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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베덴보리 저서에서 참고 글 3 / 주님의 응답으로 오는 계시와 지각,
그리고 신성한 진리의 입류와 인간의 깨달음에 대하여
- 주님에게서 비롯된 천적인 것들이 속사람, 합리적인 사람을 통해
겉 사람에 속하는 기억의 지식들로 흘러들어간다.
이때 속사람의 유입은 애정을 수단으로 겉 사람의 지식에 들어간다.
지식이 천적인 것들을 받는 그릇이지만
합리적인 것은 지식에서 태어나지 않고 지식(또는 진리)에 대한
애정에서 태어난다.
천비 1940
속사람은 사람의 가장 깊은 부분이고
주님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이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문이나 입구이며 거기서 일어나는 일은 개인이 이해할 수 없다.
합리적인 사람은 가장 내적인 속사람에 종속되어 있고
이 합리적인 사람 안으로 주님에게서 속사람을 통해
사랑과 신앙의 천적인 것들이 흘러들어오고
또 그것들은 이 합리적인 사람을 통해
겉 사람에 속하는 기억의 지식들로 흘러들어간다.
하지만 흘러 들어가는 이런 것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는
개인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사람의 합리적인 것은
진리 또는 진리에 대한 애정에 의해 주님으로부터 형성된다.
이 애정은 그에게 선이며 그는 그것으로부터 행동한다.
.. 그러나 여기서 '씨앗을 번성시키는 것'은
합리적인 사람이 내적 또는 신성한 진리에 복종할 때
합리적인 것 안에서 사랑의 천적인 것들이 결실하는 것을 의미한다.
'번성'은 진리를 언급하고 '결실'은 선을 언급하지만
주어가 주님이기 때문에 '번성'은
그분의 합리적인 것 안에 있는 모든 진리가 선이 되고
따라서 신성이 되었기 때문에 결실을 맺음을 의미한다.
이것이 여기서 언급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의 경우는 다른데
사람의 합리적인 것은
진리 또는 진리에 대한 애정에 의해 주님으로부터 형성된다.
이 애정은 그에게 선이며 그는 그것으로부터 행동한다.
사람의 합리적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번성과 결실에 관해서는
유입에 대해 알지 못하면 이해할 수 없다.
유입에 관해서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이미 말했듯이 모든 사람 안에는
속사람, 중간에 있는 합리적인 사람, 그리고 겉 사람이 있다.
속사람은 사람의 가장 깊은 부분이며
그것으로 그는 그러한 가장 깊은 부분이 없는 짐승과 구별된다.
속사람은 말하자면 주님을 위한 문이나 입구,
즉 주님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이
사람 안으로 들어오는 문이나 입구이다.
거기서 일어나는 일은 개인이 이해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합리적인 수준을
완전히 넘어서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합리적인 마음은 우리의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이 가장 내적인 것, 즉 속사람에 종속되어 있다.
이 합리적인 사람 안으로 주님에게서 속사람을 통해
사랑과 신앙의 천적인 것들이 흘러들어온다.
그리고 그것들은 이 합리적인 사람을 통해
겉 사람에 속하는 기억의 지식들로 흘러들어간다.
하지만 흘러 들어가는 이런 것들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는
개인의 상태에 따라 달라진다.
우리의 합리적인 마음이
주님의 선과 진리에 복종하지 않는 한, 이 합리적인 마음은
유입되는 것들을 억누르거나 거부하거나 왜곡하는데
특히 감각적 증거에서 얻은 기억의 지식으로 유입될 때 더욱 그렇다.
이것은 주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길가에 떨어지거나, 돌밭에 떨어지거나,
가시덤불 사이에 떨어진 씨앗이 의미하는 바이다.
(마태 13:3-7, 마가 4:3-7, 누가 8:5-7)..
천비 1616
지식이 천적인 것들을 받는 그릇이지만 그것이 가득 채워지면
결과적으로 지식이 천적인 것들에 심어지게 된다.
지식은 영적, 천적인 것들을 받아들이는 그릇이기 때문에
지식 없이 주님과 결합될 수 없다.
..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의 상수리나무 숲”이
더욱 내적인 지각을 의미하는 것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다.
겉 사람에 속한 것들이
속사람의 천적인 것들과 결합되는 정도에 따라
지각은 증가하고 더 내적으로 된다.
천적인 것들과 결합하면 지각이 생긴다.
이는 여호와에 대한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들에는
속사람의 생명 그 자체가 있기 때문이다.
같은 말이지만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들 안에,
즉 천적인 사랑 안에 여호와께서 현존하신다.
이 현존은 결합이 이루어질 때까지 겉 사람 안에서 지각되지 않는다.
모든 지각은 결합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결합의 결과다.)
.. 주님의 경우 그분의 겉 사람,
즉 인간적 본질이 증대되고 열매를 맺으면서
신성한 본질과 단계적으로 결합되셨다.
어떤 사람도 지식을 통해서가 아니면
여호와나 주님과 결합될 수 없다.
왜냐하면 지식을 통해서 사람은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주님에게도 적용되었는데
그분은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태어나셨고
다른 모든 사람과 마찬가지로 교훈을 받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분이 그릇으로 가지고 계신 지식에
천적인 것들이 끊임없이 주입되었고
그 결과 그분의 지식은 끊임없이 천적인 것들을 받아들이는
그릇으로 만들어졌으며 이 그릇들 자체도 천적으로 되었다.
그분은 이런 식으로 유아기의 천적인 것들로 계속 나아갔는데
이는 앞서 말했듯이 사랑에 속한 천적인 것들은
초기 유아기부터 어린 시절까지, 또 청년기까지 주입되기 때문이다.
그분도 사람이시기 때문에 그때와 그 이후에 지식을 부여받으셨다.
만약 어떤 사람이 거듭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 지식들은 사랑과 인애에 속한 천적인 것들로 채워지고
이렇게 해서 유아기부터 유년기와 청소년기에 이르기까지
그가 부여받은 천적인 것들 안에 심어지며
이런 식으로 그의 겉 사람이 그의 속사람과 결합된다.
(지식이 천적인 것들을 받는 그릇이지만 그것이 가득 채워지면
결과적으로 지식이 천적인 것들에 심어지게 된다.)
그 지식들은 먼저 그가
청소년기에 부여받은 천적인 것들 안에 심어지고,
그 다음에는 유년기에 부여받은 것들 안에 심어지고,
마지막으로는 유아기에 부여받은 것들 안에 심어진다.
그 시점의 그는 주님께서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눅 18:16) 라고 말씀하신 그 '어린아이'가 된다.
이 심어짐은 주님에 의해서만 이루어지므로
사람에게 있는 어떤 천적인 것도
그것이 주님에게서 나오지 않고 주님에게 속하지 않는 한
그에게 존재할 수 없다..
천비 1895
합리적인 것(합리성)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지식에서 태어나지 않고 지식에 대한 애정에서 태어난다.
그러한 지식에 대한 어떤 기쁨이나 애정이
그 안에서 타오르지 않는 한 아무도 합리적이 될 수 없다.
.. 선에 연합한(allied, adjoined 인접한) 진리는
진정한 의미에서 지성적인 진리이지만
추론 과정을 통해 보는 합리적 진리는 이보다 아래에 있기에 열등하다.
그리고 이 합리적 진리는
지식에 상응하는 애정을 통해
활력을 얻은 지식(과학적 지식과 선험적 지식)으로부터 태어난다..
먼저 지성적인 진리가 진정한 의미에서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또한 합리적인 것(합리성)이 어떻게 속사람을 아버지로 하고
자연적인 사람, 즉 겉 사람을 어머니로 하여 태어나는지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둘이 결합되지 않으면
결코 어떠한 합리적 능력도 나올 수 없기 때문이다.
합리적인 것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지식에서 태어나지 않고
지식에 대한 애정에서 태어나는데,
이는 그러한 지식에 대한 어떤 기쁨이나 애정이
그 안에서 타오르지 않는 한
아무도 합리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애정은 모성적 삶 자체를 구성하는 반면,
그 애정 안에 있는 천적이고 영적인 것은 부성적 삶을 구성한다.
결과적으로 사람의 애정의 정도와 품질이
그에게서 발달되는 합리성의 정도와 품질을 결정한다.
사실 이러한 지식 자체는 죽은 것, 즉 도구적 원인에 불과하고
그것들을 살아나게 하는 것은 애정의 생명력이다.
그리고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있는 합리적 사람에 대한 개념이다..
천비 1900
사람의 생명 그 자체는 속사람에게서 나오는데
이 속사람의 유입은 애정을 수단으로 하여
겉 사람의 지식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생명의 유입을 받을 그릇이
지식을 통해 기억 속에 형성될 때까지는
속사람은 겉 사람과 매우 모호한 소통만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소통은
그릇이 지식을 통해 (외부) 기억에 형성되고,
합리적 사고를 통해 내부 기억에 형성됨에 따라 점차 확실해진다.
또 그릇을 형성하는 지식이
진리가 아니면 여전히 일치성(congruity)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속사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은
진리 안에서만 그 자신에 대한 상응관계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 사람의 합리적 마음은 속사람을 아버지로,
겉 사람을 어머니로 하여 잉태되고 태어난다.
사람의 생명 그 자체는 속사람에게서 나오는데, 이 속사람은
그 생명을 받을 그릇이 지식을 통해 기억 속에 형성될 때까지는
겉 사람과 매우 모호한 소통만 할 수 있다.
속사람의 유입은 애정을 수단으로 하여
겉 사람의 지식에 들어가는 것으로 이루어진다.
한편 이러한 지식이 있기 전에도 실제로 소통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오직 애정을 통해서만 겉 사람이 지배를 받는다.
그래서 거기에는 어린아이에게서 볼 수 있는 것과 같은
가장 일반적인 충동과 특정한 욕망, 맹목적인 본능만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러한 소통은 (속사람의 생명을 받을)그릇이
지식을 통해 (외부) 기억에 형성되고,
합리적 사고를 통해 내부 기억에 형성됨에 따라 점차 확실해진다.
이러한 그릇들이 형성되면서 일련의 질서를 가지고 배열됨에 따라,
실제로 서로에 대해 혈연관계나 결혼관계 또는 사회와 가족처럼
상호 관계를 맺을 정도로 배열됨에 따라
겉 사람과 속사람은 점점 더 완전한 상응을 이루게 된다.
속사람과 겉 사람 사이 다리 역할을 하는 합리적 사고는
이 둘을 상응시키는데 더욱 뛰어난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릇을 형성하는 지식이
진리가 아니면 여전히 일치성이 부족하다.
왜냐하면 속사람의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은
진리 안에서만 그 자신에 대한 상응관계를 발견하기 때문이다.
두 기억의 유기적 형태를 구성하는 그러한 진리들은
사랑의 천적인 것들과 신앙의 영적인 것들이 적절하게
도입될 수 있는 진정한 그릇들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천국 공동체, 즉 주님의 왕국의 관념과 이미지에 따라
주님에 의해 거기 배열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은 적어도 형태상으로는
천국이나 주님의 왕국의 축소판이 된다..
천비 1496
진리는 천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데 적합한 그릇이다.
기억 안에 있는 진리, 합리적 진리, 지성적 진리는
세 가지 별개의 것으로 그들은 차례로 온다.
.. 진리가 천적인 것과 결합되는 것에 관해서는 이렇다.
그 자체로 볼 때, 어린 시절부터 배운 진리는
천적인 것을 받아들이는 데 적합한 그릇일 뿐이다.
진리는 그 자체로부터는 생명이 없고,
오직 흘러들어오는 천적인 것으로부터만 생명을 가진다.
천적인 것은 사랑과 인애로 이것이 모든 진리의 근원이다.
그리고 모든 진리가 이 근원에서 나오기 때문에
진리는 일종의 그릇일 뿐이다.
더욱이 진리 자체는 저 세상에서 그대로 명백하게 나타난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보이는 것은
진리 자체가 아니라 진리 안에 있는 생명, 즉 사랑과 인애로
이루어진 진리 안에 있는 천적인 것들이기 때문이다.
이것들로부터 진리는 천적인 것이 되고 천적인 진리라고 불린다.
이것으로부터 지성적인(intellectual) 진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어리신)주님에게는 이 지성적인 진리가 천적인 것들로 가는
길을 열었다는 것이 이제 분명해질 수 있다.
기억 안에 있는 진리(사실적 진리), 합리적 진리, 지성적 진리는
세 가지 별개의 것으로 그들은 차례로 온다.
기억 안에 있는 진리는 기억의 지식에 관한 것이다.
합리적 진리는 이성(reason)에 의해 확인된 기억의 진리이다.
지성적 진리는 그것이 그렇다는 내적 지각과 결합된 진리이다.
이 지성적 진리는 어린 시절에 주님에게 존재했고
그분 안에서 그것은 천적인 것들로 가는 길을 열었다.
천비 3077
진리나 진리에 대한 애정은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보라, 리베카가 나왔다.”
이것이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온 진리의 애정을 의미한다는 것은
리베카가 합리적인 것(사람, 마음)의 신성한 선과 결합되어야 할
신성한 진리로 표징된 것에서 분명하다.
그러나 여기서 약혼하기 전의 그녀는
교리적인 것들로부터 온 진리의 애정에 대한 표징을 가진다.
왜냐하면 이 교리적인 것들에서 진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진리는 생명이 없다면 진리가 아니며 그 생명은 사랑에 속한 애정이다.
천비 3078
모든 애정은 겉보기에 단순하고 하나의 것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세부적인 것들이 들어 있다.
그 사람이 유아기로부터 그 애정이 활동하는 삶의 시간까지
획득한 모든 삶이 그 자체 안에 들어 있다.
애정은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온전한 모습이다.
.. 주님의 경우 진리에 대한 초기 애정은
실제로 주님이 자신의 자연적인 사람 안에서 획득한
신성한 것들에서 유래했다.
그러나 자연적인 사람에는 여전히 어머니에게서 온 것들이 있었고
그것은 한순간에 분리될 수 없었으며
이러한 (초기)애정도 거기서 나왔다..
모든 애정은 겉보기에 단순하고 하나의 것으로 보이지만
그럼에도 그 안에는 셀 수 없이 많은 세부적인 것들이 들어 있어서
어떤 생각으로도 그것을 파악하고 묘사할 수 없다.
모든 애정에는 그 사람이
유아기로부터 그 애정이 활동하는 삶의 시간까지 획득한
모든 삶이 그 자체 안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것은 우리가 아버지와 어머니, 조부모, 증조부모로부터
태어날 때부터 물려받은 것을 포함하기 때문에
그보다 더 많은 것을 포함하고 있다.
애정은 사람이 있는 그대로의 온전한 모습이다.
다음 생에서는 때때로 사람의 주된 애정이 공개적으로 나타나
그 사람에게 자기 사랑과 세상 사랑이 얼마나 있는지,
그리고 선한 원칙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있는지,
어떤 목적과 용도를 위해 있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또한 선과 진리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있는지,
그리고 그 선과 진리의 특성은 무엇인지,
그리고 선과 진리가 어떻게 배열되어 있는지,
즉 얼마나 결합되어 있는지, 근접해 있는지, 아니면 분리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따라서 그것들이 천국의 질서에
얼마나 일치하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
방금 말했듯이, 이 모든 것들은
그 사람의 주된 애정이 드러날 때 분명해지는데,
왜냐하면 애정은 온전한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천비 3080
모든 아름다움은 순수함이 있는 선에서 나온다.
선 자체가 속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흘러들 때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여기에서 모든 인간적 아름다움이 나온다.
창 24:16 ‘그리고 그 처녀는 보기에 지극히 아름다웠다..’
이것이 진리에 대한 애정의 아름다움을 의미한다는 것은
"처녀"가 순수함이 있는 애정이라는 의미에서 분명하다.
이는 또 모든 아름다움이
순수함이 있는 선에서 나온다는 사실 때문이다.
선 자체가 속사람에서 겉 사람으로 흘러들 때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여기에서 모든 인간적 아름다움이 나온다.
이것은 또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사람의 얼굴이 아니라 얼굴에서 빛나는 애정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그리고 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경우, 그들을 자극하는 것은
사람의 얼굴에서 보이는 선에 대한 애정이며
그것은 그들이 사랑하는 선에 순수함이 존재하는
정도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따라서 그들의 애정을 자극하는 것은
자연적인 것 속의 영적인 것이고
영적인 것이 없는 자연적인 것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이와 비슷하게 선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감정은
그들이 사랑으로 보는 어린아이들에 의해 자극을 받는데
그 이유는 그들의 얼굴, 행동, 말투에
인애와 함께하는 순수함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형성하고 구성하는 것은 선함과 인애다.
- 본래의 겉 사람을 구성하는 것과
사람이 가진 자연계의 외면에 관한 이해에 대하여
천비 978
엄밀히 말해서 감각적인 사람,
즉 감각적인 것에 근거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겉 사람이다.
감각적 능력과 쾌락을 지닌 육체가 겉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은
영들도 세상에서 살 때와 같은 육체적 몸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여전히 겉 사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로부터 분명하다.
그러나 모든 사람 안에
‘천사의(angelic) 천국’에 상응하는 천적인 것과 영적인 것이 있고,
‘천사적(angelic) 영들의 천국’에 상응하는 합리적인 것이 있고,
‘영들의 천국’에 상응하는 내면적 감각적인 것(an interior sensuous)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면
속사람이 무엇이고 겉 사람이 무엇인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세 개의 천국이 있고
사람 안에도 동일한 수의 천국이 있으며
이들은 서로 가장 완벽하게 구별된다.
그러므로 사후에 양심을 가진 사람은 먼저 ‘영들의 천국’에 있고,
그 후 그는 주님에 의해 ‘천사적 영들의 천국’으로 올라가고,
마지막으로는 ‘천사의 천국’으로 올라가는데
이는 그에게 동일한 수의 천국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며,
그가 그 천국과 그 상태에 상응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만 가능하다..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이 속사람을 형성하고,
합리적 것들이 내부 또는 중간을 형성하고,
감각적 것들(육체에 속한 것들이 아니라 육체적인 것들에서
파생된 감각적인 것들)이 겉 사람을 형성한다.
이것은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영에게도 해당된다..
엄밀히 말해서 감각적인 사람,
즉 감각적인 것에 근거한 생각을 가진 사람은 겉 사람이고,
영적이고 천적인(celestial) 사람은 속사람이다.
그리고 합리적 사람은 두 사람 사이의 중간에 있으며
이 합리적 사람을 통해 겉 사람과 속사람의 소통이 이루어진다.
이러한 관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외적인 것들 사이에서 살고
외적인 것들에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자신을 짐승과 같다고 여기고,
육체가 죽으면 완전히 죽을 것이라고 믿지만
그러나 우리는 죽은 후에야 먼저 살기 시작한다.
천비 1718
촉각, 미각, 후각, 청각, 시각 등의 감각적 능력과
또한 식욕과 쾌락은
단지 육체의 가장 바깥쪽 사람을 구성할 뿐이다.
본래의 겉 사람은 기억의 지식과
사람에게 주입된 사랑의 애정으로 구성되며,
또 영에 속하는 감각적 능력과 영이 즐기는 쾌락으로 구성된다.
.. 겉 사람이 무엇인지는 오늘날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육체에 속하는 것만이 겉 사람을 구성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사람들은 겉 사람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육체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촉각, 미각, 후각, 청각, 시각 등의 감각적 능력과
또한 식욕과 쾌락이 그것에 속한다.
그러나 이것들은 단지 육체의 가장 바깥쪽 사람을 구성할 뿐이다.
본래의 겉 사람은 기억의 지식과
사람에게 주입된 사랑의 애정으로 구성되며,
또 영에 속하는 감각적 능력과 영이 즐기는 쾌락으로 구성된다.
이것들이 겉 사람 또는 외면적인 사람을 적절하게 구성한다는 것은
다음 생의 사람들, 즉 영들에게서 분명해진다.
이들도 마찬가지로 겉 사람과
내면적인 사람, 결과적으로 속사람을 소유한다.
육체는 마치 덮개나 껍질에 불과하며
사람이 참되게 살 수 있도록, 그리고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이
더욱 탁월해지도록 하기 위해 존재한다.
천국과 지옥 304
자연계에 있는 외면이란 사람의 자연적 기억,
즉 외적 기억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생각과 상상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여기에는
세상에 속한 지식과 앎과 그에 따른 기쁨과 즐거움이 포함된다.
또한 몸의 감각에 속한 많은 쾌락,
그리고 감각 자체와 말과 행동이 포함된다.
이 모든 것이 주의 신성이 종착하는 곳인 가장 외적인 것이다.
.. 그러나 사람에게는 천사에게 있는 것 이상의 것이 있다.
사람은 그의 내면(interiors)으로는 영계에 있으면서 동시에
그의 외면(exteriors)으로는 자연계에 있는 것이다.
자연계에 있는 외면이란 사람의 자연적 기억,
즉 외적 기억과 그것을 바탕으로 한 생각과 상상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여기에는
세상에 속한 지식과 앎, 그에 따른 기쁨과 즐거움이 포함된다.
또한 몸의 감각에 속한 많은 쾌락,
그리고 감각 자체와 말과 행동이 포함된다.
이 모든 것이 주의 신성이 종착하는 곳인 가장 외적인 것이다.
입류는 중간에서 멈추지 않고
그 가장 외적인 것에까지 계속 흘러가기 때문이다.
이상으로 신적 질서의 가장 외적인 것은
사람에게 있다는 것과,
가장 외적이므로 그것은 또한
기초이자 바탕이기도 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의 신적 입류는 중도에서 멈추지 않고
그 가장 외적인 것에까지 계속 흘러간다고 앞에서 말했다.
그것이 거쳐 가는 중간 부분은 천사들의 천국이고
가장 외적인 부분은 사람 안에 있다.
그리고 연결되지 않은 것은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다.
이 원리에 따르면,
천국과 인류의 연결과 결합관계는
서로 상대방에 의해 존재가 유지되는 관계라는 결론이 나온다.
또 천국 떠난 인류는 고리 없는 사슬과 같고,
인류 없는 천국은 기초 없는 집과 같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천비 5301
자연적인 것이라는 표현에는
자연적인 단계, 자연적인 마음, 겉 사람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것은 이집트 땅에 있을 것이다.”
이 말은 그것이 자연적인 것(the natural) 안에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이집트 땅에서 일어날 일은 자연적 단계에서 일어날 것이다.)
이는 “이집트 땅”이 자연적인 마음이라는 의미에서 분명하다.
여기와 다른 곳에서 “자연적인 것”이라고 말했고
그것은 자연적인 마음을 의미한다.
사람은 두 가지 마음,
즉 합리적인 마음과 자연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다.
합리적 마음은 속사람에 속하고, 자연적인 마음은 겉 사람에 속한다.
그리고 단순히 '자연적인 것'이라는 표현이 사용될 때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자연적인 마음 또는 겉 사람이다.
마음이 사람 자신이라는 것은 지금 이어지는 내용에서 알 수 있다.
- 세상에 있는 겉 사람으로부터 온 것과 천국에 있는
속사람으로부터 온 것의 분별
천비 9704
사람이 옳게 생각하고 선하게 뜻할 때
그것은 속사람으로부터 나온 생각과 뜻이다.
.. 사람이 지성적으로 생각하고 지혜롭게 뜻할 때
그는 속사람으로부터 생각하고 뜻한다.
그러나 그가 지성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지혜롭게 뜻하지 않을 때
그는 속사람으로부터 생각하거나 뜻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람이 주님과 주님에 속한 것에 대한 생각이 옳고 선하고
이웃과 이웃에 속한 것에 대한 생각이 옳고 선하며
이 모든 것에 대한 그의 뜻이 옳고 선할 때
그의 생각과 의지는 속사람으로부터 나온다..
올바른 생각은 진리를 믿는 것의 결과물이고
올바른 의지는 선을 사랑하는 것의 결과물이지만
잘못된 생각은 거짓을 믿는 것의 결과물이고
잘못된 의지는 악을 사랑하는 것의 결과물이다.
(우리가 내면의 깊은 속사정은 알지 못하나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것에 한해서는 알 수 있다.
그것은 내면에 있는 것이 영적인 방식이 아닌 자연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기 때문인데 그 결과물이 곧
우리의 생각과 의지를 통해 나타난 말과 행동이다.)
천비 10134
거듭나고 있는 사람이 겪는 상태 변화와
속사람 안에 있을 때와 겉 사람 안에 있을 때의 분별
.. 천사가 사랑과 빛의 상태일 때는 속사람 안에 있지만
그가 희미한 빛과 사랑의 상태일 때는 겉 사람 안에 있다.
천사는 속사람과 겉 사람을 가지는데
그들이 속사람 안에 있을 때 겉 사람은 거의 고요하지만
그들이 겉 사람 안에 있을 때는 보다 둔하고 애매한 상태에 있다..
.. 거듭나고 있는 사람과 거듭난 사람도
사랑과 신앙에 있어서 더 내적인 것들로 더 높여지거나
더 외적인 것들로 낮아지는 상태 변화를 겪는다.
그러나 이것을 숙고할 수 있는 사람은 적은데
왜냐하면 속사람과 겉 사람 안에서
생각하고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속사람이 무엇이고 겉 사람이 무엇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속사람 안에서 생각하고 의지하는 것은
천국에서 그렇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속사람이 있는 곳이 바로 그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겉 사람 안에서 생각하고 의지하는 것은
세상에서 그렇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겉 사람이 있는 곳이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사랑과 그로부터 나오는 신앙이
사람을 지배할 때 그는 속사람 안에 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 천국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의 사랑과 그로 인한 신앙이 흐릿한 상태라면
그는 겉 사람 안에 있다.
왜냐하면 그는 그때 세상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외관상 겉 사람으로 사는 것 같으나
실제로는 겉 사람으로 살 때도 있고 속사람으로 살 때도 있다.
이를 달리 말하자면 그가 겉 사람 안에 있을 때와
속사람 안에 있을 때가 다르다는 것인데
이는 삶의 주도권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의 차이에서 생긴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육체를 가지고 사는 까닭에
겉 사람이 삶의 주체인 듯 여겨지나
만일 그의 겉 사람이 속사람의 의중을 반영하고 있다면
그는 속사람에 지배된 겉 사람으로 살고 있는 것이다.)
천비 978
사람의 생각과 애정에서 인식되는 일반적인 것에는
속사람으로부터 나온 무수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사람은 ‘천사의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것을 지각할 수 없다.
사후에 선한 사람들은
먼저 ‘영들의 세계’나 ‘영들의 천국’에서 감각적인 삶을 살고,
그 후에 ‘천사적 영들의 천국’에서 내면적 감각적인 삶을 살고,
마지막으로 ‘천사의 천국’에서 가장 내면적 감각적인 삶을 산다.
그러나 이 마지막 천사의 삶은 속사람의 삶으로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오직 거듭난 사람만이
천사의 삶이 속사람의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 그들이 선과 진리, 그리고 속사람과 겉 사람 사이의
영적 전쟁에 대해 성찰할 때에만 그것을 알 수 있다.
결국 속사람의 삶은 우리 안에 있는 주님의 삶이다.
왜냐하면 주님은 속사람을 통해
겉 사람 안에서 인애의 선과 신앙의 진리를 이루시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사람의 생각과 애정에 인식되는 일반적인 것에는
속사람으로부터 나온 무수한 것들이 포함되어 있지만
사람은 ‘천사의 천국’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그것을 지각할 수 없다.(천비 545 참조)
그러나 속사람에 관해 언급된 이러한 사항들은
대부분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에
그들이 속사람과 겉 사람의 존재를 알고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으로부터 온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는다면
그것은 그들의 구원에 필수적이지는 않다.
천비 1015
생각을 육신에서 끌어내 영으로 생각한다면
내면적인 사람을 통해 속사람의 활동을 들여다볼 수 있다.
.. ‘내면적인(interior) 사람’이라는 용어가 사용되는 이유는 이러하다.
즉 우리 안에 있는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은
주님께만 속하는데
그것은 앞서 보여준 것처럼 우리의 속사람을 형성하고
반면에 합리적인 것들은 우리의 내면적인 사람,
즉 속사람과 겉 사람의 중간 사람을 형성하며
‘선에 대한 애정’과 ‘기억의 지식’이
우리의 겉 사람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육신으로 살면서 그것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육체적 관심에 몰두해 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더 깊은 것들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고
그것들이 이러한 뚜렷한 층들로 배열되어 있다는 사실은
더더욱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에 대해 성찰하려고 한다면,
말하자면 우리의 생각을 우리 육신에서 끌어내고
우리의 영으로 생각한다면
(육체에서 분리된 생각에 싸여 영 안에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충분히 분명히 볼 수 있다.
‘결실하고 번성하는 것’이
내면적인 또는 합리적인 사람과 관련이 있는 이유는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없는)속사람의 활동이
오직 내면적인 사람에게서는
매우 일반적인 방식으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면적인 사람 안에서는 셀 수 없이 많은 세부적안 것들이
하나의 일반적인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천비 3702
사람이 신적 질서에 따라 산다면 그의 내적 시각이 열려
신성이 사람을 거쳐 자연적 질서의 가장 낮은 단계에
내려와 있는 것을 즐거움 속에 뚜렷이 보고 느낄 수 있다.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 계신 것을 보라.”
.. 이 말의 내적 의미에 숨겨진 비밀은
모든 선과 진리가 주님에게서 내려와 주님에게로 올라간다는 것,
즉, 주님은 처음이자 마지막이 되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주님의 신성한 것들이 그를 통해
자연적 질서의 가장 낮은 것들에 이르기까지 내려올 수 있고
또 자연적 질서의 가장 낮은 것들로부터
주님에게로 올라갈 수 있도록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사람은 신성과 자연적 세계를,
그리고 자연적 세계와 신성을 연결하는 매개체가 될 수 있으며
이런 식으로 두 세계를 연결하는 수단인 사람을 통해
자연적 질서의 가장 낮은 단계가 신성으로부터 생명을 받을 수 있다.
사람이 신적 질서에 따라 산다면 이는 현실이 될 것이다.
이 특별한 형태로 사람이 창조된 것은
그의 몸이 소우주라는 사실에서 분명하다.
이는 자연계의 모든 비밀이 몸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하늘에 있는 모든 비밀은 눈에 저장되어 있고
공기 중에 있는 모든 비밀은 귀에 저장되어 있으며
보이지 않고 공기 중에 떠다니는 모든 것은
감지되는 곳에서 후각 기관에 저장되고
물과 다른 액체에 있는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은 미각 기관에 저장된다.
그리고 실제 상태의 변화는
마찬가지로 몸 전체의 촉각에서 발생한다.
이러한 것 외 훨씬 더 깊이 숨겨진 실체는
우리의 삶이 질서 정연하다면 우리의 내부 기관에서 감지할 것이다.
이로써 신성이 사람을 거쳐
자연적 질서의 가장 낮은 단계로 내려가는 것이 분명해지고
자연적 질서의 가장 낮은 단계로부터 신성으로
올라가는 것이 분명해진다.
이는 사람이 찬된 신앙, 즉 사랑으로 주님을
자신의 첫 번째이자 마지막 목적으로 인정해야만 가능하다.
이와 같은 상태는 천적이었던 태고의 사람들에게도 존재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감각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무엇이든
주님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따라서 주님과 그의 왕국에 대해 생각하는 소재로 사용했고
그러한 생각으로부터 그들이 세상적이고 지상적인 대상에서
즐겼던 즐거움이 나왔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들이 자연에 속한
더 낮고 궁극적인 대상에 대해 숙고했을 때
그들에게는 이것들이 생명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 사람들의 내적 시각과 지각 속에는
이들에게 전해진(descended) 생명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들이 눈으로 본 대상들은 말하자면 그 생명의 형상이었고
그 형상들은 본질에 있어서는 죽은 형상이지만
그들에게는 이런 식으로 살아 있는 형상이었다.
이것은 천적 천사들이
세상의 모든 것에 대해 가지고 있는 지각의 종류이며
또한 어린아이들이 가지고 있는 지각의 일종의 근원이기도 하다.
그것은 내가 종종 지각하도록 허락받은 것이었다.
이 모든 것에서 우리는
주님의 신성한 것들이 자연의 궁극적인 것에 내려오고
자연의 궁극적인 것에서 그분께로 올라가는 자들의 품성이
어떠한지 알 수 있으며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창 28:12,13)는
가장 높은 의미에서 말씀이 신성한 소통과 그에 따른 결합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천비 6057
사람 안에서 영적 세계가 자연적 세계와 결합된 결과
영적 세계가 자연적 세계로 아주 활발하게 흘러들어가기 때문에
이제 사람이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그것을 분별할 수 있다.
겉 사람이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의 형상에 일치하여 형성된 것처럼
속사람은 천국의 모든 것들의 형상, 곧 주님에게서 발출한
천적인 것들이나 영적인 것들의 형상에 일치하여 형성되었다.
거기 있는 천적인 것들은
주님사랑이나 이웃사랑에 속한 모든 것들을 가리키고
영적인 것들은 신앙에 속한 것들을 가리키는데
그것들 안에는 그 만분의 일도 입으로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그리고 그러한 성질이 내재해 있다.
속사람이 이런 모든 것들의 형상에 일치하여 형성되었다는 것은
천사들에게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천사들이 내게 나타났듯이 사람의 내적 시각에 나타날 때
그들의 단순한 출현만으로도
그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이는 주님사랑과 이웃을 향한 인애가
그들에게서 그에게 부어져 침투하기 때문이다.
즉 그 사랑과 인애에 의해 발산되는 신앙의 광선이
그들로부터 빛을 발해 사람의 애정을 감동시키기 때문이다.
이것에 의하여 그리고 다른 입증에 의하여 나에게 명확하게 된 것은
속사람은 하나의 천사가 되기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에
그는 가장 작은 형체의 천국이라는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 분명해진 것은
이제 사람 안에서 영적 세계가 자연적 세계와 결합되었다는 것,
따라서 사람의 경우 영적 세계가 자연적 세계로
아주 활발하게 흘러들어가기 때문에
사람이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그것을 분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영혼과 육체의 상호작용의 본질을 보여준다.
즉, 본래 그것은 천국에 속한 영적 실체와
세상에 속한 자연적인 것의 소통이며
이 소통은 하나가 다른 하나로
흘러들어가는 것에 의해 영향을 받지만
그 둘이 함께 결합 된 방식에 의존하는 소통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유입을 통해 영향을 받으면서 둘이 결합된 방식에 의존하는
이러한 소통은 오늘날에는 알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것들이 자연적인 힘에 돌려지고
영적인 것에 대한 지식은 아무것도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날에는 사람들이 생각할 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 거듭남의 과정 중에 자연적인 진리가
합리적인 선에 도입되어 선과 결합되기까지
천비 3167
자연적인 선과 진리가
합리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들을 받기 위해서는
자연적인 사람에게서 나온 진리가 합리적인 것에 도입되어
그 안의 선과 결합되어야 한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천국의 빛이 흘러들어
자연적인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을 비추고
따라서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는
합리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들을 받게 된다.
.. 합리적인 것 안에서 진리가 선에 도입된 결과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가 어떻게 영적인 것들을 가지게 되는지
사람들이 알 수 있도록 여기 간략히 설명하겠다.
모든 사람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가지고 있으며
내적인 것은 속사람, 외적인 것은 겉 사람이라고 부른다.
속사람은 영적인 사람과 같고 겉 사람은 자연적인 사람과 같다.
영적인 사람은 천국의 빛 안에 보이는 것에서
지성과 지혜를 얻는 반면
자연적인 사람은 세상의 빛 안에 보이는 것에서
지성과 지혜를 얻다.
천국에는 영적인 것만이 존재하고
세상에는 자연적인 것만이 존재한다.
사람은 그 안에서 영적 차원과 자연적 차원,
즉 그의 영적인 사람과 자연적인 사람이 서로 일치하거나
하나를 이루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나 그 경우 영적인 사람은
자연적인 사람에 대한 통제권을 가져야 하고
자연적인 사람은 하인이 주인에게 복종하듯이 순종해야 하다.
그러나 타락을 통해 자연적인 사람은 영적인 사람 위로 자신을
높이기 시작했고 그래서 신성한 질서 자체를 뒤집어 놓았다.
그 결과 자연적인 사람은 영적인 것에서 자신을 분리했고
영적인 것들은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하기 위한
작은 틈새를 통해서만 자연적인 사람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적인 것들이 다시 자연적인 사람에게 흘러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주님에 의해 거듭나야 했다.
즉, 자연적인 사람에게서 나온 진리가 합리적인 것에 도입되어
그 안의 선과 결합되어야 했다.
이런 일이 일어날 때 영적인 것들은
자연적인 사람에게 도달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제 천국의 빛이 흘러들어
자연적인 사람 안에 있는 것들을 비추고
거기에 있는 것이 빛을 받게 하기 때문이다.
그 안의 선들은 빛의 열, 즉 사랑과 인애이며
진리들은 빛의 광선, 즉 신앙이다.
이런 식으로 자연적 선과 자연적 진리는
합리적인 것으로부터 영적인 것들을 받는다..
자연적 진리는
지혜를 행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모든 교리의 가르침과 기억의 지식으로 구성된다.
천비 3085
신성한 유입이 끊임없이
속사람을 통해 겉 사람으로 온다.
즉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이
합리적인 사람을 통해 자연적인 사람으로,
같은 말이지만 겉 사람의 자연적인 것들로 유입되고
또 이 유입에 의해 진리들이
자연적인 사람으로부터 끊임없이 불려 나와 고양되고
합리적인 사람 안에 있는 선에 심어진다.
..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이러한 것들은
평범한 인간의 지성뿐만 아니라 더 진보된 지성도 이해할 수 없다.
즉, 이 장과 그 뒤를 잇는 몇 장에서
내적 의미에 포함된 것과 같은 것들이 그렇다.
그 이유는 신성한 유입이 끊임없이
속사람을 통해 겉 사람으로 있다는 것,
즉 천적이고 영적인 것들이
합리적인 사람을 통해 자연적인 사람으로,
같은 말이지만 겉 사람의 자연적인 것들로 유입되고
또 이 유입에 의해 진리들이
자연적인 사람으로부터 끊임없이 불려 나와 고양되며
합리적인 사람 안에 있는 선에 심어진다는 것을
거의 아무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없는데 어떻게 전체 과정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 알 수 있겠는가?
지혜의 과정이 너무나 위대해서(신성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결코 만분의 일도 탐구할 수 없고 오직 가장
일반적인 측면만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 내적 의미로 존재하는 것들이
이해 가능하게 설명될 수 없고 또 설명되는 것이
이해를 초월한다는 사실에 놀라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 과정에 초점을 맞추고 설명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내적 의미는 주로 천사들을 위해 존재하며
말씀을 통해 천국과 사람사이에 소통을 확립하기 위해서이다.
천사들은 그 내용을 그들의 즐거움 중 하나로 여긴다.
왜냐하면 천국의 양식은
지성과 지혜에 속한 모든 것 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지혜와 지성의 축복은
주님을 대하는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천비 3138
신성한 빛인 천국의 빛이 세상의 빛으로 형성된 자연적인
사람의 생각 속으로 유입되면 깨달음과 인식이 생긴다.
이때 상응이 존재하면 진리를 인식하고,
상응이 존재하지 않으면 진리 대신 거짓을 인식한다.
자연적인 사람은 그 깨달음과 인식을 통해 거기서 합리적인 것
안에 있는 선과 결합되어야 할 진리를 이끌어낼 수 있다.
.. ‘합리적인(rational) 사람 안에 있는 선’에 결합되어야할 진리를
거기서부터(자연적인 사람으로부터)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자연적인 사람의 준비와 깨달음이 필요하다.
사람의 지성적인(intellectual) 것들을 형성하는 두 가지 빛이 있다.
천국의 빛과 세상의 빛이다.
천국의 빛은 주님으로부터 오는데 저 세상에서 주님은
천사들에게 태양과 달로 나타나신다.
세상의 빛은 육체적 시각 앞에 나타나는 태양과 달에서 온다.
속사람은 천국의 빛에서 시력과 이해(understanding)를 가진다.
그러나 겉 사람은 세상의 빛에서 시력과 이해를 가진다.
천국의 빛이 세상의 빛에 속한 것들로 유입되면
깨달음과 동시에 인식(recognition)이 생기는데
이때 상응이 존재하면 진리를 인식하고,
상응이 존재하지 않으면 진리 대신 거짓을 인식한다.
그러나 깨달음과 인식은 애정이나 사랑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애정이나 사랑은 영적인 열이며
빛에 의해 깨닫게 된 것에 생명을 준다.
.. 다음 구절에서는 그 준비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천국의 빛, 즉 주님의 신성한 빛이 세상의 빛으로 형성된
그분의 자연적인 인간의 생각 속으로 흘러들어갔고 그분은 거기서
합리적인 것 속의 선과 결합될 진리를 낳을 수 있으셨다.
(주님의 신성한 빛인 천국의 빛이 그분의 자연적인 인간 안에 있는
세상의 빛에 속한 것들 안으로 유입되었고
그 결과 생긴 깨달음과 인식으로 인해 그분은 거기서
합리적인 것 안에 있는 선과 결합되어야 할 진리를 이끌어내셨다.)
이것은 평범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했기에
주님은 자신의 인간을 신성으로 만들기 위해
평범한 방식으로 세상에 오셨다.
즉, 그분은 사람으로 태어나고, 사람으로 가르침을 받고,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 그분의 뜻이었다.
그러나 차이점은 사람은 주님으로 거듭나는 반면
주님은 스스로 자신을 거듭나게 하셨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영광스럽게 하셨다. 즉 자신을 신성으로 만드셨다.
또한 사람은 인애와 신앙의 유입을 통해 새로워지지만
주님은 자신 안에 있었고 자신의 것이었던
신성한 사랑의 유입을 통해 그렇게 되셨다.
이로써 인간의 거듭남은
주님의 영광의 형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인간의 거듭남의 과정에서 비록 희미하지만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과정을 볼 수 있다는 것도 같은 의미이다.
천비 5219
천국의 빛은 오직 진리로만 흘러든다.
그 빛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성한 진리이며
천사와 영, 그리고 인간에게 거주하는 진리의 근원이다.
그들에게 있는 진리들은 보조적인 빛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들 안에 있는 선의 존재를 통해
신성한 진리로부터 빛을 얻는다.
.. ‘모호하다’는 단어는 진리가 추방되었기 때문에 사용된다.
실제로 진리가 없는 곳에는 모호함이 존재한다.
천국의 빛은 오직 진리로만 흘러든다.
그 빛은 주님으로부터 받은 신성한 진리이며
천사와 영, 그리고 인간에게 거주하는 진리의 근원이다.
그들에게 있는 진리들은 보조적인 빛이다.
그러나 그들은 진리들 안에 있는 선의 존재를 통해
신성한 진리로부터 빛을 얻는다.
왜냐하면 진리들이 선에 뿌리를 두지 않는 한,
즉 진리들이 그 안에 선의 존재를 갖지 않는 한
그들은 신성으로부터 어떤 빛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선을 통해 빛을 얻을 수 있는 이유는
선은 불이나 불꽃과 같고
진리들은 그것으로부터 발산되는 빛과 같기 때문이다.
다음 세상에서도 선함이 없이 빛나는 진리들이 있다.
그러나 그 진리들로부터 비치는 빛은 겨울의 빛이며
천국의 빛이 도래하면 짙은 어둠으로 변한다.
천비 8764
인간은 신앙의 진리들에 의해
합리적인 것에 속한 선이 있는 천국의 빛에 이를 수 있다.
“내가 어미 독수리가 그 날개로 새끼를 업어 나르듯이 하였다.”
이 말씀은 진리들에 의해 그들이 천국의 빛에 이르기까지
높이 올려졌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 나른다는 것은 올리워지는 것을 뜻하고
날개들은 영적 진리들(신앙의 진리들)을,
그리고 독수리는 진리측면의 합리적인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거기 오르는 일이 신앙의 진리들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것은
신앙의 진리들이 사람을 그 선이 있는 천국에 올리기 때문이다.
진리측면에서 합리적인 것이 독수리의 의미인 것은
사람의 합리성은 그의 하늘이고
자연적인 것은 상대적으로 땅과 같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합리적인 것은 속사람을 형성하고
자연적인 것은 겉 사람을 향성하기 때문이다.
천비 3108
진리가 선에 도입되어 선과 결합되기 전에는
그것이 사람에게 있을지라도 사람 자신의 것으로 되지는 않는다.
.. 진리를 선에 도입하는(introduce) 것과 관련하여 말하자면,
진리가 도입되어 선과 올바르게 결합되기 전에는
실제로 진리가 사람에게 있을지라도
그것이 사람에게서 나온 것처럼 되거나
사람 자신의 것으로 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진리가 자신의 선에 도입되자마자
그것은 그 사람의 것이 된다.
그것은 그의 외적 기억에서 나가서 내적 기억으로 들어간다.
다시 말해 그것은
자연적인 사람 또는 겉 사람 안에 존재하지 않고
합리적인 사람 또는 속사람으로 들어가서 그 사람 자체를 옷 입고
그의 인간성, 즉 그의 고유한 인간적 성품을 구성한다..
천비 3190
진리가 자연적인 것에서 합리적인 것으로 고양될 때
그것은 세상의 빛의 영역에서 천국의 빛의 영역으로 옮겨지고
인간은 동시에 지성과 지혜로 고양된다.
.. 진리가 자연적인 것에서 합리적인 것으로 고양될 때
그것은 세상의 빛의 영역에서 천국의 빛의 영역으로 옮겨진다.
마치 밤의 어두움에서 낮의 밝음으로 옮겨지는 것과 같다.
세상의 빛에 속한 것들, 즉 모든 자연적인 것들이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밤에 있는 것과 같고
천국의 빛에 속한 것들, 즉 영적인 것들이 있는 것은
상대적으로 낮에 있는 것과 같다.
따라서 진리가 자연적인 것에서 합리적인 것으로 고양될 때
인간은 동시에 지성과 지혜로 고양된다.
더욱이 인간에게 있는 모든 지성과 지혜는 이 근원에서 나온다.
이것이 지성적 부분이
자연적인 기억의 지식 위로 고양된다는 의미이다.
천비 8754
중생과정에 있는 사람은 그가 진리에 의해 선에 인도될 때
처음에 그는 신앙의 진리들이 아직 심어지지 않은 선에 인도된다.
왜냐하면 그가 선 안에 있기 전까지는
진리들은 심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선 안에 있기 전에
기억 안에서 진리들을 미리 알게 되지만
그러나 그 진리들은 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 밖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은 아직 신앙의 진리들이 심어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진리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정렬되어(arranged) 있는 선이다.
.. 여기서 나는
‘진리들이 심어져야(implanted)할 선’에 관해
몇 마디 부언하고자 한다.
여기 그 선은 바로
시내 광야(the wilderness of Sinai)를 뜻한다.
중생과정에 있는 사람은
주께서 처음에는 진리에 의해,
그리고 뒤에는 선에 의해 인도하신다.
중생과정에 있는 사람은
사실상 그가 선에 들어가기 위해 진리에 의해 인도된다.
다시 말해 그가 그것을 알고 원하고
종국에 그것을 행하기 위해 진리에 의해 인도된다.
그러나 그가 진리에 의해 선에 인도될 때
처음에 그는 신앙의 진리들이 아직 심어지지 않은 선에 인도된다.
왜냐하면 그가 선 안에 있기 전까지는
진리들은 심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선 안에 있기 전에
기억 안에서 진리들을 미리 알게 되지만
그러나 그 진리들은 선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선 밖에 있는 것이다.
그 뒤 그 사람이 새로운 생명을 받을 때
이것은 그가 선에 의해 통치될 때 처음 받는 것인데,
그때 신앙의 진리들이 심어진다.
말하자면 진리들이 속사람 안에서 선과의 혼인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선은 아직 신앙의 진리들이 심어지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 진리들을 수용할 수 있도록
정렬되어(arranged) 있는 선이다.
여기 시내 광야가 뜻하는 선이 바로 이것으로
이는 기독교의 선 이외의 다른 선을 의미하지 않는다.
천비 3084
신성한 사랑은
선에 대한 애정으로 흘러들고 거기서 진리에 대한 애정으로 흘러들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것들을
빛으로 깨우치고 활력을 주며 동시에 그것들을 정렬시킨다.
이것이 '내려가는'의 의미이다.
그 후 진리는 자연적인 인간에서 합리적인 인간으로 올라가
선과 결합되는데 이것이 '올라가는'의 의미이다.
창 24:16 “.. 그가 우물로 내려가서
물을 그 물동이에 채워가지고 올라오는지라.”
앞에서 '그녀의 물 항아리는 그녀의 어깨에 있었다.'는 것은
진리를 받아들이는 그릇과 그 진리를 지지하려는
전적인 노력을 의미한다.
이는 "물 항아리"가 기억의 지식, 따라서 진리의 그릇을 의미하고
"어깨"가 모든 권능, 즉 노력을 의미한다는 것에서 분명히 알 수 있다.
"항아리"나 "물 항아리" 그리고 일반적으로 그릇은
내적 의미에서 그릇이 될 위치에 있는 것,
즉 기억의 지식과 진리와 관련된 지식, 그리고 선과 관련된
진리 자체를 의미한다.. (천비 3079)
.. 인간의 관념에서 보다 낮거나 높은 것은
천사의 관념으로는 보다 외적인 것이거나 내적인 것이다.
예를 들어 천국은 인간에게는 높게 보이지만
천사에게는 내적인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인간에게 있는 자연적인 것은
그의 영적인 것에 상대적으로 외적인 것이고
마찬가지로 영적인 것도 천적인 것에 상대적으로 그렇다.
또는 같은 것으로, 자연적인 인간에 속하는 기억의 지식은
진리에 상대적으로 외적인 것이고
진리는 선에 상대적으로 외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에 상대적으로 기억의 지식을
덮개라고 부르고 옷이라고도 하며,
진리도 마찬가지로 선에 상대적으로 그렇게 불린다..
이 구절은 내적 의미로 볼 때
진리가 자연적인 사람에게서 합리적인 사람에게로 올라가는
초기 단계를 묘사하기 때문에
리베카가 표징하는 진리에 대한 애정이 '우물로 내려갔다'고
말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올라갔다'고 말하고 있다.
3074 에서 언급했듯이, 신성한 사랑은
선에 대한 애정으로 흘러들고 거기서 진리에 대한 애정으로 흘러들며
그렇게 함으로써 자연적 인간 안에 있는 것들을
빛으로 깨우치고 활력을 주며 동시에 그것들을 정렬시킨다.
이것이 '내려가는'의 의미이다.
그 후 진리는 자연적인 인간에서 합리적인 인간으로 올라가
선과 결합되는데 이것이 '올라가는'의 의미이다.
천비 3086
신성한 선은 자연적인 사람의
기억의 지식(memory-knowledges, factual knowledge 사실적 지식),
지식, 그리고 그 안에 있는 교리적인 것들로 흘러들어
거기 있는 모든 것을 깨우치고, 활력을 주고, 질서 있게 배치한다.
.. 내적 의미로 여기 포함된 것들에 대해
어떤 일반적인 개념이라도 가지려면 이 장 전체가 신성한 선에
결합되어야할 신성한 진리에 대해 다룬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즉, 신성한 선이 자연적인 사람의
기억의 지식(memory-knowledges, factual knowledge 사실적 지식),
지식, 그리고 교리적인 것들로 흘러들었는데
이는 이것들이 자연적인 사람의 기억 속에 있는 한
그들은 자연적인 사람에게 속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유입된 선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깨우치고, 활력을 불어넣고, 질서 있게 배치했다.
자연적인 사람 안에 있는 모든 빛, 생명, 질서가
신성으로부터의 유입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누구나 그것에 주의를 기울이면 알 수 있다.
이 유입을 통해 진리에 대한 일반적인 애정이 생겨난다..
천비 3679
사람의 합리적인 것(합리성)은
진리가 어떻게 신성한 질서에 따라 선과 결합될 수 있을지를
자연적 선 안에서 집중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자연적 선(natural good)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위에서 방금 말한 것에서 어느 정도 분명해진다.
즉, 그것은 자연적인 것에 속한 선 안에 있는 생각,
자연적인 선함과 관련 있는(involving earthly goodness) 생각이다.
(영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자연적 선이 가진 생각이라고 하지만
인간의 사고방식에 따르면
자연적인 것에 속한 선 안에 있는 생각이라고 한다.)
합리적인 것은(마음은) 선을 목표할 때
자연적인 것에 속한 선 안에서(자연적 선과 관련하여) 생각한다.
선이 바라는 목표일 때,
진리에 속한 선(진리에 근거한 선)을 통한 결합에 관해
자연적 선이 가지고 있는 생각은 자연적 선 안에서 목적,
즉 진리가 어떻게 신성한 질서에 따라 선과 결합될 수 있는지에
관해 생각하게 된다.
(합리적인 마음은 선을 목표로 바라볼 때
자연적인 선과 관련하여 생각한다.
그러므로 진리에 근거한 선을 통한 결합에 대해
자연적 선이 갖는 생각은
자연적 수준에서 바라보는 목표에 대한 생각이다.
그러한 생각들이 집중하는 질문은 진리가 어떻게 신성한 계획에 따라
선과 결합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결합은
신성한 질서에 따라 일반적인 방식에 의해 이루어진다.
위에서 자주 말했듯이 이것은 외적인 것들,
즉 순서상 궁극적이거나 마지막 것들에 존재한다.
왜냐하면 자연적 것의 모든 거듭남은 이것들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지막 또는 궁극적인 것들이
유아와 어린이의 지식과 같은 첫 번째 지식이다..(3665)
처음에 겉으로 보기에는
에서가 표징하는 ‘선에 근거한 진리’는
야곱이 표징하는 ‘진리에 근거한 선’과 결합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후자는 전자의 반대이기 때문이다.(n 3669)
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내적으로는,
즉 목적에 관해서는 결합되어 있다.
‘선에서 나오는 진리’의 목표는 앞서 언급했듯이 진리들이
질서에 따라 선에 결합될 수 있다는 것이고
이것은 또한 진리에서 나온 선의 목적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들을 결합하는 것이 목표이기 때문에
그 둘도 따라서 그렇게 결합된다.
초기 단계에서의 질서의 역전은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천비 5122
거듭남의 첫 번째 상태에서는
신앙의 진리(종교적 진리)에서 인애의 선으로 간다.
이 거듭남이 완료되면 인애는
마지막 자리에서 그 라인의 첫 번째 자리로 옮겨가고,
그래서 새로운 상태가 시작되는 지점이 된다.
이 새로운 상태는 두 방향으로 진행된다.
즉 내부로는 주님을 향한 사랑에 더 가까이 나아가고,
외부로는 먼저 신앙의 진리에, 그 다음 자연적 진리에,
그 다음에는 감각으로 지각되는 진리에 더 가까이 나아간다.
그런 다음 이 세 단계의 진리들은 합리적인 것 안에 존재하는
인애와 사랑에 속한 선의 형태와 차례로 일치하게 되고
이 과정을 통해 천국의 질서로 들어가게 된다.
.. 모든 감각적인 능력과 자연적안 것의 모든 측면,
그리고 합리적인 것의 모든 측면이 거치는 거듭남의 상태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들의 자체적 진행 단계를 가지고 있다.
그들이 어떤 끝에 도달하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데,
이전 상태에서 도달한 마지막 단계를 시작으로
목표를 향해 더 나아가고 그렇게 계속되어 결국 패턴은 바뀌고
마지막이었던 것이 첫 번째가 된다.
이것은 사람이 합리적 측면과 자연적 측면 모두에서
거듭나게 될 때 일어나는 일과 같다.
거듭나는 동안 첫 번째 상태의 단계는
신앙의 진리(종교적 진리)에서 인애의 선으로 간다.
그때 신앙의 진리가 겉보기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반면
인애의 선의 형태는 보조적인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신앙의 진리는 인애의 선을 목표로 삼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국면은 사람의 거듭남이 완료될 때까지 계속되는데
이것이 완료되면 인애는
마지막 자리에서 그 라인의 첫 번째 자리로 옮겨가고,
그래서 새로운 상태가 시작되는 지점이 된다.
이 새로운 상태는 두 방향으로 진행된다.
즉 내부로는 주님을 향한 사랑에 더 가까이 나아가고,
외부로는 먼저 신앙의 진리에, 그 다음 자연적 진리에,
그 다음에는 감각으로 지각되는 진리에 더 가까이 나아간다.
그런 다음 이 세 단계의 진리들은 합리적인 것 안에 존재하는
인애와 사랑에 속한 선의 형태와 차례로 일치하게 되고
(brought into agreement with, 인애와 사랑에 속한 선과 상응에
이르게 되고, reduced to correspondence with)
이 과정을 통해 천국의 질서로 들어가게 된다.
이것이 바로 발전과 진보는 끝없이 계속된다는 의미로
그것은 거듭나는 사람의 경우 끝이 없다.
그것은 그가 어린아이일 때부터 시작하여
세상에서 그의 삶의 마지막 단계까지 계속된다.
사실, 그것은 그 이후로 영원히 계속되지만
그의 거듭남은 결코 그가 어떤 방법으로든 완전하다고
불릴 수 있는 지점에 도달할 수는 없다.
그의 합리적 측면과 자연적 측면에서 거듭날 수 있는 것은
셀 수 없고 실제로 무한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은 무한한 싹들, 즉 내부와 외부 방향으로
더 깊이 도달할 수 있는 진보와 발전의 싹들을 가지고 있다.
사람은 이것을 전혀 즉시 알지 못하지만
주님은 모든 구체적인 세부 사항을 알고 있으며
매순간 그것을 돌보아 주신다.
만약 그분이 이것을 단 한 순간이라도 멈추신다면
모든 발전 단계는 혼란에 빠질 것이다.
먼저 오는 것은 끊어지지 않는 사슬로 다음에 오는 것을 바라보며,
영원에 이르는 일련의 결과를 낳는다.
이를 통해 신의 예지력과 섭리가
모든 세부적인 부분에 존재한다는 것이 분명하며,
만약 그렇지 않거나 일반적인 종류의 보살핌만 나타났다면
인류는 멸망했을 것이다.
- 주님께서는 말씀을 수단으로 사람 안에 유입하셔서
그의 기억 속 지식을 통해 그를 깨우치고 인도하신다.
주님으로부터 오는 생명을 받는 수용 용기는
감각을 매개로 하여 지식 또 쾌락과 즐거움을 통해 열린다.
천비 6315
신앙의 선에 의해 그의 삶이 감각적 수준으로부터 올려진 사람은
감각적 수준의 빛과 더 내적 수준의 빛에 번갈아 있게 된다.
.. 신앙의 선에 의해
그의 삶이 감각적 수준으로부터 올려진 사람은
감각적 수준의 빛과 더 내적 수준의 빛에 번갈아 있게 된다.
세상적인 걱정이 그의 주의를 차지하거나
외부적인 관심이 번창하는 사람들 사이에 있거나
단순한 쾌락에 빠져들 때 그는 감각적 수준에서 살고 있다.
이 상태에서 그는 신과 신앙에 대한 문제에 대해
말하고 생각하는 것을 피하고 반대한다.
만일 그가 그 상태에서 그 주제들에 대해 말하고 생각할지라도
주님에 의해 즉시 더 내적인 것들로 올려지지 않는 한
그는 그것들을 가볍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그가(같은 사람이) 세상적인 것들에 사로잡히지 않고
보다 내적인 수준의 빛 안에서 볼 때는
올바르고 공정한 것에 근거하여 생각하고
또 그가 훨씬 더 내적인 수준의 빛 안에서 본다면
영적으로 참되고 선한 것에 근거하여 생각한다.
선한 삶을 사는 사람은
한 수준의 빛에서 다른 수준의 빛으로 올려진다.
그가 악한 생각을 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는 더 내적인 수준으로 올려지는데
이는 천사들이 그 가까이에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많은 경험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인데
나는 애정과 생각에 있어서 올려지는 것과 동시에
상태의 변화를 자주 감지했다.
천비 10236
사람에게는 짐승이 가지지 않은 외적 측면의 감각이 있다.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받은
인상들(impressions)을 저장하는 사람의 기억이다.
천국을 거쳐 오신 주님께서는
말씀을 수단으로 사람 안에 유입하셔서
그의 기억 속 지식을 통해 그를 깨우치고 인도하신다.
.. 사람 안의 자연적 등차(degree, 차원)에는
외적 평면(level), 중간 평면, 내적 평면이 있다.
자연적 등차의 외적 평면은 세상과 접촉하는 것이며
감각에 속한 외적 평면이라고 불린다.
자연적 등차의 내적 평면은
천국에 거주하는 속사람과 접촉하는 평면이다.
자연적 등차의 중간 평면은 두 가지를 함께 연결한다.
왜냐하면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존재하는 곳에는
그들을 연결하는 중간적인 것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은 외적 평면, 중간, 내적 평면을 포함하는
자연적 등차를 가지고 있다.
엄밀히 말해 자연적 등차의 궁극적이자 가장 낮은 감각의 평면은
사람이 죽으면 사라지는 육체라고 불리는 것,
즉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과 같이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도록 봉사해온 감각적인 것을 의미한다.
이 감각은 사람의 생명이 종결되는 궁극적인 평면이며
그 생명의 토대가 되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세상을 향해 직접 열려 있고
그들을 통해 세상이 들어오고 천국은 떠나가기 때문이다.
이러한 감각은 사람이 동물과 공유하는 감각이다.
그러나 사람이 짐승과 공통으로 가지고 있지 않은
외적 측면의 감각이 있는데
그것은 세상으로부터 받은 인상들(impressions)을 사람의 기억에
저장하는 것으로, 이는 오직 세상적, 육체적,
지상적(worldly, bodily, earthly) 형상들로 구성되어 있다.
내면적인 것들이 아닌 이러한 것들만으로
생각하고 추론하는 사람을 감각적인 사람이라고 하다.
이 감각의 평면은 사후에도 사람에게 남지만 휴면 상태가 된다..
여기에서는 사람의 외적 감각의 본질이
표징들에 의해 설명된다.
특히 사람이 자신의 감각으로부터, 즉 세상으로부터
천국이나 교회에 속한 것들에 들어가지 않도록 하시는
주님의 보호가 설명되는데
이는 그것이 신성한 질서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즉 세상은 천국에 들어갈 수 없지만
천국은 세상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천국을 거쳐 오신 주님께서
말씀을 수단으로 사람 안에 유입하셔서
그 안에 거하시고, 그를 깨우치고, 가르치고, 인도하실 때 일어난다..
천비 1563
겉 사람이 속사람, 곧 영혼으로부터
생명을 세부적이고 명확한 방식으로 받기 위해서는
유기적 수용용기가 열려야 한다.
그러한 용기들은 감각을 매개로 하여 지식
또는 쾌락과 즐거움을 통해 열린다.
이때 겉 사람이 속사람과 결합되기 위해서는
육체적, 세상적, 지상적인 것들을 목적으로 여기는 것들이
제거되어야 한다.
.. 겉 사람은 주로 속사람,
즉 영이나 영혼으로부터 생명을 받는다.
거기서 일반적으로 그의 생명 자체가 나오는데
이 생명은 그 사람의 유기적 수용 용기(vessels)가 열리지 않는 한
겉 사람이 세부적이고 명확한 방식으로 받을 수 없다.
그 용기는 속사람으로부터 가장 미세한 것까지
특정한 영향을 받아들이는 것이어야 한다.
이 유기적 용기는 감각, 특히 청각과 시각을 통해서만 열리는데
그것들이 열리면 속사람은 가장 미세한 것까지
특정한 것에게 흘러들 수 있다.
그러한 용기들은 감각을 매개체로 해서
지식(scientifica et cognitiones)을 통해,
그리고 또한 쾌락과 기쁨을 통해 열린다.
이해에 속하는 것들은 지식을 통해,
의지에 속하는 것들은 쾌락과 기쁨을 통해 열린다.
이러한 것들에서 필연적으로
영적 진리와 일치하지 않는 지식들이 겉 사람 속으로 스며들고
또 천적인 선과 일치하지 않는 쾌락과 즐거움들이
스며들게 될 것이 분명해진다.
이는 육체적, 세상적, 지상적인 것들을 목적으로 여기는
모든 것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다.
이것들이 목적으로 여겨질 때 겉 사람을 밖으로 또는 아래로
끌어내려 속사람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그러므로 그러한 것들이 먼저 제거되지 않으면
속사람은 결코 겉 사람과 일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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