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유대철 베드로(1826〜1839)
o 한국 천주교 최연소 동정 순교자
◦ 1826년 서울에서 역관 유진길(아우구스티노)의 장남으로 출생
o 1839년 우포도청 옥에서 교수형으로 순교
한국 천주교 103위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린 유(劉)대철43 44) 베드로. 그 럼에도 불구하고 포도청의 문초와 형벌 때에 보여준 그의 굳은 믿음과 순 교 용덕은 어느 누구보다 뛰어났고, 그래서 교회사가들은 그의 신앙과 순 교를 15세의 나이로 순교한 이탈리아 카메리노(Camerino)의 성 베난시 오에 비교하기도 한다. 실제로 베드로가 체포된 이후 그에 대한 형벌을 직접 담당했던 형리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혀를 내두르기도 하였다.
열네 살(음력)밖에 되지 않은 아이가 살이 다 떨어져 나가고 뼈가 드러나도록 아주 혹독한 형벌을 가했지만 죽지도 않고 ‘천주학만은 버릴 수 없다’ 고 버티니 내가 오히려 진이 다 빠졌소〜
역관 유진길 아우구스티노의 장남으로 서울에 태어난 유대철 베드로 는 어렸을 때부터 이미 진실하고 후덕한 마음씨를 나타냈다. 그의 부친 아우구스티노는 그가 태어나기 전에 이미 천주교에 입교하여 교회 일을 돕고 있었지만, 그의 모친과 누이는 천주 신앙을 배척하고 부친이 신앙 생 활을 하지 못하도록 훼 방을 놓기까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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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유대철은 한자 성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의 한자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44) 『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100, 최 베드로의 증언. 증언자 최 베드로는 최
양업 신부의 둘 때 아우인 최선정 베드로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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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가 열 살이 조금 넘었을 때 부친 아우구스티노는 그에게 천주 교리를 가르쳐 주었고,베드로는 남동생과 함께 입교하여 열심히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하였다. 집안에서 모친과 누이의 박해가 계속되었지만, 베 드로는 여기에 흔들리지 않고 부친의 모범을 충실히 따랐다. 또 신부로 부터 성사를 받은 뒤에는 더욱 열정을 발하여 순교 원의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모친과 누이는 때때로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어째서 너는 부모의 말에 순종하지 않고, 하지 말라는 일을 고집스럽게 하느냐?” 그럴 때마다 베드로는 공손하게 교리를 설명해 주었고, 주님 앞에서 기도할 때면 모친의 어두움을 한탄하면서도 자신의 지극한 효성만은 버리 지 않았다고 한다.
1839년의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베드로는 마음속으로부터 다시 순교 의 열망이 솟아남을 느낄 수 있었다. 증거자들이 보여준 용덕과 끗끗한 모범에 대한 이야기들은 그의 마음에 불을 질러 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베드로는 부친 아우구스티노가 체포될 무렵에 스스로 자수할 결심을 굳 히고 우포도청을 찾았다.45:
포도청 관원들은 자수한 베드로를 보고는 성명과 집안 내력을 물은 뒤 아우구스티노의 자식임을 알고는 옥에 가두어 두었다가 다시 불러냈다. 그런 다음 엄포를 놓기도 하고 만단으로 회유하기도 하면서 배교를 권유 하였다. 그러나 박해자들은 곧 자신들의 생각이 틀렸음을 알게 되었다. 베드로의 나이가 어려서 쉽게 배교시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생 각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결국 박해자들은 어린 베드로에게 혹형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이내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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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승정원일기』, 헌종 5년(1839) 6월 7〜9일.〈앵베르 주교의 보고서〉(154 쪽)에 따르면, 베드로는 부친 아우구스티노와 7월 17일(음력 6월 7일)에 같이 체포되었다고 한다. 반면에〈페레올 주교의 보고서>(793 • 887쪽)에 는 ‘부친 아우구스티노가 체포되기 전날 포교가 오기 전에 자수하였다.’ 고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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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몸은 매질로 인해 살이 터지고 피가 낭자하게 되었지만, 순교의 열망 은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하루는 어떤 형리가 구리로 된 대통으로 그 의 허벅지를 들이박아 살점을 한 점 떼어내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이래도 천주교를 버리지 않겠느냐?”
그러자 그는 대답하였다.
“그럼요. 이것쯤으로 배교할 줄 아세요?”
이번에는 형리가 벌겋게 된 숯덩이를 집고는 입을 벌리라고 하자, 그 는 “자요.” 하고 입을 크게 벌렸고, 이에 놀란 형리가 오히려 놀라 뒷걸 음질을 치고 말았다.
옥으로 들어온 베드로에게 교우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너는 아마 많은 괴로움을 당한 줄로 생각하겠지만, 큰 형벌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저도 알아요. 제가 받은 형벌은 쌀 한 말 가운데서 한 톨에 불과할 뿐 이에요.”46》
그러고 나서 베드로는 오히려 옥중 교우들을 간절하게 권면하고 용기 를 북돋워주는 말을 하였다. 또 어느 날에는 사람들이 혹독한 형벌을 받 고 까무러친 채 옥으로 실려 온 베드로를 보고 어떻게든 정신이 들게 하 려고 허둥지둥 대고 있었는데, 깨어난 그가 이러한 상황을 눈치 채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너무 수고들 하지 마세요. 이런 것쯤으로 죽지는 않을 거예요.”
베드로는 모두 열네 차례에 걸쳐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그 사이에 태 장 100여 대에 치도곤도 40대를 맞았다.4” 그러나 이처럼 극심한 고통 46 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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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 『순교사 비망기』, 452〜453쪽 :『기해 • 병오 재판록』회차 38, 유 바르바 라의 증언.
47) 『기해일기』, 111쪽. 베드로에게 가해진 태장이 600도 이상이었다는 기록 도 있다(『순교사 비 망기』, 4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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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에서도 베드로의 영혼은 침착했고,그의 얼굴에는 즐겁고 만족스러운 표정까지 나타났다. 하느님에 대한 그의 사랑은 이 세상의 수준을 벗어 나 있었고, 그의 항구함은 위대하고 숭고하기조차 하였다. 그는 때때로 형벌을 비웃고 형리들의 분노에 맞서기도 했으며, 헤지고 문드러진 자신 의 살들을 스스로 뜯어내 모두를 두려움에 떨게 하였다.
결국 포도대장은 어 린 베드로에게 사형을 선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 러나 사람들 앞에서 그를 처형하는 것이 두려웠는지 비밀리에 옥중에서 교수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이러한 명에 따라 한 옥졸이 옥안으로 들어가 상처투성이가 된 어린 몸뚱이를 움켜잡고 목을 졸라 죽였으니,이때가 1839년 10월 31일(음력 9월 25일)로, 그의 나이 13 세였다.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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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김대건 신부의 보고서〉, 337〜339쪽 :〈페레을 주교의 보고서〉, 887〜889쪽 :『기해일기』, 112쪽 :『순교사 비망기』, 454쪽 :『순교자 약전』, 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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