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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부사시사의 고향 보길도를 찾아서 | 정모/여행/산행후기 학산 | 조회 3 | 2004/05/30 15:43:29 어부사시사의 고향 보길도를 찾아서 비를 맞으며 새벽에 출발하기가 좀 부담스러웠으나 그래도 약속을 한 터라 그냥 가기로 결정을 한다 차로 4시간 여를 달려 땅 끝 마을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또 배를 타고 거의 한 시간 가량을 가야 내가 가고파했던 보길도를 간다. 섬이라야 별거 있겠느냐 하면서도 설래이는 가슴은 소풍가는 어린아이 처럼 설레인다 뭍에서의 여행과는 또 다른 느낌이 든다 물론 보길도라는 섬이라서 뿐만은 아니리라 고산 윤선도! 그분의 숨결과 님의 벗 오우가를 읊은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는 감동. 당대의 대 문장가이시고 시인이시며 조정의 지체높으신 그분께서 어찌 안락한 생활을 마다하고 이 멀고먼 섬 보길도를 당신의 마지막 삶의 터로 택했을까?.... 땅 끝 마을에 도착한시간은 오전 9시 새벽잠까지 설쳐 가며 일찍 출발하기를 잘했다싶은 생각으로 마음은 한결 가볍다 다행이 비는 그치고 나그네의 심사를 달래나 주듯 바다에 비친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내려가고 비릿한 갯 내음이 코끝을 스치는 바다바람이 제법 쌀쌀하기까지 하다. 바다하면 망망대해 널 다란 푸른 바다를 연상케 하지만 이곳 남쪽바다는 다도해의 올망졸망한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어 넓은 호수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다 뱃길 따라 양쪽으로 부표들이 마치 넓은 연못에 피어있는 하얀 연꽃처럼 푸른 바다를 가득 메우고 또 어찌 보면 물위에서도 신기 하리만큼 줄과 열이 잘 정돈 된 하얀 모자를 쓴 해군 병사들이 도열하고 있는것 같기 도 하다. 여기가 어부들의 논 밭!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이 이런 것이구나! 뱃머리에 서서 흘러가는 크고 작은 섬들을 바라보는 풍광 또한 아름답다 어느덧 그 육중한 배는 보길도 조그마한 청별 항 선착장에 도착한다 여기까지 오면서 머리 속으로 그려보았든 지상낙원 보길도! 물론 상상 속의 그런 곳은 아닌 성싶다 보길도에는 격자봉(格紫峰)과 미산(微山) 두개의 산으로 둘러 싸여있고 보길도의 산세는 마치 갓 피어난 한 포기 연꽃과 같다하여 부용동(芙蓉洞) 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에서 고산은 많은 정자 와 27채의 집을 지었다하나 세연정 외에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빈터만 남아있을 뿐이다 어떤 곳은 논과 밭으로 변해버렸고 그 터마저도 찾을 수가 없으니 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부끄러움을 금 할 수 가없다. 고산 선생은 이곳에서 약15년 간을 보내시면서 어부사시사 40수 한시 53수를 지으셨으니 이곳은 가히 우리 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문학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특히 이곳은 조선조의 원림(苑林)연구와 우리 시가 문학연구의 바탕 이 되는 곳 이기도하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세연정(洗然亭)(사적368호 1638년 52세때 세움)정자마루에 오르니 인쇄하기 인쇄 24. 10. 8. 오전 9:12 Daum 카페 https://cafe.daum.net/_c21_/bbs_print?grpid=SXAN&fldid=K1op&dataid=24 1/3 고산의 체취가 물씬 풍기듯 푸른 솔향이 감미롭기 그지없다 기둥이며 창살문, 토방에 놓인 계단석, 정자 앞 연못 그리고 아름 들이 서있는 나무들이 주인 없는 이곳을 설명이나 하듯 고색창연(古色蒼然) 하다. 이곳은 선생이 풍류 적 삶을 만끽하신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이곳에 수중보, 동대, 서대, 등을 지으신 것은 그 당시로서는 너무나 호사스러운 삶이 안인가 여겨 지기도하나 고산의 삶은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격자봉 쪽으로 십리를 더 들어가면 낙서재(樂書齋)(사적368호)가 있다 선생의 7차에 걸친 보길도에 들어오심은 그의 18년 간의 귀양살이의 고단한 삶과 관계가 있으리라. 선생은 "세속의 모략중상이 낚싯배까지 이른단 말인가 그러니 나는 다시 어디로 가리오" 라고 탄식하시며 이곳 보길도를 찾아 머문 것이다. 사치스럽다고도 하나 고산의 절제와 검 소의 생활모습을 엿 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시를 노래한다 黃原浦裏芙蓉洞 황원포 안에 자리한 부용동 矮屋三間蓋我頭 좁다란 초가삼간 내 머리 덮어 麥飯雨時瓊玉酒 비 올적에 보리밥에 경옥주 한잔 終身此外更何求 종신 토 록 이외엔 바라지 않아. 낙서제 앞으로 흐르는 낭음계(郎吟溪)(사적368호) 지금은 상류에 저수지를 막아 흐르는 물이 적어 그 바닥을 드러내 볼품 없는 개울로 변했지만 당시에는 맑고 깨끗한 물이 굽이처 흐르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시내였으며 고산은 이 냇물을 두고 "명경지수 맑은 물이 흐르는 신선 골"이라 노래하셨으리라 격자봉과 미산에서 합 수하여 흐르는 물이 구비 처 흘러 곡수를 이루니 이곳에 대를 쌓고 정자를 지어 곡수대(曲水臺)라 이름하였다 고산은 곡수대에 앉아 그의 벗 시냇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겼으리라. 이제 그 터는 논으로 변해버렸고 대를 쌓았던 돌은 논두렁길로 바뀌었으니 덧없이 흘러간 세월의 무상함은 나그네 의 발걸음을 무겁게 할 뿐이다 고산은 보길도에서의 삶이 다양하셨음을 엿 볼 수 있다 그의 한결같은 유학이념의 구현과 실천의 노력 속에서도 현실의 생활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석실(石室)(사적368호)축조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오시게 된 동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1636년 12월에 발발한 병자호란으로 인조대왕께서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하셨으나 청군에게 포위 당하고 빈궁과 원손 대군은 강화도에 피난 하셨다는 급박한 소식을 듣고 늘 나라에 대한 은혜를 갚지 못하시어 앙앙하시던 선생께서는 향리 제자와 청년들을 모아 의병 대를 조직하여 우선 강화도에 피난중인 빈궁과 원손 대군을 구할 양으로 해남연동에서 해로를 따라 강화도로 가는 도중 강화도는 이미 함락되었다는 슬픈 소식을 접하고 회항하는 도중 더욱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인조대왕께서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하셨다는 내용이었다. 고산은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으리라는 마음으로 배에서 내리지도 않고 탐라(제주)를 향하여 항해하던 중 보길도를 지나다 황원포에 잠시 닻을 내려 상륙을 한다 이곳에서 보길도의 아름다움과 수려함이 그 어느 곳에 비하랴 24. 10. 8. 오전 9:12 Daum 카페 https://cafe.daum.net/_c21_/bbs_print?grpid=SXAN&fldid=K1op&dataid=24 2/3 고산은 이곳을 은서 지로 정하신 것이니 이것을 보고 혹자들은 고굉이 타이티섬을 발견함과 흡사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있 나는 또 다른 생각을 해본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에게 있는 모든 역량을 나라와 임금님을 위하여 받침으로 백성으로서 신하로서의 할 일을 다함이라 할 것이 아닌가 어찌 보면 나만의 안위를 위하여 현실을 외면한 것으로도 보여지나 이는 사가들의 정확한 해석이 있을 것으로 사료되어 나의 조그마한 생각을 피력할 따름이다 어느덧 해는 격 자 봉을 소리 없이 넘어가고 낮에 타고 온 배는 뱃고동을 울리며 상념에 가득 차있는 나그네의 발길을 재촉한다 오우가(五友歌)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 빛이 맑다 하나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소리 맑다 하나 그칠 적이 하노매라 맑고도 그칠 뉘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루나니 아마도 변치 않음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이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 구천에 뿌리 곧은 줄을 그로 하여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비었느냐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치니 밤중의 광명이 너 만 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2001. 8.10 보길도 세연정에서 학산 씀 24. 10. 8. 오전 9:12 Daum 카페
어부사시사의 고향 보길도를 찾아서 | 정모/여행/산행후기
학산 | 조회 3 | 2004/05/30 15:43:29
어부사시사의 고향 보길도를 찾아서
비를 맞으며 새벽에 출발하기가 좀 부담스러웠으나 그래도 약속을 한 터라 그냥 가기로 결정을 한다
차로 4시간 여를 달려 땅 끝 마을에 도착을 하고
그곳에서 또 배를 타고 거의 한 시간 가량을 가야 내가 가고파했던 보길도를 간다.
섬이라야 별거 있겠느냐 하면서도 설래이는 가슴은 소풍가는 어린아이 처럼 설레인다
뭍에서의 여행과는 또 다른 느낌이 든다 물론 보길도라는 섬이라서 뿐만은 아니리라
고산 윤선도!
그분의 숨결과 님의 벗 오우가를 읊은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다는 감동.
당대의 대 문장가이시고 시인이시며 조정의 지체높으신 그분께서
어찌 안락한 생활을 마다하고 이 멀고먼 섬 보길도를 당신의 마지막 삶의 터로 택했을까?....
땅 끝 마을에 도착한시간은 오전 9시
새벽잠까지 설쳐 가며 일찍 출발하기를 잘했다싶은 생각으로 마음은 한결 가볍다
다행이 비는 그치고 나그네의 심사를 달래나 주듯 바다에 비친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내려가고
비릿한 갯 내음이 코끝을 스치는 바다바람이 제법 쌀쌀하기까지 하다.
바다하면 망망대해 널 다란 푸른 바다를 연상케 하지만
이곳 남쪽바다는 다도해의 올망졸망한 섬들이 옹기종기 모여있어 넓은 호수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하다
뱃길 따라 양쪽으로 부표들이 마치 넓은 연못에 피어있는 하얀 연꽃처럼 푸른 바다를 가득 메우고
또 어찌 보면 물위에서도 신기 하리만큼 줄과 열이 잘 정돈 된
하얀 모자를 쓴 해군 병사들이 도열하고 있는것 같기 도 하다.
여기가 어부들의 논 밭!
잡는 어업에서 기르는 어업이 이런 것이구나!
뱃머리에 서서 흘러가는 크고 작은 섬들을 바라보는 풍광 또한 아름답다
어느덧 그 육중한 배는 보길도 조그마한 청별 항 선착장에 도착한다
여기까지 오면서 머리 속으로 그려보았든 지상낙원 보길도!
물론 상상 속의 그런 곳은 아닌 성싶다
보길도에는 격자봉(格紫峰)과 미산(微山) 두개의 산으로 둘러 싸여있고
보길도의 산세는 마치 갓 피어난 한 포기 연꽃과 같다하여
부용동(芙蓉洞) 이라고도 부른다.
이곳에서 고산은 많은 정자 와 27채의 집을 지었다하나
세연정 외에는 그 흔적조차 찾을 수 없고 빈터만 남아있을 뿐이다
어떤 곳은 논과 밭으로 변해버렸고 그 터마저도 찾을 수가 없으니
후세를 살아가는 우리들로서는 부끄러움을 금 할 수 가없다.
고산 선생은 이곳에서 약15년 간을 보내시면서 어부사시사 40수 한시 53수를 지으셨으니
이곳은 가히 우리 문학사에 큰 획을 그은 문학사적 의미가 큰 곳이다.
특히 이곳은 조선조의 원림(苑林)연구와 우리 시가 문학연구의 바탕 이 되는 곳 이기도하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세연정(洗然亭)(사적368호 1638년 52세때 세움)정자마루에 오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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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10. 8. 오전 9:12 Daum 카페
https://cafe.daum.net/_c21_/bbs_print?grpid=SXAN&fldid=K1op&dataid=24 1/3
고산의 체취가 물씬 풍기듯 푸른 솔향이 감미롭기 그지없다
기둥이며 창살문, 토방에 놓인 계단석, 정자 앞 연못
그리고 아름 들이 서있는 나무들이 주인 없는 이곳을 설명이나 하듯 고색창연(古色蒼然) 하다.
이곳은 선생이 풍류 적 삶을 만끽하신 곳으로도 유명하다
그가 이곳에 수중보, 동대, 서대, 등을 지으신 것은
그 당시로서는 너무나 호사스러운 삶이 안인가 여겨 지기도하나
고산의 삶은 검소하고 절제된 생활이었다고 한다 이곳에서 격자봉 쪽으로 십리를 더 들어가면
낙서재(樂書齋)(사적368호)가 있다
선생의 7차에 걸친 보길도에 들어오심은 그의 18년 간의 귀양살이의 고단한 삶과 관계가 있으리라.
선생은 "세속의 모략중상이 낚싯배까지 이른단 말인가 그러니 나는 다시 어디로 가리오" 라고 탄식하시며
이곳 보길도를 찾아 머문 것이다.
사치스럽다고도 하나 고산의 절제와 검 소의 생활모습을 엿 볼 수 있는
다음과 같은 시를 노래한다
黃原浦裏芙蓉洞 황원포 안에 자리한 부용동
矮屋三間蓋我頭 좁다란 초가삼간 내 머리 덮어
麥飯雨時瓊玉酒 비 올적에 보리밥에 경옥주 한잔
終身此外更何求 종신 토 록 이외엔 바라지 않아.
낙서제 앞으로 흐르는 낭음계(郎吟溪)(사적368호)
지금은 상류에 저수지를 막아 흐르는 물이 적어
그 바닥을 드러내 볼품 없는 개울로 변했지만
당시에는 맑고 깨끗한 물이 굽이처 흐르는 아름답기 그지없는 시내였으며
고산은 이 냇물을 두고 "명경지수 맑은 물이 흐르는 신선 골"이라 노래하셨으리라
격자봉과 미산에서 합 수하여 흐르는 물이 구비 처 흘러 곡수를 이루니
이곳에 대를 쌓고 정자를 지어 곡수대(曲水臺)라 이름하였다
고산은 곡수대에 앉아 그의 벗 시냇물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겼으리라.
이제 그 터는 논으로 변해버렸고 대를 쌓았던 돌은 논두렁길로 바뀌었으니
덧없이 흘러간 세월의 무상함은 나그네 의 발걸음을 무겁게 할 뿐이다
고산은 보길도에서의 삶이 다양하셨음을 엿 볼 수 있다
그의 한결같은 유학이념의 구현과 실천의 노력 속에서도 현실의 생활모습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석실(石室)(사적368호)축조와 같은 것이 그것이다.
고산이 보길도에 들어오시게 된 동기는 대략 다음과 같다
1636년 12월에 발발한 병자호란으로 인조대왕께서는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하셨으나
청군에게 포위 당하고 빈궁과 원손 대군은 강화도에 피난 하셨다는 급박한 소식을 듣고
늘 나라에 대한 은혜를 갚지 못하시어 앙앙하시던 선생께서는
향리 제자와 청년들을 모아 의병 대를 조직하여 우선 강화도에 피난중인
빈궁과 원손 대군을 구할 양으로 해남연동에서 해로를 따라 강화도로 가는 도중
강화도는 이미 함락되었다는 슬픈 소식을 접하고 회항하는 도중 더욱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된다.
인조대왕께서 삼전도(三田渡)에서 항복하셨다는 내용이었다.
고산은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않으리라는 마음으로 배에서 내리지도 않고
탐라(제주)를 향하여 항해하던 중 보길도를 지나다 황원포에 잠시 닻을 내려 상륙을 한다
이곳에서 보길도의 아름다움과 수려함이 그 어느 곳에 비하랴
24. 10. 8. 오전 9:12 Daum 카페
https://cafe.daum.net/_c21_/bbs_print?grpid=SXAN&fldid=K1op&dataid=24 2/3
고산은 이곳을 은서 지로 정하신 것이니 이것을 보고 혹자들은 고굉이 타이티섬을 발견함과 흡사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 글을 쓰고있 나는 또 다른 생각을 해본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나에게 있는 모든 역량을 나라와 임금님을 위하여 받침으로
백성으로서 신하로서의 할 일을 다함이라 할 것이 아닌가
어찌 보면 나만의 안위를 위하여 현실을 외면한 것으로도 보여지나
이는 사가들의 정확한 해석이 있을 것으로 사료되어
나의 조그마한 생각을 피력할 따름이다
어느덧 해는 격 자 봉을 소리 없이 넘어가고
낮에 타고 온 배는 뱃고동을 울리며
상념에 가득 차있는 나그네의 발길을 재촉한다
오우가(五友歌)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그 더욱 반갑구나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구름 빛이 맑다 하나 검기를 자주 한다
바람소리 맑다 하나 그칠 적이 하노매라
맑고도 그칠 뉘 없기는 물뿐인가 하노라.
꽃은 무슨 일로 피면서 쉬이 지고
풀은 어이하여 푸르는 듯 누루나니
아마도 변치 않음은 바위뿐인가 하노라.
더우면 꽃이 피고 추우면 잎 지거늘
솔아 너는 어찌 눈서리를 모르느냐
구천에 뿌리 곧은 줄을 그로 하여 아노라.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시기며 속은 어이 비었느냐
저렇게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작은 것이 높이 떠서 만물을 다 비치니
밤중의 광명이 너 만 한 이 또 있느냐
보고도 말 아니하니 내 벗인가 하노라.
2001. 8.10
보길도 세연정에서
학산 씀
24. 10. 8. 오전 9:12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