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 24, 온유(4): 불의에 대한 침묵은 온유가 아닙니다!
성경: 갈 6:1; 찬송 460(515)장 1-2절
온유를 오해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것은 죄에 대해서도 분노하지 않고 침묵하거나 봐 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온유가 아닙니다. 온유한 사람은 불의와 죄에 대해 단호한 입장을 취해야 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쓴 편지에서 이렇게 권고했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 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갈 6:1) 교회의 형제자매가 죄 가운데 있을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온유한 마음으로 품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모두 죄인인데 다른 사람의 죄를 들추어내는 것이 옳을까요? 스스로 되돌릴 때까지 덮어두는 것이 온유한 태도가 아닐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랑이시지만 동시에 공의로우신 분입니다. 죄와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죄를 교정하기 위해 죄를 지적해야 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세우신 권위자에 의해 징계 받도록 해야 합니다. “주의 종은......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딤후 2:25). 잘못한 자를 심판하거나 비난하는 마음이 아니라, 온유한 마음으로 징계하란 말입니다.
그러므로 온유는 불의에 대해 침묵하거나 가만히 참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 교회는 군사독재 시절에 불의한 정권에 대해 침묵했습니다. 교회의 젊은이들은 불의를 보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국가의 잘못된 결정과 집행에 대해 그리스도인 젊은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습니다. 온유함을 교육받은 그들은 폭력을 사용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들이 거리로 뛰쳐나가 대모를 했지만 물리적 충돌만 생길 뿐 효과는 별로 없었습니다. 그들 가운데 일부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가해하는 ‘분신’(자신을 불에 태우는 자살 행위)의 방법이었습니다. 당시 분신한 사람의 95%가 그리스도인이었다고 합니다. 교회가 온유와 불의에 대한 태도를 잘못 가르친 결과인지도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도 불의에 대해서 분노하셨습니다(시 7:11). 교회와 그리스도인도 죄와 불의와는 분노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가만히 있는 것은 인정하는 것이고 타협하는 것입니다.
[질문]
1. 온유는 불의에 대해 침묵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것입니까? 아니라면 무엇이니까?
2. 온유를 잘 못 이해하면 어떤 일이 생깁니까?
첫댓글 아멘... 불순종도 필요할 때가 있지요. 단 어떠한 방법을 취하느냐가 중요하겠지요. 우리 아이들에게 어떻게 가르쳐야할지 모르겠습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부어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