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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과 아방가르드 / 이승훈 (57) - 제 10장 선과 아방가르드 2. 공안과 아방가르드
2. 공안과 아방가르드
내가 그때 강조한 것은 이런 네 가지 문제를 살피려는 것이 아니라 이 공안이 보여주는 모더니즘 원리에 대한 비판과 대안이다. 들뢰즈에 의하면 모더니즘 원리는 이른바 기표작용체계에 해당한다. 모더니즘은 기호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기표 작용체계는 기호의 이런 자율성을 뜻한다. 기호의 자율성은 기호가 현실과 관계없이 의미를 생산하는 것이고, 모더니즘 문학은 현실과 자연의 재현이 아니라 언어 자체의 미학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기표작용체계에 해당한다.
기표작용체계는 기호를 구성하는 기표가 지시물과 관계없이 기표들의 내적 체계에 의해 기의(의미)를 생산하는 것. 이 글에서는 들뢰즈의 견해를 중심으로 하되 기표작용체계라는 용어 대신 기호의 자율성, 혹은 기호의 내적 체계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기호의 자율성은 여덟 가지 양상 혹은 원리로 정의된다. 그가 말하는 기호의 자율성을 중심으로 이 공안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기호의 자율성은 기호가 사물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기호를 지시하고, 따라서 기호와 기호가 1대 1로 대응하는 내적 체계이다. '장미는 램프다'에서 '장미'(기호)는 구체적인 장미(지물)를 지시하지 않고 '램프'(기호)를 지시하고, '장미'와 '램프'는 기호로서 1대 1로 대응하는 내적 체계이고 이런 내적 체계가 의미를 생산하면서 발전한다. '장미는 램프다' 라는 기호체계는 외적 현실, 대상과는 관계없는 특수한 내적 체계이고, 외부와 단절된 특수한 공간이다.
그러나 덕산 스님의 공안에서는 이런 체계가 깨지고 기호의 발전이 없고 의미 생산이 단절된다. 덕산은 '어디로 가는가?' 라는 설봉의 말에 아무 대꾸도 없이 방장으로 돌아간다. 질문/대답이라는 기호/기호의 관계가 파괴되고 부정되고 기호가 더 이상 발전하지 않는다. 한편 기호는 외부와 단절된 내적 체계가 아니라 실천적 기능이 있지만 이런 실천적 기능도 부정된다.
둘째로 기호의 내적 체계에서는 기호들이 체계 속에서 회귀한다. 말하자면 순환한다. 은유의 원리가 그렇다. '장미는 램프다' 라는 은유는 기호체계 속에서 '장미'가 '램프'로 회귀하며 이런 회귀는 기호 밖의 세계와는 무관하다. 그러나 이 공안의 경우 기호들은 순환하지 않고 계속 이동할 뿐이다. '어디로 가는가?-고개 숙이고 돌아가다-말후구를 모르는 구나'의 구조는 순환이 아니라 이동이고 심하게 말하면 기호들의 단절이고, '덕산'이라는 기호는 삶에서 죽음으로 이동한다.
셋째로 기호의 내적 체계에는 중심이 있지만 이 이야기에는 중심이 없다. 체계는 구조이고 구조에는 중심이 있다. 예컨대 구조가 완벽한 소설은 주인공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그러나 이 공안의 경우 덕산이 중심인가? 설봉이 중심인가? 암두가 중심인가? 중심이 모호하다.
넷째로 기호의 내적 체계는 해석에 의해 의미가 주어지고, 이 의미가 다시 기호가 되는 과정이 반복된다. '장미는 램프다'의 경우 '장미'(기호)는 해석에 의해 '램프'(의미)가 되고 '램프'는 다시 '램프는 창문이다.' 처럼 기호가 되어 해석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이 공안의 경우 기호는 해석의 단서를 제공하지 않고, 따라서 의미가 부여되지 않는, 의미가 탈락된, 의미를 부정하는 기호들의 세계라고 할 수 있다. 무슨 소린지 알 수 없지 않은가?
다섯째로 기호의 내적 체계는 기호들의 무한 집합이 하나의 중심이 되는 기호를 지시하고, 이 기호가 절대적 권위를 상징한다. 예를 들면 '대학'을 의미하는 기호들은 많지만 이런 무한 집합은 '학문'이라는 중심 기호를 지시한다. 그러나 이 공안에는 이런 중심 기호가 없고, 이렇게 절대 기호, 중심 기호가 없다는 것은 불교가 지향하는 공사상과 통한다.
여섯째로 기호의 내적 체계의 경우 기호는 실체를 소유한다. 그것은 기호가 목소리와 관계되고, 이 목소리가 실체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 목소리가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기호의 내적 체계는 음성중심주의이고, 최초의 말씀(목소리)에 의해 우주의 질서가 섰다는 기독교적 해석을 강조하면 음성중심주의는 이성중심주의가 된다. 그러나 이 공안에는 이런 의미로서의 목소리, 곧 질서를 만드는 목소리가 없다. 암두가 은밀히 그 뜻을 말했다고 하지만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고, 암두가 은밀한 덕산이 말후구도 모른다고 했지만 과연 모른다고 한 것인지 알고도 그런 말을 한 것인지 모르겠다. 요컨대 여기서 기호는 실체, 목소리, 이성을 배반한다.
일곱째로 기호의 내적 체계는 체계로부터의 도주선을 부정한다. 이런 체계는 언제나 외부 세계와 단절된 닫힌 공간. 폐쇄적 공간이기 때문이다. '장미는 램프다'에서 '장미'와 '램프'는 어디까지나 이 내적 기호체계에서만 의미가 있고 밖으로의 도주는 허용되지 않는다. '장미' 가 이 체계를 벗어나 현실, 대상, 지시물을 지시하면 '장미'는 '램프'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적 체계로서의 기호는 외부 세계와 단절된 특수한 공간이고, 모더니즘 문학이 강조하는 것 역시 외부 세계의 모방이나 재현이 아니라 외부 세계와 단절된 툭수한 언어 공간이다.
그러나 이 공안은 이런 폐쇄적 공간이 아니라 열린 공간, 개방적 공간이다. 이런 공간에는 시작도 끝도 없다. 그렇지 않는가? 과연 어디가 시작이고 어디가 끝인가? 어느 날은 어느 날일 뿐이다. 어느 날 우연히 이런 일이 있었고, 이야기에는 필연성이 없다. 그런 점에서 선(禪)은 선(線)이고 그것도 도주선이다. 선(禪)은 한 점에 고정되는 것이 아니라 선(線)을 따라 선(線)에 의해 선(線)을 삼키며 무수히 도주한다. 그리고 선(禪)은 선(禪)에 의해 선(禪)을 삼키며 무수히 도주한다. 그러므로 이 도주는 도주가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도주도 아니고 도주가 아닌 것도 아니다. 머무는 것도 아니고 떠나는 것도 아니다.
무주(無住)는 무주가 아니기 때문에 무주이다. 머물지 않는 것이 머무는 것이고, 그것은 주/무주의 분별을 떠났기 때문이다. 선종 6조 혜능에 의하면 무주는 인간의 본성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본성(마음)은 머물지 않고 계속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성, 마음, 무주는 어디에고 걸림이 없는 무애이다. 본성 무애의 작용이 무념(無念)이고 무념이기 때문에 모든 대상은 청정한 무상(無相)이다. 무념이 종(宗)이고 무상이 체(體)이고 무주가 본(本)이라는 말은 이런 뜻이다.
그러므로 무주가 무념이고 무념이 무상이고 무상이 무주다. 기호들은 내적 체계에서 순환하는 것이 아니라 체계에서 도주하고 동시에 머문다. '지금 생각'은 사라지면서 있고, 이동하면서 있고, 이동한 념(念)이 있다. 념념상속이다. 무념(無念)은 유/무의 경계를 초월하는 마음이고 어디에도 머물지 않는 이런 마음이 연속되는 것이 선(禪)이다. 이런 마음은 과거, 현재, 미래도 모르고, 사물도 모르고 자아도 모른다. 왜냐하면 분별 사량을 벗어나고 어디에도 머물지 않기 때문이다. 머물지 않고 이동하는 이런 마음은 있으며 없고 없으며 있다. 무념은 생각하되 아무 생각이 없고, 무주는 무주이며 무주가 아니고, 무상은 상이 있되 상이 없다. 그런 점에서 선의 시학은 탈영토화(내적 체계)에서 재영토화(해방)를 지향한다.
끝으로 기호의 내적 체계는 보편적 기만의 체계이다. 왜냐하면 체계는 인위적 조작이고 허구이고 폭력이고 억압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공안은 이런 기만에서 허구에서 폭력에서 억압에서 탈출하는 해방의 도주의 길을 암시한다. 들뢰즈에 의하면 유목민적 기호계가 해방을 지향하지만 나는 이런해방을 선적 사유 혹은 선적 기호계에서 읽는 입장이다.
이 공안에서 읽을 수 있는 반기호성, 곧 반모더니즘의 특성은 아방가르드 정신과 통하고, 따라서 이 공안은 한 편의 아방가르드 작품이 된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이 공안이 베케트의 희곡과 유사한 느낌을 준다고 말했다. 결국 이 공안은 공안이면서 전위적인 희곡이고, 전위적 희곡이며 공안이다. 아니 한 편의 전위적 시라고 해도 된다. 요컨대 이 공안에서 읽을 수 있는 것은 공안/전위적 희곡/전위적 시의 경계가 해체되는 중도의 미학이다. 이 공안을 파격적 선시, 전위적 선시라고 부르는 이유이다.(이상 이승훈, <선과 모더니즘>, <현대시의 종말과 미학>, 집문당, 2007 참고) (계속)
선과 아방가르드 / 이승훈 (58) - 제 10장 선과 아방가르드 3. 언어 놀이
3. 언어 놀이
내친 김에 전위적 선시가 나갈 방향에 대해 좀 더 부연하자. 내가 <선과 모더니즘>에서 강조한 것은 선적 사유와 선적 감각에 의해 모더니즘 미학을 극복하려는 시도였고, 그런 시도가 아방가르드 시학과 연결되기 때문에 선과 아방가르드의 회통이 다시 문제다.
중요한 것은 언어체계, 기호의 내적 체계에서 해방되는 일이고 방법이고 책략이다. 현대언어학이 강조하는 것은 대상과 단절된 자율적 구조이고, 이 구조, 곧 기호들의 내적 관계가 의미를 생산한다. 그리고 언어가 사유(의미)이고 사유의 조건이다. 언어가 사유를 조작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언어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어떻게?
비트겐슈타인이 생각난다. 그가 후기의 <철학적 탐구>에서 강조한 것은 이런 언어, 곧 사유를 조작하는 언어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그는 '철학의 목적은 파리에게 파리병에서 빠져 나갈 출구를 가리켜 주는 것' (<철학의 탐구>, 309쪽)이라고 말한다. 이때 파리병이 언어이고 인간들은 파리병에 갇힌 파리이다. 어떻게 언어라는 파리병에서 나갈 것인가?
그는 초기의 <논리-철학논고>에서 언어를 현실의 그림으로 정의하고, 이런 언어를 명제라고 부른다. 명제는 과학적으로 실증될 수 있는 언어를 뜻한다. 그러나 결론은 이런 명제들은 무의미한 것이며, 이 명제들, 곧 사다리를 딛고 올라간 후에는 사다리를 던져버려야 한다는 말로 끝난다. 왜냐하면 이 세계에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이 있고, 이런 것은 스스로 드러나고, 이렇게 스스로 드러나는 것은 신비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초기의 그림으로서의 언어는 부정된다. 세계가 어떻게 있느냐가 신비한 것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어떻게'가 아니라 '그저 있음'이다.
그의 후기 철학은 이런 사유를 동기로 한다. 언어는 이제 '그림'이 아니라 '놀이'가 된다. 이른바 언어 게임 혹은 말놀이 개념이 나타난다. 그가 말하는 언어는 경기 혹은 놀이로 인식된다. 이 세상에는 무수한 놀이가 있고 언어 역시 체스 놀이, 축구 게임, 배구 게임처럼 하나의 게임이다.
그렇다면 게임을 구성하는 것은 무엇인가? 크게 보면 '규칙'과 '사용'이다. 축구 게임은 축구 게임의 규칙이 있고, 축구공의 의미는 외부 현실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선수들이 사용할 때 의미가 있다. 절대적 의미가 있는 게 아니라 '사용'이 의미이다. '규칙' 역시 모든 게임을 공통된 규격이 없다. 그렇다고 규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축구, 배구, 농구에 공통된 규칙은 없지만 규칙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런 게임들의 관계를 '가족유사성'이라고 부른다.
언어도 하나의 게임이다. 그러니까 언어, 축구, 배구, 농구는 가족유사성의 관계에 있다. 모든 게임은 한 가족을 구성하는 식구들처럼 유사하다. 한 가족의 얼굴을 보면 유사한 것처럼 언어, 축구, 배구, 농구 경기는 공통된 특성(규칙)은 없지만 유사하다. 한편 축구 경기의 경우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여러 유형이 있듯이 언어 경기 역시 무수한 유형이 있고, 모두 삶의 형식이 된다. 쉽게 생각하자. 노동도 삶의 형식이고, 축구도 삶의 형식이고, 사업도 삶의 형식이고, 말하는 것도 삶의 형식이다. 그리고 언어 놀이도 축구가 그렇듯이 명령, 보고, 검증, 창작, 노래, 시 등 여러 유형이 있다. 이 세상엔 무수한 삶의 형식이 있다. 시쓰기도 삶의 형식이고, 여행도 삶의 형식이다.
요컨대 언어는 '그림'이 아니라 현실과 무관한 게임이고 놀이다. 초기엔 언어는 '논리적 그림'이고 후기엔 '삶의 형식이고 놀이'다. (좀 더 자세한 것은 이승훈, <언어란 무엇인가?>, <영도의 시쓰기>, 푸른사상, 2012 참고 바람)
앞에서도 말했지만 모든 놀이, 경기를 구성하는 것은 '규칙'과 '사용'이고, 축구의 경우 공은 선수가 찰 때 의미가 있고, 언어의 경우도 말을 사용할 때 의미가 있다. '밥 줘!', '저기 밥이 있네.' '응 지금 밥 먹고 있어' 등 사용할 때 의미가 있다. 그렇지 않은가? '밥'이라는 기호 자체는 사용하지 않을 때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런 점에서 비트겐슈타인은 언어 실천을 강조한다. 그리고 언어 실천, 기호 실천은 사유가 없는 행동으로 나타난다. 축구의 경우 선수는 공을 차는 것이지, 공이란 무엇인가? 생각하며 사유하며 공을 차는 것은 아니다. 언어의 경우도 그저 '밥 줘!'라고 말을 하지, '밥이란 무엇인가? 생각하며 사유하며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비트겐슈타인은 <철학적 탐구>에서 사물과 언어, 대상과 이름의 관계를 새롭게 성찰하면서 시작된다. 초기의 사유에 의하면 한 낱말의 의미는 그 낱말이 가리키는 대상이다.(언어회화론) '책상'이라는 낱말이 의미를 소유하는 것은 이 낱말이 책상이라는 사물을 지시할 때이다. 과연 그런가? 비트겐슈타인은 다음처럼 말한다.
A는 건축용 석재들을 가지고 하나의 건물을 짓는다. 벽돌들, 기둥들, 석판들, 들보들이 있다. B는 그에게 석재들을 건네주어야 한다. 더구나 A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순서에 따라서, 그 목적을 위해서 그들은 '벽돌', '기둥', '석판', '들보' 라는 낱말들로 이루어지는 어떤 하나의 언어를 사용한다. A가 그 낱말들을 외친다. B는 이렇게 외치면 가져오도록 배운 석재를 가져간다. 이것을 완전히 원초적 언어라고 생각하라.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이영철 옮김. 1994. 20쪽
건축가 A와 조수 B의 경우 낱말 '벽돌'은 A가 '벽돌!' 소리치면 B는 그소리에 따라 '벽돌'을 가져갈 뿐 '벽돌'이라는 낱말의 의미를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A는 목적에 의해 낱말들을 사용하고 B는 그의 말에 따라 사물들을 가져간다. 이렇게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 이른바 '원초적 언어'이고, 이런 언어의 사용은 어린아이들이 말하는 법을 배울 때 나타난다.
원초적 언어에선 사용이 중요하지 그 의미는 중요한 게 아니다. 건축가와 조수 사이에도 언어 사용이 강조되고 어린아이의 경우에도 언어 사용이 중요하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에는 한 사람이 낱말을 외치고 다른 사람이 그 낱말에 따라 행동하고, 후자의 경우에는 배우는 아이가 낱말을 말한다. 이때 말한다는 것은 사용한다는 것이고, 선생의 말을 따라 한다는 점에서 사용이고 행동이고 연습이다. 그런 점에서 이렇게 낱말을 사용하는 전체 과정은 언어를 배우는 놀이(경기)들 가운데 하나이고, 비트겐슈타인은 이런 놀이들을 '언어 놀이들'이라고 부른다. (위의 책,21~22쪽) (계속)
선과 아방가르드 / 이승훈 (59) - 제 10장 선과 아방가르드 4. 파리병에서 나오는 길
4. 파리병에서 나오는 길
언어 놀이 속에서 우리는 직관적으로 규칙을 따르며 언어를 사용할 뿐이다. 그러므로 언어의 의미가 사용에 있다는 것은 의미, 사유, 생각을 벗어나는 행위를 뜻한다. 비트겐슈타인에 의하면 '생각은 기호의 조작'이다. 그는 기호의 조작, 곧 단어라는 기호를 조작하는 단순한 보기에 대해 다음처럼 말한다.
나는 누군가에게 '사과 여섯 개'라고 써 있는 종이쪽지를 주면서 "가게에 가서 사과 여섯 개를 사오라"고 명령한다. 그가 이 명령을 수행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을 것이다. 그 쪽지가 점원에게 주어지면, 그 점원은 '사과'라는 단어를 각 선반들에 붙어 있는 라벨들과 비교해본다. 그는 라벨들 중 어느 하나에 '사과'라고 적혀 있는 것을 발견하고, 1에서 시작해 쪽지에 적힌 숫자까지 셈하며 그때마다 선반에서 과일을 하나씩 꺼내 봉지에 담는다.
-비트겐슈타인, <청갈색 책>, 진중권 옮김, 그린비, 2006,53쪽
이것이 단어가 사용되는 한 가지 보기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언어를 이렇게 복잡하게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론 이 보기에서 점원은 언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그가 사용하는 방법은 단어가 지시하는 의미를 중심으로 비교, 발견, 셈하기에 의존하고, 비교나 발견이나 셈하기는 모두 기호들을 분류하고 조작하는 것에 지나지 않고, 단어에 대해 사유하는 것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사유는 언어(기호)들의 조작에 지나지 않는다. 요컨대 사유는 지시적 의미를 토대로 낱말들을 조작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언어 놀이는 이렇게 복잡하게 사유하며 언어를 사용하지 않고 그저 사용할 뿐이다.
한편 비트겐슈타인은 이미 <철학적 탐구>에서 이와 비슷한 언어 사용을 보기로 낱말들의 지시적 의미를 비판한 바 있다.
나는 누군가에게 '다섯 개의 빨강 사과'라는 기호가 적힌 종이쪽지를 주며 사오라고 말한다. 그는 종이쪽지를 상인에게 가지고 간다. 상인은 '사과'라는 기호가 붙은 궤짝을 연다. 다음 그는 어떤 열람표에서 '빨강'이란 낱말을 찾으며, 그 맞은편에서 색 견본을 발견한다. 이제 그는 '다섯'까지의 수열을 말하며 각각의 숫자마다 그 견본의 색깔을 가진 사과 하나를 궤짝에서 꺼낸다. 낱말들을 가지고 우리는 이렇게, 그리고 비슷하게 작업한다. 그러나 그가 '빨강'이라는 낱말을 어디에서, 그리고 어떻게 참조해야 하는지, 그리고 그가 '다섯'이라는 낱말을 가지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아는가?
-비트겐슈타인, <철학적 탐구>, 이영철 역, 1994, 서광사, 19~20쪽
앞의 보기가 강조한 것은 지시적 의미를 토대로 낱말들을 조작하는 것이 사유라는 점이고, 위의 보기가 강조하는 것은 지시적 의미 자체에 대한 비판이다. 특히 '빨강'이라는 낱말과 '다섯'이라는 낱말이 그렇다. 상인은 '빨강' 이라는 낱말을 열람표에서 찾고 그 견본의 색깔을 발견한다. 그러나 문제는 견본에 있는 '빨강'이 아니라 낱말이 지시하는 사물은 무엇인가? '사과' 라는 낱말이 사과(사물)을 지시하듯이 '빨강'이란 낱말도 그에 해당하는 사물을 지지하는가? 이 낱말은 참조해야 할 사물이 없다. '다섯'이란 낱말도 그렇다. 이 낱말이 지시하는 사물은 없다. 이 낱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물론 '다섯'이라는 낱말의 정의와 설명은 가능하지만 그런 설명은 한계가 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낱말의 의미가 아니라 사용이다.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사유가 강조하는 것은 결국 언어의 의미는 사용에 있다는 것. '빨강 사과를 가져오라' 고 할 때 우리는 '빨강'에 대한 사유, 곧 의미를 생각하고, 다음 '사과'에 대해 사유하고, 다음 '가져오라' 에 대해 사유하면서 이 낱말들을 사용하는 게 아니라 관행(practice)으로, 곧 그냥 사용할 뿐이다. 언어를 사용할 때는 사유가 필요 없다. 그냥 하는 것은 일체의 관념, 사유, 조작에서 벗어난 마음으로 움직이는 것이고 이런 행위가 선(禪)과 통한다. 선이 강조하는 것은 분별, 조작, 시비를 떠나는 평상심이고, 이 평상심이 무심이고 무상이고 무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언어 놀이는 선의 시각에서 새롭게 해명되고 해명될 필요가 있다.(좀 더 자세한 것은 이승훈, <사유는 기호의 조작이다> <영도의 시쓰기> 앞의 책, 257~262 참고 바람)
결국 언어는 놀이이고 이런 놀이는 사유를 모른다. '파리가 같힌 유리병'에서 파리가 나오는 길은 언어 놀이에 있다. 외부와 단절된 기호체계는 '파리가 갇힌 파리병'이고, 언어 놀이, 사유 없는 언어 사용은 이 체계에서 벗어나는 길, 곧 '파리병에서 나오는 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초기 언어 회화론, 명제론의 끝 부분에서 결국 명제(언어)들은 극복의 대상이고 다 올라간 다음 버려야 할 사다리이고, 이 사다리를 던져버릴 때 우리는 세계를 올바로 본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세계가 있는 방식'이 아니라 '세계가 있다는 것'이 신비하기 때문이다. 언어(명제)는 우리가 다 올라간 다음 버려야 할 사다리이고, '파리가 갇힌 파리병'이다. 언어는 우리가 갇힌 감옥이다. 사다리를 버리고 파리병에서 나오는 길이 선이고 해방이다. 언어 놀이는 파리병에서 나오는 출구이고, 그것은 기호의 내적 체계를 부정하고 해체하고 거기서 도주할 때 가능하고, 이런 도주가 선(禪)과 통한다. 다시 말하자. 언어 놀이, 사유 없는 기호 사용이 파리병에서 나오는 길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