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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님의 사건수첩은 2017년 작품이다. 이 영화는 조선시대 예종을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예종의 실제 이야기는 아니다.예종은 재임기간이 너무 짧아 업적이 제대로 거론되지 않았다. 조카를 없애고 왕위를 찬탈한 세조의 둘째 아들이며 세종의 손자라는 정도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다. 왕의 재임 일년 2개월만에 생을 마감했기 때문이다. 왕의 나이 20살때였다. 예종은 매우 총명했다고 알려지고 있다. 역사에서 차지하는 위치가 협소하고 알려진 것이 별로 없기 때문에 감독은 이부분에 착안해 예종을 매우 다재다능한 왕으로 묘사를 하고 있다. 영화에 나오는 총은 당시에 조선에는 없었다. 선조때인 임진왜란때 처음으로 조선에 나타난 무기였기 때문이다. 사관인 이서가 그 총을 자신의 형이 만들었고 어릴 때부터 자주 사용했다는 것은 틀려도 아주 틀린 말이다. 하긴 영화 감독이 영화상으로나마 예종을 다재다능하고 총도 잘 쏘고 칼의 달인이며 마술사 능력도 있는 지금껏 조선의 왕에서 찾아보지 못했던 재능을 영화라는 매체를 이용해 마음껏 날개를 펴게 한 것은 충분히 이해가 간다. 그리고 왕과 사관 즉 서로 융합할 수 없는 관계였던 사이를 아주 친근하면서 둘도 없는 군주와 신하로 묘사한 것도 흥미롭다. 조선 8대 임금이지만 훈신세력과 종친세력사이에서 흔들렸던 실제 예종과는 달리 능구렁이 훈신(나라나 군주를 위해 드러나게 공로를 세운 신하)세력들을 이리저리 잘 요리하는 모습도 잠시나마 마음을 시원하게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예종이라는 것을 밝혔고 그의 형의 아들 즉 예종의 조카인 자산군이 등장하는 등 역사적 사실에 기초를 하는 만큼 너무 픽션으로 흐른 감은 지울 수 없다. 역사를 제대로 모르는 세대나 국민들이 실제 예종이 그랬을 것이라고 착각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역사에서 잘 알려지지 않은 예종이었으니 말이지 만일 세종대왕이었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그래도 흥미롭게 흐름을 이끌어 예종이라는 왕에 대해 다시 한번 들여다 보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는 점에서 나는 흥미롭게 이 영화를 지켜봤다.참고로 조선시대 27대왕을 열거한다.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 광인효현숙경영 정순헌철고순.)
모든 사건은 직접 파헤쳐야 직성이 풀리는 총명한 왕 ‘예종’(이선균). 그를 보좌하기 위해 학식, 가문, 외모(?)는 물론 한 번 본 것은 절대 잊지 않는 비상한 재주까지 겸비한 신입사관 ‘이서’가 임명된다.
하지만 의욕과 달리 어리바리한 행동을 일삼던 이서(안재홍)는 예종의 따가운 눈총을 한 몸에 받으며 고된 궁궐 생활을 시작한다.
때마침 한양에 괴이한 소문이 돌기 시작하고, 예종은 모든 소문과 사건이 심상치 않음을 직감한다. 예종과 이서는 모든 과학적 지식과 견문을 총동원, 괴소문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나서는데…!
사건 쫓는 임금과 임금 쫓는 신입사관
궁 넘고 담 넘는 유쾌한 과학수사가 시작된다!
태조는 나라를 세우고
태조의 손자인 세종은 한글을 만들고
세종의 손자인 예종은 사건을 쫓는다!
사건 쫓는 임금과 임금 쫓는 신입사관의 이야기가 흥미롭게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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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금님의 영화수첩 ]
낮에는 임금과 사관, 밤에는 비밀 수사대 요원.
<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조선 명탐정> 잇는 2017년 코믹수사활극 탄생이오!
< 임금님의 사건수첩>은 예리한 추리력의 막무가내 임금 '예종'(이선균)과 천재적 기억력의 어리바리 신입사관 '이서'(안재홍)가 한양을 뒤흔든 괴소문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과학수사를 벌이는 코믹수사활극이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조선 명탐정> 시리즈, <해적: 바다로 간 산적> 등 기존 사극의 격식과 전형성을 깨는 참신한 소재와 재미로 큰 흥행을 이끈 작품들의 계보를 잇는 코믹수사활극 <임금님의 사건수첩>은 조선시대의 과학수사라는 신선한 소재와 전에 없던 특별한 왕 ‘예종’과 어리바리한 신입사관 ‘이서’의 유쾌한 콤비 플레이로 차별화된 재미를 선사한다.
논어보다 해부학, 궁궐보다 사건 현장이 적성에 맞는 특별한 임금 ‘예종’과 한 번 본 것은 무엇이든 기억하는 비상한 능력을 지닌 신입사관 ‘이서’. <임금님의 사건수첩>은 지금껏 본 적 없는 재기 넘치는 임금과 사관 캐릭터, 실학과 논리적 추론을 바탕으로 민심을 뒤흔든 소문의 실체에 접근해 가는 이들의 활약을 통해 흥미를 자극한다. 특히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사건 속 단서를 찾기 위해 밤마다 저잣거리로의 잠행을 나가거나, 시체 검안까지 직접 해내는 색다른 임금. 그리고 평소엔 둔하기가 당대 제일이지만 결정적 순간 능력을 발휘하며 의외의 활약을 펼치는 어리바리한 신입사관의 콤비 호흡은 생동감 넘치는 재미를 선사한다. 긴박한 상황 속 손발이 맞지 않아 티격태격하다가도 ‘5보’(五步)이상 떨어지지 않고, 찰떡 같이 붙어 사건을 파헤쳐가는 예종과 이서의 군신(君臣) 앙상블은 예측할 수 없는 재미와 웃음을 유발한다. 여기에 궁궐 안 은밀하게 숨겨진 임금님의 비밀 공간, 시체 검안실, 물 속을 가르는 잠항선 등 독창적인 상상력이 가미된 공간과 소품으로 다채로운 볼거리를 전하는 <임금님의 사건수첩>은 4월 봄 극장가, 남녀노소, 온 가족이 즐길 수 있는 유쾌한 웃음과 재미로 관객들을 매료시킬 것이다.
조선을 뒤흔든 괴소문의 실체를 찾아라!
사건 쫓는 임금과 임금 쫓는 사관...품격이 다른 궁궐 콤비 납시오!
모든 사건을 직접 눈으로 보고 쫓아야 직성이 풀리는 임금과 그의 곁에서 다섯 걸음 이상 떨어져서는 안 되는 임무를 받은 어리바리한 신입사관의 만남은 예측할 수 없는 웃음과 케미스트리를 만든다. 의술과 과학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왕성한 호기심, 과감한 행동력까지 지닌 조선의 임금 ‘예종’. 사건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바람처럼 떠나는 임금 예종은 그간 사극에 주로 등장했던 묵직하고 근엄한 왕의 모습과 차별화 된 색다른 매력으로 신선한 재미를 자아낸다. 특히 민심을 혼란케 하는 소문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신입사관 이서를 곁에 두지만, 둔하고 굼뜬 이서의 엉뚱함과 답답함에 잔소리를 쏟아내는 예종의 모습은 웃음을 선사한다. 낮에는 사리사욕에 눈먼 대신들 앞에서 군왕으로서의 존재감을 발산하고, 밤에는 사건 현장을 찾아 활보하는 예종의 다채로운 매력은 극에 흥미진진한 생명력을 불어넣는다.
반면 비상한 기억력과 두뇌, 남다른 충정으로 까다로운 예종의 테스트를 모두 가뿐히 통과한 신입사관 ‘이서’. 장원급제의 화려한 스펙과 충만한 의욕과는 달리 예종의 막무가내 지시에 허둥대고, 따라 주지 않는 몸 때문에 실수를 연발하는 이서는 친근하면서도 사랑스러운 매력으로 관객들을 무장해제 시킨다. 특히 툭하면 ‘어명’을 앞세우는 예종의 지시에 울며 겨자 먹기로 사건 현장에 따라 나서지만 위기의 순간 번뜩이는 재치를 발휘, 제 몫을 해내는 이서의 활약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의외성으로 극에 활기를 제공한다.
또한 입만 열면 독설과 구박에 허세까지 완벽한 조선 최고의 슈퍼 갑(甲) 예종과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24시간 시달리는 가성비 갑(甲) 이서가 보여주는 티격태격 호흡은 기존 사극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콤비의 탄생을 알리며 관객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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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종은 과연 누구인가.
예종은 1450년(세종 32)에 세조와 정희왕후 윤씨의 2남 1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황(晄), 자는 명조(明照)이며 세조가 즉위하자 해명대군(海陽大君)에 봉해졌다. 형인 의경세자(후에 덕종으로 추존)가 세자로 책봉된 지 2년 만인 1457년(세조 3)에 죽어서 둘째 아들인 그가 세자의 자리를 물려받아 왕위에 올랐다.그러니까 예종은 세종대왕의 손자인 것이다.
실록에 따르면 그는 성품이 영명과단(英明果斷, 총명하고 일에 과단성이 있음)하고 공검연묵(恭儉淵默, 공손하고 겸손하며 속이 깊고 말이 없음)하며, 서책에 뜻을 두어 시학자(侍學者)로 하여금 날마다 세 번씩 진강(進講)하게 하고, 비록 몹시 춥거나 더울 때도 그만두지 않았다고 한다. 그렇게 덕업(德業)이 일찍 이루어지고 여망(輿望)이 날마다 높아지자 세조는 "세자가 육례(六藝, 禮·樂·射·御·書·數)에 이미 통하지 아니하는 바가 없다."라며 칭찬했다. 예종은 효성이 지극해 세조의 병환이 깊어지자 수라상과 약을 직접 챙기며 극진히 간호했는데, 이 때문에 본인의 건강이 나빠졌다.
병세가 깊어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세조는 죽기 하루 전날인 1468년(세조 14) 9월 7일 예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세조로부터 직접 면복을 건네받은 예종은 수강궁에서 즉위했다. 이때 그의 나이 19세였다.
예종은 세자 시절인 1460년(세조 6)에 한명회의 큰딸과 혼인했다. 당시 훈신세력의 핵심인 한명회는 큰 딸을 예종의 비로 또 다른 딸은 예종의 뒤를 이은 성종의 비가 되게 만들었다. 조선의 두 왕의 장인이 된 것이다. 당시 훈신 세력의 위세를 잘 말해주고 있다.
훈신 세력과 종친 세력의 대립
젊은 나이로 왕위에 오른 예종의 정치적 영향력은 크지 않았다. 모후인 정희왕후의 수렴청정과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具致寬) 등 원상(院相)들의 정사 관여 때문이었다. 원상은 세조 말년에 도입된 제도로, 세조는 측근인 한명회, 신숙주, 구치관을 원상으로 임명해 그들로 하여금 예종의 정무를 돕도록 했다. 그들은 수시로 승정원에 드나들며 정무에 참견했다. 이것은 그들에게 막강한 권력을 부여했고 왕권은 그만큼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
예종을 불안하게 하는 세력은 훈신 세력만이 아니었다. 종친 세력이 훈신 세력에 대적할 만큼 성장해 있었던 것이다. 세조는 이시애의 난을 겪으면서 훈신 세력을 견제할 필요성을 느꼈고, 그 대항마로 종친 세력을 키우고자 했다. 종친 세력의 중심은 이시애의 난으로 부상한 구성군과 남이였다. 구성군은 세종의 넷째 아들인 임영대군(臨瀛大君)의 아들, 즉 세종의 손자였다. 그는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이 된 데 이어 병조판서와 영의정까지 지내는 등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조정의 실력자가 되었다. 남이는 태종의 외증손자로, 태종의 넷째 딸인 정선공주(貞善公主)와 의산군(宜山君) 남휘(南暉)의 손자다. 그는 훈신인 권람(權擥)의 사위이기도 했으며, 27세의 나이로 병조판서의 자리에 올라 주위의 부러움과 시샘을 한몸에 받았다.
예종은 세자 시절 부왕 세조가 자신의 정적이 될 수 있는 종친 세력을 키우는 것을 불안해했다. 세조에게 "성상께서 구성을 지나치게 사랑하시니 신은 이를 그르게 여깁니다."라고 발언했던 것에서도 예종의 심정을 알 수 있다. 특히 예종은 남이에 대해서도 경계하는 마음이 컸다. 그러던 중 유자광(柳子光)이 남이의 역모를 고했고 결국 남이는 처형됐다.
20세의 젊은 나이로 죽다
예종은 왕위에 오르면서 분경 금지, 겸판서 폐지, 대납 금지, 면책특권 제한 등 훈신 세력들을 견제하기 위한 일련의 정치적 결단을 실행에 옮겼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런 와중에 훈신 세력을 견제하던 종친 세력이 '남이의 옥'을 계기로 힘을 잃게 되자 이를 기회로 훈신 세력은 더욱 자신들의 입지를 공고히 하려고 했다. 그런 그들의 유일한 방해물은 오로지 왕인 예종뿐이었다. 예종이 계속해서 훈신들의 권한을 제한하는 정책을 고수한다면 정치적 대결도 불가피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은 1469년(예종 1년) 11월 28일 예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훈신 세력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정희대비와 원상들은 왕이 죽은 바로 그날 일사천리로 덕종(의경세자, 예종의 형)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者山君)을 왕으로 지목하고 즉위식까지 마쳤으니, 그가 바로 조선의 9대 왕인 성종이다. 왕위 계승 서열로만 따지자면 자산군은 왕이 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우선 예종과 안순왕후 사이에서 낳은 원자(제안대군)가 있었다. 원자가 너무 어려서 안 된다면, 그다음 계승 순위는 의경세자의 큰아들인 월산군(月山君)이 되어야 옳았다. 하지만 자산군이 왕위에 오른데는 그 이유가 있었다. 자산군은 다름 아닌 당대의 최고의 권력자 한명회의 사위였다. 그래서 이를 한명회와 정희대비의 정치적 결탁으로 보는 시선이 많았고, 때문에 예종 독살설이 대두되기도 했다. 그러나 수렴청정을 하고 있는 정희대비와 훈신 세력의 좌장 한명회가 왕의 뒤에서 권력을 쥐고 있는 이상 이러한 의혹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결국 아쉬움과 의혹만을 남긴 채, 예종은 왕위에 오른 지 1년 2개월 만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이때 나이 20세였다. 시호는 양도(襄悼)이고, 능은 경기도 고양에 있는 창릉(昌陵)이다.
첫댓글 언제 소주 한병들고 경기도 고양에 있는 예종왕의 무덤인 창릉에 가야겠다. 사람들이 잘 모르는 왕 그리고 가슴속에 뭔가를 많이 품고 있었을 것 같은 예종왕님께 큰 절을 드리고 싶기 때문이다. 그런데 임금님의 사건수첩에 나온 배우들과 감독은 당연히 창릉을 찾았겠지. 쓸데없는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