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춥지 않은 이유
문희봉
재질이 단단한 참나무는 다른 나무에 비해 타는 소리가 요란스럽게 타닥거리지 않고, 불꽃이 화려하거나 높지 않으며, 엷은 푸른빛으로 오래 오래 잘 탄다. 참나무는 소리 없이 타면서 다른 것들의 밑불이 되어주고, 타다가 꺼지면 참숯이 되어 다시 불을 일으켜 준다.
사람들 중에도 말없이 타오르며 다른 사람의 밑불이 되어주고 따뜻한 온기를 내는 참나무 장작 같은 사람들이 있다. 참나무 장작 같은 사람이 되면 마음속의 살림이 늘어난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서는 다른 것보다 용서란 것이 가장 좋다. 먼저 손을 내미는 겸손, 용서하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외롭고 소외된 마음들을 한껏 보듬는 뜨거운 사랑. 그런 것들을 가진 사람이 사는 집은 대부분 끼이익 소리를 내며 열리는 파란색 투명 철대문이다. 밖에서도 대문 너머로 마당이 들여다보이고, 그 사이로 사람 사는 냄새가 난다. 좌우로 꽃사과, 들국화, 꽃치자, 백일홍을 심은 화분들이 길을 따라 늘어서 있다.
입만 열면 남을 비난하고 원망했던 시간들, 무관심, 무기력, 무감동으로 소홀히 했던 일상생활들, 분수에 맞지 않는 허영과 오만으로 눈이 멀었던 시간들, 무례하고 거친 말로 가족 친지에게 상처 주었던 시간들을 뉘우치며 살아가는 사람들로 하여 사회는 탄력을 잃지 않는다.
먼저 헤아려 주고, 먼저 아파해 주는 마음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위로가 되어주는 그러한 아름다운 마음들이 밑불이 되어주는 것이리라. 좋은 열매를 맺으려 서두르지 않고, 먼저 좋은 나무가 되고자 하는 나무들처럼. 남보다 더 돋보이고 싶고, 남보다 더 인정받고 싶고, 남보다 더 추앙 받고 싶은 욕심은 인간의 본능 중에서도 가장 원초적인 것에 속할지 모른다. 그러나 깊은 산중에 자신의 둥지를 틀고 숨어 있는 나무들처럼, 이 욕심이 난무하는 시대에서도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그리고 흔들림 없는 자세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에 사회는 삐걱거리지 않고 잘 돌아간다.
거침없이 큰 목소리를 내며 타오르다 이내 불꽃이 사그라지고 마는 사람보다 믿음을 주고, 희망을 주고, 용기를 주어 살맛나게 해주는 사람은 참나무 장작 같은 그런 사람들이 아닐까 싶다. 씨앗은 자기를 썩혀 싹을 틔우고 촛불은 자기를 태워 세상을 밝힌다.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사랑, 양심을 물질에 팔지 않는 자유, 거짓을 말하지 않는 용기, 해야 할 일을 미루지 않는 성실함, 말과 행동이 어긋나지 않는 성숙함, 잘난 체하지 않는 겸손함, 잘못한 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 떳떳함 같은 것을 소유한 사람들이 많기에 사회는 조화를 이루어 잘 돌아간다.
목소리가 낮고 불꽃의 키도 높지 않아 눈에 잘 띄지 않지만, 굳이 이기려 남을 해하는 일도 없고, 굳이 빼앗으려 차례를 어기는 일도 없이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주어진 삶에 감사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기에 살맛 나는 세상이 된다.
잘 생기고 말 잘해 타인의 시선을 한 몸에 받는 그런 사람보다 자신의 일에 항상 최선을 다하면서 남의 시선을 오래도록 받는 그런 사람이고 싶다던 내 친구의 말이 지금까지도 기억 속에서 용틀임한다. 연꽃의 양분은 천국 선녀의 화장품이 아니다. 진흙이다. 열반의 원료는 도솔천의 감로수가 아니다. 번뇌에 찬 윤회다. 욕망을 묶고 가두고 발효시키면 열반이 된다.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의 본분을 잃지 않고 따뜻한 인간애와 생명력으로 살아가는 선한 사람들로 하여 사회온도는 상승 중이다. 한 보따리가 넘지 않게 정리하는 것과 같은 무소유의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얼굴엔 평화가 깃든다. 고귀한 사랑을 지닌 사람은 스스로 마음 아픈 사람들에게 아량과 사랑을 베풀어서 이 시대에 작은 등불이 되는 일에 앞장선다. 그래서 사랑을 ‘죽는 날까지 가슴에 남는 단 하나의 의로운 이름이라’ 부르는지도 모른다.
가을은 깊은 생각으로 고개 숙여 익어가는 작물들에게 열매를 맺게 한다. 오만 가지 생각과 고민으로 작물들은 이 계절에 밖으로 꽃 피우고 안으로 익어간다. 이 계절의 오묘한 진리를 닮은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한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성취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꿈과 열정이 있는 사람들, 모든 일들 가운데 감사의 조건을 찾아 감사하는 진정 범사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들, 나의 일도 내 일같이 하고, 남의 일도 내 일같이 하는 사람들로 우리 사회는 가득 차 있다.
이런 사람들이 있어 우리의 겨울은 춥지 않다. 냉장고에 콜라와 쇠고기를 넣어두고, 대문 밖에 고급자동차를 세워놓았다 해서 대한민국이 발전했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