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때 부터는 본격적으로 모심기 철과 가을 거둠때는 아예 일주일 학교에 가지 않았습니다.
누가 시킨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스스로 자립자력갱생 교육을 저절로 그렇게 배우면서 자랐습니다.
한창 동무들과 웃고 떠들며 자랄때 나는 국민학교 저학년 어린나이에 학교에서 돌아오면 당연히 집안일을 거들고 지게지고 산에 띨감 나무하러 가고..... 그때는 죽을맛이였지만... 이제 지난날을 되돌아 보니 아름다운 추억과 살아가는데 좋은 피와 살이된 산 공부를 한것 같습니다.
집안에 오래내려온 전통은 올곳게 사람을 소중하게 살아가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서 크고 자란것 같습니다.
가난해서 우리먹을것이 쌀을 보탠다고 무우밥.국수.죽을 밥먹듯 끼니를 때우다 보니 한동안 죽과 국수는 질리고 물려서 한동안 보기도 싫었습니다.
그러나 거지가 동냥을 얻으러오면 우리 먹을것도 모자랐지만 성큼 덜어서 정성껏 주시던 어머니 모습이 60여년이 지난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손님 지나가는 과객이 오면 담넘어 울넘어 이웃집에 반찬을 구해서 정성껏 장만해 대접하고 없는 살림에 갈때 여비를 주시고
손님이 먹다남은 음식내밑에 여동생과 서로 먹을려고 지금도 그얘기를 하고 웃고 합니다.
선조들은 이성계쿠테타에 반기를든 두문동 70현인의 한분이십니다.
숙종때 남인천거로 갈암 이현(자 )일 (자) 할배가 이조판서로 잠시 조정에 나가 노론의 영수 우암 송시열에게 사약을 내리게 해서 죽게 한것을 마지막으로 그뒤 300년간 이조가 망한 고종때까지 중앙정계진출은 노론세력들의 괘씸제인 연좌제에 걸려서 벼슬길은 영영 담을쌓고 민초들과 동고동락 풍찬노숙을 함께 하면서 .....
집안 대대로 오랫동안 내려오는 봉제사 접빈객의.가풍과 맞물려
나의.자녀 교육은 가난한 집안살림에 어쩔수 없이 저절로 이루어 진것 같습니다. 자립자급 자력갱생 교육 은 이념과 철학이 따로 없이 그냥 너 스스로 알아서 하라는.... 지배와 간섭이 없이 자주적으로 ....
아예 돈이 없으니 학원에 안보내고 상근예비역 나온 아들을 현역 특수부대로 군에 보내고 100일 휴가나온 4일중 이틀은 힘든 논매기일 시키고 대학때도 스스로.로 학비를 마련하는 것도 산공부이기에 공사장.식당에 일하고 휴학을 하면서 학교를 다녔습니다. 국비로 유학도 다녀와서 삼성에 다니다 안맞아 그만두고 지금은 공기업에 다니지만 ....
앞으로 꿈이 농촌에서 자연속에 누구의 지배나 간섭없이 본인이 하고 싶은것 하면서 살고 싶다고 합니다.
딸도 32인데 건축기술사로 하고싶은 일 하면서 둘다 제 앞가림은 하니 내가 더이상은 도와줄 필요가 없습니다.
내가 쓰다 남은 재산은 자식보다 더 어려운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도 더이상 자식에게 짐이 안되고. 자식도 부모재산을 넘보지 않기로 그리고 내재산은 내가 갑자기 죽어도 자식들이 일체 손을대지 못하도록 변호사 공증을...
내가 너무 심하게 자립자급 자력갱생 교육을 했는지 한땐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는 생각도 했다지만 .... 지금은 아버지를 세상에서 가장 존경 하며 아버지 자녀교육이 어려운 세상을 사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내가 특별히 교육철학을 가지고 한것은 아니고 부모와 자식이 다함께 사는 길은 이길밖에 없는 것 같아서 어쩌다 보니....
부모의 잘못된 자식사랑과 교육으로 스스로 자립자급 자력갱생 을 하지못해 늙은부모 곁에서 맴도는것을 옆에서흔히 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