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동광원, 귀일원, 송등원
그리고 남원의 기독교동광원수도회
이현필이 어린 학생들을 본격적으로 가르치던 1946년 공동체 일부가 광주로 이주를 시작했다. 이후 남원 가족들이 1948년 3월 18일까지 모두 광주로 이주했고, 1949년 현재의 귀일원 부지인 광주 방림동 일명 밤나무골에 터를 잡았다.
동광원의 시작은 한반도 현대사의 정치·사회적 현실과 연결되어 있다. 1948년 10월 여수-순천사건으로 많은 고아가 발생했다. 이에 이현필은 1949년 화순 도암면 봉하리 청소골에 8명의 고아를 돌보기 시작했다.
1950년 1월, 목포에서 고아원을 운영하던 전도사 윤치호의 제안으로 광주의 뜻있는 인사 70여 명이 동광원을 설립하기로 결의했다. 동광원은 ‘동방의 햇빛으로 빛나는 동산’, ‘하나님의 사랑으로 빛나는 에덴 동산’, 또는 ‘순결하고 아름다운 신앙공동체’라는 뜻을 지녔다. 당시 광주YMCA 총무인 정인세가 원장으로 추대되어, 고아와 걸인과 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이후 1950-1954년까지 한국전쟁 기간에 광주 동광원에서 600여 명의 고아들을 이현필과 그의 제자들이 주축이 되어 섬겼다.
동광원에 이어 귀일원이 태동하였다. 1951년 동광원을 맡고 있던 정인세 총무가 화순군 도암면 화학산 소반바위 밑 산속 움막에서 벙어리 수도를 하고 있던 이현필을 찾았다. 벙어리 수도를 하고 있던 이현필은 종이에다 귀일원歸一院이란 글을 쓰고 이어갔다. “곧 나가서 광주역을 배회하는 사람들을 데려다 따뜻하게 대접하고 하룻밤을 재워 보내는 운동을 하시오.”
‘하나님께 돌아가 하나 되어 사는 공동체’라는 뜻을 가진 귀일원운동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오갈 데 없는 사람들이 자기 집으로 알고 하룻밤이라도 쉬어갈 수 있도록 돌보는 공동체, 이것이 바로 현재 귀일원의 중심 모토가 되었다.
화순 고아들과 함께 시작한 귀일원은 1965년 2월 사회복지법인으로 전환되었다. 지금은 귀일원 산하에 ‘귀일정신요양원’(정신장애인 시설), ‘귀일민들레집’(지적장애인 시설), ‘귀일향기일굼터’(장애인직업 재활시설) 3개 시설에 장애인 240여명과 종사자 60여명이 섬기고 있다.
1980년 ‘기독교동광원수도회’가 남원 서리내 인근의 대산면 운교리에 자리를 잡았다. 이곳은 동광원 본원의 역할을 하면서 사회복지법인 귀일원을 설립하고 운영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가톨릭 광주대교구는 이현필의 영성을 잇기 위해 광주에 독신 여성수도원인 ‘소화 데레사 자매원’을 설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