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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한 우주 공간에서의 동행
1. 서로에게로의 경배를!
《시조21》여름호에서 많은 작품들과 만났다. 한 편 한 편이 그 시인에게는 최상의 노력의 소산일 터다. 하지만 그 중에 골라내어 읽을 수밖에 없다. 늘 그러하지만 이번 호에서는 특히 삶에 대한 간절함이 실감실정으로 형상화된 작품들을 눈여겨보았다.
말세지말이라고도 일컫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가장 필요로 하는 마음은‘간절함’일 것이다. 워낙 대형 인재와 자연재해가 빈번한 이 지구촌에 사는 이들은 이제 웬만한 일에도 그리 놀라지 않을 정도로 둔감해져 버렸다. 결코 바람직한 일이 아니다.
다음 작품을 보자. 소박하지만 진중하기 그지없다. 김종삼의「묵화」를 연상케 한다. 하지만 다른 목소리, 다른 방향의 같은 노래다.
가끔, 소는 목을 돌려
제 꼬리에 입 맞춘다
꼬리 또한 마침맞게
입을 슬쩍 쓸어준다
너 있어
내가 산다며
서로에게 경배하듯
-신필영,「소」전문
평소 소와 가까이 하고 사는 이들에게 이러한 장면은 일상이다. 그러기에 그냥 지나치고 말뿐 그리 깊이 생각하지 않는 법이다. 일반인들은 생태적으로 그런 것을 두고 그렇게 의미 있게 생각하지 않지만 시인의 날카로운 눈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소의 입과 꼬리와의 만남은 물론 소의 본능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끔, 소는 목을 돌려/ 제 꼬리에 입’을 맞추고, ‘꼬리 또한 마침맞게/ 입을 슬쩍 쓸어’주는 것은 참으로 절묘한 상응이다.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시어는‘마침맞게’라는 말이다. 이 시편의 핵심어다. 더도 덜도 말고‘마침맞게’꼬리가 입을 쓸어줌으로써 서로에게의 경배는 완성된다. 이렇듯 단시조「소」는 너와 나 사이의 상생관계를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 시조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그렇다. 삶은 이런 것이구나!’하고 다시 한 번 자신의 삶의 방향을 가다듬게 만든다.
우리는 서로에게 경배까지는 할 수 없을지라도 어떠한 경우에도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터다. 상대의 지위고하와 삶의 형편이 어떠하든지 간에…….
울음 깬 그날부터 눈꺼풀 닫을 때까지
은밀한 경계선에 감시하는 저 시선들
일상의 그 모든 것은
프로그램 되어진다
그들은 왜 낯모르는 당신이 궁금할까
촘촘히 스크린 한 소름 돋는 미궁 세상
언제쯤 속내도 찍혀
다 배포될 것이다
두렵다 기억해선 안 되는 것 재생될 때
가면을 그때그때 상황 맞게 바꿔 쓰는
오늘 밤 빛나는 자해
내 두 눈은 정전이다
-오종문,「천 개의 눈」전문
「천 개의 눈」은 섬뜩하다. 최후의 심판을 연상시킨다. 요즘은 어디든지 CCTV가 설치되어 있어 감시의 눈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요람에서 무덤까지 시선들이 뒤쫓고 있다. 그리하여‘일상의 그 모든 것은/ 프로그램 되어’져서 우리를 옭아맨다. 자유로울 수가 없다. 모르는‘당신’에 대해 굳이 궁금해 하지도 않아도 될 터인데 법적으로 설치된 것에 의해 우리 스스로 속박을 자청한 꼴이다.‘촘촘히 스크린 한 소름 돋는 미궁 세상/ 언제쯤 속내도 찍혀/ 다 배포될 것’이라는 대목에서 전율이 일어난다. 결코 드러나서는 안 될‘속내’까지도 다 까발려진다면 마지막 자존까지 무너지고 말 것이다. 그러고 나면 우리에게 무엇이 남을 것인가. ‘기억해선 안 되는 것 재생될 때’가면을 상황에 따라 바꿔 써야 하는 한 자아는 밤을 맞아 ‘빛나는 자해’끝에‘두 눈은 정전’을 맞는다. ‘천 개의 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한 자아가 선택한 길이다.
한 사람 떠나갔다,
술도 시도 다 버리고
도다리 살 차지고
다북쑥 올라오면
묵은 해 풀어내자고
몸살을 앓더니만
올봄은 더디다고
멋쩍게 웃던 저녁
눈으로 보내주던
성근 말만 맴도는데
다 식은
도다리 쑥국이
네 손길을 기다린다
-정용국,「도다리 쑥국」전문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서로에게 위안이 되던 ‘한 사람’을 잃고 난 뒤의 상실감을 노래하고 있다. 시종 담담한 어조여서 더욱 애절하다. 그는 시도 버리고 술도 버렸다. ‘도다리 살 차지고/ 다북쑥 올라오면// 묵은 해 풀어내자고/ 몸살을 앓’던 그가 끝내 떠나간 것이다. 바다에서 생산된 봄날의 도다리와 육지에서 돋아나는 다북쑥을 함께 넣어 끓인‘도다리 쑥국’을 앞에 놓고 다시 한 번 술잔을 주고받으며 정담을 나누고자 했으나 ‘올봄은 더디다고/ 멋쩍게 웃던 저녁’이 마지막이 되고 만 것이다. 「도다리 쑥국」에서 ‘시의 화자’와 ‘한 사람’은 앞서 살핀 신필영의「소」에서 소의 입과 꼬리와의 관계와 엇비슷하다. ‘소’는 그 관계가 지속되고 있지만「도다리 쑥국」에서는 상생의 한 쪽은 완전 상실 상태다. 그것이 다른 점이다.
2. 웃음에 관한 고찰
아래 두 편은 소재가 전혀 다르지만 웃음을 자아내는 점에서 일맥상통한다. 정경화의「그러려니, 섬」은 미소를 짓게 하고, 박해성의「초대」는 일순간 폭소를 터뜨리게 한다.
섬으로 가는 뱃길,
그러려니 해야 하네
눈앞에 제 집 두고 사정없이 되돌려져
낯 설은 포항 부둣가 난민처럼 던져져도…
섬으로 오는 택배,
그러려니 해야 하네
살찐 감자꾸러미 싹이 난 채 떠돌아도
소문은 파도에 주고 명이나물 캐야 하네
잇몸살 젖몸살에 섬백리향 말라가면
해무에 통증을 묻고 적소로도 잊혀지는,
을릉도 그 섬에서는
그러려니 해야 하네
-정경화,「그러려니, 섬」전문
밥상머리 불쑥, 파리 한 분 등장하시네
감히 예가 어디라고, 팔을 휘휘 내두르자
두 손을 싹싹 비비시네
한번만 봐달라고
어디서 오셨는지 어디로 가시는지
전공은 무엇인지 종교는 있으신지
질문은 생략한 채로 맞대면을 하자하니
거울도 안 본 그 얼굴 마음에 걸리셨나
얼른 쓱쓱 문질러 마른세수를 하시네,
어차피 차려진 밥상
자, 우리 겸상하세
-박해성,「초대」전문
「그러려니, 섬」은 유치환의 시「을릉도」를 연상케 한다. 시인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쓰는 생활 수사법인 ‘그러려니’에 착안하여 뭍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는 섬의 나라 울릉도 정서를 흥겹게 표현하고 있다. 흔히 다소 체념적이기는 하나 ‘일의 있는 대로를 그대로 인정하고 사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하는 어투인 ‘그러려니’를 활용하여 새로운‘그러려니의 철학’을 정립하고 있다. 또한‘그러려니’에는 한국인의 삶의 태도인‘은근과 끈기’의 정서가 깃들어 있는 것이 보인다. 그렇기에‘눈앞에 제 집 두고 사정없이 되돌려져/ 낯 설은 포항 부둣가 난민처럼 던져’질지언정‘섬으로 가는 뱃길, 그러려니 해야 하네’라는 발상의 육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둘째 수에서도 마찬가지다. ‘섬으로 오는 택배’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셋째 수에서‘섬백리향 말라가면/ 해무에 통증을 묻고 적소로도 잊혀지’기도 하는 섬인‘을릉도 그 섬에서는/ 그러려니 해야 하’는 것이 좋다고 거듭 말한다. 세 수를 눈으로 따라 읽어가다 보면 절로 미소가 머금어진다.
「초대」는 이종문 시인이 벌레들에 대해 노래한 여러 편의 해학 시편들을 떠올리게 한다. ‘밥상머리 불쑥, 파리 한 분 등장하시네’라고 미물이라고 일컫는 파리에 대하여 과분한 존칭을 쓰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끝까지 그런 어투다.) 시의 화자는 파리를 쫓아내려고 하고 파리는 한번만 봐달라고 싹싹 빈다. 그런데 둘째 수가 참으로 가관(?)이다. 어디에서 왔고 어디로 가는지를 묻고 심지어는 전공과 종교까지 묻는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셋째 수에서는 파리가 마른세수를 하는 것을 보고 화자는 결단한다. ‘어차피 차려진 밥상/ 자, 우리 겸상’하자고. 그렇다. 이 시의 화자가 파리에게 대하는 존칭 어법으로 보아 이미 이것은 예견된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정성들여 차려놓은 밥상에‘파리’와 같이 예기치 못했던 한 사람이 찾아왔을 때 우리가 가지게 되는 태도에 대해서다. 「초대」는 그런 일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웃음이 필요한 시대다. 모두 잘 웃지 않는다. 웃을 일보다 애통해야 할 일이 더 많은 세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러할수록 웃음을 회복해야 한다. 몇 해 전 최영효 시인이 흡사 논문 제목 같은 다소 거창한 이름으로「웃음에 관한 고찰」을 발표한 적이 있다. 살면서 웃음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그러려니, 섬」과 「초대」두 작품이 다시금 강하게 환기시키고 있다.
3. 따로 떨어져 가는 것 아니라 함께 가는 일행
김 강사는 학문 접고 과일 팔러 오늘 왔다
아파트 노인정 앞 팽나무 짙은 그늘
소설론 강의하던 시간 과일 사라 외친다
세상일도 소설속의 플롯처럼 전개되어
위기단계 이른 그를 우연히 만난 오후
우수에 여윈 두 뺨이 능금처럼 붉어진다
대학 강단 문턱 높아 무릎 깬 김 박사는
제비새끼 같은 식솔 귀울음 병이 되어
지친 삶 그림자 끌고 이 길 들어선 거였다
예지에 빛나던 눈은 우물처럼 슬픔 깊고
지성미 닦은 이마 검게 타 패인 날에
이 시대 사실주의를 확성기로 팔고 있다
-정해송,「과일장수」전문
「과일장수」는 대학에서 강의를 하던 한 지성인이 살기 위한 방책으로 과일장수가 되어 장사하고 있는 장면을 노래하고 있다. 소설론을 강의하던 시간에 과일을 팔지 않고는 아니 되는 김 강사의 처지가 딱하지만 어찌 보면 그는 제대로 된 선택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시간 강사로는 생계가 유지되기 힘들다면 과일장수는 아주 실리적인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얼마나 수익이 나올지는 알 수 없으나‘대학 강단 문턱 높아 무릎 깬 김 박사’인 김 강사에게 과일을 파는 일은‘제비새끼 같은 식솔 귀울음 병’치유 방안이기에 현명하다고 해야 옳겠다. ‘확성기’로 과일을 파는 일이나‘마이크’를 잡고 예지로 빛나는 눈빛으로 학문을 논하던 일은 모두 삶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학 강사에서 과일장수로 탈바꿈한 김 박사의 애환의 삶은 가볍게 스쳐 지날 수가 없다.
다음은 이광 시인의 신작 세 편이다. 이미 이광 시인은 발군의 역량을 보인 바 있지만 이번 작품들을 통해서 그의 존재 가치는 더욱 빛나고 있지 않나 생각한다. 특히 그가 시작 노트에서‘첫 시집 이후 다소 뜸했지만,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눈에 띄기를 바라며 그들의 근황을 옮겨본다. 앞서가는 자와 뒤따르는 자가 따로 떨어져 가는 게 아니라 함께 가는 일행임을 서로 공감할 때 우리는 무한한 우주 공간에서 비로소 동행이 되는 것이다.’라고 자못 우주론적 존재 철학을 드러내고 있는 글을 읽으면서 이 시인이 얼마나 뜨겁게 시조를 붙들고 삶의 질곡의 현장을 치열하게 노래하고자 애쓰고 있는지를 여실히 엿보게 되었다.
문 밖엔
늘 헤쳐 온 파도가 넘실댄다
바다도 뭍도 아닌
여기는 작은 선창
그물질
지친 몸 부릴
배를 댄다
집이다
-이광,「현관」전문
일행을 뒤따르는 히말라야 셰르파처럼
도시의 갖은 짐을 걸머지고 가는 사내
군살이 죄 빠진 몸피 걸음새 날렵하다
내 꿈은 버렸지만 딸애 꿈은 지켜주자
개당 구백 원씩 하나라도 더 날라야
지난달 생긴 빚 갚고 품에 넣는 지전 한 잎
하루치 택배물량 포개 실은 일톤 탑차
막힌 길 뚫고 나면 발로 뛰는 층층다리
서산에 해 떨어질 땐 몸도 기운 짐짝이다
언제쯤 날아갈 듯 홀가분한 날이 올까
히말라야 산 정상을 상상 속에 오른 모습
환호는 차마 못하고
반듯이 잡는 핸들
-이광,「포터」전문
깡깡 깡깡 두들기며 시름도 쪼아내고
깡깡 깡깡 깡만 남아 시계추로 내젓던 팔
사는 건 부단한 날갯짓
갈매기도 끼룩댔지
남정네도 손을 드는 그 험한 망치질로
자식들 실어 보내 빈 배로 남은 노구
녹이 낀 만신창이는
누가 깡깡 해줄런가
조선업 맨 밑바닥 다지느라 깡깡 깡깡
아낙네 팔자타령 장단 넣어 깡깡 깡깡
저물녘 어두운 귓속
그 소리떼 날아든다
-이광,「깡깡이 아지매」전문
「현관」은 단시조의 묘미가 잘 살아 있다. ‘문 밖엔/ 늘 헤쳐 온 파도가 넘실’대는데‘바다도 뭍도 아닌/ 여기는 작은 선창’아라고‘현관’에 대해 의미 규정을 한다. ‘작은 선창’이라는 표현이 아주 적절하다. 착상 자체는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닐지라도 육화 과정이 창의적이다 보니 이 시편은 명징하게 다가온다. ‘그물질/지친 몸 부릴/ 배를 댄다’라고 노래한 뒤 줄을 바꾸어서‘집이다’라고 작은 반전으로 끝맺는 것이 인상적이다. 앞서 신필영 시인의 단시조「소」에서 쓰인 시어 ‘마침맞게’를 이광 시인의「현관」의 결구‘집이다’와의 관련지어 생각해 본다. ‘마침맞게’의 안온함과 하루 일과의 모든 피로를 마음껏 부려 놓을 수 있는‘집이다’의 평온함이 자연스레 접맥되고 있는 것을 느낀다. 묘한 일맥상통이다.
「포터」에서 ‘포터’는 차 이름이기도 하지만 짐을 나르는 짐꾼이름이기도 하다. 하여 「포터」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일톤 탑차 ‘포터’를 모는 운전기사이면서 ‘히말라야 셰르파’이기도 하다. ‘도시의 갖은 짐을 걸머지고 가는 사내’여서‘군살이 죄 빠진’바람에 걸음새 날렵하다. 그리고 자신의 꿈은 버렸지만, 딸애 꿈은 지켜주기 위해 온갖 어려움을 견디어 낸다. 막힌 길을 뚫고 층층다리를 발로 뛰니‘서산에 해 떨어질 땐 몸도 기운 짐짝’일 수밖에 없다. 그런 중에도 꿈꾼다. ‘언제쯤 날아갈 듯 홀가분한 날’이 와서‘히말라야 산 정상을 상상 속에 오른 모습’을 그려본다. 그 생각을 하자 환호하고 싶었지만 참고 다시금 반듯이 핸들을 잡는다. 이광 시인은 이렇듯 삶의 현장을 멀찍이서 관찰하고 있지 않고 그 속으로 파묻혀 들어가서 소시민의 애환을 주도면밀하게 네 수의 시조로 엮어낸다.
이 뿐만이 아니다.「깡깡이 아지매」는 언뜻 보면 별다른 내용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새겨 읽으면 실감실정 그대로다. 깡깡 두들겨서 시름도 쪼아내고, 깡만 남아 시계추로 내젓던 팔이 결국 ‘사는 건 부단한 날갯짓’임을 자각하게 한다. 더구나 갈매기조차도 함께 끼룩대면서 성원하고 있다. ‘남정네도 손을 드는 그 험한 망치질로/ 자식들 실어 보내 빈 배로 남은 노구’이지만 그의 일은 그치지 않는다. 깡깡이 아지매가 하는 일은‘조선업 맨 밑바닥 다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아낙네 팔자타령 장단 넣어 깡깡’두들기는 소리가 시의 화자의‘저물녘 어두운 귓속’으로 날아들게 됨으로써 그 귓속이 환히 밝아졌으리라.
4. 묻혀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몇몇 시인들의 신작들을 일별하면서 읽는 즐거움에 푹 빠져들었는데 이제 그 꿈에서 깨어날 때가 되었다. 그런데 갑자기 아주 오래 전인 1977년《현대시학》9월호 시조 월평이 생각난다. 일평생을 작품과 이론을 겸해온 이우걸 시인이 그 난을 맡았는데, 그 때 등단하지도 않은 필자의 작품「연못둑 산책」외 몇 편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일이 있었다. 아주 파격적인 일이었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시조문단의 말석에서 활동하다 보니 본의 아니게 평필을 들게 되거나 시조에 대해 말할 자리가 생겨서 잘 알려져 있는 시인은 아니지만 작품이 좋아서 그 시인들의 작품을 다수 소개한 일이 있었다. 이 일에 부지런을 떨게 된 것은 아무래도 이우걸 선생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이 글의 끝부분에서 다룬 이광 시인을 염두에 두고 한 이야기다. 그는 시조 한 편 쓰는 일을 두고서도 ‘무한한 우주 공간에서의 동행’을 말한 스케일이 큰 시인이다. 그렇기에 ‘묻혀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지 아니 하여도 좋은 작품만 꾸준하게 생산하게 된다면 널리 알려지고 길이 빛날 터이니 안으로 깊숙이 부여안고 다스리고 있는 예봉을 지금처럼 잘 벼렸으면 한다.(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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