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뇌腦의 슬픔
허 열 웅
내가 디지털치매 중증환자라는 것을 확실히 안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한국문인협회 동작지부 회원들과 문학기행에서였다. 경기도 안성에 있는 조병화, 박두진 문학관 탐방과 시낭송을 겸한 행사에 참석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얼큰한 장터 국밥에 동동주와 소주를 곁들인 식사를 끝내고 차에 오르자 남은 안주로 다시 술잔이 오고갔다. 체격이 우람하고 시골 농부처럼 순박하게 생긴 회장이 마이크를 들고 한 곡조 뽑아내더니 순서대로 노래를 시키는 것이었다.
단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돌아가는지라 내 차례가 왔다. 나는 음치인데다가 가사를 잘 외우지 못하고 박자도 자주 틀려 그동안 노래를 불러야하는 기회가 생기면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다행이도 노래방이 생기고 나서는 그런대로 연습을 하여 몇 곡쯤은 화면을 보며 따라 불러 위기를 면하곤 했다. 그러나 타고 오는 관광버스에는 노래방 기기가 없어 모두들 육성으로 불러야 했다.
긴장된 마음으로 노래방에서 가끔 불렀던 ‘백마강’을 부르기 시작했다. 헌데 첫 가사 한 줄을 부르고 나니 다음이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사회자가 1절 만이라도 불러야 된다며 다시 강요를 함과 동시에 여러 사람이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돋우는 바람에 ‘추풍령’을 부르기 시작했다. 마찬가지였다. 가사 첫 줄을 부르고 나니 머리가 하얗게 텅 비워져 꽉 막혀버리고 말았다.
국립국어원이“디지털 치매란”‘신조어로 올렸다.<디지털기기에 지나치게 의존해 기억력이나 계산 능력이 떨어진 상태>라고 정의했다. 디지털치매는 무능해도 되는 삶에서 비롯된다. 가족 친지들의 전화번호는 휴대폰에 저장되어 있고 이들과 약속 장소로 가는 길은 내비게이션이 알려준다. 공적, 사적 일정도 휴대폰이나 PDA가 알고 있다. 모르는 건 인터넷에 물어보면 된다. 그러니 스스로 생각하고 저장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어졌다.
지난 가을 형님이 교통사고를 당해 위독한 상태로 대전의 대학병원에 입원해 계시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가장노릇을 하신 분이었다. 급히 서둘러 서울 역으로 향했다. 열차표를 사려고 호주머니를 뒤지는 순간 핸드폰을 집에 두고 왔음을 알았다. 다시 집에 가 핸드폰을 가져오기에는 시간이 너무 많이 필요했다.
생명이 위독하다고 했는데 임종이라도 해야 된다는 마음으로 포기하고 가기로 했다. 출발 시간이 20 여분 남아 누님들이나 동생에게 연락도 하고 직장에 근무하고 있는 아내한테도 사실을 알려야 했다. 핸드폰이 없어 공중전화 앞으로 가서 전화를 걸려고 하니 가족들은 물론 아내의 전화번호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봐도 정열 되지 않은 알파벳 숫자만 공중에 둥둥 떠 있을 뿐이었다. 할 수없이 대전에 내려가서야 조카들을 만나 그들이 입력해 놓은 몇 군데 친척들에게 연락을 취할 수가 있었다.
미래학자 ‘니컬러스 카’는 인터넷이 사람의 뇌를 게으르고 얄팍하게 만든다고 했다. 온라인에 쏟아지는 정보를 슬쩍 훑어보는 ‘스타카토’ 식으로 사람들의 독서 습관이 바뀌었다고 했다. 집중력을 분산시키는 디지털 환경에<전쟁과 평화>나<바람과 함께 사라지다>같은 장편소설을 뚝심 있게 읽어내는 사람이 줄어 과거의 뇌를 잃어버렸다고 한탄했다. 지식을 기억하려 애쓰지 않고 컴퓨터에 ‘상시常時접속’ 상태를 유지한 채 그때그때 꺼내 쓰느라 디지털에 얽매이게 된다고 했다.
연세대학교 K교수는 어느 모임에서 “최근 2~3년 사이 신입생들의 지적 수준이 현저하게 낮아졌다”고 개탄했다. 손에 스마트 폰이 없으면 대화가 안 될 정도이고, 잠시라도 스마트 폰을 확인하지 않으면 불안해하면서 수업에 집중하지 못하는 정도라는 것이다. 현대인은 6분에 한 번 정도 핸드폰을 열어본다는 통계를 읽은 적이 있다.
병원 중환자실에 누워 계신 형님은 인공호흡기에 의지해 엷은 숨만 내쉴 뿐 의식이 없었다. 의사는 며칠 지켜보아야 한다고 했다. 깨어나시길 기다리는 동안 대전에 잠시 머물기로 한 나는 20여 년 동안 살았던 대전인지라 누구든 만나 술이라도 마시면서 회포를 풀고 싶었다. 중 고교 동창들, 직장 옛 동료들, 향우회 회원들 중에 단 한 사람의 전화번호도 기억나지 않았다. 백여 명이 넘는 이들의 전화번호는 핸드폰에 입력되어 있었다. 홀로 집에서 불빛만 껌벅거리고 있는 ‘똑똑한 기기’는 나의 지문으로 가벼운 터치만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뇌 과학자 '슈피처'는 외우는 전화번호가 집과 가족의 휴대전화번호 뿐이거나 노래방에서 가사를 보지 않고 부를 노래가 몇 곡 안 되는 것은 디지털치매의 증상이라고 한다. 디지털 치매 예방법으로 독서, 명상, 詩 외우기, 얼굴을 맞댄 대화 등으로 노인성 치매가 14% 이상 감소한다는 시카코 대학의 연구 결과가 있다. 운동을 하면 근육이 발달하듯 뇌를 많이 활용해면 뇌 근육도 활성화된다고 한다. 친구 세 명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페이스 북에서 3백 명과 가상 접촉을 하는 것 보다 훨씬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이가 들수록 기억력도 점점 감퇴하는데 디지털 치매까지 겹쳐 합병증 환자가 된 느낌이다. 그것은 편리한 기계만을 의존해온 나에게 내리는 인과응보인 것 같다. 기기는 갈수록 스마트해 가는데 뇌는 점점 둔하고 낡아져가고 있다. 디지털 치매의 중증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컴퓨터보다는 종이책을 더 많이 읽어 메모도 하고, 유행가 가사도 기억해 불러보고, 몇 편의 詩라도 외워보고, 글도 열심히 써야하겠다.
내가 즐기는 테니스를 비롯한 여럿이 같이 하는 운동도 자주 하며 내가 먼저 친구에게 만나자고 전화를 하여 얼굴을 맞대고 술잔이라도 가끔 기우려야 할 것 같다. 그 동안 똑똑한 기계만 믿고 나 스스로가 무관심했던 뇌는 얼마나 외롭고 슬펐을까? 그 뇌를 찾아 진정으로 위로해주며 달래야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