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8일(木) 우리가 맨처음 <탐방>한 곳은 북악산 기슭에 위치한 '길상사'였습니다. 소시적에 외국인 접대차 둬번 들른 바 있는 요정 '대원각'이 마치 뽕나무밭이 바다가 되듯 불교 도량(道場)으로 바뀌었네요. 그 요정의 으뜸 주모였던 김영한의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장안의 호사가들 사이에서 널리 회자되던 러브스토리였지요. 그 전말을 인터넷에 나와 있는 걸 약간 윤색하여 올리니 너그러히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길상사의 유래
시인 백석과 대원각의 기생 김영한의 사랑이야기를 담고 있는 길상사, 제 3공화국 시절 삼청각 청운각과 함께 3대 요정이 었던 대원각, 이 요정의 주인이었던 기생이 법정 스님께 시주하면서 길상사가 탄생한다 .
열여섯 나이에 기생된 김영한씨는 춤과 노래는 물론 글솜씨도 뛰어나 스승의 도움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한 신여성으로, 스승이 감옥에 투옥되어 면회길에 시인 백석을 운명처럼 만난다. 시인 백석은 영어교사를 그만하고 3년간 꿈같은 사랑을 하지만, 부모는 기생과 동거하는 아들을 못마땅하게 여겨 강제로 떼어놓기 위해 결혼을 시킨다. 그후 만나고 헤어지기를 3차례, 그러나 남북분단으로 영원한 이별이 된다. 북쪽에 남은 백석은 초기 상당히 인정을 받지만 이후 숙청되어 소식이 묘연해 지고, 남쪽에 있는 김한영은 대연각 기생으로 시작하여 결국 이 큰 요정의 주인이 된다.
박정희 대통령시절 서울의 유명한 3대 요정이라면 삼청각 청운각 대운각을 손꼽을수 있다. 당시 막강한 권력의 정치인들이 자주 찾던 최고급 요정으로 당시 절대권력자들의 전용 놀이터(?)였던 요정 대원각. 이곳의 주인이 김영한이라는 여인이다. 1997년 이곳 안주인 김영한 여사는 당시 불교계에 연을 맺고 있던 법정스님에게 대원각을 시주하려는 뜻을 밝힌다. 7천여평의 대지에 40여동의 건물로 이루어진 대원각, 당시 시세로도 1000억이 넘는 어마어마한 재산. 그러나 받지 않으려는 '무소유'의 법정을 끝내 설득해, 결국 대한불교 조계종 송광사 말사로 등록하여 길상사라는 절로 다시 태어난다.
이날 법정스님은 그녀에게 길상화(吉祥華)라는 법명을 지어주고, 108염주 한벌을 길상화 공덕주에게 걸어준다. 그리고 길상화의 법명을 따서 이 절의 이름을 길상사(吉祥寺)라 붙이게 된다. 그녀는 길상사 경내를 산책하면서 "나죽으면 화장해 길상사 경내에 뿌려주시오" 라 유언하고 11월14일 108염주를 목에 건채 파란만장한 83세의 일기를 마친다.
길상사는 천주교와도 연(緣)이 깊어 개원법회 때는 김수환 추기경이 참석하기도 했으며, 2000년 천주교신자인 최종태씨가 성모마리아상과 흡사한 형태의 관세음 보살상을 조각해 봉헌하여 경내에 안치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지금도 길상사 경내에 수녀님들과 천주교 신자 모습을 종종 볼수 있다.
성모마링아상과 닮은 관세음 보살상
길상화(기명한)와 시인 백석(白石)의 소설같은 러브스토리.
서울에서 태어난 김영한은 집이 몰락하자 가난 탓에 16살의 어린 나이에 몸이 약한 신랑에게 팔려간다. 우물가에서 빨래하는 사이에 남편은 그만 우물에 빠져 죽는다. 시어머니의 고된 시집살이에 눈물을 머금고 집을 나온 그녀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스스로 한성 기생 진향(眞香)으로 다시 태어난다. 미모가 뛰어난 그녀는 가무와 궁중무를 배워 서울의 권번가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젊은시절 김영한 / 18세 기생 진향(眞香)
잡지에 수필을 발표할 정도로 시와 글, 글씨 그림에도 재능이 뛰어난 기생이었다. 스물세살때 흥사단과 조선어학회에서 활동했던 스승 신윤국의 도움으로 일본 도쿄 유학을 떠나게 된다. 하지만 스승이 투옥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해 함흥 감옥을 찿아가지만 면회를 거정 당한다. 그리하여 신지식 여성에서 다시 기생의 길을 택한 그녀, 함흥기생이 되면
지역유지의 도움으로 스승의 모습을 볼 수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이때 시인 백석과 운명적인 만남이 시작된다.
시인 白石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천재시인이라는 수식어가 붙는 백석은 그녀를 위해 쓴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란 시이다. 김영한보다 네살더 많았던 시인 백석은 일본 유학을 마치고 함흥 영생여고 영어 교사로 있다가, 우연히 만난 기생 김영한과의 첫만남에서 그녀의 손을 잡고 다짐한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이별은 없을것"이라고 하지만 백석의 집안에서 아들이 기생에게 빠져있다는 소식을 듣고 서둘러 다른 여자와 결혼을 시키게 된다. 그러나 결혼식날밤 집을 빠져나온 백석은 영한에게 달려와 만주로 달아나자고 설득하지만 그에게 걸림돌이 될 것같은 마음에 영한은 끝내 거절하자 1939년에 혼자 만주로 떠난다. 이것이 이들 두사람 사이의 영원한 이별이 된 것이다. 백석은 만주를 유랑한 뒤 해방이 되어 다시 함흥으로 돌아왔지만 이미 영한은 다시 서울로 돌아간 뒤여서 만날 수 없었고, 그것이 영원한 이별이 된다. 이후 평생 백석을 그리워한 김영한은 1996년 2억원을들여 "백석 문화상"을 제정하고 같은 해에 대원각을 시주하게 된다. 침묵의 집 맞은 편에 무소유를 몸소 실천한 김영한 할머니의 공덕비가 세워져 있다.
길상화 공덕비
金英韓 여사의 일화
어느날 백석은 진향(김영한 기생이름)이 사들고 온 시집을 뒤적이다. 이백의 시 "자야오가(子夜吳歌)를 발견하고서는 그에게 자야(子夜)라는 아호를 지어준다. 자야오가는 장안에서 서역지방으로 오랑케를 물리치러나간 낭군을 기다리는여인, 자야의 애절한 심정을 노래한 시이다. 한때 고등학교 교과서에는 이백의 춘하추동 오언율시 중에서 가을편이
'장안달 밝은밤에'로 소개된 적있다. 이백 외에도 중국의 여러 시인들이 자야가를 썼다. 백석이 하늘이 맺어준 여인에게 '자야'라는 아호를 붙여 준것은 자신에게 닥칠 운명을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김영한은' 내사랑 백석' 에서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아미도 당신은 두사람의 처절한 숙명이 정해질 어떤 예감에서 , 혹은 그 어떤 영감에서 이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주셨던 것은 아닐까. '백석이 당시로서 최고의 직장인 고보 영어교사 자리를 그만 두게 된 것도 자야 때문이었다. 이런일도 있었다. 백석은 조선축구학생연맹전 대표선수 인솔교사로 서울에 와서는 학생들만 여관에 투숙시켜놓고 자신은 정작 청진동 자야의 집에서 사랑을 불태웠다. 이 사실이 밝혀져 함흥여고보는 발칵 뒤집어 졌고, 이에 백석은 미련없이 자야의 옆에 있기 위해 사표를 던지지만 운명은 그의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첫댓글 제목을 '인왕산..'이라 했더니, 인왕산은 청화대 뒷산이고 북악산이 맞는다는 제보가 있어 바꿨습니다.
길상사 현판에는 '삼각산길상사'라 되어 있지만 삼각산은 전체를 가리키는 말로 통상 북한산이나 도봉산을 말하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