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내용을 아래와 같이 공유합니다.
이소룡 영화의 여배우들 하면 우선 묘가수(노라 미야오)가 떠오르고 그밖에 의의(衣依/마리아 이), 모영(안젤라 마오잉), 그리고 정패(베티 팅페이)가 떠오릅니다.
아직도 건재한 그녀들을 만나보죠.
우선 처음으로 묘가수입니다.
묘가수는 1952년 2월 8일 생이다. 이소룡의 영화 파트너로 가장 많은 출연작을 갖고 있는 여배우이다.
묘가수는 이소룡 사후 일본 스크린지 선정 인기 베스트 1의 여배우로 선정되었고 가장 전성기를 누린다. 말년의 그녀는 캐나다로 이민을 가서 방송국 앵커로도 활동하였는데 국내의 호남아 스타 S와도 혼사 이야기가 있었으나 시어머니 되실 분이 엄청 반대하여 결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전형적인 중국미인으로 순진함과 아울러 청초한 미모가 돋보인다.
묘가수는 노라 미아오라는 이름으로 불리운다. 그녀는 1952년 2월 8일 홍콩 출생으로 1968년 홍콩 TV 드라마에 출연하면서 연기 생활을 시작했고 1971년 골든하베스트사의 <도불류인>에서 주인공을 맡았다.
이소룡이 출연한 작품 중 <당산대형> <정무문> <맹룡과강> 등에 출연했다. <당산대형>에서는 거리에서 차를 파는 아가씨로 단역출연하였는데 이후 영화에서 이소룡의 연인역으로 주연을 맡는다. 그녀의 이미지는 평범하면서도 표현하기 어려운 매력을 가지고 있다. 평범 속의 비범함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소룡 사후 일본 스크린지 인기투표에서 1위를 하기도 한다.
그녀의 미모나 연기 때문은 아닐텐데 그녀는 홍콩에서보다 해외에서 더 알려진 배우가 됐다. 그녀의 활동시기에는 이청, 하리리, 임청하의 전성시기였다.
골든하베스트사의 창립은 그녀에게 기회가 되었다. 이소룡이라는 영웅이 지켜줘야 할 여주인공으로 그녀는 제 격이었다.
그렇다고 보호본능을 자극하는 여린 캐릭터도 아니건만 그녀에게 돌아오는 역은 한결 같았다. 정창화 감독의 <흑야괴객>에서도 쫓기는 주인공의 부인 역을 맡기도 한다.
후에는 액션영화에 출연하기도 하나 역시 정창화 감독의 <파계>에서 모영 같은 여배우가 액션여배우로 자리잡은 것과는 대조를 이룬다.
아무래도 그녀에게서는 액션배우로서의 모진 면을 발견하기 힘들어서가 아닐까 싶다. 이소룡의 연인으로서 깨끗한 이미지를 간직한 채 그녀는 1980년대 초반 은퇴한 후 캐나다에서 독신으로 살고 있다.
다음은 의의입니다. 묘가수에 밀리었지만 <당산대형>에서 주인공을 맡았습니다.
의의(衣依/마리아 이)는 1953년 7월 29일 상해 출생이다. 신인시절 대만에서 활동 중 골든하베스트에 입사하여 1971년 이소룡의 성인 컴백작인 <당산대형>로 데뷔한다. 다소 쌀쌀맞는 캐릭터로 이소룡의 마음을 빼앗는 역을 잘 소화했다. 극중에서 이소룡은 불의를 못참는 허검(전준 분)이 묵는 화교 집에 머물게 되는데 의의는 미소가 귀여운 아가씨 교매로 출연한다.
그녀는 이지적 이미지의 당찬 여성으로 사극이나 현대극에서 다양한 캐릭터로 매력을 보여준다.
이소룡에 대한 인터뷰가 남아 있다. <당산대형>의 현장에서 처음 만난 이소룡은 청바지에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체격은 크지 않았고 허리는 여자같이 날씬하였다고 한다. 이소룡은 노래는 저음이라 잘 부르지 못했지만 듣는 것은 매우 즐겼다. 그는 잠시도 가만 있지 못하는 활달한 스타일로 특히 운동을 즐겨 하였다. 그는 자신이 신인이라서 NG를 많이 내자 위로해주며 친절히 연기 지도도 해주었다. 생일 때에는 축가도 불러주었지만 목소리가 저음이라 노래는 별로였다.
이소룡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부를 하는 인정많은 사람이었고 촬영은 잘 끝났다. 나이트클럽에 놀러 갔는데 그의 춤 솜씨는 일품이었다. 이후 <정무문>에도 함께 출연하였다.
이소룡과의 인연은 그게 끝이었다.
이이는 1974년 6월 사업가 쉬징보와 결혼했다. 1976년의 출연작인 <일대영웅(북소림)>이 그녀의 은퇴작이다.
다음은 모영입니다.
<용쟁호투>에서 이소룡의 누이동생으로 출연했던 모영. 지금은 홍콩에서 식당을 운영중이라는데...
영국인 무술영화 광팬인 토비가 찾아가 촬영한 사진입니다.
그녀는 비록 나이들었지만 예전의 그 샤프한 이미지는 그대로입니다.
모영은 1950년 9월 20일생으로 <용쟁호투>에서 이소룡의 누이로 출연하며 전 세계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물론 그 이전에도 <중태권단생사전>, <합기도>, <흑권> 등의 영화로 한국에서는 알려진 배우이다. 여러 영화를 통해 보여준 여협의 이미지로 당찬 그녀는 당연히 첫 손 꼽히는 무협여배우로 자리매김했다.
다음은 정패입니다.
멋진 배우 이소룡과 미모의 여배우 정패의 만남은 이미 비극을 잉태하고 있었습니다.
사후 두 사람의 관계를 영화로 보여준 정패. 그러나 팬들의 용서는 있을 수 없었죠. 결국 그녀는 은퇴하고 결혼합니다.
정패는 1947년 대만 출생으로 홍콩 쇼브라더스사에서 활동을 하였고 골든하베스트사의 레이몬드 쵸우와 인연으로 이소룡을 만나게 되었다. 내연의 관계로 까지 발전한 두 사람의 인연은 길지 못했는데 1973년 7월 20일 이소룡이 두통을 호소하며 그녀의 침실에서 잠이 들고 영영 일어나지 못했다. 이후 온갖 비난을 감수하던 그녀는 <이소룡과 나>라는 라마 감독 영화를 제작, 각본, 주연하였지만 팬들의 비난은 그치질 않았고 몇 편의 영화에서 주연 내지는 단역으로 출연하다가 은퇴아닌 은퇴를 하게 되었다.
그녀는 이소룡 사후 홍콩배우 겸 제작자인 향화강(샹화창/向華強)과 결혼 하였는데 그는 삼합회 일원이었고 결국 1980년에 이혼한다. 향화강은 신의안이라는 삼합회 조직의 첫 보스인 향전의 세째 아들로 두 명의 형도 조직의 일원이다. 그녀가 그런 그를 택한 것은 자신의 신변 보호 때문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녀는 얼마 전 딸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소룡과의 관계에 대해 자신의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비운의 여인이며 여배우로서도 안타까운 배우의 삶이었다. 정신 적 갈등을 극복하기 위해 종교에 귀의하며 마음의 평화를 찾은 듯 평온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이상 네 명의 여배우 소개를 마칩니다. 질문은 덧글 바라고 이상으로 120회 세미나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