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善)이란 무엇입니까?”
“너와나 우리를 포함한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선입니다.”
“그럼, 무생물도 포함됩니까?”
“물론이지요.”
고개를 들어 상대방의 얼굴을 바라본다.
평범한 모습이다.
몇 마디 물음에 흥이 나는지 어려운 문자를 써가며 열심히 무언가를 설명하는데 영 알아들을 수가 없어 금방 지루해진다. 상대방이 알아듣지도 못하는 수많은 내용을 욕심 많게 계속 설명하느라 시간이 많이 흘러간다.
움직이지 않고 계속 서 있으니 허리가 불편해 발바닥을 들어 약간 옆으로 옮기는데 상대는 가려는 것으로 생각했던지 몇 발짝 내 곁으로 다가오며 반야봉의 산신령도 원하면 보여 줄 수 있다고 말에 힘을 실어보낸다.
가지 않는다는 확신을 하고선 낮은 목소리로
“가재마을이 명당 중의 명당입니다.”
“처음 듣는 말입니다.”
“백두대간의 기가 마지막 지리산을 만나기 전에 용트림을 한다 할까요. 지축으로부터 흘러드는 기(氣)가 대간을 따라 폭 140m 깊이 200m에서 흐르는 것은 알지요?”
“.........”
생면부지 처음 보는 이에게 자기 가치를 인정받고자 알아들을 수 없는 말 만 하는 이 사람은 누구인가?
나뭇잎이 오그라들 듯 서기 2001년도 달력 한 장만 남기고 저물어 가는 12월 초순..........남원에서 24번 도로를 따라 운봉 방향으로 올라가다 구불구불한 여원재를 오르는데 혼란스럽다. 버스와 승용차에서 내린 사람들이 아래에서부터 많이 있어서이다. 여원재는 분명 고개이름이니 이곳에서 가장 높은 곳이 재가 되겠는데 사람들이 아래쪽에 모여 있어 그곳이 재가 아닌가 의문을 품으며 그냥 지나쳤다.
도로의 커브 길에 굴곡의 여유가 있는 터에는 어김없이 포장마차가 들어서 있는데 굴뚝으로 희뿌연 연기가 피어오른다. 두세 번 몸 쏠림을 경험하니 세워둔 돌에 여원치(女院峙)라는 글자를 음각하여 높이 세워두었다. 차에서 내려 사진을 찍고는 지형을 살피니 산길이 없을 것 같다. 왼편으로 발걸음을 떼어보니 ‘여원정(女院亭)’이라는 정자가 초겨울 햇살을 받아 몸을 데우고 있는 중이었다. 남원과 운봉의 민풍(民風)이 인문적이며 예술적이라 높은 곳에 있는 정자도 지역성과 잘 어울린 느낌이다.
어느 산이건 슬픈 전설을 간직하지 않은 산이 없겠지만 남원과 운봉을 잇는 전설 속의 여인이 지키는 고개, 여원재(女院峙)다.
여원치에는 고려시대 이전부터 일반 여행객을 위하여 여원치에 '여원'이란 원(여관)을 설치하였다. 여관 건물을 원우(院宇)라 하였는데 이곳 여원 터에는 지금도 암벽에 마애여래상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원우는 사원(寺院)을 개조 혹은 전환한 것으로 짐작된다.
고려시대에 이르러 우왕 6년(1380) 황산대첩시 안개가 자욱한 이 곳 여원치에서 이성계장군이 행군 도중 백발이 성성한 노파로부터 전승(戰勝)의 날짜와 전략을 계시 받았다 한다. 전설에 의하면 그 노파는 당시 경남 함양 지방의 미모 단정한 주부였는데 왜장 아지발도가 그녀를 희롱하며 젖가슴에 손을 대니 칼로 왼쪽 젖가슴을 베어 자결한 원신(怨神)이었다 한다. 후에 이성계는 이 백발 노파가 필시 산신령이라 여기고 이를 기리기 위해 노파를 만났던 고개의 석벽에 여상(女像)을 새기고 그 위에 산신각을 지어 보존케 하였다. 따라서 지리산 산신령은 보통 여자로 알려져 있고 이러한 산신령이 사는 곳을 여원(女院)이라 불렀다. 그리하여 지리산 산신령이 사는 이곳을 여원치(여원고개)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
(인터넷 자료에서)
다시 시동을 걸어 고갯마루에 올라가니 커다란 바위에 '주지사'를 알리는 안내판이 있는 곳에서 시멘트 길로 작은 길이 오른편으로 갈라져 있었다. 도로 맞은 편에는 가옥도 있고 버스 정류장도 있는 곳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곳이 백두대간이 지나는 곳이었다.
이곳에 틀림없이 수정봉으로 오르는 등산로가 있을 거라 단정하고 시멘트 길로 들어선다. 가축을 키우는 곳인지 축사로 보이는 큰 건물이 있는 곳에서 시멘트포장은 끝나고 맨땅이 드러난다. 더 이상 승용차는 안 되겠다 싶어 적당한 곳에 차를 쑤셔 박는다.
빨리 산으로 오르려는 생각에 챙길 것과 확인할 것을 게을리 하고, 주위를 살펴보아 산길을 찾으니 길 양편으로 리본이 수 없이 붙어 있었다. 아-하 이곳이 백두대간이란 곳이지........산 높이는 얼마 안되지만 워낙 유명한 백두대간이란 곳이라 길이 선명하고, 그리고 약간이라도 애매한 곳에서는 리본이 무당집을 알리는 표시처럼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이 얼굴을 내밀고 있다.
작은 소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진 곳으로 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곳이 백두대간이 아니라면 벌써 길은 흔적도 없어졌을 것이라고 생각하며 오늘은 길 찾기의 어려움은 없을 것으로 생각하니 마음이 편하다.
임도를 만나 몇 분 따라 오르다 다시 산길로 접어든다. 동네 뒷산의 분위기가 잘 묻어나며 여전히 소나무 숲길이다. 이삼십 분쯤 올랐을 때 바지 뒷호주머니가 허전하다. 산행을 하면서 항상 이때쯤이면 몸에 땀이 약간 베이면서 뒷주머니에 넣어둔 지갑이 있는 부분이 땀이 더 많이 차서 불편했었다. 지갑을 꺼내 배낭 속으로 옮겼던 습관에 익숙해져 있어 손으로 엉덩이를 만져보니 허전하다. 기억을 되새김질 해보니 고속도로 톨게이트로 나오면서 바지에서 지갑을 꺼내고 자동차 앞좌석에 던져둔 채 산행 출발하면서 확인을 안하고 그대로 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순간 또 야무지게 일 처리를 못한 내 자신에게 실망을 하고는 다시 되돌아가느냐로 몇 초간 갈등을 하다 그냥 올라가기로 마음을 정한다. 서두름이 또 문제가 되었지만 시골사람들과 산꾼들의 마음을 믿기에..........누구 꼭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돈은 얼마 안되지만 가져가시되 통행료 1500원만 남겨두고 가져가 주세요.....꾸벅.
계속 이어진 소나무 숲길로 얼마 안가서 첫 번째 봉우리가 나온다. 왼편으로도 곁능선이 있는데 희미한 길 흔적만 있고 대간 길은 아래에서처럼 많은 수의 리본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다. 나무의 키가 적은 곳에서는 잠간씩 시야가 트이는 데 남원의 이백면과 운봉평야가 서북능선 아래 아늑하게 펼쳐져 있었다. 남쪽의 저편으로는 수정봉이 우뚝 솟아있다. 솟아있는 모양이 콘형으로 왕산에서 필봉산을 바라보았던 모습과 참 닮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적당히 솔잎으로 쿠션을 만들어 놓은 내리막길은 바지 주머니에 양손을 찔러 넣고도 여유 롭게 내려갈 수 있어 편하고도 쉬운 길이다.
조용하다.
지구가 자전을 멈춘 듯한 고요의 한 가운데서 미물이 꼼지락거리듯 발길을 반복하여 움직여 본다.
큰산에서는 내리막을 만나면 부담스럽다. 다시 또 올라가야 하기에.......그러나 이곳은 눈높이로 보아도 수정봉의 고도가 얼마 안 되는 곳이어서 즐기면서 내려간다.
한껏 고도를 숙이는 곳은 ‘입망치’로 사거리 갈림길이 뚜렷한 곳이다. 대간을 가로지르는 길은 폭이 넓은 큰길이었다. 왼쪽으로는 마을 집도 가까이 보이고 전봇대도 있는 것이 사람들이 살고 있음을 알려주고, 오른편은 소나무만 서있는 숲 속이었다.
등산로 옆으로 서있는 소나무가 조금전과는 다르게 키가 훨씬 커 보인다. 이곳도 여전히 소나무만 있고 다른 나무는 키우지 않는 듯 단순한 오르막이다. 그러나 정신세계의 무릉도원을 걷는다는 생각에 지루하거나 지겹지가 않다. 솔 향내를 더욱 더 흠뻑 맡을 수 있는 감각이 생겨나길 바래본다. 수정봉을 얼마 안 남기고 돌 틈을 끼어가야 하는 곳도 있었고 잔돌이 쌓여있는 작은 너덜지대도 통과한다.
산이 아무리 낮고 이름 없는 육산이라도 그것이 하나의 산인 이상 그곳에는 산이 되게끔 받쳐주는 바위가 서있고, 그것을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수많은 나무들이 자라기 마련이다.
수정봉
정상은 희한하게도 각이 진 나무막대를 철사로 고정시켜 정상표시를 해 두었다. 건축자재 블록도 몇 개가 있어 앉아 쉬었던 흔적이 뚜렷하다. 정상에서 조망하니 지리산 서북능의 선이 부드럽게 다가온다. 덕두산, 바래봉, 세동치, 세걸산, 팔랑치, 큰 고리봉이 정령치에서 고개를 숙이고 그 오른쪽으로 만복대가 홀로 황량하게 다가오는 겨울을 맞고 있다. 어느 봉우리 하나도 뺄 수 없을 정도로 전체적인 조화가 잘 되어 있었다.
안타깝게도 지리산의 주능은 안 보인다. 육모정 방향으로 낮은 산군들이 포개어져 어둠의 옅고 짙음으로 늘어서 있는데 그 쪽의 봉우리 이름은 아는 게 없다.
이제부터 관심은 가재마을로 가다가 능선의 갈림에서 육모정으로 길이 있는가를 찾아보고 길이 있으면 육모정으로 가보는 것이다. 육모정 곁능선까지는 고도차가 적기 때문에 쉬운 길이었으며 도중에 대간 종주중인 세 사람을 만났다. 연배가 지긋해 보이는 팀이었는데 종주에 어찌나 진지하게 임하던지 말 붙이기도 어려웠다.
지형을 살피며 육모정으로 뻗은 능선이 시작된 곳에서 걸음을 멈추고 오른편을 찾아보니 길이 잘 안 보인다. 파란색의 움막이 한 채있고 남원 뚜벅이의 리본이 선구자임을 일러주듯 육모정 방향이라는 글을 달고 있었다. 부근을 샅샅이 뒤져보아도 길은 찾을 수 없었다.
일단 가재마을을 내려가 보고 다시 올라 올 때 판단하기로 하고 마을로 내려간다.
동네 집들이 훤히 보이는 마을 뒤에서, 배낭도 매지 않고 나무지팡이와 작은 페트병에 물을 한 손에 들고 있는 털모자를 쓴 사람이 가재마을을 배경으로 서북능선을 찍고 있는 나를 뒤에서 바라보며 기다리고 있었다.
“등산객이 아니지요?”
산길을 경쟁하듯 걷지 않고 한가롭게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고하는 말 인 듯 했다.
“아니오. 지리산을 좋아하는 등산객입니다.”
“나는 도인(道人)입니다.”
물어 보지도 않았는데 자기소개를 먼저 하는 서두름에 낯설어
“예?”
“도(道)를 닦는 도인이지요.”
스스럼없이 도를 닦는다는 이 사람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상상하는 - 흰머리가 길게 늘어지고 수염이 많은 외양을 갖춘 - 도사가 아니었다. 그런 선입견이 자리잡고 있었던지 처음에는 별로 흥미가 없어 주촌리와 청소년 수련원을 보면서 확인하는 것에 더 신경을 쓰며, 나뭇가지가 비켜준 틈새로 본 덕산 저수지의 물이 붕어의 비늘처럼 반짝거린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광주에서 왔습니까?”
“혹시 교직에 있습니까?”
라고 묻는 말이 도인이라는 본인 소개보다는 가벼운 바람에도 흔들릴 수밖에 없는 내마음에 흥미를 불러오기에 훨씬 효과적이었다.
관심을 보이자 도를 설명하느라 그는 장황하게 말을 잇는다. 얼굴을 돌리며 내가 제대로 듣고 있는지 자주 확인을 하며 은근히 부담을 주는 강의가 어느새 시작되었다.
설명들은 것을 이해하지 못해 다 옮기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 때론 섬세한 속살을 보이며 선문답이 계속되었다. 특별히 바쁠 것도 없어 자리를 뜨지 않고 한 시간 가량이나 듣고 있자니 발도 저리고 허리가 아프다. 몸도 추워 계속해서 듣고 싶은 의욕을 잃었기 때문에 나의 길로 가고 싶어 분위기를 바꾸어 보려고
“어디로 가는 중입니까?”
“산으로 가서 기를 수련하지요.”
지식과 도를 찾으러 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많다 하는데 호기심이 발동된다.
“그럼 수정봉으로 가는 길입니까?”
“수정봉은 아니고 아마 내려오면서 파란 움막을 혹시 못 봤어요?”
“아-. 그거요. 마을 사람들이 설치해 놓은 어떤 시설물로 생각했는데......”
그곳으로 올라가면서 더 얘기를 해주겠다고 한다.
‘도인이 현재 걸어가고 있는 내면의 세계는 대체 어떠한 것일까?’어차피 그곳으로 다시 가야하기 때문에 더 들어볼 욕심으로 같이 올라가게 되었다.
허황되고 믿기지 않은 내용을 쏟아내는 이야기를 듣느라 텐트를 보완하여 만든 움막에 금방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가려다 갑자기 빠져서는 안될 중요한 것이 생각난 듯이 뒤로 돌아선다. 집으로 들어 갈 때는 반드시 지구공전 방향과 같은 반시계 방향으로 돌아서 들어가야 한다면서 움막을 오른쪽으로 한 바퀴 돌고서 속으로 들어갔다. 따라서 하는 것이 예의 일 것 같아 똑같이 따라 한다. 까다로운 절차를 치르고 들어온 내부는 생각보다는 커 보였고 아늑했다.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사방을 끈으로 여러 군데를 묶어놓은 곳이다.
안에서 잠시 팽팽한 긴장이 감돈다.
배낭을 풀어 도시락을 꺼내 같이 먹자고 하니 기색이 별로 안 좋은 눈치다.
“설명이 끝나면 그 때 드시지요.”
“밥 먹는 시간은 잘 지키는 편이라서...”
할 수 없이 일제 보온 도시락을 다시 배낭으로 집어넣는다.
나의 건강과 몇 살쯤 되어서 인생의 고비가 있을 것이며 가족들의 신수도 말하여 준다. 듣기에 대충 맞는 것 같기도 하지만.... 그런 것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철학관에 가면 많이 들을 수 있는 내용이라서......
입을 열었다.
도사님.
“저는 눈에 보이거나 저의 상식으로 이해가 되는 것들만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리산이 알고 싶어 직접 이렇게 다리품을 팔며 정처 없이 다닙니다. 평범한 사람이 느낄 수 있게 아무 것이나 보여 줄만한 것은 없습니까?”
직접 체험해서 확인하지 않으면 쉽게 믿지 못하는 내 속내를 감추지 않고 드러냈다.
“그럼 기를 느낄 수 있게 해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자 나를 따라 해 보세요.”
시범을 보이며 때로는 자세를 고쳐주기도 하며 지그시 눈을 감고 뭔가 해 보이려는 진지함은 있었다. 자기 같은 도사를 만난 것이 나에겐 커다란 행운이라는 말을 하며 기운을 느껴보라는데.....글세 뭔가 느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모르겠다.
도사는
“분명 느낄 수 있는데 모르겠다고 하시네요.”라며 오히려 나에게 책임을 묻고 있다.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이런 애매한 것이 아니다. 좀더 확실한 것을 원하며 인내를 필요로 하더라도 분명한 색을 원한다.
“정말로 모르겠습니다. 좀더 확실한 것은 없어요.”
“그러려면 수련을 해야 합니다.”
“직관에 의해 단번에 깨닫는 방법은 있으면 좋겠는데.....”
제대로 안다는 것은 결국 자신에게 달린 것이다. 하긴‘도’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얻어지겠는가? 호랑이의 이빨과 황소의 인내력을 주고도 어렵겠지. 자신에게 합리화를 시키고 편안함만을 찾고 있었다. 움막에서의 모습은 중년이 되어 동심을 되찾은 때묻지 않은 그림을 그릴 수 있었던 것으로 만족한다.
내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채 시간만 흐르고 있다. 움막에 들어 온 지도 한시간이나 지났지만 얻은 것은 없었다. 시계를 보며 일어날 틈만 찾고 있었다.
“이제 그만 일어날께요. 춥기도 하고 배도 고픕니다.”
내 말은 들은 체도 않고 자기를 믿어보라며 설악산과 반야봉에서 수도한 경험을 자랑삼아 쉬지 않고 이어낸다. 뭔가 가르쳐 주고 싶다면서 쉽게 할 수 있는 호흡수련법도 알려주는데 내 머릿속에는 밥 먹을 생각과 차안에 두고 온 지갑이 잘 있는지 전혀 엉뚱한 곳에 마음이 가 있다. 왜 하필 꼭 이런 때 생각이 나는지....
역시 속세의 사람과 산속에서 도를 닦는 도인하고는 생각이 많이 달랐다. 차마 냉정하게 일어서질 못하고 기다리다 움막을 빠져나온 시간이 세시가 넘어서였다.
“우리 언제 다시 만나요.”
도인은 어느새 우리라는 표현을 쓰고 있었다.
오늘 지리산은 나에게 잊혀지지 않은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어 주었다. 도인이 추구하는 세계에 사족을 달고 싶지는 않지만 확실하지도 그리고 믿기지도 않는 일에 시간과 열정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것이 내가 교회에 가지 못하는 이유가 되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