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92호
주 안에서 하나님의 최고 사랑을 체험하는 것은?
에베소서 6장에 "주 안에서 네 부모를 순종하라, 그리고 공경하라"는 말씀이 있어 강조할 수밖에 없는 구절로 인해 기독교를 효도의 종교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 여러 군데에서 언급하고 있는 효나 공경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에 따른 본질과 개념이 올바르게 전달하고 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하나님 밖에서 하는 효도는 어느 누구도 할 수 있는 것이며 그것을 마땅히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러나 성경에서 전하는 개념과 의미에서 효도가 무엇이며 본질과 핵심을 알아야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할 것이 아니겠는가? 기독교 밖에서 언급하는 효도와 효자는 어떤 것일까? 익히 잘 알고 있지만 삶의 현장에서 효도하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부모님의 말씀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든 없든 이치에 맞든 맞지 않던 그대로 순종하는 것이 진정한 효도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나를 낳아 주신 부모님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는 것이 마땅함에도 불구하고 내 이치에 맞지 않아서 내게 유익이 되지 않아서 불효하는 것을 이 글을 쓰는 필자에게서 느낀다.
기독교의 효는 살아생전에 내 부모에게 하는 효를 행해야 하는 것은 물론, 내 주위에 있는 부모가 될 수 있는 분들에게 하는 효도 실천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사람인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야 되는 도리일 뿐, 성경에서 보여주려는 효는 아니다. 그런데 우리는 도덕 윤리적인 효를 강조하고 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다시 찾은 아들의 비유(이때까지 탕자의 비유로 알고 있다)에서 '둘째'는 원어에서 '둘째'가 아니라 "새로운"(네오오테로스 new,teroj) 아들로 피력하고 있는데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고 있다. 이 단어가 마 9:17, 막 2:22, 눅 5:37에 나오는 "새 포도주는 새 부대라"는 문구에서 '새'(네오스 ne,oj, 네오오데로스 new,teroj)라고 사용되고 있는데 유독 누가복음에만 '둘째'로 번역하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내용을 갖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동하는 장면인가? 이 장면을 대상으로 연극도 하고 예화로 사용하고 있는데 새로운 아들에게만 재산을 준 것이 아니라 그때 당시 맏아들에게까지도 재산을 분배해 준 것을 성경에 명확하게 명시되어 있다. 그런데 새로운 아들에게만 재산을 나누어 준 것으로 언급하거나 거론할 때가 많다.
새로운 아들이 재산을 갖고 먼 나라에 가서 허랑방탕 다 허비하고 난 뒤 거기서 흉년을 만나 똥냄새 나는 돼지를 치는 신세가 되었다. 옳게 먹지도 못하여 쥐엄 열매로 끼니를 때우며 짐승처럼 살다가 아버지에게 돌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새로운 아들이 떠난 그 날부터 동네 어귀에 서서 매일 기다리고 있었다.
새로운 아들이 피골이 상접하여 돌아오는 모습을 멀리서 보고 달려가 마중하는 장면은 마치 감동적인 영화장면과 흡사하다. 사실은 이 비유의 주인공은 새로운 아들이 아니라 기다리고 있었던 아버지가 주인공인데 이 비유를 대상으로 연극을 하면 꼭 새로운 아들이 주인공으로 나온다.
기다리던 아버지가 새로운 아들을 발견하고 뛰어가 끌어안고 입 맞추며,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손에 가락지 끼우며, 신발을 신기우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이는 것이 이 비유에 핵심인데 이렇게 해 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바로 기독에서 말하는 효도라는 사실을 얼마나 알고 있는지.......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추방하기 전에 가죽 옷을 입혀 주시는 사랑을 비롯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기 위하여 족장과 천사들을 동원했으며, 모세와 여호수아, 사사들, 선지자들, 제사장들, 왕들, 심지어 나귀까지 동원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 깨닫도록 전심을 다하셨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들에게 도달되기도 전 번번이 묵살되거나 아니면 인간적으로 받아들여져 사랑의 진위를 무시해 버려왔었다. 구약 말라기에 마침표를 찍은 후 구약과 신약 사이에 400년이란 세월동안 하나님의 계시나 말씀으로 또한 천사들을 동원하거나 아니면 선지자나 제사장, 왕들에게 하달한 적이 없었다.
신구약중간시대, 즉 하나님의 침묵시대를 거쳐 하나님께서 단행한 구속사는 그 분의 독생자, 하나님과 하나가 되신 분으로 하늘과 땅의 권세를 가진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인간의 내면세계)에 속죄 양으로 보내시어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인간의 정과 욕심과 함께 죽으시고 삼일동안 장사지내었다가 부활하시어 창세전에 우리가 되돌려 받아야 하는 것을 되돌려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는 것이 바로 진정한 효도임을 깨달아야 한다.
그래서 "주 안에서"라는 단어를 사용하신 것이다. 즉 "주 안에서만이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을 깨닫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하나님의 사랑을 듣고 깨달아 영생의 구원을 받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를 향한 효도이며 공경인 것이다. 육의 몸을 멸하여 다시는 죄에게 종노릇하지 못하게 했는데 정과 욕심으로 가득 찬 옛 사람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것이 바로 불효인 것이다.
옛 사람의 상태인 죄와 사망의 법아래서 말씀을 보거나 듣거나 실천하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는 짓을 하는 불효인 것이다. 율법 아래서, 죄와 사망에서 해방시켜 참 자유를 주신 온전한 구원을 믿지 않는 것이 불효임 모르고 예수를 믿는다고 내세우는 어리석은 자들이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다.
지난번 성경공부에 참석했던 영국 선교사는 영국 교회 강단에서 십자가와 부활의 내용을 언급하는 설교는 전혀 들을 수 없으며 축구나 다른 세상 주변 얘기로 채워진 설교를 듣게 된다는 것이다. 남의 나라 예기만이 아니라 지금 한국 교회 강단에 채워지는 설교에 성공주의와 기회주의가 가득 채워진 거룩한 거짓말로 가르쳐 다시 율법으로 되돌아가 예수를 못 박게 하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자행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우리 죄를 위하여 제물 되신 예수님께서 다시 부활하시어 구원 표징으로 영생의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달았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이며 구속사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달았다면 살아있는 육신의 부모에게 알리는 것이 진정한 효도가 아니겠는가?
그런 부모가 없다면 내 주위 사람들을 부모로 여기고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 기독교의 효라고 자부할 수 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인데 내가 노력한다고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유일한 길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믿어지는 의로운 믿음이 와야만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성령이 임하여 약속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는데 예수님과 하나님을 믿은 척하고 있으니 하나님을 사기꾼으로 가짜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창세전에 받아야 하는 것을 받은 척하고 있으며 속 빈 강정처럼 허수아비처럼 엉터리로 예수님을 믿지 않았으면 한다. 그러니까 세상 사람들이 우리들을 보고 비아냥거리는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을 체험한 주 안에서 믿지 않는 육신의 내 부모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야 하는 것이 효도이며 공경해야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또한 내 주변에 있는 불신자들이 내 부모로 여겨서 주 안에서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을 체험할 수 있도록 섬기는 것이 바로 순종이며 공경하는 대상이라면 기독교 효의 새로운 패러다임 속에 다시 출발해야 할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믿기만 하면 지금 이 땅에서 그리고 바로 이 순간 천국이 되며 영생복락을 즐기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효도를 하는 것이다. 직장생활 속의 부모는 자기보다 위에 있는 사람 모두가 부모이며 학교이든 아니면 어떤 조직이든 간에 나이, 학력, 경험 등을 상관하지 않고 배울 점이 있다면 내 부모로 여겨라.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올바르게 전해야 한다.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을 부모에게 알려주는 것이 바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이고 순종하는 것이며 공경하는 것이다. 내 생각이 달라도 부모의 말이 옳다면 부모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순종하기 쉽다. 그러나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는 말과 행동에 순종하거나 공경하기 쉽지 않다.
괴팍한 경영주인 어느 회장에게 눈에 든 부하직원이 자기의 간과 쓸개를 다 빼면서까지 회장에게 복종하고 올라간 경우를 종종 보면서 부모에게 공경하고 순종을 잘 하면 장수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표현하지 않아도 깨달을 것이다. 지나간 일이지만 과거 직장에서 상사에게 이렇게 했다면 부목사로 있었을 때나 담임목사에게 내게 맞지 않는 상황에서 불만이 있었어도 그렇게 순종과 공경을 잘 했다면 하는 후회를 해 본다.
이 글을 읽는 독자만이라도 학교와 직장 그리고 기타 모임에서 상사나 선배에게 굴복하라는 것이 아니라 순수하게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을 나타나기 위해 부모로 여기고 기독교적인 순종과 공경이 나타난다면 그리스도의 향기가 진동할 것이다. 상식에 맞지 않고 도저히 용납되지 않는 상황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주 안에서 최고의 하나님의 사랑을 체험한 것을 그냥 간직만 하고 있을 것인가? 내 부모에게도 그렇게 한 적이 없다면 지금 실천하여 진짜 멋지게 효도 한 번 해봄이 어떤가? 지금은 육신의 부모가 없어 아쉬운가? 그렇다면 주변에 내 부모로 삼아야 할 대상은 얼마든지 있다. 쉬운 상대도 있지만 만만치 않는 짐승 같은 족속도 있을 수 있다. 과거 그 괴물짐승 같은 족속이었던 나를 예수님께서 부모처럼 여기고 순종하며 공경하여 하나님의 최고사랑을 누리고 있다면 어찌 하실 텐가?
예수께서 나를 부모로 여겼다는 표현은 이상하지만 하나님의 명령인 영생복락을 나에게 주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공경하신 차원에서 부모로 여겼다는 의미이다.
내 부모가 나를 위해 뺨을 맞고, 침 뱉음을 당하며 채찍에 맞고 십자가를 지고 나의 정과 욕심을 가득 채워진 나를 위해 못 박히시고 목마름을 당하며 극심한 고통으로 대신 죽으셨는가? 그 분이 나와 함께 한 몸이 되시고자 얼마나 기다리셨는가? 창세전 하나님아버지께로부터 받아야 할 것을 찾으려 되돌아오는 나의 모습을 보고 달려와 끌어안고 입 맞추고 옷을 입히시며, 가락지와 신발을 주시고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배설하시는 그 사랑을 찾았다면 그 사랑을 받을 내 부모를 찾아라. 찾았다면 순종하고 공경하며 멋지게 효도해라.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칼 럼 필 자 |
이종남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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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좋은글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