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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재집 제5권 / 서(序) / 서재실기 서〔西齋實記序〕
순무사(巡撫使) 서재(西齋) 송 충강공(宋忠剛公)은 단묘(端廟 단종)의 유신(遺臣)이다. 나는 공이 둔학(遯壑)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를 둔학의 후손한테 얻어 보고, 그의 충성을 아름답게 여기고 그의 절의를 안타까워한 적이 있다. 또 그가 칭찬하고 선양하는 은전(恩典)을 입었다는 말을 들었으나 그 본말을 자세하게 알 수 없었으니, 고루하다는 탄식을 더욱 이기지 못하였다. 어느 날 공의 후손 송석년(宋錫年) 수록(壽祿)이 호남(湖南)의 흥양(興陽)에서 공의 《실기(實記)》 한 책을 가져와서 보여 주며 서문을 써 줄 것을 청하였다. 대체로 공의 지(誌)와 장(狀) 등 여러 글 및 포증(褒贈)한 사실을 엮고, 또 공의 후손들의 충효를 부록으로 붙였다. 그러나 공이 둔학에게 준 편지는 기록하지 않아, 그 까닭을 물었더니 집안에 전해오는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징험할 문헌이 없는 것이 애석하도다! 살펴보건대, 경태(景泰) 을해년(1455, 세조1)에 공은 도진무(都鎭撫)로 명을 받아 호남을 순무(巡撫)하였다. 돌아오려 할 때 선위(禪位)한다는 소식을 듣고 여산(礪山)에서 멈추었다. 단종(端宗)이 영월(寧越)로 귀양을 가게 되자, 이에 영월에 가서 공무를 보고하고, 목이 쉬도록 통곡하고서 돌아왔다. 단종이 세상을 뜨자, 깊고 외진 산에 들어가서 삼 년 동안 복상(服喪)을 하였다. 계속 흥양(興陽) 바다 굽이의 마륜촌(馬輪村) 서쪽에 살면서 서재(西齋)라고 자호(自號)하였다. 산에 오르고 물가에 설 때마다 곡(哭)을 하여 사람들이 광옹(狂翁)이라고 불렀다. 자신이 직접 낙안(樂安)의 미원(薇原)에다 묘자리를 잡았고, 세상을 떠난 뒤에 거기에다 장례를 지냈다. 사는 집을 ‘서(西)’라고 부르고 장지를 ‘미(薇)’로 정한 것은 아마도 그 은미한 뜻이 있지 않을까. 대체로 장전(狀傳)의 글들은 단지 야사(野史)에 근거한 것인데, 야사의 말들은 간략함과 자세함이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순무하고 나서 공무를 보고하기 위해 곧바로 영월로 향했다는 것은 상세한 정황이 조금 부족하다. 술을 제멋대로 마셔 크게 취하여 미친듯이 거리를 걷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면서 10년 동안 흔적을 남겼다는 것은, 공이 김매월(金梅月)을 논평한 글을 가지고 살펴보면, 그것이 과연 어떠할지는 모르겠으나 어찌 공이 충성을 다한 실질에 흠이 되겠는가. 정종(正宗) 신해년(1791, 정조15)에 임금이 사릉(思陵 단종 비 정순왕후 능)에 공손히 참배하였는데, 단종의 마음을 애석하게 여기면서 또 그 당시 절의(節義)를 세운 여러 신하에게 시행하지 못했던 은전(恩典)을 다시 시행하게 하였다. 이에 공이 처음으로 은혜로운 표창을 입었고 또 내각에 명하여 전기를 짓도록 하였으며, 다시 시호를 청하는 많은 선비들의 의견을 따르기도 하였다. 이에 공의 충렬(忠烈)이 목숨을 바친 여러 공들과 함께 찬란하게 빛이 났으며, 태학(太學)에서 대의(大義)를 앞장서 외치고 멀고 가까운 선비들이 메아리처럼 호응하여 공이 행적을 감추었던 바로 그 자리에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올렸으니, 높이 받들고 보답한 것에 또한 서운함이 없을 것이다. 오호라! 우리 선왕(先王)께서 충렬을 환히 드러내던 세상을 만나지 못했다면, 숨겨져 있던 덕을 널리 밝히는 것이 어찌 이와 같을 수 있는가. 진실로 공이 간직한 실제 사적이 아니라면 또 어떻게 수백 년 뒤에 임금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겠는가. 전기를 두 번씩이나 세우게 된 것에는 성상의 마음이 분명 거기에 있었기 때문인데, 그것을 전하는 사람이 공의 두 편지를 얻어 책속에 싣고 예람(睿覽 임금이 살펴봄)에 대비할 수 없었던 것이 매우 한스러운 일이다. 나는 실로 글솜씨가 없지만 은연중 마음에 감동된 것이 있어 삼가 이와 같이 쓴다. 또 책자에서 순서를 잃은 것들을 대략 바로잡고 공의 편지 두 통을 첫머리에 엮도록 하였다. 공의 실제 사적을 찾는 사람이 여기에서 고찰하여 얻는 것이 있다면 정말로 망녕되다고 나를 허물할 수 있지 않겠는가. 또 공의 후손이 선조를 따라 공훈을 세우고 목숨을 바친 것이 임진년과 병자년에도 서로 이어져서 사람들의 귀와 눈을 찬란하게 비추고, 사론(士論)으로 공에게 배향된 사람이 다섯 사람이나 되었으니, 공의 유풍과 여운이 길고도 무성하다고 할 수 있겠다. 둔학(遯壑)은 또한 공의 재종제(再從弟)인 경원(慶元)이고 공과 함께 절의(節義)를 함께 한 사람이니, 한 가문에 현인들이 많이 나온 것이 더욱 숭상할 만하다. 아, 아름답지 않은가!
| 宋侃 | 14?? | ? | 礪山 | 西齋 | 忠剛 |
[주-D001] 송 충강공(宋忠剛公) : 송간(宋侃, 1405~?)으로, 호는 서재이다.[주-D002] 둔학(遯壑) : 송경원(宋慶元, 1419~1510)을 가리킨다.[주-D003] 칭찬하고 …… 입었다 : 김시습(金時習), 조상치(曺尙治), 조여(趙旅), 정지산(鄭之産), 이성희(李成熺), 이축(李軸), 엄흥도(嚴興道)와 더불어 단종의 팔절(八節)로 숭상(崇尙) 받았다. 서재에게는 1793년(정조17)에 충강(忠剛)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주-D004] 사는 …… 것 : 백이(伯夷)와 숙제(叔齊)의 고사를 인용하였다. 서재라고 한 것은 서산(西山 수양산(首陽山))의 ‘서’를 따온 것이고, ‘미(薇 고사리)’는 주(周)나라 곡식을 먹지 않고 고사리만 뜯어 먹다가 죽었다는 고사에서 따온 것이다.[주-D005] 목숨을 …… 공들 : 사육신(死六臣)을 말한다.
ⓒ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 노재준 박해당 권민균 (공역)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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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자집 시고 제3책 / 시(詩) / 흥양의 마륜촌에 이르러 충강공 송간의 시호를 선시하고〔到興陽馬輪村 宣忠剛公宋侃諡 有吟〕
순무사의 거룩한 충정을 세상 모두 흠모하니 / 廵撫危忠世共欽
강개한 노래와 통곡을 세상에 누가 알아줄까 / 狂歌痛哭孰知音
미원에 자란 봄 고사린 무덤에 올릴 만하고 / 原長春薇堪奠墓
유허가 남은 서동엔 충심 상기 전해오네 / 基留西洞尙傳心
둥그런 한 조각은 바다 위에 뜬 달이요 / 一片照圓湖上月
괴롭게 우는 것은 영월의 두견새라오 / 數聲啼苦越中禽
성명한 조정에서 이곳에 시호 내리니 / 聖朝賜謚仍斯地
명 받든 못난 이 몸, 감격 금할 수 없어라 / 承命微臣感不禁
송공이 단종조에 순무사로 어명을 받들고 지방에 있었다. 돌아와 보니 이미 단종이 손위(遜位)하였다. 이에 영월로 가서 복명하고, 그 길로 흥양(興陽)으로 은둔하였다. 매양 물가와 고갯마루에서 통곡을 할 때면 사람들이 미치광이 늙은이로 지목하였다. 스스로 서재(西齋)라고 호를 붙였는데, 지금까지 그 분이 살던 옛 유허를 서재동이라 부른다. 낙안(樂安)의 미원(薇原)에 안장해 달라는 유명을 남겼다. 지금 후손들로서 흥양에 있는 자들이 수백 가호에 그칠 뿐이 아니다. 정사년(1797) 2월에 비로소 옛 유허에서 연시(延諡)하였다. 내가 이때 이조의 낭관으로 명을 받들고 가서 선시하였다.
[주-D001] 흥양의 …… 선시하고 : 57세 봄에 지은 작품이다. 평성 침(侵) 운을 압운한 칠언율시이다. 평측이 지켜지지 않는 부분이 있다. 송간(宋侃)은 본관은 여산(礪山), 호는 서재(西齋)이다. 김시습(金時習), 조상치(曺尙治), 조려(趙旅), 정지산(鄭之産), 이성희(李成熺), 이축(李蓄), 엄흥도(嚴興道)와 더불어 단종의 복을 입은 ‘팔절(八節)’로 숭상받았다. 동학사(東鶴寺) 초혼각(招魂閣)과 운곡서원(雲谷書院), 숙모전(肅慕殿), 세충사(世忠寺) 등에 제향되었다. 마륜촌은 지금의 전라남도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이다.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이규필 (역) |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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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계집 제34권 / 묘지명(墓誌銘) / 순무사 송공 묘지명 병서 〔巡撫使宋公墓誌銘 幷序〕
우리나라가 생긴 이래로 절의(節義)가 장릉육신(莊陵六臣 사육신)보다 더 열렬한 분은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을병(乙丙)의 즈음에 시절은 몹시 위태롭고 재앙은 몹시 참혹하여 감히 그 일을 말하는 자가 없었다가, 2백 년 뒤에 이르러 비로소 신원되었다. 이 때문에 당시의 지사(志士)들 중에 간혹 질병을 핑계로 자취를 숨겨 스스로 의리를 지킨 자도 있었으나, 후세에 전하는 바가 없다.
내가 야인(野人)의 기록에서 순무사 송공의 사적을 보고서 마음속으로 홀로 그 절의를 기특하게 여기고 그 뜻을 슬프게 여겼지만 상세한 내용을 알지 못한 것이 애석하였다. 흥양(興陽 전라도 고흥)의 사인(士人) 송기일(宋基一)이란 사람이 천 리 멀리서 나의 대문을 찾아와 유사(遺事)를 지니고 폐백을 갖추고서 두 번 절하고 청하기를 “저는 송 순무사의 후손입니다. 선조께서 수립하신 바가 이처럼 탁월한데도 처음엔 시휘(時諱)에 막히고 중간엔 병화에 잃어버려 오래도록 세상에 드러내지 못하였습니다. 만약 공의 한마디 말을 얻어 무덤에 빛을 낸다면 거의 후세에 증거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나는 입언(立言)하는 사람이 아니니 어찌 이 일을 맡기에 충분하겠는가. 그러나 속으로 일찍이 공의 의로움을 사모한 적이 있었으므로 이에 감히 사양하지 않고 서술한다.
공은 휘가 간(侃)이니, 그 선대는 여산(礪山 전라도 익산) 사람이다. 고려 시대에 추밀원사(樞密院使)에 추증된 유익(惟翊)을 상조(上祖)로 삼는다. 3대를 전하여 휘 송례(松禮)가 원종(元宗) 때를 당하여 권신(權臣) 임유무(林惟茂)를 주벌하고 정권을 왕에게 돌려주어 큰 공훈을 세워서 여량부원군(礪良府院君)에 봉해졌다. 증조는 휘가 숭(嵩)이니, 선공시 영(繕工寺令)을 지냈다. 조부는 휘가 인충(仁忠)이니, 중랑장(中郞將)을 지냈다. 부친은 휘가 양진(良珍)이니, 왕조가 바뀌는 때를 당하여 벼슬하지 않았다. 아들 셋을 두니, 공은 맏아들이다.
공은 세종과 문종을 섬기고 단종 조에 이르러 자급이 가선대부(嘉善大夫 종2품)에 이르렀다. 경태(景泰 명나라 대종(代宗)의 연호) 을해년(1455, 단종3)에 왕명을 받아 남방을 순무하였다. 임무를 마치고 돌아오려고 할 때에 국가에서 왕위를 선양했다는 소식을 듣고 빨리 말을 달려 영월(寧越)로 향하여 청령포(淸泠浦)에서 단종에게 복명하고 나서, 하직하고 나와서 목이 쉬도록 통곡하였다. 단종을 지키던 자가 놀라서 공을 잡으려 하였는데, 어떤 늙은 아전이 조용히 이르기를 “그대는 잘 지키기만 하면 되지 어찌 남을 재앙으로 밀어 넣는가.”라고 하니, 지키는 자가 이에 중지하였다.
공은 이에 곧장 여산(礪山)으로 돌아가 문을 닫아걸고 세상일과 단절하였다. 노릉(魯陵 단종)이 승하했다는 소식을 듣자 달려서 깊은 산으로 들어가 상복을 입고 몹시 애통하게 곡을 하더니, 이윽고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집안사람들이 사방으로 찾아 헤매다 흥양(興陽)의 마륜촌(馬輪村) 산정(山亭) 아래에서 발견하였는데, 흥양은 서울에서 천 리나 떨어진 바닷가 궁벽한 곳이었다. 공은 성명을 감추고 농부와 나무꾼 사이에 자취를 감추고서 삼 년의 상복을 다 마쳤다. 평소 거처할 때엔 늘 술에 흠뻑 취해 도로를 미친 듯이 내달렸고, 간혹 산에 올라 들판을 내려다보며 대성통곡하였다. 이에 사람들이 둘러서 구경하며 웃으면서 미친 늙은이라고 부르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렇게 하기를 10여 년 동안 하였다.
집안사람들이 공을 따라 살게 되자, 이로 인해 공은 산정의 서쪽에 거처하고 서재(西齋)라고 자호하며 홀로 두 아우를 데리고 생을 마쳤다. 그곳 사람들은 지금까지 그 골짜기를 서재동(西齋洞)이라 부른다. 공은 스스로 낙안군(樂安郡) 남쪽 미원(薇院)에 장지를 정해놓고, 자손들에게 훈계하기를 “내가 죽으면 이곳에 묻어라.”라고 하니, 유언에 따라 오향(午向)으로 봉분을 만들었다.
아, 공의 사적으로 볼 수 있는 바는 이것뿐이다. 생졸연월 또한 전해지지 않으니, 하물며 아름다운 언행이야 말해 무엇하랴. 슬프다! 가생(賈生)이 남긴 말에 “자신에게 염치가 확립되어 있지 않으면 그럭저럭 지내면 그만이므로, 임금에게 실패가 있으면 이를 기회로 정권을 찬탈하고, 임금에게 환란이 있으면 나는 구차하게 모면하면 그만이므로 서서 바라볼 뿐이며, 나에게 편리함이 있다면 속여 팔아 이롭게 할 뿐이다.〔廉恥不立, 苟若而可, 主上有敗則因而挻之矣, 有患則吾苟免而已, 立而觀之耳, 有便吾身者, 則欺賣而利之耳.〕”라고 하였으니, 이는 세상에 대해 분개하는 말이다. 공이 살았던 때에 우리나라 조정에 벼슬하여 두터운 은혜를 입어 높은 벼슬을 차지한 자가 어찌 한정이 있겠는가. 그런데도 하루아침에 위급한 어려움을 당하자 군부(君父)를 행인처럼 보아 내팽개치고 돌아보지 않았으며, 혹은 몸을 뒤집고 모습을 바꿔 공을 세우고 총애를 낚아 부귀를 독차지하면서도 아무 일 없는 듯이 지내기도 하였으니, 제 몸을 위한 계책으로는 참으로 교묘하다 하겠으나, 공의 풍도를 듣는다면 어찌 얼굴이 화끈하지 않겠는가.
내가 보기에 공과 육신(六臣)은 모두 섬기는 바에 마음을 오로지하여 죽을지언정 마음을 변치 않고자 하였으니, 그 자취는 다르지만 그 의리는 같다고 하겠다. 예컨대 은(殷)나라 어진 세 사람은 죽은 이도 있고 떠난 이도 있었지만 공자가 모두 어질다고 칭송하였다. 그러나 사육신은 죽음으로써 드러났고, 공은 은거하여 묻혀서 홀로 기려 드날림이 없었으니, 또 개탄할 만하다. 후세에 붓을 잡은 자가 나라의 역사를 찬술한다면 공은 육신과 함께 전해질 만하다.
공은 아들 다섯을 두니, 맹유(孟儒), 중유(仲儒), 계유(季儒), 백유(伯儒), 숙유(叔儒)이다.
다섯 아들이 각각 아들 하나씩을 두니, 사안(思安), 사평(思平), 사권(思權), 사원(思元), 사문(思文)이다.
그 후손이 더욱 번창하여 호남좌도에 흩어져 사는데, 흥양에 사는 종족이 가장 번성하여 수백 가구에 이르고 이따금 벼슬하여 드러나기도 하였다. 6세를 내려와 홍연(弘淵)은 사신의 명을 띠고 명나라에 다녀왔고 군공(軍功)을 세웠다.
대립(大立)이란 분은 선조 정유년(1597, 선조30)에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추천으로 창의 별장(倡義別將)에 제수되어 왜적을 첨산(尖山)에서 토벌하면서 힘을 다해 싸우다 전사하여 참의(參議)에 추증되고 그 마을에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대립의 아들 심(諶)은 인조 정축년(1637, 인조15)에 홍원 현감(洪原縣監)으로서 북쪽으로 돌아가는 오랑캐를 공격하다 진영에서 전사하여 또한 관직을 추증받고 마을에 정려가 내려졌으니, 그 대대로 충의(忠義)에 독실한 것은 대체로 유래한 바가 있다. 이에 명을 짓는다.
어느 땅인들 살수 없으랴만 / 何地不可棲兮
반드시 서쪽에 집을 정했네 / 必宅于西
어느 산인들 묻힐 수 없으랴만 / 何山不可埋兮
반드시 미원으로 돌아갔네 / 必歸于薇
공의 뜻이 이와 같았으니 / 公志如是
나의 명은 이만 그치려네 / 我銘止此
[주-D001] 순무사(巡撫使) 송공(宋公) 묘지명 : 송간(宋侃, 1405~?)에 대한 묘지명으로 이계가 58세 때인 1781년(정조5)경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송간의 본관은 여산(礪山), 호는 서재(西齋)이다. 1455년(단종3)에 순무사로 남방을 순시하고 돌아오다가 단종이 폐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강원도 영월(寧越)로 가서 단종에게 복명한 뒤, 10년 동안 전라남도 흥양(興陽), 즉 현재 고흥(高興)의 마륜촌(馬輪村) 산정(山亭)에 숨어 지내며 미치광이처럼 지내다 생을 마쳤다. 1793년(정조17) 12월 21일에 충강(忠剛)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사후에 김시습(金時習), 조상치(曺尙治), 조려(趙旅), 정지산(鄭之産), 이성희(李成熺), 이축(李軸), 엄흥도(嚴興道)와 더불어 단종의 팔절(八節)로 일컬어졌다. 《西齋實紀 卷1 墓誌銘》 《剛齋集 卷5 西齋實記序》 《豐墅集 卷18 廵撫使宋公謚狀》 《淵齋集 卷31 西齋宋公侃神道碑銘竝序》 《性潭集 卷30 巡撫使西齋宋公傳》[주-D002] 을병(乙丙)의 즈음 : 을해년(1455)과 병자년(1456)의 단종과 세조의 왕권 교체기를 가리킨다.[주-D003] 2백 …… 신원되었다 : 사육신이 모두 죽은 뒤에 민간에서 묘소를 마련하여 제사를 지내왔는데, 육신묘가 공식적으로 인정을 받게 된 것은 숙종 때부터였다. 1679년(숙종5)에 숙종이 노량에 군대를 사열하러 갔다가 유사(有司)에게 명해 육신묘에 흙을 북돋우고 나무를 심게 하였고, 1691년에는 사육신을 국가에서 공인, 복관시키고 묘우(廟宇)를 만들어 제사 지내게 하였다.[주-D004] 공은 …… 정해놓고 : 송간이 서재(西齋)라고 자호한 것과 낙안군의 미원(薇院)에 장지를 정한 것은 은(殷)나라 고죽군(孤竹君)의 아들 백이(伯夷)ㆍ숙제(叔齊)가 주 무왕(周武王)이 은나라를 정벌하는 것을 불의하다 여겨 서산(西山) 즉 수양산(首陽山)에 들어가서 고사리를 캐먹다가 굶어죽었던 데 마음을 의탁한 것이라고 한다. 《西齋實記 卷1 巡撫使西齋宋公傳》[주-D005] 가생(賈生)이 …… 하였으니 : 가생은 한(漢)나라 가의(賈誼)를 가리킨다. 인용한 구절은 가의가 문제(文帝)에게 올린 상소에 보이는데, 〈치안책(治安策)〉이라 일컫는다. 《漢書 卷48 賈誼列傳》[주-D006] 은(殷)나라 …… 칭송하였다 : 은나라의 어진 세 사람이란 은나라 마지막 왕인 주(紂)의 서형(庶兄) 미자(微子), 숙부 기자(箕子), 비간(比干)을 가리킨다. 주가 무도한 것을 보고 미자는 종사(宗祀)를 보존하려고 멀리 떠났고, 기자는 노예가 되었고, 비간은 간하다 죽음을 당하였는데, 공자가 이를 논하여 “은나라에는 삼인이 있었다.[殷有三仁焉.]”라고 평하였다. 《論語 微子》[주-D007] 홍연(弘淵) : 송홍연(宋弘淵, 1569~1629)은 충양공(忠襄公) 송순례(宋純禮)의 손자이다. 1592년(선조25) 임진년에 전라 병사로서 전공을 많이 세웠고 1596년 병신년에 전(前) 부장(部將)으로서 홍주에서 이몽학(李夢鶴)의 난을 평정하여 공훈 대신에 기록되었다. 1624년(인조2) 갑자년에 요동 지역의 전쟁에 나아가 승리하고 돌아와 어영대장에 제수되었다. 충좌위 좌부장(忠佐衛左部將), 남해 현감(南海縣監), 내금장(內禁將), 온성 판관(穩城判官), 개천 군수(介川郡守), 위원 군수(渭原郡守), 풍천 도호부사(豐川都護府使), 무산 첨사(茂山僉使), 창주 첨사(昌州僉使) 등을 역임하였다.[주-D008] 대립(大立) : 송대립(宋大立)은 자가 신백(信伯)으로 송간(宋侃)의 6세손이다. 1594년(선조27)에 무과에 합격, 지도 만호(智島萬戶)가 된 아우 희립(希立)과 함께 왜적을 소탕하다가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의 추천으로 도원수 권율(權慄)의 막하에서 왜적 소탕에 일조하였다. 정유년(1597)에 왜적이 또다시 침략하자, 권율은 송대립을 창의 별장(倡義別將)으로 차임하여 바닷가의 왜적들을 막게 하였다. 송대립은 고단한 의병을 수습하여 흥양의 첨산(尖山)을 굳게 지켰고, 보성진(寶城津), 망제포(望諸浦) 등지를 종횡무진 누비며 왜적을 방비하다가 복병에 걸려 전사하였다. 이 일이 알려지자, 선조가 특명으로 병조 참의(兵曹參議)를 추증하고,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책록하였으며, 그 마을을 정표(旌表)하여 ‘충신지문(忠臣之門)’이라 하였다. 《陶谷集 卷26 宋正父子傳》[주-D009] 심(諶) : 송심(1590~1637)으로, 본관은 여산(礪山), 자는 사윤(士允)으로 아버지는 창의 별장(倡義別將) 송대립(宋大立)이다. 1614년(광해군6) 무과에 급제, 북변(北邊)의 수비에 종사한 뒤로 선전관, 전라도 병마우후(全羅道兵馬虞侯) 등을 역임하였다. 1635년에 홍원 현감(洪原縣監)이 되었는데, 이듬해 병자호란에 남한산성을 구원하고자 양근(楊根)에 이르렀는데, 이미 강화가 성립되자 온갖 만행을 자행하며 본국으로 철수하는 청군 소속의 몽골병을 추격하였고, 안변 남산역(安邊南山驛)에 이르러 전후영장(前後營將)과 함께 적을 공격하였으나, 부족한 병력으로 고군분투하다가 전사하였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전라남도 흥양의 세충사(世忠祠)에 제향되었다.
ⓒ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 김채식 (역) | 20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