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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암 李鍾巖(1896 ~ 1930)】 "신흥무관학교, 1919년 의열단 창단과 활동"
1896년 (음)1월 12일 경상북도 달성군(達成郡) 공산면(公山面) 백안동(百安洞)에서 부친 이석능(李錫能)과 모친 남원 양씨(南原梁氏)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로 ‘종윤(鍾胤)’이라는 형과 누님이 3명 있었는데 모두 일찍 사망하였다. 그래서 ‘바위같이 튼튼하게 오래 살라’는 뜻으로 아명을 ‘바위암(岩)’자를 사용하여 ‘종암(鍾岩)’으로 지었다고 한다. 본관은 하빈(河濱)이며, 본명은 이종순(李鍾淳)이다. 이명은 이중호(李仲浩)·양건호(梁建浩)·양근오(梁槿吾)·양주평(梁州平)·권택건(權宅建) 등이다. 어려서는 조부에게 『천자문』·『동몽선습』·『사략』 등 한학을 수학하였다.
1905년 조부를 따라 부재서당에 입학하였다. 당시 대구에서 가장 진보적인 서당이어서 한학과 함께 산술·체조·창가도 배웠다. 부재서당에서 3년 동안 공부하다가 1908년 신학문을 배우기 위해 아버지를 졸라 대구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12년 대구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대구농림학교에 입학하였으나 1학년을 마치고 중퇴하였다.
1913년 부모 몰래 매형에게 5원을 얻어 부산으로 가서 부산상업학교에 입학하여 학업을 계속하였으나 학비 조달이 어려워 학교를 그만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서 독학하던 중 1914년 봄 고모부 정재학(鄭在學)이 은행장으로 있는 대구은행에 견습생으로 입사하였다. 대구은행은 1913년 11월 설립되었는데, 정재학을 중심으로 하는 경북 일대의 지주층이 중심이 되어 경북에서 최초로 설립한 민족계 지방은행이었다. 입사한지 1년 만에 출납계 주임이 되었고, 1915년 서희안(徐喜安)과 결혼하였다.
대구은행에 근무하던 중인 1915년 조선국권회복단이 조직되었다. 조선국권회복단은 풍기광복단과 연계하여 1915년 7월 대한광복회를 결성하면서 활동 영역이 확대되었다. 1915년 9월 3일 대한광복회 단원들이 군자금 모집을 위해 정재학·이장우(李章雨)·서우순(徐雨淳)의 금고를 털다가 체포되는 ‘대구권총사건’이 일어났다. 1917년 대구은행에서 같이 근무하던 동료 이영국(李永局)과 신상태(申相泰)가 조선국권회복단 단원으로 붙잡혀 고초를 겪게 되자 큰 충격을 받았다.
1917년 12월 대구은행 돈 1만 500원을 소지하고 갑자기 종적을 감추었다. 종적을 감춘 날은 토요일이었다. 마감 시간 5분쯤 지나 어느 상점에서 입금하려 한 1만 500원을 보자기에 싼 채 금고 뒤쪽 구석에 감추고 입금 전표에 도장을 찍었다. 출납계 주임이라 쉽게 빼돌릴 수 있었다. 다음날이 일요일이라 대구은행에서는 월요일 아침에야 이 사실을 알고 경찰에 신고하였다. 대구은행 동료인 신상태를 찾아가 도움을 청하였다. 신상태는 약목 복성동에 있는 자신의 본가에 숨겨주었다. 두 달 동안 발각되지 않고 숨어 지내다가 1918년 2월 중순 중국으로 건너가 ‘양건호’라는 가명으로 활동하였다.
이후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하고 1917년부터 만주를 왕래하며 활동하던 밀양의 김대지(金大池)·구영필(具榮泌) 등과 함께 비밀결사를 조직하고자 하였다. 원래 대구은행 돈 1만 500원을 가지고 미국으로 유학 가려 하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구영필과 함께 상하이(上海)를 거쳐 만주로 간 것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 사정이 여의치 않아 펑톈(奉天)에서 구영필과 함께 대구은행에서 가져온 돈 중 7,000원을 자본금으로 삼광상회(三光商會)를 설립하고 무역업을 시작하였다.
1918년 4월 삼광상회를 구영필에게 맡기고 펑톈성(奉天省) 퉁화현(通化縣)에 있는 신흥중학교(新興中學校)에 입학하였다. 신흥중학교에서 수학하며 서상락(徐相洛)·한봉인(韓鳳仁)·신철휴(申喆休) 등과 함께 기숙사 같은 방에서 지냈다. 1919년 만세운동 이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에서 활동하던 지청천(池靑天)·김경천(金擎天) 등이 망명하여 서로군정서로 와서 신흥중학 교육에 참여하자 신흥중학은 나날이 발전하였다. 이후 신흥중학은 퉁화현 고산자와 합니하 두 곳에 분교를 설치하였고, 1919년 5월 3일 신흥무관학교로 개칭하였다.
서상락·신철휴·한봉인·강세우(姜世宇) 등과 함께 고산자 제2분교로 옮겼다. 신철휴·한봉인 등과 함께 신흥무관학교 제2기 졸업생이 되었다. 서상락·이종우·강세우와 협의한 후 보다 실질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신흥무관학교를 떠나 지린성(吉林省)으로 가서 의열단 창단에 참여하였다.
의열단은 1919년 11월 10일 지린성 파호문(巴虎門) 밖 중국인 반씨 집에서 창단되었다. 의열단 창단을 기획하고 준비한 주역은 대한독립의군부(大韓獨立義軍府)의 후신인 조선독립군정사(朝鮮獨立軍政司) 회계과장 황상규(黃尙奎)와 김원봉(金元鳳) 등이었다. 황상규는 배후에서 지도하였고, 그의 생질 김원봉은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그리하여 신흥무관학교 생도들을 중심으로 10대 후반에서 20대 중반의 청년 10여 명이 의열단 취지에 호응하여 지린으로 집결하였다. 이들은 합숙하면서 폭탄 제조법과 사용법을 익힌 후 의열단 창단에 참여하였다. 1919년 7월 김원봉과 함께 상하이로 가서 구국모험단 단원들과 합숙하면서 3개월간 폭탄제조법과 조작법을 배우고, 그해 10월 지린으로 돌아왔다. 대구은행에서 가져온 돈이 의열단 창단 자금과 활동 자금으로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강세우·곽재기(郭在驥)·권준(權晙)·김상윤(金相潤)·김원봉·배중세(裵重世)·서상락·신철휴·윤세주(尹世冑)·이성우(李誠宇)·한봉근·한봉인 등 12명과 함께 의열단 창단에 참여하였다. 창단 회합에서 이들은 형제의 의(義)를 맺고 ‘공약 10조’로 조직 규율을 정하였다. 김원봉이 선거에 의해 ‘의백(義伯, 단장)’으로 추대되고, 곽재기가 부단장으로 임명되었다. 의열단 창단 관련자 가운데 황상규·윤치형·김원봉·김상윤·윤세주·이성우·한봉근·한봉인 등 8명이 경남 밀양 출신이었다. 또한 이종암을 비롯한 김원봉·강세우·권준·김상윤·서상락·신철휴·이성우·한봉근·한봉인 등 10명이 신흥무관학교 출신이었다. 의열단의 최초 조직 구성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을 주축으로 하고, 1910년대 국내외 비밀 결사에 참여하였거나 만세운동 당시 지방의 만세 시위를 주도한 경력이 있는 망명 청년들이었다. 의열단 창립 단원들의 전직은 학생·점원·농민·은행원·교사 등 다양하였다.
의열단은 창단 당시에 조선총독 이하 고관, 군부 수뇌, 대만총독, 매국적(賣國賊), 친일파 거두, 적탐(敵探), 반민족적 토호열신(土豪劣紳) 등 일곱 부류 암살 대상과 조선총독부, 동양척식주식회사, 매일신보사, 각 경찰서, 기타 왜적 중요 기관 등 다섯 가지 파괴 대상을 선정하였다. 의열단의 활동 목표는 창단 시부터 식민지 지배의 핵심 기관과 그 수뇌, 요인 및 친일 민족 반역자 집단 제거, 숙청으로 확정되어 있었다. 의열단 창단에 누구보다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의열단 창단과 활동을 위한 자금을 제공하였고, 김원봉과 함께 상하이로 가서 3개월간 폭탄제조법과 조작법을 배우는 등 의열단 창단을 위해 매진하였다.
의열단은 1920년 전반기에 본부를 베이징(北京)으로 옮기고 조선총독부 등 중요 기관을 파괴 대상으로 선정하고 총기와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고자 하였다. 1920년 3월부터 곽재기·이성우·신철휴·윤세주 등 핵심 단원들과 함께 국내로 잠입해 활동을 개시하였다. 김원봉·곽재기·김원목·이성우·윤치영·김기득 등과 함께 1920년 3월경 상하이에서 중국인으로부터 매입한 폭탄과 탄피로 폭탄 3개를 만들었다. 이 폭탄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차장 장건상의 주선으로 안동(丹東, 현 단둥) 현 세관에 근무하는 영국인 유스 포인에게 소포로 발송하였다. 곽재기는 안동현에서 소포를 찾아 밀양의 김병환에게 보냈다. 그러나 일제 밀정에 의해 탐지되어 폭탄이 모두 압수되었고 특별 경계령이 내려졌다.
1920년 4월 초순 중국 상하이에서 김원봉과 이성우는 중국인 단익산(段益山)에게 매입한 무기를 안동현을 거쳐 배중세에게 보냈고, 이를 강상진의 집 창고에 숨겨 두었다. 무기 국내 반입에 성공한 의열단원들은 거사일을 7월 10일로 정하였다. 6월 16일 곽재기·이성우·황상규·윤세주·김병환 등과 서울 인사동 중국 음식점에 모여 거사 계획을 논의하였다. 그러던 중 일제 경찰의 급습으로 모두 붙잡혔다. 이어 윤치영·신철휴·배중세 등도 부산과 마산 등지에서 붙잡혔으며, 경남 지역에 숨겨 두었던 무기들도 모두 압수당하였다. 이처럼 의열단의 국내에서의 제1차 ‘국내 기관총 공격 거사(일명 밀양 폭탄 사건)’는 폭탄 밀송 및 은닉 사실이 일제 경찰에 탐지되어 20여 명의 의열단 단원이 붙잡혀서 실패로 돌아갔다. 일제 경찰의 추격을 피한 김상윤·서상락·한봉근은 중국으로 탈출하여 김원봉과 합류하였다. 이때 이수택과 함께 국내에 남아 잠행하면서 다음 거사를 준비하였다.
이수택과 함께 김상윤의 친구인 최수봉을 의열단에 가입시켜 밀양경찰서 투탄 의거를 지원하였다. 최수봉은 의거 직후 일제 경찰에 붙잡혀서 사형 선고를 받고 1921년 7월 사망하였다.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투탄 의거 당시 폭탄을 제공하고 국내에 거점을 구축한 후 1921년 12월 베이징 의열단 본부로 무사히 귀환하였다.
1922년에는 전년도 9월 12일에 조선총독부 투탄 의거에 성공한 김익상·오성륜 등과 함께 상하이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田中義一) 처단 의거(황포탄 의거)를 계획하였다. 1920년 10월 조선군사령부 휘하의 일본군이 ‘훈춘 사건’을 조작하여 간도를 침공하고 수많은 재만 한인 동포를 학살한 ‘경신참변’을 자행할 당시 일본 조슈(長州) 군벌의 후계자이자 육군대신이었던 다나카는 이른바 ‘간도 불령선인 초토화 계획’을 수립하고 총지휘한 인물이었다. 오성륜·김익상과 함께 각각 제1선, 제2선, 제3선을 맡아 다나카를 처단하기로 하였다.
1922년 3월 28일 오후 3시 30분경 상하이 황포탄 세관 부두에서 오성륜이 다나카를 향해 권총 2발을 발사하였으나 앞서 나오던 미국인 스나이더 부인이 총에 맞아 즉사하였다. 이에 놀란 다나카가 황급히 대기 중인 자동차로 도주하자 제2선에서 대기하고 있던 김익상이 권총 2발을 발사하였다. 다나카의 모자만 꿰뚫고 지나갔다. 김익상은 재차 소지하고 있던 폭탄을 다나카에게 던졌다. 이번에도 폭탄이 터지지 않아 실패하였다. 이때 제3선에서 대기하다가 다나카가 타고 있던 자동차에 폭탄을 던졌으나 이것마저도 폭발하지 않았고 영국 군인이 폭탄을 강물로 차버리는 바람에 실패하고 말았다.
의거 직후 오성륜은 현장에서 붙잡혔다. 김익상도 추격하던 영국 경찰이 쏜 총에 손과 발을 맞고 중국 경찰에게 붙잡혔다. 오성륜과 김익상이 경찰의 주의를 분산시키는 틈을 타서 무사히 피신하였다. 오성륜과 김익상은 상하이 일본 총영사관에 분리 수감되어 예심을 거쳐 일본 나가사키재판소로 이송될 예정이었다. 오성륜은 일본인 죄수 4명과 공모하여 감옥을 탈출하였다.
상하이 황포탄 의거 이후 의열단의 활동이 활발해지자 1922년 6월 의열단 핵심 단원들은 톈진(天津)에 모여 재차 조선총독부 투탄 의거를 협의하였다. 이때 몇몇 의열단 단원과 함께 도쿄(東京) 의거를 주장하였다. 그 이유는 몇 차례에 걸친 국내 거사로 의열단에 대한 일제의 경계가 강화되었기 때문이었다.
1923년 의열단 지도부는 국내 거사 계획의 실패 원인을 점검하였다. 이에 철저한 보안 유지와 일원적인 지휘 계통 확립이 절실하다고 판단하고, 의열단을 기밀부와 실행부로 나누는 등 부서를 재편하였다. 극소수의 간부와 참모진으로 구성된 기밀부는 거사 계획 입안과 실행 준비 지휘, 대외 교섭과 자금 관리 등을 총괄하고, 실행부는 일반 단원들로 구성하여 거사 실행만을 전담하기로 하였다. 참모부라고도 불린 기밀부에서 김원봉·김상윤·한봉근·윤자영과 함께 기밀부원으로 활동하였다.
1925년 도쿄(東京) 거사 준비를 위한 군자금 모집을 위해 국내로 잠입하였다. 의열단 단원 11명과 함께 경상도 일원에서 군자금 모집 활동을 전개하다가 경북경찰부에 붙잡혔다. ‘경북 의열단 사건’(도쿄 거사 준비와 군자금 모집 활동)이다. ‘경북 의열단 사건’은 일제가 중대 사건으로 규정하고 의열단의 기세를 제압하기 위해 1년간 비밀리에 조사하고 신문 보도도 통제하며 계획한 것이었다.
경북 의열단 사건의 중심 인물로 재판 과정에서 태연하고 당당하게 대구은행에서 가져간 자금과 의열단에서의 활동 등을 전부 시인하였다. 또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책을 비난하고 “우리 조선이 일본의 압박에서 벗어나려면 혁명을 불가불 할 수밖에 없지 않소”라고 일본인 재판장을 질타하였다. 징역 13년을 받고 대전형무소에서 복역 중 1930년 5월 19일 위장병·인후병·폐병이 악화되어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석방된 지 열흘만인 1930년 5월 29일 3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