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산 엘레지’
부산광역시 중구 광복동의 ‘용두산’이 배경으로 고봉산이 작곡하고 최치수가 작사한 대중가요로 작곡자가 직접 노래까지 부른 가요다.
용두산아 용두산아 너만은 변치 말자
한발 올려 맹세하고 두발 디뎌 언약하던
한 계단 두 계단 일백구십 사 계단에
사랑심어 다져놓은 그 사람은 어디가고
나만 혼자 쓸쓸히도 그 시절 못 잊어
아아~~아 못잊어 운다
♩♪♬ ~ ♩♪♬ ~
용두산아 용두산아 그리운 용두산아
세월 따라 변하는게 사람 들의 마음이냐
둘이서 거닐던 일백구십 사 계단에
즐거웠던 그시절은 그 어디로 가버렸나
잘있거라 나는간다 꽃 피던 용두산
아아~~아 용두산 엘레지
1957년 꽃잎이 바람에 흩날리던 늦은 봄날이다.
고봉산은 부산 중구 우남공원(현 용두산 공원)을 숨 가쁘게 오르고 있었다.
한발 두발 일백 구십 사 계단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울화통이 터질 것 같았다.
공원에 오르자 눈앞에는 바다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뿌웅~~~”
국제선여객터미널에서 뱃고동이 길게 울려 퍼졌다.
“어떻게 그런 배신을 할 수 있나?
그 동안 내가 얼마나 공을 들여 이 노래를 연습했는데 다른 가수에게 음반 취입을 시키다니......”
고봉산이 열심히 연습한 곡은 이재호 작사·작곡의 [울어라 기타줄]이었다.
그런데 지방공연에 매달려 있는 사이 그 곡이 인기 가수 손인호에게 넘어갔다.
가수 손인호는 본 카페 [인생이야기 노래 따라 사연 따라 7]에서 소개한 적이 있다.
고봉산은 울분을 달래며 다짐을 했다.
“내가 작곡을 못해서 생긴 일인데 누구를 탓할 것인가?
나도 작곡을 해야 해!
내가 부를 노래를 직접 만드는 거야!”
(작사가 정두수의 '가요 따라 삼천리'에서 일부 인용)
그날 이후 고봉산은 피아노와 씨름을 하며 작곡에 몰두하였다.
부산을 왔다 갔다 하며 항구의 정서를 익히고 열심히 노래를 만들었다.
당시 부산은 6·25 전란을 겪고 난 후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삶을 재건하던 도시였다.
가요계에선 부산에서 뜨면 전국에서 뜬다는 말이 돌았다.
고봉산은 마침내 출세의 길을 여는 히트곡 하나를 발표한다.
‘무역선 오고 가는 부산항구 제2부두’로 시작되는
[아메리칸 마도로스]가 공전의 대히트를 쳤다.
뉘라서 이 노래를 부르지 않았을까?
항구의 사랑과 이별을 절묘하게 녹인 이 노래 덕분에 '부산항구 제2부두'는 두고두고 '추억의 명소'가 되었다.
노래 가사 중
'닻줄을 감으려니 기적이 울고, 뱃머리 돌리려니 사랑이 운다’
는 대목은 절창이다.
항구의 아가씨를 울리고 떠나는 마도로스가 무정하지만 그것은 항구의 일상인 것을…….
☞ ‘고봉산’은?
1927년 황해도 연백 출신으로 6·25때 남하한 고봉산은 악극단을 따라다니며 가수의 꿈을 키운다.
그러다가 [금성좌] 전속 단원으로 데뷔하여 김민우라는 본명으로 트롬본을 불다가 무대 가수가 되었다.
해방 이후에는 [박단마 악단]에서 활약을 하였다.
1954년에 [오리엔트레코드], 1958년에는 [도미도레코드]의 전속가수로 활동하였다.
싱어 송 라이터로 활동하던 때 한 여자를 만나 달콤한 사랑에 빠졌다가 쓰라린 이별을 맛 보았다.
그리고 다시 찾은 용두산!
항구를 굽어보며 쓰라린 경험을 반추하던 그는 깨어진 옛 사랑을 그리워하며 용두산을 불러낸다.
그때 악상 한 줄이 바람처럼 다가와서 뇌리에 꽂혔다.
‘용두산아 용두산아 너만은 변치말자~~~’
작사가이기도 한 아세아 레코드사 최치수 사장이 용두산을 다룬 가사를 건네자 고봉산은 가슴에 갈무리해둔 곡을 끄집어낸다.
이것이 '용두산 엘레지'(일명 '추억의 용두산')다.
곡이 완성되자 고봉산은 죽어라 연습했다.
자기가 작곡한 곡을 헤어진 여인을 생각하며 직접 불렀다.
용두산에 올라 사람들이 보는 가운데서 노래를 불렀다.
뱃고동에 맞춰 소리를 내질렀다.
'용두산아 용두산아 너만은 변치 말자~~~’
이 노래는 전체 2절의 구조로 1절에서는 실연을 당한 남자가 추억이 어린 용두산에서 자신의 슬픔을 호소한다.
2절에서는 체념한 남자가 자신도 용두산을 떠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슬픈 가사와는 달리 노래는 오히려 경쾌한 느낌을 준다.
노래는 크게 히트했다.
용두산에서,
추억 한 올 사랑 한줌이라도 묻은 사람은 이 노래를 더욱 잊지 못한다.
사랑 하다 실연한 청춘들은 아픔을 달래기 위해 부르고, 고향 떠나 삶이 힘겨운 사람들은 추억을 되살리며 이 노래를 부른다.
'용두산 엘레지'는 이처럼 시간이 흘러도 세월을 건너 끝없이 레코딩 되고 있다.
고봉산의 노래 중에는 ‘잘 했군 잘 했어’도 있다.
70년대 라디오만 틀면 흘러나오던 ‘하춘화’와 함께 부른 노래다.
‘용두산 엘레지’는 고봉산 원곡 이외에도 나훈아, 최정자, 하춘화, 주현미, 송가인 등 여러 가수가 부른 리바이벌 버전이 있다.
당대의 인기 가수들이 한번쯤 부르는 명곡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노래를 두루 들어봐도 고봉산이 부른 원창의 분위기를 제대로 살려내는 가수가 없다.
지나친 오버액션에 의존하거나 단조로운 감정과잉으로 듣기에 거북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작곡가 이호섭은 노래는 변화된 시대에 맞게 불러야 한다며 부적절한 감정과잉을 자꾸 부추긴다.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이 노래를 부르는 고봉산의 창법을 주의 깊게 들어보면 섬세함, 애절함, 절규, 현실로 복귀하려는 평상심의 회복 따위가 각 장과 절마다 균형감각을 유지하며 절묘하게 배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마구 내지른다고 노래가 되는 것이 아님을 고봉산의 창법은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원곡 가수의 창법에 익숙한 사람들은 리바이벌 버전의 가수가 아무리 노래를 잘 불러도 원곡가수가 그리운 이유다.(가요평론가 이동순의 이야기에서…….)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임영웅의 노래도 마찬가지다.
그는 물론 타고난 가수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임영웅이 부르는 노래 뒤로 원곡가수의 노래가 그리워지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몇몇 주변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원곡가수의 노래를 접하지 못한 상태에서 ‘임영웅’이 부르는 노래를 먼저 접한 사람들은 임영웅의 노래가 더 좋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왜냐하면 원곡의 느낌을 모르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사람이 내 아내이다.
결론은 누가 부른 노래를 먼저 접했느냐에 따라서 평가도 달라지는 것 같다.
나는 물론 원곡 가수의 노래가 훠~얼씬 좋다.
왜냐하면 그 원곡가수의 창법과 목소리 때문에 그 노래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리바이벌 가수들은 자기만의 개성을 나타내려고 원곡의 느낌을 훼손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듣기가 거북하기 때문이다.
☞ ‘우남공원’은?
용두산 주변의 게딱지같은 피란민 판자촌은 1954년 화재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 불탄 자리에 공원이 조성되어 시민들의 휴식공간이 되었다.
그 공원의 이름이 [우남공원]이다.
자유당 독재시절 충성파들의 농간에 따른 결과였다.
우남(雩南)은 이승만의 아호였다.
4·19혁명 이후 공원의 이름은 [용두산공원]으로 되었다.
한 장소가 겪은 역사의 영욕과 사연을 노래 한 곡으로 모두 되새겨 볼 수 있다는 것이 노래의 또 다른 매력이 아닐까?
첫댓글 노래따라 사연따라 읽으며 송이골님대단 하시다 감탄합니다.
아까운 인재가 초야에서 지내는듯 하여 안타깝네요.
지금도 늦지 않으니
좋은글 써 보는게 어떨까요?
용두산아 용두산아 너만은 변치말자~~~
ㅎㅎ!
과찬이십니다.
노래의 사연을 알고 곡을 대하는 재미가 솔솔하여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