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갑자기 복잡한 감정을 추슬러야 했다. 오늘 점심에 주문을 하는 중에 착오가 생겨서 뜻하지 않게 중국냉면을 먹게 됐다. 간짜장을 주문했지만 잘 못 나온 중국냉면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서 그냥 먹겠다고 했다. 한 젓가락 먹자마자 고소한 땅콩소스 맛이 느껴지면서 잊고 살았던 어린 시절의 중국냉면에 대한 기억이 아삭한 오이 고명보다 더 선명하고 푸르게 살아났다.
국민학교 때 아버지는 결핵을 앓고 계셨다. 기력은 점점 쇠하시고 마당의 국화꽃을 돌보는 정도만 거동을 하셨다. 그 해 여름 몇 번을 벼르시다 나에게 고덕 시장의 중국집에서 중국냉면을 사오라는 심부름을 시키셨다. 좀더 가까운 복생원이란 중국집도 있었지만 시장 안쪽의 다른 중국집에서 사오라고 당부하셨다. 나는 냄비를 자전거에 싣고 시장으로 달려갔다. 복생원과 달리 주방 아저씨는 한국 사람이었다. 냉면을 부지런히 준비한 후 얼음을 넣고 토마토 두 조각을 얹어서 냄비를 건네 주셨다.
나는 냄비를 두 겹 세 겹으로 자전거 뒷자리 짐받이에 동여맸다. 지난 번에 줄이 풀어져서 호떡을 봉지째 잃어 버린 일이 있었기에 더욱 단단히 고무 밧줄을 옹쳐 맸다. 나는 바람처럼 자전거를 달렸다. 얼음이 녹기 전에 집에 도착해서 아버지가 시원한 냉면을 드시게 해야 했기 때문이다. 안식일 교회를 지날 무렵 면천에서 오는 버스가 신작로에 먼지를 일으키며 다가오고 있었다.
냇가로 접한 길 오른쪽은 움푹움푹 패인 곳이 많아 나는 좌측으로 자전거를 달리고 있었다. 버스를 피해 왼쪽으로 더 붙어서 속도를 줄였다. 그러다가 길가에 밀려난 자갈에 그만 중심을 잃고 철균이네 생강 밭으로 자전거가 들어가 버렸다. 나는 필사적으로 중심을 잡으며 버텼다. 아버지가 드셔야할 중국냉면이 실려 있는데 넘어지면 큰 일이었다. 앞 바퀴가 또랑에 쳐박혔고 나는 초인적으로 뛰어내려 자전거가 쓰러지지 않도록 온 몸으로 막았다.
바지가 페달에 걸려 찢기고 종아리 쪽에서 얇게 피가 나고 있었다. 나는 다시 자전거를 신작로로 올렸다. 양금줄이 빠져 있었다. 나무가지를 꺽어서 양금줄을 걸어 다시 끼워 넣었다. 핸들이 비스듬히 돌아가 있었지만 지체없이 자전거에 올라타 집으로 달렸다. 집 마당에 들어설 때 아버지는 토방에 앉아 막대기로 땅을 헤치고 계셨다.
냄비를 마루에 내려 놓자 어머니는 부엌에서 상을 내오셨고 냉면을 대접에 옮겨 담으셨다. 나는 수돗가에서 급하게 손발을 닦고 종아리에 흐르는 피를 씻어냈다. 마루에 돌아와 앉았을 때 아버지는 더운데 고생했다 하시며 중국냉면 조금과 토마토 한 조각을 작은 그릇에 덜어 주셨다.
하얀 면과 뽀얀 국물에 올려진 붉은 토마토와 푸른 오이채의 색감.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면의 쫄깃함. 땅콩소스가 들어간 그 고소한 멀국의 맛. 세상에서 내가 한여름 그 날에 먹었던 그 중국냉면보다 맛있는 요리는 없었다. 그 후로 중국냉면을 먹어보지 못했다. 어쩌면 그 요리를 주문할 용기가 없었을지도 모른다. 간짜장 대신에 잘 못 나와 내 앞에 놓인 중국냉면을 잘 저어서 한 젓가락을 먹는 순간 그 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살아나서 나는 왈칵 눈물이 날 뻔 했다.
아버지와 내가 냉면을 먹을 때 애써 등을 돌려 마당 수돗가에서 빨래 방망이를 두드리시던 어머니의 어깨는 광주리처럼 굽어 있었다. 그 황홀한 맛에 눈이 멀어 어머니 냉면 한 젓갈 드셔보세요라는 말을 하지 못했던 내가 너무나 한스럽다.
겨자도 넣지 않은 중국냉면에 나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여름이 끝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