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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원 김홍도와 조선시대 민화 3 [유홍준의 문화유산 보는 눈] (14)
이제까지 있었던 남종문인화, 진경산수, 속화 세 줄기의 그림들을 표암을 통해서 받아서 김홍도라는 호수
속에 다 집어넣으니까 이 이후에 모든 화가들은 다 김홍도를 따라서만 가는 일이 됩니다.
석가탑이 만들어진 다음에 모든 탑들은 석가탑을 중심으로 해서 변형해야 한 것처럼 김홍도를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가 하나의 문화역량을 만들어낸 그때가 정조 시대입니다.
김홍도가 위대함을 이야기 할 때면 김홍도가 위대한 것보다 더 위대한 것이 김홍도 같은 화가를 낳은 정조
시대가 위대한 것입니다.
정조 대왕 자신이 이런 파초의 그림을 그리면서 그림의 격조를 알고 문화는 아는 분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능했어요.
김홍도 같은 화가를 낳은 시대의 위대함
다산 정약용이 강진이 유배되어서 ‘여기 날아대는 새야 여기 저기 다니지 말고 둥지 틀고 나하고 살면 어떻
겠냐?’ 라고 하는 아주 진짜 다산 글씨의 흐트러짐 없으면서도 해맑으면서 꼿꼿한 것, 지적인 것 다 들어가
있는 다산 글씨의 아주 진면목을 고려대 박물관이 보여주는데 여기에 가경 18년 계유년 몇 월 14일 날 열수
옹이 다산 처당에서 이글을 쓴다.
내가 강진에 유배 와서 몇 년이 지났더니 부인 홍씨가 빨간 치마를 보내줬는데 시집올 때 오는 것이 녹의홍삼
이잖아요. 그 시집 올 때 가져왔던 그 붉은 치마를 보내줬어요. 자기 잊지 말라고 보내줬겠죠.
그랬는데 세월이 지나고 나니까 빛이 다 바래서 그것을 다시 빨아서 다려서 4개의 첩을 만들어서 그것을
두 아들에게 주고 이만한 천포가 남아서 여기에 딸아이를 위해서 이 그림을 그려준다라고 하는 그 ‘매조도’를
그린 것이 이와 같은 그림입니다.
다산이 가지고 있는 필력이 얼마 안 됐는지 모르지만 그분이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이 애잔한 느낌의 그림을
그렸는가.
그러니까 좋은 예술 작품이 나오는데 있어서 기본기를 어느 정도 갖추고 난 다음에는 정말로 그것을 그리고자
했던 그 마음 지금 거기 쓰여 있는 그대로입니다.
부인이 보내 줬던 빨간 치마가 세월이 지나서 다 빛이 바래서 그것으로 아들에게 기념이 될 수 있는 첩을
만들어서 써주고 이만한 조각이 남은 것을 딸에게 이 그림을 그려준다라고 하는 그 심정이 귀양객의 심정이
우짖는 새 입술 속에서 그냥 그대로 표현하죠.
이러한 문화가 있었던 때였기 때문에 김홍도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 시절에 연암 박지원이 있고 다산 정약용이 있고 그리고 단원 김홍도가 있고 또 그러한 시절에 번암 채제공
같은 대정치인이 있었고.
한 시대 문화 역량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해서 꽃이 피니까 정조 시대를 우리가 찬사를 보내게 됩니다.
어떤 사람이 그린 취하라고 하는 호를 가진 사람이 방 단원 필의, 단원의 선생은 중국의 심석전의 그림을 방
해서 그림을 그리면서 자기를 배웠는데 이 단원의 후배 되는 사람은 방 단원의 그림을 본받아서 이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그림에서 이 글씨가 없었다면 이것은 단원의 그림으로 조금 서툰 그림이다.
단원 이런 식으로 얘기를 해도 그만이다고 생각될 정도의 그런 그림입니다.
김정희는 사대주의자가 아니라 국제주의자
그렇게 사는데 1830년 무렵 40년 되니까 완당 김정희가 등장을 했습니다.
이분은 이제까지 한국 사회가 조선 사회가 가지고 있었던 민족주의적인 화풍이 김홍도를 넘어서면서 매너
리즘에 빠져서 있을 때 청나라에서 새로 일어난 금속학과 고증학에 입각한 새로운 화풍, 근대적인 화풍,
그것을 받아들여야 된다고 하는 주장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추사 김정희를 사대주의자라고 하는데 나는 절대 그것이 아니고 추사는 김정희는 국제주의자
였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지식과 우리의 예술이나 모든 것을 한국 사회 속에서 시골의 향색이 짙은 것은 머물게
하지 말고 대륙과 함께 문화권 전체, 당시로서는 세계죠.
세계사적인 지평 속에서 같이 호흡을 해야 한다. 하는 것이었고 그 자신은 아주 능숙하게 그렇게 보여줬고
중국의 대가들과 서로 학문을 교류하고 글씨를 교류하면서 완당 바람을 일으켜서 김홍도 이후에 매너리즘에
빠졌던 조선 화풍에 신풍을 문인화풍으로 넣게 됩니다.
그 자신이 그렸던 세한도의 이런 아주 고담한 문인화의 분위기가 이후 후배들에게 그분이 가르쳤던 8대 제자
라고 하는 사람들에게 퍼져가면서 이제는 진경산수나 속화가 아니라 청나라에서 금속학과 함께 유행했던
다시 문인화풍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고람 전기가 그린 ‘계산포무도’와 같은 그림은 추사가 지양하고 있었던 바에 그런 예술 세계를 가장 잘 반영
해준 그림이었죠.
추사가 아주 편애를 했던 소치 허련의 그림 속에 허련의 이 그림에 추사가 글씨를 화제를 써 준 것인데 이런
그림 속에서 그는 후배들에게 이제 우리는 평가의 기준이나 모든 것을 국제적인 수준으로 끌고 가자라고 하는
강렬한 의지를 보여 줍니다.
오랑캐의 나라라고 없신여기는 사이 중국은…
친구의 선배였던 자하 신위 같은 사람도 이제는 앞 시대, 이 분은 표암의 계통을 받았으면서도 추사의 이런
방향에 동조를 해서 들어갑니다. 자하 신위가 나이 40에 청나라에 가게 됐어요.
그때 추사는 이미 갔다 왔어요. 그래서 자하가 청나라에 가서 무엇을 보면 좋겠냐 그랬더니 천 가지 만 가지
보는 것 보다 옹방강 선생 한 분을 만나는 것이 나을 거라고 그래서 추천서를 써 줍니다.
미리 사람을 보내서 편지를 보내 줬죠.
그래서 옹방강이 자하를 만나고 그대 듣던 것보다도 훨씬 더 아름답다고 하는 모습이나 문장이나 예술이
그런 대화를 하고 돌아와요.
돌아와서 자하는 이제까지 자기가 가지고 있었던 썼던 시들을 다 찢어버리고 그리고 새로운 시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래서 지금도 자하를 연구하는 사람은 그분이 중국 가기 전에 어떤 시를 썼는가? 그것을 연구하는 것이
중요한 테마가 됐어요.
국제 사회를 경험하고 난 다음에 사람들은 계속해서 이제까지 중국을 청나라 오랑캐의 나라라고 업신여기
면서 그 문화에 대해서 존경심을 보이지 않던 사이 중국은 강희-옹정-건륭 연관으로 오면서 크게 발달했던
그 문화의 힘을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봉 조희룡이 그린 매화 그림을 보면 그 가지하나 줄기에 피어 있는 이러한 모습들이 현대적이면 현대적
이고 근대적이면 근대죠.
정말 이런 그림을 보면 우리가 얘기하는 모던 소사이어티(Modern Society)는 멀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이
그림에서 감지됩니다.
그분이 그린 난초 그림에 이와 같이 분란을 그는 화본에다 그린 난초 그림이 이 시대에 사군자 의례적으로
치는 사람보다 훨씬 더 근대적이죠.
북산 김수철이라고 하는 마리 로랑상(Marie Laurencin)의 그림을 보는 것과 같은 감각파의 그림을 보면
매화꽃과 괴석의 매화꽃을 그린 북산이라고 싸인 해 놓은 것을 보면 1850년을 넘어서 60년 무렵 됐을 때
우리의 상황이라고 하는 것을 가장 잘 대변해주고 있는 화풍이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북산의 그림은 일제시대 때 일본인들이 무지하게 좋아했습니다. 좋아하게 생겼죠? 일본사람들이.
19세기 후반 상투적인 것을 넘어서 그림의 개성시대로
남나비라고 하는 사람은 이 나비의 대가인데 냉금지 금딱지 종이에 마티엘을 이용해서 나비에 그 모습들을
리얼리즘으로 붙여요. 정말 슈퍼 리얼리즘으로 했어요.
그 대신 이 마티엘이 가지고 있는 느낌과 나비의 리얼리티와 딱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어느 틈엔가 19세기 후반으로 들어왔을 때 한국 사회는 이렇게 변화하고 있었어요.
홍세섭이라고 하는 몇 작품 남기지 않은 화가의 ‘유압도’ 그림을 오리의 그림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그러니까 시각의 혁명이 일어나 버린 것입니다.
여태까지 상투적으로 보아 왔던 것이 위에서 딱 볼 수 있는 것으로 바뀝니다.
참 시각의 혁명이라는 것이 김홍도가 도담산봉을 헬기 샷으로 해서 그린다든지 이런 유압도를 그린다던지.
그것은 이제까지 보아왔던 상투적인 것을 넘으니까 그것이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흥선 대원군이 그린 그림에서 보이는 정말로 파격적인 이러한 그림들의 세계는 정말로 개성의 시대라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죠.
바로 모든 사람들이 다시 직업 화가가 문인이고 전부 이런 세계에 빠져 있다 보니까 또 문제는 그러면 진짜
옛날처럼 잘 그리는 리얼리티 있는 그림의 화가가 없어져 버리는 거예요.
못 그리는 사람도 따라 그릴 수 있는 그림들을 그리고 있는 거예요.
바로 그럴 때 오원 장승업이라고 하는 사람이 등장을 했던 것입니다. 오원의 신화는 거기에서 생겼던 것입
니다.
평양 감사를 했던 박규수 이야기대로 이것은 고사 문인들만이 아니고 직업 화가까지도 전부 문인화풍을 흉내
내서 소감스럽게 그려놓고 대충 그려놓고서 격조가 있느니 이런 식으로 얘기하면 정말 국가에서 있는 실제로
정확하게 그리는 것을 요구하는 그림은 누가 감당을 하겠는가.
바로 그런 때 이것이 실사구시에서 실사를 그림에서 잃어버리는 것이 아니냐하고서 통탄을 하고 있는 그러한
때 오원 장승업의 이런 독수리 그림 같은 데에서 보여주는 강렬한 이미지를 담아 옵니다.
'실사'를 잃어버릴 때 나타난 오원 장습업
불행한 것은 오원은 이런 그림은 몇 폭 못 그리고 대개는 그냥 술에 취해서 그렸는지 의례적으로 중국 화본
풍을 그린 것에 빠진 것이 자기 관리를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이 오원의 비극이었고 그는 모든 삶의 여건이
그것밖에 안됐으니까 어쩌면 그가 가지고 있는 재량은 저게 한없이 높았는데 세월이 그에게 준 노비로서
벗어날 수 없었던 신분적 제약이 그로 하여금 타락된 타작들을 많이 만들게 했던 것이 사실 오원의 상을
만들면 그 갈등을 묘사하는 것이 오원 장승업의 작가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로는 그림의 소재가 화조화, 인물화, 신선화, 산수화만이 아니고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그림이 나왔습
니다. 책거리 그림이 등장했습니다.
이규상이 쓴 글에 보면 요즘에 책거리 그림 책가도가 유행을 하고 있는데 이 책가도 그림은 책가도 그림을
귀인의 집안에 쳐 놓고서 이것을 안 건 집이 없는데 김홍도가 이 방면에 아주 뛰어난 개량을 보였다.
이렇게 쓰여 있어요.
이 책거리 그림은 결국은 정조 대왕이 화성에 있으면서 자기 자신이 책과 멀리 떨어져 있을 때 항상 책을
생각할 수 있는 분위기로 해서 책가도를 걸었다라고 하는데 나중에 보면 책가도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책만
그리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온갖 귀한 것들은 자명종에서부터 중국 화병, 찻잔, 귀중한 책 하여튼 비싸고
좋고 가지고 싶은 것은 여기에 다 그려놓는 거예요.
책가도의 유례가 어디에서 왔는가 여러 가지 있는 중에 제가 보기에는 자금성에 가면 건륭 황제가 공부했던
사미당이라고 하는 곳이 있습니다. 사미당의 마루가 이와 같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러한 이건 실물로 다 놓여 있습니다,
항상 책을 생각할 수 있도록 그린 '책가도'
이제는 장식이라고 하는 것이 사대부 양반 궁궐만이 아니고 일반 여염집에서도 있는 사람은 장식을 할 수
있게 됐어요. 이 사람들이 갖고 있는 즐기는 것은 그동안에 있었던 것하고 다른 신소재를 요구했는데 대표
적인 것이 이 책가도가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는 있는 사람만 그림을 그리는 게 아니라 없어도 그림 하나씩은 가져다 놓을 수 있다고 하는 생산력이
이러한 사회적 경제력을 가지니까 각 지방에 있는 그림 좀 그린다는 사람들이 그림을 그려서 팔게 되니까
각 지방에 민화들이 이른바 나오게 됩니다.
김홍도가 그린 이 총석정 그림, 이것을 민화로 그리니까 이렇게 돼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얼마나 재미있어요?
라이브 페인팅이라는 하는 것은 세계사 속에 어느 민족이든지 다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어느 민족이든지 다 가지고 있어요. 잘 그린 그림이 가지고 있는 권위적이고 뻑뻑한 것보다 이렇게 편안하게
그린 그림이 주는 친숙감. 이것이 20세기 현대인들은 더 즐기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 가하면 평사낙안, 동정추월의 여기 호숫가에 앉아 있고 다리 어딘가에 떠 있을 거예요.
평사낙안이라고 해서 기러기가 쭉 줄지어서 가고 있는데.
이런 것을 8폭으로 그림을 그려서 해놓는 것이 어린애 그림이 갖고 있는 친숙감 그것하고는 전혀 다른 것이죠.
그러나 화법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럼없이 그리는 그림으로서의 민화가 갖고 있는 순수성, 그런데 김홍도의
그림이나 또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갖고 있는 어린애 글씨 같은 순진성, 천진성이 있어요.
민화의 단련된 천진성
그것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민화가 갖고 있는 천진성. 어린애 그림이 갖고 있는 천진성.
그런데 추사가 그렇게 개성적이었으면서 맨 마지막에 말년에 봉운사에 판전이라고 쓴 것은 그것은 정말 본인
의 말에 의하면 허화한 마음을 다 비워놓은 편안한 평화로운 상태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그렇게 나온 글씨
였다고 얘기하거든.
그 단어를 완당평전을 다 쓸 때까지 그 단어를 찾지 못했어요.
그랬는데 다 쓰고 나서 지난번에 고승들의 유묵전을 보고서 생각난 것이 그것은 단련된 천진성이었다라는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자연의 본질 어린애가 갖고 있는 순수성에서부터 오염되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을 해야지 나이
70까지 산 사람이 얼 만큼 노력을 해야지 그것을 갖겠습니까?
그것은 세련된 것을 갖는다는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일이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예술의 세계에 접하다보면 그것이 갖고 있는 미적 가치의 척도가 얼마나 다양한가하는 것을 알 수가
있는데 그런 점에서 민화가 갖고 있는 매력은 어린애 그림이 갖고 있는 천진성이나 단련된 천진성을 추구
했던 대가와는 달리 그 자체가 애시 당초 창작의 동기에서부터 모든 정서가 그저 있는 그대로 기량 그대로
그래도 그것을 개의치 않을 수 있는 것. 이것은 절대 대가들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크기가 작든 크든 별도의 세계였던 것이죠. 아프리카의 원시조각이라고 하는 조각들이 피카소나
마티스가 거기에 매료를 하게 된 것도 바로 자기네들은 그것을 도저히 흉내를 못내는 별도의 예술 세계가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민화의 세계 속에서는 전문가의 그림을 따라가려고 했는데 못 따라간 민화, 못 그린 그림으로서의 민화,
그것은 민화라고의 가치를 갖지를 못합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것이 무시해버린 민화였을 때 민화입니다.
그때 이것은 동정추월, 평사낙안이라는 그림을 보고 억지로 그린 그림들 상당히 많습니다. 서툴게 그린 것.
그것보다는 차라리 이런 식으로 그리는 것이 우리에게 민화가 갖고 있는 유머 감각까지 주기 때문에 더
가치가 있죠.
그림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뻔뻔스러움
새를 그리면서 이렇게 엉망으로 그릴 수 있다고 하는 그 실력, 저 대담한 저렇게 놓고 그림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뻔뻔스러움. 이들에게 있어서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그림이야말로 요즘에 노님같은 사람이 그린 작품이라든지 또는 세련된 천진성을 추구
했던 장욱진 그림이나 이런 데에서 보는 것보다도 훨씬 더 이 그림 속에서 꽃과 새가 갖고 있는 진실성을 볼
수 있으니까 민화로서의 매력은 이런 쪽에서 만점을 받을 수가 있는 것이죠.
세월은 그랬습니다. 이제는 부귀의 상징으로서 지배층의 양반문화의 산물로서의 그림이 아니고 이 민간의 집
쪽까지 퍼져온 것이 19세기 후반이었습니다.
효제 충신제의 염치라는 문자도가 각가지로 해서 집에 병풍을 쳐서 어린애 방에도 해줘서 익히는데 이런
그래픽 디자인으로 효자에 그림을 넣는다든지 또는 다른 폭으로 아주 현대적으로 20세기 초 되면 무궁화 꽃
같은 것까지 넣어서 애국적인 충정의 충(忠)자 같은 것을 만들어 냅니다.
참 문자도도 굉장히 다양하게 나온 것은 결국 혁필화라고 장터에서 꽃 그리고 이름 써 주는 것에 그것의 하나
로서 나온 것하고 똑 같이 나옵니다.
민화는 양반 문화에서 받았던 것을 민이 양반 문화의 고유하게 즐기던 것은 민도 같이 쓰게 되면서 민중
예술과 민화가 생깁니다.
언제든지 지배층의 문화를 피지배층에서도 본받으면서 자기도 문화를 갖기 시작을 합니다.
그런데 이때에는 지배층의 문화를 자기 식으로 바꾸는 것이 아까 본 민화의 산수화 화종화가 같은 곳에서
보이는 것이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단계가 되면 그들만이 가질 수 있는 소재로서 바꾸어 가는 것이죠.
쉽게 얘기해서 우리나라에 처음 노동운동이 시작 했을 때 이 사람들이 노동 운동에 부르는 노래도 없어요.
그러니까 제일 먼저 부른 것이 다 군대 갔다 왔으니까 군가에 가사 바꿔서.
노가바 노래 가사 바꿔서 그것도 군가에 자기네들의 요구를 넣어서 넣다가 세월이 지나니까 그들의 목소리로
그곳을 위한 작곡으로 나오는 것처럼 변하듯이 문화가 흘러갈 때에는 그런 단계는 반드시 겪게 됩니다.
지배층의 문화를 본받아 생긴 민화
단원의 아들 긍원이 그린 호랑이 그림을 일본 사람이 조선 김긍원이라고 쓴 것은 일본에 가는 사람이 선물
로나 아니면 가져간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김홍도가 자기 아버지가 그린 호랑이가 이렇게 됩니까?
그런데 이 호랑이가 민화에 와서 호랑이는 이렇게 되어 버립니다.
이것보다도 더 웃기는 호랑이는 이렇게 됩니다. 까치와 호랑이라고 하는 것으로 나옵니다.
이런 와중에서도 일본 구라시키 뮤지음에 있는 것인데 그것이 보고 싶어서 구라시키를 갔는데 전시를 하지
않아서 포스터라도 하나 달라고 해서 포스터를 하나 구해서 지금 내 청장실에 오면 걸려 있는 까치 호랑이는
이런 작품입니다.
이것은 화원을 능가하는 실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방상시에 다이아몬드 눈 4개를 가져다 반짝이는 것으로
해서 놨는데 이런 기량까지 가는 민화가 있었다라고 하는 것에 너무나 감동을 해서 이 작품을 꼭 보고 싶은데
아직까지 친견은 못하고 그러한 그만한 사이즈로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런 실력이 있었어요. 그 중에도 명화는 이것이죠. 88올림픽 때 호돌이 마크는 난 당연히 이것으로 했어야
된다고 생각을 합니다. 괜히 미국의 어느 야구 팀 것을 베껴서 벌금만 왕창 내놓고.
이만한 세계에 왔을 때 이만한 세계를 가질 수 있었던 것이 우리의 민화의 세계입니다.
용주사 벽화에는 토끼가 호랑이가 담뱃불 붙여오라니까 입천장을 확 찔러버리는.
내가 힘이 없어서 너에게 굴하지만 마음까지 굴하지 않았다라고 하는 것을 보여주는 일종의 민중의 반항
같은 것이 시화화 되어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20세기로 가는 것입니다.
왜 장승은 악을 쓰고 무섭게 인상을 써야 하나
장승을 끝으로 봅시다. 쌍계사 입구에 있는 장승인데, 장승이 인상 쓰면 장승인지 알고 요즘에 장승들 만들어
놓은 것 보면 참 나쁜 무슨 심정으로 사람이 보고 즐겁지 않고 거부감 나는 것을 왜 저렇게 만드는가에 대해서
내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천하대장군 통일여장군 뭐하고 써 놓는 것이 그냥 악을 쓰고 무섭게 인상을 쓰면 장승이다라고 잘못된 감정을
가지고 만드는데 조선시대 사찰 장승이나 마을 장승을 보면 전혀 그런 것 없습니다.
쌍계사에 있는 나무뿌리를 뒤집어 놓은 것 같은 귀신같은 모습이면서도 거부감을 주지 않습니다.
나무 장승에서 제일 멋있게 본 것은 경기도 광주 엄미리에 있는 장승제를 보면 현대 조각가가 만든 것처럼
저기가 탁탁 몇 개만 상징적으로 해놓으면서도 부랑쿠지 조각 같은 그런 느낌으로 살려 냅니다.
이 시대 이런 장승은 안 만들고 하여튼 나 요즘 장승을 보면 그것의 중요함을 알면서도 알기 때문에 그러는지
정말 외면하고 싶은 장승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것은 정말로 시각공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장승이 오랜 세월을 두면 여기에 부여 성주사터에 있는 장승처럼 150년 200년 되면 이렇게 됩니다.
밤나무로 만들어서. 옛날에는 이것이 5개 있었는데 얼마 전에 가보니까 3개만 남았더라고요. 참 보존을 했
어야 되는 것인데. 내 사진에만 해도 5개 있잖아요.
여기에도 있고. 그래서 이 상을 보면서 왜냐하면 해마다 열리는 장승을 거기에 꽂아 놓거든요.
앞의 장승을 제거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어디 많은 곳에는 한 20개도 걸려있고 그래요. 그런 중에 돌장승은 아마도 영조 무렵에 만들었을 것입
니다. 실상사 냇가 입구에 건너가서 있는 이 벅수나 하루방이나 할머니나 전부 다 돌장승을 의미하는데 사찰
장승이 가지고 있는 사천왕적인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것, 위압적인 것 그것으로는 제일 명작이죠.
더군다나 이 나뭇결이 무슨 조폭 칼침 맞은 것 같이 되어 있어서 있는데.
그런데 바로 남원 여기 운봉 아영에 돌장승들이 있는데 이 운봉 아영이 흥부의 고향이 바로 여기입니다.
그래서 남원이 대단한데 춘향이도 거기이고 흥부도 거기 사람이에요.
그래서 아영면하고 운붕면하고 흥부가 자기네 동네다고 고증하는 학자들을 동원해서 심포지엄 (symposium)
을 열었어요.
흥부가 남원군 사람은 남원군 사람인데 아영면 사람이냐 운봉면 사람이냐 가지고 싸웠거든요?
그런데 솔로몬의 지혜를 가지고 있는 학자가 나타나서 놀부하고 같이 아영면에 살다가 쫓겨나서 운봉면에
가서 살았다.
그래서 두 군데 다 흥부 마을이 되어서 거기에 가면 흥부 슈퍼, 흥부 주유소가 그냥 아영면, 운봉면에 있는데
그 운봉에 있는 마을 장승을 보면 쥐어 터져도 이렇게 터질 수 없는 흥부 같은 장승이 서 있습니다.
때릴 테면 때려봐. 더 맞아봤자 어떻게 되겠어요?
‘당신은 낯 설은 이곳에 왜 선발되어 오신 줄 아십니까?'
돌장승 중에서 제일 멋있는 것은 나주 중장터 삼거리에서 도암면 화순에서 도암면 쪽으로 가다 보면 부례사
라고 하는 절이 있습니다. 그 입구에 가면 지금은 찻길이 잘 나서 잘 가는데 전에는 중장터 삼거리에서 걸어
가야 돼요. 걸어가면 한 경찰서에서 써 놓은 표지판이 있는데 그것이 지금도 난 그것을 다시 만들어서 세우고
싶을 정도의 근대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것이 있었어요. 그것이 없어졌어요.
‘당신은 낯 설은 이곳에 왜 선발되어 오신 줄 아십니까? 당신이 교육을 받고 이곳에 와서 보니 무엇이 다릅
니까? 우리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신분보장을 하여 드립니다.
나주 경찰서장.’ 그런데 세월이 지나니까 요즘 대학생들은 저것이 누구를 찾는지를 몰라요, 지금은.
이제 저것 오지 선다형에 나와서 나주 경찰서창이 찾는 사람은 ①도벌꾼 ②신용불량자 ③간첩 이렇게 해서
시험 문제에 나올 그런 세월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경찰서에서 써놓은 경고판 쳐놓고 이렇게 문학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있었을까 하는 의미에서 난
리얼리즘이니까.
절대 이것 슬라이드로 이렇게 보여 주고 싶은데, 거기에 가면 할아버지 장승이 수염을 따서 이렇게 나오는데
할머니 장승은 앞니가 빠져서 이렇게 아름답게 있어요.
88올림픽 때 인사동 안국동 네거리에 인사동 입구에 장승을 하나 세울 때 어느 것을 세울 것인가 하는 것이
이것을 추천을 해서 이것을 에폭시로 떠서 지금도 인사동 입구에는 나주 부례사 장승이 서 있습니다.
제주도도 이상하게 제주도에 이런 매끈한 대리석 길 돌길로 나와 있는 그것이 석인상으로 제주도 무덤의 산담
(山潭) 사이에 있는 이 석상이 정말로 아름답습니다.
목석원에 가면 여러 개 보이고 북제주군에 지금 돌문화관이 그렇게 해서 만들어 지는데 이와 같이 부랑쿠지
작품, 파울클레 작품 같은 이런 것으로 만들어지던 것이 있고 또 하나는 대정에 있는 읍성에 있는 장승처럼
이와 같이 화산암으로 해서 만드는 것이 있는데 이런 것을 전체를 다 통괄하는 최고의 장승은 관덕정에 있는
이 돌 하루방입니다.
여러분들이 가서 서귀포에 가서 보고 온 것 전부 다 이것 카피입니다.
이것을 제주 읍내 관덕정 앞에 있는 제주 목사 관아 터에 있는 이것을 능가하는 장승은 아직까지 저는 못
봤습니다. 부례사 장승이 아름답고 실상사 장승이 아무리 아름다워도 그것은 또 창녕 관룡사 입구에 있는
장승이 아름다워도 그 마을에 그 도시에 심볼(symbol)이 되기에는 너무 개별성이 강한 데 제주도도 이
하루방을 가지고 얼마든지 로고(logo)로 CI을 만들 수가 있어요. 한 차원 높은 것입니다.
최고의 장승 관덕정 돌하루방
누가 봐도 제주도의 한 이미지로 만들어내고 또 한편으로는 거부감 나지 않으면서 무언가에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데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저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본래 제주도 사람들이 실력이 더 있어서 그런 것인가? 별 생각을 했는데 내가
거둔 결론은 그것입니다. 제주 목사 관아 터 관덕정 앞에 있는 장승은 국가에서 만든 것입니다.
실상사 앞에 있는 것은 스님들이 만든 것이고, 운봉 마을 사람들이 만든 것하고 차원을 달리 하는 국가의
재력과 기술과 행정력이 들어가서 만들어 낸 것입니다.
그런데 여태까지와 다른 점이 하나가 있죠. 관에서 민에 내려가는 하향식의 예술이 아니고 민에서 올라오는
장승 문화를 관에서 받아서 관이 가지고 있는 모든 힘을 더하니까 이런 작품이 나오는 것입니다.
나는 이 돌 하루방을 보면서 우리 문화가 제대로 되기 위해서는 민의 요구하고 있는 것을 관이 받아서
그것을 한 차원 더 높여서 만들 때 성공한다고 봅니다.
관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기회를 해서도 이것이 좋으니까 당신들도 따라오시오. 당신들도 하시오. 하는 것은
민에서 받아주지 않으면 그만입니다.
반면에 민이 하겠다고 하는 것을 그들이 재력이 없고 시간이 없고 실력이 없어서 서툴게 하는 것을 당신들이
이것을 정말 이렇게 좋아하면 그것을 우리가 만들어 주마. 하면서 만들었을 때 이런 명작이 나올 수 있는 것입
니다.
민이 흥이 나야 나오는 명작
전국에 있는 어떤 장승중에서도 관에서 만들어 준 것은 관덕정 장승 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충청도 경기도 경상도 전라도 제주도 전국에 있는 장승 어떤 것을 다 둘러보아도 관덕정에 있는
장승처럼 관이 가지고 있을 수 있는 덕성을 보여주고 있는 장승은 만나기가 힘들었던 것입니다.
나는 한국 문화 속에서의 여러 가지 가능성 유물 하나하나 작품이 가지고 있는 그 제작 배경과 현재 가지고
있는 모습을 생각하면서 여러분들하고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쭉 만났던 것에 마지막으로 쓸 수 있는 화면으로는
이것이 제일 좋지 않았나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 이후 20세기 백 년 동안에 흘러간 미술의 역사는 전혀 다른 문맥에서 시작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언제 기회 되면 그런 자리에서 만나기로 하고 이것으로서 제 강좌는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불교미술의 원리와 삼국·통일신라 불상 [유홍준의 문화유산를 보는 눈](15)
삼국불상 ‘미소’가 통일신라 들어 ‘근엄’
모든 고대국가가 형성되는 데는 3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영토의 확장과 율령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통치
체계의 확립, 그리고 이데올로기로서의 종교가 그것이에요.
샤먼의 전통으로 유지될 때만해도 제관(祭官)이 춤추고 주술적인 것을 행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지만 조직이
커지고 사회가 분화돼 왕과 귀족, 백성의 신분차별이 생겨나면서 이런 위계를 설명하는데 종교의 신세를
지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와 함께 인간의 삶과 영혼의 문제, 두가지를 다 해결해 줄 수 있는 이데올로기인 종교의 전파를 위해 고대
제왕들은 막대한 재력이 들어가는 신전과 사찰의 건립에 그렇게 열성적이었던 것이지요.
실제 삼국시대 가람배치에서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 승방 순으로 남북 일직선상에 배치돼 있는 경주 황룡
사지 강당은 오늘날 정부종합청사의 강당이 아니라 로마시대 홀룸 같은 역할을 해 원효대사와 자장율사가
모두 이곳에서 강의를 했어요.
따라서 지금부터 강의하는 불교는 어느 특정 종교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고대 우리 조상들이 국가창출의
원동력으로 삼았던 불교, 이데올로기로서의 불상에 대한 내용입니다.
기원전 6세기에 활동한 고타마 싯다르타가 도를 깨달은 뒤 10대 제자를 통해 불교를 전파했지만 국가로부터
인정받은 것은 300년이 지난 기원전 3세기가 됐을 때입니다.
불상을 만들지 않아 무불상 시대로 미술사에서 얘기하는 당시에는 산치대탑과 같은 수트파(Stupa·불탑)
외에는 불교적인 장치물이 없었어요. 서기 1세기 들어 오늘날 파키스탄 영토인 간다라지역에서 비로소
불상이 출현하게 됩니다.
간다라는 알렉산더 대왕이 동쪽으로 진출한 마지막 지역이었지요. 헬레니즘 문화가 동쪽으로 진출하는 과정에서 간다라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인간의 모습을 빌어 신상(神像)을 만들던 그리스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차용해 이때부터
불상이 제작되기 시작합니다.
원시 소승불교에서 대승불교로 전환하는 불교 교리상의 발전도 불상제작의 전기가 되지요. “깨우친 자가
부처다”라는 대승불교의 교리에 따라 석가모니도 수많은 부처 중의 하나일 따름이 되며 경전이 찬술될 때마다
수많은 부처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족보가 대단히 복잡해요. 부처 밑에 보살이 있고 보살 아래 천상의 세계를 지켜주는 제석천
과 범천, 그리고 사천왕이 있으며, 다시 그 밑에 아라한과 나한이라는 고승, 그 아래로 승려와 대중이 있어
상하로 연결된 것이 불교의 위계(하이어라키)입니다.
석가모니가 성불하기 전 왕자일 때의 모습을 모델로 한 보살상은 귀공자의 모습, 또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의 모습을 띠게 됩니다.
불상의 조성을 보면 석가를 포함 우주에서 중생을 구하기 위해 다녀간 일곱 분의 부처(과거칠불)와 미래에
출현한다는 미륵불 등 시간개념의 부처가 있는가 하면, 방위개념이 들어가 있는 부처도 있답니다.
과거칠불 중 석가모니 직전에 지구에 다녀갔던 분이 다보불이기 때문에 석가와 다보불이 나란히 앉아 있는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이나 석가탑과 다보탑이 병립해 만들어집니다.
동서남북에 다 부처가 있을 것이란 믿음에서 사방불 개념이 퍼지고 사면석불이 조성돼요.
‘아미타경’이 찬술되는 2세기쯤 되면 인도사람들은 자신들이 남쪽에 있다는 생각에 남쪽에는 석가모니,
북쪽에는 미륵, 서쪽 극락세계는 아미타여래 하는 식으로 사방불 개념이 완전히 체제를 갖추게 됩니다.
또 부처의 좌우 양쪽에 부처를 보좌하는 보살상이 만들어지는데, 아미타여래의 경우 관세음과 대세지보살이,
석가모니의 경우 문수와 보현보살이 좌우에 배치됩니다. ‘화엄경’이 찬술되는 시점에 오면 불법 자체를 의미
하는 비로자나불이 나타나게 됩니다.
말로는 간단하지만 불경으로 들어가면 아주 복잡한 구조를 갖는데, 사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당시 신앙
형태가 어떠했느냐는 것일 겁니다.
동남아시아 각국의 불상을 소개한 ‘The Image of Buddha’란 책을 보면 불상들이 각각 그 나라 사람 중 가장
미남형이거나 이상적인 상으로 변해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인도는 인도 사람의 이상형으로, 캄보디아는
캄보디아 사람의 이상형으로, 그리고 우리가 인정하든 안하든 경주 남산의 불상은 한국인이 갖고 있는
이상적인 상을 반영한 것이에요.
미국 하와이주의 호놀룰루에 ‘아카데미 오브 아트’라는 미술관이 있는데, 이곳 간다라 미술실에 전시돼 있는
불두(佛頭)를 보면 그리스 신전에서 떼어왔는지 불상에서 떼어왔는지 거의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헬레
니즘을 통해 받아들인 그리스의 영향을 느끼게 됩니다.
부처님이 어떻게 생겼는가에 대해 설명한 것으로 32상 80종호란 게 있어요. 거의 모두 부처님의 이상적인
몸매와 보통사람과 다른 신체구조를 32가지, 80가지로 설명하는 내용입니다.
예를 들어 나중에 법륜(法輪)으로 형상화되는 평발인 발바닥에 있는 바퀴나 곱슬머리와 머리 위의 군살을
나타낸 나발(螺髮)과 육계(肉?n), 두 눈 사이에서 희고 빛나는 털인 백호(白毫) 등이 모두 32상 80종호에
나옵니다. 이밖에 눈은 은행알처럼 생겼고 몸에서 금빛이 났다는 내용 등도 설명돼 있습니다.
그리스인의 모습이 아닌 인도인의 이상적인 모습을 담은 불상을 만든 굽타왕조를 지나 흰두교가 불교를 압도
해버리면서 인도에서는 더이상 불교가 발전하지 않고 실크로드를 넘어 불상과 함께 동점(東漸)을 하게 됩
니다.
이 과정에서 4~14세기 1000년에 걸쳐 막고굴 등과 같이 중국 둔황(敦煌) 등 실크로드 각지에 석굴을 파고
그 안에 불상을 조성한 유적이 나타납니다.
19세기 중엽 모래바람에 덮였던 석굴이 하나하나씩 드러나면서 스타인이나 펠리오, 오타니 같은 서구와
일본의 탐험대(도적떼)가 들어가 벽화와 불상 등 유물을 가져갔습니다.
이중 펠리오가 막고굴 장경동에서 발견, 프랑스 기메박물관으로 가져간 돈황문서에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이 발견됐으며 일본의 오타니(大谷)탐험대가 조선총독부 창고에 갖다놓은 수집품 때문에 우리나라는 중앙
아시아 벽화의 세계 최대 컬렉터 중 하나가 됐지요.
중국 북위시대 윈강(雲崗)석굴만해도 불상이 중국화되기전 간다라 양식을 보여줍니다.
선비족인 탁발씨(拓跋氏) 등 중국에 들어와 남북조시대를 연 북방 이민족들은 유교에 필적할만한 이데올로기
로 불교를 적극 받아들였어요.
북위가 안정되면서 갸름한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으며 추운 북방민족 출신답게 두툼한 옷을 입은 불상을
만들어냅니다.
또 똑같은 시대지만 남조 양나라에선 훨씬 더 부드럽고 유연한 모습의 불상을 조성하는데 각각 고구려와
백제 불상에 영향을 주게 됩니다.
우리 판소리에 “찡그리면 다 서시인줄 아느냐”란 대목이 있어요. 북위시대 불상의 아련하게 잔잔한 미소는
중국의 미인인 서시(西施)가 어금니가 아파 찡그렸는데 웃음이 나와 아픔을 무릅쓰고 웃을 때의 모습을
연상시켜줍니다. 이런 불상이 북주와 북제를 지나 당나라에 오면 육감적인 불상으로 바뀌게 되요.
당나라 불상의 극치를 보여주는 게 통일신라가 석굴암을 만들 당시 조성된 높이 약40m짜리 ‘봉선사 비로
자나불상’입니다.
살찐 사람 목처럼 목에 3도, 즉 세 줄이 가 있는데, 불상 중에서 가장 이상적인 인간상에 다가간 것으로
이 불상을 꼽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당나라를 끝으로 신유학의 시대로 다시 넘어가는 송나라 이후로는 고전을 파괴하는 파격적인
불상들이 출현하게 됩니다.
현재 우리나라 고구려 불상은 20여개 밖에 남아있지 않아요. 그나마 석불은 남기지 않았고 옮겨다닐 수 있는
조그만 금동불이어서 양식을 가지고 설명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중 경남 의령에서 발견된 ‘연가(延嘉)7년명 금동여래입상’은 뒤쪽에 539년 고구려 동사(東寺)라는 절
에서 천불을 만들어 유포했는데, 그 중 제29번째 불상이라는 기록이 전하고 있어 확실한 고구려 불상임을
알 수 있지요.
옷자락이 무릎에서 X자로 교차하고 있는 평남 ‘원오리 출토 소조보살입상’은 고구려 기왓장에서 보이는
것처럼 연꽃대좌를 포함한 전체적인 선이 강하고 날카로운게 특징입니다.
반면, 충남 부여 ‘규암면 신리 출토 금동보살입상’은 연꽃대좌의 양식을 보면 600년무렵 백제에서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이렇게 당시 유행했던 양식을 통해 시대를 감별해내는 것이 미술사가 갖고 있는 큰 힘 중 하나입니다.
가장 백제다운 모습을 보여줘 ‘미스 백제’로 불리는 부여 ‘군수리 출토 금동보살입상’이나 같은 곳에서 나온
고개가 6시5분 방향인 ‘납석제여래좌상’은 절대자가 갖고 있는 친절성을 보여줍니다.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삼국시대 불상 중 미소를 띠고 있는 불상들의 경우 입상이 압도적으로 많습니다.
대부분 좌상이면서 아주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통일신라불상과는 달리, 우리와 동일한 지평 속에서 우리를
극락세계로 맞이하고 구제하러 온 절대자가 갖고 있는 친절성을 극대화시킨게 삼국시대 불상의 공통적인
특징이라고 봐요.
‘서산 마애삼존불입상’처럼 은행알 같은 큰 눈을 하고 활짝웃는 불상은 세상에서 보기 힘듭니다.
서산 마애불이나 석굴암 본존불, 창녕 관룡사에 있는 불상 등은 모두 동동남 15도 방향, 즉 동짓날 해뜨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어요.
그런데, 동지는 일년의 끝이 아니라 시작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서울 경복궁 국립중앙박물관이 지난 10월
문을 닫기 전 국보 78호와 83호 ‘금동반가사유상’을 함께 전시해 근래에 드문 히트를 쳤지요.
지금도 국적을 갖고 논란이 있지만, 거의 등신대에 가깝고 조선 사람의 이상적인 모습을 모델로 해 절대자가
갖고 있는 친절성을 극대화한 이들 반가사유상이 있기 때문에 삼국시대 불상의 위대함을 얘기할 수 있게 됐
습니다.
이들 반가사유상과 거의 흡사한 일본 코류지(廣隆寺)의 ‘목조 미륵반가사유상’을 본 독일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모든 실존적 고뇌로부터 완벽하게 해방된 절대자의 모습을 읽을 수 있다”고 극찬했지요.
경남 ‘거창 출토 금동보살입상’을 보면 보살상이 가진 존엄성보다는 옆집 수퍼 아줌마를 보는 것 같은 느낌
입니다. 바로 이 점이 뒤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룰 수 있었던 기반인지도 모르는데,
절대자의 모습을 이웃집 아저씨와 아줌마 같은 평범한 상에서 찾은 것이 특징이에요.
원효의 대중불교가 갖고 있는 성격과도 일맥상통합니다. 신라의 불상, 특히 경주 남산자락에 있는 100여군
데의 불상 중 삼국통일 전에 조성된 것은 ‘배리 석조삼존불입상’과 ‘남산 부처골 감실 마애불’, ‘삼화령 석조
미륵삼존불상’ 등 3개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이들 석불상은 여타의 다른 신라 불상과는 모습이 달라 백제 석공을 불러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요. 신라불교는 점점 세속화되면서 삼국통일의 밑바탕이 됩니다.
삼국통일 뒤 가장 먼저 만들었다고 생각되는 경북 군위 팔공산의 자연석굴을 이용해 조성된 ‘군위 삼존석불’을
보면 아련한 미소를 짓던 삼국시대 불상의 미소는 사라지고 뻣뻣하다 못해 목에 깁스를 한 채 높은 좌대 위에
앉아 군림하는 모습이에요.
삼국시대에서 통일신라시대 불상으로 나아가는 전환을 보여주는데, 불상의 미소는 점점 없어지다가 경주
남산 보리사 불상을 마지막으로 이후 이땅에서 만들어진 불상에선 미소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720년 김지성이 부모를 위해 만든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및 ‘석조아미타불입상’은 전남 장흥 보림사와
강원도 철원 도피안사의 철불과 함께 제작 연대를 알 수 있는 몇안되는 불상 중 하나입니다.
‘군위 삼존불’에서 보이는 뻣뻣한 목의 불상이 100년 동안 세련돼 그 정점에 나타난 것이 경덕왕(재위 742~765)
때 만들어진 석굴암 본존불입니다.
옷자락이 몸에 밀착돼 있는 것을 표현할 정도로 돌을 다루는 솜씨가 세련됐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지요.
목에 3도가 있는 것이나 젖꼭지 표현, 엉덩이 등을 보면 당나라 때 불상과 마찬가지로 육감적입니다.
아잔타 석굴을 원용해 만들었다고 볼 때 전실은 없었고 빛을 받아들이는 광창이 있었다는 게 석굴암에
대한 제 생각입니다.
11면 관세음보살상과 제석천·범천 등의 조각에서 보이는 인체비례나 도들새김을 표현한 두께에 따라
이상향과 현실감을 표현해낸 점이나 석굴사원 조성과정에서 1000분의 1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은 완벽한
기술 등을 볼 때 한반도에서 모든 것이 사라져도 석굴암 하나가 남아있다면 이 땅에 살았던 민족은 위대한
민족이었다고 사람들이 기억해줄 것입니다.
석굴암을 비롯, 불국사와 석가탑, 다보탑, 성덕대왕신종(에밀레종), 안압지 모두 신라문화의 전성기로
고전이 완성되는 8세기 3·4분기인 경덕왕 때 만들어진 게 특징입니다.
경주 남산의 불상조성도 경덕왕 때 들어와 본격화됩니다. 혜공왕 이후 신라하대에 조성되는 불상들에선
긴장감이 빠지면서 감정의 과소비 현상이 나타나며 하향곡선을 걷게 됩니다.
반면, 지방에서 일어난 호족들이 구산선문을 중심으로 자신들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는 철불을 조성하기
시작하며 이런 사람들에 의해 세상이 바뀌게 됩니다. 보림사와 도피안사, 광주 춘궁리 철불이 대표적인
예지요. 이렇게 봤을 때 불상은 어느 한 종교의 신상이 아니라 우리 역사의 산물이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절대자의 모습도 시대에 따라 친절성을 극대화시킨 모습으로, 혹은 석굴암처럼 이상적인 인간상과
신의 인격화가 절묘하게 조화돼 근엄의 극치를 보여주는 모습으로, 다시 능력있는 자만이 절대자가 갖고
있는 현실파괴 능력과 변형능력을 기원하는 모습 등으로 바뀌게 되는 것을 확인하게되지요.
山寺의 미학 [유홍준의 문화유산을 보는 눈] (16)
깊은 산속 깊은 절… ‘아늑한 佛心’ 절로
지난해 말 문화일보를 통해 절찬리에 지상중계됐던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특설강좌가 수강생들과 독자들의
열화와 같은 재개 요청에 따라 지난 21일부터 2차 특설강좌를 시작했습니다.
격주로 월요일 오후 5시 정부대전청사 후생동 대강당에서 열리는 ‘유홍준 문화재청장의 특설강좌Ⅱ-문화
유산을 보는 눈’은 21일 첫 강좌 ‘산사(山寺)의 미학’을 시작으로 6월27일까지 3개월여 동안 진행됩니다.
문화일보는 유 청장의 두번째 특설강좌를 격주로 목요일자 지면에 지상중계합니다.
우리가 산사의 전통을 갖게 된 것은 9세기 이후의 일입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된 황룡사 모형도에서
볼 수 있듯 초기 시내(왕도)에 조성된 절은 높은 탑을 중심으로 건물이 만들어지고 주변에 회랑을 두른
구조였지요.
의상대사가 화엄사나 부석사 등 국경선 가까운 곳에 국방의 목적으로 대찰인 화엄십찰을 짓는 것에서부터
기원한 산사는 하대 신라인 9세기에 구산선문이 열리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됩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산사의 개념에 맞는 절은 장흥 보림사와 해주 심원사 같은 곳입니다.
이처럼 산속에 그윽하게 들어가 있는 절들은 당시 호족들의 발원으로 만들어졌습니다.
여러분은 ‘산이 있는 곳에 절이 있으면 산사로, 이는 일본과 중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중국과
일본에선 산사의 의미가 우리와 완전히 달라요.
중국과 일본의 산사가 삼각형의 높은 산 꼭대기에 있는 것과 달리, 우리는 순천 선암사처럼 ‘높은 산’이 아닌
첩첩이 겹쳐져 있는 계곡을 따라 들어가는 ‘깊은 산’에 아늑하게 자리를 틀고 앉아 있습니다.
우리의 산사는 언제부터인가 일주문을 지나 사천왕이 지키고 있는 천왕문을 들어가면 중앙에 정원을 놓고
‘ㅁ’자 형태로 건물을 배치하는 ‘산지중정형(山地中庭形)’ 가람구조를 특징으로 하고 있지요.
그런 다음 절의 사세에 따라 주변 환경에 맞게 전각들을 증축해 나갔습니다.
야외법당으로 사용되는 만세루란 2층 누각을 아래로 통과해 계단을 올라서면 탑이 서 있는 정원과 대웅
전이 나타나고 좌우에 선방인 적묵당과 부엌인 심검당이 배치돼 있는 게 산지중정형이며 절에 따라 이름을
달리하지만 기본적으로 대웅전, 적묵당, 만세루, 심검당으로 구성돼 있는 것이 산사의 기본구조예요.
그 다음에 목적에 따라 나한과 지장·관음보살을 모시는 응진전과 명부전, 관음전, 산신각 등이 조성됐습
니다.
이처럼 사찰은 처음부터 마스터플랜에 의해 지어진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사정에 따라 증축됐지만 창녕
관룡사의 예에서 보듯 증축된 건물들이 주변 환경과 잘 맞아떨어져 현대 건축가들의 찬사를 받는 곳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훌륭한 전통도 20세기 후반, 정확히 1980년대 들어 굴착기(포클레인)를 동원해 군대 연병장
처럼 큰 마당을 만드는 풍조가 산사에 밀려오면서 우리 옛 사찰이 갖고 있었던 고즈넉한 맛은 다 사라져버
렸어요.
주변의 동백나무 느티나무와 조화를 이룬 단아한 맞배지붕 집이었던 강진 무위사 극락전은 양 옆을 다 트고
앞마당을 넓히면서 집만 덩그러니 서 있는 느낌을 주며 예산 수덕사는 소림사 무대를 방불케 합니다.
그래도 학이 날갯짓하고 내려앉을 때 그 날개의 모습을 보여주는 수덕사 대웅전 측면 지붕의 기울기는 일품
입니다.
부안 내소사 주차장에서 보면 일주문만 눈에 들어오고 그 안은 보이지 않습니다. 어느 절이나 그렇지요.
우리나라 절들은 속이 깊기 때문에 내소사의 경우 중간중간 단풍나무가 포진한 전나무 숲길로 1㎞를 들어
가고 벚꽃나무 길을 지나서야 천왕문으로 이어집니다.
산사로 진입할 때 우리가 느끼는 감동과 편안함은 바로 매표소에서 표를 사서 일주문을 지나 길을 꺾어 들어
갈 때부터 시작되는 것으로 사실 거기서부터가 하나의 건축입니다.
이처럼 건축적인 컨셉트를 가지고 조형된 길을 무시해버리고 자동차로 홱 들어가버리고 나면 출입하면서
속세와 성역이 갖고 있는 시간적·공간적 거리감을 느끼게 조형된 우리 사찰건축의 묘미를 이해할 수 없지요.
또 이렇게 해서 들어와도 대웅전을 바로 보여주는 일은 없습니다. 내소사의 경우 돌계단을 지나 봉래루
(만세루) 밑 계단을 통해 올라서야지 준봉(峻峯)인 능가산의 기세에 지지 않게 높이 쌓은 축대 위에 팔작
지붕의 날개를 활짝 뻗어올린 대웅보전이 보이지요.
이와 같은 산세 속에 무위사 극락보전 같이 단아한 집을 지어놓았으면 집이 산세에 눌려서 아마 기운을 쓰지
못했을 거예요. 최치원이 쓴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문’에도 지증대사 생전의 6가지 잘한 일 중
하나로 “기와집을 짓고 사방으로 추녀를 드리워 (희양산의) 지세(地勢)를 눌렀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내소사 대웅보전은 집이 화려한 만큼 공포장치나 창살문양도 예사롭지 않아요.
우리나라 사찰은 대개 4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중 첫째로 구례 화엄사 각황전처럼 궁궐에 준
하는 위엄을 갖춘 사찰이 있습니다. 부처님을 궁궐과 같은 건물에서 왕과 같은 위상으로 모신 것입니다.
반면에 무위사는 아주 고즈넉한 산사로 선방과 함께 깊은 산속에 들어가 있는 형상이며 부석사는 일망무제
(一望無際)로 파노라마처럼 전개되는 경관을 전제로 호방한 기상을 보여주는 절이지요.
마지막으로 선암사는 옹기종기 건물들이 모여 앉아 있는 것이 마치 경주 양동 민속마을이나 안동 하회마을
같은 분위기예요.
돌계단과 시누대 숲을 지나는 서산 개심사의 옛 길에서 만나게 되는 것이 경지(鏡池)예요. 영지(影池)와
함께 ‘거울 못’이란 뜻으로 상왕산의 그림자가 비치기 때문에 얻은 이름인데 청평사와 불국사 등 절에는
이런 이름의 연못이 많습니다.
통나무 외나무 다리를 건너 올라가면 큰 배롱나무와 함께 해강 김규진이 쓴 ‘상왕산개심사(象王山開心寺)’란
만세루의 현판이 나타나고 안쪽에 대웅보전과 심검당, 적묵당이 만세루와 함께 정사각형을 이루는 구조로 돼
있지요. 불국사와는 달리 앞마당에 꽃밭이 있는데, 아무 곳에나 꽃밭을 만들어 놓는 것이 아닙니다.
절대자가 갖고 있는 친절성을 극대화할 것이냐, 아니면 절대자가 갖고 있는 존엄의 가치를 극대화할 것인가
하는, 절이 지향하고 있는 가치에 따라 정원에 대한 계획 자체가 달라져버리는 거지요.
화려한 자연에 화려하게 대응했던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고구려 때 창건된 내금강 보덕굴입니다.
7.2m높이의 구리기둥 위에 건물을 세우고 쇠줄을 둘러 허리부분을 붙잡아 맨 보덕굴은 세 사람만 들어가도
흔들리지요.
멀리서 보면 3층 집처럼 보이지만 위에 있는 집들은 멀리서 볼 때 외롭게 보이지 않게 하거나 빗물이 내릴 때
물받이 역할을 하는 장치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이 집은 눈썹지붕, 팔작지붕, 맞배지붕, 우진각지붕 등 어떤 식으로 지어도 4가지 이상 나올 수 없는
한옥의 지붕유형이 모두 다 들어있는게 특징입니다.
은행잎이 깔린 박석길을 따라 들어가는 영주 부석사의 진입로는 산사가 가진 고즈넉한 멋을 대표합니다.
천왕문을 오르는 돌계단을 시작으로 9개의 석축 맨 마지막에 무량수전이 들어 앉아 있는 부석사의 건물
배치는 9품 만다라의 전개를 구현한 것이지요.
미술사학자 최순우 선생의 저서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를 통해 널리 알려진 부석사 무량수전은
학이 날갯짓하고 올라가는 형태를 보여주는 팔작지붕의 기울기와 군더더기 하나 없는 주심포 집의 간결미가
지켜주고 있는 엄숙성 등 건축적인 특징 외에도 무엇보다 그것이 위치한 자리가 주는 의미가 중요합니다.
교토(京都)의 기요미즈데라(淸水寺)가 절 그 자체보다도 절에서 내려다보는 교토의 경관 때문에 유명한 것
처럼 말이죠. 소백산맥이 펼쳐진 대자연을 정원으로 삼은 부석사 하나로 우리 산사가 갖고 있는 시원한
눈맛에 대한 설명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의 사용을 금지한 이후 오히려 보수공사를 되풀이하고 있는 승선교를 지나 순천 선암사 입구에 들어
가면 삼인당(三印塘)이란 연못이 있는데, 이곳에는 토목공학적, 종교적, 미학적인 여러 가지 조건이 다
들어가 있어요.
장마 때 물을 가둬두었다가 속도를 줄여서 밑으로 빼는 역할과 함께 종교적으로 마음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
이란 의미를 가진 연못입니다. 연못 가운데 작은 섬은 장마때 물을 유도하는 회로 역할뿐 아니라 연못이 커보
이게 하는 장치이기도 하지요.
일주문을 들어서면 바로 앞에 중국 육조시대부터 내려온 오래된 절, 달마시대부터 내려오는 절이란 뜻으로
‘육조고사(六朝古寺)’라는 추사풍의 현판이 걸린 만세루가 있습니다. 선암사에는 현재 23채의 당우(건물)가
있지만 원래 50여채가 있었어요.
물론 처음에는 대웅전과 만세루, 심검당, 적묵당 4채로 시작했다가 차차 명부전, 관음전, 응진전, 선방 등으로
한 채 한 채 절집을 지어 들어갔는데 그것이 아주 자연스럽게 배치돼 있어 유서 깊은 마을에 온 것 같은 그런
편안함을 느끼게 해줍니다.
겨울철 꽃이 피는 동백나무와 아열대성인 파초 등 사찰 경내에 80종의 나무가 있어 1년 365일 꽃이 지는
날이 없는 것도 자랑거리입니다. ‘대변소 뒷간’으로 쓰인 변소와 큰 석조로 교체하지 않고 당우가 늘어날 때
마다 조그만 석조를 옆에 붙여 놓은 달마전의 4단 석조 등도 선암사의 미학을 대표합니다.
지난 95년 제1회 광주비엔날레 커미셔너로 있을 당시 방한한 미국의 미술평론가 캐서린 할브라이시(미니애
폴리스 워크 아트센터 관장)와 함께 선암사에 간 일이 있어요. 자연과 어우러진 선암사를 본 그는 “피라미드는
네모뿔, 타지마할은 상자 위에 양파 하나 얹혀 있는 모양 등 세계의 모든 건축에는 고유 이미지란 것이 있는데,
선암사는 전후좌우로 건물이 계속 겹쳐서 나오면서 건축의 전모가 머릿 속에 들어오지 않는다”며 “한국에선
이런 건축을 ‘깊은(deep)’ 건축이라고 하느냐”는 질문을 제게 해왔습니다.
‘깊은 산속에 깊은 절’, 아마 이것이 우리 산사의 미학이 갖고 있는 핵심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출처] : 유홍준의 문화유산을 보는 눈] 특별강좌/ 문화일보
정리〓최영창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