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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세심궁(洗心宮)
정의
조선중기에 한성부 북부장의동에 있었던, 궁인들의 질병을 치료하던 곳.
개설
세심궁(洗心宮)은 영조대 이전부터 궁인(宮人)들의 질병을 치료하던 곳이었다. 1764년(영조 40)에 임오화변(壬午禍變)으로 숨을 거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사묘(私廟)를 건립할 때 궁가(宮家)가 훼철되었다. 사도묘 건립 공역이 끝났지만 영조는 사도묘를 창경궁 서쪽 언덕으로 옮겨 짓도록 하고, 묘호(廟號)도 수은묘(垂恩廟)로 고쳤다. 세심궁 터는 이로 인해 빈터가 되었고 그 후 해당 터에 백성들이 들어가 사는 것이 허가되면서 흔적도 남지 않게 되었다.
위치 및 용도
세심궁은 한성부 북부장의동(藏義洞), 현재 서울의 창의문(彰義門) 안쪽 언덕에 있던 궁가로, 영조대 이전에 궁인들의 조리처(調理處)로 이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승정원일기』 1762년(영조 38) 5월 13일의 기록에, 세심궁은 언제 건립되었는지 모르지만, 궁인들이 조리하던 곳이라는 내용을 통해 세심궁의 본래 용도를 알 수 있다. 1763년(영조 39)에 영조는 세심궁에 임어(臨御)하여 1762년에 죽은 사도세자를 위한 사묘 건립을 계획하였다.
1764년(영조 40) 1월에 호조(戶曹) 판서(判書)구윤명(具允明)을 당상(堂上)으로 삼아서 사도묘 건립을 시작하였지만, 영조는 사묘가 너무 사치스럽다며 축소하여 다시 짓게 하였다. 또 입묘(入廟)를 한 달 앞둔 상황에서 신주를 묘우(廟宇)에 들일 때 종묘(宗廟) 앞을 꼭 지나야 한다며 다시 사당을 창경궁 건너편 언덕으로 옮겨 짓게 하였다. 이때 묘호도 수은묘(垂恩廟)로 고쳤다[『영조실록』 40년 7월 12일]. 수은묘를 옮겨 지은 후 사도묘의 재실을 훼철한 재목은 영빈방(暎嬪房)에 주고 터는 인경궁(仁慶宮)의 예에 따라 백성들이 들어가 사는 것을 허가하였다. 백성들이 세심궁 터에 들어가 살게 되면서 현재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형태
세심궁의 형태는 국립문화재연구소에 소장된 「세심궁도형(洗心宮圖形)」을 통해 알 수 있다. 해당 도형에 표현된 건물과 공간 구성을 살펴보면, 가운데 주루(廚樓)를 중심으로 동서쪽의 공간이 구획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주루 동쪽의 건물은 넓은 대청과 상방(上房)으로 구성되었으며, 마당을 중심으로 맞은편에는 중문간채가 설치되었다. 중문간채 동쪽 끝에는 사랑이 배치되었으며, 사랑 동쪽으로 이어진 담장은 다시 북쪽으로 꺾어 외원(外園)을 형성하였다. 그 안쪽에 전면퇴가 붙어 있는 3칸의 건물이 있지만, 건물의 명칭이나 공간 구성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상방의 서쪽에는 마루와 방을 들였으며 그 맞은편으로는 해당 영역으로 진입하는 중문과 창고를 만들었다. 중문간채 앞쪽으로는 규모가 큰 고사(庫舍)가 있으며 다시 그 앞쪽으로는 중대문간과 동쪽의 산정이 일곽을 이루었다. 중문간을 나서면 행랑과 마구간으로 구성된 외대문간이 나오고 서쪽에는 서행랑이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정조는 매년 봄에 신하들과 더불어 세심대(洗心臺)에 올라 꽃을 감상하고 활쏘기를 하였다. 이에 대하여 정조는 “해마다 이때 내가 꼭 이 대에 오는 것은 여가를 즐기기 위함이 아니라 경모궁(景慕宮)을 처음 세울 때 정했던 자리이기 때문이다. 옛 을묘년의 나라 경사 때 고 중신 박문수(朴文秀)가 여러 경재(卿宰)들과 필운대(弼雲臺)에 모여 기쁨과 축의를 표했는데, 그때 영성군(靈城君)의 시가 지금까지도 전해 오는 운대가 바로 이곳이다.”라고 하였다. 즉 현재 전하는 필운대가 세심대이며, 세심대 근처가 사도묘가 처음 지어졌던 곳이라는 뜻이다[『정조실록』 19년 3월 7일].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궁궐지(宮闕志)』
『내각일력(內閣日曆)』
『대동지지(大東地志)』
국립문화재연구소 편, 『조선왕실 건축도면』, 국립문화재연구소, 2013.
이찬, 『서울의 옛 地圖』, 서울시립대학교 부설 서울학연구소, 1995.
허영환, 『정도 600년 서울지도』, 범우사, 1994.
소주방(燒廚房)
정의
왕의 수라를 마련하던 궁궐 내부의 부엌.
개설
궁궐 내의 음식을 담당하는 부서에서는 왕실의 일상적인 식사를 준비하는 것 외에도 여러 형태의 음식을 준비해야 했다. 궁궐의 잔치인 연향에 쓰일 음식, 왕이 신하들의 공을 치하하기 위해 내려 주는 음식, 특별한 날에 마련하여 먹는 그날의 음식, 노인에게 베풀어 주는 양로연·제사를 위해 준비하는 음식 등을 만들어야 했다. 이러한 음식을 만드는 사람들 또한 다양한 분류의 많은 인원이 필요했다. 일상적인 수라의 준비도 왕의 음식을 만드는 주방, 세자의 음식을 만드는 주방, 왕실 각 처소의 음식을 만드는 주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때문에 당대 왕의 각 처소마다 어느 처소의 주방은 밑반찬이 맛있고 어느 처소의 주방은 떡이 맛있으며 어느 처소의 주방은 별식을 잘한다는 등의 평가가 있어 그 처소의 음식을 필요한 때에 선물하기도 하고 서로 나누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각 처소에서 필요한 식재료의 양과 요리에 필요한 기물을 보급하는 수량에도 차이가 있었다.
내용 및 특징
궁궐의 음식을 담당하는 총책임 부서는 ‘이조(吏曹)’였다. 이조는 궁궐의 음식을 담당하는 내시부(內侍府)와 사옹원(司饔院)을 산하 부서로 두고 있었다. 내시부는 궁궐 안의 음식을 감독하는 일과 음식을 만드는 상궁 나인을 관할하였다. 사옹원은 주원(廚院)이라고도 부르는데 음식을 만드는 직접적인 부서이다. 사옹원에서는 왕실에 소용되는 식재료와 왕의 건강 상태를 점검한 후, 식단을 관리하고 예제에 따른 반찬 수를 결정하였다. 또한 임금이 명하여 음식을 나누는 공궤(供饋), 호궤(犒饋)를 담당하였다.
궁궐 음식에 관한 일은 예조(禮曹)에서도 관여하였는데, 산하 부서로 전향사(典享司)를 두어 제사와 연향에 쓰이는 일부 음식을 담당하였다. 이외에도 음식의 식재료를 조달하거나 관리하는 여러 조직이 있었다. 왕과 왕실의 일상 음식을 만드는 주방을 ‘소주방’ 또는 ‘수라간(水剌間)’이라고 불렀다.
수라간이란 왕이 먹는 음식을 ‘수라’라고 한 데서 기인했다. 수라는 ‘siüla’라는 몽골계 언어로, 요리·밥을 뜻한다고 한다. 수라(水刺)의 음을 한자로 차용해서 쓴 ‘수날’과 ‘수자’는 수라를 표기할 때 혼용되고 있는 한자어이다. 문헌 사료의 원문을 찾아보면, 음식과 관계되는 때에는 대부분 ‘수날’을 쓰고 있다. ‘수자’는 문장 전후에 군사와 관련된 내용이나 용어가 함께 들어 있을 때 한자 ‘자(刺)’를 쓰고 있다. 따라서 ‘수자’를 ‘진지’에 해당하는 수라로 쓰는 것은 잘못된 표기이거나 번역할 때 생긴 오류가 아닌가 생각된다.
궁궐 음식을 담당하던 소주방과 수라간은 사료에서 활동 기록을 찾기가 힘들다. 내시부, 사옹원과 같이 하는 일에 관한 조직 체계나 업무 내용을 파악하기도 매우 어렵다. 다만 소주방과 수라간이 모두 왕실의 음식을 만드는 부엌을 지칭하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나 소주방과 수라간은 엄밀히 다르게 해석되고 있었다. 「동궐도(東闕圖)」상에서는 소주방과 수라간을 구별하여 명칭을 표기하였고, 같은 의궤의 내용 안에서도 수라간과 소주방을 구별하여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주방(燒廚房)은 한자 표기가 보여 주는 의미대로, 불을 쓰는 곳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조선왕조실록』에는 ‘소주방(燒廚房)’이라는 용어가 쓰이지 않고 ‘소주방(小廚房)’이라 쓰거나[『중종실록』 22년 4월 3일] ‘주방(廚房)’ 또는 ‘내주(內廚)’로 쓰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 이외의 의궤, 문집, 「동궐도」 등에는 ‘소주방(燒廚房)’을 쓰고 있고, 다른 문헌 사료에서는 그저 ‘주방(廚房)’으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아 어느 것이 정확한 명칭인지 알 수 없다.
이외에도 궁중의 음식을 만드는 부엌의 명칭은 더 있다. 예를 들어 왕과 왕후, 대비 등을 위한 음식 만드는 곳을 지칭할 때는 ‘내주(內廚)’, 신하들이 왕이 내려 주신 음식을 먹으며 그 음식을 만든 곳을 지칭할 때는 ‘천주(天廚)’, 왕의 음식을 만드는 곳을 직접 지칭할 때는 ‘어주(御廚)’, 절기상 먹는 특별한 날의 음식을 만든 곳을 지칭할 때는 ‘선주(仙廚)’ 등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많은 용어들이 모두 다른 부엌을 지칭하는지, 그저 상징적인 의미로 부르는 명칭인지, 위와 같이 분류했지만 실제로는 통합되어 사용되는 것인지 명확히 알 수 없다. 이뿐만이 아니라 설리방(薛里房), 생과방(生果房), 연향색(宴享色), 반선색(盤膳色), 잡물색(雜物色), 미면색(米糆色) 등과 같이 음식의 종류에 따라 나뉜 명칭도 있다. 또 ‘설리’, ‘각색장’, ‘대령숙수’ 등은 수라간 상궁·나인과 더불어 음식을 만들고 조달하는 요리사의 명칭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의 기사를 정리해 보면, 수라간은 조선초기부터 쓰였던 왕실 부엌의 명칭이었다. 소주방은 ‘소주방(小廚房)’으로 쓰이며 각 전각에 딸린 작은 주방을 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각 전각에 딸린 작은 주방은 대체로, 만들어진 음식을 데우거나 가벼운 음식을 즉석에서 마련하였고 식기 등을 비치하였다가 필요할 때 꺼내 사용하는 정도의 공간이었다. 즉 왕이 음식을 물리고 난 뒤에 그 상을 처리하는 퇴선간과 비슷한 규모와 의미였다. 그러던 것이 수라간과 소주방을 구별하면서, 각 처소에 딸려 있고 일상적이며 즉석에서 해 먹는 음식, 즉 불을 사용하여 음식을 조리하고 익히는 곳은 ‘소주방(燒廚房)’으로, 왕의 이름으로 주도되는 일상의 음식과 연향 음식을 계획하고 담당하는 곳을 수라간으로 부르다가, 나중에는 수라간과 소주방을 통칭하거나 혼용하여 사용한 것이 아닌가 한다.
『[영조정순후]가례도감도청의궤([英祖貞純后]嘉禮都監都廳儀軌)』를 살펴보면, 주방·내소주방·외소주방·수라간 등 각각의 명칭이 나온다. 크게 주방과 수라간을 나누어 분석해 보면, 조리하는 공간을 만들기 위한 건축 재료와 조리용 땔감 등을 말할 때 ‘주방’이라고 언급하고, 조리를 하기 위한 기물들의 소용품을 말할 때는 ‘수라간’을 쓰고 있다. 주방과 수라간은 음식을 만드는 공간과 기획하는 곳의 차이가 아닌가 한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일성록(日省錄)』
『경세유표(經世遺表)』
『만기요람(萬機要覽)』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응천일록(凝川日錄)』「동궐도(東闕圖)」「동궐도형東闕圖形」
송현궁(松峴宮)
정의
인조가 국왕에 오르기 전에 거처하던 잠저(潛邸).
개설
송현궁은 인조의 잠저, 즉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으로 1755년(영조 31) 저경궁(儲慶宮)으로 개칭되었다. 선조의 후궁인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사우가 있었다. 현재 한국은행 자리가 이에 해당된다.
위치 및 용도
송현궁은 남대문의 안쪽인 서울의 남부 회현방(會賢坊) 내 송현동에 위치하였다. 송현동은 지금의 서울특별시 중구 소공동과 북창동, 남대문 일대에 해당되는데, 송현궁이 있던 곳은 현재의 한국은행 자리로 알려진다. 송현궁은 선조와 후궁 인빈김씨의 소생인 추존왕 원종(元宗)과 그의 아들인 인조가 생활하던 곳이었다.
변천 및 현황
1752년(영조 28) 국왕은 송현궁을 둘러보고는 보수를 지시하였고[『영조실록』 28년 7월 26일] 관리를 위해 호조(戶曹)의 낭관(郎官)이 3년마다 살피도록 지시하였다[『영조실록』 28년 10월 2일]. 1755년(영조 31)에 저경궁으로 개칭하고, 인빈김씨의 사당을 설치하여 신위를 봉안하였다[『영조실록』 31년 6월 2일]. 동시에 인빈에게 경혜(敬惠)라는 시호를 내리고, 원호(園號)는 순강원(順康園)이라 하였다. 영조가 어필로 신주를 써 춘분과 추분, 하지와 동지 그리고 각종 절일(節日)마다 제사를 거행했다.
저경궁은 이후 1908년(융희 2) 인빈김씨의 신위를 육상궁(毓祥宮)으로 옮긴 뒤에도[『순종실록』1년 7월 23일] 건물은 존재하였으나, 1927년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가 건립되면서 철거되었다.
형태
송현궁 및 이후에 개칭된 저경궁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현재로써는 확인되지 않는다. 다만, 같은 후궁의 궁묘인 육상궁의 모습을 통해서 추론해볼 수 있을 것 같다. 육상궁은 입구에 하마비(下馬碑)가 설치되었고, 입구는 삼문(三門) 형식의 솟을대문이다. 궁 안에는 영조의 생모인 숙빈최씨(淑嬪崔氏)의 신주를 모시는 사당 이외에 제향과 관련된 전사청(典祀廳)과 헌관집사청(獻官執事廳), 찬알청(贊謁廳), 수복방(守僕房) 등의 부속 건물이 있었다. 육상궁의 이 같은 모습은 송현궁의 형태를 추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될 것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1752년(영조 28) 12월 영조는 송현궁에 행차해서는 자신의 육순을 기념하여 신하들이 하례를 올리는 것을 사양하겠다는 의사를 전달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날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차마 듣지 못할 하교[不忍聞之敎]”를 내렸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선위(禪位)를 하겠다는 하교를 말하는 것이다. 갑작스러운 하교를 접한 신하들은 당황해하였으며 예조(禮曹) 판서(判書)원경하(元景夏)는 사모(紗帽)를 벗고 머리를 땅에 조아리며 어가를 돌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국왕이 계속 고집을 피우자 우의정(右議政) 김상로(金尙魯) 등이 대왕대비인 인원왕후(仁元王后)에게 요청하여 이를 돌리려 하였고, 대리청정하던 세자에게도 청하였다. 다급해진 세자는 호위도 갖추지 않고 보련(步輦)을 타고 가겠다고 지시하였다. 대왕대비의 봉서(封書)가 전달되자, 이를 받아 본 영조는 결국 자신의 의사를 철회하고 궁으로 환궁하였다. 소여(小輿)를 타고 나가던 세자는 국왕이 돌아온다는 말을 듣고는 돈화문(敦化門) 밖에서 국왕을 맞이하여 궁궐 안으로 들어왔다[『영조실록』 28년 12월 5일].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동국여지비고(東國輿地備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임하필기(林下筆記)』
서울시사편찬위원회, 『서울지명사전』, 서울시사편찬위원회, 2009.
윤진영, 「칠궁의 합사 내력과 신주 감실(龕室)」, 『영조비빈자료집 2』,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1.
수각(水閣)
정의
연못 가운데나 물가에 지은 정자, 혹은 어구(御溝) 위나 우물 주변에 지은 건물.
개설
수각은 강가나 호숫가 등 물가에 세운 정자나, 누각 중에서도 특히 연못 안의 섬에 세운 정자를 말한다. 때로 연못에 섬을 만들지 않고 물속에 돌기둥을 세워 그 위에 건물을 짓기도 한다. 이같이 지은 수각에 오르면 물에 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주변의 경관과 함께 물이 주는 특별한 감흥으로, 궁궐의 후원이나 사대부의 원림에 작은 수각을 지어 휴식과 완상의 공간으로 사용했다. 큰 규모의 연못을 조성하고 그곳에 누각을 지어 왕실의 행사와 연회의 장소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경복궁의 경회루(慶會樓)가 있다.
그 외 조선후기까지 궁궐 내 명당수가 흐르는 금천(禁川) 어구(御溝)와 행각이 교차하는 경우, 어구에 다리를 놓듯이 교각을 세우고 돌 귀틀을 얹은 위에 지은 건물을 수각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경우 수각에 철창으로 문을 달고, 주변의 문을 담당하는 수문장에게 관리하도록 하였다. 수각 아래의 어구로 사람이 몰래 드나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내용 및 특징
수각은 주로 연회를 위해 연못에 지었다. 1420년(세종 2) 상왕인 태종이 직접 지휘하여 양주의 풍양궁(豐壤宮)에 수각을 지었다[『세종실록』 2년 6월 22일].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이때 연못을 파고 축대를 쌓아 수각을 지었으며 낙성연과 연회를 하였다고 한다. 이외에도 경복궁 경회루나 경회루 아래를 수각으로 지칭하는 용례가 있다.
다른 용례는 1396년(태조 4) 『조선왕조실록』 기사에 나타난다. 경복궁을 지었을 때 홍례문(弘禮門) 안쪽에는 명당수인 금천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났다. 여기에 영제교라는 다리를 놓았는데 그 동쪽과 서쪽에 각각 3칸의 수각을 세웠다고 한다[『태조실록』 4년 9월 29일]. 이 수각은 금천 위에 지은 것으로 후대의 창경궁 홍화문(弘化門) 행각이나 고종대에 중건한 경복궁 흥례문(興禮門) 행각처럼 주위에 행각 없이 어구 위에 독립된 건물로 지은 것으로 보인다. 궁궐 외에도 사찰이나 민간에서 우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지은 건물도 수각이라고 하였다.
변천
조선전기의 『조선왕조실록』에는 수각을 주로 물가에 지은 정자나 누각으로 지칭하고 있다. 그러나 조선후기에는 같은 경우에 ‘수각’이라는 보통명사 대신 정자나 누각의 이름을 적었다. 조선후기의 『조선왕조실록』에 언급되는 수각은 어구 위에 설치된 건물을 일컫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수강궁(壽康宮)
개설
수강궁은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태종이 상왕(上王)으로 있으면서 머물던 궁이다[『세종실록』 즉위년 11월 3일]. 태종 사후에는 왕실의 별궁으로 사용하였다. 성종 연간에 인수왕대비(仁粹王大妃)와 인혜왕대비(仁惠王大妃)를 위한 궁인 창경궁을 수강궁 터에 건립하면서 수강궁은 기록으로만 남게 되었다[『성종실록』 10년 5월 29일].
위치 및 용도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수강궁의 위치를 한양의 연화방(蓮花坊)으로 추정하였다. 현재 서울의 창경궁이 자리한 곳이다. 수강궁은 본래 태종이 상왕으로 있으면서 건축된 상왕전(上王殿)이다. 태종 사후에는 왕실의 별궁 역할을 했다. 태종과 세조가 이곳에서 별세했고, 예종이 수강궁의 중문(中門)에서 즉위했다.
변천 및 현황
수강궁이 태종의 상왕전으로 영건된 것은 1418년(세종 즉위) 왕위를 세종에게 물려주던 해다. 태종이 이어하여 거처하는 동안에도 수강궁의 공역은 계속되었는데 1419년(세종 1)에 남쪽 행랑과 수강문(壽康門)이 완성되었다. 수강궁에 옮겨 살던 태종은 1422년(세종 4)에 이곳에서 별세하였다.
태종 사후 수강궁은 왕실의 별궁으로 사용되었다. 단종과 세조는 공역이 계속되는 경복궁, 창덕궁 등을 피하여 종종 이곳에 머물며 정사를 논의했다. 세조는 병이 깊어지자 수강궁으로 이어했고 1468년(세조 14) 정침에서 별세했다. 따라서 세조를 이어 왕위를 이은 예종은 수강궁의 중문에서 즉위할 수밖에 없었다.
성종 연간에도 수강궁은 왕실의 별궁으로써 기능하였다. 특이한 내용으로는 1473년(성종 4)에 수강궁의 장춘문루(長春門樓)에서 무신(武臣)의 말타기와 활쏘기[騎射]를 점검한 기록이 있다[『성종실록』 4년 5월 5일].
1479년(성종 10) 인혜왕대비와 인수왕대비가 왕이 머무는 대전(大殿)이 좁다 하여 수강궁으로 옮겨 거처하였다. 이후 수강궁은 왕대비들의 궁으로 활용되기 시작했다. 결국 1482년(성종 13) 성종은 창덕궁을 수리하는 대신 왕대비들이 머물러 있는 수강궁의 수축(修築)을 명하였다. 대신들의 반대에 부딪혀 공역이 지연되기는 했으나, 1484년 완성되어 창경궁이라는 궁호(宮號)를 얻게 되었다[『성종실록』 15년 3월 20일].
수방재(漱芳齋)
정의
창덕궁의 동궁 권역 안에 있던 청나라와 관련된 건물.
개설
창덕궁에는 수강재(壽康齋)라는 건물이 있었지만, 『조선왕조실록』의 수방재는 청국의 수방재를 말하는 것이며 창덕궁의 수방재에 관한 내용은 없다[『정조실록』 23년 1월 22일]. 청국을 다녀온 사신들의 기행록에서 발견되는 수방재도 청국에 있는 수방재를 말한다. 수방재는 자금성(紫禁城)의 영수궁(永壽宮) 서쪽에 있어 건륭황제가 왕위를 물려준 뒤 때때로 머물던 곳이며, 황제가 조선의 사신들을 인견하던 곳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위치 및 용도
『임하필기(林下筆記)』「춘명일사(春明逸史)」편에, 헌종이 고금의 서화를 방 하나에 쌓아 두고 이름을 수방재라 하며 신하들에게 구경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수방재는 그 앞에 있던 ‘도서루(圖書樓)’와 함께 그림과 책은 물론 중국 관련 물건들을 모아 놓은 전시 장소가 아닌가 생각된다. 수방재는 「동궐도(東闕圖)」 중앙에 위치한 동궁 영역, 중희당(重熙堂)의 부속 건물인 ‘소주합루’의 북쪽에 놓여 있다. 담을 사이로 동쪽에 연영합(延英閤)의 영역이 배치되어 있다.
형태
수방재는 궁궐 내 다른 전각들과 확연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집채에 단청을 하지 않았고 전돌을 깐 낮은 기단이 마치 툇간처럼 건물의 안으로 들어와 있다. 정면 5칸 건물의 중앙은 앞에 댓돌이 놓여 있고 분합문(分閤門)을 달았지만 대청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좌우로 2칸씩 놓인 방은 중인방 아래까지 벽돌로 화방벽을 쌓고 그 위에 작은 문을 달았다. 분합문 앞에는 수방재, 동쪽 방 앞에는 문화각(文華閣)이라는 편액을 달았다.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툇간처럼 보이는 서측 벽체는 완자무늬를 넣어 장식해 두었다. 동측 벽체에는 상부에 원형으로 구멍이 나 있고 벽체에 바로 잇닿아 복도각처럼 보이는 부속채가 동쪽 담장을 관통해 연영합 부속채와 연결되어 있다. 마당 앞에는 도서루(圖書樓), 해당정(海棠榳)을 좌우에 벌여 놓았고 서측에는 부속 건물인 저방실(貯芳室)이 놓여 있다. 담장과 연결되어 남쪽에는 보운문, 북쪽에는 여화문을 달아 수방재의 한 영역을 이루고 있다.
수방재와 비슷한 분위기로 조성된 연영합 공간에는 유난히 학과 관련된 편액이 많다. 마당에는 심지어 두 마리 학이 놀고 있다. 효명세자(孝明世子)의 문집으로 『경헌집(敬軒集)』 외에 『학석집(鶴石集)』도 있는데, 이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과 자신의 처소를 학과 관계 지었던 것으로 보인다. 『학석집』에는 학을 노래한 시가 많은데 수방재와 관련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하는 「학석소회소서(鶴石小會小序)」가 흥미롭다. “거문고와 술 단지가 어지러이 놓인 가운데 난정수계(蘭亭修契)와 같은 모임을 갖는데, 시렁 위에는 그림과 책이 가득하니 흡사 서원의 아집과 같다.” 하며 중국의 시문학 동인들의 모임 장소를 빗대어 시를 읊고 있다. 특히 “받침대 위의 쌍학은 공중을 빙빙 돌다 정원에 내려앉은 듯하고 험준한 산령의 늙은 바위가 문 앞에 놓여 있으니 학석이라 이름 한 것이 제대로 되었다.” 하면서 감탄하는 것으로 보아 이 건물은 효명세자의 설계대로 만들어진 듯하다.
참고문헌
『일성록(日省錄)』
『경헌집(敬軒集)』
『계산기정(薊山紀程)』
『무오연행록(戊午燕行錄)』
『임하필기(林下筆記)』
『학석집(鶴石集)』
수성궁(壽成宮)
정의
문종의 후궁들이 문종 사후에 모여 살던 궁가(宮家).
개설
문종은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와의 사이에서 단종을 낳았다. 문종에게는 현덕왕후 권씨 외에도 여러 후궁이 있었지만 모두 자녀가 없거나 옹주만 출산하였다. 왕자를 낳은 경우도 있으나 오래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때문에 문종 사후에 후궁들은 궁궐을 떠나야 했고 단종은 이들을 수성궁에 모여 살도록 하였다[『단종실록』 2년 3월 13일].
위치 및 용도
수성궁의 위치는 『연산군일기』의 “서편에 새로 쌓는 성은, 영추문(迎秋門) 북편에서 똑바로 풍저창(豐儲倉) 북편으로 걸쳐, 수성궁 서편 옛 성 밑에 이르기까지 축조하게 하라.” 하는 기사를 통해 경복궁 서편에 자리 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연산군일기』1년 1월 9일].
수성궁은 문종 사후에 문종의 후궁들이 모여 살던 궁가로, 연산군대에 성종의 후궁들이 들어가 살면서 정청궁(貞淸宮)으로 개칭되기도 하였다[『연산군일기』 10년 5월 15일].
변천 및 현황
문종에게는 숙빈홍씨(肅嬪洪氏), 숙의문씨(淑儀文氏), 소용권씨(昭容權氏), 소용정씨(昭容鄭氏), 소훈윤씨(昭訓尹氏), 승휘유씨(承徽柳氏), 궁인장씨(宮人張氏), 사칙양씨(司則楊氏) 등의 후궁이 있었다. 모두 문종이 세자였을 때 간택해서 들인 후궁들로, 소생이 없거나 옹주를 출산했다. 소용정씨와 궁인장씨의 경우 왕자를 낳았으나 모두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고 말았다. 때문에 후궁들은 문종이 승하하자 궁궐에 남지 못하고 개인의 궁가(宮家)를 하사받지도 못했다. 대신 모두 왕실에서 정해 준 장소로 들어가 살게 되었다.
1454년(단종 2)에 문종의 후궁들이 사는 곳을 수성궁이라 칭하라는 명이 내려졌다. 1455년(세조 1)에는 수성궁에 별감(別監)·소친시(小親侍) 24인과 9품의 체아(遞兒) 1인을 두어 후궁들의 시중을 들고 수성궁을 관리하게 하였다. 수성궁의 관장은 액정서(掖庭署)에서 담당하며 그곳에서 필요한 물품들은 내탕금으로 구입하여 들였다[『세조실록』 1년 11월 13일].
1503년(연산군 9)에는 수성궁 담장 밑에 사는 집들을 철거하도록 하였다[『연산군일기』 9년 11월 8일]. 1504년(연산군 10)에는 수성궁의 후궁들을 세종의 후궁들과 성종의 폐비 윤씨(尹氏)가 거처하던 자수궁(慈壽宮)으로 옮겼다. 수성궁의 옛 건물들은 새로이 고쳐 성종의 후궁들이 거처하도록 하였다. 궁가의 이름도 정청궁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곳에 정청궁을 지으면서 다시 수성궁이라 불렀다. 자수궁으로 옮겨 갔던 후궁들도 다시 수성궁으로 돌아와 이곳에 살았다.
참고문헌
지두환, 『문종대왕과 친인척』1~2, 역사문화, 2008.
수옥헌(漱玉軒)
정의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의 왕립도서관.
개설
수옥헌은 1898년(광무 2)경에 만들어져 1901년(광무 5) 화재로 소실된 후[『고종실록』 38년 11월 16일], 다시 재건되어 현재와 같은 중층의 조적식(組積式) 구조 건물이 되었다. 역사서에는 1906년(광무 10) 이후 수옥헌 대신에 중명전(重明殿)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고종실록』과 『순종실록』을 감수한 경성제국대학 교수인 오다쇼고[小田省吾]는 『덕수궁사(德壽宮史)』에서 수옥헌에 대해 하나의 건물이 아니라 이 건물을 포함한 모든 전각의 총칭이라고 기술하기도 했다.
위치 및 용도
현재 서울 중구 정동극장 왼편으로 난 좁은 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면 중층의 조적식 건물이 나타난다. 이 건물은 경운궁의 중명전으로 예전에는 중명전 인근 지역이 경운궁의 한 영역을 이루고 있었다. 용도는 왕실 도서관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다만 1904년(광무 8) 경운궁 대화재 이후 고종이 거처할 때는 도서관의 기능보다 침점과 편전의 용도 및 외교사절을 접견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변천 및 현황
현재까지 수옥헌과 관련된 자료로 가장 오래된 것은 선교사 알렌(Horace Newton Allen)이 찍은 사진이다. 이 사진에는 1899년(광무 3) 3월이라는 촬영 시기와 각 건물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여러 건물 중에서 수옥헌은 사진의 왼쪽 편에 위치하고 있다. 서양식 건축물로 경운궁 내에 위치한 정관헌(靜觀軒)과 유사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 건물도 정관헌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건축가인 사바틴([沙婆眞, 薩巴丁], Sabatine, A.S.)이 만들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사진에서는 이 건물을 “new royal library”라고 기록했다. 새롭게 만든 왕립도서관이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다른 자료에서도 수옥헌을 도서관이라고 한 경우가 발견된다. 이를 통해 수옥헌은 1898년(광무 2)경에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크고 용도는 도서관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만들어진 수옥헌은 1901년 11월 16일 화재로 소실되었다. 화재 이후 중건하였는데 역시 서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중건 당시의 기록은 다른 서양식 건물과 마찬가지로 현재까지 알려지지 않았다.
수옥헌이 역사의 중심으로 등장한 것은 1904년 경운궁에 대화재가 발생한 후의 일이다. 경운궁의 대화재로 거처가 없어진 고종은 수옥헌을 임시 거처로 삼았다. 이 사이에 세계 정세가 급변하면서 러일전쟁이 발발하였고 일본이 승리했다. 그 결과 일본은 1905년(광무 9) 11월 17일 수옥헌에서 대한제국과 강제로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을사늑약 체결 이후 고종은 계속 수옥헌에 머무르고 있었고, 1912년 10월 29일에서야 비로소 함녕전(咸寧殿)으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수옥헌은 외국인 클럽(club)으로 이용되다가 1925년 3월 12일에 다시 화재가 발생해 내부가 전소되었다. 그러나 외관은 기존 수옥헌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었고, 이후 중건이 이루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관련사건 및 일화
수옥헌에서 1905년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덕수궁 복원정비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小田省吾, 『德壽宮史』, 李王職, 1938.
수인당(壽仁堂)
정의
지금의 덕수궁인 경운궁의 대비전.
개설
수인당은 1897년경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건립 이후 명헌태후(明憲太后)인 효정왕후(孝定王后)남양홍씨의 처소로 사용되었다[『고종실록』 41년 1월 2일]. 1933년경 철거되어 현재는 남아 있지 않다.
위치 및 용도
수인당은 경운궁의 동북쪽 언덕 위에 위치했던 건물로 효정왕후의 처소였다. 동쪽에는 ㅁ자형 평면의 양심당(養心堂)이 있고, 서쪽에는 서양식 건물인 정관헌(靜觀軒)이 있으며, 남쪽에는 순헌귀비 엄씨의 침소인 영복당(永福堂)이 있다.
변천 및 현황
조선시대 궁궐에서 대비의 전각 혹은 궁은 동쪽에 조성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것은 중국 한나라 태조가 장안(長安)을 수도로 삼고 미앙궁(未央宮)과 장락궁(長樂宮)을 건립했는데, 장락궁을 미앙궁의 동쪽에 위치시키고 이곳에 태후를 모시게 한 데서 연유한다. 1667년(현종 8) 창덕궁에 대비전이라 할 수 있는 집상전(集祥殿)을 새로 조성했는데 “자전께서 정전(正殿)에 임어하시지 못한 지 지금 이미 반년이나 되었으니 우선 옛 궁궐에서 한 칸을 헐어다가 전(殿) 동쪽의 옛터에다 건립하고자 한다.”고 하였다[『현종실록』 8년 11월 11일]. 이러한 사례는 1655년(효종 6)에도 나타난다. 당시 대비는 창덕궁 수정당(壽靜堂)에 모시고 있었다. 그러나 효종은 수정당이 산을 등지고 있고 비좁아서 궁색하다며 창덕궁의 서쪽인 흠경각(欽敬閣) 터에다가 전각을 만들어 대비를 모시고자 하였다. 이에 영돈녕부사 김육(金堉)은 “예로부터 태후가 거처하는 곳은 반드시 대내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동조(東朝)라고 했습니다. 창경궁이 동쪽에 있는 것도 이런 까닭입니다. 정전의 서쪽 구석으로 외부 가까운 자리에 옮겨 짓는 것은 굽어져 있는 데다 또 멀며, 좌측을 숭상하는[尙左之義] 고례에 부합되지 않습니다.”라고 하여 대비전을 옮기는 것이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효종실록』 6년 12월 4일].
경운궁의 동북쪽에는 많은 내전들이 위치하고 있는데 수인당은 그중에서도 후면 언덕 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했다. 수인당은 1897년경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나 사료의 부족으로 정확한 날짜는 가늠하기 어렵다. 수인당은 효정왕후의 처소로 사용되었는데 효정왕후는 헌종의 계비로 후에 대한제국의 마지막 태후인 명헌태후(明憲太后)가 되었다. 명헌태후는 수인당에서 승하하였고, 빈전은 흥덕전(興德殿), 혼전(魂殿)은 문경전(文慶殿)을 사용했으며, 전호는 효혜(孝惠)라고 하였다.
고종황제 승하 이후에도 수인당은 계속 존재하고 있었으나, 경운궁이 중앙공원으로 조성되어 일반에 공개되는 시점인 1933년 전후에 철거된 것으로 보인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덕수궁 복원정비기본계획』, 문화재청, 2005.
小田省吾, 『德壽宮史』, 李王職, 1938.
수정전(壽靜殿)
정의
1654년(효종 5)에 장렬왕후를 위해 새롭게 조성한 창덕궁의 대비전.
개설
수정전은 원래 창덕궁 후원에 인접하여 위치한 수정당(壽靜堂)이었다. 1794년(정조 18) 12월에 대비의 존호를 올리면서 책보(冊寶)와 책인(冊印)을 올리는 행사를 하기 위한 장소로 수정당을 명하였다. 그리고 전각의 명칭을 그에 부합하는 위계로 수정전이라 바꾸어 부르게 되었다[『정조실록』 18년 12월 18일].
위치 및 용도
창덕궁의 대조전(大造殿) 뒤편으로, 집경당(集慶堂)과 경훈각(景薰閣) 북쪽에 위치하고 있다. 대조전은 창덕궁에서 왕의 정침이며, 그 뒤편으로 있는 집경당은 1667년(현종 8)에 현종의 어머니 인선왕후(仁宣王后)를 위해 경덕궁의 집희전(集禧殿)을 옮겨 지은 것이다. 수정당은 1654년(효종 5)에 증축하여 당시 대비였던 장렬왕후(莊烈王后)가 머물도록 하였다. 이후 정조 연간에 대비인 정순왕후(貞純王后)가 이곳을 거처로 삼았으며, 대비전에 존호를 올리는 의식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변천 및 현황
수정당은 광해군대에 창덕궁을 재건하면서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인조반정으로 창덕궁의 여러 전각이 소실될 때에도 남아 있었다. 창덕궁 후원에 가까이 있어 효종 연간까지 ‘유완지소(遊玩之所)’라 하여 후원의 경치를 관람하고 휴식하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효종실록』 5년 2월 10일].
1654년에 대비였던 장렬왕후를 위해 건물을 대대적으로 증축하고 대비전으로 활용하였다. 장렬왕후는 당시 창경궁 통명전(通明殿)에 머물고 있었으나 자주 몸이 아팠다. 효종은 과거에 창덕궁과 창경궁 내전에서 더러운 물건들이 발굴되면서 여러 전각의 벽과 온돌 및 전돌 등을 교체하는 대규모 수리를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대비의 건강이 좋지 않자 전각을 옮기는 것을 고민하였다. 마땅히 대비를 모실 만한 전각은 마련되지 않아 창덕궁의 후원 근처에 있던 수정당을 수리하여 사용하였다. 병은 여전하였고 옛 총부로 옮겨 모시기도 하였으나, 옛 총부는 대비가 오래 살 만한 공간이 아니었으며 공간도 협소하였다. 결국 1655년(효종 6) 창덕궁 인정전(仁政殿) 서편에 있던 흠경각(欽敬閣) 터에 만수전(萬壽殿)을 새로 지었다. 효종은 장렬왕후를 위해 여러 전각을 수리하고 건강을 돌보았는데, 아마도 대조전 가까이에 대비를 모셔 두고 간병하기 위한 선택으로 보인다.
1654년에 수리하여 대비가 머물기 적합한 전각의 규모를 갖춘 이후 수정전은 대비의 거처로 사용되었다. 정조 연간에는 정순왕후가 이곳을 사용하였다. 1795년(정조 19) 1월 16일에는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환갑을 맞아 생일잔치를 벌이고 정순왕후와 혜경궁에게 존호를 올리는 장소로 사용하였다.
형태
정면 6칸, 측면 3칸의 규모로 팔작지붕 집이다. 전면 1칸은 돌기둥을 초석으로 사용한 누각으로 이루어졌다. 정면에 월대를 갖추고 있다. 전각 사면에는 행각이 두르고 있으며 뒷마당에서 창덕궁 후원으로 통하는 읍청문(浥淸門)이 있다. 수정전으로 들어서는 문은 영훈문(迎薰門)이다. 영훈문을 통해 앞마당으로 들어서면 널빤지로 된 담장인 판장(板牆)이 마당을 가로질러 안쪽 전각을 가리고 있다. 판장에는 이각문이 설치되어 있다. 이처럼 수정전은 시선과 동선을 차단하기 위해 여러 차례 담장과 문을 설치하였다.
관련사건 및 일화
정조는 49세 되는 1800년(정조 24) 6월 28일 영춘헌(迎春軒)에서 승하하는데, 죽기 전 희미한 목소리로 ‘수정전’이라는 말만 남긴다. 이때 수정전은 왕대비였던 정순왕후가 거처하는 곳이었다.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궁궐지(宮闕志)』
문화재청 창덕궁관리소, 『동궐도 읽기』, 창덕궁관리소, 2005.
수정전(修政殿)
정의
고종대에 중건한 경복궁 근정전 서쪽의 편전.
개설
수정전은 고종대 경복궁 중건 시 내전과 외전의 전각이 대부분 준공된 후에 지었으며 조선초기의 경복궁이나 조선후기의 창덕궁에서는 볼 수 없는 형태의 전각이다. 수정전은 남쪽의 숭양문(崇陽門), 영화문(永化門), 수정문(修政門)까지 삼중의 행각과 월대를 갖추었고, 지붕에 양상도회를 하는 등 사정전 못지않은 전각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위치 및 용도
근정전(勤政殿)의 서쪽, 경회루(慶會樓) 남쪽에 위치한다. 조선초기 집현전(集賢殿)이 있었던 자리라고 전해지고 있으나, 집현전의 위치는 대략 수정전의 남동쪽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수정전 서쪽은 궐내 각사가 모여 있는 곳으로 「북궐도형(北闕圖形)」에 의하면, 수정전의 서쪽에는 대전장방(大殿長房), 내반원(內班院), 대전수라간 등 왕을 수발하는 부서가 위치하고 있다.
1867년(고종 4) 11월 16일, 경복궁의 중건 공사가 거의 마무리되었을 때, 왕이 경복궁 근정전에 나아가 하례를 받고 새로운 궁궐의 준공을 기념하여 교문을 반포하였다[『고종실록』 4년 11월 16일]. 다음 날 수정전에서 시원임 대신들의 문안을 받고 덕담을 나누었다. 그다음 날은 사정전(思政殿)에서 영건도감(營建都監)의 관원들을 포함하여 신하들을 만났다. 따라서 경복궁에서 전각의 위계를 근정전, 수정전, 사정전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이후에 수정전의 사용 예를 보면 각 단묘에 제사를 지낼 때 향과 축문을 내리거나, 신하들이 올린 전문(箋文)을 받고, 군사방(軍士房) 승지(承旨)의 소견이나, 입격한 유생의 소견, 신하의 예를 받는 것을 수정전에서 행하고 있어서 사정전 외에 또 다른 편전으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고종대에 근정전에서 이루어지는 의례에서 국왕이 친림할 때 출발하는 장소는 두 가지가 있는데 사정전의 사정문(思政門)과 수정전의 영화문(永化門)이다. 영화문은 수정문과 숭양문(崇陽門) 사이에 있는 중행각의 문이다. 즉, 경복궁 중건 시 수정전의 기능은 기존의 편전 건물인 사정전 이외에 별도로 편전의 기능을 강화하고 때로는 정전에서 치러야 할 의례를 거행하는 것이었다.
고종의 즉위 초기에는 사정전과 수정전을 같이 운영하다가 점차 수정전으로 그 무게 중심이 옮겨갔다. 1872년(고종 9) 고종의 어진이 처음으로 제작되자 1875년(고종 12)까지 수정전에 이를 보관하였으며[『고종실록』 12년 5월 28일], 어진을 건청궁(乾淸宮)의 관문각(觀文閣)으로 옮긴 이후에는 다시 고종 초기와 같이 편전의 용도로 사용하였다.
수정전의 외삼문인 숭양문 남쪽은 빈터인데 이 마당을 사이에 두고 흥례문(興禮門) 서행각에 있는 유화문(維和門)과 마주보는 위치에 기흥문(岐興門)이라는 사주문이 있다. 이 문 안쪽에는 빈청, 정원(政院, 승정원), 당후(堂后, 승정원 주서), 선전관청 등 궐내 각사가 모여 있다. 정원의 동쪽 누마루는 당호가 육선루(六仙樓)인데 육선은 승정원의 도승지, 좌승지, 우승지, 좌부승지, 우부승지, 동부승지 등 여섯 승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궐내 각사의 동쪽 문이 기흥문이라면, 서쪽인 영추문(迎秋門)에서 들어서서 어구를 건너면 궐내 각사 영역의 대문인 청운문(晴雲門)이 있다.
변천 및 현황
수정전의 기능과 주변 행각에 변화가 생긴 것은 1895년(고종 32) 2차 갑오개혁 때 의정부(議政府)를 내각(內閣)으로 고치고 수정전을 내각의 청사인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로 정하면서부터이다. 내각 청사로 바뀌면서 원래는 북행각 쪽으로 연결되어 있던 복도가 철거되고 수정전 좌우에 복도가 설치되었으며 중행각과 외행각의 규모가 확장되는 변화가 있었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 수정전은 전시관 등으로 전용되어 내부의 바닥 구조가 변형되었다. 2000년 보수 공사를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형태
수정전은 남쪽에 세 겹의 행각이 있어서 숭양문→영화문→수정문을 통하여 수정전에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북궐도형」에는 북행각에 융지문(隆智門)이 있고 습회당(習會堂), 협오당(協五堂), 장원당(章元堂)의 당호가 적혀 있다.
수정전은 정전과 정침에만 설치되는 월대를 갖추고 있으며 지붕마루에 양상도회를 하고 취두와 용두, 잡상의 지붕장식을 하고 있으며 공포는 이익공이다. 평면 구성은 정면이 10칸으로 짝수이며 중앙에 3칸 대청을 두고 동온돌 3칸, 서온돌 2칸, 그리고 좌우에 툇간이 있으며 전툇간이 넓은 점이 특징이다.
관련사건 및 일화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때 의정부를 경복궁 안에 옮기되 내각으로 고쳐 부르고, 장소는 수정전으로 하였다[『고종실록』 31년 12월 16일].
참고문헌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
『궁궐지(宮闕志)』「경복궁배치도(景福宮配置圖)」「북궐도형(北闕圖形)」
이혜원, 「경복궁 중건이후 전각구성의 변화-「경복궁배치도」와 「북궐도형」을 중심으로-」, 경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