925년에 발간
된 (공중 용사) 안창남 飛行記(尹鍾悳 저, 以文堂)에는 그의 출생 및 성
장과정이 정리되어 있다.8) 국가보훈처에서 발간한 30년 방랑기 : 柳基
石 회고록에서는 「태원에서의 1년 : 안창남 전」(1963년 8월 13일)을 통해
안창남의 생애와 중국 항공부대 활동 경위를 증언하고 있다. 또한 조선
총독부와 경찰 관계 자료를 통해서는 공명단을 비롯하여 안창남의 독립
운동 사실을 규명할 수 있다. 그 밖에 국가기록원에 소장되어 있는 총독
부 경찰부의 경시청정보 중 「비행학교 재학 조선인·대만인 조사에 관
한 건」(1938~1939), 일본 국립국회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는 제국비행협회
및 대일본비행협회 발간 항공연감(1930, 1936, 1941) 등을 통해 시대적
배경으로 일제강점기 항공 정책 주요 현황과 비행교육의 실태, 당시 일
본에 유학하고 중국에서 항공독립운동을 한 조선인 비행가의 현황을 함
께 살필 수 있다.
8) (空中 勇士) 安昌男 飛行記는 山西省 太原飛行學校 교장으로서 조선 독립운동에
공헌한 안창남의 이야기를 다루었다는 이유로 1930년 차압 및 기사 삭제 출판물로
검열을 받았다(朝鮮出版警察月報 21, 1930년 5월 12일, 「出版警察槪況 : 不許可差
押及削除出版物記事要旨」).
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 95
2. 성장 배경과 일본 비행사 활동
1) 성장 배경과 초기 교육
제적등본을 보면 안창남은 1901년 1월 29일에 출생했고, 본적은 경
기도 경성부 平洞(현 서울 종로구 평동) 20번지로 되어 있다.9) 본관은
順興이며, 부친은 安祥俊(安尙俊)이고 장남으로 태어났다. 안창남의 아
버지는 구한말에 醫官이었다고 하는데,10) 이후 안창남의 학적부에 따
르면 아버지는 상업에 종사했다.11) 생모는 그가 4살 되던 때 병사했
고,12) 늦은 나이에 아들을 두었던 아버지도 그가 16살 되던 무렵 역시
병사했다.13)
집안이 유복했던 편은 아니었으나,14) 안창남의 교육 열정은 남달랐다.
그는 국내에서 초등·중등교육과정으로 미동보통학교를 다니고 휘문고
등보통학교를 중퇴한 후, 일본으로 건너가서 자동차학교, 비행기제작소
를 이수하며 전문교육을 받았다. 미동공립보통학교 학적부에 따르면 안
창남은 사립 華東學校에 다녔다가, 미동공립보통학교15)에 1911년 4월 입
9) 제적등본에 경기도 경성부 長沙洞 213번지에서 1920년 5월 3일 위 본적 주소지로 이
주했다고 되어 있다(안창남 제적등본 참조).
10) 동아일보, 1922년 11월 22일, 「空中의 人 안창남(1) : 彼의 생애는 如何」.
11) 미동공립보통학교와 휘문의숙 학적부 참조. 아버지가 목사였다는 기록도 있다(宋相
燾, 騎驢隨筆, 국사편찬위원회, 1971, 313쪽).
12) 제적등본에 모친은 崔姓女로 되어 있으나, 1904년 생모 李氏가 안창남을 포함해 1남
1녀를 두고 병으로 죽어 부친이 그해 바로 재혼한 것이다(동아일보, 1922년 11월
23일, 「空中 勇士 안창남(2) : 비행가의 지망은」; 尹鍾悳, (空中 勇士) 安昌男 飛行
記, 以文堂, 1925, 4~7쪽).
13) 동아일보, 1922년 11월 26일, 「空中 勇士 안창남(5) : 千載의 好機會」. 제적등본에
는 아버지의 생몰연월일이 쓰여 있지 않으나, 학적부에는 안창남이 휘문의숙 1학년
이던 때까지 아버지(당시 55세)가 생존해 있던 것으로 확인되며, 안창남 비행기에
는 휘문의숙 2학년 때 아버지가 사망한 것으로 나온다(휘문의숙 학적부 참조; 尹鍾
悳, (空中 勇士) 安昌男 飛行記, 13쪽).
14) 조선일보, 1930년 4월 12일, 「조선이 낳은 천재 비행가 안창남 씨 추락 참사」.
9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5집
학하여 1915년 3월 졸업했다.16) 이어서 그는 民族私學의 분위기 속에서
중등교육을 받았다. 보통학교 졸업 후 바로 1915년 4월 휘문의숙17)에 입
학한 것이 학적부에 확인된다.
하지만 그는 3·1운동이 한창이던 1919년에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중퇴
하고서 일본 유학을 선택했다.18) 새 과학기술 교육에 대한 열망이 그를
바다 건너 일본으로까지 이끌었을 것이다. 안창남은 먼저 오사카 니시구
(西區)의 자동차학교 專修科에 들어가 발동기 관련 교육을 받고 3개월 만
에 운전수 면허를 획득했다. 비행기 운전 기술 습득을 위한 전초전이었
을까. 이후 그는 학비 마련을 위해 잠시 귀국했다가,19) 같은 해 도쿄로
가서 아카바네(赤羽)비행기제작소(일본 군용비행기 用具 공급처)20) 機體
15) 渼洞公立普通學校는 현재의 공립 서울미동초등학교이다. 1895년에 공포된 ‘소학교
령’에 따라 그해 漢城府公立小學校로 개교했다. 1906년 漢城公立普通學校로 교명을
변경하고, 1908년 다시 미동공립보통학교로 개칭하면서 서대문구 미근동 현재의 위
치로 교사를 이전했다(김경미, 한국 근대교육의 형성, 혜안, 2009, 166~167쪽).
16) 동아일보, 안창남 비행기, 기려수필에는 안창남이 1908년 미동공립보통학교
에 입학해 1911년 졸업했다고 되어 있다(동아일보, 1922년 11월 23일, 「空中 勇士
안창남(2) : 비행가의 지망은」; 동아일보, 1922년 11월 24일, 「空中 勇士 안창남(3)
: 졸업장의 비애」; 尹鍾悳, (空中 勇士) 安昌男 飛行記, 7~9쪽; 宋相燾, 騎驢隨筆,
313쪽). 그런데 휘문의숙 입학 시기와 비교해 봐도 이 보통학교 수학 시기는 오류가
있어, 화동학교 학력에 대한 오기일 수 있다.
17) 徽文義塾은 1906년 閔泳徽가 서울 종로구 苑西洞 觀象監 터에 고종으로부터 ‘徽文’
이라는 교명을 하사받아 개교했다. 휘문의숙은 1918년에 휘문고등보통학교로 교명
이 변경된다. ‘民族私學의 牙城’답게 3·1운동 때 만세운동에 앞장서 3명이 옥고를
치렀으며, 1921년에는 학교장 任暻宰를 비롯한 교사들이 중심이 되어 조선어연구회
를 창립하기도 했다(유봉호·김융자, 한국 근·현대 중등교육 100년사, 교학연구
사, 1998, 71쪽; 휘문중고등학교, 휘문 100년사, 2006 참고).
18) 기사에는 안창남이 1919년 휘문고등보통학교 3학년 때 일본 오사카로 건너갔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학적부에는 1915년에 입학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중간에 휴학
기간이 있지 않았나 추정된다(안창남, 「오구리비행장에서」, 개벽 6, 1920년 12월
1일; 매일신보, 1921년 5월 5일, 「조선인 비행가, 소율비행학교를 졸업하고 불원에
조교수가 될 안창남」).
19) 동아일보, 1922년 11월 27일, 「空中 勇士 안창남(6) : 고국 방문은 宿望」; 尹鍾悳,
(空中 勇士) 安昌男 飛行記, 17쪽.
20) 아카바네(赤羽)飛行機製作所는 조종사를 양성하는 일본의 민간 비행학교로, 의학박사
기시 가즈타(岸㊀太)가 출자하고 교장으로 이노우에 다케사부로(井上武三郞)를 맞아
1917년 12월에 설립되었다(佐藤㊀㊀, 日本民間航空通史, 圖書刊行會, 2003, 77쪽).
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 97
部에 들어가 비행기 구조와 조직 및 성능에 대해 6개월간 연구한 후, 본
격적으로 오구리(小栗)비행학교에 입학하여 비행 기술을 연마하기 시작
했다.
2) 일본의 비행학교 졸업과 비행사 면허 취득
안창남은 1920년 8월 일본 도쿄 오구리비행학교에 입학하여 1921년 3
월경 이 비행학교를 졸업했다.21) 당시 도쿄 유학생 졸업 소식과 함께 이
채로운 사실로 오구리비행학교를 6개월 만에 졸업한 안창남의 이야기가
전해졌는데,22) 조선인으로서 일본의 비행학교를 졸업한 것은 金景圭23)
를 효시로 두 번째였다. 안창남은 오구리비행학교가 설립된 지 2개월 만
에 입학하여, 일찍이 미국식 선진 비행 기술을 일본에 보급하기 시작한
신흥 비행학교에서 수학한 것이었다.24) 안창남은 곧 이 비행학교의 조교
수가 될 것으로 기대되었다.25)
21) 동아일보, 1921년 3월 29일, 「今春에 學窓을 出하는 東京의 유학생」.
22) 이 무렵 비행학교의 이수과정은 6개월이었다. 학과보다도 기술교육에 치중했기 때
문에 6개월 과정만 거치면 操縱桿을 잡을 수 있었다(대한항공, 대한항공10년사,
611쪽).
23) 金景圭(1899~?)는 보성소학교를 졸업하고, 보성중학교에서 3년 공부하다가 1916년 9
월에 도쿄로 건너갔다. 일본에서 나카지마(中島知久平) 해군 대위가 경영하는 군마
현(群馬縣) 소재 나카지마(中島)비행기제작소 부속 비행학교(中島飛行練習所)에
1919년 6월 입학하여 오지마(尾島)비행장에서 비행 연습을 하고, 도코로자와(所澤)
비행협회에서 항공술을 연구했다. 비행학교를 졸업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매일신보, 1919년 5월 30일, 「사설 : 김경규 군의 前途를 祝함」, 「조선인의 비행가」;
매일신보, 1919년 5월 31일, 「新 비행가는 何人 : 마포 재산가의 셋째 아들」; 매일
신보, 1919년 6월 17일, 「비행기 추락, 위태하였던 김경규」; 매일신보, 1919년 7월
2일, 「김경규 군」; 매일신보, 1919년 10월 29일, 「비행계의 건아가 될 김경규 군의
近情」; 매일신보, 1920년 12월 22일, 「鮮滿 횡단 비행」).
24) 오구리비행학교는 1920년 6월 개교한 일본의 민간 비행학교로, 미국에서 萬國비행
기조종사 면허를 취득한 오구리 쓰네타로(小栗常太郞)가 설립했다. 校舍를 도쿄 후
카가와구(深川區) 스사키(洲崎) 매립지에 두고, 비행기 조종사 양성과 선전 비행, 항
공사진 촬영 등 교육사업을 했다(佐藤㊀㊀, 日本民間航空通史, 78쪽).
25) 매일신보, 1921년 5월 5일, 「조선인 비행가 : 소율비행학교를 졸업하고 불원에 조
교수가 될 안창남」; 매일신보, 1921년 5월 8일, 「조선인 비행가 안창남 군」.
98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5집
비행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안 된 1921년 8월 안창남은 공식적으로 비
행사 면허를 취득했다. 안창남은 1921년 8월 27일 제국비행협회 개최 도
쿄-모리오카(盛岡) 간 우편비행대회에 참가하여 3등 조종 면허장과 상
금 1,000원을 수여받았다.26) 이때 일본 육군성 항공국은 제1회 조종사 면
허 시험을 개최한 것으로,27) 안창남은 여기서 우수한 성적으로 일본에서
도 일본인 다음 두 번째로 조종사 면허를 취득했다.28)
비행학교 졸업 후 비로소 정식 비행사로서 그 이름을 세상에 널리 알
리게 된 안창남은 일시 귀국하여 고국 방문 비행과 비행학교 설립에의
포부를 드러냈다. 비행사 면허 취득 후 약 2개월 만인 1921년 11월 초 안
창남은 귀국하여 서울에 체류했다. 그는 조선에서 항공 분야가 아직까지
미발달 상태에 있고 비행기의 필요성이 고려되고 있지 않은 현실에 탄식
하며,29) 이번에 조선을 건너오면서 후일 고국 방문 비행을 계획하게 되
었다고 밝혔다. 또 조선에 비행학교를 설립하고자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30) 11월 11일에는 서울의 유지들이 維民會31)를 중심으로 안창남
26) 매일신보, 1921년 8월 30일, 「조선인 비행가 안창남 씨가 1,000원 수상」.
27) 1920년 7월 일본정부는 ‘항공국 관제’를 공포하고 8월에 육군성 外局으로 항공국을
설치하고서, 1921년 4월 8일 일본 내무성·육군성령 법률 제54호로 ‘航空取締規則’을
공포하여, 비행사는 조종사(1~3등) 면허가 없으면 비행을 할 수 없게 되었다(光村利
之, (寫眞)日本航空史, 海と空社, 1935, 16~17쪽; 高橋重治, 日本航空史, 航空協
會, 1936, 303쪽; 佐藤㊀㊀, 日本民間航空通史, 44~45, 209쪽).
28) 佐藤㊀㊀, 日本民間航空通史, 81쪽.
29) 조선총독부의 항공 행정 관련 사업은 제1차 사이토 총독 시대(1919~1927년)부터 시
작되었고, 야마나시 총독 시대(1927~1929년)에 항공로 및 비행장 설비를 갖추었다
(朝鮮總督府, 施政二十五年史, 1935, 641쪽). 안창남이 활약하던 시대는 일본 內地
에서나 식민지 조선에서 모두 항공사업의 초창기에 해당했다.
30) 매일신보, 1921년 11월 8일, 「조선인 비행가 안창남 씨 談」; 漢陽居士, 「안창남 군
의 추억」, 삼천리 1930년 初夏號, 1930년, 61~62쪽.
31) 3·1운동 직후 개시한 자치청원운동이 실패하자, 고희준·안국선 등 자치청원운동
주도 세력들은 새로운 차원에서 활동을 모색하며 1919년 12월 초 ‘維民會’를 결성했
다. 노동자 등 대중계몽을 통해 영향력을 확대하면서 부르조아세력의 이해와 직결
된 경제 현안에 참여하여 정치적·대중적 기반을 마련하겠다는 것이었다. 유민회
(회장 박영효)는 1921년 7월부터 조선인산업대회에 참여하며 일본에 종속적인 산업
구성과 일본정부의 지원을 주장했다(이태훈, 「1920년대초 자치청원운동과 維民會의
자치 구상」, 역사와 현실 39, 한국역사연구회, 2001, 82~85, 97쪽).
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 99
의 귀국 환영회를 열어 주었다.32)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안창남은 이제 오구리비행학교 교수로서 2등
비행사 면허 취득을 위해 나섰다. 하지만 몇 차례 비행기 사고를 겪는
등 2등 비행사 면허를 위한 비행시간을 확보하기까지 과정이 순탄치만
은 않았다.33) 마침내 1922년 5월 11일 일본 육군 항공국의 2등 비행사
검정 야외 비행이 거행되었다. 이날 안창남 외 수 명이 지바현(千葉縣)
쓰다누마정(津田沼町)을 떠나 사이타마현(埼玉縣) 도코로자와시(所澤市)
로 향했는데, 안창남이 조종하는 비행기가 제1착으로 도코로자와에 도
착했다.34) 이날 高度 비행에 참가한 조선인 비행가로는 안창남 외에도
張德昌35)이 있었다.36) 이로써 안창남은 1922년 6월에 2등 비행사 면허
를 받았다.
32) 매일신보, 1921년 11월 11일, 「안창남 군 환영」.
33) 동아일보, 1922년 2월 1일, 「안창남 씨 추락」; 매일신보, 1922년 2월 2일, 「안창남
씨 시험 비행 중 추락」; 매일신보, 1922년 2월 8일, 「안창남 씨 서신 : 추락이 아니
라 불시 착륙한 것이다」; 매일신보, 1922년 4월 1일, 「안창남 씨 飛機에서 추락」.
34) 매일신보, 1922년 6월 1일, 「제1착은 안창남 씨」.
35) 張德昌(1903~1972, 華山德昌)은 1919년 양정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0년 5월 도
쿄 이토(伊藤)비행기제작소 조종과에 들어가 1921년 10월 제1기생으로 졸업한 후,
1922년 2월 안창남에 이어 일본에서 조선인으로서 두 번째로 비행 면허를 취득했다.
1922년 6월 오사카 사카이시(堺市) 日本航空輸送硏究所(JAL 전신)에 창립사원으로
입사하여 여객기 비행사로 근무했다. 1925년 11월 위 연구소가 폐쇄되면서 大日本
航空株式會社에 입사했고, 1927년 1등 비행기 조종사 면허를 취득했으며, 이후 대일
본항공에서 機長으로 근무했다. 제2차 세계대전 말기에는 일본 육군 ‘猛作戰’의 요
원으로 서울에서 활동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귀국 후 공군 창설을 주도했고, 1956
년 제4대 공군참모총장이 되었다(삼천리 7-1, 1935년 1월 1일, 「삼천리 창공에 뜬
白衣 비행사 군상, 水上飛行의 覇者 장덕창」; 帝國飛行協會, 航空年鑑, 1930, 517
쪽; 航空年鑑, 1936, 652쪽; 大日本飛行協會, 航空年鑑, 1941, 463쪽; 佐藤㊀㊀, 日
本民間航空通史, 82~83쪽).
36) 매일신보, 1922년 6월 4일, 「최고도 비행 성적 : 10등은 장덕창 군이 차지했다」.
10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5집
3. 고국 방문 비행과 민족의식 각성
1)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의 의미
안창남은 비로소 고국 방문 비행 준비에 돌입했다. 1922년 8월 14일 고
국 방문에 쓰일 비행기가 오구리비행학교에서 조립·완성되었다. 이 비
행기는 일본 육군성에서 사들인 영국제 單發(발동기 1대) 雙葉 비행기로,
원래 영국 육군에서 적군 추격용으로 만든 소형기로 제1차 세계대전 때
유명했던 기종이었다. 비행기 양편에 안창남은 조선 13도 지도를 일목요
연하게 그리게 했다.37)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 관련 소식은 주로 1922년 11월 초 본격적인
준비에서부터 12월 10일 서울 상공에서 실행에 옮겨지기까지 연속적으
로 보도되었다. 일본정부는 식민 통치 미화의 차원에서 內地에서 선진
적으로 비행 기술을 습득한 식민지 조선인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을
적극 지원하며, 일본의 항공 정책 실현과 군사 기술 향상에 대해 홍보하
고, 아울러 1920년대부터 시작한 과학보급화운동의 일환으로 식민지에
의 선전 효과를 기대했을 것이다. 안창남 관련 기사를 동아일보에서
만큼이나 매일신보에서도 많이 보도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그 한편에는 암울한 식민지 현실에서 희망을 가지고 안창남의 소식을
계속 주목하며 그의 고국 방문 비행 날을 손꼽아 기다리는 식민지 조선
인들이 있었다.
우선 안창남은 1922년 11월 6일 도쿄-오사카 간 우편비행을 마쳤
다.38) 우편비행에 성공한 그를 위해 11월 7일 오사카에 있는 조선인들이
37) 매일신보, 1922년 9월 2일, 「2등 비행사 안창남 씨 고국 방문 비행」; 동아일보,
1922년 11월 18일, 「五彩의 조선 지도」.
38) 매일신보, 1922년 11월 8일, 「東京에서 大阪에 안착한 안창남 씨」; 大阪朝日新聞,
1922년 11월 12일, 「予期近き成功を收めて : 東京大阪間郵便飛行終了す」; 안창남, 「폭
풍·풍우와 싸우면서 구사일생으로 大阪에 착륙하기까지」, 개벽 30, 1922년 12월 1일.
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 101
기타구(北區)에서 환영회를 열어 주었는데, 이 자리에서 안창남은 장래
조선에 비행학교를 설립하고 싶다는 포부를 다시금 밝혔다.39) 안창남은
11월 10일 오사카에서 도쿄로 무사히 비행기를 타고 돌아왔는데, 이날 많
은 조선인들이 그의 비행 모습을 참관하려 성황을 이루었다.40) 11월 26
일 도쿄 주오구(中央區) 쓰키지(築地) 水交社(일본 해군 장교의 친목단
체)에서 도쿄-오사카 우편비행 왕복 성공에 대한 수상식이 열렸다.41)
조선인 2등 비행사 안창남과 함께 그의 동료였던 대만인 비행가 謝文達
등이 수상했고, 안창남은 協會有功賞 3,000원을 받았다.42) 항공국에서도
추가로 1,000원의 상금을 주었는데,43) 도쿄에서 오사카까지 약 1,400리를
날아간 것은 당시 일본에서도 최장거리 비행술이었다.44)
우편연락비행을 성공리에 마친 안창남은 고국 방문 비행 계획을 구체
화했다. 11월 17일 먼저 뉴포르(Nieuport) 15㎡, 톤당 80마력의 비행기를
분해하여 발송하기로 했다. 도쿄 시부야구(澁谷區) 요요기(代代木 : 練兵
場이 있던 곳)에서 비행기를 수송하고 돌아온 안창남은 ‘본월(11월) 말일
께로부터 내월(12월) 초승까지에 경성과 부산 등지 3, 4곳에서 비행을 할
터이며, 來春에는 새로이 조선 전토 연락비행을 하고자’ 한다고 밝혔
다.45) 나중의 보도에 따르면, 안창남은 서울에서 고국 방문 대비행을 마
친 뒤에 서울-평양 간 편도비행, 평양-진남포 간 왕복비행, 서울-인
천·개성·수원 간 삼각비행, 대구-부산 간 왕복비행, 신의주-安東縣
간 왕복비행을 할 계획이었다.46)
39) 매일신보, 1922년 11월 9일, 「안창남 씨 환영연」.
40) 매일신보, 1922년 11월 13일, 「空界㊀의 快勇士인 안창남 씨 귀환 비행으로 동경에
도착할 때 조선인단의 환호 갈채」.
41) 매일신보, 1922년 11월 25일, 「우편비행 수상자 10명」.
42) 매일신보, 1922년 11월 28일, 「우편비행 수상식」.
43) 동아일보, 1922년 11월 28일, 「항공국에서도 상금 : 안창남 씨의 광영」.
44) 이용선, 「안창남의 ‘비행기 감격시대’」, 15쪽.
45) 매일신보, 1922년 11월 15일, 「안창남 씨 고국 방문 비행은 금월 하순 결행」.
46) 매일신보, 1922년 12월 1일, 「순회비행 : 예정의 계획과 장쾌한 안군의 비행, 삼각
비행 결행」.
10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5집
이번에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 행사를 주관하게 된 동아일보사는 안
창남을 ‘사회적·민중적으로 환영’하는 이유로, 현대 과학기술에 숙련된
그가 ‘애족적 열정’으로 조선 상공을 조선인 최초로 비행함으로써,47) ‘조
선 민족의 문화생활에 신기원’을 이룬다고 의미 부여하였다. 1922년 11월
말 동아일보 사설에서는 안창남 초청의 의미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48)
…… 우리가 同君(안창남)을 환영하고 또한 갈망·기대함이 여러 가지
의미가 있으니, ㊀은 同君이 우리와 같은 조선 사람인 까닭이요, 又㊀은
현대 과학의 최신 眞髓를 結晶한 비행 기술에 學理의 蘊奧와 실제 기술
의 숙련을 兼得한 선구자인 까닭이로다. ……
안창남이 서울에 도착한 12월 5일자 동아일보에도 그를 환영하는 사
설이 실렸다.49)
첫째, 安君은 조선 사람이라. 조선 사람으로서 문화의 발전에 공헌코
자 하여, 異域風霜에 心神의 焦勞를 備嘗하며 생명의 위험을 不顧하고
棟樑을 成하며 寶玉을 顯하여 殊邦異人으로도 그 勇壯을 감탄하며 그 기
능을 讚賞하거든, 하물며 혈육의 정이 深하고 苦樂의 途가 동일한 조선
사람으로는 그 감정의 충동이 如何하며 그 환호의 정도가 如何하겠느뇨.
둘째는 안군의 愛族的 열정이 발로하여, 時候의 寒烈과 심신의 苦勞를
불고하고 고국 방문의 名義下에서 문명의 복음을 선전하여 실제적 觀感
을 興起케 하려 하는 것이 吾人으로는 감사 아니할 수 없으며 贊仰 아니
할 수 없도다. 셋째는 재외 동포 중에 물론 幾多의 비행가가 有할 것이며
有하여야 될 것이라. 그러나 지금까지에 조선 공중을 조선 사람으로 비
행케 하던 일은 絶無하였도다. …… 그러면 조선 민족의 문화생활에 신
47) 안창남은 식민지 조선의 상공을 처음 난 조선인이었지만, 조선 민중은 이미 5년 전
에 비행기가 조선의 상공을 나는 모습을 본 경험이 있었다. 1917년 미국인 아트 스
미스(Art Smith)가 제1차 세계대전을 당해 본국으로 돌아가면서 용산 연병장에서 비
행하여 군중이 운집했던 것이다. 안창남도 이때부터 하늘에의 동경을 품고 비행술
을 배우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매일신보, 1922년 12월 9일, 「안군의 呈才飛行」;
宋相燾, 騎驢隨筆, 314쪽).
48) 동아일보, 1922년 11월 23일, 「조선 비행계의 第㊀人 안창남 군의 雄志」.
49) 동아일보, 1922년 12월 5일, 「안창남 군을 환영하노라 : 금일 入京」.
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 103
기원을 作하며, 飛行史上에 ㊀紙頁을 添하는 이 壯擧가 어찌 기념적 사
실이 아니며 중대한 의미가 有치 아니한가. ……
식민지 조선의 유지들도 政派를 떠나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을 후원
하고 나섰다. 당시 일본에서는 비행학교 수학을 마치면 고국 방문 비행
을 하는 것이 전례였고, 각 縣은 자기 고장에서 비행가가 나오면 의례히
후원회를 조직하여 비행기를 사주고는 했다. 이 무렵 동료 사문달도 대
만인들이 기부금을 모아 사 준 비행기로 대만 일주 고국 방문 비행을 성
대히 거행할 예정이었는데, 이것이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에 더 자극
이 되었다.50) 이미 11월 12일 서울 시내 유지 수십 명은 종로 조선중앙기
독교청년회관(YMCA)에서 ‘안창남 군 고국 방문 비행 후원회’를 결성했고,
朴泳孝를 위원장으로 추대했다. 이 후원회에서 안창남에게 비행기를 사
주고자 회원을 모집하여 회비를 모으기로 하고,51) 후원회 사무소는 동아
일보사 안에 두었다.52) 안창남 후원회 구성을 보면 다음과 같다.
서무계 : 高元勳, 金瓚泳, 具滋玉, 劉銓
회계계 : 閔大植, 韓翼敎
선전계 : 姜邁, 金圭源, 金秊洙, 金尙沃, 金容埰, 金尙燮, 金潤冕, 金弼
秀, 金鎭玉, 金漢奎, 權東鎭, 任璟宰, 張道斌, 張斗鉉, 鄭廣朝,
鄭大鉉, 鄭魯湜, 李慶世, 李範昇, 李世賢, 李升雨, 李鍾駿, 李
鍾翊, 李軫鎬, 林圭, 朴勝鳳, 朴勝彬, 白寬洙, 白南奎, 白寅基,
白完爀, 薛泰熙, 安炳儀, 嚴柱益, 吳鉉玉, 兪星濬, 兪鎭泰, 兪
致衡, 尹致昊, 趙南駿, 趙東植, 趙鎭泰, 崔奎東, 崔東曦, 崔聖
模, 玄相允, 玄俊鎬, 洪淳泌
50) 동아일보, 1922년 11월 29일, 「비행 후원의 중대한 의의」.
51) 안창남 후원회비는 통상회원 2원 이상, 특별회원 10원 이상, 명예회원 50원 이상으로
하여(동아일보, 1922년 12월 2일, 「회원은 다수를 희망」), 비행기 구입비 1만 5,000
원과 부속품 구입비 5,000원, 총 2만 원을 모집할 계획이었는데, 모 유력자는 혼자서
5,000원을 내기도 했다(동아일보, 1921년 11월 27일, 「비행가를 위하여 2만 원」).
52) 매일신보, 1922년 12월 2일, 「안창남 씨 후원회」; 동아일보, 1922년 12월 2일, 「동
아일보사 주최 고국 방문 안창남 군 대비행」.
10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5집
일본 항공국을 비롯하여 용산 주둔 조선군사령부, 평양항공대 등 당국
도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을 지원하고 있었다. 11월 29일 안창남의 비
행 행사를 위해 技師 다카하시 벤지(高橋辨治)와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
행을 조력하던 朴容燮, 오구리비행장에서 수학한 제자 金容瑞가 함께 평
양항공대에 교섭하여 당국의 협력을 요청하고자 먼저 출발했다.53) 이때
기사 다카하시는 안창남의 비행술을 칭찬하면서도, ‘(안창남이) 항상 물
질에 고통을 받아서, 즉 다시 말하면 남만큼 돈이 없어서 비행기를 샀다
하여도 썩 좋은 것을 사지 못하였음’이 유감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안창
남의 고국 방문 비행 때 고국 인사들이 더 성원해 주어 좋은 전용 비행기
를 사주기 바란다고 부탁했다.54) 이에 화답하듯이 용산 20사단 사령부는
이번 안창남의 비행 계획에 대하여 특별히 일본 항공국으로부터 의뢰를
받았고 또 국민들에게 비행을 장려하는 의미로 대대적으로 원조하겠다
는 의사를 밝혔다.55)
조선총독부는 매일신보 사설을 통해 당시 최첨단 과학기술의 상징
인 비행기 조종사이자 일본제국의 청년 안창남을 선전하는 한편으로,
조선인 계몽 차원에서는 이 식민지 청년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
지시켰다. 즉 ‘안창남과 같은 원기 발랄한 청년으로 근대적 진보한 과학
문명을 향토의 인사에게 소개하는 것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며, 근대
과학 물질문명의 선두주자로서 청년 안창남을 칭송했다. 하지만 동시에
‘안창남 군의 空間 정복도 실로 쾌심할 일이나, 그러나 陸上에 있는 조선
청년의 노력 전진할 임무와 領分이 허다한 것을 망각치 못할 것’이니,
‘친애하는 일반 청년과 사회 각 계급 인사의 열렬한 자각을 깊이 바란다’
고 했다.56)
안창남은 범종교적으로도, 또 조선인과 일본인을 불문하고 성대한 환
53) 동아일보, 1922년 11월 30일, 「9일이나 10일에는 壯快한 안씨의 비행」; 매일신보,
1922년 12월 1일, 「鳥人 안창남 군」.
54) 매일신보, 1922년 12월 1일, 「사실 유감은 비행기」.
55) 매일신보, 1922년 12월 1일, 「군사령부 당국의 원조」.
56) 매일신보, 1922년 12월 5일, 「空界의 청년 남자를 환영함」.
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 105
영을 받아 전례 없는 대규모의 환영회가 예상되었다. 안창남이 조선에
도착하는 날에는 후원회의 대표이자 조선중앙기독교청년회 간부 具滋玉
을 비롯하여 대종교 대표 등이 특별히 수원까지 마중을 나갈 예정이었
다. 안창남이 남대문역에 도착할 때는 일본인 보수단체 國粹會 천여 명
도 나가 안창남을 맞이하기로 했고, 조선신문사에서는 화환을 증여하며
환영하기로 했다.57) 안창남과 함께 조선 반도의 하늘 위를 날 비행기가
먼저 12월 1일 오후 배편으로 인천에 도착했고 기차를 통해 서울로 운반
되었다.58) 평양항공대와 교섭하기 위해 평양에 갔던 다카하시 기사, 박
용섭, 김용서도 서울로 돌아와, 비행기를 조립하여 여의도59) 格納庫에 보
관했다.60)
2) 고국 방문 비행과 민족의식의 자각
마침내 일본에서 배를 타고 건너온 안창남이 1922년 12월 5일 아침 부
산에서 서울행 특급열차에 올랐다. 열차에서 전한 말에 따르면, 우선 12
월 10일 경성에서 비행하고 순차적으로 평양, 대구 등지를 방문 비행할
예정이었다. 이번에 탑승하는 비행기 이름은 ‘金剛號’로 명명되었다.61)
그를 환영하기 위해 수원에까지 조선청년연합회 대표 崔淳鐸 등 각 단체
대표가 나왔고, 영등포까지 개벽 기자 金起田을 비롯해 천도교청년회
와 국수회 대표 등이 마중을 나왔다. 동아일보사장 宋鎭禹가 안내하여
안창남이 남대문역 밖으로 나오자 모여 있던 수천 명이 안창남을 에워싸
57) 매일신보, 1922년 12월 2일, 「환영 화환」; 동아일보, 1922년 12월 5일, 「대종교에
서 수원에 대표 파견」.
58) 매일신보, 1922년 12월 2일, 「안씨의 비행기 작일 인천에 도착해」.
59) 여의도는 이전에는 주로 목축장으로 사용되다가, 한일병합 후 일제가 비행기 이착
륙장으로 쓰기 시작했으며, 1916년에는 활주로와 격납고를 갖춘 비행장을 개장했다
(이경재, 서울 定都 600년(2) : 개화풍속도, 315~316쪽).
60) 매일신보, 1922년 12월 3일, 「안창남 군 환영 준비」.
61) 매일신보, 1922년 12월 6일, 「안창남 군 來 10일 비행?」.
10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5집
며 열광적인 환영을 보냈다. 안창남, 方定煥, 오구리비행학교장 일행에
환영객이 좌우로 늘어서 화환을 증정하고 사진을 촬영하려는 데 분주하
다가 점차 과열되어 군중이 큰 소리로 만세를 불렀다.62)
총독을 위시하여 총독부, 평양항공대, 경성부, 경기도경찰부, 경성일보
사, 조선신문사 등 관계관서와 일본인 언론도 나서서 안창남을 환영해
주었다. 서울에 온 날 밤으로 평양항공대를 방문한 안창남은 12월 7일 아
침 다시 서울로 돌아와 이번 비행을 성원하는 곳곳을 찾았다.63) 이날 밤
에는 안창남 환영회가 경성공회당에서 열렸다. 2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조선인으로 후원회장 박영효 이하 유수의 인사들이 왔고, 우마노(馬野精
㊀) 경기도경찰부장, 히지야(泥谷良次郞) 경성일보 편집국장 등 주요 일
본인 인사들도 참석했다. 환영회는 박영효의 개회사로 시작되어 보성전
문학교장 高元勳, 조선신문사장 마키야마(牧山耕藏), 경성부윤 요시마쓰
(吉松憲郎), 오구리비행학교장 오구리 쓰네타로(小栗常太郞) 등의 환영사
가 이어졌다.64) 12월 9일 오후에는 사이토(齋藤) 총독이 직접 안창남을
주빈으로 관계자와 총독부 국장·부장을 관저로 초대하여 성대한 다과연
을 개최해 주었다.65)
안창남은 선진 비행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조선인들을 대표하여 동포
들의 민족적인 후원을 바라며 고국 방문 비행에 나섰다. 거기에는 분명
식민지 조선인으로서의 자각, “조선 사람도 ‘하면 된다’”는 신념이 있었다.
…… 지금의 조선 청년들이 이 비행술에 특별한 천재를 가지고 있는
것을 기뻐하여 주십시오. 그리고 우리가 다함께 힘을 합하여 이 사업에
힘을 쏟으면 다른 아무 곳의 비행기라도 능히 압두할 수 있는 것을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내가 있는 일본비행학교에도 우리 곳 청년이 세
62) 매일신보, 1922년 12월 7일, 「수천 군중의 환호성 중 안창남 군 再昨夜 入城」; 동
아일보, 1922년 12월 7일, 「공전의 대환영 중 안창남 군 입경」.
63) 매일신보, 1922년 12월 8일, 「안창남 군 본사 방문」.
64) 매일신보, 1922년 12월 9일, 「안창남 군의 성대한 환영회」.
65) 매일신보, 1922년 12월 10일, 「총독 安氏 초대」.
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 107
사람이나 나에게 배우고 있고, 또 그 외에도 배우게 해 달라는 청년이 많
이 있습니다. 내 마음대로 될 수 있다든지 또 내 소유의 비행기가 따로
있다면 어디까지든지 내 힘껏 가르쳐 드리겠으나, 그리도 못하고 그네도
학비도 부족하고 학교에서도 용이히 허락지 아니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
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닙니다. …… 될 수만 있으면 그리 비싸지도 아
니한 것이니 비행기를 장만하여 조선에 비행학교나 안 되면 강습소라도
세우고 우리끼리 정답게 연구에 종사하고 싶습니다. ……
이번 비행으로 하여 우리 조선 사람도 ‘하면 된다!’, ‘하면 남보다 낫다!’
하는 신념을 두터이 하시고 또 전 민족적으로 이 일에 착수하실 한 동기
를 지어 주신다 하면 그보다 더 다행한 일이 없겠습니다.66)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은 3·1운동으로 획득한 ‘문화통치’하에 1920
년대 초부터 과학대중화운동이 조선인 언론을 필두로 제창되는 계기가
되었다.67) 특히 동아일보사는 이후로도 과학 대중화와 홍보에 앞장섰
다. 고국 방문 비행이 있던 날 동아일보 1면에는 다음과 같은 사설이
실렸다.68)
…… 安君의 今般 비행이 我 조선 청년·인사에게 ㊀新 轉機를 촉진케
하여야 할 점은 非他라, 제군 청년이 擧㊀致하여 필히 비행기를 조종하는
비행사가 되라 함이 아니다. 우리가 더 ㊀層 물질과학 방면에 연구의 用
意를 경주하여야 할 점이로다. 즉 일종의 ‘과학운동’이 발흥하기를 切願하
는 바이니, 모든 의미의 조선 문화의 계발에 前者의 과학운동이 결여하고
는 其後가 殆히 沙上의 누각에 불과할 것을 단언하는 바로다. ……
1922년 12월 10일 안창남 고국 방문 비행의 날 여의도에는 사이토 총독
을 비롯하여 각 관료, 경성부청 관계자, 신문·통신 기자, 은행·회사 주
빈과 학생 약 만 명 및 청년회원 등이 참석했다. 동아일보사는 ‘민족적으
66) 동아일보, 1922년 12월 10일, 「고국 동포에게 衷情을 訴하노라 : 안창남 수기」.
67) 현원복, 「일제하 과학운동의 새로운 이해」, 39~43쪽;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한
국과학기술30년사, 신광사, 1980, 53~56쪽.
68) 동아일보, 1922년 12월 10일, 「조선 文化史上으로 관찰한 안군의 비행」.
108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5집
로 응원’하며 ‘일반 과학에 관한 지식과 취미를 한 사람
이라도 더 많은 이에게 보급’한다는 목적으로 입장료를 받지 않고 안
창남의 비행을 무료로 일반에 공개했다. 약 5만 명의 군중이 붐비어, 임
시열차가 4회 동원되고 보통열차에 객차를 더 달며 전차 수효도 증가시
킬 정도였다. 군사령부에서는 비행을 응원하는 뜻으로 기념품을 증정
했다.69)
제1회 비행은 12월 10일 낮 12시경 노량진 여의도에서 거행되었다.70)
이날 12시 5분 여의도를 이륙한 안창남의 비행기는 서편을 향하여 가파
른 각도로 300m쯤 날아오르다가 북편으로 방향을 바꾸어 용산의 상공을
날아 북악산 상공으로 향했다. 남산을 돌고 창덕궁 상공으로 날아가 순
종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고 서울 시내 상공을 한 바퀴 돈 것이다.71) 제1
회 비행을 마친 안창남은 쉬었다가 오후에는 800~900m 상공에서 고등비
행을 보여 주었다. 2시 20분에 이륙한 그의 비행기는 모진 바람 속에서
도 橫轉·逆轉·旋回 비행 등을 해 냈다.72) 특히 제2회 비행 때에는 동
아일보사, 고국방문비행후원회, 안창남 명의로 공중에서 선전물을 1만
장 정도 3회에 걸쳐 뿌렸는데, 과학기술 발달에 힘쓰기 바란다는 내용이
었다.73)
…… 비행기의 발명, 항공술의 발달은 이제 세계 모든 인류의 생활을
근본적으로 변화케 하고 또 향상케 합니다.
이 문명의 進運, 利器의 발달에 선각하는 자는 흥하고 낙오하는 자는
69) 동아일보, 1922년 12월 9일, 「비행장은 일반에 공개」, 「기차 이용이 편의」; 동아일
보, 1922년 12월 10일, 「전차 증설」; 동아일보, 1922년 12월 11일, 「5만 관중의 환
호」, 「여의도에, 노량진에」; 매일신보, 1922년 12월 11일, 「快男兒 안창남 군의 筋
斗飛行」.
70) 매일신보, 1922년 12월 11일, 「서편을 향하여 이륙」.
71) 동아일보, 1922년 12월 11일, 「반도의 天空에 최초의 환희」; 尹鍾悳, (空中 勇士)
安昌男 飛行記, 33~34쪽.
72) 매일신보, 1922년 12월 11일, 「得意의 고등비행」.
73) 동아일보, 1922년 12월 11일, 「五彩 영롱한 紙花中의 묘기」; 尹鍾悳, (空中 勇士)
安昌男 飛行記, 35쪽.
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 109
망합니다. 조선 사람도 이 세계적 문명 회전 운동에 참가하여 우리의 生
榮을 保持할 도리를 강구하여야 할 것이 아닙니까.
발명과 창작에 독특한 천재를 발휘하여 인류사상에 대서특필할 幾多
의 기록을 끼친 우리의 祖先은 비행기의 발명에 있어서도 세계에 가장
앞섰던 일은 문헌이 昭證하는 바이라.74) 그러나 우리의 현재가 과연 어
떠합니까. 凋殘이 아니면 쇠퇴가 있을 뿐이올시다. 이 어찌 선인에 대한
罪過가 아니며 세계에 대한 수치가 아니오리까. 위대한 祖先의 피는 우
리의 혈관에 흐르나니 우리도 노력만 하면 往時의 영광을 重輝하여 인류
공동의 행복 증진에 큰 공헌을 기여할 수 있을 것이올시다.
우리는 이 뜻으로 고국 방문의 이번 비행을 실행하는 동시에 조선이
과학의 조선이 되고 아울러 다수한 비행가의 배출과 항공술의 신속한 발
달을 요망하여 마지아니합니다. ……75)
12월 13일 오후 3시 안창남은 다시 여의도 상공을 날아 서울 장안 상공
을 일주한 후 그 길로 인천으로 향하여 80리 거리를 돌파하고 약 15분 뒤
에 돌아왔다.76) 앞서 멀리 함흥에까지 안창남을 초청하자는 여론도 비등
했었다. 12월 6일 함흥 관민과 유지 수십 명은 함흥상업회의소에 모여 협
의한 결과 기부금 5,000원을 모집하여 안창남이 함흥에 오는 비용을 충당
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기후 관계로 함흥까지 비행이 가능할지 알 수 없
어, 먼저 평양에서 기상 및 항공 상황을 조사한 후에 안창남이 가능 여부
74) 조선시대에 비행기가 발명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임진왜란 일본 측 기록인 倭
史記에 진주병영 別軍官 鄭平九(1566~1624)가 ‘飛車’를 발명하여 1592년 임진왜란
때 진주성전투에서 사용했다고 쓰여 있다. 당시 조선군이 비거를 이용해 외부와
연락을 취하고 영남 孤城에 갇혀 있던 성주를 30리 밖으로 탈출시키는 등으로 일본
군은 작전상 곤욕을 치렀다고 한다. 국내 문헌에 비거가 등장하는 것은 18세기 후반
으로, 실학자 申景濬의 旅菴全書와 李圭景의 五洲衍文長箋散稿에 비거에 대한
기록이 있다(박재광, 「서양보다 300년 앞선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기 ‘비거’」, 과학
과 기술 40-12,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 2007, 36~39쪽). 오주연문장전산고 등
을 달리 해석하여 정평구가 아니라 明齋 尹拯의 후손 尹達圭(1778~1851)가 우리 역사
상 최초의 비거 발명자라는 주장도 있다(박성래, 「尹達圭의 飛車」, 역사문화연구
18, 한국외대 역사문화연구소, 2003, 1~3, 19~20쪽).
75) 동아일보, 1922년 12월 11일, 「공중에서 경성 시민에게 깊은 경의와 사의를 표합
니다」.
76) 매일신보, 1922년 12월 14일, 「안창남 군의 결행으로 京仁 왕복 대비행」.
11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5집
의사를 밝히기로 했다.77) 그러나 결국 안창남은 함흥에 가지 못했다.
초기 계획에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지는 거의 조선 전역에 걸쳐 있
었으나, 결국 서울 및 인천 정도로 축소되고 만다. 비행기 성능이 장기
비행이 안전하게 가능할 만큼 좋지 못했던 원인도 있겠지만, 일본정부나
총독부에서 처음의 입장과는 달리 고국 방문 비행이 확장되는 것을 제지
했을 가능성도 있다. 즉 고국 방문 비행이 식민지 조선인들에게 일제 통
치의 선전 효과보다 도리어 민족의식을 고양시키는 효과가 큰 것을 보고
비행이 연장되거나 확대되는 것을 막았을 수 있다.
고국 방문 비행을 마친 안창남은 아쉽게 다시 일본 도쿄로 돌아가게
되었다. 李鎭浩 등 유지들은 12월 22일 食道園에서 송별회를 개최해 주었
다.78) 그러나 결국 고국의 후원회에서는 안창남에게 비행기 한 대를 사
주지 못하였다. 안창남 후원회의 친일세력 등을 비롯하여 다양한 정치세
력들이 합심하기 어려웠을 것이고, 고국 방문 비행 후 일본정부나 총독
부의 태도 변화가 예상되는 것처럼 조선인 유지들도 안창남이 계속 활약
하는 것에 모두 그리 적극적이지만은 않았을 수 있다.
그러나 고국 방문 비행은 안창남 스스로도 조선인으로서 민족의식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개벽에는 다음과 같은 그의 기행문이
실렸는데,79) 특히 조선인으로서 독립문 옆 서대문형무소 수형인과 경복
궁·창덕궁의 조선 왕조에 대한 감회를 밝힌 것이 눈에 띈다.
…… 여기서 바로 또렷이 보이는 것은 慕華館 뒤 舞鶴재 고개와 그 앞
에 서 있는 독립문이었습니다. 독립문은 몹시도 쓸쓸해 보였고 무학재
고개에는 흰옷 입은 사람이 꼬물꼬물 올라가고 있는 것까지 보였습니다.
그냥 지나가기가 섭섭하여 비행기의 머리를 조금 틀어 독립문의 위까지
떠가서 한발 휘휘 돌았습니다. 독립문 위에 떴을 때 서대문 감옥에서도
자기네 머리 위에 뜬 것으로 보였을 것이지만, 갇혀 있는 형제의 몇 사람
77) 매일신보, 1922년 12월 10일, 「함흥에도 안군 비행?」.
78) 매일신보, 1922년 12월 24일, 「안창남 군 송별 잔치 성황」.
79) 안창남, 「공중에서 본 경성과 인천」, 개벽 31, 1923년 1월 1일.
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 111
이나 거기까지 찾아간 내 뜻과 내 몸을 보아주었을는지……. 붉은 높은
담 밖에서 보기에는 두렵고 흉하기만 한 이 감옥이 공중에서 내려다보기
에는 붉은 담에 에워싸인 빛 누런 마당에 햇빛만 혼자 비추고 있는 것이
어떻게 형용할 수 없이 한없이 쓸쓸하여 보일 뿐이었습니다. “어떻게나
지내십니까” 하고 공중에서라도 소리치고 싶었으나 어떻게 하는 수 없이
그냥 돌아섰습니다. ……
경복궁 넷 대궐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거무데데한 북악산 밑에 입 口字
처럼 둘러싼 담 안의 넓기나 넓은 넷 대궐은 우거진 잡초에 덮여 버린 집
같이 사람 하나도 보이지 않고 몹시도 한산하고 쓸쓸하여 보였습니다.
거기서 바로 창덕궁을 향하고 安洞 네거리 별궁 위 동아일보사 부근의
공중을 스쳐 모로 놓인 ㄱ字形으로 보이는 천도교당과 휘문의숙을 지나
검푸른 樹林 속에 지붕만 보이는 창덕궁의 위에서 한발 휘휘 돌아 공중
에서 경의를 표하였습니다. ……
뒷날을 기약하고 나는 돌아갑니다. 떨어지기 싫은 고국을 또 떠나서
나는 갑니다. ……
3) 관동대진재와 식민지 조선인으로서의 각성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이 있을 당시에도 ‘金剛號야’라는 곡이 만들어
졌고,80) 이후에 ‘쳐다보면 안창남이요, 내려다보면 嚴福童일세’라는 속요
가 조선 민중 사이에 널리 불리게 되었다.81) 조선 민중들이 처음으로 직
접 비행을 관람하여 인정해 준 조선인 비행가 안창남은 이후 일본에서
어떠한 활동을 이어나갔을까.
어디서든 청년 비행가로서 더욱 활약하기 바랐을 조선인들의 바람과
는 달리 오히려 갑자기 안창남이 사망하고 말았다는 유언비어가 먼저 조
선에 나돌았다. 안창남이 조선에 왔다 간 지 3개월 만인 1923년 3월 말,
80) 동아일보, 1922년 12월 10일, 「金剛號야(세레나데 곡), 辛香山 作」.
81) 매일신보, 1936년 1월 5일, 「현대 조선 元祖 이야기, 그것은 누가 시작하였던가?(3) : ‘내
려다보면 엄복동, 쳐다보면 안창남’」. ‘떴다 보아라 안창남의 비행기, 내려다보니 엄복동
의 자전거’라는 노래는 전래민요인 ‘청춘가’에 가사를 바꿔 붙인 노래로 일본인들 앞에서
는 함부로 부르지 못했다고 한다(한겨레신문사, 발굴 한국현대사 인물 1, 64쪽).
11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5집
그가 비행기 추락사나 암살을 당한 것 같다는 유언비어였다. 총독부는
안창남이 사망했는데 당국이 신문 보도를 금지한 것 아니냐는 말까지 있
으나 그런 일은 단연코 없다며 안심시켰다.82)
이로부터 3개월 후쯤 안창남의 생존 사실을 확실히 보여주는 그의 수
상 소식이 전해졌다. 1923년 6월 2~3일까지 일본에서 민간 비행가 경쟁대
회가 개최되어, 안창남은 지바현 요쓰카이도(四街道)-이바라키현(茨城
縣) 가스미가우라(霞浦)-사이타마현 도코로자와 간 三角 연속비행에서
2등을 차지하여 비행기 1대와 현금 2,000원을 수상했다. 자기 비행기 없
이 150마력 되는 다른 사람의 위험한 비행기를 빌려서 위험을 무릅쓰고
경쟁대회에 참가하여 기대 이상의 좋은 성적을 올린 것이었다.83) 그리고
그해 7월 4일 일본 항공국에서는 특별한 시험 없이 안창남에게 1등 비행
사 면허를 수여했다. 당시 일본에서 1등 비행사 면허증을 가진 사람이 총
7명밖에 되지 않았으니 큰 성과였다.84)
그런데 이렇게 전도가 촉망되던 비행가 안창남을 두고 다시 그의 사
망 보도가 전해졌다.85) 1923년 9월 관동대진재가 일어나, 1등 비행사란
명예를 얻고 도쿄 스사키 오구리비행장에서 명성이 자자하던 안창남
이 세상을 떠나 버렸다는 말에 조선인들은 참담함을 감출 수 없었
다.86) 그가 지난 7월경부터 병으로 도쿄의 병원에 입원해 치료받던 중
진재로 병원이 불에 타 사망했다는 것이다.87) 그렇지 않아도 관동대진
재로 무고하게 희생되던 조선인들이 많던 가운데 이 소식은 더욱 절망
적이었다.
82) 매일신보, 1923년 3월 20일, 「만리경」.
83) 매일신보, 1923년 6월 5일, 「삼각 비행에 제2위 안창남」; 신한민보, 1923년 7월
5일, 「비행가 안창남 씨는 비행 경기에 2등상」.
84) 동아일보, 1923년 7월 6일, 「안창남 씨」.
85) 매일신보, 1923년 9월 14일, 「안창남 군 사거」.
86) 매일신보, 1923년 9월 15일, 「진재 哀話 : 비행가의 참사, 안창남 청년의 흉보에 미
친 사람이 둘이 생겨」.
87) 매일신보, 1923년 9월 23일, 「安氏 燒死 확실」.
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 113
하지만 그의 부고는 며칠 후 다시 오보로 정정 보도된다. 안창남은 도
쿄 교바시구(京橋區)에 있는 이케다(池田)병원에 있다가, 진재 돌발 후
다행히 군마현(群馬縣)으로 피난했으며 9월 25일에 무사히 도쿄로 돌아
왔다.88) 안창남의 누나 安昌華(서울 수송동 거주)89)는 남편과 사별하고
서 동생 하나를 믿고 지내오던 터에 신문을 통해 그의 變死 소식을 듣고
하늘이 무너질 듯 슬퍼하다가, 안창남이 살아 있다는 경성일보의 보도
에 도항증명서만 나오면 곧 그를 보러 일본에 건너가겠다고 했다.90) 며
칠 후 안창남은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왔다. 10월 3일 밤 경성역에 도착했
는데, 사망 소식에 놀란 누이를 안심시키기 위해 귀국한 것이었다.91)
관동대진재 때 동포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하는 광경을 바라보며 안창남
본인은 비록 무사했지만 조선인에 대한 차별에 모멸감을 느끼고 참담함도
컸을 것이다. 어쩌면 일본에서 비행사로서 높이 올라갈수록 조선인으로서
그의 좌절감은 더 컸을지 모른다. 그러나 한편으로 고국 방문 비행 후 관동
대진재를 겪으며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안창남은 더욱 각성하고 있었다.92)
88) 매일신보, 1923년 9월 28일, 「진재 중에 흉보를 전하던 안창남 군 희소식」; 동아
일보, 1923년 10월 5일, 「안창남 씨 경험담」; 신한민보, 1923년 10월 25일, 「안창
남 씨가 부활」. 유기석은 관동대진재 때 조선인을 참살하던 폭도가 사방에서 안창
남을 찾았으나, 일본 친구 집에 숨어 화를 면했다고 증언했다(해외의 한국독립운
동사료(35) : 30년 방랑기, 유기석 회고록, 국가보훈처, 2010, 22~27, 113쪽).
89) 동아일보 기사를 비롯하여 윤종덕의 안창남 비행기에도 손위 누이(1897년생)의 존
재가 확인된다(동아일보, 1922년 11월 22일, 「空中의 人 안창남(1) : 彼의 생애는 如
何」; 尹鍾悳, (空中 勇士) 安昌男 飛行記, 11~12쪽). 형제로는 계모 소생의 남동생 하
나가 더 있었다고 하는데(동아일보, 1922년 11월 27일, 「空中 勇士 안창남(6) : 고국
방문은 宿望」), 제적등본상 확인되는 안창남의 혈육은 누이동생 안순이(安順伊, 장녀,
1912~?)와 남동생 안창수(安昌洙, 차남, 1916~1923)이다. 누나 안창화는 제적등본에서
확인할 수 없어, 안창남의 부친이 재혼할 때 등본에서 누락되지 않았는가 한다.
90) 매일신보, 1923년 9월 28일, 「愛弟의 吉報에 喜極淚」.
91) 매일신보, 1923년 10월 5일, 「雙頰에 帶笑하고 왕성한 원기로」.
92) 유기석은 안창남이 일본 비행대회에 참가하거나 관동대진재를 겪으면서, “일본 사회
곳곳에 나타난 민족 차별대우와 식민지 민중을 박해하는 야만행위 때문에 그는 점
차 조선 민중의 적이 누구인가를 인식하게 되었다. …… 그러므로 그의 머릿속에는
점차 민족의 자각성이 자라났으며, 그의 생활 속에서도 조국을 사랑하는 행동이 표
현되었다”고 했다(30년 방랑기 : 유기석 회고록, 112~113쪽).
11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5집
관동대진재로 교수로 있던 오구리비행학교가 全燒하여 활동할 곳을
찾아 전전하던 안창남은93) 처음에는 도쿄에 비행학교를 건립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이에 대하여 일본 체신성 항공국은 비행기 3대를 교부하
여 이토(伊藤)비행장에 맡겼다. 그런데 교사를 건축할 돈이 없어 경영비
를 마련하고자 백방으로 뛰어다녔는데, 우선 4,000원 정도라도 모이면 사
업에 착수할 예정이었다.94) 하지만 조선인으로서 일본 수도에 비행학교
를 설립하려던 계획은 결국 좌절되고 만다. 이후 그는 한동안 1등 비행사
임에도 적당한 직업을 찾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95) 1924년 하반기에야
그는 지바현 쓰다누마정 이토비행기연구소에서 傾斜비행을 연구하고 있
던 것으로 확인된다.96)
그런데 안창남은 이 해 9월 일본인 괴한으로부터 습격을 받게 된다. 이
미 안창남과 그의 동료 비행사가 上海 임시정부 요원과 왕래하며 비밀리
에 중국군에 가담하고자 협의하고 있다는 보도가 전해졌고,97) 吳佩孚의
直隸派에 참가하여 奉天軍에서 활약하려 한다 하여 안창남이 협박장을
받기도 했다.98) 1924년 9월 27일 저녁 8시 반경 지바현 쓰다누마정 이토
93) 관동대진재로 오구리비행학교가 燒失된 후 안창남은 가고시마현(鹿兒島縣) 소재 혼
다(本田)비행학교에서 교사로도 활약했다(淺田禮三, 航空殉職錄 : 民間編, 航空殉
職錄刊行會, 1936, 207쪽).
94) 매일신보, 1924년 3월 10일, 「안창남 씨가 東京에 비행학교 계획」.
95) 이 무렵 안창남은 비행대회에서 상품으로 받은 훈련비행기를 이용하여 회사의 광고
를 살포하거나, 때로 임시 영업으로 승객을 받아 도쿄 상공을 한 바퀴 비행하여 보
수를 받았다. 그런데 이때 동료 2등 조종사 謝文達은 중국 東北 張作霖 군벌에 속해
조종사를 하며 상당한 봉급을 받고 있었다. 어떤 사람은 만일 안창남이 1등 조종사
로서 장작림에게 가서 일한다면 더 높은 봉급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안창
남은 장작림이 친일세력이므로 그에 속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30년 방랑기 :
유기석 회고록, 113~115쪽).
96) 매일신보, 1924년 9월 1일, 「안창남 씨 경사비행 성공」; 시대일보, 1924년 9월 11
일, 「안창남 군 모험비행에 성공」; 신한민보, 1924년 10월 9일, 「모험비행가 안창남」.
97) 1924년 3월경 안창남이 비행사 李商泰와 함께 상해 임시정부 요원과 모의하고 있다는 전
보가 일본 경무국에 전해졌다(朝鮮新聞, 1924년 3월 19일, 「安飛行士が上海假政府へ」).
98) 이와 관련하여 안창남은 일본 國民新聞 기자가 이 무렵 일본인 비행사 야스오카(安
岡)가 중국군에 참전한 소식을 전해 듣고, 안창남이 直隸軍에 참가하여 활동하려 한
다고 잘못 기사를 쓴 것이라 말했다(조선일보, 1924년 9월 27일, 「비행가 안창남 씨
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 115
비행장 소속 1등 비행사 안창남과 2등 비행사 스즈키 기쿠오(鈴木菊雄)
가 근처 음식점에 있던 중, 돌연 세 명의 남자가 들어와 두 사람을 문밖
으로 불러내 중국 直隸軍에 가담하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며 短杖으로 난
타하고 스즈키 비행사의 손목을 찍고 도망갔다. 범인은 赤化防止團員 요
시다 도루(吉田貫)라는 인물로 밝혀졌는데, 다행히 안창남은 무사했다.99)
이로부터 한 달이 채 안 되어 안창남은 귀성길에 오른다. 그리고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 해 11월 제국비행협회에서 개최하는
비행대회에 참여하여 명예의 영관을 수여할 것으로 기대되던 안창남은
누이의 병을 위문한다는 명목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지바현을 떠나오는
길에 안창남은 10월 14일 가고시마(鹿兒島)에 도착했는데, 마침 10월 16
일 안창남의 제자인 혼다(本田稻作) 비행사가 가고시마 시외에 혼다비행
장을 개설해 개장식이 열려 여기에서 첫 비행을 선보이며 훌륭한 기술을
발휘했다. 이것이 일본에서 그의 마지막 비행이었다.100)
4. 중국에서의 항공독립운동
1) 중국 혁명운동을 통한 항일무장투쟁
고국 방문 비행을 마치고 관동대진재를 겪으며 안창남은 민족의식을
더욱 키워 나갔고, 이후 조선인 비행사로서 민족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중국 直隸派에 참가설」; 시대일보, 1924년 9월 27일, 「안창남 씨 중국 전선에 날
뜻」; 시대일보, 1924년 9월 30일, 「위협 받는 안창남」; 동아일보, 1924년 10월 19
일, 「위기일발 虎口를 탈출한 안창남 씨 귀국」; 시대일보, 1924년 10월 19일, 「협
박받던 내력과 광경 : 안창남은 귀경, 범인은 죄 잡혀」; 宋相燾, 騎驢隨筆, 314쪽).
99) 매일신보, 1924년 9월 30일, 「危禍를 면한 안 비행사」; 朝鮮新聞, 1924년 9월 30
일, 「危かった安昌男君」.
100) 매일신보, 1924년 10월 19일, 「안 비행사 昨朝에 귀성」.
11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5집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했다. 현실적인 항공독립운동 방략으로 중국으로
의 망명을 선택한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들과 접촉하고, 중국군에
속하여 중국 혁명운동에 참여하면서 北伐 참전을 통한 항일무장투쟁, 군
사 훈련과 비행사 교육에 매진했다. 또한 직접 독립운동단체를 조직하여
독립군 양성을 위한 비행학교 등 무관학교 설립 시도와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하였다.
1925년 2월 중순 안창남이 중국 상해에 있다는 소식이 조선에 전해졌다.
안창남이 돌연히 상해의 프랑스 조계에 나타난 것이다. 거기에서 약 1주일
간 상해 임시정부의 수뇌들과 만나서 무언가를 획책하고 다시 어디론가
종적을 감추어 버렸다는 정보가 상해일본총영사관으로부터 경무국에 도달
하여, 조선총독부는 해외 각지에 연락을 취해 경계령을 내린 상태였다.101)
안창남이 일본에서 서울로 돌아온 후 누이의 집에 머물다가 그 후 자취를
감추고 상해로 건너간 것에 대해 당국은 매우 주목하고 있었다.102)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각종 군사운동을 추진하는 가운데 중국 및
미국 등지에서 비행대를 설립하기 위한 시도를 하며, 비행기를 군사와
선전에 이용할 것을 구상하고 있었다. 1920년 임정의 육군무관학교 개교
에 이어, 이 해 임시의정원에서 국무총리 이동휘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시정방침」을 통해 비행기대 편성 계획을 수립하고 공군력 건설의 가능성
을 초기부터 열어 놓았다. 특히 임시정부 내무총장 安昌浩는 제1차 세계
대전기 비행기의 활용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장차 비행기가 독립전쟁
수행과 선전 활동에 중요한 역할을 할 것으로 예측하며 비행기 구입과
한인 비행사 양성에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103) 항공독립운동의 목적하에
안창남과 임시정부와의 만남은 필연적이었다. 1924년 12월경 중국으로
건너갈 때 안창남은 비밀리에 임시정부의 교통사무국 역할을 수행하던
101) 동아일보, 1925년 2월 17일, 「안창남 씨 상해에」; 신한민보, 1925년 3월 26일, 「안창남 씨 상해에」.
102) 매일신보, 1925년 2월 24일, 「안 비행사 상해 잠행설」.
103) 홍선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공군 건설 계획과 추진」, 군사 97, 국방부 군사편찬
연구소, 2015, 181~185쪽; 한국항공우주학회, 한국항공우주과학기술사, 1987, 22쪽.
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 117
안동현 소재 怡隆洋行의 도움을 받아, 大連과 상해를 경유했다. 이때 안
창남은 ‘安虎’라는 異名을 사용했다.104) 중국에 망명하여 새롭게 활동을
도모하려는 의지를 표명한 것이다.
안창남은 상해에 도착한 후 呂運亨의 소개를 받아 중국 군벌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독립군 비행사 양성을 모색하게 된다. 여운형은 임시정부 개
조파에 섰다가 한인 독립운동에 대한 지원 입장을 표명하고 있던 孫文의
권유로 국민당에 가입하여 중국 혁명운동을 통한 한국독립운동을 구상
하고 있었다. 한편 당시 중국은 남북전쟁으로 남방 直隸 군벌 吳佩孚105)
군이 북방 奉天의 張作霖 군을 山海關으로 몰아 위기일발의 시기를 맞고
있었는데, 처음에 안창남은 여운형의 인도로 오패부 군에 참가하기로 했
었다. 그러나 당시 오패부가 장작림과 함께 몰락하는 때라고 판단하여
비교적 세력이 튼튼한 군대에 가입하고자 계획을 수정한다. 여운형의 소
개로 안창남은 1925년 남방 국민혁명군 측 郭松齡 군벌의 초빙을 받아 육
군 中將 비행사로서 맹렬히 활동했다.106) 그러다가 北京의 馮玉祥 군이
오패부에 협력하다 반동을 일으켜 남방군의 북진이 일시 수포로 돌아가
게 되자, 안창남은 다시 고국에 돌아와 李商在의 지도를 받았다. 이후 다
시 중국 廣東으로 갔으나, 남방의 전세가 유리하지 못하여 동지 金東轍
과 같이 상해에 기항했다. 하지만 상해 거류 조선인들 간 파벌 관계로 운
동이 진전되지 못하는 것을 보고, 북경에 가서 청년회관에 체류하며 ‘조
선청년동맹’107)에 가입해 활동했다.108)
104) 동아일보, 1930년 4월 12일, 「조선 창공의 최초 용사 안창남 씨의 訃電」.
105) 吳佩孚는 北洋軍閥派 直隸派의 총수로, 1920~1926년까지 영국의 지원을 받아 활동
했다. 한국독립운동과 관련해서는 洛陽 군벌 오패부의 洛陽講武學校에 다수의 한
인이 입교했다(장화, 「일제 침략기 한국인의 중국 군관학교 교육과 그 의의」, 통일
인문학 54, 건국대 인문학연구원, 2012, 232쪽).
106) 「共産黨員ノ狀況」(朝鮮總督府 警務局, 1926년 3월), 日本外務省特殊調査文書 40,
국가보훈처, 2012, 470~471쪽.
107) ‘조선청년동맹’의 단체 성격이나 안창남의 구체적인 활동 사실은 사료에서 확인되
지 않는다. 혹시 1924년 4월 서울에서 사회주의 계열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민족주
의 청년단체가 동참해 결성된 연합단체 朝鮮靑年總同盟과 관계있지는 않은가 한다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10, 1009~1012쪽).
118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5집
당시 중국 관내에 있던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은 대체로 국민당 국민혁
명군의 이념에 동조하고 있었는데, 이는 국민혁명군의 反제국주의 기치
에 대한 신뢰였다. 奉天派에 잠시 가담했던 풍옥상109) 군벌도 이후 국민
혁명군에 합류하는데,110) 1925년 10월 초 안창남은 다시 여운형의 추천으
로 풍옥상 군으로 거처를 옮긴다.111) 그해 12월 정보를 보면, 안창남·閔
成基112) 등이 풍옥상 군에 가담하여 북경과 河北省 張家口 사이를 왕복
하며 활약하고 있었다.113) 안창남을 동경하며 일본에 유학했던 대표적인
비행가들이 이제 그의 뒤를 따라 중국으로 건너가 중국군 및 항일무장투
쟁에 참여하고 있다는 소식은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안창남은 1920년대
108) 조선일보, 1930년 4월 12일, 「조선이 낳은 천재 비행가 안창남 씨 추락 참사」; 宋
相燾, 騎驢隨筆, 314쪽.
109) 馮玉祥(1882~1948)은 민주화를 지향하며 처음에는 段祺瑞의 安福派에 속했다가 뒤
에 直隸派에 가담한 인물로, 1922년 奉直戰爭(일본의 지원을 받는 張作霖의 奉天派
와 영국의 지원을 받는 曹錕·吳佩孚 등의 직예파 사이에 1922년과 1924년 두 차례
에 걸쳐 발발)에 참가하고 陝西·河南都督을 역임했다. 그러나 1924년 제2차 봉직
전쟁 때 반기를 들어 봉천파와 손을 잡아 직예파의 조곤을 몰아내고 북경을 점령하
여 전 청나라 황제 溥儀를 추방했으며, 국민군 제1군사령 겸 전군총사령이 되어
세력을 떨쳤다. 하지만 곧 봉천파와도 불화가 생겨, 1925년부터 反帝·반군벌 민중
운동의 영향으로 11월에 장작림을 타도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1926년 모스크바에
갔다가 돌아와 국민당에 입당하고, 서북국민연합군 총사령으로서 북벌에 협력했
다. 1928년 봉천군을 몰아내고 국민당 중앙집행위원이 되었으나 蔣介石과는 시종
이해가 대립했으며, 1930년 反蔣운동을 펴다 실패하여 제명되었다.
110) 김기둥 외, 「최용덕의 항공독립운동과 광복군 내 역할」, 439~438쪽.
111) 「上海在留鮮人情況 : 上海佛租界憲兵隊 10月 月報」(1925년 10월), 不逞團關係雜件
: 鮮人의 部, 在上海地方(6), 日本 外務省; 「印刷物送付ニ關スル件」(朝鮮總督府 警
務局長, 1926년 3월 23일), 不逞團關係雜件 : 鮮人의 部, 在上海地方(6).
112) 閔成基(1894~미상)는 英親王 李垠의 外從弟이며 명성황후의 친정 손자이자 李王職
長 李載克의 외손이다.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한 후 보성전문학교를 다니다가, 1925
년 1월 일본의 第㊀航空學校에 입학하여 그해 11월 3등 비행사 자격을 취득했다.
조선에 돌아온 후, 중국 河南으로 갔다가 북경으로 옮겨 吳佩孚 군에 들어갔다.
1932년 6월경 南京 國民政府 航空所에서 근무했고, 南京軍官學校에서 교관으로 활
동했다(매일신보, 1925년 2월 28일, 「第㊀航空學校에 문제의 조선 청년」; 동아일
보, 1925년 11월 15일, 「2인의 신진 비행사」; 매일신보, 1926년 5월 21일, 「支那
動亂에 활약하는 조선인 비행가의 소식」; 朝鮮總督府, 國外ニ於ケル容疑朝鮮人名
簿, 1934, 244쪽).
113) 매일신보, 1925년 12월 5일, 「조선인 비행사가 馮軍에 가담」; 신한민보, 1925년
12월 31일, 「遠東 소식」.
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 119
중반부터 조선인 비행사들이 중국군에 참여하여 군사력을 증강하고 항
일전쟁에 참전하는 등 중국 혁명운동을 통한 항공독립운동 방략을 추구
하는 데 길잡이 역할을 하고 있었다.
1926년에 안창남은 다시 여운형의 도움을 받아 山西省 군벌 閻錫山114)
군에 합류했다.115) 1926년 1월 초 산서성이 관할하는 산서성항공대의 비행
학교 교관으로 초빙된 것인데,116) 당시 산서성항공대에는 독일인과 중국
인 비행사 각 1명과 안창남까지 총 3명의 비행교관이 있었다.117) 안창남은
太原의 비행대에서 그의 제자가 된 柳基石118)과 함께 활동을 계속했다.119)
이즈음 중국 국민당 군에서 활동하는 조선인 비행가는 안창남·민성기
외에도 徐曰甫, 崔用德, 李英茂, 여류 비행가 權基玉 등 34명이나 되었
다.120) 한편 1927년 5월 현재 일본 항공국 비행사시험에서 합격한 조선인
은 전부 13명으로, 1등 비행사 安昌男·張德昌, 2등 비행사 李商泰, 3등
114) 閻錫山(1883~1960)은 1909년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1911년 신해혁명에 참
가했으며, 1912~1927년 山西軍政長官·山西省長을 역임했다. 그 후 山西省 太原府
를 거점으로 ‘山西 먼로주의’를 표방하며 독립왕국을 형성했다. 1930년 馮玉祥·李
宗仁 등 국민당 내의 異質分子와 결탁하여 蔣介石에 반대하는 북경정권을 수립했
으나 실패로 끝났다. 조선인 민족운동과 관련해서는 1927년 朴容萬이 염석산 등의
원조를 받는 군사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이후 1929년 그 자금 모집을 위해 申德
永·崔養玉·金正連·李容華 등이 공명단사건을 일으켰다(한애라, 「박용만의 중국
과 러시아에서의 민족운동」, 상명대 대학원 석사논문, 2015, 6, 64~65, 70쪽).
115) 별건곤 38, 1931년 3월 1일, 「안창남 군은 참말 살아 있는가」.
116) 안창남이 태원에 오면서 이곳에 항공학교가 생겼고, 안창남은 이 학교를 통해 수많
은 항공기술 인력을 훈련시켰다(해외의 한국독립운동사료(32) : 중국편(7) 李慈海
自傳, 국가보훈처, 2007, 41쪽).
117) 조선일보, 1926년 1월 13일, 「山西省 항공대로 간 安 비행사 최근 소식」.
118) 중국에서 아나키즘운동을 주도하던 柳基石은 1926년 북경에서 安定根의 소개로 비
행사 안창남을 만나 태원에 있는 염석산의 산서항공부대에 입대했다. 유기석은 통
역을 맡으며 비행기술을 배우고자 했으며, 동시에 당시 북경에서 창간된 고려청년
편집에 沈茹秋(沈容海)와 깊이 관여하기도 했다. 유기석이 太原에 머문 기간은 1년
이 채 되지 않는데, 1927년 안창호의 길림행을 수행하기 위해 북경으로 돌아갔다
(30년 방랑기 : 유기석 회고록, 22~27, 111쪽).
119) 매일신보, 1926년 5월 21일, 「支那 동란에 활약하는 조선인 비행가의 소식」; 시
대일보, 1926년 5월 21일, 「중국 동란을 중심으로 出沒 自在의 조선 비행가」.
120) 동아일보, 1926년 5월 21일, 「중국 창공에 조선의 鵬翼」; 신한민보, 1926년 6월
24일, 「중국에 한인 비행가」; 朝鮮總督府, 北京在留朝鮮人の槪況, 1927, 338쪽.
12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5집
비행사 閔成基·金治玕·鄭再燮·權泰用·朴敬元·姜愚陽·徐雄成·
愼鏞頊·李昌均·李壽福이었다.121) 여기에 빠진 3등 비행사 姜世基·李
貞喜까지 합하면 당시 조선인 비행사는 총 15인이었는데,122) 그중 상당
수가 중국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1930년대 말까지 일본의 민간 비행학
교를 졸업한 후 중국군에서 활동하며 항일무장투쟁을 한 조선인 조종사
들로는 안창남·민성기 외 田相國123)·金鍊器(金練器)124)·金治玕125)·
鄭再燮126)·權泰用 등이 있었다.127)
1928년 10월경 안창남은 남경의 국민혁명군과 연합하여 북벌 및 항일
121) 동아일보, 1927년 5월 10일, 「조선인 비행사 합하여 13명」.
122) 동아일보, 1926년 9월 24일, 「淑明 출신의 新 비행가 이정희 양의 모험」; 동아일
보, 1927년 12월 14일, 「조선비행사구락부를 창립」; 동아일보, 1928년 4월 20일, 「所澤에서 연습 중 강 비행사 참화」.
123) 田相國(1907~1938)은 다치카와(立川) 일본비행학교를 졸업하고, 1931년 2등 비행기
조종사로서 중국 공군에 입대하여 항일활동을 전개했으며, 1936년에는 民族革命黨
員이 되어 독립투사들의 항일운동을 지원했다. 1938년 중일전쟁 때 南京政府 육군
少佐로서 飛行大隊長으로 복무하면서 楊子江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던 중 전사하
여, 1990년 건국훈장 애국장에 추서되었다(동아일보, 1929년 11월 13일, 「2등 비
행가 전상국 씨 입경」; 「中國軍官學校ニ入學セントスル不良靑年檢擧ニ關スル件」
(京城鍾路警察署長, 1936년 6월), 警察情報 寫 : 副本, 昭和11年; 「昭和十㊀年八月
十五日附在上海北村內務書記官發信萓場警保局長宛報告摘錄 : 重ナル不逞鮮人ノ調
査」(在上海內務書記官, 1936년 8월 15일), (日本外務省)特殊調査文書 27, 318쪽; 「전상국」, 독립유공자 공훈록, 국가보훈처).
124) 金鍊器는 1927년 6월 도쿄 다치카와 일본비행학교에 입학하여 1928년 7월 졸업하고
1929년 2등 비행사 면허를 취득했다. 중국으로 망명하여 1930년 국민정부 軍政部
항공 제1대 少校 飛機師로 활동했으며, 1932년 4월경 항공 제1대 中佐로 승격되었
다. 의열단원으로 활동하며 항공학교 생도 모집과 연락을 담당하기도 했으며, 상해
에서 중일전쟁에 참전했다(김연기, 「중국 비행학교 지원하는 고국 청년에게」, 三
千里, 1932년 12월; 帝國飛行協會, 航空年鑑, 1930, 487쪽; 이윤식, 「항공독립운동
가(23) 싸울 때마다 용기를 내어 앞장서다 : 김연기·전상국·김은제」, 매거진 공
감, 대한민국공군, 2014).
125) 金治玕은 1924년 9월 이토(伊藤)비행기제작소를 졸업하고 3등 비행기 조종사가 되
었다(帝國飛行協會, 航空年鑑, 1930, 451쪽).
126) 鄭再燮은 1925년 11월 第㊀航空學校를 졸업하고 3등 비행기 조종사가 되었다(帝國
飛行協會, 航空年鑑, 1930, 451쪽).
127) 朝鮮總督府 警務部, 「飛行學校在學朝鮮人臺灣人調査ニ關スル件」(鮮高秘 第1199
號), 警視廳情報, 1938~1939, 18~22쪽; 이윤식, 비행기로 민심을 격발하고 장래
국내의 대폭발을 일으키기 위함이라, 민미디어, 2003, 37쪽.
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 121
무장투쟁 중이던 염석산 군대에서 항공군 제2대 사령관으로 소부대를 지
휘하며, 하북성 石家庄·保定에서의 전쟁에서 큰 공적을 남기고 있었다.
직접 비행기를 타고 공중에서 敵軍(奉天派 등)의 진중에 포탄을 투하하
여 혼란시키거나, 군정을 샅샅이 조사해 총사령부로 보고하여 10만의 군
사로 적군 30만을 방어하는 등의 공을 세웠다. 이로써 염석산 군중에서
안창남은 小將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128)
2) 대한독립공명단 조직과 항공독립운동
중국군에서 비행대 소장이자 항공독립운동가로서 안창남의 지위와 자
금력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안창남은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
하여 주축이 되어 비행학교 등 무관학교 설립과 군사 양성을 계획했고,
공명단을 통해 상당한 독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공명단은 중국에서 암
살 및 파괴 등 적극적인 항일무력투쟁을 벌인 의열단이 1920년대 말부터
민족주의 급진파를 표방하는 단체로 변모해 가던 때 한편에서 의열투쟁
의 대미를 장식했다.
즉 안창남과 관련하여 세간을 떠들썩하게 한 독립운동 사건이 바로 공
명단의 의거였다.129) 1929년 4월에 벌어진 이 ‘자동차 습격 강탈단’ 사건
의 내막은 이러했다.130) 4월 18일 오후에 돌연 서울-춘천 간 1등도로의
128) 신한민보, 1928년 10월 18일, 「산서 태원 10일」.
129)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7, 1976, 674~683쪽.
130) 동아일보, 1929년 4월 18일, 「범인 계통은 상해 공명단」; 중외일보, 1929년 4월
19일, 「楊州街道 麻石嶺에 白晝 권총단 출현」; 매일신보, 1929년 4월 20일, 「3명의
권총 든 청년 突現 자동차 2대 습격 강탈」; 동아일보, 1929년 4월 21일, 「수십 명
상대 범행」; 조선일보, 1929년 4월 21일 호외, 「자동차 습격하고 독립만세 고창」;
매일신보, 1929년 4월 22일, 「자동차 습격 강탈단 3명 전부 체포」; 동아일보,
1929년 4월 22일, 「세상을 震駭케 한 권총단」; 삼천리 7, 1930년 7월 1일, 「공명단
과 신문 호외戰」; 별건곤 73, 1934년 6월 1일, 「공명단 사건 활동 裏面記」; 「독립
군 자금 모집 10 : 공명단 군자금 모집 사건」,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1, 국사
편찬위원회, 2000; 「판결문」(경성지방법원, 1929년 12월 13일), 독립운동사자료집
11,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6, 806쪽.
122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5집
險地이던 양주군 和道面 摩石隅里 고개에 3인조 권총단이 나타났다. 이
들은 4월 20일 아침 춘천으로 가는 경성우편국 우편자동차를 비롯해 자
동차 세 대를 습격하여 승객과 우편물에서 현금을 챙겼다. 이들은 상해
에서 온 공명단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독립군 자금을 조달하고자 한
다며 ‘대한 독립 만세’를 함께 부르게 한 후 자동차까지 탈취해 타고서 서
울로 향했다. 서울과 경기도 경찰의 필사적인 수사로 4월 21일 새벽까지
범인이 모두 잡혔는데, 崔養玉131)·金正連132)·李善九133)가 그들이었다.
최양옥은 申德永의 연락을 받고 1928년 4월경 만주로 건너간 후 북경에
서 의열단에 가입하여 활동한 바 있었고, 이후 상해로 가 ‘安革命’이 조직
한 결사적 직접 행동기관인 대한독립공명단에 그해 음력 9월 입당하여
단장 안혁명의 명령으로 독립운동 군자금 모집 사명을 띠고 1929년 1월
조선에 들어온 것이었다. 김정련·이선구와 공모하여 서울로 들어왔는
데, 중간에 다시 濟南에 가서 안창남으로부터 600원의 현금을 얻어 天津
을 들렀다가 거기에서 관헌에게 행동 不審者로 체포되어 각각 1주일씩
구류를 당했다. 이후 4월 7일 안동현으로 와서 시기를 엿보다가 신의주
131) 崔養玉(1893~1983)은 1919년 3·1운동 때 횡성군에서 천도교인들과 합세하여 만세시
위에 참여했고, 만주에 가서 이동녕·박은식에게서 군자금 모집 지령을 받고 서울로
와 1920년 7월 申德永의 집에서 扶韓靑年團을 조직했다. 신덕영 등과 같이 대구·광
주·담양·곡성 등 남부지방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여 상해 임시정부로 보내다가 체
포되어 1921년 5월 광주지방법원에서 7년 징역형을 받고 1926년 말 출옥했다(「申德
永 등 판결문」(광주지방법원, 1921년 5월 31일); 「申德永 등 판결문」(대구복심법원,
1921년 12월 13일); 중외일보, 1929년 5월 10일, 「최양옥 入京과 거사 경로」).
132) 金正連(1895~1968)은 평양 숭실전문학교 재학 시 황해 황주군 및 평남 대동군에서
항일독립운동 연설을 하다 경찰에 체포되어 평양감옥에 구금되었다. 졸업 후 숭덕
소학교와 숭실중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중 3·1운동이 일어나자 만세시위에 참가했
다가 체포되어 태형을 받았다. 이후 전남 광주 숭일중학교 교사로 있다가 1919년
8월 항일 연설을 해서 제령 위반으로 8개월 징역에 2년 6월의 집행유예 언도를 받
았다. 1920년 10월 부한청년단원 신덕영·최양옥 등과 함께 大同團員 全協과 연락
하면서 전남 각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다가 체포되었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
었다. 이후 중국으로 망명하여 활동하던 중 일제 밀정에 체포되어 천진감옥에서 2
년 6월간 옥고를 치르고 1927년 출옥했다.
133) 李善九(1902~미상)는 신의주부청에서 자동차 운전수로 일하다 최양옥을 만났다. 이
후 공명단에 가입하여 국경 비밀단원으로 있었다(「경찰신문조서 : 이선구 신문조서」
(경기도경찰부, 1929년 4월 21일),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1).
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 123
로 건너와 잠입한 것이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이름이 ‘안혁명’이다. 공명단 단장 안혁명이 누구인가
에 대해서는 몇 가지 추측이 있다. 당시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에는
상해 공명단장 이름이 安華命, 安革命으로 나오고, 안중근의 再從弟(6촌
아우)라고 했다.134) 그런데 공명단 군자금 모집 사건 당시 경찰과 검사
調書를 보면, 안혁명은 본적을 황해 송화군에 두었으며, 1912년경 미국
하와이에 있었고, 1929년 사건 당시에는 약 50세였다고 진술되어 있다.
한편 안혁명과 별도로 공명단에 자금 600원을 지원했다는 비행사 안창남
도 등장한다.135) 따라서 안혁명이 안창호를 의미하는 듯하여 공명단원들
이 그를 명예단장처럼 생각했을 수 있으나, 안창호가 1913년 미국에서 흥
사단을 조직하고 그 단원들이 상해 등지에 와서 활동한 사실은 있지만
1912년에 공명단을 조직했던 일은 없으므로 신문조서 등의 기록은 사실
을 속여 말한 것으로 보인다고 해석되었다.136)
이때 조서에 허위 진술이 기록된 것으로 본다면 안혁명 또는 안화명
은 안창남의 이명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인다. 공명단은 안창남의 근거
지였던 산서성 태원에서 결성되었고 이 일대를 중심으로 무관학교 설립
이 추진되는데, 공명단 간부 중 안창남의 나이가 비록 어린 편이었으나
염석산 군 항공부대 소장의 지위와 비행사로서의 오랜 경력이 인정되었
을 것이다. 또한 안창남의 독립운동 자금력과, 공명단장 성씨가 특별히
安氏였던 점 등을 고려하면, 그가 공명단 조직과 활동에서 주도적이었
고 영향력이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137) 훗날 최양옥은 “중국 산서성 태
134) 동아일보, 1929년 4월 25일, 「안중근 再從弟로 각국에서 독립운동」; 조선일보,
1929년 4월 25일, 「중국 지부장 安革命은 안중근의 再從弟」; 朝鮮出版警察月報 9,
1929년 5월 21일, 「出版警察槪況 : 不許可差押及削除出版物記事要旨」.
135) 「공판조서」(경성지방법원, 1929년 12월 6일),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1.
136) 조규태, 「대한독립공명단의 조직과 활동」, 101쪽.
137) 앞서도 공명단장 안혁명을 안창남으로 추정하는 연구가 있었는데, 공명단의 주요 사업
이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 및 비행사 양성 등 군사적인 독립운동론을 표방한 점, 국내
에 잠입한 최양옥의 활동 자금을 안창남이 주었다는 점, 부원 중에 안창남의 항공학교
제자들이 다수였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홍윤정, 「독립운동과 비행사 양성」, 32쪽).
12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5집
원에 가서 안창남·신덕영 諸氏와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했다고 회고
한 바 있는데, 신덕영이 부단장이었으므로 단장은 안창남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138)
비밀결사 대한독립공명단은 ‘조선을 일본제국 羈絆에서 이탈시킬 목적
으로’ 1928년 7~11월경 안창남을 비롯하여 신덕영·최양옥·김정련·李
容華139) 등 민족주의 계열에서 조직했다.140) 공명단은 남·북만주에 있
던 정의부·신민부·참의부 등 직접행동파와 상해·광동 등지에 근거를
둔 의열단원 등이 共鳴하여 조직한 것으로 보인다.141) 1926년부터 중국
관내에서 ‘한국유일독립당 촉성회’가 조직되는 등 민족유일당 설립운동
이 전개되던 것에 고무되었으리라 짐작된다. 공명단은 정치부·군사부·
재정부로 구성되어 주로 독립운동 자금 모집 활동을 했는데, 군자금을
모집하여 중국에 무관학교를 설치해서 조선인을 다수 교육시키고 군대
를 양성하여 함경도와 평안도 지방으로 국내 진공 작전을 벌일 것을 구
상했다. 이 일환으로 1927년에는 안창남을 중심으로 북만주 黑龍江省의
토지 수백여 만 평을 구입하여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비행
학교 설립을 계획했다. 이에 풍옥상·염석산의 후원을 받기로 되어 있었
138) 「최양옥 수기원고」, 독립기념관 소장, 3쪽.
139) 공명단의 최양옥과 김정련은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신덕영은 1962년 독립장, 이
용화는 1990년 애국장, 이선구는 1991년 애국장에 추서되었다.
140) 공명단은 3·1운동 직후 만들어진 大同團 조선지부의 申德永계 조직에서 유래되었
다. 즉 공명단에서 활동한 신덕영·최양옥·김정련은 바로 대동단 신덕영계의 구성
원이었다. 1928년 음력 6~9월경 중국 태원에 거주하고 있던 신덕영·최양옥·안창
남 등은 공명단을 조직한다. 당시 신덕영은 39세, 최양옥은 36세, 안창남은 28세였
으므로 연령으로 신덕영이 가장 많았고, 신덕영은 최양옥·안창남에 비해 독립운
동 경력도 앞섰으므로 신덕영이 부단장으로서 공명단의 실질적 책임자였을 가능성
이 있다(조규태, 「대한독립공명단의 조직과 활동」, 89~91, 100~102쪽). 한편 공명단
본부는 미국 하와이에 있었으며 1912년경 조직되었는데, 1928년 봄에 상해 프랑스
조계 三馬路에 공명단 동양지부를 두고 단의 간부 전부가 상해로 이주한 것이었다
고도 한다(동아일보, 1929년 4월 24일, 「上海에는 지부 성립, 공명단 본부는 布哇」;
조선일보, 1929년 4월 24일, 「공명단 본부는 米領 布哇에 두고」; 「경찰신문조서 :
김정련 신문조서」(경기도경찰부, 1929년 5월 1일), 한민족독립운동사자료집 41).
141) 조선일보, 1929년 4월 20일, 「의열단의 일파? 공명단의 정체」; 독립운동사편찬위
원회, 독립운동사 4, 1972, 442쪽.
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 125
으며,142) 학교 설립 기금 모집과 연락을 위해 서울에 공명당 지부를 설
치할 목적으로 최양옥·김정련을 이선구 등과 더불어 조선에 잠입시킨
것이었다.143)
공명단 의거 이후144) 안창남은 산서성 태원 비행학교의 교장으로서
다수의 청년을 지도했다. 그러나 그 후 그와 관련하여 일반에 전해진 소
식은 공교롭게도 부고가 전부였다.145) 염석산의 부하로 산서성 군 항공
중장, 태원 산서항공학교 교관의 요직을 맡아 60여 명의 중국인 연습생
들을 교수하던 안창남은 1930년 4월 2일146) 순국했다.147) 태원부 天地壇
산서항공학교 앞에서 비행 훈련을 하던 중 기체 고장으로 돌연히 비행
기가 추락한 것이다. 누나 안창화는 안창남의 혼사를 위해 1929년 가을
142) 공명단은 馮玉祥의 지원을 받아 30만 원을 들여 사관학교를 南京, 北京, 만주 부근
세 곳에 설치할 계획이 있었다(동아일보, 1929년 6월 1일, 「30만 원 경비로 士官
校 설립」). 공명단은 독립을 도모하는 데 蔣介石·閻錫山 등에게도 원조를 받고, 국
내 유지로부터 지원을 받아 약 150만 원의 자금을 마련하여 무관학교를 세우고 청
년 장교를 교육시켜 5개 사단 7만 5,000여 명의 병사를 양성하고자 했다. 군인이 양
성되면 4만 명의 병력을 함경북도, 3만 5,000여 명의 병력을 평안북도로 침입시켜
일본과의 전면전을 일으키고, 독립군이 중국·소련 지역으로 도피하여 일본군이
추적하게 함으로써 일본과 중·소와의 전쟁을 유도하려고 했다. 이에 호응하여 국
내에서 독립만세시위를 일으키면 자연히 독립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 보았다(조규
태, 「대한독립공명단의 조직과 활동」, 104쪽).
143) 동아일보, 1929년 4월 20일, 「의열단·정의부 등 직접행동파로 조직」; 동아일보,
1929년 6월 1일, 「30만 원 경비로 士官校 설립」; 동아일보, 1929년 12월 7일, 「公訴
의 사실」; 思想月報 1-5, 1931년 8월 15일, 「朝鮮治安維持法違反調査(2) : その3」,
454쪽;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운동사 6, 1975, 350쪽; 日本外務省特殊調査
文書 17, 525쪽; 김영범, 한국독립운동의 역사(26) : 의열투쟁(1), 270쪽.
144) 공명단은 안창남이 1930년 사망하고, 신덕영도 1932년 하얼빈에서 일본경찰에 체포
되어 옥고를 치르면서 1930년대 초에 와해되고 말았다(조규태, 「대한독립공명단의
조직과 활동」, 112쪽).
145) 조선일보, 1930년 4월 12일, 「조선이 낳은 천재 비행가 안창남 씨 추락 참사」.
146) 안창남의 사망 일자를 두고 조선일보에서는 1930년 4월 8일 추락사했다고 하고,
1930년 4월 9일 사망했다는 기록도 있으나(淺田禮三, 航空殉職錄 : 民間編, 207쪽; 국
방부 공군본부, 공군창설전기록(기사) 공군관련자료, 1950, 12쪽), 제적등본 및 중
외일보에 따르면 안창남은 1930년 4월 2일 오후 4시 중화민국 산서성 산서학교 앞에
서 사망했다(중외일보, 1930년 4월 20일, 「안창남 씨 死因은 飛機 엔진의 고장」).
147) 매일신보, 1930년 4월 12일, 「空界의 寵兒 안창남 군 객사」; 동아일보, 1930년
4월 12일, 「조선 창공의 최초 용사 안창남 씨의 訃電」; 宋相燾, 騎驢隨筆, 314쪽.
12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5집
중국으로 건너가서 태원에 같이 있었는데, 사망 소식을 듣고 중국으로
출발한 친구 김동철과 함께 그의 사체를 운반하여 조선의 고국산천에
매장할 예정이었다.148) 그러나 결국 안창남의 시신은 고국으로 돌아오
지 못했다.149)
5. 맺음말
일제강점기 안창남은 비행사로서 식민지 조선 민중의 영웅이 되어 민
족의식을 고양시켰다.150) 안창남이 한국 최초의 비행사로 알려졌던 것이
자료가 발굴되면서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지만, 그가 암울하던 식민
지기에 조선 민족에게 주었던 자부심과 용기 등 희망적 영향력은 결코
무시될 수 없을 것이다. 그는 여전히 한반도 상공을 최초로 날았던 한인
비행사로 남아 있으며, 안창남의 비행을 통해 한인 비행사의 존재와 더
불어 비행기, 날개 등 생소했던 단어들이 많은 식민지 청년들에게 꿈과
동력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안창남은 억압된 식민지 현실을 비상하고 싶
148) 조선일보, 1930년 4월 12일, 「조선이 낳은 천재 비행가 안창남 씨 추락 참사」. 한
편 안창남은 18세에 혼인하고 21세쯤 이혼했는데 자녀는 없었다(동아일보, 1922
년 11월 26일, 「空中 勇士 안창남(5) : 千載의 好機會」; 동아일보, 1922년 11월 27
일, 「空中 勇士 안창남(6) : 고국 방문은 宿望」; 신한민보, 1930년 5월 15일, 「안창
남 씨 불행 장서」).
149) 19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태원에서 안창남의 묘와 비석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석
에는 ‘중화민국 제3집단군 항공학교 특별비행교관 安君昌男之墓’라고 쓰여 있었는
데, 염석산이 안창남의 누나와 나란히 묘를 써 주었다고 한다(동아일보, 1965년
4월 20일, 「異域 하늘에 진 鳥人 안창남 씨 중국 태원에 묻혀」). 그러나 이제 그의
무덤은 봉분도 없이 사라졌다(한국방송, 「떳다 보아라 안창남 : 창공에 펼친 조선
독립의 꿈」, 역사스페셜 57, 2011년 1월 27일).
150) 해방 후 1949년 9월 15일 대한민국 최초의 航空日을 기념하여 육군항공사령부 주최
로 독립영화사에서 항공영화 ‘안창남 비행사’를 제작·개봉했다. ‘3·1운동 직후 전
동양을 진동시킨 경이적 천재요, 애국심에 불타는 혁명가’가 ‘反日帝 전선에 勇躍,
탈출하기까지’ 안창남의 일대기가 그려졌다(한성일보, 1949년 9월 4일, 「안창남
비행사 항공영화 완성」; 민주중보, 1949년 11월 3일, 「광고 : 안창남 비행사」).
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 127
은 조선인들의 표상이었다.
안창남은 1920년 8월 일본 오구리비행학교에 입학하여 6개월 만에 졸
업하고, 이 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1921년 8월 일본에서 3등 비행사 면허
를 받는데, 일본에서도 일본인 다음 두 번째,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비행기 조종사 면허증을 취득한 것이었다. 직후 안창남은 조선에 돌아와
고국 방문 비행 계획과 조선에 비행학교를 설립하고 싶다는 포부를 밝혔
다. 안창남은 1922년 6월 2등 비행사 면허증을 받고, 비로소 고국 방문 비
행 실현에 나선다.
마침내 1922년 12월 10일부터 13일까지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이 서
울과 인천 등지에서 거행되었다. 일본 항공국, 조선총독부, 용산 주둔 조
선군사령부, 평양항공대 등을 중심으로 일제는 식민 통치 미화의 차원에
서 내지에서 선진적으로 비행 기술을 습득한 식민지 조선인 안창남의 고
국 방문 비행을 적극 지원했다. 일본의 항공 정책 실현과 군사 기술 향상
에 대해 홍보하고, 1920년대부터 시작한 과학보급화운동의 일환으로 식
민지에의 선전 효과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재조일본인들도 나서 안창남
을 환영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안창남은 선진 비행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조선인들을 대표하
여 동포들의 민족적 후원을 바라며 고국 방문 비행에 나섰다. 조선 민중
에게 안창남은 현대 과학기술을 숙련하여 ‘애족적 열정’으로 조선 상공을
조선인 최초로 비행함으로써 ‘조선 민족의 문화생활에 신기원’을 이룬 존
재로 의미 부여되었다. 政派를 떠나서 또 범종교적으로 많은 조선인 유
지들도 그를 후원하고 나섰다.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은 식민지 조선
인들이 주체가 된 과학대중화운동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일제가 청년
안창남을 근대 과학 물질문명의 선두주자로 그리며 식민지 조선인들을
계몽시키려 했다면, 동시에 조선인들은 민족적 자부심으로써 그를 환대
했다. 한 마디로 동상이몽이었다.
고국 방문 비행은 순수했던 조선인 청년 안창남이 스스로도 더욱 민족
의식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안창남은 1923년 6월 일본의 민간
128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5집
비행가 경쟁대회에서 수상하고 그해 7월 특별한 시험 없이 일본 항공국
에서 1등 비행사 면허를 수여받았다. 하지만 1923년 9월 관동대진재 때
동포들이 무참하게 학살당하는 광경을 바라보며, 본인은 비록 무사했지
만 조선인에 대한 차별에 모멸감을 느끼고 참담함도 컸을 것이다. 어쩌
면 일본에서 비행사로서 높이 올라갈수록 조선인으로서 그의 좌절감은
더 컸을지도 모른다. 고국 방문 비행 이후 관동대진재를 겪으며 식민지
조선인으로서 안창남은 더욱 각성하게 되고, 이 무렵부터 조선인 비행
사로서 민족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하기 시작
했다.
1924년 12월경 이륭양행의 도움을 받아 중국으로 망명한 안창남은 현
실적인 항공독립운동의 방략으로 상해의 임시정부 요원들과 접촉했다.
당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각종 군사운동을 추진하는 가운데 중국 및 미
국 등지에서 비행대를 설립하기 위한 시도를 하며, 한인 비행사를 양성
하여 비행기를 군사와 선전에 이용할 것을 구상하고 있었다. 또한 1925년
부터 안창남은 중국 군벌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독립군 비행사 양성을 모
색했다. 당시 임시정부 개조파에 섰다가 국민당에 가입하여 중국 혁명운
동을 통한 한국독립운동을 구상하던 여운형의 소개로 남방 혁명 군벌 곽
송령 군의 육군 중장으로 활동했다. 이후 또 여운형의 추천으로 북경의
풍옥상 군에 가담하는데, 여기서 국민혁명군의 反제국주의 이념에 동조
하며 반일항쟁에 참여했다.
그러다가 안창남은 다시 여운형의 도움을 받아 1926년 산서성의 염석
산 군에 참가하여 항공사령관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이 무렵 염석산 군
은 남경 국민정부의 국민혁명군과 연합하여 북벌 및 항일무장투쟁에 참
여하고 있었다. 산서성항공대에서 비행대 소장이자 조선인 항공독립운동
가로서 안창남의 지위와 자금력은 상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1928
년 말 안창남은 주축이 되어 민족주의 계열의 신덕영 등과 대한독립공명
단을 조직하여, 직접 600여 원의 자금을 지원해 최양옥·김정련·이선구
를 국내에 파견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고자 했다. 당시 공명단은
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 129
▪ 투고일 : 2016. 6. 30 / 심사완료일 : 2016. 7. 30 / 게재확정일 : 2016. 8. 17
▪ 주제어 : 안창남, 비행사, 항공독립운동, 대한독립공명단, 대한민국임시정부, 항
일무장투쟁, 의열투쟁, 여운형, 풍옥상, 염석산
중국 관내 민족유일당 설립운동에 영향을 받아 결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비행학교 등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조선인을 교육시키고 독립군을 양성
해서 국내 진공 작전을 전개할 것을 구상한 직접행동파로 1920년대 말 의
열투쟁의 대미를 장식했다.
한편 주목할 것은 안창남처럼 일본에 유학했던 전상국, 민성기, 김연기
등 조선인 비행사들이 1920년대 중반부터 줄줄이 그의 뒤를 따라 중국군
및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한 사실이다. 안창남은 조선인 비행사들이 중국
군에 참여하여 군사력을 증강하고 항일전쟁에 참전하는 등 중국 혁명운
동을 통한 한국독립운동 방략을 추구하는 데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안
창남은 1930년 4월 산서성 군 항공중장으로서 산서항공학교 비행 연습
도중 추락사로 안타깝게 순국했으나, 그의 항공독립운동 정신은 중국에
서 다른 조선인 비행사들을 통해 이어졌다. 안창남의 계보를 이은 조선
인 항공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추적하여 정리하는 것은 차
후의 과제로 남긴다.
13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5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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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 133
❂ 국문요약
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
최 은 진
일제강점기 안창남(1901~1930)은 비행사로서 식민지 조선 민중의 영웅
이 되어 민족의식을 고양시켰다. 안창남은 억압된 식민지 현실을 비상하
고 싶은 조선인들의 표상이었다. 암울하던 식민지기에 그는 조선 민족에
게 분명 자부심과 용기 등 희망적 영향력을 주었다.
일본정부, 조선총독부, 조선군사령부 등은 식민 통치 미화의 차원에서
내지에서 선진적으로 비행 기술을 습득한 식민지 조선인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을 적극 지원했다. 항공 정책 실현과 군사 기술 향상에 대해 홍
보하고, 1920년대부터 시작한 과학보급화운동의 일환으로 식민지에의 선
전 효과를 기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창남은 선진 비행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조선인을 대표하여
동포들의 민족적 후원을 바라며 고국 방문 비행에 나섰다. 조선 민중에
게 안창남은 현대 과학기술을 숙련하여 ‘애족적 열정’으로 조선 상공을
조선인 최초로 비행함으로써 ‘조선 민족의 문화생활에 신기원’을 이룬 존
재로 의미 부여되었다. 안창남의 고국 방문 비행은 식민지 조선인들이
주체가 된 과학대중화운동의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고국 방문 비행은 순수했던 조선인 청년 안창남 스스로도 민족의식을
자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더욱이 관동대진재를 겪으며 식민지 조선인으
로서 안창남은 더 각성하게 되어, 이 무렵부터 조선인 비행사로서 민족
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모색했다.
이륭양행의 도움을 받아 중국으로 망명한 안창남은 현실적인 항공독
립운동 방략으로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 요원들과 접촉했다. 그리고 중
134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5집
국 군벌에 들어가 중국 혁명운동에 참여하여 본격적으로 독립군 비행사
양성을 모색했다. 여운형의 소개로 안창남은 남방 혁명 군벌 곽송령 군
육군 중장으로 활동했고, 다시 여운형의 추천으로 북경의 풍옥상 군에
가담하여 국민혁명군의 反제국주의 이념에 동조하며 항일전쟁에 참전했
다. 그러다가 다시 여운형의 안내로 산서성의 염석산 군에 속하여 항공
사령관으로서 국민혁명군과 함께 북벌 및 항일무장투쟁에 참가했다.
산서성항공대에서 비행대 소장이자 조선인 항공독립운동가로서 안창
남의 지위와 자금력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안창남은 민족주
의 계열의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하여 주축이 되어 비행학교 등 무관학
교 설립과 군사 양성을 계획했고, 독립군의 국내 진입을 위해 상당한 독
립운동 자금을 지원했다. 공명단은 1920년대 말 의열투쟁의 대미를 장식
했다.
안창남처럼 일본에 유학했던 조선인 비행사들 수 명은 1920년대 중반
부터 줄줄이 그의 뒤를 따라 중국군 및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했다. 안창
남은 산서성 군 항공중장으로서 산서항공학교 비행 연습 도중 추락사로
안타깝게 순국했으나, 그의 항공독립운동 정신은 중국에서 다른 조선인
비행사들을 통해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 135
❂ 영문요약
An, Chang-nam’s Avi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Japanese Colonial Era
Choi, Eun-jin
In the Japanese Colonial Era, An, Chang-nam(1901-1930), who was a pilot,
became a folk hero of the colonial Korea and inspired national
consciousness. An, Chang-nam was the embodiment of Koreans who wanted
to soar from the oppressed colonial reality. He gave a hopeful influence
such as pride and courage to the Korean people in the gloomy colonial era.
The Japanese government,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nd the Japanese Korean Army actively supported An Chang-nam’s flight
visiting homeland to glorify colonial rule because he was a colonial Korean
man who acquired the advanced flight technique in Japan. They wanted to
publicize the actualization of their aviation policy and the military’s technical
improvement and expected a propaganda effect in the colony as a part of
the new science dissemination movement which was started in the 1920s.
An Chang-nam had a flight back home, however, hoping for national
support of his compatriots, on behalf of Koreans who wanted to learn the
advanced flight technique. The Korean people gave a meaning to An
Chang-nam, as an existence of ‘making an epoch in civilized life of the
Korean people’ by acquiring skills in modern technology and being the first
Korean man to fly over the Korean peninsula with patriotic ardor. An
Chang-nam’s flight visiting homeland was also the starting point of the
autonomous science popularization movement made by the colonial Koreans.
136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5집
The homecoming flight served as a momentum to awaken An Chang-nam,
the pure Korean young man himself, to national consciousness. Moreover,
going through the Great Kanto Earthquake, An Chang-nam became more
aware of national consciousness as a colonial Korean man. He sought
specific ways to devote himself to his people as a Korean pilot since then.
An Chang-nam crossed into China for realistic strategies of the avi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and made contact with the agents of the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in Shanghai. He went into
Chinese warlords to participate in the revolutionary movement, earnestly
seeking to train pilots in the army for the national independence. Lyuh,
Woon-hyung introduced him to join the Feng Yuxiang’s army in Beijing, and
he entered the anti-Japanese war on the National Revolutionary Army side of
Chinese Kuomintang, sympathizing with its anti-imperialism ideology. Then
he belonged to the Yan Xishan’s army in Shanxi province under the
guidance of Lyuh, Woon-hyung again and took part in Northern Expeditions
and the anti-Japanese armed struggle as an air force commander with the
National Revolutionary Army.
As the major general of Shanxi’s Air Force and a Korean fighter for the
avi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it seems that An Chang-nam had
considerable authority and financial firepower. Especially, An Chang-nam
organized the Korean Independence Resonance Party affiliated with
nationalism, playing a key role in planning to establish military schools like
a flight school and to train the military and supporting considerable
independence movement funds for its entry operations to Korea. The Korean
Independence Resonance Party decorated the grand finale of the heroic
struggle in the late 1920s.
From the mid-1920s, a number of Korean pilots who studied in Japan
joined the Chinese army and participated in the anti-Japanese armed struggle
일제강점기 안창남의 항공독립운동 137
after An Chang-nam. As the lieutenant general of Shanxi’s Air Force, he
unfortunately died in a plane crash during practice flight at flight school of
Shanxi’s Air Force, but his spirit led other Korean pilots in China into the
avi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Key Words : An, Chang-nam, pilot, aviational independence movement,
Korean Independence Resonance Party, Provisional Government
of the Republic of Korea, anti-Japanese armed struggle,
heroic struggle, Lyuh, Woon-hyung, Feng Yuxiang, Yan
Xishan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