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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는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14. 그러나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노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15.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16. 그리고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서 축복하여 주셨다.(마가복음10:13-16)
13. Some people brought children to Jesus for him to place his hands on them, but the disciples scolded the people. 14. When Jesus noticed this, he was angry and said to his disciples, “Let the children come to me, and do not stop them, because the Kingdom of God belongs to such as these. 15. I assure you that whoever does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like a child will never enter it.” 16. Then he took the children in his arms, placed his hands on each of them, and blessed them.
13. 사람들이, 어린이들을 예수께 데리고 와서, 쓰다듬어 주시기를 바랐는데, 제자들이 그들을 꾸짖었다.
13. Some people brought children to Jesus for him to place his hands on them, but the disciples scolded the people.
우리 기독교 신앙에서 아무리 강조하고 강조해도 부족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죽으심입니다.
사람의 죽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으로 창조되었던 사람들이 흙으로 다시 돌아가는 일입니다.
충격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일을 잊고 지냅니다.
실은 두려운 나머지 의식적으로 죽음과의 대면을 피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공생애 말기였습니다.
베드로는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했습니다.
주님은 그 그리스도의 고백을 듣자마자 그 때로부터(From that time on) 주님의 죽으심을 말씀하셨습니다.
21. 그 때부터 예수께서는, 자기가 반드시 예루살렘에 올라가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사흘째 되는 날에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마16:21)
21. From that time on Jesus began to say plainly to his disciples, “I must go to Jerusalem and suffer much from the elders, the chief priests, and the teachers of the Law. I will be put to death, but three days later I will be raised to life.”
이와 같이 그리스도 고백은 주님의 삶의 내용을 고백 이전과 고백 이후로 분명히 나누고 있었습니다.
기독인들도 그리스도의 고백 이전과 그리스도 고백 이후로 경계를 가릅니다.
그 전에는 병 고치는 간증
눈먼자 눈 뜨는 간증.......
하지만 그 이후로는 자신의 죽음을 고백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베드로의 그리스도 고백을 들으신 주님은 나를 따르는 자는 누구나 제 십자가를 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이해한다는 것은 곧 그의 죽으심을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의 죽으심 없이 그리스도를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누구든지 제 십자가를 감당해야 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기독인도 자신의 십자가를 말하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말하지 못할 것입니다.
물론 기독인들이 구원 구원 수없이 고백하고 있는 구원이란 죽어도 사는 하나님 나라의 영생을 이릅니다.
그 구원이 없는 기독교를 생각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행하셨던 오병이어의 기적이 물 위를 걸으시는 그런 기적들이 죄인에게 영생을 보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그 분의 십자가에 죽으심이 영생을 보장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살펴보세요!
눈 뜨고 병 낫고 혹은 예수님께서 처녀의 몸에서 신기하게 탄생하신 기사는 어떤 복음서에는 있고 어떤 복음서에는 없습니다.
그 기사가 있어도 복음서고 없어도 복음서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죽으심의 기사가 없는 복음서는 없습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다루지 않았다면 그것은 복음서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그 죽으심을 어떤 시각에서 보느냐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먼저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것입니다.
그 죽으심을 통해 우리는 속죄함을 얻었습니다.
8. 그러나 우리가 아직 죄인으로 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써,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을 나타내셨습니다.
9. 그러므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었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으리라는 것은 더욱 확실합니다.(롬5:8,9)
예수께서 대속의 제물이 되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그리스도로써 죽으셔야만 하셨습니다.
다른 길이 없으셨습니다.
그 죽음을 두고 바울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4.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의 죽으심과 연합하는 세례를 받음으로써,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살리심을 받은 것과 같이, 우리도 새로운 생명 가운데서 살아가게 하려는 것입니다.(롬6:4)
예수님의 사건이 나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덤에 묻히실 때 나 역시 거기에 묻혀 버렸던 것입니다.
그 연합으로 인해 나의 삶의 내용이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 연합이 뜻하는 것은 나로 새로운 생명 가운데 살아가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새로운 생명의 살아가는 삶이란 어떤 삶인가?
그 추상적인 표현이 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되어야 하는 것인가?
34. 그리고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무리를 불러 놓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오너라.(막8:34)
예수님을 따라서 나도 죽는 일입니다.
바울은 수없이 이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31. 형제자매 여러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 거는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합니다만,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고전15:31)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순간 주님은 그를 따르는 사람들의 삶의 내용을 밝히신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하지만 죽음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를 살펴봅시다.
베드로가 그리스도를 고백했는데 주님이 그 말씀을 하실 줄이야!
첫 번째로 주님의 그 죽으심의 예고를 들었을 때 베드로는 주님의 죽으심을 정면으로 막았습니다.
오늘 본문은 두 번째로 주님의 죽으심의 두 번째 예고 후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들은 주님의 죽으심의 말씀을 들으면서 서로 누가 크냐를 두고 다투고 있었습니다.
자신들에게로 불똥이 튈 수 있는 죽음의 암시에 질겁한 것입니다.
완전히 딴청을 한 것입니다.
이 상황에서 어머니들이 아기를 안고 예수님께 등장했습니다.
그 때 거기에는 수 만을 헤아리는 인파가 몰려있었습니다.
어중이떠중이의 이 무리를 12명의 제자가 통제하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소명감으로 온갖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입니다.
질서를 잡는다고 소리치며 다녔습니다.
얘들은 가라!
집에 가서 숙제해라!
제자들은 큰 소리로 어린아이들을 꾸중하면서 예수님께로부터 몰아내고 있었습니다.
수십 년 전 미군 부대가 있던 동두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주일이 되면 교회에서 번번이 일어나는 일이었습니다.
술 냄새를 풍기면 예배에 들어오는 술집 여인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장로님이 교회 입구를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주일도 장로님이 한 여인을 쫓아내고 있었습니다.
그 녀는 울부짖었습니다.
교회마저 나를 막으면 나는 어디로 가라는 말입니까!
이 여인은 첩첩산중의 고향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동생들의 학비와 병든 부모님의 병원비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서울로 상경했는데 서울역에서 인신매매단에 끌려간 것입니다.
돈이 많아도 몸을 파는 사람이 있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제가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일은 오래된 이야기도 아닙니다.
저는 그런 뉴스들을 신문에서 보고 라디오로 들으며 자랐습니다.
그 녀는 나락으로 떨어진 것입니다.
그 비참한 생활에서 자신이 다녔던 시골 교회를 생각해 낸 것입니다.
그런 발걸음이었습니다.
불과 몇 달 전입니다.
이 여인은 시골에서는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앞장세우고 찬송하며 교회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술로 억지 용기를 내서 교회에 발을 내디뎠던 것입니다.
그런데 헌신적인 장로님의 봉사 때문에 교회 들어갈 수가 없게 된 것입니다.
그 녀는 그 교회 입구에서 통곡한 것입니다.
이것은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인데 헌신하는 장로님과 술 먹고 교회에 온 이 여인의 통곡 중에 예수님은 누구의 소리를 들으셨을까요?
술 취한 여인의 소리인가?
경건한 장로님의 경고인가?
이것은 정말 기독교 신앙의 수수께끼입니다.
간디는 나는 예수님을 사랑하지만 예수 믿는 사람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영국 유학을 하던 간디 역시 교회 입구에서 장로님께 경건을 이유로 쫓겨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가 유색인종이었기 때문입니다.
14. 그러나 이것을 보시고, 예수께서 노하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14. When Jesus noticed this, he was angry and said to his disciples, “Let the children come to me, and do not stop them, because the Kingdom of God belongs to such as these.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께 적대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위해 목이 쉬도록 헌신 봉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제자들의 헌신을 보시고 노하셨습니다.
주님을 노하시게 하는 주님을 위한 헌신!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 봉사는 안 하는 것이 낫다.
너희가 지금 하나님 나라를 위해 봉사하는 줄 아는데 실은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들을 쫓아내고 있는 중이다.”
여러분들이 염두에 둘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께 드리는 여러분의 헌신이 예수님의 진노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정말 혼돈스러운 일입니다.
기독인들은 이런 혼돈에 빠지기 쉬운 것입니다.
경건의 이름으로 불경을 행하는 일입니다.
당시 바울도 유대인들의 행위를 이런 식으로 설명했습니다.
2. 나는 증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데 열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열성은 올바른 지식에서 생긴 것이 아닙니다.
3.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알지 못하고, 자신의 의를 세우려고 힘을 쓰면서, 하나님의 의에는 복종하지 않았습니다.(롬10:2,3)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열성을 다해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
그런데 그 봉사의 결과로 엉뚱한 나라가 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을 뺀찌 드라이버로 사용해서 내 의를 드러내는 내 나라를 세워둔 것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의 나라의 주인공들을 쫓아내고 있는 모순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이사야가 경고했습니다.
11. 주께서 말씀하신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12.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
13. 다시는 헛된 제물을 가져 오지 말아라. 다 쓸모 없는 것들이다. 분향하는 것도 나에게는 역겹고, 초하루와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참을 수 없으며, 거룩한 집회를 열어 놓고 못된 짓도 함께 하는 것을, 내가 더 이상 견딜 수 없다.
14. 나는 정말로 너희의 초하루 행사와 정한 절기들이 싫다. 그것들은 오히려 나에게 짐이 될 뿐이다. 그것들을 짊어지기에는 내가 너무 지쳤다.(사1:11-14)
바울의 말씀을 인용하자면 그 봉사는 올바른 지식에서 근거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공연히 하나님의 뜰만 밟는 봉사가 있는 것입니다.
내 것을 하나님께 가져다 바치고 내가 하나님의 진노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23. 율법 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아,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너희는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면서, 정의와 자비와 신의와 같은 율법의 더 중요한 요소들은 버렸다. 그런 것들도 반드시 했어야 하지만, 이것들도 소홀히 하지 말았어야 했다.
24. 눈먼 인도자들아! 너희는 하루살이는 걸러내면서, 낙타는 삼키는구나!(마23:23)
이 사람들은 이중 바보들입니다.
하나님께 십일조를 다 바치고 그 십일조 일로 저주를 받은 셈입니다.
23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다!”
주님은 지금 종교 행위와 종교의 정신을 분리하고 계셨습니다.
다음에는 이 둘을 비교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분명히 밝히고 계시는데 십일조 행위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정의와 신의와 자비라는 그 정신입니다.
유대인들은 종교 행위에 충실했지만 그 정신을 위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우선되어야 하는 것을 그 종교의 정신이라는 예수님의 지적입니다.
종교 정신이 그 종교 실천 행위의 상위에 자리 잡고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뒤집힌 경우 주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화려한 성전을 지어서 봉사하고 서로 싸우고 있다면 그것은 제정신이 아닌 것입니다.
유리창에 씌워진 모기장이 파리모기는 제대로 막아주는데 닭과 오리 뱀들이 제 마음대로 들락거리게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우선순위를 뒤집어 놓는 못된 짓을 하는 자들이 인도자라는 것입니다.
목사들이 주로 그 선봉자라는 것입니다.
“이거 바쳐라.
저거 바쳐라.
종교 행위와 그 정신이 무슨 분리가 되냐?
일단 바치고 보면 능력의 하나님께서 열 개의 창고를 짓게 하신다.”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뽑아 놓으니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주인공인 어린이를 예수님으로부터 쫓아내는 봉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소명감을 가지고.......
14. "어린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허락하고, 막지 말아라.
14. “Let the children come to me, and do not stop them,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예배 질서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성전 건축!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그 예배의 주인공인 사람 자체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화려한 성전, 예배 질서, 무슨 프로그램.......을 보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쫓겨가는 어린이들을 유심히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신앙은 사람 실존의 문제입니다.
모세의 율법에 충실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 법에 충성을 다 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법을 어긴 여인이 죽게 생겼습니다.
4.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5.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를 돌로 쳐서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 일을 놓고 뭐라고 하시겠습니까?"(요8:4,5)
법을 어긴 여인과 법에 충실한 유대인들!
하나님의 법은 이데올로기가 아닙니다.
법의 주인공은 사람입니다.
그것을 보시고 주님은 할 말을 잊으셔서 땅바닥에 글을 쓰신 후 마음을 가다듬으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너희 자신이 사람인 것을 잊었냐? 너도 같은 죄인이잖아!”
7.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8:7)
그 말씀에 그들은 손에 들었던 돌을 한 사람씩 내려놓고 돌아갔습니다.
그 때에야 “아 나도 사람이었구나. 나는 내가 사람이 아닌 줄 알았네.......” 했습니다.
그래도 2,000년 전 그 사람들은 최소한 자신의 잘못을 깨끗하게 인정한 것입니다.
바이든을 날리면이라며 말 같지도 않은 억지 부리는 요즈음 사람들과는 같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게 그 여인은 죽지 않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잔인한 봉사를 그만 두라는 것입니다.
특별히 기독교인들을 더 혼란하게 하는 봉사가 있는데 기적이 동반되는 경우입니다.
1.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방언으로 말을 할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울리는 징이나 요란한 꽹과리가 될 뿐입니다.
2. 내가 예언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내가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닙니다.(고전13:1,2)
마귀의 방식은 사람과 천사의 방언과 예언과 모든 지식과 산을 옮길 믿음을 동원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은 팥소 없는 찐빵이었습니다.
속아 넘어간 신앙 행위에는 사랑과 정의라는 팥소가 없었습니다.
밀가루 덩어리라면 눈감고 먹을 수는 있는 일이지만 그런 신앙의 소음을 만든 것입니다.
그 기적들은 귀가 째지는 신앙의 꽹과리 소음이었습니다.
이제 마귀의 이 방식은 사람을 더 혼란하게 합니다.
사랑의 형태를 갖춘 실천 행위들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재산을 내어주었습니다.
그들의 봉사는 제 몸을 불사르는 희생을 과시했습니다.
그럴 줄이야!
거기에 팥소가 없었던 것입니다.
3. 내가 내 모든 재산을 나누어 줄지라도, 자랑스러운 일을 하려고 내 몸을 넘겨 줄지라도, 내게 사랑이 없으면, 내게는 아무런 이로움이 없습니다.(고전13:3)
그들은 오른손으로 우리의 눈길을 빼앗은 다음에 왼손으로 사람을 속였습니다.
봉사로써 사람을 속인 것입니다.
그 내면에 사랑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일일이 나열하고 있는 것입니다.
4. 사랑은 오래 참고, 친절합니다.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뽐내지 않으며, 교만하지 않습니다.
5. 사랑은 무례하지 않으며, 자기의 이익을 구하지 않으며, 성을 내지 않으며,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6. 사랑은 불의를 기뻐하지 않으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
7.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딥니다.(고전13:4-7)
성경은 예수님께 나오던 어린이를 막아서는 안 되는 두 가지 이유(because)를 밝히셨습니다.
첫째 하나님의 나라 주인공은 이런 어린이였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이런 어린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방식을 어린이에게서 찾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14. 하나님의 나라는 이런 사람들의 것이다.
14. because the Kingdom of God belongs to such as these.
죄인들은 세상 방식을 하나님의 나라에 적용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 나라 사이에 완전한 차이가 있습니다.
이 세상의 주인공은 강자입니다.
이 세상은 양육강식의 법칙으로 돌아갑니다.
학교 교육도 그것입니다.
강자를 만들어서 경쟁에 이기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 주인공은 약자입니다.
그러다 보니 제자들에게 혼선이 온 것입니다.
제자들은 봉사를 내세우면서 약자를 내쫓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늘에서 오신 예수님은 제자들의 주객이 전도된 봉사의 모습을 보고 계셨습니다.
그런 봉사 때문에 우리들의 교회에도 교회 주인공들이 다 쫓겨나고 말았습니다.
15.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15. I assure you that whoever does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like a child will never enter it.”
이런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경우를 두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 부정적인 경우를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많은 사람이 번번이 어린이 같은 봉사 하는 것이 아니라 어른 같은 봉사로 하나님의 나라를 놓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봉사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먼저 새번역과 개역을 비교해 봅시다.
이 두 번역에서 차이점을 찾아보십시요.
새번역입니다.
15. 누구든지 어린이와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은 거기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15. whoever does not receive the Kingdom of God like a child will never enter it.”
개역은 이 본문을 이렇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시고
개역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이와 같이 받들라는 것입니다.
같은 본문을 두고 새번역은 어린이와 같이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받들다.(serve)
받아들이다.(receive)
이 두 번역, 개역이나 새번역을 두고 다 좋으네 하실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번역상의 실수입니다.
하지만 번역자조차 그것이 하도 그럴듯해서 착각한 모양입니다.
하지만 간과할 수 있는 문제이므로 검토하자는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다른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받들라는 인간이 그 주체입니다.
대상은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밥상을 차리면 하나님께서 그 음식을 드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어 데코마이는 받들다(serve)는 뜻이 아니라 받아들인다(receive)는 뜻입니다.
받아들이는 일은 수동적인 뜻입니다.
일의 주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밥상을 차리시고 그 대접을 우리가 받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상을 받아먹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보고 상을 차리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가 차리신 상을 잘 받아먹으라는 것입니다.
봉사로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실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봉사하신 것입니다.
그 결정적인 봉사는 십자가의 사건입니다.
구원의 사건은 이렇게 사람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사건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가 밤잠을 자지 않고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의대를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의사가 될 수 있습니다.
판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부자가 되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노력으로 절대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가는 일입니다.
보리수 밑에서 도를 닦으면 앞날이 눈앞에 훤히 보이는 도사가 되는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도사가 되어도 하나님의 나라에는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 나라에 들어가는 관건은 의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의에 관한 한 죄인은 그 일의 자격조차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면 의인이신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을 잘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이 다루는 가장 치명적인 죄가 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의 의존하기를 거부하고 독립선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도 하나 되어서 잘살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3.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자, 벽돌을 빚어서, 단단히 구워내자." 사람들은 돌 대신에 벽돌을 쓰고, 흙 대신에 역청을 썼다.
4. 그들은 또 말하였다. "자, 도시를 세우고, 그 안에 탑을 쌓고서, 탑 꼭대기가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의 이름을 날리고, 온 땅 위에 흩어지지 않게 하자."(창11:3,4)
당시 그들은 자신만만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 재료공학이 발달했기 때문입니다.
돌이라는 재료 대신에 벽돌을
흙이라는 재료 대신에 역청을 발명한 것입니다.
그 첨단의 재료 공학으로 하나님 없이 다 잘 될 줄 알았습니다.
그들이 무슨 비윤리적인 살인을 일삼은 것이 아닙니다.
돼지 대가리 놓고 거기에 절한 것도 아닙니다.
높은 탑을 하나님 없이 쌓은 다음에 우리 하나 되어서 잘살아 보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에 꼭 이런 사람들만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방식으로 잘살아 보려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 없이는 잘살 수 없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습니다.
2. 내가 너로 큰 민족이 되게 하고, 너에게 복을 주어서, 네가 크게 이름을 떨치게 하겠다. 너는 복의 근원이 될 것이다.(창12:2)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손에 끌려다녔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으로 인해 큰 백성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복을 받은 것입니다.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고, 내가 그 사람 안에 머물러 있으면, 그는 많은 열매를 맺는다. 너희는 나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6. 사람이 내 안에 머물러 있지 않으면, 그는 쓸모 없는 가지처럼, 버림을 받아서 말라 버린다.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서 태워 버린다.(요15:5,6)
결국 제 힘을 의지했던 사람들에게는 아무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들은 시나르 평야에서 하나 되어서 잘살아 보자는 비젼 때문에 도리어 벌을 받았습니다.
모조리 흩어지게 된 것입니다.
나라마다 다른 말을 쓰게 된 것입니다.
장로님 말과 목사님 말이 완전히 딴 판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싸움판이 되어서 두 쪽이 난 것입니다.
6. 주께서 말씀하셨다. "보아라, 만일 사람들이 같은 말을 쓰는 한 백성으로서, 이렇게 이런 일을 하기 시작하였으니, 이제 그들은, 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하지 못할 일이 없을 것이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그들이 거기에서 하는 말을 뒤섞어서,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창12:6,7)
제멋대로 생긴 돌 대신에 네모난 벽돌로
빗물에 씻겨나가고 말 흙 대신에 방수도 되는 역청으로
석탄 대신에 우라늄으로.......
그랬는데 하나님께서 세 번인가? 파도를 일으키시자 난리가 난 것입니다.
발전소가 물에 잠기고 만 것입니다.
모터가 작동을 멈추더니 냉각수 순환이 멈추고 만 것입니다.
핵발전소가 순식간에 핵폭탄이 된 것입니다.
실제 핵폭탄은 번쩍하면서 폭발하면 끝이 났습니다.
그런데 이 후쿠시마의 핵발전소 폭탄은 2011년부터 아직까지 꺼지지 않는 아비스의 지옥불이 되어서 지구 한 구석에서 여전히 지글거리며 타들어 가고 있습니다.
더러운 국물을 꾸역꾸역 토해 내면서.......
사람들이 만들어놓고 자랑했던 중심부에는 아직까지 사람이 접근도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너무 뜨거운데다 위험하고 땅 깊은 데에 있고.......
그러니 성경의 말씀대로 제가 판 함정에 제가 빠지고 만 것입니다.
거기서 빠져나올 길이 없습니다.
100년 사는 인간의 편에서 본다면 핵의 독성이 사라지는 것은 영원에 해당됩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 하신 일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일입니다.
그렇게 받아들이는 일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절대적인 조건입니다.
여기서 어린이처럼 받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차려주신 상을 받아들이는 태도를 이르는 것입니다.
어른이 받아들이는 태도를 취했다가는 하나님의 나라에 못 들어갑니다.
어린이 같은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 간다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어린이 역시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는 아직 윤리의식이 성숙하지 못했으니 어른보다 죄를 더 많이 짓고 있는 중입니다.
성경 말씀은 어린이처럼 되라는 것이 아니라 어린이와 같은 태도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를 이르고 있습니다.
그 때 결단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누구든지!
그러면 어린이와 같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젖먹이를 생각해 봅시다.
아이가 죽고 사는 것은 어머니를 받아들이는 유무에 달려 있습니다.
그 존재의 원인도 실은 어머니 자궁의 살점이었습니다.
이제 태어난 젖먹이는 제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어머니에게 젖을 먹고
어머니가 씻어 주고
기저귀 갈아 주고
병원 데리고 가고
어머니는 주고 아이는 받아들이고!
어른이 되면 엄마가 해준 밥이 싫다면서 라면 끓여 먹을 것인데.......
만약에 이 아이가 어머니가 주는 젖을 거부하면 죽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품을 받아들여서 그의 체온을 유지해야 할 것입니다.
어린이의 생존 방식에 주의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미친 바다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오라!
베드로는 젖먹이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딴생각 일절 없었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미친 파도 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 발짝 걷던 베드로에게 중학교 1학년의 물리 시간 공식 나부랭이가 생각난 것입니다.
물의 비중 어쩌고 그러자 벌써 한쪽 발이 물에 푹 빠졌습니다.
12 명의 제자들에게 쫓겨났던 어린이들도 어머니 품에 안겼든지 아니면 어머니 손에 이끌려서 주님 앞에 나온 것입니다.
이 어린이들처럼 구원의 사건은 하나님의 손에 끌려가는 일입니다.
이 일이 일어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를 수 없습니다.
주님이 미친 파도 위로 걸으라면 걷고
하지만 저 파도가 미쳤다는 생각에 주춤하면 그대로 물에 빠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어린이처럼 받아들이다 보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는 것입니다.
한국 교회의 어려움은 교회 프로그램에 따라서 하나님 받들다가 일어난 것입니다.
한국 교회에서 하나님의 뜻에 거스르는 봉사가 사라져야 합니다.
약자들을 교회에서 쫓아내는 봉사는 사라져야 합니다.
세상에서 떵떵거리는 장로님이 권력을 동원해서 불법 교회 건축을 봉사하고
억대의 그랜드 피아노 기증하는 봉사
거대한 커튼을
거액의 헌금을 하고 큰 자들이 작은 자들을 교회에서 쫓아내는 봉사!
그것은 주님의 진노의 대상이 될 것입니다.
사람의 봉사는 대부분 물질적인 것입니다.
하나님께 받아들이는 것은 영적이며 존재의 문제입니다.
그 하나님의 봉사가 우리로 하나님의 나라를 얻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 하나님의 봉사가 충만한 곳입니다.
타락한 교회와 교주들의 특징은 물질적인 봉사를 요구하며 가져오라는 데에 있습니다.
받아들이라는 영적 수용을 등한시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린이 같은 받아들임을 강조하는 데에는 대단히 위험한 요소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이단 때문입니다.
도대체 말이 안 되는 비상식도 신앙의 이름으로 받아들였다가는 난리가 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몹시 낯을 가리는 어린아이와 같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낯선자가 눈에만 보여도 질겁합니다.
신뢰가 없는 자가 주는 사탕을 먹었다가는 죽습니다.
5. 양들은 절대로 낯선 사람을 따라가지 않고, 그런 사람을 보면 도리어 달아난다. 양들은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요10:5)
여러분 이단 앞에서 중요한 것은 그 낯선 목소리입니다.
여러분은 낯선 목소리와 성경의 말씀을 분명히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그 목소리가 아니면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그들이 당신의 영혼을 유괴할 것입니다.
이단들은 대부분 성경을 능가하는 경전이나 교리서나 협박하는 설교가 있습니다.
이것들을 먹으면 죽고마는 독버섯입니다.
이것들이 낯선 목소리입니다.
원리 강론
엘렌 G 화이트
몰몬경
신세계역 성경
신천지도 저들만의 교리를 주장하는데 그 성경 외의 것들
교주들의 절대시하는 교리들 설교들.......
성경 무오설은 있어도 교리 무오설 설교 무오설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성경 앞에서 어떤 교리도 설교도 비판의 대상일 뿐입니다.
바르트는 예수님과 기록된 성경과 강대상의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정의했는데 저는 생각이 다릅니다.
강대상의 설교는 성경에 부합될 때 하나님의 말씀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과 성경 이 두 가지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저희를 돕는 교회 목사님과 통화를 했는데 신천지가 교회에 들어와서 교회가 홍역을 치렀다고 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봉사를 하고
헌금 많이 내고
교인도 데려오고
그러더니 거짓 정보로 목사님과 교인들을 이간질했다는 것입니다.
몇 교인들을 결국 떨어져 나갔다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는 헌금, 봉사 다 필요 없습니다.
우리 교회에 여러분들의 제정을 요청할 그런 문제는 없습니다.
제가 바라는 것은 유일한데 여러분이 하나님의 마음을 품으라는 것입니다.
철저히 성경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제가 한 설교조차 성경을 통해 비판해야 옳습니다.
교인들의 말 중에 거짓 정보를 주의해야 합니다.
바이든이 날리면이라고 하는 사람을 주의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다 보니 목사님이 원수가 되었습니까?
원수 갚는 일을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
아니면 그런 똥통에서 발을 빼시는 것이 옳습니다.
나중에는 똥밭에서 함께 뒹굴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집사 장로 목사를 내 편으로 만들려는 노력도 무의미한 것입니다.
조용히 기도하시다가 그런 데에서는 도망가는 것이 대수입니다.
교회는 언제나 사탄의 위협 속에 존재합니다.
달내 교회라고 예외는 없습니다.
그 비바람을 맞으면서 열매가 익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이겨낼 주체적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 신앙의 중심에 항상 성경이 있어야 합니다.
받드는 일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받드는 일로 질투하다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처럼 되는 수가 있습니다.
이 부부는 바나바가 교회에서 존경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36. 키프로스 태생으로, 레위 사람이요, 사도들로부터 바나바 곧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의 별명을 받은요셉이,
37.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밭을 팔아서, 그 돈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행4:36,37)
바나바는 1,000만 원짜리 밭을 팔더니 1,000만원을 그대로 헌금한 것입니다.
초대 교회 사람들은 이 바나바를 엄청 존경한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있던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바나바처럼 사람들에게 존경받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받드는 흉내를 내본 것입니다.
하지만 바나바처럼 1,000만원짜리 밭을 팔아 그 돈을 손에 쥐고 보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500만원을 챙기면서 다 낸 척한 것입니다.
그렇게 받들다가 두 부부가 죽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은 바나바를 따라서 돈 내다가 망한 것입니다.
그럴 때는 하나님 나는 아까워서 헌금 못 하겠어요 하시라는 것입니다.
일원도 헌금을 안 해도 좋으니 정직하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이런 거짓말을 안 하는 사람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펴고 그 은혜를 조용히 받아들이는 일이 우선입니다.
16. 그리고 예수께서는 어린이들을 껴안으시고, 그들에게 손을 얹어서 축복하여 주셨다.
16. Then he took the children in his arms, placed his hands on each of them, and blessed them.
주님은 이 말씀을 마치신 후에 정말로 그 아이를 껴안으신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쫓겨났던 아이들을 축복하신 것입니다.
말씀만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브는 금단의 열매를 먹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금지된 일을 제 손으로 한 것입니다.
알고 있는 것과 실천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였습니다.
후쿠시마도 보십시오.
그 나라는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과학자들이 있는 나라입니다.
그들이 이 오염수를 바다에 버리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 모를 리가 없습니다.
모르고 그 일을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핵 오염수를 바다에 내버리는 일은 인류 역사상 처음 해 보는 일입니다.
그들은 비용에 가장 적게 드는 일이라서 택한 것입니다.
어떻게 되든지 말든지 일어날 일에 눈 감아버리고.......
그들은 2차 대전을 일으키고 핵폭탄 맞은 것을 보복하는 중입니다.
아니면 멈추어야 합니다.
누구는 과학적인 검증된 정제수 운운하던데 그것은 생짜 거짓말입니다.
과학의 지식이 없어도 아주 상식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현대의 첨단 과학이 모인 곳이 당연히 원자력 발전소입니다.
일본이라면 드러난 과학의 선진국입니다.
거기에 모든 두뇌가 다 모인 다음 모든 요인(factors)을 고려해서 그 발전소를 설계하고 건축한 것입니다.
과학이 다 동원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선진국이 빼먹은 요인이 있었을 줄이야!
그 바보들이 발전소를 낮은 곳에 지은 것입니다.
한국에는 1+1=2라고 계산 잘하는 사람이 있는데 거기 일본에는 없었던 것입니다.
모조리 1+1=100 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랬으니 그 사람들이 그런 사고가 날 짓을 했던 것입니다.
실은 이것이 인간 첨단 과학의 현주소지입니다.
첨단 과학과 기술이 모여서 낮은 곳에 발전소를 세운 것입니다.
그 요인(factor)를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것이 엄연한 현실입니다.
물론 다음 과학자들은 후쿠시마를 경험해 보고 높은 곳에 발전소를 지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다른 요인(factors)이 또다시 어떤 형식으로 나타날지는 모릅니다.
과학자들은 그 때는 이렇게 고백할 것입니다.
아이고 우리가 너무 높은 곳에 발전소를 지었네.......
과학자들은 제 양심조차 버렸습니다.
눈알을 부라리며 100% 과학의 확신을 외치는 사람들이 있던데 과학에는 확신이라는 단어가 없습니다.
오직 확률이 있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도 모든 요인을 알지도 적용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확신이란 무당의 전문 용어입니다.
영생을 구하려고 예수님을 찾았던 부자 청년은 현명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지적이 항상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주님은 그에게 또다시 옳은 말씀을 해주신 것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청년은 충분히 현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께 등을 돌렸습니다.
지옥 가기로 정한 것입니다.
21.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고자 하거든, 가서 네 소유를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그리하면, 네가 하늘에서 보화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22.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면서 떠나갔다. 그에게는 재산이 많았기 때문이다.(마19:21,22)
성경은 그 원인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데 이 청년에게 재산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이 옳은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 스스로 파멸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실천하지 못한 것입니다.
그를 지배하는 진정한 주인은 돈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 저는 당신을 존경해요.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나눈 다음에 예수님을 등지고 떠났습니다.
그런데 일본의 이웃 나라의 행위는 무엇 때문인가?
이 후쿠시마에 대한 짓거리를 묵인하는 것이 돈 때문인가?
무당 때문인가?
도대체 알 수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주님은 그의 말씀을 대중 앞에서 실천하신 것입니다.
약자를 팔에 안으신 것입니다.
미국도 흑인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안 것이 최근이었습니다.
일억 명의 흑인을 죽이고 팔아먹고 태초에 하나님께서 흑인도 사람으로 만드신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
그들도 사람이구나!
그 일은 최근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그들을 팔로 껴안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손에 왕 자를 쓰고 나온 이 정부의 봉사 때문에 참으로 걱정입니다.
동해를 일본해라고 인정하는 정부는 독도를 일본놈들의 섬으로 인정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민족의 이익도 미래도 양심도 저버리고 있습니다.
생명을 역행하는 이들 때문에 간절히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역사하소서.
하나님 정의를 드러내소서.
하나님께서 살아계심을 만천하에 드러내소서.
전능하신 주여 우리의 원수를 갚아주소서.
약자를 죽이는 무리의 봉사로 이 세상이 멸망으로 치닫고 있나이다.
하나님 역사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