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식 창고와 서재 / 한정숙
인구 3만에 못 미치는 작은 읍의 농업고등학교 후문과 접한 신작로에 이어진 짧은 골목을 걸어 들어오면 마지막 집을 앞에 두고 우리 집이 있었다. 입구에 서면 남향의 안채가 보이고 오른쪽에 행랑채가 있으며 왼쪽엔 부모님의 돈벌이가 되었던 돼지우리와 헛간을 겸한 재래식 변소가 있는 ㅁ자형 집이다.
사립 안으로 들어오면 안채에는 중앙에 널찍한 방 한 칸이 있고 양옆으로 부엌과 곡식을 저장하는 항아리와 아버지께서 보시는 책이 빼곡한 광이 있었다. 바닥이 널찍한 나무판으로 된 광은 이를테면 곡식 창고이면서 서재인 셈이었다. 그곳엔 쉰이 넘어서까지 아버지께서 보시던 법률 관련 서적이 자리를 차지했고 간간히 불경도 보였으며, 제사에 필요한 물건들도 있었다. 6.25 동란 시절 경찰이셨던 아버지께서 제주도로 몸을 피하셨을 때 절에서 오래 계셨다고 하는데 그 영향인지 줄곧 불경을 외우셨다. 곡식 창고와 서재는 서로 어울리지는 않았으나 학교에 들어가기 전 여동생이랑 마당과 안방을 오가며 놀 때 책을 읽는 아버지의 모습을 매일같이 보았다. 상비약을 집에 두고 살던 시절이 아니라서 밤에 아이들이 열이라고 날라치면 시간을 가리지 않고 아버지는 우리들 옆에 허리를 곧추세우고 앉아 긴 시간 불경을 외워 주셨다. 목소리가 카랑카랑 하셨는데 그 기세 때문이었는지 아픈 기색은 점점 사라지기도 했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대학생이 되었던 열두 살 위의 오빠는 방학이면 그곳에서 학생들을 모아 과외를 하였다. 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던 오빠는 매번 등록금과 생활비 마련에 애를 먹어야 했는데 국립대학이라고 하나 늘 책만 붙들고 계시는 아버지와 종일토록 들에서 일하시는 어머니의 수완으로는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름께나 있는 집 아이들은 오빠에게 받는 과외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그 대학에 갈 수 있는 지름길이겠거니 했을 것이다. 돈이 필요한 오빠는 수준의 고하를 막론하고 낮은 책상 둘레에 까까머리들을 앉혔는데 태도가 흐트러지면 곡식창고 옆의 안방에서 건너가는 아버지의 큰소리가 학생들의 기강을 잡았다. 여름엔 덥고 겨울엔 추웠던 서재에서 아이들은 분명 인내심은 길렀을 것이다.
오빠의 방학이 끝나고 아버지도 집을 비운 시간에는 동생과 항아리를 두드려보기도 하고 사이를 돌며 숨바꼭질도 했다. 때로는 마분지 밀가루 포대 조각에 그림도 그리면서 마룻바닥을 뒹굴었다. 대부분 아버지의 책 일색이었던 책장엔 선생님이신 외삼촌댁에서 가져온 어린이용 도서와 어머니가 읽으시는 고전 소설도 끼어 있었다. 그 당시의 부모님들이 그랬듯이 어머니는 효와 우애를 중히 여기셔서 잠들기 전 우리의 머리맡에서 심청 이야기나, 흥부놀부, 의좋은 형제 이야기를 읽어 주셨다. 또 당신이 좋아하는 책도 소리 내어 읽으셨는데 춘향전을 비롯한 고전 소설도 들어서 덤으로 알게 되었다.
내가 글을 깨치고 맨 처음 읽은 책은 에이브라함 링컨이었다. 물론 그 책도 아버지의 책장에서 머물러 있다가 나에게 왔다. 표지는 딱딱하고 오래되어서 제목도 색이 바랬었다. 표지에 그려진 짧은 멜빵바지를 입은 어린 에이브의 모습은 책을 읽는 내내 눈에 밟혔다. 이야기를 읽는 동안 글의 내용도 그림도 모두 인상적이었으나 골라내자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란 링컨이 말을 타고 농사일을 돕는 그림이요 또 하나는 엄마를 여읜 에이브와 누이 셀리가 숲 속에서 손잡고 망연히 서 있는 모습이다. 처음 장면은 어떤 일이 있어도 강인하게 이겨낼 수 있는 아이로 자랄 것이라는 징표라서 나도 힘이 났으나 다음은 너무 일찍 겪은 큰 슬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오누이의 마음이 전해져 짠했다.
책을 읽으며 유난히 눈물을 많이 흘린 대목이 있었는데 노예들을 사고파는 시장 이야기였다. 노예 일가족이 주인의 결정대로 시장에서 팔리게 되는데 사가는 사람들의 요청에 따라 가족이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백인 아이의 놀이친구로 가는 아이, 유모로 가는 엄마. 일꾼으로 가는 아버지가 서로 헤어지기 싫어서 애태우며 울부짖는데 그들의 절규가 종이를 뚫고 내 가슴을 치면서 나약한 사람에 대한 연민의 씨앗도 함께 심었다. 아버지를 따라 노예 시장에 가서 보았던 것은 에이브가 대통령이 되어 노예 해방을 선언하게 하는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지나가는 소리로 들은 이야기로 아버지께서는 쉰이 넘어서까지 고시공부에 매달렸다고 한다. 초등학교도 번듯하게 졸업하지 못한 아버지는 어려서부터 무엇이든 당신 손으로 해결하는 데 익숙해서 하루 종일 일하는 중에도 점심때는 20리 길을 달려 읍내에서 책을 구해 오곤 했단다. 즐겨 쓰는 한자나 짧은 영어까지 독학하여 경찰이 되었고 그것도 모자라 법률공부에 뜻을 두었으나 끝내 본인의 포부를 이루지는 못하셨다, 그러나 늘 공부하는 모습을 자식들에게 보여 주셔서 고맙고 자랑스럽다. 문득 아버지께서는 그 때 <에이브라함 링컨>을 동경하지 않았나 하는 재밌는 생각을 한다. 나중에 불 쏘시개로 소용되거나 재래식 화장실에 대롱대롱 매달린 아버지의 책을 볼 때면 기분이 묘하기도 하였다. 간간히 붉은 색 펜으로 길게 그어진 줄을 보면 마음이 짠했다. 아버지의 책장은 조금씩 빈자리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붓과 먹이 신문지와 함께 들어오더니 붓글씨 연습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여기저기 검정물이 튀었다고 속상한 내색을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의 뜻은 꺾이지 않았고 광주로 서울로 출품을 하시며 즐거워하셨다.
생각해 보니 곡식 창고(사실 곡식 창고라니 어색하다. 그 시절 우리 항아리는 늘 가벼웠다.)와 서재는 불가분의 관계가 아닌가 한다. 곡식은 생명을 이어주는 씨앗이요, 책은 지혜를 키우는 곡식이니 말이다. 우리 집 곡식 창고는 늘 이름값을 못했다. 자꾸 퍼내어 자식들의 학비에 보태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재로서의 몫은 톡톡히 한 셈이다. 아버지의 꿈이 모양을 갖추었고, 어머니의 사랑이 늘 머물었으며 오빠의 도약을 위한 준비가 시작되고 나와 동생에게 지혜의 씨앗이 뿌려진 곳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