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로 풍경
정동식
내가 사는 동네에 ‘도원지 순환산책로’가 있다.
이 산책로는 월광수변공원 기존의 길과 22년 초에 건설된 서편의 숲 속산책로를 포함한 총 2.8km의 구간을
말한다. 위치상으로도 앞산순환로와 연결되어 달서구 주민은 물론, 남구, 수성구 등 대구 어디에서나 접근성이
좋은 편이다. 도원못은 맑은 물에만 산다는 수달의 서식지이며, 못 주변에 월광수변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수변공원은 하루 6번 음악에 따라 춤을 추는 분수대, 대구가 낳은 작곡가 박태준의 흉상과 그가 작곡한 ‘오빠생각’을 들을 수 있고, 전상렬 시비 등 다양한 볼거리가 있다. 이뿐만 아니라 먹거리촌, 전망 좋은 카페, 밤이면 조명이 들어오는 각종 조형물이 있어, 성인은 물론 연인의 데이트 장소로 인기가 높다. 그리고 작년에 순환산책로를 개통하였고, 올 1월에는 숲 속산책로 상에 달빛조형물이 완성되어 주야 나들이명소로 방점을 찍게 되었다.
우리 집에서 출발하여 산책길을 돌아오면 8,500보 정도이다. 굳이 만보를 채우려면 조금 더 걸으면 되고, 갑자기 걷고 싶더라도 그냥 간단히 준비만 하고 나서면 그만이다. 나는 산책을 빠르게 하지는 않는다.
키가 커서 남들보다 속도감이 있을 것 같은데도 의외로 작은 사람보다 늦다. 구불구불한 청산도 보리길을 걷는
느낌이랄까? 가벼운 명상을 하거나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편하게 걷는다. 아내도 그렇게 빠른 걸음이 아니므로 우리의 산책은 슬로시티에 사는 사람의 모습일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니 남의 얘기를 본의 아니게 듣게 되기도 하고, 특별한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담기기도 한다.
우리는 통상 도원중학교 뒤편으로 올라가 숲속 산책길의 오르막 구간에서 시작한다. 산책을 오랜만에 하다 보면 조금 힘들기도 하지만 구간이 길지 않아 걱정할 정도는 아니다. 오르막 구간이 끝나는 지점에는 벤치가 있어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쉴 수도 있다. 이렇게 운동을 시작하면 시계 반대 방향이 된다. 그날 컨디션에 따라 시계
방향으로 돌기도 하고, 숲속 산책길 정상부근에서 되돌아오기도 한다. 숲속 산책길은 모두 목재 데크길이다.
걸어보면 데크길은 쿠션이 좋아 수변산책로의 우레탄이나 흙길보다 발바닥이 훨씬 편하다. 이 구간은 10개월
공사기간을 거쳐 22년 1월 6일 개통식을 했다고 한다. 특히 야간에도 산책을 할 수 있게 군데군데 간접조명시설이 되어 있고, 최근에는 보름달 모양의 조형물을 설치하여 밤이 되면 절구 찧는 토끼 모습이 나타나, 잠시나마
동심의 세계로 돌아가게 만든다. 숲속 데크길은 도원못 서쪽 경사면의 깎아지른 절벽에 만들어져 있다.
경사는 생각보다 가파르다. 낭떠러지 아래로 돌을 굴리면 금방 ‘풍덩’ 소리가 날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지형상
내리막과 오르막이 반복되며 잔도를 걷는 듯한 묘미를 느낄 수 있다. 못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도원지와 월광수변
공원이 아래쪽에 풍경화처럼 펼쳐지고, 멀리는 앞산자락과 청룡산 정상이 정면에 우뚝 솟아 제법 웅장하게 서 있다. 숲속 산책길에 들어서 200m쯤 가면 출렁다리와 만난다. 출렁다리는 요즘 관광의 대명사이다.
나는 작년에 이 출렁다리를 처음 만났을 때의 벅찬 감동을 잊을 수 없다. 큰 선물을 받은 느낌이었다.
소금산 출렁다리 등, 여기저기 유명한 다리가 많지만, 내 집 근처에 언제든 쉽게 만날 수 있는 친구가 생긴 것은 축복이었다. ‘이팔청춘 출렁다리!’ 다리 이름도 재미있지 않은가?
길이가 28m여서 지어진 명칭 같긴 한데 나는 문득 L 구청장님의 얼굴이 떠올랐다. 청장님은 예전에 젊은 남녀의 커플주선에 관심이 많았다. 이팔청춘들이 이 다리를 자주 오가며, 결혼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네이밍을 하지 않았나 상상해 보았다.
힌남노 몹쓸 태풍이 할퀴고 지나간 2~3일 후였다.
숲 속데크길 정상, 벤치에 쉬면서 들은 어느 분의 얘기이다.
70대로 보이는 한 남자가 큰 소리로 친구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우리 모임, 포항에서는 안 된다. 거기는 태풍피해가 크니까, 만나더라도
영덕쯤에서 보는 게 좋겠어, 조만간 한번 봅시다.”
“..........”
화제가 바뀌었는지, 모 친구 아내의 얘기를 하는 것 같았다.
“그 친구 집은 안된다. OO는 마누라 눈치 보며 산다. 아직 70이 넘은 남편에게 돈 벌어오라 한다더라.”
“...............”
추측하건대 모임을 꼭 한다면 수해를 많이 입은 포항보다는 피해가 덜한 영덕부근에서 하자는 일말의 양심을 보여준 대화였다. 하지만 70이 넘은 남편에게 돈 벌어오라는 소리는 섬뜩하게 들린다.
노인의 3대 문제가 질병, 고독, 빈곤이라는데, 누구든 돈 없는 노후는 정말 초라하다. 더군다나 돈 없고, 아프고, 고독하면 최악을 면하지 못한다. 70이 안 된 내 주변에도 아직 일하는 친구들이 꽤 많다. 근로는 신성하다.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더라도 정년퇴직 전에 무슨 일을 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칭찬은 못하더라도 비난은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항상 하고 있다.
나쁜 일이 아니라면 근로와 봉사는 소중하며 오히려 존중되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지난 추석 연휴가 끝날 무렵이었다.
수변산책로 우레탄길을 걷다가, 뒤에서 아가씨 두 분의 대화가 들렸다.
“아~, 우리 집,요즘 분위기 안 좋다.”
“무슨 일 있나? 아빠, 엄마 싸웠나?”
“아니, 그게 아니고 주식 때문에.....”.....”
“요즘 안 그런 집 있나? 우리 집도 마찬가지다.”
주식이라는 얘기에 나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20대 아가씨 두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주식열풍이 한참이던 그 무렵에 충분히 나올 수 있는 주제였지만 젊은 그녀들의 얘기가 아니라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2~3번 주식에 도전했다가 쓴잔을 마신 적이 있다. 비록 투자동기가 순수해도 주식은 냉정했다.
땀 흘려 번돈이 진정한 내 재산임을 비싼 수업료를 내고 나서야 터득했다.
만일 젊은 사람이 주식을 한다면 말리고 싶은 게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하루는 시계방향으로 숲 속산책길을 내려오고 있었다. 내려올 때는 힘이 덜 들고, 여유도 있고, 시야도 넓어진다. 40대 초반의 부부가 올라오며 대화를 하고 있었다. 아니 대화라기보다는 훈계에 가까웠다. 여자의 목소리는 크고 남자의 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내려오는 속도가 빠르다 보니 여자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대화의 내용은 알 수 없었다. 얼핏 듣기에 ‘당신은 왜 그렇게 눈치가 없나’라는 내용으로 짐작이 갔다.
남자는 말없이 진지하게 듣고 있었고, 여자는 약간 격앙된 분위기였다.
며칠 되지 않아 그 부부를 다시 만났다. 그날은 공교롭게도 수변산책로 데크길이었다. 예전의 심각한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다. 평화롭게 손을 잡고 다정하게 걷고 있었다. 아마 지난번 대화에서 오해가 잘 풀려 두 사람이 평온한 관계로 복원이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산책하다 들은 얘기는 일부러 들은 내용은 결코 아니다. 지나가면서 혹은 벤치에 앉아 쉬면서 듣게 된 우리 주변의 일상이다. 가끔은 은연중에 보게 되는 극히 인간적인 모습도 있다. 잉어밑밥을 누나보다 작게 받았다고 엄마에게 떼를 쓰는 남자아이의 투정도 있고, ‘너희 아빠는 국화와 장미밖에 꽃 이름을 모른다’는 모녀지간의 남편성토 대화도 있다. 어디에서 어떻게 살든 세상 살아가는 모습은 비슷한 것 같다. 왕후장상이나 재벌이라면 몰라도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의 일상은 순수하고 정겹다. 매향을 실은 봄바람이 두 팔을 벌려 우리를 부른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주변의 둘레길, 산책길로 나가자. 나만의 한적한 길도 괜찮다.
편안한 곳이면 어딘들 좋다.
겨울을 털어낸 이웃들의 인정이 촉촉하게 젖는 봄.
파르라니 생명의 순이 돋는 봄은 많이 보아야 봄이다.
(2023.3.11)
첫댓글 산책길은 인생 길입니다. 더욱 관찰하고 깊이 사색해서 더 좋은 글을 많이 쓰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