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함사사영이라는 악독한 무기를 선물로 받다
위소보는 노옹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이 노인네가 바로 할머니 누님의 사백입니까?]
그 여자는 웃으며 말했다.
[물론이지. 나는 이 노인네와 사십여 년 동안 만나지 못했지. 맨 처음 에는 나도 잘 알아볼 수 없었지만 이 노인네가 그렇게 맹렬한 설횡진령 (雪橫秦嶺)의 일 장을 쓰는 것을 보고서야 나의 사백인 줄 알았지. 아 마 이렇게 무서운 설횡진령의 공력을 쓰는 사람은 중원에서 찾아보기가 어려울 거야.]
위소보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대답했다.
[이분들이 우리 편이라고요? 이것 참 어떻게 하지요?]
그 여자는 고개를 가로 저으며 웃더니 말했다.
[나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나의 사부님께서 이 일을 아신다 면 틀림없이 나에게 호된 꾸지람을 내리실 거야.]
그녀는 몇 명의 여자 하인들이 손에 굵은 끈을 가지고서 기다리는 것을 보자 웃으면서 말했다.
[자네가 만약에 이 사람들을 묶고 싶다면 명령을 내려서 묶도록 하게 나. 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네. 이분이 바로 나의 사백님이니 나야 묶 을 수 없지 않은가? 그러나 만약에 묶지 않는다면 이 노인네가 정신이 들어 공격해 올 때, 우리가 절대로 당해 낼 수 없지. 여보게, 자네는 자네 힘으로 이 노인네를 당해 낼 수 있는가?]
위소보는 그녀의 말을 듣고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더욱 당해 낼 수가 없지요.]
위소보는 그녀가 이렇게 나오자, 그녀가 이 일에 끼여들고 싶지않으나 그렇다고 사백을 적극적으로 도와 주려는 의사도 없음을 알고 급히 서 천천을 향해서 말했다.[이 사람들은 오삼계의 일당이고 좋지 않은 사람 들입니다. 할머니 누님과는 조금도 상관없는 일이니 우리 천지회에서 이자들을 묶기로 하지요.]
서천천 등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병자에게 희롱을 당하고 놀림을 당했 었다. 이와 같은 치욕은 평생 겪어 보지도 못했던 터였다. 분풀이를 하 려고 벼르던 차라 위소보가 묶으라고 하자 즉시 끈을 가지고 노옹, 노 부인, 병자와 두 명의 남자 하인을 있는 힘을 다하여 단단하게 묶었다. 그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물었다.
[어쩌다 귀 사백께서 오삼계와 일당이 됐죠? 당신들은 어떻게 이들과 만났소?]
위소보는 어떻게 노옹과 식당에서 만났으며 식당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 는지를 설명하었다. 그러나 서천천 일행이 이 병자에게 어떻게 놀림을 당했는가는 빼고 말했다. 단지, 그 병쟁이의 무공이 대단하여 우리 모 두 그의 적수가 못된다는 말만 했을 뿐이었다. 그 여자는 말했다.
[귀가(歸家) 소사제(小師弟)의 생명은 역시 우리 사부님이 구해준 것이 야. 그는 어려서부터 중한 병을 앓아서 지금까지도 몸이 좋지 못하지. 그는 귀 사백 부부의 생명줄이야.]
그 여자는 노옹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계속해서 말했다.
[귀 사백은 본시 정의로운 사람인데 어떻게 오삼계 그 역적놈과 한패거 리가 되었을까? 만약 이것이 정말이라면 나의 사부님은 욕을 하시지는 못할 것이야. 호호호!]
그녀의 말투를 보아 하니 사부님을 정말로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위소보는 말했다.
[오삼계를 도와 주면 그 누구라도 죽음을 면치 못하지요. 사부님께서 이를 아신다면 크게 어르신을 칭찬하실 겁니다.]
그 여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정말로 그렇게 해주실까?]
노옹과 노부인을 바라보면서 잠시 깊은 생각에 잠겼던 그녀는 병자에게 다가가 숨을 살피더니 말했다.
[잠시 후에 사백께서 정신이 들면 틀림없이 크게 화를 내실 거야. 그렇 지만 우리가 죽일 수도 없는 일이니, 이렇게 하지. 이들을 이곳에다 남 겨 놓고 우리들은 쥐도 새도 모르게 빠져나가 버리자.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영원히 누가 그들을 묶었는지 모르게 하는 거야. 이 방법이 어 떻겠나?] [사부님의 분부이시니 그렇게 하겠습니다.]
셋째 마님은 이렇게 대답했으나 이곳에서 여러 해 동안 살았는데 갑자 기 떠나려 하자, 이곳을 버리기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많은 물 건들을 옮기기가 쉽지 않아서 얼굴에 난색을 드러냈다. 다른 흰옷을 입 은 노부인이 말했다.
[원수를 이미 잡아들였으니 이 원수를 영전에 바치고 제사를 지낸 다음 에 그 영전의 위패를 태워 버리면 될 것 같소이다.]
셋째 마님은 말했다.
[할머니의 말씀이 옳습니다]
즉시 여러 사람은 영전 앞으로 갔다. 그리고 오지영을 끌고와 땅바닥에 무릎을 꿇렸다. 넷째 마님은 공탁(供卓)에서 책 한 부를 꺼내다가 오지 영의 눈앞에 갖다 들이대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오 대인, 이 책이 무슨 책인지 잘 알고 있겠지?]
오지영은 이 책을 일찍이 보아 왔기 때문에 이 책의 두께, 크기, 권 수 를 보자, 이 책이 바로 자기가 벼슬을 얻고 권세를 누리도록 해준 책이 라는 것을 알았다. 제목을 보니 과연 명서집략(明書輯略) 이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셋째 마님은 또 말했다.
[여기를 똑바로 쳐다보시오. 이곳에 모셔 놓은 위패는 당신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오.]
오지영은 위패에 쓰여 있는 이름을 쳐다보았다. 위패에는 장윤성(莊允 城), 장정룡(莊廷龍), 이령석(李令晳), 정유번(程維藩), 이환(李煥), 왕조정(王兆楨), 모원석(茅元錫) 등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백여 개가 넘는 위패들은 모두 자기가 제보하거나 밀고하여 죽임을 당했던 사람들 의 이름이었다. 오지영은 여덟아흡 개의 이름을 보자 혼비백산했다. 그는 혓바닥이 잘려져 피를 계속 흘리고 있었기 때문에 이미 죽은 거나 다름이 없었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 땅바닥에 고꾸라져 몸을 사시나무 떨듯했다.
[네 놈은 단지 부귀를 쫓고 공명이 탐이 나서 이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 다. 이분들은 옥중에서 고통과 괴로움을 받다가 죽거나 처참하게 능지 를 당하여 돌아가셨다. 다행히 우리들은 천운으로 사부님의 구출을 받 아 살아남았지만, 그렇지 않았다면 벌써 네 놈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 다. 오늘 단칼에 네 놈을 죽여 버린다면 그것은 너에게 너무나 편안함 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너희들처럼 그렇게 잔인하지 않으니 지금 죽겠다면 스스로 끝장을 봐라.]
그녀가 말을 하면서 그의 혈도를 풀어 주고 한 자루의 단도를 땅바닥에 던지자 쨍고랑, 하며 단도는 땅바닥에 떨어졌다. 오지영은 온몸을 사시 나무 떨듯 벌벌 떨며 땅바닥에 떨어진 단도를 집어들었다. 그러나 자살 한다는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어찌 그리 쉽겠는가! 갑자 기 몸을 돌려 밖으로 도망치려 하였다. 한 발짝 나오자 수십 명의 흰옷 을 입은 여자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오지영은 목구멍에서 쉰소리 를 몇 차례 내더니 땅바닥에 고꾸라졌다. 몇 번인가 몸을 떨더니 잠시 후에는 꼼짝도 하지 않고 뻗어 버렸다. 셋째 마님이 그의 몸을 뒤집었 다. 호흡은 이미 멈춰 있었고, 얼굴은 새빨간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으 며 눈을 부라리고 죽은 모습이 실로 공포스러웠다.
[악독한 짓을 하면 악독한 대가를 받는 법입니다. 이 간사한 자도 결국 은 죽었군요.]
그녀는 영전 앞에 무릎을 끓고 말했다.
[이제서야 복수를 했습니다. 상공(相公)께서 혼령이 있으시다면 이제 편안하게 눈을 감으십시오.]
여러 여자들은 일제히 땅바닥에 엎드려 통곡했다. 위소보와 천지회 군 웅들도 영전 앞에 절을 하였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는 한쪽에 서서 눈 살을 약간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 있었다. 여러 제자들은 한바탕 울고 난 뒤에 위소보를 향해 머리를 조아리며 절을 하고 원수를 잡아 준 데 대해서 감사를 드렸다. 위소보는 황급히 고개를 숙여 절을 하며 말했다.
[작은 일을 했을 뿐이니 그렇게 추켜세우지 마십시오. 만약에 다른 복 수할 자가 있다면 저에게 말씀해 주십시오. 내가 당신들에게 그자를 잡 아다 대령시키겠습니다.]
셋째 마님은 말했다.
[그 간사하고 흉악한 오배를 어르신께서 친히 죽여 주셨고 또다시 오지 영을 잡아다 주셔서 그 대가를 치루게 해주셨습니다. 우리들의 복수는 이미 다 끝났습니다. 다른 누구와도 원한 관계가 없습니다.]
여러 제자들은 영전을 거두고 위패를 태웠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는 그녀들이 예의를 차리고 격식을 따지며 한바탕 소란을 피우자, 참지 못 하고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묶인 사람을 살펴보려고 밖으로 나갔다. 위 소보와 천지회 군웅들은 그녀를 뒤따라 나갔다. 노옹, 노부인, 병자는 아직까지도 정신이 들지 않은 상태였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가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이보게, 귀여운 어린 친구. 독을 써서 사람을 잡으려면 착실하게 잘 배워야 되겠더구먼.]
위소보는 말했다.
[예, 예. 약을 써서 정신을 잃게 하는 방법 외에는 실로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무공이 너무나 강했으므로 제가 만약 이런 흉계를 꾸미지 않았다면 틀림없이 그들에게 목이 잘렸을 것입니다. 이런 저질 수법은 강호의 영웅호걸들로부터 업신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제가 잘못 했습니다. 다음 번에는 절대 이런 일을 벌이지 않겠습니다.]
노란 옷을 입은 여자는 약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뭐가 최고의 수법이고 최저의 수법이야? 사람을 죽였으면 사람을 죽인 것이지. 주먹으로 죽이나 약으로 죽이나 사람을 죽이는 것은 똑같은 것 이 아닌가? 강호의 영웅호걸들이 업신여긴다고? 흥! 누가 그들보고 칭 찬을 해달라고 했나? 예를 들면 오지영 같은 놈은 조정에 밀고를 해서 수천 수백 사람을 죽였다. 그가 독을 쓰지 않았으니 칭찬해 주고 대단 한 사람으로 보아야겠는가!]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위소보의 마음을 흡족하게 해주고 위안을 시켜 주었다. 그래서 위소보는 얼굴이 환해지며 말했다.
[할머니 누님, 그 말씀은 옳은 말씀이십니다. 제가 어렸을 때 누굴 도 와서 싸움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가 석회(石仄)를 상대방 눈에 뿌려 버렸지요. 그래서 그 싸움은 우리가 이겼습니다. 그러나 그 사람 은 오히려 제가 비굴한 수법을 썼다고 매섭게 제 따귀를 때렸조 그때 할머니 누님께서 앞에 계시지 않았던 것이 정말로 애석한 일이군요. 그 때 계셨더라면 그자에게 교육을 시키는 건데 그랬습니다.]
[그러나 자네가 나의 귀 사백에게 독을 썼으니 내가 자네의 따귀를 때 려 줘야만 하겠어.]
그녀의 말에 위소보는 급히 대꾸했다.
[그때 저는 정말로 이자가 할머니 누님의 사백인 줄 몰랐습니다.] [자네가 만약에 그가 나의 사백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나는 자네 목을 비틀었을 거야. 어떤가? 자네에게 독약이 또 있다면 그에게 독을 쓸 건 가 쓰지 않을 건가?] [목숨과 관련이 있으면 별수없이 실례를 해야겠지요.] [자네는 솔직해서 좋구먼 자기의 목숨이 달아날 판인데 그 어찌 다른 사람의 목을 취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내가 자네의 따귀를 때 리려는 것은 자네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줄 모르기 때문이야. 이 양반 은 바로 그 이름도 유명한 신권무적(神拳無敵) 귀신수(歸神手)라는 분 인데 그의 공력이 얼마나 깊고 강한 줄 알고나 있나? 자네는 이분에게 별볼일없고 아무 효과도 없는 몽한약(蒙汗藥) 을 썼는데 이 어르신은 그 약을 후춧가루쯤으로 여기고 계시는 분이 지.] [그러 나 그는....그분은....] [자네는 이런 아무짝에도 쓸데없는 밀가루 같은 약을 차 안에 타면 여 든 살이나 먹은 노강호가 그렇게 흐리멍텅하게 마실 줄 알았나? 그런 약은 남의 재물이나 빼앗으려고 술집을 차리는 작은 모리배들이 하는 장난에 불과해. 독을 쓰려면 독다운 것을 써야지.]
위소보는 그 말을 들으니 놀랍고 또한 기뼜다.
[알고 보니....알고 보니, 할머니 누님께서 제일 강한 약으로 바꾸어 놓으셨군요?]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느냐? 나는 약을 바꾸지 않았다. 귀 사백 일 행은 너무나 지치고 피곤해서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나 정신을 잃었을 뿐 이지. 나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병에 골골하는 약골 하나와 여든 살이 훨씬 넘은 할아버지와 할망구가 갑자기 정신을 잃었다고 해서 그 게 무슨 신기하고 희귀한 일이란 말이냐?]
그녀의 말투는 매우 점잖았으나 눈빛에는 장난기가 역력하게 배어 있었 다. 위소보는 그녀가 훗날 사부가 이 일을 알면 나무랄까 봐 염려되어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이 여자에 대 해서 말할 수 없는 호감과 감탄이 일어났다. 그는 갑자기 땅바닥에 무 릎을 꿇고 말했다.
[할머니 누님, 제가 사부님으로 모시겠습니다. 저를 제자로 거두어 주 십시오. 앞으로는 제가 사부 누님이라고 부르겠습니다.]
그 여자는 킥킥 웃더니 오른손을 내밀어 손바닥을 그의 턱 아래에 갖다 대었다. 위소보는 턱 아래에 무엇인가 딱딱한 것이 와 닿자 사람의 손 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고개를 숙여 바라보고 깜짝 놀랐 다. 그것은 바로 검은 빛의 쇠갈고리였다. 그 쇠갈고리의 끝은 매우 날 카로웠으며 번쩍번쩍 빛을 발했다. 그 여자는 웃으면서 말했다.
[어디 더 자세히 살펴보겠나.]
왼손으로 오른손의 소매를 걷어을리자 새하얀 팔뚝이 드러났다. 그러고 보니 손목은 끊어지고 손바닥이 없었다. 그 쇠갈고리는 손목에 부착된 것이었다. 그 여자는 말했다.
[자네가 나의 제자가 되는 것은 어려울 것도 없지. 손바닥을 절단해 버 리고 내가 자네에게 쇠갈고리손 하나를 달아 주면 되지.]
이 노란 옷을 입은 여자는 바로 천하에 이름을 떨친 오독교(五毒敎)의 교주 하철수(何鐵手)로, 나중에 원승지(袁承志)를 사부로 모시고 이름 을 하척수(何揚守)로 고쳤던 것이다. 명나라가 망한 후 그녀는 원승지를 따라 멀리 해외로 나갔었다. 그리고 얼마 후 사명을 받고 중원으로 일을 처리하기 위해 왔는데 우연히 장씨 집안 셋째 작은마님 등 한 떼의 과부들을 구하고 그녀들에게 약간의 무 예를 전수하였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왔을 때 마침 쌍아가 몽한약을 가지고 온 것을 보고 사정을 듣게 되었다. 그녀는 상대방이 누군지 모 르지만 무공이 그토록 고강하니 보통 몽한약으로는 아무런 소용이 없다 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독한 약물을 물독에 넣었던 것이 다.
하척수는 본래 독을 쓰는 재간이 천하무적이라 할 수 있었지만 화산파 (華山派)로 귀의한 이후 독을 쓰지 않은 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갑자기 물독에다 독을 쓰는 것을 보고는, 그만 손이 근질근질하여서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그녀의 사부 원승지보다 더 심후 한 내력을 가진 귀신수가 위소보가 어전시위들 손에서 구한 보통 몽한 약 한 봉지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병든 사내 귀종(歸鐘)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이미 병을 얻었기 때문에 키우기가 정말 어려운 지경이었 다. 그런데 후에 진귀하기 이를 데 없는 영약을 먹고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신체와 머리가 이미 손상을 입어서 늘 여느 사람들처럼 건장하지 못했다. 귀신수 부부는 자식이라고는 이 아들밖에 없었기 때문에 그야말로 생명 보다 더 아꼈다. 그리고 그가 어릴 적부터 병고에 시달려 왔기 때문에 그만 지나친 총애를 하여 가르침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귀종은 일신에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으나 중년에 이르러서도 지혜와 성격에 있어 서는 여전히 팔구 세의 어린아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하척수는 약을 쓸 때는 상대방이 누군지 몰랐었지만 나증에 귀 사백의 집안이란 것을 알고 크게 가슴을 두근거렸다. 그러나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른 이상 내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다군다나 위소보는 사람의 환심을 사는 말을 매우 잘하는지라 무척 귀엽게 느껴졌다. 그녀는 해외에서는 이와 같이 영리하고 짓궂은 소년을 찾아볼 수 없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위소보는 한쪽 손을 잘라야만 사부로 모실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자신의 손을 들여다보았다. 손이 잘라질 때 아플 것이 두려웠고 또 아까워서 매우 망설이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척수는 웃으면서 입을 열었다.
[사부로 모실 필요는 없다. 나 역시 너에게 무공을 전수할 마음이 없으 니. 그러나 나에게 한 가지 매우 재미있는 암기가 있는데 그것을 너에 게 주마. 그렇지 않으면 너는 속으로 억울하고 헛되게 큰절을 했다고 생각하며 나보고 사부 누님이라고 부른 것을 후회할 것이 아니겠느냐?] [사부 누님, 그것은 절대 헛되이 부른 것이 아닙니다. 사부 누님이 설 사 저에게 무공을 전수하지 않고 저에게 물건을 주지 않는다 해도 그대 처럼 어여쁜 소저에게 몇 번 더 사부 누님이라 부르는 것은 즐겁기 이 를 데 없는 일이지요.]
하척수는 깔깔거리고 웃으며 말했다.
[잔나비처럼 기름 바른 입술과 혓바닥으로 너의 할머니뻘되는 사람에게 버릇없이 터무니없는 말을 지껄이는구나.]
그녀는 본래 묘족(苗族) 출신이라 한나라 사람들의 예법과 규칙에 대해 서 전혀 마음에 두지 않고 있었다. 그래서 위소보가 그녀의 아름다움을 칭찬하자 예의가 없고 나쁘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오히려 흐뭇하게 생각 하였다. 그녀는 다시 웃으며 입을 열었다.
[잔나비야, 다시 한번 불러 보렴.]
위소보는 웃었다.
[누님, 훌륭한 누님!] [아이쿠! 가면 갈수록 더 망나니가 되는구나.]
그녀는 자신의 왼손을 뻗쳐 그의 뒷덜미를 잡더니 그를 들어올렸다. 그 순간 지지직, 하는 소리가 나면서 탁자 위의 세 촛불이 꺼졌고 맞은편 의 판자벽에 파파팍, 하는 소리가 울려퍼졌다. 위소보는 놀람과 기쁨에 섞여 물었다.
[이게 무슨 암기지요?] [네 스스로 보려무나.]
그리고는 그를 땅에 내려놓았다. 위소보는 차탁자 위에서 촛대를 들고 판자벽에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곳에는 수십 대의 번 득이는 강침(鋼針)이 판자벽에 깊이 박혀 있었다. 그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탄복하여 말했다.
[누님, 꼼짝도 하지 않고 어떻게 이 많은 강철침을 발사할 수 있었지 요? 이와 같은 암기를 천하에 누가 피할 수 있겠습니까?]
하척수는 웃었다.
[과거 나는 함사사영(含沙射影)이라는 암기를 사용하여 나의 사부를 쏘 았으나 그분은 피했으며 한 대의 침도 그분에게는 적중하지 않았단다. 하지만 우리 사부님 이외에 이 독침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아마 몇 사 람 되지 않을 것이다.] [그때 사부님은 그대로 하여금 시험삼아 그를 쏘게 하였기 때문에 미리 방비하고 있었겠지요. 만약에 갑자기 쏘았더라면 그 어르신네의 무공이 아무리 고강하다 해도 이와 같이 종적도 없고 그림자도 없이 날아오는 암기를 어떻게 피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때 나와 사부님은 적대지간에 놓여 있어 한창 격전을 벌이고 있던 판이었다. 사부님은 나에게 시험삼아 쏘라고 하지 않았으며 사전에 전 혀 모르고 있었단다.]
위소보는 말했다.
[그렇겠군요, 그렇지요. 그때 사부님은 온 신경을 곤두세워 그대를 경 계하고 있었으니 피할 수 있었겠지요. 만약 그때 그대가 동쪽을 가리키 고 고개를 돌려서 '어, 누가 오는군?' 하고 소리쳤다면 그대 사부 역시 동쪽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때 그대가 독침을 발사했다면 반드시 적 중되고 말았을걸요?]
하척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어쩌면 네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강철침에는 극독을 묻혔 기 때문에 우리 사부님이 만약 피하시지 못했더라면 죽었을 것이다. 사 실 그때 나는 그분을 죽이고 싶지는 않았단다.] [그대는 마음속으로 사부님을 사랑하신 거지요?]
하척수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런 일은 없었으니 터무니없는 소리는 지껄이지도 말아라. 우리 사모 님께서 들으신다면 너의 혓바닥을 반 토막으로 잘라 낼 것이다.]
위소보는 하척수가 몰래 사랑하게 된 것은 바로 여자로서 남장을 한 사 부님이었다는 사실을 결코 짐작조차 못했다. 젊었을 때의 옛일이 그림 같이 머리에 떠오르자 이미 수십 년이 지난 일이었지만 하척수의 얼굴 이 더욱 붉어졌다. 그녀는 두 개의 사슴가죽으로 만든 골무를 왼손 엄지손가락과 식지에 끼우고는 판자벽에 박힌 강철침을 한대 한대 뽑았다. 곧이어 손을 뻗쳐 옷자락 안에서 하나의 무쇠로 만들어진 띠를 풀었다. 그 띠 위에는 하 나의 강철 상자가 장치되어 있었는데 뚜껑에는 무수한 구멍이 송송 나 있었다. 위소보는 확연히 깨달은 듯 손뼉을 치며 말했다.
[누님, 이 암기는 정말 교묘하군요. 원래 옷자락 안에 장치해 놓았다가 무쇠로 만들어진 띠의 장치를 들추기만 하면 쇠상자에서 강철침이 쏘아 져 나가게 되는군요.]
그는 그녀가 자기에게 암기를 선물하겠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십중팔 구 이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어 흐뭇했다. 하척수는 웃었다.
[아무리 무서운 암기라 하더라도 쏠 때는 어쨌든 손의 힘을 빌어 겨냥 을 해야 한다. 너의 무공은 너무나 형편없기 때문에 이 함사사영 이외 의 다른 암기는 사용하지 못할 것이다.]
이어서 그녀는 강철침을 한대 한대 상자 안에 도로 담았으며 그에게 장 포를 걷어올리라고 하고는 무쇠로 만들어진 띠를 그의 몸에 감아 주었 다. 강철 상자가 가슴팍 앞에 이르도록 하고는 장치를 움직이는 법과 다시 바늘에 묻어 있는 독약과 해약을 만드는 처방을 알려주고 말했다.
[상자 안의 강철침은 모두 다섯 번 사용하게 되어 있는데 사용한 후에 반드시 다시 닫아야 한다. 우리 사부님께서는 함부로 무고한 사람을 해 치는 일이 없도록 하라고 여러 번 당부하셨다. 이 암기는 본래 극독을 묻힌 것이지만 지금 묻힌 독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독약이 아니라, 사람에게 적중되면 간지럽고 마비되는 것을 금할 수 없게 하여 전신의 기운이 쏙 빠지도록 만든 것이다. 그러나 너는 함부로 이것을 사용하지 않도록 해라.]
위소보는 연신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다시 엎드려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 하척수는 말했다.
[너는 이들 세 분을 부축하여 제대로 앉히도록 하여라.]
위소보는 먼저 귀신수를 부축해서 의자에 앉히고 다시 귀종을 부축하여 앉히려고 하다가 그의 허리에 불룩하니 하나의 호로 같은 것이 달려 있 는 것을 건드렸다. 그의 장포를 들추고 보니 가죽 주머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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