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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현당을 지나며 학정 이재익 시인의 발길은 역사의 의미를 추구한다. 2020.2.8. [중요 내용] 화면 번호 / 내용 5. ▣ <님께서 부르시면>_신석정 시비 6. ▣ <선유동천>_상현리 예찬비 10. ▣ 설니홍조 16. ▣ 상현당 안내문 17. ▣ 강릉김씨 충순공파 도표 ▣ 명주군왕 김주원 / ▣ 매월당 김시습 18. ▣ 북계 김선 선생 / ▣ 백취 김정서 장군 28. ▣ 질그릇,수레바퀴 30. ▣ 신천마을 벽화- <아이들> 43. ▣ 빈잔은 없다. 50. ▣ 오늘의 코스도표 1. 금정구 선동 상현리 상현당에 얽힌 역사학습의 의지를 다지며 출발! 2. 평소에 무심히 지나갔던 곳인데~ 3. 여기에도 시가 살아있었네. 4. 동천 호경 천고불후라! (시내 호수 그 좋은 경치 오랜세월 변함없으리.) 그래서 우리가 찾아오는 것이고,. 5. 4연중 앞 첫번째 연과 마지막 4번째 연은 생략하고 새김.
< 님께서 부르시면 > 신석정(辛夕汀, 1907~1974, 본명 錫正, 전북 부안 생)
가을날 노랗게 물들인 은행잎이 바람에 휘날려 흔들리듯이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호수에 안개 끼어 자욱한 밤에 말없이 넘는 초승달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포곤히 풀린 봄 하늘 아래 굽이굽이 하늘 가에 흐르는 물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파아란 하늘에 백로가 노래하고 이른 봄 잔디밭에 스며드는 햇볕처럼 그렇게 가오리다 임께서 부르시면……
6. < 선유동천 > 신선 노닐은 좋은 고장
유녀선남이 자운강림하야 ( 어질고 교양있는 남녀들 서기도 어리게 터전잡은 곳) 동천호경은 천고불후로다 (시내 호수 그 좋은 경치 오랜세월 변함없으리.) 상현하현이 시화예촌이라 (상현 하현 마을은 문장 그림 예향이고 ) 현조계손이 세세번영하리라. (자랑스런 조상의 얼 본받은 후손들 세세토록 번영하리라.) 선동상현송 가농 지음 / (해석 ; 학정) 7. 2020년 2월 초, 현재 코로나 폐렴이 유행해 조심스러운 때이다. 8. 내 몸에 나아가 내 자신을 깨닫는 사람이라야 만물을 만물에 맡길 수 있으며, 천하를 천하에 되돌릴 수 있는 사람이라야 속세에 있으면서도 속세를 초탈하리라. (채근담) 잠깐 집밖에 나와있는데, 여전히 속세인데 속세를 초탈한 마음들을 느끼시지요? 9. 조경원 사유지 옆을 지나며 10. 설니홍조(雪泥鴻爪)라? 우리가 열심히 찍고있는 이 발자국도 ' 녹기 시작한 눈 위에 남긴 기러기 발자국' 같은 것. 11. 상현당은 강릉김씨 충순공파 재실이다. 12. 다리에서 바라본 상현당 원경 13. 상현당 출입문 쪽 14. 숲 너머 상현당 전경 15. 복원도 16. 상현당 안내문, 강릉김씨 제실을 넘어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다. < 강릉김씨 충순공파 동래문중 상현당 >
강릉김씨 시조 주원공(周元公; 김주원)은 신라 제29대 태종 무열왕 김춘추공의 6세손이다. 신라 제38대 원성왕(787년)은 주원공이 왕위 계승의 대사를 재삼고양(사양함)한 덕망에 감동받아 강릉, 삼척, 양양, 울진 등을 관할 통치하겠큼 명주군왕(溟洲郡王)으로 책봉하였는 바, 이에 강릉 김씨 시조이시다.
이곳 금정구 선동 상현당 재실은 시조 주원공의 22세손 일성(日省)과 일신(日新) 형제에 따르며 형 일성은 <청간공파淸簡公派 파조> 로서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선생의 부친이시며 여기 김시습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동생 일신은 <충순공忠順公 파조>로서 손자 북계 김선 선생의 그 높은 충절과 충의의 선비정신을 함께 추모한다.
또한 북계 김선 선생의 큰 손자인 백취 김정서 당상관 절충장군의 임진왜란 때 그 많은 전공과 충절이 있어서 두 분(김선, 김정서)을 함께 봉안하여, 매년 음력 4월 첫 정일(丁日 ; * 그달의 네번째 날)에 제향을 모시는 사당이다.
일찌기 <북계(北溪) 김선(金璿)선생> 은 조선왕조 문종때 이조참의를 역임한 분으로써 세조 때 병자육신지화(1456 ; 세조의 왕위찬탈에 저항한 사육신의 충의)시에 울산군수(* 이조 참의에서 울산군수라면 좌천된 것)로 제수되었으나 벼슬을 버리고 천리밖 이곳(* 동래 상현리)까지 동생과 부친을 모시고 이곳에서 은둔생활하면서 충신불사이군 의 충절을 지키고, 백이숙제(伯夷,叔齊 *주무왕이 포악한 은나라 말왕 주왕을 칠 때 말렸던 의인 형제) 와 같은 대의를 몸소 실천하시고 인근 수재들에게 학문을 가르쳤든 높은 선비정신과 충절의 의미를 후손들께 전수하였다.
<백취 김정서(栢翠 金廷瑞) 의병장군>은 일찌기 담략과 지모가 출중하여 장재(將材)로 촉망 받든 중 1592년 음력 4월 13일( * 왜군이 부산항에 들어온 날, 그 다음날 부터 부산진성 전투가 시작됨) 임진왜란을 당해 열세의 위기에 처할 무렵 조국을 지키려는 충의 정신이 강한 선비 66명으로부터 추대를 받아 의병장군이 되었다.
그는 왜적 토벌에 진두하여 적들이 소산역(현 금정구 선동 하정마을)에 주둔하자 야음을 틈타 투석기를 설치, 소수정예정공에 의한 전법으로 일시에 적진으로 야습하여 왜적들의 시체가 골짜기를 가득 메우는 전과를 올렸다.
연이어 언양과 울산으로 진격하는 왜적을 격퇴코져 결사항전의 매복 유격전술로 토벌, 진로를 차단, 교두보를 선취하였고 다시 화왕산(현 경남 창녕읍)으로 가서 망우당 곽재우 의병대장과 합류 경상우도 군민 양식확보와 조달에 힘쓰며 장기항전에 많은 전공을 세운바로, 선조 31년 1598년 다대포 첨사에 제수되었으며, 선조 38년(1605) 선무원종공신 1등 서훈이 추서되셨고, 그 후 영조 45년(1769) 6월 가증통정대부 병조참의로 추증되어, 오늘날 부산 충렬사에 24공신중 수공신으로 봉안되어있다 .
또 대구 임란호국영남 충의단(망우당), 울산 임란공신 숭모제(충의사), 언양선무원종공신원모제(원모사)등 영남 방방곡곡에서 매년 춘추로 위국충절의 추모제향이 년중 배향되고 있다.
특히 왜군의 최초 침략지가 부산 동래였으며, 불시에 밀어닥쳐 관민의 허리를 찔린 위기사태에 의병장군의 장거를 결행한 것은 우리 의병사에 금자탑을 세웠던 것이다.
본 재실은 1907년 8월 정미년 신축되었든 3개동의 100주기를 맞아 부산지역 문중의 뜻을 모아 다시 재실 3개동을 증축 복원하고, 선령의 묘역을 단장하여 선대의 호국충절정신과 소홀해지고 있는 유교적 효의 정신문화유산을 지역사회의 후예 들에게 고유문화 전례의 학습장으로 기여하기를 바라면서 우리 후손들의 정성을 시민들께 알립니다.
2007년 정해 10월 강릉김씨 충순공파 동래문중 17. 안내문으로 작성한 도표, 아! 여기서 매월당 김시습을 만나다니. < 명주군왕 김주원에 대하여 >
신라는 56왕 역년 992년간 지속됐다. 크게 3대로 나누어 보면 1대 박혁거세로부터 28대 진덕여왕까지 28왕 성장발전기를 <상대>라고 하며, 중대는 29대 태종무열왕부터 36대 혜공왕 때까지 8왕시대는 신라 문화의 융성기로 <중대>라고 하며, 37대 선덕왕~56대 경순왕까지 20명의 왕시대, 쇠퇴기를 <하대> 라고 구분한다. 하대가 시작된 선덕왕이 후사 없이 재위 6년 만에 하세하자 군신들이 왕위계승을 의논하였다. 제일후보자는 제1의 재상 이찬 김주원(金周元; 태종무열왕 6세손)이었다. 김주원은 서울 북쪽 20리 밖에 살았는데 마침 큰 비가 와서 알천(閼川)이 불어나 주원이 건너올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임금 자리는 진실로 사람이 도모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 폭우가 하늘에서 쏟아지니 혹시 하늘의 뜻이 '김주원을 세우려하지 않음' 인가 보다. 지금의 상대등 김경신은 전왕의 아우로 본디 덕망이 높아 임금의 자격이 있다."
이 말에 뭇 신하들이 동의하여 김경신이 임금으로 추대되어 제38대 원성왕(능은 괘릉)으로 즉위했고, 그런 연후에 비가 그쳤다. 일기(日氣)가 역사를 바꾼 것이다.
왕이 못된 김주원은 대신에 멀리 명주(강릉)으로 옮겨서 그 곳 지방통치자(명주군왕) 으로 지냈고, 아들 김헌창은 웅천주 도독으로 있다가 아버지가 즉위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고, 822년 헌덕왕때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였다. 4년 후 김헌창의 아들 김범문도 고달산 산적 수신의 세력과 함께 난을 일으켰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김헌창과 김범문의 난은 내물왕계에게 왕위를 뺏긴 무열왕계열의 반발로 왕권에 대한 도전이 실패한 것이다. 매월당 김시습(金時習)
1. 본관, 영월 김씨, 1435(세종 17년~1493(성종 24년), 호 매월당(梅月堂). 법호 설잠(雪岑,봉우리잠), 신라 명주군왕 김주원의 후손, 음보(고귀한 가문의 자제가 과거없이 관직에 나아가는 것)로 충순위 지낸 아버지 金日省의 아들, 2. 5세에 이미 신동(神童) 소문, 세종 어전에서 시구를 주고 받은 수준 3. 20대, 소오산수(嘯傲山水 ; 휘파람불며 산수 유람 / * 嘯 ; 휘파람소/ 傲 ;거만할오) -산사에서 학업중, 세조의 왕위 찬탈에 저항, 방랑, 관동 관서 호남 기행 -효령대군 권유로 궁중의 내불당 불경언해사업 교정 참가 -정창손, 김수온 등 권신에 비위 거슬려 그만 둠 4. 30대, 고독한 영혼의 정사수도(靜思修道) -31세~37세 경주 남산 금오산실, 용장사 칩거, 당호 매월당이 호가 됨. -금오신화 (우리나라 최초의 한문소설) 지음 -37세~47세 서울 수락산 수락정사 등 10여년 산사 생활 5. 40대, 가증스런 현실 냉철히 비판, 행동으로 항거 -47세에 잠시 환속, 안씨와 가정 -1년후 1481년, 안씨가 곧 죽음에 충격, 성종의 폐비윤씨사건이 발생하자, 다시 유랑 6. 50대, 초연, 낡은 허울 벗고 떠돌다가, 마지막에 부여 무량사에서 59세로 입적. 부도가 무량사에 있음. 7. 이황의 평가 ; "색은행괴(索隱行怪) ", 자유분방한 학문추구 이해 못하고 한 異人으로 바라 봄. 8. 이이의 평가 ; <김시습전>을 짓고, 높이 평가함. "재주가 그릇 밖으로 넘쳐 흘러서 스스로 수습할 수 없을 만큼, 義와 倫紀가 드높다." "풍성을 듣는 사람은 겁장이도 용동하는 것을 보면 가히 <백세의 스승>" 9. 남효원의 평가 ; 생육신의 한 사람 [* 참고, 사육신] ;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남효온 평가) [* 참고, 생육신] ; 김시습, 원호, 이맹전, 조려, 성담수, 남효온 10. 남긴 문화와 사상 * 2,200여 수 한시, 자연과 閑(한가할 한) , 자신에 결핍됐던 사랑 염정시 많음. -매월당집, 금오신화 저술 -심유천불(心儒踐佛 ; 정신의 근본은 유교, 사색 실천은 불교) -효령대군의 추천으로 원각사 낙성식 찬시를 썼다. -완전한 한일(閑逸) 속에 자적하지는 않았다. (완전히 세속과 결별하지는 못했음) 11. 시호(사후에 나라에서 받는 존칭) ; 청간(淸澗), 부 金日省은 청간공파조로 인정됨. -무량사에 김시습 영정(김시습은 생전에 스스로 영정을 그렸다)이 있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글씨가 보존됨. 18. 학정의 안내와 해설 < 북계 김선(金璿) 선생 >
1. 신라 태종 무열왕의 후손 김주원이 시조인 강릉 김씨의 후손이다. 2. 생육신중 한 분인 매월당 김시습의 5촌조카, 매월당의 가르침과 영향을 받았다. 3. 조선 단종시대 벼슬 이조참의(인사권 부서, 차관급) 를 지냄 4. 세조의 왕위 찬탈에 항거하여 벼슬을 버리고, 동래 상현리에 낙향 은거했다. 5. 이곳 계곡을 북계라고 명명하고 그의 호가 됐다. 6. 단종이 돌아가신 영월 향해 집의 문도 북향이었다. 7. 북계정 뒤 언덕(현 상현당 옆 산중턱)에 선생의 묘소가 있다. 8. 특출한 충효 선비정신의 귀감이 되는 분이다.
< 백취 김정서 > 2015년 5월 27일 부산일보 기사. 임진왜란중 소산전투, 상현당과 관련
1. 1592년 4.14.에 부산진성이 함락(정발 장군 순절)되고 이튿날 4.15 반나절만에 동래성이 함락됨(송상현 부사 순절). 2. 왜군은 소산역에 진을 쳤다. ( 선두구동 하정마을) 3. 의병장 김정서(1561~1607, 상현당에 봉안됨) 중심 첫 의병할동이 시작됐다. 4. 규모는 미미했다. 의병장 10명, 의병 26명 모두 36명 규모 적은 병력으로 효과를 거두기 위해 야음을 틈탔고, 돌을 날리는 투석기가 주무기였으며, 치고 빠지는 게릴라식전투였다. 전후에 다대포 첨사로 부임. 5. 1608년 (선조 41년) 동래부사 이안눌이 정리해서 24명의 공훈을 정리하여 별전공신으로 선정했다. 당대에 조사 기록한 것이니 신뢰할만하다. 6. 평소 동래향교 중심의 충효교육과 14문중의 결합으로 중과부적(衆寡不敵) 위험이 뻔한 상황에서 목숨을 바치는 의기義氣를 발휘했다. 19. 건너편은 상현마을 20. 상재(桑梓)께서 한 포즈,멋지시다. 21. 농장이 있다. 운반이 좀 힘들 수 있겠다. 22. 상현당 앞에서 23. 올해는 눈다운 눈도 없이 매화꽃이 눈트고 있다. 폭설에 소나무 가지라도 부러지는 겨울다운 겨울은 멀리 가고 있다. 이제 봄을 찾아 나서는 길밖에는~! 24. 가을 같이 쏟아지는 청명한 하늘이 푸른 물결에 실려가는 날의 상쾌함~ 25. 오늘은 어쨋든 한 틈사이다. 과거와 미래가 됐던, 어제와 내일이 됐든, 오늘은 오늘이다. 나는 오늘 걷고, 내일도 걸으리라. 26. 길은 한순간 현존한다. 자연과 부처님 사이에 내가 있다. 27. 2/4 입춘이었고 2/8 오늘은 정월대보름. 날짜 가는 것은 새겨야 하겠지. 28. 마음이 넓으면 어마어마한 부귀도 질그릇 같이 하찮게 보이고, 마음이 좁으면 터럭 같이 사소한 일도 수레바퀴처럼 크게 보인다. (채근담) 29. 신천마을, 아침부터 노을이 질 때까지 꽃이 와서 피어요. 30. 아이들 아이들을 그대들의 소유라 여기지 말라 아이들이란 스스로 갈망하며 자라는 삶의 아들이며 딸들이다. 아이들은 그대들의 몸을 빌어 왔을 뿐 소유는 아니다. 그대들은 아이들에게 사랑을 베풀 수 있으나 단지 생각으로 아이들을 만들 수 없다. 그대들이 결코 도착 할 수 없는 집에서 아이들의 영혼이 살고 있으며 그대들이 꿈 속에서도 구경할 수 없는 내일의 마당에서 놀고있다. 오히려 아이들 닮기에 힘쓰되 아이들을 그대들 처럼 만들려 애쓰지 말라. 인생이란 결코 과거로 되돌아가지 않으며 과거 속에 정지해 있는 것이 아니다. 아이들은 마치 날아가는 화살처럼 그대들의 활시위를 떠나 앞으로 나아간다. 거룩한 사수 신께서는 무한대의 시간을 향해서 한 표적을 겨냥하여 온힘으로 활시위를 당긴다. 그분의 화살이 빠르고 보다 멀리 도착할 수 있도록. 청마가 뛰어 온 해 금정인 구서 [아무개 인] 31. 신천마을 벽화 32. 신천마을 벽화앞에서 33. 신천마을 벽화앞에서 34. 신천마을 벽화앞에서 35. 남천 36. 신천마을 정류소에서 37. 신천마을 정류소에서 38. 신천마을 정류소에서 39. 신천마을 정류소에서 40. 신천마을에서 다리를 건너 나온다. 다리 양쪽에 정자가 있다. 41. 회동수원지 상류쪽. 북계 김선 선생이 북계라고 명명하고 집의 문도 북향했다. 단종임금이 돌아가신 영월을 향했다. 42. 상현마을과 신천마을의 분기점이 되는 정자. 43. 항상 빈 잔에는 영롱한 빛이 담기고, 우정의 잔에는 술이 담기고, 비우지 못한 마음의 잔에는 영혼이 잠시 담긴다. 빈잔은 없는 셈이다. * 옥같은 시냇물은 그저 흘러가지 않는다. 물가에 좋은 정자를 남가고 흘러가네. (학정) 44. 금정구 구조는 까치다. 김정서 의병 장군의 자랑스런 활동을 추모하는 문구를 넣었다. 다리의 장식 모형을 까치형으로 만든 유래를 적었다. 45. 쿡보이집 46. 3분스피치 진지한 모습 47. 학정, 근래 드문 미소 모습을 잘 포착했다. 48. 겨울난 갈대가 조락해가고 있다. 49. 경륜장 부근 개울이다. 50. 오늘의 코스 ▣ 구서역, 마을 버스 3-1 ▶ ▣ 상현마을(오륜대 호숫가) ▶ ▣ 상현당 ▶ ▣ 신천마을 ▶ ▣ 다리 건너서 정자 ▶ ▣ 아스콘길 ▶ ▣ 경륜장 입구 ▶ ▣ 쿡보이 중국집 ▶ ▣ ▶노포동 전철종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