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해협해전
1950년 6월 25일 ~ 6월 26일 사이 대한해협에서 벌어진 해전이다.
대한민국의 공식 전사는 대한민국 해군과 후방 침투를 기도한 조선인민군 해군 간의 해전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대한 다른 견해로는 블라디보스톡에서 출항하여 중국 뤼순으로 향하던 당시 소련 해군 소속 케이블 부설선 플라스툰 함과 대한민국 해군 간의 우발적인 교전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당시 한국 해군의 상황
한국 해군의 모체인 해방병단(海防兵團)은 해방 이후 난립하던 다른 사설 군사 조직들과는 달리 미군정의 승인을 받은 첫 군사 조직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해군에는 일본 제국 해군이 쓰다 진해에 버린 목선 몇 척만 있었고] 그나마 상당수는 만들다 방치한 것을 해방병단원들이 어떻게든 자재를 구해 완성해 굴리는 열악한 환경에 처했다.
조선해안경비대가 된 이후 미국 해군이 쓰던 상륙정이나 소해정 등을 여러 척 넘겨받았으나, 함정 간 혹은 함정에서 육상을 타격하는 게 불가능한 이들 소형 지원함정들만으론 한계가 있었다.
주무장이 강해봐야 M2 브라우닝 중기관총이었고, 후에 37mm 대전차포를 장비하는 개수를 했으나, 이마저도 포가 부족해 출동 나가는 배가 입항한 배의 포를 인계받아 교대로 장착하고 나가야 했다.
결국 함포가 있는 전투함을 구입하기로 결심한 손원일 제독은 '함정건조기금 거출위원회'를 결성해 장교들과 하사관, 수병들이 봉급의 일부분을 기금으로 냈고, 나중에는 국민들까지 모금에 동참하였다.
이때 모인 1만 5000달러에 이승만 대통령이 정부지원금 4만 5000달러를 더 얹어 줌으로써 손원일 제독은 6만 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가 미국상선단사관학교 실습선으로 무장이 제거된 채 쓰이다 민간에 매각되었던 화이트헤드 함을 포함한 총 4척의 초계정(Patrol Craft, PC)을 사오게 된다.
이 4척 중 화이트헤드가 바로 백두산함이다.
백두산함은 하와이에서 3인치 포를 장착하고 괌에서 3인치 포탄 100여 발을 구입한 뒤 1950년 4월 10일 진해항에 입항하였다.
함정을 마련했음에도 불구하고 포탄이 백여 발에 불과하여 나무로 모형 포탄을 만들어서 장전 훈련만 하는 등 당시 해군의 상황은 정말로 열악했다.
전투 전개
첫 출전
전날 훈련을 마치고 진해항에 정박해 있던 백두산함에 1950년 6월 25일 오전 11시에 진해통제부사령관 해군 준장 김성삼 제독으로부터 의아 선박이 발견되었으니 긴급출진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당시 승조원들은 6월 24일에 진해항에 들어왔고, 휴일이었던 관계로 대부분 외출한 상태였으므로 헌병 차량 등을 동원해 승조원들을 소집하느라 4시간 뒤인 오후 3시에 출동 준비를 마쳤고, 승조원 60명을 태우고, YMS-512 구월산정·YMS-518 고성정과 함께 출항하였다(518정은 보급 문제로 늦게 출항). 당시 백두산함에 내려진 명령은 '동해안으로 쳐들어온 적 상륙 특공대를 격멸하라!'였다.
백두산함은 18시 30분을 지나 부산 오륙도 등대를 통과하면서 침로를 북으로 잡아 북상했다.
20시 12분 영일만 부근, 북위 35도 15분 동경 129도 31분 해역, 쌍안경으로 우현을 살피던 조병호 일등수병이 갑판사관 겸 항해사·포술사 최영섭 소위에게 보고했다.
우현 45도 수평선쪽에서 검은 연기를 포착한 것이다.
연기의 굵기로 보아 어선은 아니었다.
이 내용은 함장에게 보고되었고, 함장은 변침하여 동쪽을 향해 추적했다.
12km 뒤에서 따라오던 512정에게는 “본함은 작전상 잠시 항로를 이탈하니 귀 정은 예정대로 북상하라”고 지시했다.
21시 30분 괴선박을 발견하였다.
어선도 상선도 화물선도 아닌 해군의 수송선과 비슷한 검은색의 배였다.
배 이름도 국기도 없어 분간할 수 없자 이에 백두산함은 국제 기준에 따라 검문을 시작하였다.
먼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따라가면서 수기(깃발)신호를 보냈다.
함교 뒤편에서 김세현 삼등병조와 최도기 삼등병조가 수기신호를 보냈으나, 괴선박은 응답없이 계속 남하했다.
백두산함은 이어 국제발광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30분 동안 『J.F 너의 국기를 게양하라.』, 『N.H.I.J.P.O 너의 국적을 제시하라.』, 『I.J.G 언제 어디를 출항하였는가?』, 『L.D.O 목적항구가 어디인가?』를 반복했으나 역시 아무런 응답이 없이 남하를 계속했다.
백두산함은 상황을 해군본부에 보고하였고, 본부는 선박의 정체를 정확히 보고하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백두산함은 다시 발광신호를 보냈다.
『K 정지하라.』 『O.L 정지하지 않으면 발포하겠다.』라는 발광신호를 두 시간동안 수십 차 보냈으나 역시 하등의 응답이 없었기 때문에 적선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백두산함은 괴선박과 100m 거리까지 접근한 뒤 조명을 비추고 괴선박을 보았다.
괴선박의 갑판 앞쪽에는 대포로 보이는 커다란 물체가 포장되어 있었고, 갑판에 국방색 군복을 입고 앉아있는 인원들, 중갑판 양쪽에 중기관총 2정이 배치되어 있었다.
위험하다 판단하여 다시 거리를 벌린 뒤 23시 40분 함상회의가 소집되어 괴선박이 인민군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해군본부에 타전, 나포 명령을 받아 적선을 유도했으나 어렵다 판단, 다시 무전을 보내고 3분 뒤 적선을 격침하라는 지시가 내려지고 26일 00시 30분 경 백두산함이 처음으로 3인치 함포를 적선을 향해 발포했다.
혹여나 있을 민간 및 아군 선박에 대한 오인 공격을 막기 위해, 일단 경고 사격을 1회 실시해 (적일 경우) 놀라서 괴선박으로부터 대응 사격이 시작되면 격파 사격을 하기로 했다.
교전 개시
경고 사격에 적 수송선은 백두산함과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고 곧이어 중기관총과 포를 사용해 응사에 나서 치열한 포격전이 전개되었으며, 늦게 출항했던 YMS-518정도 전투에 동참하였다.
여기서 적선이 치명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좌현쪽에 등 하나가 꺼지지 않은 것이다.
그 등불 덕택에 백두산함은 조준을 수월하게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두발을 적선 갑판 쪽에 명중시켰다.
그러나 적선은 큰 피해를 입지는 않은 듯이 응사를 계속했다
이에 함장의 명령으로 배 흘수 아래쪽을 노리고 쏘라는 지시가 내려졌다.
그렇게 백두산함은 선체 아래쪽을 노리기 위해 접근했다.
접근할수록 명중률은 높아졌고, 900m까지 접근했을 때, 백두산함에서 발사된 포탄이 적선의 마스트에 명중(!)했고, 외부 선체에도 구멍이 나서 적 수송선이 침몰하기 시작했다.
침몰하는 와중에 적 수송선은 발광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고, 이를 본 아군 함정들은 위치를 더욱 확실하게 노출한 적 수송선을 향해 정확히 포격을 가할 수 있었다.
이때까지 백두산함은 함포로 20발을 쏴서 5발을 맞췄다.
그런데 3인치 함포가 고장이 나버렸다!
3인치 함포를 계속 쏘다 보니 격발 장치의 고무 스프링이 녹아 고장난 것이다.
주무장이었던 함포가 고장나자 함장 최용남 중령은 기관총으로 반격을 명령, 적 수송선과의 거리를 좁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너무 접근한 탓에 백두산함이 적탄을 맞고 말았다.
소련제 85mm 포탄 한 발이 조타실을 관통하며 3명의 승조원에게 중상을 입혔다.
김종식 소위가 발에 부상을 입고, 김창학 삼등병조와 전병익 이등병조는 복부에 치명적인 관통상을 입었다.
부상자는 식당으로 옮겨졌고, 군의관 김인현 중위가 응급치료를 실시했지만 안타깝게도 김창학 삼등병조와 전병익 이등병조는 전사했다.
전병익 이등병조는 전역을 한 달 앞둔 시점이었다.
26일 새벽 1시 38분 결국 적 수송선은 바다 아래로 가라앉으면서 치열했던 포격전이 끝났다.
전투 이후 백두산함은 진해에 입항 후 사상자 3명만 상륙시킨 뒤 재보급 후 전투가 벌어진 해역으로 재출동, 적선 침몰의 증거를 찾기 위해 일대를 4시간 동안 수색했으나 생존자는 없었고 옷가지와 기름띠, 나무상자 같은 간접 증거물만 떠다녔다.
그렇게 백두산함은 본 임무인 묵호 해안 상황 대처를 위해 함수를 돌렸다.
전투 결과
아군 피해
2명 전사(국군의 두 전사자의 유해는 포항에서 진해로 옮겨져 경남 진해 시내 평지봉 기슭에 안장되었고, 전후 서울 동작동 국립서울현충원에 이장되었다.), 2명 부상
백두산함 조타실 및 주포 아래 피격.
적군 피해
적 수송선 격침, 승조원 및 육전대 600여 명 전원 사망(추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