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
들숨
유축해서 젖을 먹였던 첫째의 젖떼기는 쉬웠다. 모유를 담아주던 젖병에는 분유를 타서 넣어 먹이고, 이제부터는 유축없이 젖을 말리면 되었다. 예민했지만 먹성 좋은 아기는 잠시의 배고픔을 견디지 못했고, 밥을 먹고, 입가심으로 분유 한 병을 쭉 들이켰다. 이렇게 쉽다고? 그러니까 나를 옥죄고 있었던 건 스스로 형성한 ‘모유 강박’이라는 거지. 조리원을 나올 때 원장이 “다르게도 생각할 수는 있다 아이가. 엄마들 아 낳기 전에 나쁜 거 마이 묵었다고. 모유가 영양분이 풍부하다는 건 그렇다 쳐도, 얼라한테 그게 제일 좋은 거라고, 아무도 장담 못 한다.” 막상 조리원 퇴원할 때는 저 양반이 나한테 이제는 분유를 팔려고 저러는 갑다 싶어서 귓전으로 흘려버렸던 말이었다. 젖병에 한 스푼, 두 스푼 분유를 넣으며 10달 전 조리원 원장의 말이 억센 그의 사투리와 함께 반복 재생되었다. 아무려면 어떤가. 내가 해방되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그날 밤, 늦도록 채널을 돌리다가 생리대를 파는 홈쇼핑 채널을 보고 반사적으로 생리대를 구매했다. 이젠 예전처럼 투덜대지 않고 생리와 생리통을 기꺼이 맞고 싶었다. 고급형 생리대 모든 사이즈, 1년 치를 꽉꽉 담아 보내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다음 날, 마트에서 종류별로 맥주도 구입했다. 흥이 나니, 멋도 추구해야지, 기세 좋게 수입 병맥주로 가는거야. 늦도록 윤도현의 러브레터 재방송을 보면서 남편과 맥주잔을 기울였다.
그리고 다음 달, 둘째 임신을 확인했다.
첫째의 활동량이 늘어갈수록 내 몸은 무거워졌다. 둘째는 첫째와 달리 급속도로 배가 나왔고, 마지막 달에는 쌍둥이를 임신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배가 컸다. 첫아이를 낳은 뒤 진행된 M자 탈모가 극에 달했던 시기였으니 당시 나는 여느 식당에서 쉽게 볼 수 있었던 달마대사의 족자 그림과 흡사했다. 이번만큼은 직접 모유 수유를 해야지 단단히 결심하고 아기를 낳았다. 두 번째 출산은 순조로웠고, 빠르게 진행되어서 병원에 들어간 지 3시간 만에 아기에게 첫 젖을 물릴 수 있었다. 당황스러웠던 모든 순간을 미리 겪어서일까. 내 온 신경은 오직 수유에 쏠렸고, 어떤 불편했던 상황도 ‘원래 그랬으니까’라는 생각으로 쉽게 무마되었다. 아기도 덥석, 젖을 물었고 20분 동안이나 쪽쪽 빨아댔다. 유난히 까맣고 곱슬한 머리카락이 빠글빠글, 동그란 머리통에 빼곡해서 자꾸 웃음이 났다.
“또 왔어? 나 보고싶어서 또 왔나? 이번에도 젖가슴 붙잡고 엉엉 울 거야?” 조리원 원장의 환대를 받았다. 당장 내게는 직접 수유라는 큰 목표가 있었으므로 조리원에서 다른 산모들과 대화를 한다거나, 원장의 툭툭 내던지는 말에 상처 입을 겨를이 없었다. 2009년에서 2010년으로 넘어가는 새해, 바깥은 온통 눈밭이었고, 신종 플루가 맹위를 떨쳤다. 그저 이 아기와 나, 둘이서 최대한 서로에게 적응해가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확실히 직접 수유는 유축보다 훨씬 수월한 점이 많았다. 젖가슴이 모유로 차는 느낌이 들면 바로 아기에게 젖을 물리면 되었다. 젖뭉침도 줄었고, 젖병을 씻고, 소독해서, 말리는 수고, 모유를 짜서 냉동보관하는 번거로움이 없었다. 대신 아기가 얼마나 먹었는지 가늠할 수 없었고, 아기가 젖을 달라 보채면 언제든 가슴을 드러내 젖을 먹여야 한다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먹성이 좋은 둘째는 활달하기까지 해서 잠이 적었다. 땡그란 눈을 데굴데굴 굴리며 팔다리를 버둥댔고, 온종일 하늘만 쳐다보다가 제가 알아서 뒤집었다. 아무리 불러도 형아만 바라보고 있는 엄마가 돌아보지 않는 게 답답했던지 침대 난간을 붙잡고 일어서곤 했던 녀석이었다. 활발해서 배도 금세 꺼지는지 끝도 없이 모유가 들어갔다. 첫째 때 늘 채워져 있는 느낌이 들던 젖가슴이 둘째 때는 헐렁했다. 이 아이가 젖먹을 때마다 보채는 이유가 젖이 모자라서가 아닐까 의심했다. 젖 늘리는 방법을 밤마다 고민했다. 아기가 막 까불다가 기껏 먹여둔 젖을 왈칵 토하기라도 하면 겁이 덜컥 났다. 이제는 더 먹일 젖이 없는데, 대체 얼마나 더 놀고 보채다가 잠을 자려는 걸까 아득했다.
애간장이 탈수록 젖도 돌지 않았다. 두 돌을 넘기며, 첫째에게도 손이 많이 갔다. 첫째는 한 달간 울면서 어린이집에 다녔다. 얼마나 눈물을 닦아냈는지 아이 뺨에 시커멓게 딱지가 앉았다. 그래서 어린이집 보내기를 포기했다. 죽이든 밥이든 더 울리지 말고 셋이서 껴안고 뒹굴어보리라 결심했다. 둘째에게 젖을 물리며 다른 손으로 첫째와 놀아주고, 책을 읽어줬다. 하루 세끼 제대로 챙겨 먹기는커녕, 아이가 남긴 밥을 후다닥 퍼먹거나 커피나 과자 한 봉지로 밥을 대신하는 날이 많았다. 몸은 점점 지쳐갔고, 지칠수록 젖량은 더 줄었다. 젖이 안 나온다고 아기가 내 가슴을 물어뜯어 젖꼭지 주변으로 피가 맺혔던 밤, 화가 치밀어 아기의 엉덩이를 세게 내리쳤다. ‘내가 더 먹어야 하나? 더 자야 하나? 더 노력해야 하나?’라는 고민이 끝없이 맴돌았지만, 힘을 내기 위해 무엇을 더 해야 하는지, 아니면 하지 말아야 하는지조차 모호했다.
남편이 늦게 온다던 어느 밤, 아이 둘을 나란히 재운 뒤 거울을 봤다. 초췌한 얼굴, 헝클어진 머리, 눈 밑까지 내려온 다크서클. 그리고 한없이 굽은 어깨, 작아진 것 같은 모습. 질염, 방광염, 위염, 어깨 염좌, 손사마귀로 범벅이던 내 몸.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온전히 아이에게만 집착하며, 정작 내 몸과 마음은 방치하고 있었음을. 젖을 늘리려 애쓰기보다 먼저 나를 돌보아야 했다. 죽이든 밥이든 뭔가를 만들어내려면 나부터 살아야지. 아이들이 잘 때 같이 눈을 붙이고, 끼니를 거르지 않도록 내 간식을 챙겼다. 젖병을 거부하는 둘째에게 빨대컵 훈련을 시켰다. 컵에 분유를 타서 마시게 했다. 모유 맛과 엄마 젖꼭지에 익숙한 아기는 고무 젖꼭지를 빨다가 구역질을 했고, 배고픔에 분유를 한 번에 다 마시고는 토하기 일쑤였다. 다시 처음부터 시작했다. 아기의 분유컵에 내 찻잔을 부딪히며 서로를 다독였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내 마음이었다. 젖이 부족하면 분유를 주면 되지. 모유가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 엄마가 아이를 키우는 거잖아.
해답은 시간에 있었다. 모유가 충분하든 부족하든, 중요한 것은 젖 한 방울이 아니라 나와 아이의 교감이었다. 조급해하지 않고, 조금 더 느긋하게.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려 결심했다. 첫째 때 그렇게 마르지 않던 젖도 자연스럽게 서서히 말라갔다. 모유냐, 분유냐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과 의지의 차원이었던 게다. 무엇을 주느냐보다 어떤 마음으로 돌보고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내가 먼저 건강하고, 행복해야 주변에 좋은 것을 전할 수 있음을 깨우쳐갔다. 두 번째 젖가슴 수난사가 내게 남긴 배움이었다. 이게 끝일까. 아직 할 이야기가 조금 더 남았다. 세 번째 아기가 찾아오며 펼쳐질 또 다른 국면의 이야기다. 과연 계속 수난만 당하는 내 젖가슴에 위로의 순간이 찾아들까?
첫댓글 1. 둘째 완모를 하신 거예요? 와
2. 셋째 이야기도 기다립니다. 제발 써주세요.
3. 밑줄 그은 곳이 많아요. ;;; 다 말씀드려 보겠습니다.
- 10달 전 조리원 원장의 말이 억센 그의 사투리와 함께 반복 재생되었다.
- 이젠 예전처럼 투덜대지 않고 생리와 생리통을 기꺼이 맞고 싶었다.
- 그저 이 아기와 나, 둘이서 최대한 서로에게 적응해가는 것, 그것이 중요했다.
- 둘째에게 젖을 물리며 다른 손으로 첫째와 놀아주고, 책을 읽어줬다. 😵💫
- 젖꼭지 주변으로 피가 맺혔던 밤,
- 어깨 염좌,
- 나는 온전히 아이에게만 집착하며, 정작 내 몸과 마음은 방치하고 있었음을.
- 모유가 아이를 키우는 게 아니라, 엄마가 아이를 키우는 거잖아.
- 중요한 것은 젖 한 방울이 아니라 나와 아이의 교감이었다.
- 무엇을 주느냐보다 어떤 마음으로 돌보고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첫번째 젖가슴 수난사를 읽었을 때, 10년도 더 지난 이야기를 어떻게 이렇게 생생하게 쓰셨는지 감탄했는데 두번째도 놀라울 정도예요! 당장 어제 일처럼 써주셔서 다음 편이 너무 궁금하고 한편으로 두려워요. ㅎㅎ 두려움이 걷히려면 세번째 수난사도 꼭 들어야 할 것 같아요! 기다리겠습니다 ㅎㅎ
와.. 정말 몰입해서 읽었네요. 둘째라서 조금은 더 순조롭지 않을까 했는데 전혀 아니군요.. 세번째 이야기도 정말 궁금해집니다. 저도 기다릴게요! :-)
저도 한 숨에 읽었어요..!
거울에 비친 모습을 적어내려간 부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어떤 다른 국면이 또 있는 것인 지, 세 번째 수난사도 너무너무 궁금하구요..
아이 낳을 준비를 하고 있는 친구들이 많은데,
친구들이 이런 부분들을 알고 참고할 수 있으면 너무 좋을 것 같네요..
책 내주세요 들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