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역사의 길
봉알자리
위치 :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 911-9[진주대로1144번길 18] 에 위치한 봉란대(鳳卵臺)
진주(晋州) 강씨(姜氏)의 성지이다.
봉이 알을 품고 있는 자리라고 해서 봉알자리하고 부르는 유서 깊은 곳이다.
강씨의 시조는 고구려 병마도원수를 지낸 강이식(姜以式) 장군
통일신라 헌강왕 때 강이식 장군의 후손 강진(姜縉)이 진양후(晋陽侯)로 봉작(封爵)을 받은 이후에 강씨는 본관(本貫)을 진양(晉陽)이라 했다.
이 후 고려시대가 되자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고 이들
의 위세는 고려의 중앙 지배 세력들이 위협을 받을 만 해지자 그 이유에 대해 알고자 했다.
전하는 이야기로는
진주 봉곡촌에 있는 강구만(931~975년) 집 뒤에 큰 바위가 하나가 있었는데 이 큰 바위 위에 또 하나의 작은 바위가 얹혀 있었다. 그냥 보기에도 크고 작은 바위가 조화를 이루어 흡사 봉(鳳)의 형상과 같으므로, 사람들은 봉바위(鳳岩)라 하였다.
어느 날 강남도사(江南道士)라는 사람이 이곳을 지나가다가 이 바위를 보고하는 말이
“강씨지대성(姜氏之大姜氏之大盛)
유차암고야(有此岩故也)",
즉 “강씨들의 대성함이 이 바로 이 바위 때문이었구나”라고 했다 한다.
그 후 강흥(1010~1122년)의 형제 열 한 사람이 경상(卿相)으로서 권세를 장악하다시피 하니 이자겸(李資謙)의 아들 이지원이 그 세력을 시기하여 임금에게 강씨를 모함하고 사람을 보내 봉 바위를 부수게 하였다. 이에 바위를 깨니 함박같이 생긴 흰 돌 네 개가 들어있었고 이를 철추(鐵椎)로 부수니 새빨간 피가 흘렀었다고 한다.
뿐 아니라
고려 인종 때에는 척준경(拓俊京)이 임금에게 참소하기를
“강홍의 형제들 일당이 불의의 앙심을 품고 있으니 속히 조처하지 않으면 화를 당할 것이다” 라하며 “강홍과 그의 도당(徒堂)을 내치시고 그들의 향토 진주의 명소 지명을 고치소서.” 라고 간하니 인종은 강홍의 형제와 일족을 죽이고 대봉산의 이름을 봉을 날려 보낸다는 뜻으로 비봉산(飛鳳山)이라 하게 하고, 봉지(鳳池)의 명칭을 봉을 가마솥에 삶는다는 뜻으로 부지(釜池: 가마못)로 고치게 했다 한다.
이로부터 강씨들은 한순간에 망하고 말았는데 오랜 세월이 흘러 다시 후손이 번성하고 권력도 회복되었다고 한다.
한 집안의 일처럼 여겨지는 이야기이지만 진주 사람들의 마음 속에는 봉황을 기다리는 염원이 깃든 대봉산인지라 봉황의 먹이인 대나무 열매를 위해 남강가에 대나무를 심었고 다시 깃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사는 곳의 지명도 봉곡동·상봉동·봉래동 등으로 지었다고 한다.
봉란대는 1920년 산청의 강문수(姜文秀), 진주 판문동 강영진(姜永瑨), 진주 봉곡동 강치섭(姜致燮)등이 발의해 봉란대에 시조 강이식장군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고 비봉포란(飛鳳抱卵) ‘날아간 봉황의 알을 품고 있다.’라는 글을 써 놓았다.
그 후 일제가 봉란대에 방공호를 파면서 봉란대는 파괴되고 유허비도 넘어지게 되어 방치해 오던 봉란대는 1958년 강모학(姜模學)씨가 중심이 돼서 다시 보수하고 봉란대 앞에 강모학 표창비(姜模學 表彰碑)를 돌에 새겨 놓았다,
*경남 연합신문 강신웅교수의 글을 요약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